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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첫 번째 근거: 창세기 15장 6절
3. 신약의 세 번째 인용: 야고보서 2장 23-24절!
(2) 왜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는가?
5)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된 독자적인 해석!
먼저, 이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 설교가 어렵다고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저는 수십 배 더 힘듭니다. 설교 한 편을 만드는 데 일반 설교의 한 달이나 두 달 치를 작성하는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노동이나 산행을 하는 것보다 훨씬더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질리고 자주 엄청난 중압감과 견디기 힘든 부담감과 스트레스에 짓눌리곤 합니다. 정말 너무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이런 힘든 과정을 통해 결국 어느 주석이나 강해집에도 나오지 않는 정확한 해석이 주기적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해석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기적이 하나님의 역사이듯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항상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고 조심합니다.
그런데, 이 단락에 대한 해석도 그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더구나, 이 해석은 2년 만에 최종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초집중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14절은 21-25절을 이해할 수 있는 키이자 걸림돌이다.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먼저, 이 구절은 이 단락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에 나오는 "구원"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미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뒤 21-15절에 나오는 "의롭다 하심"을 무처럼 아직의 칭의에 대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걸림돌입니다!
실제로 가장 많은 학자들이 채택하는 것이 그 견해입니다. 그러나 그 견해를 다룰 때 설명해드린 것처럼 21-25절은 마지막 칭의를 다룬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은 이 단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21-25절만 가지고 씨름하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답이 안 나옵니다. 우리는 14절을 통해 야고보의 논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무엇을 다루고 있고,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21-25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둘을 같은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혼선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 둘은 결과적으로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원인이고, 하나는 결과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결과입니다. 반면에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는 그 원인인 행함 있는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믿음의 결과인 궁극적인 구원이 초점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는 그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14절은 궁극적인 구원까지 말했으나 그 후 15-26절은 행함 없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14절의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이 무슨 뜻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 뒤 17절, 20절, 26절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표현이 나오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15-26절은 참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고, 미래의 구원을 직접 다룬 것은 14절 하반절뿐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행함 있는 믿음이 없으면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15-26절은 그 결과를 직접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자꾸 그 선을 넘어갑니다(15-26절 읽으면서 그 결과를 생각함). 그래서 이 단락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편, 제 말을 듣고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궁극적인 구원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것을 14절에서 단 한 번밖에 다루지 않았을까요?"
물론 궁극적인 구원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함 있는 믿음 있어야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야고보는 14절에서 궁극적인 구원의 중요성을 충분히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그 후 무엇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궁극적인 구원을 가능케 하는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그 뒤 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 단락 전체를 이해해야 21-25절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많은 분들이 "바로 21-25절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고, 왜 이 단락 전체에 대한 설명을 하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21-25절만 연구하면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구절들에 대한 제 해석은 세 번이나 뒤집혔습니다. 네 번째에 참 해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2년 전에 한, 당시에는 불완전하긴 했지만 저의 첫 번째 해석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21-25절만 가지고 씨름했고, 지금 여러분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14-26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옳은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댄 매카트니의 설명을 듣고 제가 틀렸고 그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21-25절만 가지고 연구하면 불완전한 해석을 하게 되고, 그것마저도 다른 견해를 들으면 흔들립니다. 그래서 제가 이 단락 전체를 먼저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야고보가 이 단락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14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믿는 사람에 대해 쓴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진짜든 가짜든, 이미 믿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로 든 아브라함이나 라합처럼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든지, 말로만 구제하는 사람이나 귀신처럼 믿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든지 아무튼 기존 신자를 다뤘습니다. "내 형제들아!"라는 말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의 관심이 과거에 어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의 관심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미래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는가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현재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즉, 어떤 믿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믿음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믿는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뿐 참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 나타나야 참 믿음입니다. 때문에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이 왜 헛된지 계속 설명했고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했습니다. 이것이 이 단락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으면, 14절에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야고보는 14절 후반절에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즉, 믿노라 하지만 행함이 없는 신자들은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뒤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의롭다 하심"이라는 단어가 출현입니다.
그렇다면 왜 14절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뒤에는 "의롭다 하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이것이 14절에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4절 후반절과 그 이후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15-26절은 14절 전반절처럼 행함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크레이그 블롬버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은 이 부분의 주요 개념이며 되풀이되고 있는 주장이다."
옳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유익이 없다', '헛되다', '죽었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단락을 옳게 해석하려면, 이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정말 그러한가?' 15-26절까지 한 절 한 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2:15-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4절에 이어 16절에도 "유익이 있으리요?"라는 질문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나의 유익이 아닙니다. 만일 나의 유익이면 "말로만 구제하는 것은 유익이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마치 그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국에 못 간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이 불가합니다.
16절에 나오는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는 행함 없는 믿음의 결과와 무관합니다. 단지 "행함 없는 믿음은 마치 이와 같은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행함 없는 믿음은 말로만 하는 구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제는 참 구제가 아닙니다. 참 사랑이나 참 긍휼이 아닙니다. 마치 그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참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말하고 있을 뿐 그 결과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까지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과연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26절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것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죽었다는 표현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7절과 달리 이곳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라는 단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가 심판을 뜻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무릇, 몸속에 영혼이 있어야 산 사람입니다. 아무리 몸이 그럴듯해도 속에 영혼이 없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마치 이와 같이 몸은 교회에 다니고 신앙고백을 해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었다는 표현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결과인 지옥에 가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어떤 사람"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역시 천국에 가냐 지옥에 가냐가 아니라, 두 사람의 믿음이 믿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이냐 아니면 행함으로 자기의 믿음을 보여주는 참 믿음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요! 그러므로 믿음을 다룬 것이지 그 결과를 다룬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서 야고보는 "귀신들도 믿고 떨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참 믿음이 초점이고 그 결과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네가 믿느냐? 귀신들도 믿고 떤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은 귀신들과 같은 거짓 믿음이지 참 믿음이 아니다"라는 뜻일 뿐입니다.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결과가 지옥인 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헛것"은 '아르고스'라는 단어로 '활동하지 않는'이라는 뜻입니다. 활동하지 않으므로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이미의 칭의와 아직의 칭의 어디나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묻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다시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4절의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처럼 현재가 초점입니다. 또, 25절의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효과가 없다("헛것")는 것이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에 관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현재의 믿음을 다룬 것이지 미래의 결과를 다룬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것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이고 최고의 난해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래의 궁극적인 구원을 다룬 것인가요? 아니지요! 이미와 아직 사이의 현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구절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도 그렇고, 특히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도 많은 씨름을 했고 어렵게 그 의미를 파악했습니다.
우선,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는 행함이 믿음과 상관없이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함께 일했다고 했으므로 믿음에서 행함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즉,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또,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는 개역개정 번역처럼 "행함"이 단수면 그것이 없으면 가짜 믿음이므로 단지 '행함이 따라야 참 믿음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행함이 복수면 그 이상의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명사 복수형입니다. 그래서 믿고 난 후의 지속적인 여러 "행함들"을 뜻하고, 그 "행함들"을 통해 믿음이 자라고 온전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최고 수준의 순종까지 가능한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문구는 이런 뜻입니다.
그 증거로,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롯도 함께 갔기 때문입니다(4절). 또, 창세기 15장 6절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절)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믿음도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 16장에서 하갈을 첩으로 취했고, 17장에서 이렇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17-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점점 자라고 강해졌습니다. 특히, 야고보가 말한 이삭을 제단에 드린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니라 최고 수준의 믿음이었습니다. 즉, 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이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로 보건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는 야고보의 말은 참 믿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성장해서 온전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21절은 하나님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현재를 보시고, 현재의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하며, 그것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2절에서 왜 갑자기 믿음이 온전하게 되는 것, 즉 성숙에 대해서 말하느냐?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믿음은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합니다." 믿음은 행함을 낳습니다. 또, 행함들을 통해서 믿음이 점점 자라서 온전해집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순종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이처럼 참 믿음은 행함을 낳고, 행함들을 통해서 점점 온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어쨌든 믿음에 행함이 따른다는 것이 확실하지요! 그래서 야고보가 이것을 사용해서 "그러므로 행함이 따라야 참 믿음이다"라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부자연스럽거나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는 것이 언제입니까? 이미나 아직의 칭의 때가 아니라 그 사이의 현재입니다. 또,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궁극적인 구원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23 "이에 성경이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많은 이들이 처음 칭의라고 생각하는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믿은 후에 가져야 할 행함 있는 믿음이 아니라 처음 의롭다 함을 받을 때 필요한 믿음을 설명한 것이 아닌가? 라는 착각과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 6절은 이미의 칭의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문맥에 의하면, 여전히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이미의 칭의가 아니라 현재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깔끔하게 이해하려면, "이루어졌고"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창세기 15장 6절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창세기 22장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간단한 의미이지요!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말일까요? 참으로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어에 대해 참으로 오래도록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어렵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이 단어는 헬라어로 '플레로오'로 '채우다', '충만하다'라는 뜻입니다. 주로 예언의 성취를 뜻할 때 쓰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 6절은 예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가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곳에도 '플레로오'란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식법의 성취뿐 아니라 도덕법 즉 계명들의 완전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을 뜻했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저는 이 단어가 이곳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3절이 아브라함의 순종이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보여주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연경 교수님도 이것을 그런 의미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이 단어는 예언의 성취와 계명의 의미를 온전히 보여준 것,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두 번째 의미만 있다고 하는가? 더구나 예언의 성취가 더 지배적인 의미 아닌가?'라는 의문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는 이 견해가 아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그것을 깨닫기까지 저는 오래도록 이 견해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이루어졌나니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다. 그리고 창세기 15장 6절은 예언이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언과 같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1:5)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순종을 예고합니다. 정말로 예언과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예언의 성취에 주로 쓰이는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야고보가 그래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맞는 것이지만 이 견해도 백 프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이루어졌고"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요? 21절을 통해 이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구절은 14절처럼 믿음에는 행함이 따르고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2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앞에서 설명해드린 대로, 이 구절 역시 믿음이 행함을 낳고, 그러므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기본적인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이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에"는 '카이'라는 단어로 '그리고'라는 뜻입니다. 문맥을 볼 때 개역개정처럼 "이에"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한 21-22절을 모두 받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21절뿐 아니라 22절의 "그의 행함"에 나오는 "그"도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므로 23절은 21-22절과 일치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23절은 22절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이 창세기 15장 16절에서 언급한 믿음의 작용, 즉 믿음이 행함을 낳고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됨을 보여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야고보가 "이루어졌다"고 한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는 23절을 해석할 때 원어나 용례에만 의존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문맥에 따르면, 22절에서 설명한 것을 재설명한 것이 23절입니다. 그러므로 23절을 22절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깨닫고 절감했습니다.
'성경은 다른 것들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이 설사 원어나 용례일지라도 문맥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원어나 용례를 볼 때 타당성이 있고 논리적으로 맞아도, 저자가 꼭 그런 생각으로 쓴 것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려면 그런 것들을 의존하지 말고, 철저히 문맥을 살피고 문맥에 의존해야 한다. 정확히 문맥을 통해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고 저자의 정확한 의도에 도달해야 된다. 그리고 그것을 시금석으로 삼고 매력적인 많은 해석들을 차단하고 오직 문맥이 허용하는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정확하고 바른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이 구절은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에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의 저처럼 이것을 처음 칭의로 착각할 수도 있고, 다수는 이것을 마지막 칭의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앞의 21절에 나오는 "제단에 드릴 때"와 뒤의 25절에 나오는 "나가게 할 때"가 보여주듯이, 이것은 이미나 아직의 칭의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21절의 "제단에 드릴 때"는 이 구절이 그 사이의 현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뒤에 나오는 25절의 "나가게 할 때"는 여전히 그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지막 칭의인 궁극적인 구원을 다룬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것은 21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알렉 모티어는 이 구절에 나오는 라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 ... 그 둘은 대단히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아브라함은 성경의 주요 인물인 반면, 라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신실한 조상이며, 라합은 이방인이다. 아브라함은 존경을 받았으며, 라합은 평판이 나빴다. 아브라함은 남자이며 라합은 여자다. 종종 그렇듯이, 그러한 대조는 대단히 포괄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 - 말하자면 아브라함으로부터 라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다 포괄하는 - 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첫째가는 행함은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함이며, 그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
참 좋은 설명이지요!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 가지 더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신앙생활 후기를 예로 들었고, 라합은 신앙생활 초기를 예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행함이 신앙이 성숙한 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초기든 후기든 이미와 아직의 칭의 사이에 항상 행함이 따라야 하며 하나님은 오직 그런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 히브리서 저자는 라합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또, 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합은 믿음을 가질 만한 근거가 희박하였지만 그 여인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수2:11)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었다.이 '믿음'에 기초하여 그 여인은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하였다. 야고보가 라합의 믿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논의의 문맥으로 볼 때 그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그렇다면 여기에서 야고보의 요점은 21절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믿음의 결과인 궁극적인 구원을 다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가져야 할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마지막 구절인 2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가 죽은 후의 심판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채영삼 교수님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여기서 몸-영혼의 비유는 전형적인 유대 기독교적 배경을 갖는다. 창세기 2:7이 그 뿌리이다(Davids, 134). 사람은 몸과 숨(기운/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이 서로 뗄 수 없이 함께 있어야 항상 온전한 사람이다. ... 그래서 여기 2:26에서 야고보는 몸과 영혼, 영혼과 몸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믿음과 행함, 행함과 믿음도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말뿐인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그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따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요 환상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참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상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린 바와 같이, 15-26절은 믿음의 결과인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믿는 자가 현재 가져야 할 행함 있는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래야 21-25절을 바르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