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들을 걸을 때는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눈 덮인 들 가운데를 처음 걸어갈 때는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오늘 내가 걸어가는 이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뒤에 따라오는 사람의 이정표(里程標)가 되리니
서산대사(西山大師)
효창공원을 조선왕조 역사에 되돌려 주어야 옳지 않을까 !
친구들과 효창공원을 찾았다.
서울 토박이 친구가 이 나이 될 때까지 효창공원을 한 번도 안갔다고 해서 였다.
역사 유적지를 즐겨 찾는 것은 오랜 세월 영욕(榮辱)의 흔적과 옛 사람들이 살던
당시의 문화(文化)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영광(榮光)의 발자취도 수치스런 흔적(痕迹)도 모두 역사(歷史)다.
△일제(日帝)에 의하여 찢겨진 덕수궁(德壽宮) 대한문(大漢門) 현판(懸板)도 역사다.
※대한문(大漢門)은 원이름이 선조(宣祖)가 지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대한제국 침략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매국노(賣國奴) 남정철(南廷哲)이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한다.
(월탄 박종화 “20세기 한국의 증언”과 이당 김은호 “서화백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는 해관(海觀) 유한익(劉漢翼)이 썼다고 함)
△일제(日帝)의 조선 총독부(總督府) 건물인 중앙청(中央廳) 자리에
경복궁흥례문(景福宮興禮門)이 제자리에 복원된 것은 역사의 원형(原形) 회복이다.
△일제(日帝)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앉혔다.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궁궐 안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키고 창경궁(昌慶宮)안에 벚꽃을 수천 그루 심는 만행을 저질렀다.
필자도 50년 전에 창경원 벚꽃 구경을 간적이 있다.
일제(日帝)의 조선 총독부(總督府)에 의하여 “창경원(昌慶苑)”으로 훼손(毁損)된
창경궁(昌慶宮)을 원상(原狀)으로 복원하였다.
△창덕궁의 후원(後苑)과 창경궁(昌慶宮) 종묘(宗廟)는 하나로 연결돼 동궐(東闕)이라 한다.
그런데 일제(日帝)가 창덕궁의 후원(後苑)을 “비원(秘苑)”이라 이름 붙이고 단절시켰다.
이렇게 훼손(毁損)된 동궐(東闕)을 지금 복원중이다.
△조선 역사의 상징인 경복궁 광화문(光化門)도 “옮기고 뜯고 고치는 변천사” 속에 지금까지 완전한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을,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광화문광장 확장 계획을 발표했다.
(2018.04. 11. 한국일보 기사)
△효창공원(孝昌公園)도 조선역사(朝鮮歷史)의 원형(原形)인 “효창원(孝昌園)”으로
복원(復原)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효창공원(孝昌公園)의 역사는,
조선 22대왕 정조(正祖)가 장남인 문효세자(文孝世子)와 세자의 어머니인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불과 4개월 사이로 같이 세상을 떠남에 정조(正祖)의
비통함은 말할 수 없었다.
정조(正祖)는 세자와 의빈(宜嬪) 성씨(成氏)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가까운 곳에 묘지를 정한 것이 지금의 효창공원이며 의빈(宜嬪) 성씨(成氏)도 아들인 세자 옆에 묻히게 정조(正祖)가 배려하였다.
참고로 “효창원(孝昌園)”에 대한 조선왕조 정조실록(正祖實錄)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본다.
▲정조실록(正祖實錄) 6년(1782) 9월 7일
왕세자(王世子)가 탄생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0년(1786) 5월 5일
세자의 피부에 열이 나서 의약청(醫藥廳)에서 인동다(忍冬茶)에 대안신환(大安神丸)을 처방하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0년(1786) 05월 10일
왕세자의 환후가 갑자기 심해져 의약청이 다시 숙직하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0년(1786) 5월 11일
왕세자가 갑자기 훙서(薨逝 서거)하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0년(1786) 5월 26일
정조(正祖)는 세자의 묘소를 편리한 곳에 정하게 하다.
정조는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에게 묻기를,
“여러 곳의 산을 보았는데, 강릉(康陵) 안 갑좌(甲座)가 어떠하던가?”
*강릉(康陵)-지금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이다.
김익이 말하기를,
“보통의 눈으로도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허전(許晪)의 무리들이 극구 칭찬하면서
“창릉(昌陵)의 갑좌나 율목동(栗木洞)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으며, 금성위는
“전후로 산을 보던 중 제일가는 대지(大地)였다고 하였습니다”
*창릉(昌陵)-지금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이다
*율목동(栗木洞)-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동
정조 임금이 말하기를,
“창릉의 갑좌와 강릉의 갑좌(甲座)는,
하나는 웅장한 것을 취할 것이 없고, 둘은 멀어서 흠이 되었다.
동교(東郊)의 능원(陵園)은 8, 9곳이기 때문에 매양 거둥할 때마다
비록 새벽에 궁을 나서더라도 반드시 밤이 되어 돌아오는 먼 거리다.
지금 만약 이곳을 정할 경우 하룻밤을 지내지 않는다면 갔다 올수가 없다.
비록 사세로 말하더라도 춘추(春秋)로 성묘하는 이외에 다시 한 번 더 거둥하게 된다면 많은 경비가 들 것이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편리하고 가까운 곳을 얻을 수 있겠는가?”
도감 도제조 홍낙성이 말하기를,
“성상(聖上)의 하교가 정말 지당합니다. 웅장한 형국은 취할 필요가 없고 사세상 편리하고 가까운 곳을 이왕 구하고자 할 경우 율목동(栗木洞 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동)보다 더 나은 곳이 없을 듯합니다. 성상께서 결단을 내리어 즉시 결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나라의 대신이니, 만약 완전히 정해졌다면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하자, 홍낙성이 다시 물어서 결정하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각자 소견을 개진하라고 명하니, 대신과 도감 당상들이 모두 완벽한 길지(吉地)라고 일컬었다.
임금이 드디어 세 번 살펴보고 표(標)를 봉하고 나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묘(墓)의 이름은 효창묘(孝昌墓)로
당시 고양군 율목동(栗木洞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었다.
송림이 울창했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인 9월 14일, 생모 의빈 성씨가 죽자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 옆에 묻어주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다.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거둥고개는 정조가 효창원(孝昌園)에 거둥할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서울지명사전)
▲정조실록(正祖實錄) 10년(1786) 6월 20일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호(廟號)를 문희(文禧)로 묘(墓)를 효창(孝昌)이라고 정하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0년(1786) 윤7월 20일
문효세자(文孝世子)를 효창묘(孝昌墓)에다 장사지냈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0년(1786) 9월 14일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어머니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사망)하였다.
▲고종실록(高宗實錄) 7년 (1879) 12월 10일
효창묘(孝昌墓)를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효창원(孝昌園)의 변천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 불렸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 병력이 효창원(孝昌園) 앞 소나무 숲 안에 국가의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만리창(萬里倉)이 있던 곳에 일본군이 주둔 하면서부터이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에 일본 낭인 배들이 출발한 곳도
이 일대였다.
그 뒤 1924년 6월 경성부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하여
“효창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조선시대 최고 성군 정조 임금이 만든 효창원(孝昌園)을 없애 버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46년 7월 9일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등의 묘소를 김구(金九) 선생에 의하여 효창공원으로 이장(移葬)되었다
1949년 7월 5일에는 국민장을 치른 김구 선생의 유해도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김구 선생의 유업을 계승하고 추모사업을 봉행하기 위해 2002년 10월
백범김구기념관이 효창공원에 개관하였다.
일제(日帝)는 조선왕조의 왕실 능원(陵園)을 훼손하여 그 자리에 일본 군대를 주둔하였다.
일본군대가 주둔한 자리에 대한민국 독립지사인 김구 선생을 비롯한 삼의사(三義士)의 묘(墓)가 조성되었다.
대한민국 안에 명당(明堂)이 수없이 많은데 왜 하필 일제가 훼손한 조선왕조 역사의 땅에 독립지사의 묘를 썼는가?
지금이라도 대한민국 독립지사의 묘는 국립현충원에 모셔야 한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돌아가실 때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가 생기기 전이었다.
국군묘지가 생긴 것은 1957년,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1965년이었다.
당시로서는 효창공원에 김구 선생을 모시는 것을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이 만든 “효창공원”은 “효창원(孝昌園)”으로 복원하여 조선왕조 역사와
대한민국 국민과 서울시민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필자의 개인 생각이지만
효창공원의 김구 선생님도 이곳에 묻힌 것을 원치 않으실 것이다.
그 이유를 김구선생의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찾아본다.
△김구 선생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라고 할 것입니다.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貧賤)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富貴)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백범일지 433~434쪽)
△백범일지에
백범(白凡)의 뜻은
하층민 백정(白丁)과 평민인 범부(凡夫)를 의미하는 백범(白凡)이 내 호(號)다.
△김구 선생이 쓴 나의 소원이란 글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조선왕조 왕릉을 훼손하고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주둔한 효창공원에
평생의 소원이 “대한 독립”이라는 김구선생의 묘를 썼단 말인가?
이것은 김구 선생의 뜻이 아닐 것이다.
평생을 “대한 독립”을 위해 몸 바치신 김구 선생에 대한 국민의 도리가 아니다.
효창공원이 아무리 명당(明堂)이라도 역사를 거역하는 일이다.
위에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詩) “눈덮힌 들을 걸을 때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애송시(愛誦詩)라 하였다.
평생의 삶이 애송시(愛誦詩)처럼 민족의 이정표(里程標)로 살아오신 어른이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