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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니가타 여행3 - 다카다성을 출발해 우에스기 겐신의 거성 가스가야마 산성에 가다!
니가타현 나가오카에서 기차를 타고는 니가타현의 남쪽 끝 조에쓰시 上越市(상월시)
다카다 高田(고전) 역에 내려서는, 걸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가 장인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 의 도움으로 축성한 다카다성 을 봅니다.
그러고는 다카다 성을 뒤로하고 걸어 다카다역 에 도착했는데, 이제 16세기 센고쿠(전국)시대에
에치고(니가타현) 의 영주 우에스기 겐신 의 본거지였던 가스가야마 산성 으로 갑니다.
가스가야마 (春日山 춘일산) 로 가는 기차는 2시 05분이니..... 1시간이나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버스 를 타기로 하는데 다카다 중앙병원 에서 나오에쓰 까지 가는 7번 버스 가 보이지를
않네요? 역앞에는 그 대신에 가스가야마로 가는 다른 버스 가 있기는 한데 부착된
시간표를 보니 하루에 3번만 운행하는데.... 이런??? 조금 전에 출발해 버렸나 봅니다!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흥정하니 2,300엔 정도 나올거라며 부담이 될터이니 버스 종점
인 중앙병원 으로 가 보랍니다. 15분쯤 걸린다기에 걸어가려고 나섰다가.....
길 찾기가 어렵기로 다시 역으로 돌아와서 택시를 탔는데 이런? 교외로 엄청 달리네요?
이리 멀리 갈리는 없으니.... 기사가 혹시나 잘못 알아들었는지 걱정이 되어 일어 로
“쥬오보잉” 했다가 금방 영어로 “센트럴 하스피탈” 이라고 거듭해서 확인 합니다.
교외로 나와 인적도 없는곳에 도착했는데 중앙병원 은 맞지만 요금이 무려 1,400엔 이나
나왔기로 입맛이 씁니다! 차에서 내려 정류소에 붙은 시간표 종이를 살펴보니
이런??? 여기가 7번 버스 출발지는 맞지만..... 버스는 또 한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네요?
그만 멘붕 상태에 빠져 당황하는데..... 이러다가는 오늘 가스가야마 산성 을 보고는
멀리 에치고 유자와 로 되돌아가 배낭을 찾아 니가타시 까지 가야 하는데,
어쩐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시간이 없는지라 억울하지만 다시 택시 를
잡아 타고는.... 가스가야마 산성 에 있는 가스가야마 신사 까지 가자고 말합니다.
택시는 논이 펼쳐진 벌판을 한참이나 달려서는 마을에 진입한후 주택가를 지나는데
오른켠에 구글 어스 에서 본 매장문화재 박물관 이 보이길래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택시는 주택가를 벗어나 야산으로 접어들더니 에스자 커브 를 그립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산을 올라가서 멈추는 데.... 요금은 무려 3천엔 가까이 나옵니다.
돈이 아깝지만 설사 버스 를 탔더래도.... 저 아래 정류소에서 이 가파른 언덕길
로 걸어서 산을 오르자면 아무래도 20분은 걸릴 것이니 비로소 그나마 위안 이 됩니다.
여기 작은 마당에서 보자니 언덕에는 구글 어스 에서 본대로 우에스기 겐신 의
다부진 모습의 동상 이 서 있고.... 오른쪽 길은 가스가야마 신사 로 통합니다.
하지만 나는 왼쪽길 로 접어드니 그건 가스가야마 산성 春日山城跡(춘일산성적) 부터 먼저
보기 위함인데..... 도로를 따라 걷다가 마음이 급하니 지름길인 가파른 산길 을 기어
올라 이리저리 구불 구불 돌아 삼노환과 이노환을 지나서 혼마루(本丸 본환) 로 오릅니다.
이처럼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급경사 를 아부라나가시 油流(유류) 라 부른다고
하는데, 허겁지겁 올라 혼마루 오른쪽 아래켠에 있는 비사문당 毘沙門堂 에
서서 저만치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경사 가 얼마나 급한지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비사문 毘沙門 이란 불법(佛法) 을 수호하는 네명의 사천왕 중에서 북쪽을 지키는 천왕
으로.....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고 다문 이라고도 합니다.
원래 사천왕 은 인도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인 쿠베라 4형제 였는데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이자..... 수미산을 수호 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미산 중턱에서 권속들과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 와 사부대중 의
보호를 맡게 되었으니 우에스기 겐신 이 소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라? 1467년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은 110여년간 내란상태라 전국에 200여명의 다이묘들이 전쟁으로 날을 지새던 시절이었습니다.
에치고(니가타현) 의 용 우에스기 겐신 은 가이(야마나시) 의 다케다 신겐 과 20년간 다섯차례 전투에 출정
을 하면서 여기 비사문당에서 승리 를 빌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우에스기 겐신이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다케다 신겐이 일본을 통일했을 것이고 그럼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후 후계자 우에스기 가게카쓰 가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옮겨간 아이즈번 영지를 몰수당하고 요네자와 로 전봉되면서 비사문천상 도
요네자와 米澤 로 옮겨졌다가 1849년에 화재로 손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1928년 후손이 도쿄 고미술상에 의뢰하여 수리한후 다시 이곳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그 옆에는 스와도 諏訪堂(취방당) 터라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이는 신사를 의미하니
나가노현 남부 스와의 신앙 이 여기 니가타현까지 퍼진 모양이네요?
조금 더 왼쪽으로 올라가면 혼마루 옆에는 천수대 터 도 있다지만 우에스기
가문 이 아이즈번 요네자와 로 전봉된후 폐성이 되었기로 이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우에스기 겐신 은, 교토로 올라가 쇼군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10여명 영주들이 할거하던
나가노현을 침략해온 오다 노부나가를 저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병사한후 후계자인 조카
가게카쓰 는 겐신의 양자로 호죠가와 오다가의 후원을 받던 가게토라 와 내전을 벌입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 는 겐신의 양자인 우에스기 가게토라 를 지원하는 오다와라의 호죠군
및 오다씨의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군의 3면 협공을 받고 멸망 직전에 이르는데....
1581년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 가 교토 혼노지에서 부하의 모반으로 죽자 숨을 돌립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 는 경쟁자 우에스기 가게토라를 제압해 에치고국(니가타) 의 영주가
되어 공세로 전환해 나가노 북부를 점령하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귀부하니
히데요시는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 를 견제하기 위해 다테씨를 북쪽으로 전봉 시킵니다.
그 다테 마사무네가 점령했던 영지와 아이즈번 을 가게카쓰 에게 주어 북쪽으로
쫓아낸 다테씨를 견제하도록 전봉시키니 120만석 대영주 가 되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는 가신인 다카나시 요리치게를 보내 진해 웅천성 을 축조했습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히데요시가 늙어서 얻은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보좌 하기 위해
만든 5대로 에 올랐는데, 히데요시가 죽자 가신인 나오에 가네쓰구의 진언으로
도쿠가와에 맞서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대군을 이끌고 아이즈번으로 진격해 옵니다.
이에야스가 아이즈번을 치기 위해 교토를 비우자 이시다 미쓰나리 는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이에야스의 마수에서 지키기 위해 도쿠가와를 치고자
군대를 출병시키니 1600년 동서 20만 대군 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입니다.
세키가하라에 집결한 양군은 20만 이나 일본 전국에서 전투 가 있었으니 30만 대군 인데
우에스기 가게카쓰 는 서군에 가담해 동군인 다테 마사무네 및 가모씨 와 싸우는데
세키가하라 전투가 한나절만에 동군의 승리로 끝나는지라 그는 도쿠가와에게 항복 합니다.
그러자 도쿠가와는 우에스기 가게까쓰를 아이즈번 120만석 에서 30만석 요네자와번
으로 쫓아버리니, 원래 요네자와 는 그가 다테 마사무네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가신인 나오에 가네쓰구 에게 맡겼던 번이니 체면이 말이 아닌데.....
그래도 충직한 나오에 가네쓰구는 요네자와 번을 주군 에게 군말없이 되돌려 줍니다.
이런 이야기는 NHK 에서 1년에 한편씩 역사 시대극을 방영하는데 2009년에 방영된
드라마 “天地人” 에 츠마부키 사토시 가 주인공 나오에 가네쓰구 역을
맡았으니 일본에서 가신과 사무라이들은 일왕(천황) 이나 쇼군이 아닌 자기
영주(번주) 를 대를 이어 모시며 충성하고 전투에서는 영주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나오에 가네쓰구 는 우에스기 겐신과 후계자 가게카쓰 2대를 모신 에치고 충신 으로 그가
살았던때 천지가 요동쳤던 격동의 시기니 120만석 아이즈 가신단을 모두 거느리고
요네자와 로 갔으니 빈곤 에 허덕이는데, 영주를 잃으면 새 영주는 자기 가신들을
데리고 이사를 오는지라 엣 영주의 사무라이들은 모두 실업자로 낭인 이 되어 떠돕니다!!!
센고쿠 다이묘나 막부 번주 는 영내에서는 사실상 왕 이니 세금을 거두어 군대를 양성 해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가신과 무사들에게 연공 을 지불하는데, 120만석 아이즈번에서
30만석으로 영지가 줄어들었지만 가신과 무사단은 그대로 라 연공 을 줄여야 했으니
4분지 1 수입으로 살아야했는데 가신과 사무라이들이 영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유 라!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20여명의 1급 다이묘 중에 전사자는 단 한명도 없으며 소다이묘
까지 100명으로 확대하면 명량해전때 죽은 구루시마 마치후사 来島通総 정도인데...
모리 데루모토가 3만명, 가토 기요마사가 1만명을 동원한데 비해 구루시마는 600명 을
동원했으니 쌀 만석에 200명을 동원한 관례로 보아 3만석 영주 이니 30만석에 비하면야.....
명량해전은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13척으로 133척 왜군을 맞아 31척을 파괴한 대승전으로
왜군 330척 총대장은 시코쿠 오즈번 7만석 도도 다카토라로 중군을 지휘했으며....
명량에 출동한건 전군 133척 와카자카 야스하루 인데, 문제는 명량해협이 너무나도
좁은지라 전투 는 자기 직속 8척을 포함해 38척 1군을 지휘한 구루지마 마치후사 입니다.
조선의 전선 판옥선 은 소나무로 만들어 튼튼하고 바닥이 평평해 안정적이며 크고 높으니
대포 25문을 싣고 180명 병사가 승선한데 비해.... 일본 세키부네 는 삼나무로 만들어
약한데다 밑이 뾰족해 속도는 빠르지만 안정성이 약하니 대포는 없고 조총수 25명을
포함 75명 가량이 승선 하는데 배가 낮은지라 높은 판옥선에 올라 백병전은 불가능 합니다.
"영화 명량" 에 왜군이 이순신 장군 배에 올라 처절한 백병전 사투를 벌이는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니, 적선과 마주친건 장군의 독촉에 나간 안위 장군의 배 단 한척 뿐인데....
왜군이 배에 오르려고 시도했으나 실패 했으니 조선군 13척은 일열로 늘어서고 구루지마
왜군 38척은 2열로 늘어서 포격전을 벌이지만 거센 소용돌이 물살로 몸을 가누기도 힘듭니다.
왜군 조총의 사정거리는 100미터 인데 비해 조선군 대포는 500미터에서 천미터 이니 300
미터 정도에서 조선군 대포가 포격하면 아군의 피해는 전무한채 적선은 피탄에 거센
물살로 자기들 배끼리 충돌해 부숴지는데... 적선 31척 파괴에 비해 아군은 배는 단
한척도 손상이 없고 전사 2명에 부상 3명 이라, 즉 육박전은 없었다는 증거 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 승리후 백성들이 기다리던 우수영에는 들러지도 못하고 노를 저어
멀리 신안군 당사도로 후퇴해 배에서 밤을 보내고.... 17일 어의도 에 이르러 비로소
섬에 상륙해서 쉰후 법성포를 거쳐 21일에는 멀리 금강 하구 군산 선유도 까지 후퇴
하는데 왜군은 아직 300척 이 남았으니 일부가 진도 바깥을 돌아와 포위되면 전멸 이라?
도도 다카토라의 왜군은 다음날 바로 진격해와 우수영과 진도를 초토화 시키고 목포를
거쳐 영광 까지 진격하며 조선인을 죽이고 약탈하며 불지르는 아비규환 생지옥 을
만들었으며, 살아남은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는데 왜군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9월말에 물러가니 장군은 왜군이 없는걸 확인하시고 10월 3일 군산을 출발합니다.
우수영 으로 돌아온 날은 후퇴한지 24일째인 음력 10월 9일 인데 장군이 돌아왔는데도
우수영 성 안팎에 그 많던 조선 백성들이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자 비통해 하시고는
11일 안편도로 가시는데 "인적이 끊어진지라 참담하기 이를데 없다" 라고 적었으니
육지와 바다가 왜군에 점령 되었으니 저 "백성들은 살륙되거나 포로" 로 잡혀간 것이지요?
임진왜란 7년간 왜군 다이묘급 장수들의 전사자 가 없는 것은 영주가 죽으면 사무라이들은
실업자 료닌(낭인) 이 되니 부모와 처자식이 굶게되는지라 주군을 옹위 하기 때문인데,
1598년 9월 명나라 8만 4천은 조선군 1만 8천과 연합해 수군 까지 합쳐서 4로 병진
왜군을 공격하니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 는 8천으로 3만 6천 연합군을 격파한 이유입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부터 93년까지고 휴전기를 거쳐 1597년 재침한게 정유재란 인데....
왜군 14만에 조선군 3만 8천과 명군 11만 7천 이 싸웠으니, 명나라 마귀 2만 4천에
조선군 김응서 1만의 서로군 은 1만 5천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성을 공격합니다.
명나라 유정 2만 4천과 조선군 권율 5천 5백 동로군 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성을
공격하는데 이순신과 진린 수군도 합세하며..... 명나라 동일원 3만 4천과
조선군 정기룡 2천 3백명 중로군 은 8천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남해의 소 군과 다치바나군이 시마즈군의 병력이 적은걸 염려해서 원군 파견을 제의
하자 요시히로는 거절 하는데, 여러 군대가 모이면 일사불란한 지휘가 힘든 때문이니
시마즈는 명군을 선진리 왜성에 끌어들인뒤 수비에 치중하다가 일시에 공격 하니 명군은
전멸에 가까운 참패 를 당하고 경북 성주까지 달아나니 서로군과 동로군도 후퇴하게 됩니다.
전년 12월 명군 양호와 마귀는 2만을 양산에 주둔시킨후 3만 6천과 조선군 권율 11,500명이 1만 6천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성 을 공격하다가.... 20여개 왜성에서 모인 왜군 8만의 원군으로
참패하고 물러난 후 다음해 1598년 9월에 4로 병진 공격도 사천성 전투 대참패 로 인해 실패합니다.
사천에서 왜군 8천이 명군 3만 4천과 조선군 2천 3백에 대승한 것은.... 사쓰마군은 영주 시마즈를 위해
목숨을 바친게 승인 이라 여겨집니다! 봉쇄된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구하기 위해 노량해전 이
벌어졌을때 시마즈 요시히로가 무사히 살아서 귀국한 이유도 영주를 필사적으로 보호했기 때문 입니다.
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군의 배신으로 패하자 시마즈씨의 사쓰마군은 도망치는 대신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을 공격해 돌파한후 100명씩 결사대 를 뒤애 남겨 적을 막으면서
가고시마로 돌아오니 1,500명중 귀환자는 80명 이었지만..... 주군을 구했으니 성공한 것입니다?
몇몇 여행자들이 이 험한 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을 흘낏 쳐다 보고는, 다시 가파른 외길을
내려와 삼거리에서 마눌을 만나 가스가야마 진자 春日山神社 (춘일산신사) 로 향합니다.
가스가야마 진자 春日山神社(춘일산신사) 로 향하는 길에는 불교의 비사문 을 뜻하는 군기
인 “毘(비)” 자 깃발과 함께 우에스기 겐신공을 기리는 축제 포스터 가 보입니다.
가스가야마 신사 의 정면에는 우에스기 가문의 문장 이 그려진 천이 드리워져 있으며
그 앞 에마 繪馬(회마) 에도 우에스기 겐신의 초상화 가 그려져 있는걸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신사를 나와 가파르고 긴 높은 계단을 걸어 내려와서는 광장에서 두 길을
만나서는 조금 망설이다가...... 왼쪽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 을 택합니다.
한참을 내려오니 민가 가 보이고 그 옆으로 자그만 내에 놓인 다리를 건너니 거기에
우에스기 가문 의 보리사인 린센지 林泉寺(임천사) 라는 팻말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