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위원회청사 광장에
맨 끝이 사이공 강이다. (청사 광장에서)
연주곡 모음 14곡
9.여행자 거리에서
인민위원회청사 광장에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훤히 내다보이는 광장 그 끝은 사이공 강이라고 했다. 그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 강이 가까이 있어 다행이다 싶다. 레라이와 응우엔 후에 거리 갈림길, 안내자는 레라이거리 쪽을 택했다. 내일 시내 투어 예약할 곳이란 말만 듣고 그를 따르는데 제법 걷는다.
이곳 날씨에 익숙한 그와 한 나절 만에 냉난방을 고루 겪는 우리와는 기상 반응도에 있어서 천지 차다. 가는 도중 벤탄시장을 만났다. 호치민시를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다. 시계탑이 참 인상적이다. 프랑스 정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시장 앞에 5거리 원형 로터리가 눈에 띄었다. 나는 이를 눈여겨 보았다. 내일 새벽 나만의 외출로 이곳을 찾을 작정이다.
조금 더 지나자 전 선생님이 한 호텔을 가리키며 미국 대통령이 묵었던 숙소라고 했다. 뉴월드 호텔, 그렇다면 버락 오바마가 머문 호텔은 아니다. 버락 오바마가 호치민을 찾을 때 묵은 숙소는 내가 알고 있기로 인터콘티넨탈 아시아나 사이공 레지던트. 우리가 지은 호텔이다. 2016년 5월 23일, 비록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치민 떤썬녓 국제공항에서 부터 오바마 대통령이 가는 장소 곳곳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전쟁 당사국인 그 둘, 환영무드라 하니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거리에 성조기는 내걸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날 베트남 교통경찰이 사상 최대로 많이 배치된 날이기도 하다는데 그가 방문한 식당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베트남 전통음식인 분팃느엉은 때를 맞이하여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그의 일정의 한 부분인 젊은 청년과의 소통은 생방송으로 진행이 되었고, 베트남 청년들은 자유롭게 오바마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는데 두나라의 앞날을 내다보자 하는 의미가 담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오바마가 다녀간 후 베트남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가 베트남을 방문한 궁극적인 이유 중 하나는 환태평양경제 동반자 협정(TPP)이었다. 또 한 가지는 "무기 수출 금지 해제" 라는 카드다. 그간 미국은 일절 베트남에 무기 수출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오바마 대통령 방문 이후 40년 만에 "무기 수출금지 해제"로 인해 양국간의 적대 관계가 해소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미국의 비 살상 무기와 전쟁 무기를 수입할 수 있음에 따라 베트남 자체 국방력이 강화될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무기수출 허용을 허락한 이유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베트남 국방력을 강화' 시키기 위해서 일거다. 이러한 정치적인 행보는 자연스레 한국에게도 긍정적인 여파를 불러오고 있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넘어오는 추세에 이런 TPP체결로 인해 베트남은 자연스레 수출의 양을 굉장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앞으로의 베트남의 한국인 유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처럼 한강의 기적처럼 '사이공 강의 기적'을 외치고 있다.
어느 참 긴 공원과 맞닿은 팜응우라옥 거리를 끼고 걷더니만 데땀거리에 접어든다. 눈 앞에 미니호텔,식당 여행사가 가지런한 것이 우리가 찾는 시내투어 예약하는 곳이 여기에 있겠다 싶었다. 호치민에서 가까운 근교로 통하는 꾸찌터널, 떠이닌, 껀저 관광을 알리는 광고물이 나를 유혹한다. 여행을 할 때면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모자라다. 볼 곳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 여행은 낭만을 꿈꾸는 호기심이 출발점이다. 우리는 신 투어리스트라는 곳을 들렀다.
내일 오전 8시50분에 출발하는 오전관광이다. 당연 우리 숙소가 관광명소와 근접한 곳이니 들르지 못할 곳을 택했다. 이 동네가 다들 말하는 여행자거리다. 팜응우라우, 데탐, 부이비엔 거리에는 여행자숙소와 더불어 여행자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카폐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신투어 여행사 옆집만 해도 해장국하고 김밥을 팔고 있다. 정통 보다는 파스타와 피자 가게 같은 캐주얼한 레스토랑이 꽈 차 있다. 건너편에 썬글라스 낀 외국인이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키며 여행자의 낭만을 말하고 있다.
데탐 거리
웃통을 벗은 사람, 큰 배낭을 짊어진 사람, 반바지에 런닝 그리고 슬리퍼.. 어디선가 NEIL YOUNG의 'HOT OF GOLD' 노래가 흘러나온다. 순간 나는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이 모인다는 태국 방콕 카오산 로드가 떠올랐다, 인도 델리 파하르간지, 베트남 하노이 팜응우라우 거리, 중국 윈난성 쿤밍…. 이곳과 다를 바 없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은 여기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정보를 얻고, 다음 여행지로 떠난다. 말 그대로 ‘배낭여행자의 거리’다.
그곳만은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배낭여행자 거리는 인도 파하르간지에서 시작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히피와 여행자들은 ‘동양의 도(道)’를 찾아 인도로 왔다. 거리에서 잠을 자고, 구걸로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속엔 행복이 가득한 인도 사람들. 서구 여행자들은 여기서 ‘유토피아’를 발견했다. 그들은 델리 중앙역 뒤 시장통인 파하르간지의 값싼 숙소에서 잠을 자고, 물건을 사고, 여행했다. 여행자들의 입맛에 맞춘 식당이 생겨났고, 여행사가 들어섰다.
1970년대, ‘인도마저 오염됐다’고 느낀 여행자들은 태국 카오산로드로 옮겨왔다. 지금까지도 카오산로드는 ‘배낭여행자의 메카’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은 이곳도 그렇지만 네팔에도, 인도네시아에도, 배낭여행자들이 휩쓸고 가는 곳마다 ‘배낭여행자의 거리’가 생겨났다.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근처. 방값이 싸고 시장이 가까운 곳. 물가가 싼 곳. 영어가 가능한 곳. 내국인보다 여행자가 많은 곳. 바다 건너 어디에선가 온 이국의 친구들과 ‘배낭여행자’라는 공감대 하나로 맥주잔을 부딪치는 곳. 오늘도 배낭을 멘 젊은이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난 솔직히 그들이 부럽다. 젊을 적 우리는 꿈도 못 꾸던 자유다. TV에서 간간이 마주하는 외국인과의 결혼, 바로 카오산 로드 역할이 크다. 일행들만 아니라면 카오산에서 그러했듯 이곳에서도 얼쩡대고 싶은데 아쉽기 그지없다. 돌아서는 길 전 선생님은 버스를 타자고 했다. 우리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려고 무척 애를 쓰는 안내자. 패키지로 왔다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벤탄시장에 일행을 풀어 놓고 '40분 후에 시계탑 앞에 모이세요.' 하고는 또 다시 버스를 타고 떠나는게 패키지여행이다. 패키지는 편할지는 모르지만 산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이로움도 없을뿐더러 이내 잊혀지고 만다.
발품을 판다는 말, 나는 이 말을 무척 사랑한다. 내 여행은 언젠가부터는 늘 걸었고 돌아와서는 또 그 기록들을 남겨두곤 하는데 권태롭다 싶을 때 다시 꺼내보면 그렇게 향긋할 수가 없다. 버스 정류장은 공원을 가로질러 있었다. 4번 버스, 우리는 카드를 대면 척척 알아서 돈 계산도 되고 벨을 누르면 문도 알아서 열리지만 이곳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도 돈을 안 받길래 공짜인가 했더니만 왠 아가씨가 불쑥 앞자리에서 일어나 버스표를 끊어 준다. 우리 돈 250원. 우리네 ‘버스 오라이’를 했던 70년대 차장아가씨가 그대로 연상되고 만다.
나는 조금 전 레라이 거리를 걸으며 우리의 80년대를 연상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길은 많은 것을 여행자에게 전한다. 말발굽처럼 조각난 돌조각으로 채워진 유렵의 거리는 돌조각의 무게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굳이 말 안해도 전해주고 있다. 나는 앙코르와트에서 유적지만큼 사랑스러웠던 것이 그들의 황무지 비포장도로였다. 열대나무와 어우러진 황토 길을 톡톡을 타며 달릴 때 쪽빛 하늘에 묻어난 그 상쾌함이라니. 아마 그곳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 중심가에 겨우 난 2차선 포장도로가 넓게 펼쳐지고 인도도 제 모습을 갖출 것이다.
호치민 시 전기 줄을 보라.
이곳도 중심 1번가를 벗어나자 길이 깔끔 정연하지 못했다. 울퉁불퉁한 길, 서로 얽혀 지상에 축 늘어진 전기 줄을 또 보았다. 우리네 80년대 보도불럭은 울퉁불퉁 , 비가 오면 물이 흥건히 고이고 배수도 안 되고 그러다 어느 날은 보도불럭을 모두 걷어치우고 땅을 파 무언가를 열심히 심기도 했었다. 그것도 한 겨울철에. 바로 전깃줄 통신선 도시가스등등의 문명의 혜택때문 아니면 남은 예산 처분 때문 그러하다. 마치 시간차를 두듯이 그렇게 파헤쳐지는 통에 보도불럭은 늘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게 수난을 당해야만 비로소 평평해지는 길, 울퉁불퉁하다는 것은 바로 한창 개발중임을 말한다. 이제 이곳도 지하철을 개통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했다.
태국 카오산 로드
보도 블럭에 쇠사슬을 묶어 놓은 것을 보았다. 의아했다. 오토바이 통행을 막느라고 그런다는 것이다. 버스든 지하철이든 대중교통이 빨리 갖추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차가 더 늘어난다면 감당이 안 될 길이다. 그 다음 날 시내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 토요일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늘어난 오토바이 행렬이었다. 그들은 보도블럭을 거침없이 넘어섰다. 그러자 외국인 셋이 어깨동무를 하며 길을 막아섰다. 일촉측발, 금세 싸움이 날 판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달려가 젊은 청년을 달랬다. 독일서 온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들로서는 올바르니 그렇게 한 것 일 텐데 과연 젊은 친구들이 한 행동이 잘한 것일까. 오토바이가 도로를 넘어서는 것은 위법이다. 하지만 예사로 여기며 이 사회는 누구든 그렇게 한다. 그들이 막아선다고 고쳐질 것도 아니다. 사회가 공감대가 형성되고 주의를 기울여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정의감도 아무 때나 쓰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단순히 여행자라면 그들의 사회를 이해하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싶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NEIL YOUNG의 'HOT OF GOLD' 몇 구절, 여행자에게 이 구절은 그야말로 단비 같은 청음이다.
I want to live, I want to give
난 살고 싶어요. 난 베풀고 싶어요.
I've been a miner for a heart of gold
난 순수한 마음을 찾는 광부로 살아왔어요.
It's these expressions, I never give
내가 그걸 표현한 적은 없죠..
That keeps me searching for a heart of gold
그것 때문에 난 계속해서 순수한 마음을 찾고 있어요.
And I'm getting old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네요..
It keeps me searching for a heart of gold
그것 때문에 난 계속해서 순수한 마음을 찾고 있어요.
And I'm getting old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