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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대왕의 영혼이 구름과 함께 서린 장릉 (莊陵) 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2009 년 등재 되었다. 지금까지 슬픈 단종애사(端宗哀史)로 수회에 걸쳐 영화와 문헌 등으로 기록되어 기억 되고 있다.
582년전 탄신(誕辰) 하신 단종대왕(端宗大王) 을 "슬픔의 애사(哀史)"가 아닌, "공경 (恭敬)의 마음" 가짐의 경사("敬史") 로 제(題)를 근선(謹選)하여 이해를 돕고자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근거로 단종대왕 경사("端宗大王 敬史")의 주요 골자(骨子)를 약기 (略記 )하여 보려 한다.
참고로 영월군(寧越郡)은1970년대 인구가 12만 명이 었으나, 폐광 등으로 현재는 3만 7천여 명으로, 71년전 6.25 전쟁 때 한국군 총 전사자 16만 2,394명 중 2023 년 5월 현재 찾아야 할 전사자 12만 1,879명이 영월군 당시 인구와 비슷하다.
또한 미국 참전군인의 전사자 (戰死者) 3만 6천9백 명이 영월군 현재 인구수 에 근접한다.그리고 영월 역사(驛舍)는 기와 지붕으로 남원, 전주와 같이 그 고장의 특성을 유지 하고 있다.
*단종대왕(端宗大王) :1441~ 1457.10. 24(17세) 아명은 홍위. 세종께서 일찍이 여덟살 때 왕세손(王世孫 )으로 책봉하셨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처음으로 지은 아래의 자규시(子規詩)가
바로 어제시(御製詩)이다.
청령포 주변의 모습과 단종의 마음 상태가 잘 표현되어 있다.
千秋無限寃 천추무한원
천추에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寂寧荒山裡 적영황산리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
萬古一孤魂 만고일고혼
만고에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蒼松繞舊園 창송요구원
푸른 솔은 옛동산을 감싸고 있네
嶺樹三天老 영수삼천로
고개 위 소나무는 하늘 높이 우거졌고
溪流得石喧 계류득석훤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구나
山深多虎豹 산심다호표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不夕掩柴門 불석엄시문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아 거노라.
위 시는 한국 시조선 (031)에 실린 내용이다.
문종(文宗)은 1452년 39세에 승하할 때 세자를 수양ㆍ안평ㆍ금성대군에게 부탁 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왕위를 찬탈(簒奪)한 왕숙으로 돌변하여, 단종을 1455년 6월 찬역(簒逆) 후 1457년 5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영월로 유배 시키고 6개월 후 1457년 10월 24일 사사(賜死) 시켰다.
이를 1681년 숙종 7년 송시열의 건의로 신원(伸寃)되고, 1698년 숙종 24년 묘호(廟號)를 단종대왕(端宗大王)으로 복위가 되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 1418~ 1453(36세)
세종의 3남으로 당대의 시, 서, 화, 가야금 등에 능했다. 아쉽게도 계유정란시 세조가 작품의 흔적을 모두 없애버려서 국내에는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는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다. 수양대군과 대립관계로, 형에게 희생된 불운한 왕자로, 강화도 교동도에 귀양보내져 8일 만에 죽음을 당하고, 그 아들도 귀양살이, 후손은 없다.
1747년(영조23) 복관(復官), 1791년 (정조15)절의를 존중 봉사손 장릉 배식단에 배향되었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 1457(32세). 세종의 6남으로 정권 에는 욕심이 없어서 세조편에 응하지 않으니, 수양대군이 순흥부로 귀양을 보냈다.
부사 이보흠과 단종복위를 논하는 것을 염탐한 관노의 고발로 1457년 9월 32세 때 죽임을 당하였다. 1791년 (정조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종친과 신하로서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참고로 순흥안씨는 고집이 센 순서로는 안(安)-강(姜)-최(崔)씨 순이라고 한다.
바로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단종 복위에 앞섰던 금성대군과 뜻을 함께 하였기에 최고의 명문가 에서 천민으로 전략 되었던 집안의 멸문지화 (滅門之禍)에서 그 유래가 되었다.
그 후 순흥안씨의 인물로는 안중근 의사 등 독립운동가 분야의 비중이 상당하며, 최근 순흥의 기지떡이
전국 시장 점유률을 선점하고 있다.
강씨는 고려 충신 강회중 에서 유래 되었는데,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권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기개(氣槪)가 사람들 에게 고집으로 각인 되었다고 한다.
최씨는 고려 말 충신 최영장군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죽어 가면서 "내가역적(逆賊)이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무성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내가 옳다면 나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 후일 지독(至毒)한 사람을 빗대 놓고 하는 말로, "최씨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고 회자 되었던 것 같다.
고집이 센 성씨 ~김씨 3명이 죽은 최씨 1명을 못 이기고, 최씨 셋이 모여도 강씨 1명을 못 당하며, 강씨 셋이서 안씨 앉은 자리 못 넘본다는 얘기도 있다.
왕방연(王邦衍)(생?~사?) 금부도사 (禁府都事) 단종이 1457년 5월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을 했고, 6개월 후 10월 24일 사약이 내려질 때 사형집행을 맡았던 인물이다.
사약을 받아 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려, 라장(羅將)이 시간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 를 갖춘 상태에서 왕방연 에게 온 까닭을 물었을 때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공생(貢生)이 자진하여 단종을 죽이는 일을 실행하였다.
어명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 청령포를 에돌아 흐르는 서강(西江)의 강가에 밤새 앉아서 비통하고 괴로운 자신의 심경을 읊은 시가 아래의 시(詩)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1457년 10월 비록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형을 집행한 금부도사로서, 사적인 감정을 인간(人間)의 도리상(道理想) 숨길 수 없었던 듯하다.
여기서 천만리는 "이승과 저승"의 길(거리)인 것 같고 청호(淸湖)는 그렇게 접근을 할까 합니다. 서울에서 영월 까지 현재 실거리는 195Km (대략 오백리) 이다.
"먹골배" 설화의 주인공 이 왕방연 이다. 문종 때부터 이어오던 관복을 벗어버리고, 지금 노원구 중량동 지역에 배나무를 심어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수확한 배를 영월을 향해 올리고 절을 했으며 후손(後孫) 들도 이어 오고 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도시화 되면서 중량지역 먹골배 밭들이 근자에는 공릉동 (육군사관학교)과 태릉을 거쳐 불암산 초입까지 "먹골배" 단지가 형성이 되어 있다.
그 먹골배 나무 아래 평상의 숯불 돼지갈비의 연기(煙氣)가 넉넉한 가을 보름달 빛을 향할 때 청호(淸湖)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상 (詩想)이 연기처럼 떠오르곤 하였다.
이는 유배지로 떠나는 단종이 갈증 으로 물을 마시고 싶어 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國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하였던 왕방연의 진솔한 아픈 마음이었다.
엄흥도(嚴興道) (생?~사?) 1457년 10월 24일(음) 청령포에서 사사 (賜死)된 단종의 시체가 동강 (東江)에 버려졌으나, 이를 손 대는 자(者)는 삼족을 멸 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아들과 함께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관과 수의(壽衣)로 입관, 지게를 지고 선산(先山)으로 향했다.
잠시 쉴 장소를 찾던 중 한 마리 노루가 놀라 달아났는데 그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더 깊은 산골로 가려 하였으나 신기 하게도 지게가 움직이지 않아 5Km 떨어진 이곳이 명당(明堂)인가 보다 하여 노루가 있던 자리에 평토장(平土葬) 을 하고 잔디 대신 돌을 얹어 표지 (標識) 하였는데.
이곳이 동을지 (冬乙旨)이다.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 안장 후 바로 그길로 아들과 함께 꼭꼭 숨어서 여생을 보냈으니 언제 사망하였는지 알 수 없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들이 등용이 되었고, 영조 때
충의 (忠義)를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공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숙종 때 송시열의 간청 으로 증직(贈職)되어 사육신 (死六臣)과 함께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당시 궁녀, 관비, 궁비, 무녀 등 6명과 시종 1명이 통곡하며 속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동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한 곳이 동강의 낙화암(落花岩)이다.
단종을 그리며 순절한 이곳에 전해져 오는 동강의 조그마한 30m 절벽의 낙화암(落花岩)은, 백마강 기슭 부소산성(扶蘇山城) 고란사(皐蘭寺) 절벽 "낙화암보다 비중을 더 둘 수도 있다" 고 청호(淸湖)는 정리를 하고 싶다.
정순왕후(定順王后) : 1440~ 1521(82세).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대왕의 비로서 송씨가 죽음을 앞두고 이승에서의 시간을 되돌아 보며 들려 주는 이야기로,
"영영이별 영이별" 박정자 낭독 콘서트를 청호(淸湖)가 기억을 되살려 그 골자(骨子)를 살펴 보고자 한다.
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여보 (단종대왕) 수양대군의 명으로 영월로 유배를 가는 단종대왕과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원히 헤어진 정순왕후의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세상을 떠난 정순왕후의 혼백(魂魄)이, 죽는 날까지 침묵해야 했던 기구하고 애달픈 사연을 여든
두 살의 나이에 죽어서야 단종대왕과 굽이굽이 그 세월을 털어놓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순왕후 송씨는 열다섯의 나이에 한 살 어린 단종대왕과의 정략 혼사로 왕비가 되었지만, 2년 6개월 뒤 단종대왕 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의덕왕비가 되고, 영월로 귀양을 간 단종대왕이 여섯달 만에 사사(賜死)당하자 서인에서 걸인, 날품 팔이꾼, 뒷방 늙은이가 되어 홀로 여든 둘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혹한 운명을 살아간 여인으로서, 그 짧지만 애뜻한 사랑은 열여덟에 혼자 남은 그녀가 일편 단심으로 65년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이었음을 보여 준다.
정순황후의 회상(回想)은 때론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로 뜨겁게 달아 오르고, 때론 무상 (無常)한 삶에 대한 체념의 어조로 가라 앉기도 하며 지아비와의 못다한 사랑에 애달파 하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177년 후 (1698) 숙종 24년 단종대왕으로 추복(追復)되어 정순왕후 신위 (神位)가 창경궁에 모셔졌고, "소릉"을 세조가 파릉 후 서인 (庶人) 묘(墓)로 이장 되었던 시신을 양주 사릉(思陵)에 조성 하였다. 가는 길은 국철 춘천행 퇴계원역 다음이 "사릉역"이다.
신기하게도 조선왕조 릉(陵) 42 곳
중 정순왕후 사릉은 울울창창한 큰 소나무 들이 애절 (哀切)한 지아비와의 못 다한 사랑과 같이 동쪽인 영월로 경배(敬拜)하듯 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나온 565년의 세월 영월 장릉(莊陵) 주위를 둘러싼 큰 소나무들이 묵묵히 공경(恭敬)의 마음으로 마치 절을 하듯 봉분 쪽을 향하여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창절사(彰節祠) 영월읍 영흥리 1063-1 충신 (忠臣) 열분의 위패 (位牌)가 모셔져 있다.
* 사육신(死六臣) 6위(位)와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충신(忠臣)4위(位)로서 < 엄흥도: (생?~사?) 위 본문 참고.
< 김시습: 1435~ 1493 (59세) 매월당(梅月堂) 사육신을 처참히 죽이는 거열형을 목도 후 관복을 벗고, 한때 "승려"로 법명 설잠(雪岑) 되기도 하였고 효령대군과는 불사에 함께 하며, 자연에 은거 일생을 동가숙 서가식(東家宿西家食) 하는 떠돌이의 삶이었고,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끝까지 단종에 대한 충신의 절개를 지켰다.
세상일이 참 뜻 갈이 않다, "잠깐 갰다 금세 비 오고 사청사우(乍晴乍雨) " 아래 청호(淸湖)가 마음에 담아 둔 매월당 (梅月堂) 시(詩)이다.
사청사우 乍晴乍雨
乍晴乍雨雨還晴 사청사우우환청
개었다 비가 오고 비오다가 다시 개니
天道猶然況世情 천도유연황세정
하늘의 이치도 이러한데 세상 인심 어떠하리
譽我便是還毁我 예아편시환훼아
나를 칭찬하다 곧 도리어 나를 헐뜯고
逃名却自爲求名 도명각자위구명 공명 싫다 하던 이가 공명 찾아 기웃거리는구나
花開花謝春何管 화개화사춘하관
꽃이야 피건지건 봄은 어찌 하오리
雲去雲來山不爭 운거운래산불쟁
구름이 오든지 가든지 산은 그리 탓을 않네
奇語世人須記認 기어세인수기인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반드시 알아 두소
取歡無處得平生 취한무처득평생
기쁨을 쟁취하되 평생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 남효온: 1454~ 1493(38세) 단종이 사사될 때 두살이였으나 육신전(六臣傳)을 저술 하였고, 성종에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능인 "소릉"을 복위하여 원혼을 달래면 재이 (災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 하였으나 성종이 실행을 미루었다.
1504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소릉 복위 상소 내용으로 부관참시 되고 아들 충세도 죽임을 당하였다.
박심문:1408~1456(48세) 예조정량. 함길도 절도사 김종서(金宗瑞) 가 6진을 개척할 때 종사관 이었고, 김종서가 수양대군 일파에게 살해되자 칭병 (稱病) 하다가 명나라에 질정관 으로 다녀오던 중 의주에 이르러 사육신 거열형 소식을 듣고 한양에 도착 후 바로 음독 자결하었다. 이조판서에 추중이 되고 숙모전(肅慕殿)에 배향 되었다.
□ 세계사의 흐름
당시 세계사의 흐름은 포르투갈의 바르돌로뮤 디아즈는 희망봉을 발견했다. 명나라에 대지진이 발생해 전국이 기근과 가뭄에 시달려 혼란에 빠졌으며, 일본은 "응인의 난" 전국시대가 시작되고,
독일은 프라이브르크 대학을 창립하였다. 로마는 첫 인쇄소가 설치되어 문화적인 발흥을 이루게 된다. 프랑스의 비용이 "유언시집"을 간행 하였고, 베네치아의 공공도서관이 설립 되었다.
□세조가 술자리를 자주 베푼 까닭은?
이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非情)한 군주의 기억을 지우고자 함이었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실질적인 권력의 1인자가 된 수양대군은 2년 후인 1455년 6월 단종을 압박하여 세조가 되어 왕위에 오른다. 불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만큼 세조에게는 정통성(正統性) 시비가 따라 붙게 되었고,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복위 운동을 일으킨 것은 세조에게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고 불안 초조하였다. 그래서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자주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세조실록>>에 "술자리"에 관한 기록이 무려 467건이나 나타 나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왕 중 최고 기록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519년 실록의 '술자리' 검색어가 총 974건이니,
거의 절반 (折半)에 달하는 수치이다.
술자리 정치의 공식들 철퇴와 칼, 거열형(車裂刑) 등으로 권력을 잡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던 만큼 최대한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임 으로써 자신의 강한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한 것으로 풀이 된다.
또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 세력을 양날의 검(劍)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공신들이, 또 다른 순간에는 자신에게 칼끝을 겨눌 위험성을 항상 인식한 세조는 잦은 술자리를 통해 그들의 기분을 최대한 풀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짐 하도록 했던 것이다.
□술자리의 여러 에피소드
1) 벼락승진 : 어효첨은 이조참의 에서~이조판서로 술이 거나히 취하여도 항상 무언(無言)이었다.
2) 참형 : 양정은 계유정난 때 제일 먼저 우의정 김종서 부자 (父子)를 제거시 수양대군과 김종서 집으로 쳐들어가서 먼저 철퇴로 장남을 죽이고, 이어서 칼로 김종서를 죽인 행동대장이었다.
1466년 6월 사정전 술자리에서 세조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했고, 이에 양정은 욱하는 심정에 술기운을 빌어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오로지 한가롭게 쉬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결국 양정은 술자리의 실수가 빌미가 되어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3) 신숙주의 기사회생 신숙주와 한명회가 세조와 술자리에서 취중 먼저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비틀었고, 신숙주 에게 자신의 팔을 비틀게 하니 신숙주가 취중 좀 세게 비틀었다. 세조는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자신을 능멸(陵蔑)한 것으로 기분이 몹시 상했다.
술을 못하는 한명회는 신숙주의 앞날이 걱정 되었다. 원래 신숙주는 취중 후에도 집에 들어 가면 잠들기 전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래서 한명회는 이점을 착안, 신숙주집 시종에게 오늘은 꼭 바로 잠들게 하도록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는 신숙주의 동태를 살피게 했고, 신숙주가 바로 잠이 들었다는 보고를 받고서는 괘씸해 했던 마음을 신숙주가 정말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으로 파악, 분노 (忿怒)를 거두었다. 한명회의 기지가 신숙주를 살린 것이었다.
술자리를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갔던 세조는, 임종 직전에 원상제(院相制)를 만들었는데 원상이란 "승정원에 출근하는 대신"이란 뜻으로 세조는 신숙주, 정인지 등 17명의 대신들을 임명했다.
원상제는 이후 세조의 공신 세력들이 예종과 성종 시대를 거치면서 훈구파(勳舊波)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세조는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렸으며, 형수 현덕왕후 능인 "소릉"을 파릉 후 서인(庶人)묘로 이장하는 등 그로 인한 후유증이 많았다.
장남 의경세자도 현덕왕후(단종 어머니) 혼령에 잠을 못 이루다가 시름시름 1457년 20세 에 요절(夭折)였다.
둘째 예종 (1450~1469) 도 즉위 1년 2개월 만인 20살에 붕어(崩御)하고,
증손자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폭정 (暴政)으로 돌변 1506년 폐위, 강화도 교동도에서 31세에 저승으로 갔으며,
한이 많고 포악한 세조는 외동딸 의숙공주가 아버지에게 "단종을 죽이지 마세요." 하고 그렇게도 애원(哀願)을 거듭거듭 청하였지만 세조는 오히려 딸을 죽이기로 결행을 하니 이를 눈치 챈 정희왕후는 깊은 밤 다급히 딸을 평복으로 갈아입혀 아슬아슬하게 피신시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세조가 몹쓸 피부병 등을 고치고자 오대산 상원사 에 이어, 온양 온천으로 가는 충청도 조그마한 마을 길목에서 9여년 만에 우연히 딸과 조우를 하고 보니, 지나온 세월 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사연이 몹시 궁금해서, 딸에게 물어보니 돌아온 답변은 두메산골에서 부부의 연으로 무위자연 (無僞自然)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니 누구인고 하야, 어느날 밤 그 생각을 하기도 거북 하였던 피신(避身)길, 젊은 나무꾼의 친절한 도움을 받은바 그 인연으로 부부가 되었으며, 김종서의 차남 이라고 당당히 답하였다.
세조는 우의정 김종서를 잔인하게 죽였으니 그 흩어진 시신을 거둘 수가 없어서 겨우 다리하나의 일부분 만으로 장사를 지내게 하는 등, 지나온 날 인간(人間)의 도리를 못하여 이렇게 피부병 (皮膚病), 습진(濕疹), 배종(背腫), 배창(背瘡) 등의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심신(心身)의 병고는 모두가 내 잘못이구나 하며 후회를 한다고 딸에게 실토 하였다고 한다.
세조는 딸에게 한양에 당도하면 이른 시일에 집을 지어 놓을테니 남은 생은 함께 하자고 언약을 하였다.
그러나 집이 완공된 후 딸을 수소문(搜所聞) 하여 이곳저곳 여러날 동안 찾아보았으나 다시 볼 수가 없게 된 딸이었다.
그후 영영 만나지 못하고, 1468년 왕 생활 13년인 52살에 이승을 하직 하였다.
저승에서 상왕인 단종 대왕과 문종, 세종대왕을 만났다면 세조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도연명 365~427(62세) 귀거래사 (歸去來辭)의 마지막 부분
樂夫天命 復奚疑 락부천명 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 일 소냐.
*임연 이량연 1771~ 1853(82세). 선생은 광평대군 후손이며, 아래의 시 '야설(野雪)'로 유명하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 덮힌 들판을 걸을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어지러이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느니라
단종대왕 (端宗大王)
탄신(誕辰 ) 582년주년의 해에
淸湖 韓基洙 謹選略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