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를 자르고 뼈를 부순다 해도
나는 치명자산을 내려와 한벽교를 지나 전주천을 건넜다. 맞은편 산기슭 고색창연한 정자가 한벽당이다. 이조 개국공신으로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의 별장 한벽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조 초기 건축양식을 보여 준다. 처음 최담의 호를 따 월당정이라 했는데 훗날
한벽당으로 현판을 바꾸었다. 한벽당은 전주천 맑은 물이 정자 앞 바위에 부딪쳐 흰옥같은 물보라를 만드는 것이 벽옥한류(碧玉寒流) 같다하여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붙힌 이름이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아름다운 풍광을 글로 남겼다. 나도 정자 난간에 기대 옛 시인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했으나 산도 옛 산이 아니요, 전주천의 백옥같은 물도 보이지 않는다. 한벽교를 지나는 자동차 소음만 귓전을 때릴
뿐이다.
찻길을 건너 한옥마을에 들어섰다. 경술국치 후
일본인들은 호남평야 곡식을 실어내가기 위해 전주 군산 가도를 건설하고 성곽을 허물면서 전주로 몰려들었다. 시내에는 일본가옥들이 늘어나고
조선인들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이에 맞서 1930년 대부터 조선인들이 풍남문과 전주관아 주변에 한옥을 짓고 마을을 이룬 것이 한옥마을 유래다.
마을에는 오목대와 이목대 정자와 향교 및 관아, 토담길 등 옛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마을에는 한옥체험관이라는 이름의 숙박시설과 전통
공예품 전시관, 전통 한지원, 전통술 박물관, 전통 한방문화 센터 등 '전통'을 내세우는 영업집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국제적으로 슬로시티로
공인된 곳이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이골목 저골목 분주히 다니며 사진찍기 바쁘다. 나 또한 인파에 떠밀려 다니긴 마찬가지다. 식당에 들어가니 개인
손님은 사절이란다. 간신히 찾은 식당에서도 전주 대표음식 비빔밥을 쫓기듯 먹고 나와야 했다. 주말이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로되 이곳을 찾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사람 모두 슬로시티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동성당 맞은편 경기원은 태조 이성계
어진(초상화)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는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가 있다. 이곳에 경기전을 세운 것은 왕가 이씨 본관이 전주이기
때문이다. 실록은 서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네곳에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를 제외한 사고들은 불에 타고 약탈당했다. 전주사고 실록은
손홍록 등 충직한 관리들에 의해 내장산으로 피했다가 묘향산을 거쳐 강화도에 옮겨졌다. 실록은 전주본을 재인쇄해 4질을 추가하여 오대산 등
산간벽지 네 곳에 사고를 신설해 보관했다. 전주는 제외되었다. 이곳에서는 실록 편찬 과정과 보존하는 법을 볼 수있어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경기원에는 관광과 교육 목적으로 역대 조선왕 어진이 진열된 박물관과 궁중복장 등 다양한 체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나는 경기원과
사고를 보고 전동성당에 맡겨 둔 배낭을 찾아 숲정이 성지로 향했다. 전동성당은 토요일이라 결혼식과 관광객들로 분주했다.
숲정이는 전동성당에서 버스로 20분
거리다. 숲이 울창해 '숲머리'라고 불리던 숲정이는 오늘날에는 아파트 숲에 쌓여 있다. 이조시대 장대(將臺)가 있어 군사 훈련장이던 이곳은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전동성당, 풍남문, 서천교, 초록바위, 여산 등과 함께 처형장이
되었다. 숲정이는 1802년 1월 31일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 등 일가족이 처형된 뒤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까지 순교자의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성지로 조성된 것은 1866년 순교한 이명서의 손자가 1930년 초 이곳을
매입하면서이다. 35년 순교비가 세워지고 68년 현양탑을 세웠으나 전주교구가 세운 해성 고등학교가 92년 이전한 뒤 아파트가 들어서 본래
순교터는 흔적도 안남았다. 현재 성지는 본래보다 150미터 떨어진 곳이다. 고육지책이었겠지만 안타깝다. 순교지의 토사를 옮겨왔다고 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학교 체육관 터에 조성된 새 성지에는 가톨릭 신학원이 생기고 성모자상과 십자가의 길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기해년
12월 순교한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 여섯 분은 1984년 교종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 다섯 분은 금년 8월 복자품에 오른다. 이밖에도 1867년에는 김사집을 비롯한
여러 무명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기해박해 때 순교한 다섯분들은 모두 1827년 체포되어 12년 간 감옥에서 참혹한 형벌과 배교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분들이다. 단 한 번에 목숨이 끊어진다면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충청도
홍주 출신 이일언 욥이 체포된 것은 순교하기 38년 전인 1801년 신유박해 때이다. 아버지에게 신앙을 받은 이일언은 신유박해 때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고 그곳에서도 배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0년이나 옥살이했다. 옥에서 나온 이일언은 유배가 풀리지 않아 아내와 안의에서 살다
1826년 유배가 풀려 전라도 임실로 옮겨 신앙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듬 해 박해가 시작되자 아내가 피신하자고 했으나 그는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해 죽겠는데 지금 이같이 궁벽한 곳에서 천주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어 기가 막힌다." 라고 탄식했다. 며칠 후 포졸들이
와서 체포하자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다며 기쁘게 잡혀갔다. 전주로 끌려간 이일언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집행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12년이나 옥에 있으면서 세번이나 사형선고문에 서명했다. 그때 배교하면 살아남을 수있었다. 그는 1839년 5월 29일 숲정이로
끌려가면서 울며 따라오는 자식들에게 "오랫동안 고생하다 마침내 천국가는 것인데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해라.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도 열심한 신자가 되라"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도우면서 성서와 교회서적을 필사해 나누어주던 용인 출신 신태보 베드로는 강원도 교우촌에서 잡혀 처형될 때까지 12년
간 옥중 경험을 수기로 썼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래와 이 투성이로 아무도 접근할 용기를 못냈다. 다행히 몇몇 건강한 교우들이 부축해 몸을 움직일 수있었고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주었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그는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천주교가 없이는 인간 정욕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라며 거부했다. 그가 처형될 때 나이는 70세였다. 충청도 홍주 출신 이태권 베드로는 신유박해부터 여러차례 체포되고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려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된 후에도 교회서적을 베껴 나누어 주는 등 신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1827년 체포된 후에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순교를 결심했다. 형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사형문서에는 "이태권은 밤낮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를 받들었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고자 합니다"라고 기록되었다. 처형 당시 나이는 57세이다.
이밖에도
충청도 덕산 출신 정태봉 바오로도 12년이나 옥에서 모진 고통을 감내하면서 순교했다. 그의 사형문서에는 "전태봉은 요사하고 황탄한 말에 빠져
이를 깊이 믿었으며, 제사를 폐하고 지내지 않았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사실 정태봉은 잡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포졸들이 지닌 명단에는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어 부인하면 잡히지 않았겠지만 그는 "나도 천주교 신자요"하면서 체포되기를 자원했다. 그가
숲정이에서 목이 잘린 것은 그의 나이 43세 때이다. 충청도 청양 출신 김대권 베드로도 철이 들면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는 성탄절에는
산꼭대기에 올라 기도하며 밤을 새웠으며 사순절에는 하루 한끼로 때우면서 예수 그리스도 수난을 묵상했다. 1827년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가서
한차례 신앙을 증거한 김대권은 전주 이송 후에도 관장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난의 은혜를 제가 한터럭이라도 갚으려면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하며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또 "매를 맞아 죽는한이 있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뼈와 살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해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고 했다. 그는 1839년 처형될 때까지 12년 옥살이를 교우들과
함께 견디어냈다. 그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는다.
나는
이분들 외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많은 유,무명 순교자들의 놀라운 행적을 묵상하면서 가슴 먹먹해짐을 느낀다. 어찌 이럴 수 있었을가. 나를 비롯한
현대신자들이 자신의 가족과 재산, 사회적 지위를 모두 버리고 순교할 수있을까. 예수께서는 가진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혹자는 예전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어 현세 고통보다는 죽은 뒤의 천국을 바라고 쉽게 순교할 수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능지처참으로
사지가 찢기고 목이 잘린 유항검 같은 이는 어떻게 설명할까. 그는 지배층 양반계급의 거부였다. 또 정삼품 당상관 남종삼 경우도 모든 것을 버리고
순교했다. 대감 정실부인이던 처는 졸지에 시골 관아 노비가 되었다. 당시 순교자들은 부자나 가난한 머슴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증거하고
순교를 택했던 것이다. 물론 마음이 나약하거나 가진 것을 놓지 못해 배교했던 사람도 많다. 그러나 백년에 걸쳐 1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은 인간
논리로는 설명이 안된다.
(2014.6.20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