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39]봄이 오는 길목, 어느 출판기념회 풍경
서울 종로구 인사8길 골목식당 ‘오수별채’에 27일(화) 오후 5시부터 전국 각지(전남 장성, 전북 임실, 충남 아산, 인천 등)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것다. 이름하여 <‘폭포 명창’ 배일동과 함께하는/생활글 작가 최영록의 『어머니』출판기념회 “막걸리 한잔!”>이 그것이었다. 5시 15분, 호스트인 생활글 작가가 5분 스피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식탁에는 임실 특산 ‘사선막걸리’가 2병씩 놓이고, 홍어회, 삶은 새꼬막 한 접시와 민어구이가 진설돼 있으니, 그야말로 환상적인 안주렷다.
“16년만에 여는 출판기념회가 감개무량하다”고 입을 뗀 후, 느닷없이 15살 때의 책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총알같이 주워섬기는 것이 아닌가. 내용인즉슨, 시골동네라 책 한 권 없는 집에서 초딩때부터 글과 책에 목이 말라도 너무 말랐다한다. ‘국졸’ 출신인 농부 아버지가 이를 눈치채고, 중학교 2학년때 10리나 떨어진 면소재지 오일장날 넷째아들을 처음 생긴 서점에 데리고 가 맘껏 책을 고르라 하더니 그대로 사줬다는 것. 그때 사준 책이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 5권, <자고가는 저 구름아> 5권, 김교식의 <광복20년>. 무엇을 안다고 <광복 20년>을 골랐을까. 15권을 땅꼬마가 메고 들고 십리길을 걸어왔던 그때의 기쁨이 평생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같고, 비록 소설가나 시인 그리고 수필가는 못됐지만 60이 넘어 ‘생활글작가’가 되는 실마리가 된 것같아, 내일모레 요양원 입주를 앞둔 98세 아버지께 오늘의 기쁜 영광을 돌린다며 울컥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랬겠다며 좌중이 잠깐 숙연해졌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막걸리 한잔>잔치는 흥에 겨웠다. 더구나 지리산계곡 폭포 밑에서 30대 7년을 몽조리 쏟아붓고 득음한 ‘폭포 목청’의 명창 소리꾼 배일동의 심청가 한 대목(그것도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뜨는 개안開眼의 장면)을 소락때기 질러대니, 1, 2층 65명의 귀와 눈이 쏠릴 수밖에. 심봉사가 개안하듯, 우리의 정치도 풀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강호의 제제다사한 인물들을 ‘대체불가한 인간’(대불인)으로 명명하며 대여섯 명을 소개할 때마다 박수가 터졌겟다.
국보급 전각예술인(돌에 마음을 새겨 꽃을 피우기 50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평전 대통령'(김대중자서전과 평전의 저자), 펜화의 명인, 문화계 오지랖인 전문화재청장, 토종 엉겅퀴를 발굴한 신농업인(오수개 천년의 혼을 깨우는데 일생을 걺), 전남북 경계 축령산 정상에 휴림공화국을 구축하여 사는 산신령 등이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누군들 대체가능한 사람일 터이지만, 어느 특정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들을 ‘대불인’이라 부른다하여 누가 뭐라 하겠는가.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뜨자, 7080가수가 기타를 들고 나타나 좌중을 휩쓴다. 36년생 원로시인이 썼다는 순한글시를 낭송하는 자도 있고,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음치도 있다. 불쑥 기타를 빌려달라더니 열창하는 저 분은 또 누구인가. 여기저기에서 막걸리가 날아다녀 2시간도 안돼 70병을 넘었다던가. 식당 전세를 내면 이런저런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다. 30년 넘은 단골이 좋은 게 이런 것을. 아무튼, 여기저기에서 고담준론이 불꽃을 튀는가하면 서로 면면 익히기에도 바쁘다. 오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고 사인한 책을 주기에도 바쁜 생활글 작가, 넙죽넙죽 술도 잘 받아넘긴다. 진작부터 술이 과했다.
이런 날은 좀 봐줘도 안되는 것일까. 선배 동료 친구들 모두 ‘인생 도반道伴’인 것을,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문제가 되랴. 틀림없이 작가만 흔쾌한 자리를 아닐 터. 학맥, 직장맥, 지맥, 혈맥 등이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 우정友情이 무르익어간다. 이럴려고 만든 잔치자리가 아니던가. 2016년 작가의 부모를 중심으로 형제자매의 휴먼스토리를 찍은 <인간극장> 프로덕션 팀장과 PD도 나타났다. 얼씨구나. 심청가를 마친 소리꾼이 이 자리, 저 자리 막걸리 추렴에 나섰다. 보기에 좋다. 대박이닷! 성공이닷! 주최측에서 가져온 신간 『어머니』(최영록 지음, 낮은문화사 펴냄, 251쪽, 19500원) 80권이 다 나갔다. 여기저기 붙여놓은 플래카드와 현수막, 포스터가 빛을 발한다.
이게 사는 재미인 것을. 도무지 쩨쩨하게 살면 안될 일이다. 맛과 멋을 합쳐 풍류風流라 할 것인가. 고차원적인 풍류는 알지 못해도, 그저 그 밤 이 정도만 되면 된다. 아름다운 밤이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도 그런 밤이었기를 바란다. 그렇게 서울 출판잔치는 끝이 났다. 전주잔치는 3월 15일 밤. 흐흐.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