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오랫동안 아이를 못가졌는데,
그분이 한나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나서, 늘 성경에서 찾아 읽는 곳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아주 나중에,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애를 가지고 싶은 소망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분은 성경의 제목 조차도 <애 배소서>로 읽었던 것입니다.
나에게도 그 집사님처럼 머릿속에서 늘 떠나지 않는 화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 가운데, 그리고 생각 가운데 그것을 자주 되뇌이지만, 그 말의 의미가
선명하게 기도의 손에, 생각의 끈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한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케노시스(kenosis).
케노시스(kenosis)란 말은 그리스어입니다.
의미는 "비우다"(to empty) 또는 비움(emptying)입니다.
이 단어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 딱 한 번, 그것도 간접적으로 등장하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신학용어로 쓰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나는 이 케노시스란 단어에서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비밀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빌립보서>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에겐 빌립보서는 신약성경 11번째 나오는 책, 또는 사도 바울이 쓴 14편의 서신(히브리서를 포함해서) 중의 하나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빌립보서가 이처럼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서 내가 케노시스란 단어를 처음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삶, 그 분의 순종, 겸손과 믿음, 그리고 그 영광의 비밀을 읽게 됩니다.
물론 케노시스의 의미는 성경 전체에 등장하는 인물들 속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를 닮는다는 것"(Christlike)은 바로 케노시스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아브라함,
야곱, 에스더, 다니엘 등--을 통해서 드러나고 예시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었고, 동시에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우리들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히 5:9)
이러한 시각에서 보니 성경은 하나님이 케노시스 레슨을 시킨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를
쓰고 있는 책(The Book)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시험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줄지어 튀어나옵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한나, 룻, 에스더, 다니엘, 세례요한, 심지어 예수--그리고 우리들 모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테스트를 받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읽어갈 때, 나는
하나님이 이들이 행한 일보다 이들 개인의 성품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가령 모세와 다윗을 보아도 성경은 이들이 이룩한 영토확장이나 승리보다도
모세를 온유한 자로 적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경우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주의 깊게 준비된,
특별하고 전략적인 곳에 우리를 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순종으로 나아갈 테고, 어떤 사람은 변명을 내세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많았고),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은(적었던) 이유일 것입니다(마 22:14).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고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곧 "신의 성품"(베후 1:4)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믿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 아버지를 토기장이로 비유합니다(사 64:8, 예 18:4-6).
내가 볼 때 이 은유는 하나님의 심정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내적으로 변화를 받아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를 원하십니다(롬 12:2).
케노시스의 눈을 통해서 보면,
아버지는 두 손을 사용하여 우리가 예수를 닮도록 빚으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보이지 않는 안쪽 손이 케노시스의 손입니다.
우리는 대개 바깥쪽 손에 시선을 모으지만,
보이지 않는 안쪽 손은 크기를 키우고 늘리는 데 바쁩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가 순결하고, 성결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고전 1:30).
토기장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들어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강조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우리는 ....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5)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롬 13:14)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
이런 삶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사 43:7).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진리를 붙들고 산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인간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고,
왜 십자가의 길을 걸었는지 알게 됩니다.
사실 케노시스를 깨닫기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죽으심--
그 모든 것이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저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며
케노시스의 마음으로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