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스 등대>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큰 항구도시가 되었고 로마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로스등대는 중세까지 운영되다 14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이집트는 그의 참모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차지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는데 이것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출발이다.
이들은 희랍인이었지만 '파라오'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기원전 30년 로마에 의해 막을 내렸다. 마지막 파라오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의 연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다.
알렉산드리아가 성경의 도시가 된 것은 이곳에서 이스라엘 경전이 희랍말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70인역'으로 알려진 구약성경이다.
기원전 3세기에는 외국거주 유대인이 본토보다 많았고 이들은 희랍어를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희랍어 성경이 절실했던 것이다.
기원후 40년이 되자 로마의 이방인들이 대거 기독교로 입교했는데 이들은 자연스레 희랍어 성경을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70인 역은 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신약성경도 희랍말로 기록되면서 성경의 원문은 모두 희랍어가 되었다. 유대인의 이집트 이주는 바빌론 포로시대부터 본격화되었고 알렉산드리아 항구가 서자 이곳에 모여 엄청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유다 독립전쟁에 참여하면서 줄어들었고 마침내 소수로 전락했다. 4세기 초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큰 충돌이 있었는데 로마의 세력을 업은 기독교가 유대교를 퀘멸시켰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를 이끌던 도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풀이었다. 그러나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떨어져 나간다.
공의회 결정은 예수님께는 신성과 인성 두 가지가 있다는 '양성론'이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만을 주장하는 '단성론'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이집트 기독교는 '콥트 기독교'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이집트에는 콥트 기독교인이 6백만 이상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