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2월 17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악한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아합을 사랑하여 그를 도와 아람에 속한 길르앗 라못에서 전쟁을 합니다.
전쟁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여호사밧을 선견자 예후가 맞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경고를 듣고 여호사밧은 더욱 겸비하여 모든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의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대하 19장).
나는 과연 하나님의 경고의 사인을 들을 때 어떠했는지요?
주님과 상관없이 내 맘과 뜻대로 행했던 악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더 낮아지고 겸비해야 할 자가 오히려 나를 주장하는 자가 되었으니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여 주시고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오늘은 공동체로 모여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마음으로 겸비하여 주의 뜻을 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26:1-12
제목 : 주님의 공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가장 미련한 자입니다.
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과 같으니라.
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5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해를 받음과 같으니라.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행인을 고용함과 같으니라.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검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 나의 묵상
중국과 네팔 사이에 있는 히말라야 봉우리를 몇 개씩 넘어서 물건을 내다 팔고 또 필요한 물건을 사오는 차마고도의 상인들을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야크나 말의 등에 짐을 싣고 이동한다.
이동할 때 이런 짐승들의 입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재갈 먹이는 것이다.
차마고도에는 독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만약 짐승의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으면 이들이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독초를 먹고 탈이 나서 일정이 지체되기도 하고, 심하면 운송수단인 소중한 짐승을 잃기도 한다.
한 번은 독초를 먹고 거품을 내는 야크 한 마리가 있었다.
보니까 재갈 먹인 것이 잘못돼서 풀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 야크는 여지없이 독초를 먹었고 그로 인하여 배탈이 나서 거품을 무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이 야크를 살리기 위해서 상인들은 가는 길을 멈추고 치료하는 등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3절 말씀에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라는 말은 그래서 정답이다.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가하는 이유는 말은 채찍을 가하지 않으면 자신이 잘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빨리 달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경주마의 등에 기수가 채찍을 가하는 것이다.
이는 그 말이 미워서가 아니라 게으름 피우지 않고 더 잘 달리도록 하기 위한 채찍인 것이다.
미련한 자의 등에는 몽둥이가 제격이다.
미련함이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미련의 사전적 의미로는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릴 정도로 어리석고 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살다보면 이처럼 미련하고 둔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과 함께 일을 하다보면 속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잠 17:12절에서는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지 않으면 1등을 못할 수도 있다.
짐을 싣고 운반하는 나귀의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으면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물질의 손해를 좀 보면 된다.
아니 다음에 다시 열심히 하면 손해 본 것만큼 회복할 수도 있다.
문제는 미련한 사람이다.
미련한 사람이 미련하게 행하여 물질의 손해를 보는 것 역시 다음에라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그것이 영혼의 문제일 때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가장 미련한 자는 누구일까?
사람이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지 않아서 2등을 한 것이나, 나귀의 입에 재갈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서 독초를 먹고 죽어가는 그런 나귀의 주인의 마음과 같을까?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깨닫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나귀의 목숨과 사람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의 등에 심판의 몽둥이를 대서라도 그를 깨우치기 원하신다.
사람들은 사람의 미련함을 지혜가 없고 둔하게 행동하며 생각이 짧은 것 등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미련함은 만물 위의 하나님을 만물 안에 갇힌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마치 도깨비 방망이나 알라딘의 램프 속에 있는 요정 지니와 같은 존재로 여겨 내 뜻을 위하여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어야만 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바로 미련함이다.
사람이 이처럼 미련한 생각과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심판으로 그의 등에 심판의 몽둥이를 대시는데 그 때에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진짜 미련한 자이다.
한두 번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하는 것은 그의 미련함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개는 그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는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다.
그들은 그것이 더러운 것인지 어쩐지 모르는 미련한 짐승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미련한 자라도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거나 깨끗이 씻고 난 다음에 자기가 싼 똥 위에 눕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몸은 더러운 것을 분별하여 가지 않으면서 영혼이 더러운 곳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잘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미련함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복한다.
(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벧후 2: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이것이 바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만물 안에 갇힌 자기의 하나님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기초를 부실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집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 하는 일이 시간마다 와서 하나님께 그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지금 당장 무너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 무너지면 그 피해의 심각성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무너질 집이라면 빨리 무너지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래야 안전하고 튼튼한 집을 다시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질 집을 무너뜨리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공의는 단지 무너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무너진 자리에 다시 성소를 짓고 가장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관계를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공의의 목적은 멀어진 관계나 끊어진 관계를 무너뜨림으로 다시 세우시고 회복시키시는데 있다.
다윗이 불의한 방법으로 밧세바를 취하여 아기를 낳았다.
하나님께서 그 아기를 치시므로 병이 들어 일주일 동안 앓다가 죽었다.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하여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석고대죄하고 회개하며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었고 그것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결국 다윗의 기도와 상관없이 아이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아이를 데려가신 하나님께서 대신 솔로몬을 허락하시고 그 이름을 여디디야, 즉 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친히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집은 다시는 무너질 염려가 없는 완전한 집, 즉 그리스도로 완성되는 언약적 가문을 말한다.
(삼하 7:11b-13)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은 전쟁을 할 때 군사의 숫자로 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전쟁을 하기 때문에 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군사의 숫자와 상관없이 승리하곤 했다.
(삼하 8:6b)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런 다윗이 어느 날 군사의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사탄이 그의 마음을 충동질 하여 그 일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자기주장의지의 발로이다.
자기주장의지는 곧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는 아주 심각한 죄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을 치시고 갓 선지자를 보내서 심판을 명하신다.
나라 전체가 3년 동안 기근에 빠지든지, 3개월 동안 적군에 쫓겨 다니든지, 아니면 3일 동안 전염병이 창궐하여 여호와의 천사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하게 하든지, 이 세 가지 중에서 택하라고 하셨다.
이에 다윗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3번째 심판, 즉 3일 동안 전염병을 통하여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내리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죽어 나갔다.
이때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기를 백성을 계수하여 범죄한 자는 나인데 어찌하여 이 백성을 죽이시나이까 하고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되 백성은 살려달라고 기도한다.
이에 하나님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그 제단을 가리켜 일명, 심판의 제단, 심판의 제사라고 한다.
원래는 이스라엘의 온 백성을 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신데, 이 심판의 제사를 받으시므로 전염병으로 다 죽이는 것을 대신하시겠다는 것이다.
다윗은 서둘러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그 제사를 받으신다.
(대상 21:26-27)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그 후에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대상 22:1)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 받은 자리가 바로 성전이 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결과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실제로 다윗이 심판의 제사를 드렸던 그 곳, 즉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짓는다.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다윗의 멀어졌던 관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이 자리는 또한 모리아 산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그 자리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고 온통 그 마음이 이삭에게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심판하신다.
그 심판의 내용은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단을 수축한 후에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하였다.
그 순간 하나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숫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심판하신 심판의 자리가 바로 모리아 산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기에 그것은 곧 그로부터 나올 자손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 심판의 자리에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짓게 하시는데 그 자리가 바로 모리아 산이다.
사람은 미련하게 행동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심판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시고 그 자리에 성소를 세워주신다.
그 세워진 성소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전은 만남의 장소이다.
주님은 바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이 성전을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의 장소로 사용하지 않고 죄를 짓는 장소로 사용하였던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동안 수차례 그에 대한 심판을 하셨다.
3~4차례 교통사고를 통하여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까지 간 적도 있고, 몸이 다쳐서 입원한 적도 있었다.
암에 걸려 수술을 한 적도 있다.
특히 내 몸을 약하게 하셔서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질병들이 찾아와 입원하고 치료하는 것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왜 나에게는 이렇게 환난이 많을까 라고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을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미련한 자가 아닐까?
그래서 미련한 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미련한 짓만 되풀이 하게 될 때, 하나님은 깨달을 때까지 그의 등에 심판의 몽둥이를 가하시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련한 자의 등에는 심판의 몽둥이가 제 격이다.
그 후 복음을 듣고 나서야 하나님의 심판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공의를 세우시고 그 안에 성소를 지으시며 그 안에서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이 있을 때 비로소 참된 평강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미련한 자의 미련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는 바로 복음의 몽둥이가 내 머리와 심령을 내리치는 순간, 그 미련의 숱한 때들이 벗겨진 것이다.
지금도 조금만 틈을 주면 언제든지 그 죄성이 발동하여 죄로 달려가는 나를 본다.
그래서 날마다 이 복음의 몽둥이로 나를 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의 심판은 그래서 나에게 복음이다.
오늘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심판을, ‘나는 옳습니다’ 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심판의 무덤 안에서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깨닫는다.
그 자리에서 아들이 보았던 그 영광이 내게 임한다.
그 자리가 다름 아닌 아들이 계신 곳, 즉 ‘나 있는 곳’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들이 있는 그 자리, 그곳은 바로 십자가의 자리요, 심판의 자리이며, 무덤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난 부활의 자리이다.
거기서 오늘도 새롭게 주님을 만나 함께 교제하니 죽을 것 같았던 이 몸과 영혼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역시 주님은 나의 생명이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주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했나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심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나 헤매고 헤맨 뒤였는지요.
하나님께서 그토록 심판의 몽둥이로 내 몸을 치고 또 때려도 나의 미련함이 얼마나 두터운지 그것을 깨닫는 데는 정말이지 한참 걸렸나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나에게 닥쳤던 수많은 환난의 흔적들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그 순간 나의 미련함은 벗겨졌나이다.
하지만, 지금도 순간순간 주님의 심판이 아니면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나 자신을 보나이다.
하오니 오늘도 주의 심판의 몽둥이, 복음의 몽둥이로 나를 쳐서 말씀 앞에 복종하게 하소서.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임을 이 죄인은 잘 아나이다.
그로 인하여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사라지길 원합니다.
오늘 심판의 무덤 안에서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오니 주여 이 종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