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그전에도 민주노동당은 연평해전이나 북핵문제 등 북한에 불리한 이슈에 관해서는 지금과 똑같은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하긴 같은 당에 관한 정보를 북에 넘긴 혐의로 기소된 간첩을 제명하느니 차라리 당이 쪼개지는 것을 택했던 이들이 아닌가. 이번 사태가 과거와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울산 지역의 민노당에서 자신들을 비판한 <경향신문>을 상대로 절독운동을 벌였다는 것. 이 느닷없는 공격적 대응이 외려 민노당 전체로 하여금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는 범국민적 요구를 받는 수세에 몰아넣은 것이다.
양들은 왜 침묵하나
침묵의 옹호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적극적으로 3대 세습이 옳다고 말하는 원리주의적 입장, 소극적으로 양심에 관해 침묵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기회주의적 입장, 그리고 다가올 대선의 야권연대를 위해 문제를 덮자는 실용주의적 입장. 이 세 입장의 문제는, 사회적 비판에 따르는 논리적 일관성과 보편적 호소력을 포기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그런 논리라면 이 세상에 정당화하지 못할 게 없을 거다. 가령 삼성의 경영권 세습도 “그들이 결정할 문제”일 것이며, 이른바 외교부의 똥돼지들의 경우에도 “뽑아놓으면 더 잘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이른바 ‘종북’이냐 아니냐는 별도 주제다. 공식화하는 게 남세스러울 뿐이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니까. 흥미로운 것은, 인민의 대량 아사를 낳은 경제적 파탄과 봉건적 세습제로 회귀한 정치적 파국에도 불구하고 ‘왜’ 그 체제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왜’가 요구하는 답변은 논리적 성격의 것이 아니리라. 논리가 있다면 ‘논파’를 하면 될 일이나, 논리를 초월한 사안은 ‘논’파가 불가능하다. 한때는 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령 “정당은 북한의 세습에 침묵할 자유가 있다”는 주장에 “개인과 달리 공당에는 그런 자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하자. 그럼 이어서 이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한겨레>의 ‘왜냐면’난에 올라온 반론은, “정당은 북한의 세습에 침묵할 자유가 있다”. 고장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의 반복은 정치가 아니라 개그에 가깝다(“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밥 먹는다” “죽었니, 살았니?” “밥 먹는다”). 이렇게 의식의 차원, 담론의 영역에서 소통이 불가능할 경우, 그 원인을 찾아 무의식의 영역으로 내려가야 할 거다.
민노당의 과도한 대응
정신분석의 담론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으나, 때로는 그것밖에 설명의 틀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당장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이름’(le nom du pere). 라캉에게서 이 개념은 의미작용을 비로소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인 기표를 가리킨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여 그를 상징계의 질서 속에서 독자적으로 의미작용을 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준다. 가령 민주노동당 부설 ‘새 세상 연구소’의 이사를 지내는 어느 교수님이 이 사태에 관해 올린 글을 보자. ‘아버지의 이름’은 한 주체로 하여금 이런 발언의 행위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들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세계 최강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고 이기게 되면 통일국가는 물론이고 세계혁명의 단초를 열게 될 것이다. 진다면 세계자본주의는 물론 다시 활력을 되찾을 것이고 모든 것은 지도자를 잘못 뽑은 때문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마지막 미국과의 최후 결전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세대교체의 일환으로 20대의 청년대장을 옹립했다. (…) 북쪽에서 새로 지도자를 옹립한 것이 북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는 앞으로 전개될 미국과의 최후 결전에서 누가 승리하는가 여부에 따라 판가름날 뿐이다.”
이 발언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우리 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체제의 상징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체제에선 저게 사회적 상식의 행세를 할 거다. 80년대에 많은 이들이 세계관이 형성되는 그 시기에 ‘주체사상’을 통해 저런 발언의 주체, 그야말로 ‘주체’(sic!)로 자라났다. 라캉에 따르면. 때론 실존 인물이 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한다. 북의 개인숭배는 이와 관련이 있다. ‘수령론’은 한마디로 몽매한 인민을 위해 추상적인 아버지를 구체적 아버지로 의인화한 것. 그 상징계 안에서 언어능력을 습득한 이들은 당연히 세습의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라캉의 언어놀이는 ‘아버지의 이름’(le nom du pere)을 동음이의어인 ‘아버지의 금지’(le non du pere)와 연결시킨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포된 모세의 십계명은 대부분 금지로 이루어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하지만 이것들보다 앞선 상위 계명은 아버지를 배신하거나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원시 유대사회의 계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원형 그대로 보여준다.
3대 세습에 대한 침묵은 이 ‘아버지의 금지’와 연관이 있을 거다. 2008년의 민주노동당의 한 당직자가 당내 상황을 북한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당 대회에는 그를 제명하자는 안건이 올라 왔다. 당시 나는 당의 주류가 결국은 간첩 혐의자의 제명에 동의할 거라 예상했다. 안 그러면 당이 둘로 쪼개질 텐데, 누가 그런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려 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예상을 깨고 간첩 혐의자를 제명하느니 차라리 당이 깨지는 쪽을 택했다. 이를 지켜보며 내심 충격을 받았다. 이 비합리적 집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당직자는 그들이 관념적으로 속해 있으나, 지리적으로는 떨어진 또 다른 상상계와 연결해주는 끈이었으리라. 그를 제명하는 것은 곧 그 끈을 자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상상계는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여 그들을 의미작용의 주체로 만들어주는 그것. 따라서 그 끈이 끊어지는 것은 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의미했을 거다. 그들이 느닷없이 <경향신문> 절독운동을 벌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상식을 넘어선 그들의 과도한 대응.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데에 대한 자식의 모욕감이라는 맥락에서 읽을 때 이해가 될 것이다.
정치적 신경증
문제는 ‘아버지의 이름’이 발휘하는 역할. 그것 없이는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를 이어주는 고리가 사라져 주체는 강박증에 빠진단다. 그들의 집착은 여기에 저항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까? 아버지를 버린다면 그들은 정체성을 잃고 아예 정치적 의미작용의 주체로 남을 수 없다. 그나마 아버지가 있어 위에 인용한 저런 수준의 언설 활동이라도 하는 거다. 이것은 담론으로 논파할 논리적 담론의 문제가 아니다. 해법은 아버지를 바꾸는 것이나, 아버지의 금지(le non de pere)의 최고 계명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진정한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