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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지구랏1): 성경과 고대근동학의 문화종교 경책적 만남 ㅡ창세기 28:12의 요한복음 1:51의 인용을 중심으로 (Cross versus Ziqqurrat: An Elenctic Encounter between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ern Studies in the test case of John 1:51, alluded from Genesis 1:51) 김진섭(Dropsie 대학 박사,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교수) 목 차 서 론: 고대근동학이란? 본 론: 1. 출발점: 요 1:51의 창 28:12의 인용 2. ם의 지시물: 지구랏 층계 2.1. 어원적 통시적 고찰 2.1.1. 동사 ללס II의 파생명사 2.1.2. למס의 자음 위치전환인 םלס 2.2. ם의 문맥적 공시적 고찰 2.2.1. 하란: 월신 Nanna/Suen의 신전 É-ḫúl-ḫúl 2.2.2. 하늘에 치솟은 지구랏 층계의 꼭대기 3. 지구랏: 십자가를 향한 탄식 3.1. 지구랏의 기원: 왕상 20:23-25 3.2. 지구랏의 구조: 친친 감은 뱀 3.2.1. 인공적 산 3.2.2. 나선형의 층계 3.2.3. 나선형 층계 지구랏: 친친 감은 뱀의 고고학적 증거 3.2.4. 나선형 층계 지구랏: 친친 감은 뱀의 수메르 문헌적 증거 4. 지구랏 문화에 대한 문화종교경책학적 평가 4.1. 성경적 일원론으로서의 선험적 비평론 4.2. 부정적 평가: 사탄숭배의 모형 4.2.1. 바빌론 지구랏(창 11:1-9) 4.3. 긍정적 평가: 십자가를 향한 탄식 4.3.1. 신전의식 4.3.2. 오직 은혜로 5. 십자가: 새로운 살 길 5.1. 십자가: 지구랏의 해답 5.2.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믿은 야곱 5.3. 요 1:51의 성경신학적 의미 5.3.1. “하늘이 열려있고” 5.3.2. “인자 위에” 5.3.3.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함” 5.3.4. “너희들이 보리라” 결론: 서론: 고대근동학이란? “고대근동학”(Ancient Near Eastern Studies)이란 현재 중동(Middle East) 혹은 “중근동”(Near and Middle East)2) 지역을 가리키는 “고대근동”(Ancient Near East)의 고고학적 유물과 문헌을 중심한 총체적 학문으로서,3) 성경 본문의 역사적-문예적-신학적 연구에 상당한 관련성을 보여 왔다.4) 에리히(Ehrich)는 고대근동 지역의 범위를 이집트, 팔레스타인, 서남아시아 건조대, 아라비아 (페르시아) 만, 메소포타미아, 이란, 중앙아시아 (서부 터키스탄), 코카서스, 아나톨리아, 시리아로 한정하여, “지중해”(Aegean)와 “동남아시아 일부”를 제외한 협의의 “중근동”으로 이해하지만, 필자는 보다 광의의 지역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특별히 괄호 안은 고대근동에 존재한 국가 이름들이다. 지중해-Crete, Cyprus, Rhodes, Troy, Gordion, Lycia, Lydia, Caria, Greece, Rome 아나톨리아-Turkey(Phrygia, Ḫatti 즉 Hittite, Cappadocia, Mitanni) Caucasus(Urartu) 시리아-팔레스타인-Lebanon(Ugarit, Byblos, Tyre, Sidon, Phoenicia) Syria(Ebla, Amurru, Mari, Yamḫad, Aram) Canaan(Kinaḫḫu, Judah, Israel, Peleset 즉 Philistia, Tyekker, Sherden) Jordan(Edom, Ammon, Moab) 메소포타미아―Iraq(Sumer, Akkad, Nuzi, Babylonia, Assyria) Iran(Elam, Susiana, Luristan, Simaški, Persia) 중앙아시아-Afghanistan, Baluchistan/Indus Valley(Mohenjo-Daro, Harappa 즉 Meluḫḫa5)) 아라비아 반도-Saudi Arabia, Qatar, Oman(Magan) Bahrain(Dilmun), 동북 아프리카-Egypt(Nubia), Sudan, Libya 고대근동학의 연대적 범위는 선사시대(Protoliterate EB; 주전 8500-3200년)에서 출발하여 주전 3100년(Uruk IV/III)으로 시작되는 역사시대로 이어져,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벌(주전 330년)을 거쳐 주후 425년의 로마제국 말기나 혹은 622년의 이슬람 발흥기로 끝맺는다.6)
1. 출발점: 요한복음 1:51의 창세기 28:12의 인용 요한복음 1:45-51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사건을 다룬 복음서들 중의 유일한 기록인데, 그 문맥은 나다나엘을 구약의 야곱과 대조시키고 있는 인상을 던지고 있다. 나다나엘은 간사스런 야곱이 아니라(요 1:47과 창 27:36, 37 대조)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요 1:47과 창 32:27-30 대조), 야곱이 보았던 그 천상 세계의 환상을 나다나엘과 또한 그와 같은 신앙 고백자들이 실상으로 보게 될 것을 강조하는 중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5-51의 사건이 분명히 구약의 역사적인 인물인 야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 야곱의 어떤 구체적인 경험을 가리키고 있는가? 일별해 보아도 창세기 28:10-22의 벧엘 사건임을 지목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51 하반절이 창세기 28:12 하반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28:12b(MT): וֹבּ םי םי םי י ה (LXX): καὶ οἱ ἄγγελοι τού θεού ἀνέβαινον καὶ κατέβαινον έπ' αὐτής 요 1:51b(NA27): καὶ τοὺς ἀγγέλους τού θεού ἀναβαίνοντας καὶ καταβαίνοντας έπὶ τὸν υἱὸν τού ἀνθρώπου (F. Delitzsch): םאָ־ן ל םי םי םי יוּ
따라서 이 논고의 출발점이 되는 요한복음 1:51의 “인자”는 창세기 28:12의 “그”(3인칭 남성 단수)와 상응하는바, “그”는 선행하는 ם을 지칭한 대명사임을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봉사하는 장면을 덧붙여 재확인할 수 있다.7) 2. ם의 지시물(referent): 지구랏 층계 야곱이 본 ם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자”와 동일시된다면, 구약에 단 1회 사용된(hapax legomenon)8) 이 용어의 지시물을 규정함은 곧 그 지시물과 인자의 성경신학적 관계성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9) 형태론적으로 ם의 어근은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어근 s-l-l에서 파생된 명사형 sull과 접미어 ām이 연결되거나,10) 어근을 s-l-m으로 하는 quttal형의 명사이다.11) 2.1. 어원적 통시적 고찰 2.1.1. 동사 ללס II의 파생명사 이스라엘 철기시대(1200-587 BC 경)의 고속도로 사정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의 개정판에서, D. A. Dorsey는 동사 ללס 및 그 파생어의 비교셈족학적 고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공하고 있다.12) 2.1.1.1. ללס I “뒤얽히다(to interwine)”는 선사적 의미 아래 성경히브리어 파생어로서는 ל(‘껴안다’-잠 9:17), ל(‘광주리’-갈대 등으로 얽은-창 40:17 등), ה(‘덩굴손’-렘 6:9)이 있다. 2.1.1.2. ללס II “경사를 완만히 하다(to grade)”, “돌출부나 장애물을 치워 편평하게 하다(to level by clearing away protrusions and obstacles)”는 선사적 의미 아래 성경히브리어 파생어로는 ל(‘편평하게 하다’-렘 50:26 등), ה(‘도로’, ‘대로’-편평하게 만든), ה(‘공격용 경사로’-전쟁 시 성벽 허는 무기와 성벽 접근의 용이를 목적으로 성벽을 향해 경사지게 만든 편평한 도로-삼하 20:15 등), ה의 시적 고어인 לוּל(사 35:8), ם(‘계단적 평면’)등이 있는데 이 “계단적 평면”으로서의 ם은 고지 접근이 용이하도록 만든 “완만한 경사로”(graded ramp)가 건축학적 용어로 “층계”(stairway) 내지 이동용 층계, 즉 “사닥다리”의 의미로 변천(semantic change)되었다. Dorsey가 ם을 ללס II의 파생어로 제안함에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전통적 히브리어(및 아람어) 사전들은 동사 ללס의 선사적 의미를 “치켜들다(쌓기 위해), 던져 올리다”로 이해하지만,13) 그는 오히려 그 정반대 의미인 “치우다, 편평하게 하다”로 수정되어야 하며, 어원적으로 2개의 다른 동사 즉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 homonym) 및 그 파생어로 정확히 구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ללס I과 II의 관계는 다의적(多義的, polysemy) 관계로서, “(쌓기 위해) 치켜들다”의 선사적 의미에서 “완만한 경사로” 즉 “나선형 층계”의 의미로 발전되거나, “껴안다, 광주리, 덩굴손” 등의 의미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음중복(geminate) 어근의 명사형은 접두어 מ이 붙으나(예: ה), 접미어 מ이 붙는 경우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ם의 어근을 동사 ללס과 관련짓기에는 난점이 있다.14) 2.1.2. למס의 자음 위치전환인 םלס 2.1.2.1. 아카드어 simmiltu = 수메르어 kun4 (= i-lu) 고대근동 언어학의 선구자 B. Landsberger는 1933년에 처음으로 ם은 아카드어 simmiltu의 자음 m, l의 위치전환(metathesis)인 것을 제안한 이래,15) 학계는 그 관련성을 인정하면서 simmiltu는 계속 시리아어 simmilta, sebbeltā 및 만다어(Mandaic) sumbilta‘로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16) 통시적으로 볼 때, 수메르어 kun4은 i(≡=; 사닥다리나 층계의 계단을 가리킴)와 lu(⊕; 바깥문의 문지방을 가리킴)의 합성어이다.17) 아카드어 simmiltu는 구 아카드어(2500-1950 BC 경)에서 왕궁의 “층계”를 가리켰고, 구 바빌론어(1950-1350 BC 경)의 수메르-아카드어 이중어 사전인 Nabintu E 287에 수메르어 kun-sag = 아카드어 simmiltu ša gigunê, “지구랏 정상(頂上)신전[에 이르는] 층계”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기 아카드어 gigunû(gigunê는 그 소유격 형태임)는 본래 구 수메르어(Old Sumerian; 주전 2600-2350년경)에서부터 나타나는 수메르어 gi-gù-na의 차용어이다. 여기 gù-na는 gun4(= èš-gunû; èš, “신당”은 단지[terrace] 위에 갈대(gi) 재료로 건립된 지성소격인 정상신전의 모습을 가리키며, gunû란 단지 속에 층계를 가리키는 빗살무늬들이 새겨진 모습을 가리킨다)의 표음식 철자법이다. 시적으로는 우리가 상론할 지구랏 전체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18) 수메르의 솔로몬격인 Šulgi왕(2094-2047 BC)을 신격화한 찬양시 중에 kun-sag-é-kur-ra, “Ekur의 정상신전 층계(여기 é-kur 또한 ‘산의 집’이란 뜻)”란 구절 역시 수메르의 예루살렘격인 Nippur의 Enlil 신전인 Ekur가 지구랏 위에 건립된 것을 가리키고 있다.19) 실제로 Šulgi의 아버지요 Ur 제 3왕조의 창시자인 Ur-Nammu왕(2112-2095 BC)이 주전 2100년경에 지은 지구랏과 Ekur신전의 유적이 현존하고 있으며,20) 주전 1300년경 점토판에 그려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Nippur 도시 지도와도 일치한다.21) Kazallu의 Numušda 신전을 (é)-kun4-sa-tu, “신전: (인공) 산에 (오르게 하는) 층계”로 표현함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22) 그러나 위에 언급한 Nabintu 사전보다 더 오래된 사전들 중에(예: Proto-Diri, 165) 수메르어 결정어(determinative) giš, “나무”란 표시가 있는 것은(즉 giškun4 = sí-im-mi-i[l]-t[um]) 상당한 초기부터(그러나 구 아카드 시대보다는 후기에) 나무로 만든 “사닥다리”도 존재한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신 바빌론 시대(1000-625 BC 경)에는 성벽 공격용 사닥다리(siege ladder)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23)
2.1.2.2. 성경히브리어 ם 창 23:12의 야곱은 약 76세로서(1800 BC 경),24) 여기 사용된 ם이 어느 시대에 속하는 용법인지는 성경히브리어 도 언어적 변천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치 않다.25) 미슈나히브리어(Mishnaic Hebrew; 300 BCㅡAD 500 경)에서는 아람어 형태 sûllāmāʾ와 함께 주로 “사닥다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26) 아랍어의 śullam(“사닥다리” 혹은 “층계”)과 śullamat(‘층계’)는 통시적 관점에서 층계와 사닥다리의 뜻이 병용된 것을 보여 준다.27) 셈족 동계어 중 페니키아어(Phoenician)는 성경히브리어 와 가장 유사성을 많이 지녀, 주전 4-3세기경에 slm, “층계”(‘사닥다리’가 아니라)라는 단어가 mpqd, “망루”라는 단어와 연어 관계(collocation)에서 사용되고 있다.28) 구약의 헬라어 역본(LXX)은 ם을 κλίμαξ로 번역했는데, 고전 헬라어에서 “사닥다리, 층계, 십자가 나무 형틀(죄수 형벌용)”을 뜻했다.29) 주전 2세기 중엽의 마카비 1서 5:30에서는 “공격용 사다리”로, 11:59에서는 “층계”로 각각 사용되었다. 주후 4세기의 Vulgata 역본은 scala로 번역했는데, 이것 역시 “사다리, 공격용 사다리, 층계”로 병용되었다.30) 이상으로 ם의 어원적 및 통시적 고찰을 요약한다면, 어원적으로는 아카드어 simmiltu = 수메르어 kun4와 연결되며, 그 의미는 나무로 만든 “사닥다리”, "왕궁이나 신전의 층계”에서 어의론적 보수주의(semantic conservatism) 현상에 의해 높은 신단이나 지구랏의 층계를 가리키는 “의미의 전문화”(specialization of meaning)와 함께 하나의 문화어(Kulturwort)가 되었다고 하겠다.31) 이스라엘 왕국 시대 이후에 “층계”를 표현하는 לוּל(예루살렘 성전 내 나선형 층계, 왕상 6:8), ה(예루살렘 성전 외부 층계, 왕상 10:5 등), ה 혹은 ה(번제단 층계[출 20:26]; 에스겔 환상 성전 내부 층계[겔40:9,31]) 등이 ם과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는 점도 이런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다.32) 2.2. ם의 문맥적 공시적 고찰33) 2.2.1. 하란: 월신(月神) Nanna/Suen의 신전 É-ḫúl-ḫúl 창세기 28:10-22의 본문은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브엘세바를 떠나 헤브론을 지나 이틀 정도 걸려 벧엘에(약 96km) 왔고, 밤이 되어 거기 유숙하는 중에 본 환상과 그 결과를 다루는 문맥 속에 놓여 있다. 그 후에 계속해서 세겜을 거쳐 중앙 산지의 길을 따라 벧산에 있는 대간선 도로를 통해 삼촌 라반의 거주지 밧단아람(ם ן, ‘아람의 통로’)의 하란까지 한 달 이상(약 880km) 여행했을 것이다.34) 밧단아람은 메소포타미아 상류지역으로서, Euphrates강과 Ḫabur강 사이의 교차하는 북부 지역이요(창 25:20; 28:2; 31:18 참조), 일명 아람 나하라임(ם ם, ‘두 강들의 아람’; 창 24:10; 신 23:4; 삿 3:8 등)으로 불려진다.35) 이 지역의 상업 중심지인 하란(ן, ‘대상(隊商)’, ‘여행’)은 니느웨에서 알렙포로 통행하는 중심 도로상에 있고,36) 가나안 이주 전에 아브라함이 그의 선친 데라와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창11:31, 12:1, 행 7:2,4). 하란은 그 전략적 위치로 인하여 주전 2250년경부터 Mari를 중심한 아모리족(Amorites)의 큰 관심사였다.37) 종교적으로 남쪽 Ur(현존하는 지구랏들 중에 가장 보존이 잘 된)와 함께38) 구 바빌론 시대부터 수메르의 일곱 주요 신의 하나인 월신 Nanna/Suen 숭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Mari의 Zimrilim왕(주전 1730-1700년경 통치) 때 이미 언급되고 있으며, 그 신전 이름이 수메르어 é-ḫúl-ḫúl = 아카드어 šubat ḫidâti, “환희의 집”이었음이 비문을 통해 알려졌다.39) Šamši-Adad(1814 BC 통치 시작)이 수도를 삼은 Ḫabur강 동편의 Šubat Enlil(“Enlil 신의 좌소”; 현 Tell Leilan)은 Yale 대학교가 1979년 이래 발굴을 계속하고 있는 바,40) 지구랏 모양의 언덕이 있으며,41) 하란과 가까운 Tell Brak42)에서도 지구랏이 발견되었으므로,43) 야곱 역시 하란의 외삼촌 집에 20년간 거주하면서(창 31:41) 지구랏 문화권에 익숙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2.2.2. 하늘에 치솟은 지구랏 층계의 꼭대기 2.2.2.1. 지구랏 층계의 위치 창 28:12에 이 층계가 “땅 위에 섰는데(האַ ב)”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ה י)”라고 묘사하고 있다. “섰다”와 “닿았다”가 현재 상태인 것을 분사형으로 강조하고 있거니와, 이 묘사는 수메르어 신전 찬양시(Temple Hymns)에서 지구랏의 모습을 묘사하는 전용구(frozen phrase)들과 의미 상당(意味相當, semantic equivalence)인 것을 알 수 있다. Akkad(창 10:10의 ‘악갓’) 제국의 창설자 Sargon왕의 딸로서 그 당시 알려진 수메르어 신전 찬양시 42개를 집성한 Enheduanna(2334-2279 BC)는 그 첫 신전 찬양시를 역시 종교적으로 가장 오래된 도시 Eridu의 주신(主神) Enki의 신전 É-engur-ra 찬양시로써 시작하고 있는 바 그 몇 행(行)을 예로 들면:44) 1. é-u6-nir an-ki-da mú-a 오, Eunir (‘지구랏의 집’)!45) 천지에 치솟았도다. 2. temen-an-ki unú-gal eriduki 천지의 지대(地臺)요, Eridu의 연회장이로다. 15. èš abzu ki-zu sur7-zu 오, 성소, Abzu! 그대의 지면, 그대의 주춧갱은 16. ki-dutu-ra gù-dé-za Utu(태양신)를 (그대가) 부르는 곳이요, 17. gir4 ninda-kú íl ú-sú-za 솥에서 먹음직한 빵을 가져와 음식 먹는 그대의 (장소요), 18. u6-nir èš-maḫ an-né us-sa-x-za 하늘 향해 치솟은 높은 성소, 지구랏이 있는 그대의 (장소로다). 후론하겠거니와, 지구랏은 2가지 종류의 신전을 갖고 있는데, 신들의 연회장으로서의 기저신전(基底神殿, Tieftempel)과 신들의 숙소인 정상신전(頂上神殿, Hochtempel)이다. 여기 제2행의 temen(비교: 고전 헬라어의 temenos의 차용어(?), 따라서 아주 초기에 수메르인과 헷인[Hittites]의 접촉),46) 제15행의 abzu, sur747) 등은 기저(基底) 신전의 모습을, 제1행 é-u6-nir, èš-maḫ 등은 정상신전의 모습을 각각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제1행의 동사 mú(= 아카드어 waṣû; 비교. 성경히브리어 אצי)는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지구랏 모습을 묘사한다. 제18행의 동사 ús(= 아카드어 emēdu; 비교. 성경히브리어 דמע)는 천지를 향해 “짓누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창 28:12의 “땅 위에 섰는데(בצי)”는 ús와 연결하여,48) “하늘에 닿았고(עגנ)”는 mú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49) 2.2.2.2. 지구랏 층계의 역할 창세기 28:12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 (층계)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17절에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한 것은 지구랏을 묘사하는 또 다른 표현들이다. 1957년에 출판된 Sultantepe 토판에서 발견된 Nergal과 Ereškigal 신화의 Assyrian 역본에서 예를 들면:50) ilâ Namtar arkat simmelat šamā[mi] Namtar은 하늘의 긴 층계를 올라갔고 [ūrid Ne]rgal arkta simmelat šamāmi Nergal은 하늘의 긴 층계를 내려갔다. 여기 나타나는 Namtar이나 Nergal은 신 Anu의 사자(使者, mār šipri)로서51) 신들의 메시지(šipru)를 전하는 자들인데,52) 마침내 그들이 Anu, Enlil, 그리고 Ea 신들의 문(bab Anim Enlil u Ea)에 도착한 것을 묘사하므로,53) 창세기 28:12의 하나님의 사자들(םי י)54) 이 하늘에 그 꼭대기가 닿은 지구랏 층계(ם)를 오르락(םי) 내리락(םי)하며, 17절에 “하늘의 문(ם ר)”이라고 표현한 그 문화적 배경을 완벽하게 제공하고 있다.55) 결론적으로 ם의 문맥적 동시적 고찰을 요약하면, 지구랏 문화권의 월신 Nanna/Suen 숭배 중심지인 하란을 향해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야곱이 환상 중에 경험한 묘사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적 배경 아래 지구랏과 그 층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 지구랏: 십자가를 향한 탄식56) 3.1. 지구랏의 기원: 왕상 20:23-25 애굽의 pyramid, 쟈바 캄보디아의 pagoda, 멕시코 Aztec 문화의 pagoda, 구약의 ל, ה, ה, אוֹלּ 등과 외견상 관련지을 수 있을지 모르나,57) 그 동기, 기능, 구조를 분석해 볼 때 지구랏이야말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대명사라 할 만큼 인류 역사에 특이하게 존재했던 층계탑 신전으로서, 주전 2200-550년 사이의 지구랏들이 발굴되었다. 지구랏의 기원 및 기능에 대하여 지구랏 발굴에 20년 세월을 보냈던 Parrot을 중심한 최근까지의 이론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58) ① 봄철 홍수와 연결하여 곡식을 건조하게 보존하거나 신전을 보호하려는 장치 ② 애굽 pyramid처럼 왕이나 신의 무덤 ③ Borsippa의 지구랏 신전 이름이 é-ur-me-imin-an-ki, “천지의 일곱 법칙을 집성한 집”인데, 여기 7법칙은 7항성들의 7궤도로서 건축학적인 우주를 상징(따라서 그 정상은 천문대 역할 가능)59) ④ 신의 좌소는 고지에 있어야 하며,60) 신들이 거주할 정상신전을 받치는 거대한 주초(柱礎=plinth)로서 층계를 사용하여 기저신전에 내려와 인간에게 현현. 처음에는 높은 단지 위의 신전에서 점차 진화됨 신구약에 유일한 전통을 소개하는 열왕기상 20:23-25는 북쪽 이스라엘 아합 왕(874-856 BC)에 대한 전략으로서 아람의 벤하닷 2세(860-843 BC)의 신복들이 진술한 것인데, 북 이스라엘의 신들(원문의 복수형)은 “산들의 신들(םי י)”이므로 우리가 만일 평지(רוֹשׁי)에서 싸우면 이길 것이라는 요지이다. 이 본문은 그 당시 고대 근동의 신 개념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산지 출신의 주민들은 자기들의 수호신 경배를 산 위의 신전에서 할 것이며, 평지(사막, 비정착 유목민) 출신들은 자연히 그들과 동행하는 이동용 성막 형태로 신들을 섬길 것이다. 본문 28절은 아람 사람들이 “여호와는 산의 신들이요, 골짜기의 신들(םי י)은 아니다”라고 하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들을 아합의 손에 붙이겠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광야 40년 동안에 12지파가 진을 칠 때는 중앙에(민 2:1), 행진할 때는 동쪽 배진 3지파(유다, 잇사갈, 스불론)가 먼저 출발한 후 성막을 걷어 레위 지파가 수레에 실음으로 동행하셨다(민 7:7-8; 10:35-36; 수 3:3-4). 그 후 시온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후, 이 산은 성산이 되었고 여호와의 산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에서나(성막으로, 때로는 시내산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나(시온산), 어디서나 무소부재하신 참 신이신 것을 경책하는 의도가61) 인접 국가와의 전쟁(고대 근동의 전쟁은 각국 신들 간의 전쟁임)62)을 다루는 이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63) 이상에서 살펴본 산지 신 대(對) 평지 신 개념이 고대 근동의 산물이었다면, 산지 출신들이 산이 없는 평지(메소포타미아는 Herodotus나 Strabo가 표현한 대로 산이 없는 평원[πεδίον]이다)에 왔을 때 자기의 신들을 모실 인공적 산을 건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보아진다. 필자는 Parrot이 요약한 위의 ④번째 이론과 관련하여 창세기 11:2가 보여주는 대로, 동쪽으로 이동하던 산지인들이(사실 수메르인이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메소포타미아로 왔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64) 남쪽 평지를 발견하여(ה אצמ) 정착하면서, 그들의 정상신전을 받치는 거대한 주초로서 먼저 지구랏의 원형(archetype)인 “높은 단지”(‘High' terraces)를 세웠으며, 후에 인공적 산인 지구랏으로 발전하여 평지에 있는 경배자들과 천상에서 내려온 신들이 교제할 수 있도록 정상신전에서 기저신전으로 통하는 층계가 필요했던 것으로 그 기원을 추정해 보는 바이다. 3.2. 지구랏의 구조: 친친 감은 뱀 3.2.1. 인공적 산 각 지역마다 존재한 지구랏 신전은(Parrot의 1954년 통계에 의하면, 서북 국경의 터키에서 이라크와 동남부 국경의 이란에 걸쳐서 27개 도시에 33개 발굴됨65)) 그들의 고유한 명칭이나 통칭(epithets)을 가지고 있는바,66) 인공적 산을 묘사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간략히 몇 실례를 들면: Nippur: é-kur[산의 집], ḫur-sag-galam-ma[층계산] Ur: ḫur-sag-sukud-du[고양산(高揚山)], é-mu-maḫ ḫur-sag-íl-an-na[고산(高山)집, 하늘(혹은 An 신)의 고양산] Kazallu: (é)-kun4-sa-tu[집, 산의 층계] Assur: é-kur-ru-ki-šár-ra[우주산의 집] Lagaš 제2왕조의 통치자 Gudea(주전 2100년경)가 그 도시 수호신 Ningirsu의 É-ninnu(“50[신들]의 집”)신전 재건 찬양시(Bauhymne)는 현존한 수메르 문학본문(literary texts) 중 가장 긴 본문을 가진 것인데,67) 그 당시의 종교, 건축, 예술, 윤리, 도덕, 상업, 무역 등의 전반적 문화 연구에 가장 요긴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지구랏과 관련하여서도 중요한 정보가 많다. 원통형 본문 A 21단 19-23행에 묘사된 인공적 산의 모습을 예로 들면68): 19. é ḫur-sag-gim im-mú-mú-ne 그들(건축인부)은 그 신전을 태산처럼 자라가게 했다(건축 진행). 20. dugud-gim an-šà-ge im-mi-ni-íb-diri-ne 그들은 중천에 구름 같이 그것(신전)을 달아 놓았다. 21. gu4-gim si im-mi-íb-íl-íl-ne 그들은 황소처럼 그 뿔을 (하늘로) 치솟게 했다. 22. giš-gana2-abzu-gim kur-kur-ra sag ba-ni-íb-íl-ne 그들은 압주의 ‘가나’나무처럼 그 꼭대기를 전 역에 (볼 수 있도록) 치솟게 했다. 23. é-e ḫur-sag-gim an-ki-a sag-an-šè sag mi-ni-íb-íl 그 신전은 태산처럼 천지에서 하늘 꼭대기를 향해 그 머리를 치켜들었다. 3.2.2. 나선형의 층계 지구랏의 정상으로 접근하는 수단은 몇 가지 양상을 띠는 바(사실상 발굴된 지구랏의 절반 이상이 그 접근 수단을 보존하고 있지 않음), 첫째, 기저신전에서 지구랏으로 직접 연결 통로를 만든 북쪽 앗시리아 형(Assur, Kar-Tukulti Ninurta, Tell Rimah); 둘째, 기저신전의 지붕이나 지구랏 후면의 특별한 건물에 의해 올라가는 앗시리아 형(Khorsabad, Nimrud); 셋째, 여러 개의 지구랏들로 분리된 도시들을 연결(3개 지구랏의 Assur; Kish/Inghara), 넷째, 남쪽 바빌론 지역의 3방향 층계(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간 후 그 다음 층에는 1방향으로만 올라가는 Uruk, Nippur, Ur)69); 마지막으로, 우리의 주 관심사인 나선형 층계이다. 주전 460년경 바빌론을 방문했던 Halicarnassus의 역사가 Herodotus는 바빌론 시에 있던 지구랏 É-temen-an-ki(“천지의 지대[地帶] 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70) “(Zeus-Belos) 신전 중앙에 가로 세로 크기가 각각 한 스타디움(계 14:20; 21:16 참조, 약 91.44m)인 견고한 탑이 세워져 있는데 탑 위에 또 다른 탑이, 그 다른 탑 위에 또 다른 탑이… 이렇게 하여 모두 8층이 연결되어 있는데 외부에서 둘러가는 나선형 층계에 의하여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중간쯤 올라가면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들이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큰 신전이 있는데 그 내부에 호화롭게 설치된 큰 침대와 그 곁에 탁상이 있었으나 아무런 (우)상들은 없었다. 그 신(즉 Marduk)을 모시고 있는 제사장들인 갈대아 사람들이 말하는 바로는 그 신이 지정한 그 나라의 한 여자 외에는 아무도 밤에 그 신전에 지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Samarra에 현존한 Abbasside 시대(주후 약 9세기)의 회교사원 기도첨탑(minaret)은 그 크기가 32×32×52.5m로서 다섯 나선형 층계를 가지고 있는데, Herodotus가 말한 그 고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3.2.3. 나선형 층계 지구랏: 친친 감은 뱀의 고고학적 증거 이 나선형 층계의 지구랏을 우리의 표본으로 삼고,71) 이러한 구조의 암시를 어디서 찾았는가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발굴된 유적들 가운데 원통형 인장(cylinder seals),72) 부적(amulets), 저부조(bas-reliefs), 항아리 등에 지구랏 묘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주로 지주(地主)나 면세용으로 만들어진 지계석(地界石, kudurrus, 신 19:14, 27:17 참조)에는 지구랏의 동심(同心) 입면도(이 경우 5층계)와 함께 자주 긴 뱀의 모습이 지계석 뒷면을 채우고 있다.73) 3.2.4. 나선형 층계 지구랏: 친친 감은 뱀의 수메르 문헌적 증거 필자가 아는 최선의 범위 내에서 아직 지구랏의 모형을 몸을 친친 감은 뱀의 모습으로 고찰한 논문을 보지 못했거니와, 수메르 신전 찬양시의 결정판을 집필했고, 개인적으로 최대의 수메르 단어 카드를 소장하고 있으며, 역사 최초로 Sumerian 사전 편집장인 현 펜실바니아 대학교 박물관(이 박물관에 Sumerian Literary Texts의 전 세계 약 70%가 소장되어 있음) 바빌론과(科) 책임자인 A. Sjöberg 박사마저도 필자가 인용하려는 본문들의 해석을 난해한 미지수로 남겨 놓고 있다. 3.2.4.1. Gudea 원통형 A 10단 19-23행 (Lagaš의 수호신 Ningirsu의 É-ḫuš 신전) 19. é-ḫuš -ki-ḫuš-mu 나의 두려운 집, 두려운 곳을 20. muš-ḫuš-gim-ki-šúr-ra bí-dù 무서운 뱀(혹은 불뱀) 모양으로 그는(An) 두려운 곳에 지었도다. 21. ki-bala-ga nu-mi-íb-du11-ga 그는 나(Ningirsu)의 적대 지역들이 아무 말도 못 하게 했도다. 22. u4 šà-mu um-ši-mi-ré-a 내 마음이 쓰라릴 때 23. muḫ-zé-gur5-a-gim uš-ma-a-ù-ku-e 맹독을 퍼붓는 뱀처럼 그(Ehuš)는 나 위해 맹독을 뿜어내도다. É-ḫuš, “두려운 집” 신전은 Enmetena(주전 2450-2400년경 Lagas 통치자) 때 문헌적으로 벌써 나타나고 있다.74) 3.2.4.2. Gudea 원통형 A 21단 26행-22단 3행 26. é-a gišim-gá-gá-ne 그 신전에 그들은 거주지를 정하고 27. ušum abzu UR-ba é-dé-dam Abzu(로부터 나오는) 친친감은75) 뱀으로 28. zú-an-na im-mi-íb-ú-ú-dam 독아(獨牙)를 하늘에 번뜩이면서 1. muš-maḫ ḫur-sag-gá sim ak-àm 상등성이에 미끄러지는 거대한 뱀으로 2. é-gi-guru5-bi muš -kur-ra Ur-ba ná-àm 그 Egiguru는 산에 친친감은 태 누워있는 뱀으로 3. sa-dú-b[i] eren-a ḫa-š[u]-úr-ra šu ḫé-tag-ga-ám 그 “산”(Egiguru/Eninnu 신전 일부)은 참으로 백 향목과 ḫashur 나무로 입혔다. 3.2.4.3. Sjöberg 1969:87-90행 (Keši에 있는 신 Ninḫursag을 위한 É-kèšiki 신전) 87. kèsiki urux utkin-an-ki Keši(신전)는 거상(巨像=colossus)이요 천지 모양으로서 88. muš-šà-tùr-gal-gim ní-ri-a 맹독성의 큰 뱀마냥 공포를 던지도다. 89. é-dnin-ḫur-sag-gá ki-súr-ra dù-a 두려운 곳에 지어진 Ninhursag의 집이여! 90. kèšiki arattaki arattaki sà-zu šà-sig bar-zu al-íl 존경스런 Keši(신전)여! 너의 중앙 내부는 친친 감겨졌으며, 너의 중앙 외부는 치켜 올려졌도다. 여기서 우리의 해석에 중요한 단어들을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①šà(제88, 90행): 여자적으로 “가슴”(성경히브리어 ב)이란 뜻인데, ב가 전치사와 결합시(예: ב) “가운데”란 뜻이 되며, 수메르어 šà의 본래 음가(音價)는 šag인데 어원적으로 성경히브리어 וֹתּ, “중앙”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은 음가 전환 법칙에 의해 설명된다. ②bar(제90행): 여자적으로 “등”인데 위치상으로 중앙 부분이므로 “중앙 외부”로 번역했다. ③šà-sig(제89행): 여자적으로 “깊은(좁은) 중심(가슴)”의 뜻인데, 아카드 상당어구는 qunnunu, 즉 qanānu 혹은 kanānu 동사 원형의 중복형이다. kanānu (Mishnaic Hebrew, ןנכ의 Pi‘el형 비교)의 뜻은 “친친 감다”인데 AHw:435는 다음과 같은 lexical texts를 소개한다.
따라서 šà-sig은 지구랏 형태를 뱀이 친친 감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전문 술어임을 알 수 있다. Sjöberg가 이 단어의 실례를 많이 들었으나 해석의 난해함을 지적하면서, “empty plain”으로 번역한 것은 유감스러운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eme-sig, “비비꼬인 말”은 아카드 상당어 “karṣu(참소)”로 이해되어 뱀에 대한 시사를 주고 있다[후론하는 galam-kad5 참조]. ④ al-íl(제89행): al은 지속을 나타내는 접두사(preformative) ar의 변형으로 보고(Poebel 1923:230 이하; Jacobsen 1970:251 참조), íl은 아카드 상당어 našû(성경히브리어 א)가 보여주는 대로 “치켜들다”인데, 지구랏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것을 묘사하는 또 다른 술어이다. 3.2.4.4. Sjöberg 1969:379-380행 (Isin에 있는 신 Nininsina의 É-ì-inki 신전) 379. ì-si0inki uru an-né ki-gar-ra šà-sig-ga ša-mu-un-dù 오 성읍 Isin이여! An(신)이 기초를 놓았 고 그가 친친 감은 상태로 건축했도다. 380. igi-bi ux-ru-àm šà-bi galam-kad5-àm. 그것의 얼굴은 위엄차며 그것의 중앙 내부는 공교롭게 엮어졌도다. ①galam-kad5(제380행): galam의 아카드 상당어는 “nakālu(공교롭다)”인데 장인(匠人)들이 공교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손을 꼬는 것과 뱀이 자연적으로 몸을 꼬는 모습에서 이런 의미가 발생했다고 본다. 들짐승 중에 뱀은 가장 “간교한”(םוּר, 창 3:1) 동시에, “지혜롭고”(φρόνιμος, 마 10:16), “슬기로운”(잠 12:16, 23. 14:15, 18, 22:3, 27:12) 것으로, 욥기에서는 “궤휼한”(5:12)의 의미로 나타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본래 nakālu는 중립적인 뜻이나 그 사용에 따라 “교묘하게 속임”이나 “교묘하게 만듦”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kad5의 아카드 상당어는 “ḫarādu(함께 묶다)”, 혹은 “karṣu(참소)”로서, 신전 부분들이 연결되어지는 건축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galam-kad5는 뱀이 친친 감고 있는 모습이 공교롭게 매듭을 엮은 장인들의 작품에 비유됨을 보여 주고 있다. 3.2.4.5. Sjöberg 1969:187-188행 (Gišbanda에 있는 신 Ningišzida의 É-nin-giš-zi-da 신전) 187. ki-ul kur-sig galam-e gar-ra 영원한 처소 공교롭게 세워진 산 188. itima ki-ḫuš šà-túm-ma ma 캄캄한 지성소(cella), 평원에 치솟은 두려운 처소 이상의 문헌들 중에서 나선형 층계의 지구랏이 친친 감은 뱀의 모습과 관련된 것을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신전 찬양시에 나타난 뱀에 대한 묘사를 위하여 Sjöberg, The Collection of the Sumerian Temple Hymns, 76, 122, 129-130 참조.
4. 지구랏 문화에 대한 문화종교경책학적 평가 4.1. 성경적 일원론으로서의 선험적 비평론76)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 활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이 지구랏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타락한 세속 문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보다 기본적인 질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교회사적으로 잘못된 2가지 유형의 기독교 문화권이 흐르고 있는데, 그 잘못은 세속 문화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양 극단론으로 치우친 이원론적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첫째로, 금욕주의자, 신비주의자, 재세례파(Anabaptist)들의 취했던 적대적 이원론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초월적 비평론(Antagonistic Dualism and the Transcendent Critique of Culture)이 있다. 이 견해는 세속 문화와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명제인바, 세속 문화는 마귀의 문화로서 기독교의 원수 내지 장애물이므로 기독교가 세속 문화를 완전히 정복하여 중생한 새 문화를 창조하든지 아니면 세속 문화 영역에서 완전히 탈퇴하여 죄의 오염에서 도피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둘째로, 주로 2세기 기독교 연지주의자의 Logos Theology를 필두로 중세기 스콜라 철학 및 현세 천주교의 자세로서 계층적 이원론으로서의 내재적 비평론(Hierarchical Dualism and the Immanent Critique of Culture)이 있다. 이 견해는 인류 타락은 초자연적 영적 은사만 상실한 것이며 진리를 해석해 낼 수 있는, 부분적이나마 그래도 독자적인 이성의 능력이 자연은사로서 내재하기 때문에, 세속 문화는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속 문화의 궁극적 의미는 제도적 교회를 통해 주입되는 영적 은혜에 의해 발견된다고 하므로, 그 결과 제도적 교회의 권위 아래에만 있으며 자동적으로 기독교 문화가 되며, 따라서 세속 문화에 대한 신앙적 비평을 가하지 아니하므로 기독 신앙에 의한 문화 변혁의 시도나 가능성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견해는, 역사적으로 존 칼빈이 “일반 은혜”(generalem dei gratium)란 용어로써 하나님의 주권 교리와 관련하여 세속 문화 평가에 이론적 기초를 제시한 이후, 특별히 19세기 화란의 A. Kuyper, H. Bavinck 및 미국의 Ch. Hodge 등을 통하여 다시 이론적 전개를 가지 다음에 20세기 화란에 K. Schilder, H. Dooyeweerd 및 미국의 C. Van Til 등의 개혁주의 신학자에 의해 정립을 본 개혁주의 견해로서, 세속 문화의 부정적, 긍정적 측면 양자에 균형을 주는 가장 성경적 견해이다. 도예벨트의 용어를 일부 빌린다면, 이 견해를 성경적 일원론으로서의 선험적 비평론(Biblical Monism and the Transcendental Critique of Culture)이라 부를 수 있겠다. 카이퍼의 보편은혜 이론이 세속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공동 광장에 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보는 대로, 개혁주의자들의 견해 속에서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이 견해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종합, 요약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그 문화의 기원을 두고(창1:-2:),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소위 문화-복음전도적 사명(cultural-evangelistic mandate; 창 1:28-30)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본체적으로 가지는 신앙적 사명 안에서 죄와 사망이 아담의 범죄 후 세상 속으로 침입해 온 이후에도 여전히 중생, 비중생자 모두에게 명령적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창 9:1, 롬 1:1-23). 창조-보존-심판 및 중생-성화-영화의 하나님께서(롬 11:36), 죄의 가공할 파괴력에서 인류가 자멸하도록 방치해 두지 않으시고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특별 은혜 속에 존재하는 보편 은혜로서, 지상의 일시적 문화 구조 속에 문화 수행, 발전의 선물을 신ㆍ불신 간에 주셔서, 긍정적으로 비중생 세속 문화까지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건설에 사용되게 하시므로 모든 문화 업적에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심을 재천명하는 것이다. 원리상 중생한 자들이 아직도 세속 문화의 습관을 유지할 수 있는 연약성과, 원리상 비중생한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됨을 파손된 채 보존하고 있는 현상적 애매 모호성은 사실상 종말론적 역사-문화관의 관점에서는 중생한 문화와 죄성 있는 비중생 문화의 양립될 수 없는 종교적 절대 반명제(absolute religious antithesis)의 분화 과정(process of differentiation)중에 놓여 있다. 따라서 비중생 문화는 동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심을 거절하는 배교 원리에 따라 건설되며, 그 결과 우상을 빙자한 사탄 숭배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부정적 비평을 항상 가지고 이 문화를 해석 사용해야 할 것이다. 4.2. 부정적 평가: 사탄 숭배의 모형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모든 종교 활동이 이 특이한 지구랏을 중심하여 전개되었고, 그 지구랏의 모형은 친친 감은 뱀 모양인 사실을 그들의 예술적 문헌적 고증에서 파악하게 되었을 때, 창세기 3:1에서부터 소개되고 있는 “그 뱀”(שׁ)은 고대 근동의 윤색(潤色)으로서의 신화적,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사탄의 화신인 것을 성경은 지적하는바(롬 16:20, 고후 11:13, 계 12:9, 14-15, 20:2),77) 지구랏이야말로 사탄 숭배의 모형임을 결론지을 수 있다. 이것이 후론할 지구랏의 원형으로서의 바빌론 지구랏(창 11:1-9 및 본 논고 각주 70 참조)과 바벨론 문화를 성경 전반에서 왜 정죄하는가 하는 핵심적 이유이다. 4.2.1. 바빌론 지구랏(창 11:1-9) 이 사건은 보다 광의의 문맥 단위 속에 놓여 있다(창 9:18-11:9). 홍수 후에(9:28, 10:1, 11:10), 노아의 세 아들들의 후손이 “온 땅에 흩어지면서”(그 서론인 9:18-19와 결론인 11:9의 동일 표현 비교), 같은 형제로서 같은 언어를 가졌던 그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분화된 역사적 사실(10:5, 20, 31)의 그 궁극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신학적인 해답으로 기록되었다. 본문의 역사적 문맥은 시날 평지의 바빌론 시와 그 가운데 지구랏의 건축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시날 평지(ר ץ 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가리키는 “Sumer와 Akkad”란 합성어의 수메르어 차용어로서 다음과 같은 변천이 있었다고 본다. šinʿār<šum(er)-ur(i)<šigir-uri<kigir-uri<ki.en.gir-ki.uri(= 아카드어, šumeru u akkadu).78) 자세한 논의는 Kraus 1970 참조. ② 니므롯 왕국(창 10:8-12, 11:2, 9): 니므롯의 역사적 신분 증명에 결정적 해답은 아직 없으나 여러 가능성에 대한 고찰로서 E. A. Speiser, “In Search of Nimrod”, Eretz-Israel 5 (Mazar Volume, 1958), 32-36을 보라 ③ 구운 벽돌과 역청: 돌과 시멘트가 희귀한 메소포타미아에서 고대 건축자재로서의 고운 흙벽돌(수메르어 sig4 = 아카드어 libittu)과 역청(수메르어 esír = 아카드어 kapru)은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④ 지구랏이 있는 성(לוּ רי): 정확한 번역은 서술적인 “성과 대”보다는 한정적인 “(그 가운데) 지구랏이 있는 성”이라야 한다. 그 당시 건축은 성과 지구랏이 분리될 수 없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문헌적으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앞서 논한 바빌론의 Esagil 신전과 Etemenanki 지구랏이 인접한 것과, Keši와 Isin은 그 도시와 신전 및 지구랏의 구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참조하라(창 11:8, 신 1:28, 렘 51:53 비교). 필자의 견해로서는 창 28:12의 ם이 지구랏의 “층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그 후에 환유법[metonymy]적으로 지구랏 자체 내지 그 신전을 뜻할 수도 있었겠으나), 여기 ל은 그 지구랏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구약 성경의 보편적 의미인 “망대”(삿 8:9등)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⑤ 하늘에 (닿는) 꼭대기(ם וֹשׁ): 본문 4절의 한글 번역, “닿는다”는 원문에 없으나 창세기 28:12과 동일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바벨(bābel)의 아카드 상당어는 bāb ilu(혹은ilāni), “신(들)의 문”이요, 수메르 상당어는 ká-dingir-ra인데 여기 dingir란 단어는 an, “하늘”이란 음가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창 28:17의 “하늘의 문”과도 관련될 수 있다. 지명 표기에 있어서 성경본문 인용시는 “바벨론”으로, 고대 근동본문 인용시는 어원적인 “바빌론”으로 각각 표기됨을 유의하라(하늘을 하나님의 대응어로 사용한 마 14:19, 눅 9:16, 15:18등을 참조). 4.2.1.1. 바빌론 지구랏(바벨탑)에 대한 성경 본문(창 11:1-9) 구조 본문은 구문상으로 반명제적 교차병행구(antithetic, chiastic parallelism)를 이루고 있다.79) 1절(원어적 상황): 온 땅, 한 언어 6-8절(심판): 하나님의 계획 및 추진 2-4절(죄): 인생들의 계획 및 추진 9절(결과적 상황): 온 땅, 혼잡한 언어 5절: 분수령 1절: 한 언어 6절: 한 언어 3절: 서로 말하되 7절: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3-4절: 자(hābâ), …하자 자(hābâ) …하자 (pl. Cohortative) (문법적 pl. cohortative;신학적 majestic pl. 삼위일체) 4절: 하늘에(닿게) 7절: (하늘에서) 내려가서 4절: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가) 9절: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여호와 흩어짐을 면하자 께서 그들을 흩으셨더라. 이 본문 구조가 벌써 암시하고 있는 대로, 개혁주의 종교경책학적인 해석이 얼마나 사활적인 이해의 차이를 가져 올 수 있는가를 다시금 인식하게 한다. 본문 2-4절에서 흩어짐을 면하고 이름을 보존하자는 구호 아래 건설되고 있던(계획, 실시, 성공적 추진에 의해 끝장을 보려는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본문 3, 4, 6절에서 보게 되는 바) 지구랏이, 사실은 주권자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작정에 대한 종교적 배교의 수단이 되어서, 오실 구속주 메시야, 그 길의 혈육적 예비의 시작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본문 즉시 뒤를 잇는 11:10-32의 아브라함의 족보 참조) 자기 파멸적, 마귀적 신기루임을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원리로서의 문화-복음전도적 사명은 “흩어지라”(창 1:26-28)이기 때문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그들의 도시문명은 정죄되었다(창 4:16-17 참조). 이것이 후대에 왜 초대교회 역사의 모체였던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의 강풍으로 흩어 사도행전 1:8의 원리적 성취를 이루시고(행 8:1), 예루살렘 교회는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형편에 머물렀으나(행 11:29) “흩어지는” 교회의 모델이 되는 안디옥 교회를(행 13:3)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셨는가에 대한 같은 원리이다. 역사적으로 모세가 창 11장을 기록할 당시는(주전 15세기) 바벨론 제1왕조가 몰락하고(주전 1550년경), 헷족(Hittite)에 의해 바벨론 시가 폐허된 형편이어서 “신(들)의 문”이라 자랑하며 교만하던 그 바빌론의 문화가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의 귀에는 “혼잡스럽게”(ללב) 들리는 것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신(사 66:1, 마 5:34) 그 하나님 앞에서 바빌론 문화에 대한 풍자도 곁들이고 있다. 신 의식을 지녔던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과 건널 수 없는 간극(chasm)의 그 경계선을 범하려 했던(본문 4, 7절) 그 시도는 바로 사탄이 뱀으로 유혹을 던졌던 “하나님과 같이 되는”(창 3:5) 그 문제이며, 범죄 후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몰아내셔야 했던 바로 그 문제인 것을(창 3:22와 11:6에 원인에 대한 결과 접속어 ה, ‘그러므로’를 참조) 지적하고 있다.80) 4.2.1.2. 바빌론 지구랏 전승 Hamlin은 이사야 41:14-16에 나타난 “산들과 작은 산들”이 바벨론 문화의 지구랏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석하면서, 창세기 11:1-9에 덧붙여 예레미야 51:25, 53; 이사야 14:12-16 본문 역시 지구랏과 관계된 것으로 제안했다.81) Parrot은 에스겔이 포로된 곳은 메소타미아의 예루살렘격인 Nippur근처인 Tel-Abib이었으므로 그가 환상 중에 본 예루살렘 성전의 층계 구조는(겔 43:13-17) 그가 실제로 그곳에서 보았던 지구랏의 구조에서 그 이해의 도움이 컸으리라고 보았다.82) 특별히 이사야 14:12-16은 타락한 천사로서의 사탄의 기원을 다루는 본문으로 전통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데(겔 28:16, 눅 10:18 참조), 그 진위에 대한 주석은 여기서 피하거니와, 이 본문의 일차적인 정황은 바빌론 문화(본문 4절의 그 왕을 대표로 하는)의 사탄적 교만과 그로 인한 타락 및 심판을 설명하고 있다. 종말론적으로 예루살렘을 그 상징으로 한 하나님 왕국(문화)의 승리를 향한(갈 4:26, 계 21장) 사탄 왕국(문화)의 몰락을(계17:-18:) 바벨론을 상징으로 하여 묘사하고 있다. 4.3. 긍정적 평가: 십자가를 향한 탄식 필자가 사용하는 “긍정적”이란 표현은 비중생 문화 속에 기독교 문화를 설명할 참된 그 무엇이 있다는 의미에서가 결코 아니다. 앞에서도 약술한 것처럼, 비중생 문화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건설에 사용될 수 있으며, 문화 업적의 참된 소유자는 그리스도이심을 천명함에 있어서, 지구랏 문화이든 현 세대의 문화이든 타락한 그들의 문화 속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복음 전파자인 어떤 유사성(내지 접촉점, 행 17:22-23)을 발견할 수 있으며, 참된 문화 수행자로서의 중생한 신자들에게 어떤 자기검토의 자료를 줄 수 있는가 라는 입장에서(고전 5:1, 11, 9:8) 사용하는 용어임을 주지해야 한다. 4.3.1. 신전 의식(神前意識, Coram Deo) 로마서 1:19에 말씀하는 보편은혜로서의 ‘신 의식’이나 ‘종교의 씨’는 메소포타미아 종교 일반 현상이 그들 나름의 신전 의식을 피상적이나마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수메르인들의 인간론이 인생은 신들을 섬기기 위한 오직 하나의 목적에서 흙에서 지어졌고,83) 그들의 거주 도시 역시 그 신들을 섬기기 위한 신전 건립의 목적으로 존재하므로 신들에게 음식과 처소를 제공하여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충분한 여가를 위해 지구랏 신전을 세웠다.84) 지구랏 정상신전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쉬는 거실로서 책상, 목욕통, 화로 및 불경스런 경배자들의 주목을 막는 휘장85)이 있었으며, 기저신전은 부엌, 창고 시설을 갖춘 신들의 연회장으로서 경배자와 교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신전 내에서 발굴되는 경배자들의 소상들(小像, statuettes)이 한결같이 신들에 대한 경외와 전념의 표시로서, 모든 손과 부릅뜬 눈의 자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 나름의 독특한 신전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거니와 Gudea의 Eninnu신전 재건 찬양시는 그 풍성한 신전 의식의 실례를 갖고 있는 바, 그 내용의 개요를 소개하고자 한다.86) 4.3.1.1. 원통 A Eninnu신전 건축(제1단 1행-30단 14행: 총814행) 1. 서론(1단 1-9행) Lagaš시 행운이 결정된 것과(1-2행) 그 수호신 Ningirsu의 부친인 Enlil 찬양(3-9행) 2. Eninnu 건축 명령(1단 107단 8행) ① 꿈 속에 Gudea에서 Ningirsu의 명령(1단 10-21행) ② 그 꿈의 뜻을 알기 위해 Nina로 가서 꿈 해몽 여신 Nanše에게 문의하여 해답 얻음(1단 22행-7단 8행); Gudea는 꿈 해석 위해 Nanše에게 묻기로 결심(1단 22행-2단 3행); Lagaš로 여행, Bagara에서 기도(2안 4-23행); Lagaš에서 Gatumdu(그 도시 설립 여신)에게 기도, 그 꿈의 내용(4단 3-5단 10행); Nanše의 꿈 해석(5단 11행-6단 13행; Nanše의 Gudea에게 충고-Ningirsu에게 선물 드리도록(6단 14행-7단 8행) 3. 신전 기공식 준비(7단 9행-12단 20행) ① Ningirsu께 드릴 선물 준비 및 전달(7단 9-29행) ② 결례식, ubšu-ukkinna 뜰에서 Ningirsu께서 기도(7단 30행-9단 4행) ③ Gudea의 건축 지원을 약속하면서 자찬하는 Ningirsu와 함께 두 번째 꿈(9단 5행-12단 11행) 4. 신전 건축 준비(12단 12행-17단 1행) ① 제사적 정결과 화평에 대한 Lagaš 전 백성들에게 지시(12단 21행-13단 15행) ② 흙벽돌과 그 신전 제작(13단 16행-14단 6행) ③ Lagaš백성 세금 징수(14단 7-27행) ④ 외국에서 원자재 공급(14단 28행-17단 1행) 5. Eninnu 신전(17단 2행 29단 12행) ① 신전 부지 성별(17단 2-28행) ② 기도와 제물(17단 29행-18단 9행) ③ 첫 흙벽돌 생산(18단 10행-19단 19행) ④ 공사 개요 설정(19단 20행-20단 4행) ⑤ 희생 제물 검사와 호의 있는 대답, 건축에 대한 신적 도움(22단 5-23행) ⑥ 신전 향한 7번 축사(20단 24행-21단 12행) ⑦ 신전 완공, 비문 및 Ningirsu의 신비적 적대자들의 복제상(複製像) 설립(21단 13행-29단 12행) 6. Eninnu 신전 찬양(29단 13행-30단 14행) 4.3.1.2. 원통 B Eninnu 새 신전 봉헌(제1단 1행-24단 15행:총 549행) 1. Eninnu 신전 찬양(1단 1-11행) 2. Eninnu 새 신전에 Ningirsu와 그 아내 Baba 등극 준비(1단 12행-4단 24행) ① Arunna신들에 대한 제사와 기원(1단 12행-2단 6행) ② 새 신전에의 Ningirsu 초대 기원 및 그에게 기도(2단 7-22행) ③ “부인의 신전”(A2ㆍMI)에의 Baba 초대 기원 및 그녀에게 기도(2단 23행-3단 4행) ④ 마지막 작업으로 제식적 정결 및 화평 유지(3단 5행-4단 24행) 3. Ningirsu와 Baba 입장(5단 1행-6단 10행) ① Ningirsu 입장(5단 1행-6단 10행) ② Baba 입장(5단 10-18행) ③ 헌물 및 제사 의식(5단19행-6단 10행) 4. Eninnu 신전 장식(6단 11행-17단 16행) ① Ningirsu의 직계 권속 임명(6단 11행-12단 25행) ② 여러 신들을 통하여 Eninnu 신전 진흥(건축시의 회상)(12단 26행-13단 10행) ③ Gudea의 Ningirsu에게 선물(13단 11행-17단 16행) 5. Eninnu 새 신전 봉헌과 함께 축제들(17단 17행-24단 8행) ① 백성들의 7일간 축제(17단 17행-19단 15행) ② 신들의 축제 음식(19단 16행-20단 12행) ③ Eninnu 새 신전 위해 An과 Enlil 신의 행운 공포(20단 13행-22단?)-토판 본문 파손 ④ 신들의 Gudea에 대한 답사(22단 17행-24단 8행-토판 본문 파손) 6. Eninnu 새 신전에 대한 결어적(結語的) 찬양(24단 9-15행) 4.3.2. 오직 은혜로(Sola Gratia)87) 앞서 살핀 창세기 11:1-9의 사건 속에는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죄가 더한 곳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는(롬5:20, ὑπερπερισσεύω) 은혜의 역사의 진행을 보게 된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영생 과일을 먹음으로 구원의 가능성 없이 타락한 상태로 영생할 가능성을 막으시고, 그 구원의 길을 여시고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던 그 은혜의 일관성으로(창 3:22), 지구랏 건축을 시작하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배도의 결말까지 진행시키려 했던(창 11:6) 그 범죄의 현장을 방치하여 자멸시키지 않으시고(참조: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으로서의 롬 1:24, 26, 28, παραδίδωμι, ‘내어 버려 두사’) 친히 찾아 오셔서(창 11:5, 7) 온 지면에 흩으시는 은혜의 역사는, 바로 뒤이어 나타나는 동일한 지구랏 문화권 속에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어(창 11:10-12:1) 믿음의 조상을 삼으려고 은혜의 언약을 주시는(창 12:2-3)것으로 그 절정을 보게 하고 있다. 따라서 최소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래, 그의 조카 롯이 이 지구랏 문화권 속에서의 특별은혜의 첫 혜택자들로서 창 12장 이후의 모든 참된 신전 의식과 하나님 은혜에 대한 생생한 이해를 대조적으로 가졌으리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88) 이 은혜의 원리는 이삭과, 특별히 후론할 야곱의 세대로 계속 전승되면서 지구랏 문화권과의 혈연적 접촉 가운데서 체득되었던 것이다. 로마서 8:19-22은 비 인간계 피조물들이 다 함께 탄식하며 고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남으로 썩어짐의 종노릇으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한다고 말씀한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야곱이 벧엘에서 보았던 층계의 지구랏이나, 아브라함과 그 권속이 떠나왔던 갈대아 우르 지역의 지구랏이 비중생한 문화와 종교의 산물로서, 우상의 형태로 사탄을 숭배했지만 동시에 참 구원의 십자가를 향해 탄식했던 피조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5. 십자가: 새로운 살길 5.1. 십자가: 지구랏의 해답 선민 이스라엘에게 경륜적 특별 은혜로 주셨던 성소를 중심한 구약 제사제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하늘 성소와 그 제사 제도를 기다렸던 모형과 그림자였다(히 8-9장).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랏을 중심한 제사제도의 모든 정죄와 탄식이 더욱 십자가 안에서 종식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 그 유일한 통로로서의 지구랏은 사실상 신들의 임재와 동행과 축복을 갈구하면서 뱀(즉 사탄)을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발로(發露)였다. 땅에 거하는 죄인의 편에서나, 하늘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참 하나님의 편에서나, 교통하는 다른 길이 없으며, 오직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육체를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으로 삼으셔서 그 육체(휘장)를 자원하여 찢으심으로(요 10:17-18; 눅 23:45),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여인의 후손이 되는 그 복음의 첫 약속(proto-evangelium, 창 3:15)을 다 이루시고, 참 하늘 지성소를 향한(히 9:24, 12:22-23)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신(히 10:19-20)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만 그 완전한 해답을 가지는 것이다. 비중생 문화로서의 지구랏을 중심한 모든 거짓 종교 행위 속에 나타났던 신 의식의 잔재는 마땅히 그 비평적 해답을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져야만 하며, 이 세대의 세속 문화종교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를 닮는 비평적 자세를 정진함으로(롬 12:2, 엡 2:2), 죄인의 구속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은 여전히 참 문화종교의 주인 되심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고대근동학 분야를 전공하는 중생한 학도들에게 요구되는 문화-복음전도적 사명으로 생각하는 바이다.89) 5.2.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믿은 야곱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신약 성도들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님으로 중생했으며, 또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4장(특별히 1-8절)은 모세의 율법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대표적 인물로서 유대인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이 사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그 이후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상적 통치자 다윗왕도 그러했다는 사실을 논증하므로 모든 구약의 성도들이 그러했다는 결론으로 유도한다.90)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씨’(ע, 3인칭 남성 단수; 창 3:15, 15:5)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간주해 주셨는데(창 15:6), 그 믿음은 사실상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는 믿음이었다(롬 4:18-21). 그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믿는(롬 4:17) 믿음이었다.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아내마저도 90세가 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기능이 죽은 것 같음을 알았으나, 아직 없는 아들의 이름을 태어난 아들 같이 이삭이라 불러 주시는(창 17:19) 그 하나님을 믿었고, 모리아 제단에 정작 죽이기로 작정하고 이삭과 단둘이 떠나면서도, “내가 아이와 함께 거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오리라”(창 22:5; הוּשׁ ...ה ...ה; 모두 1인칭 복수 청원형)고 하면서,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히 11:19) 믿었다. 아버지로서 독자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성부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 죽이시는 그 독자 예수님을 뵙고(창 22:14; ה והי, ‘여호와께서 보실 것이다’) 즐거워했음을 예수님께서 친히 증거 하셨다(요 8:56).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질 “그 씨”의 핵은 바로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우리를 살리시며(엡 2:1-5), 모태에서 조직도 되기 전에 각자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며 부르시고(시 139:16, 렘 1:5),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셔서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인 예수(וּשׁ, ‘구원’; 마 1:21; 빌 2:9) 우리 주님이 아닌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 그렇다면 야곱이 벧엘에서 실상 무엇을 보았는가? 단순히 그가 향해가고 있는 밧단아람의 하란이 가졌을 그 지구랏 문화권 아래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방신들의 사자들과 그 꼭대기에 거하는 이방신(들)이었겠는가? Lagaš의 통치자 Gudea처럼 꿈을 통해 어떤 계시를 받기 위한 인간편의 조작으로서, 어떤 제물이나 제사의 분위기에서 야곱도 잠을 청하고 있었는가(이것을 학적으로 ‘incubation’이라 함)?91) 야곱은 그 이름이 뜻하는 대로 장자 명문과 그 축복의 약탈에 대한 대가로서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중에 광야의 깊은 밤중에 던져져 있는 고독한 죄인이었다. 호세아 선지자가 재확인하는 대로(호 12:4)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그 씨”에 대한 은혜언약을 재확정하시는 약속의 그 하나님께서 야곱 생애에 처음으로 그를 찾아오시고 만나신 것이 아니었는가? 지구랏 문화권 속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지키며 떠나지 않으리라고 위로하시는(창 28:15) 그 하나님은 (지구랏) 층계 (꼭대기) 위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는 후사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신”(히 1:14),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마 18:10) 야곱의 생애의 야곱의 사자들이 아닌가(창 31:11-13; 32:24-30)? 이 모든 전적 은혜의 약속과 그 성취의 근거는 죄인 야곱을 향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과 교통하는 유일한 통로로서의 그 층계가 아니겠는가?
5.3. 요한복음 1:51의 성경신학적 의미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요한복음 1:51의 본문이 제외되었다면, 필자가 고찰해 왔던 창세기 28:12를 중심한 모든 관련된 본문과 해석의 분명한 근거는 완전히 상실될 것이다.92) 창세기 28:12의 완전 성취로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요 1:51의 성경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본문에 나타나는 “인자”란 단어는 요한복음에 13번 나타나는 그 첫 경우이며, 요한복음 1:51이 사실상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부분의 결론이기 때문에, 이 단순한 한 구절이 인자개념을 중심한 요한신학의 가장 난해한 본문으로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을 산출하고 있다. 필자는 창 28:12의 성취의 관점에서93) 예비적 고찰을 약술하고자 한다. 5.3.1. “하늘이 열려있고”(τὸν οὐρανὸν ἀνεῳγότα) “열려있고”(ἀνεῳγότα)는 동사 ἀνοίγω의 제2완료 능동 분사로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까지 그 상태로 지속됨을 보여준다. 이 동사가 닫혀 있었던 이전 상태를 전제하며, 열리는 기능의 일차적 대상이 문이기 때문에, 야곱이 고백한 “하늘의 문”(창 28:17)은 “하늘이 열려 있고”의 또 다른 표현법으로 이해된다. 하늘이란 단어가 성경에 656회 이상 나타나고 있는데,94) “열려 있고”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의 하늘은(창 1:1, 14:19, 22 등)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인데(신 26:5, 왕상 8:30 등), 죄가 세상에 쳐들어온 이후 본래 취해진 땅으로 되돌아가는 죄인인 모든 인생에게는(창 3:19, 시 115:16 등) 원리적으로 닫혀 있는 하늘이며(대하 6:26, 7:23 등),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신 30:12, 잠 30:4, 요 3:13). 둘째, 범죄한 아담을 즉각적으로 찾아오셨던 하나님께서(창 3:9),95)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하늘에서 내려오셔서(시 80:14, 사 63:15, 애 3:50 등) 말씀하시며(창 22;11, 출 20:22 등), 응답하시며(왕하 1:10-14, 대상 21:26 등) 자신을 계시하신 은혜의 하나님이셨다. 셋째, 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창세 이전에 원리적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되신 성자 안에서만 비로소 가능했는데(계 13:8, 5:6, 12 등), 이는 그 생명책에 기록된(예정된) 죄인들만 어린양 되신 성자 안에서 화목함을 얻고, 그 거룩한 하늘 처소로 용납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의 에녹이나(창 5:24) 엘리야가(왕하 2:11) 산 채로 열려 있는 하늘로 올라간 것은 신약 시대와 마찬가지로(마 3:16, 요 1:32, 행 2:2, 9:3, 10:11 등) 하늘이 열려 있는 산 증거인 것이다. 5.3.2. “인자 위에”(έπὶ τὸν υἱὸν τού ἀνθρώπου) 요한복음에 13회 나타나는 ‘인자’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 70회 나타나는 그 대조로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특별히 이 본문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서 방대한 연구 문헌을 낳고 있으므로 대단히 어려운 주제인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96) 이 단어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독점적으로 사용한 것으로(요 12:34, 행 7:56은 예외), 그 당시 메시야 칭호로 사용되던 “다윗의 아들”이나 “하나님의 아들”과 구별되는 “그”(항상 정관사 사용) “인자”로서, 다니엘 7:13의 “인자 같은 이”(kebar ʾenāš)와 이사야 42-61장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종”(הוהי ד)의 성취로서 예수님 자신이 만드신 용어이다. 김세윤은 그의「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자」개념에 대한 연구의 결론으로서, 예수님께서 “인자”란 단어를 사용하실 때는 “종말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사랑과 부요 속에 살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계시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요약하고 있다.97) 김 박사는 요한복음 1:51의 배후에 창세기 28:12과 사무엘하 7:12 이하의 탈굼 아람어 역본과 랍비 전통의 이해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98) 랍비 전통은 창세기 28:12의 “그 위에서”를 “야곱 위(곁)에서”로 보아 [본고 각주 7 참조], “야곱의 부친 집에서부터 동행했던 천사들이 영광의 보좌에 (새겨) 있는 것은 바로 야곱의 형상[ʾîqôn(în)]인 것을 하늘에 있는 동료들에게 알리고, 그 형상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아보도록 야곱에게 와보라고 청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동료들이 직접 보기를 원했어도 금지된 이유로 다시 여호와의 천사들이 내려와서 야곱은 보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야곱의 형상을 에스겔 1:26 이하에 나타나는 “보좌의 형상”에 연결하여 “merkabah”[(신의) 병거] 환상의 전통 속에 다니엘 7:13의 “인자 같은 이”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1:47-51은 마가복음 14:55-62과 병행하므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 왕” 개념이 그 본문 뒤에 계속되는 예수님의 “성전 말씀(temple-saying)”과 관련하여 사무엘하 7:12 이하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가 이러한 구약 본문의 관련 속에서 예수님의 인자 개념이 새 이스라엘의 “Stammvater(조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신약 본문의 이해를 구약 자체에서부터 그 이후의 해석사(특별히 예수님 당시에 존재한 랍비 전통을 강조하여) 사이에 어떤 단계로 관련지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점을 본다.99) 창세기 28:12의 문맥적 동시적 고찰에서 유도된 해석이 가장 선행된 것이므로, 지구랏의 층계와 관련된 인자 개념, 즉 최소한 천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서의 십자가와 관련된 인자 개념이 김 박사의 논고에서 제외된 것은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요한복음 1:51의 “인자”는 먼저 그 기원의 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요 3:13의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인자”(ὁ ἐκ τοῦ οὐράνοῦ καταβάς, ὁ υὶ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ὁ ὤν ἐν τῷ οὐρανῷ])란 표현은 선재(先在, pre-existence)하셨던 인자(요 1:1-14; 17:5)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성육하심으로 공간적 실체로서의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통로임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 1:51의 인자 “위에”(έπὶ)의 일차적 의미는 지주(支柱)나 기초를 이루는 어떤 것 위에(붙어 있는) 공간적 위치를 말하거니와,100) 인자에 “근거”해서만이(마 19:9의 동일 용법 참조) “열려 있는 하늘”과 이 땅 사이에 교통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육의 궁극적 목적은 성육의 기원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바, 요한복음 6:62는 “인자의 이전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τὸν υὶ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ἀναβαίνοντα ὅπου ἦν τὸ πρότερον)의 영화가 이 땅에 성육하신 때로부터 시작하여(요 12:23, 13:31) 계속된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서만 성취되기 때문에, “인자도 이와 같이 들려야만 하는”(οὕτως ὑψωθῆναι δεῖ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요 3:14, 8:28), 즉 영광스럽게 들려지며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할 것”(ἤμελλεν ἀποθνῄσκεν; 요 12:32-34)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1의 인자 개념에서 다른 공관복음서들도 보여 주고 있는 땅에 속한 비하(卑下, condescension)의 면을 제외시킨다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계기(moment)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승귀(昇貴, exaltation)로 복귀하시는 일련의 순환 과정을 단절시키는 잘못을 가져오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창세기 28:12의 지구랏의 “층계”가 어떻게 요한복음 1:51의 “인자”의 모형이 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의 해답도 천지를 연결하려는 동일한 방편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 방편은 사실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다는 관점에서 분명해지는 것이다. 민수기 21:9를 인용한 요한복음 3:14(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에서 예수님과 놋뱀이 동일시되는 것도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갈 3:13)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왜 지구랏을 결과적으로 십자가(위의 인자)의 모형으로 감히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필자의 기본적 이해이다. 5.3.3.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함"(τοὺς ἀγγέλους τού θεού ἀναβαίνοντας καὶ καταβαίνοντας) 신약에 170회 이상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자들”은 그 대부분이 “천사”를 가리키므로(165회 이상), 이 구절의 보다 광범위한 이해를 위하여서는 “하나님 사자” 내지 “천사”에 대한 자세한 고찰을 요한다[본 논고 각주 54 참조]. 본문이 밝히고 있는 것은 이들의 활동이 어디까지나 “인자 위에”, 즉 인자의 성육-십자가 수난-부활-승천의 과정에 나타나는 지상 생애의 구속 사업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혹자는 겟세마네 동산(눅 22:43), 부활하신 무덤(눅 24:4, 5, 마 28:6)과 감람산 승천(행 1:11) 시에 나타났던 천사들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오르락내리락”은 창 28:12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재 계속되고 있는 동작을 강조하는 현재 분사형인데 그 활동의 어떤 국면을 강조하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야곱의 경우는 하란으로 가고 오는 과정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는바, 인자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개인적인 필요와 보호에 대하여(히 1:14, 마 18:10, 창 24:7, 40, 출 14:19, 23:20, 행 5:19, 12:6-11 등) 섬기고 있는 상황을 포괄적으로 기술한 듯하다. 5.3.4. “너희들이 보리라”(ὄψεσθε) 본문 50절에서 나다나엘에게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ὄψῃ) 말씀하신 후, 곧 이어 나다나엘은 물론 그와 동일한 신앙 고백자(49절)들이 미래에 보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시간적 개념에서 정확히 어느 때를 예언하는가라는 문제에도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으나, 마가복음 14:55-62이 본문 47-51절과 병행한 입장에서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재림의 약속인 ‘망원적 예언’(telescoped prophecy)으로 이해될 수 있다.101) 왜냐하면 이 본문을 현재 접하고 있는 우리들까지라도 인자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102)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기이한 현상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결 론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지식 추구에 대한 궁극적 태도는 진리와 생명의 그 길 되시는(요 14:6)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이다(고전 2:2). 왜냐하면 참신자의 생활 속에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날마다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눅 9:23)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 신자가 언행으로 전파하는 것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요(고전 1: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기”(갈 6:14) 때문이다. 이 십자가의 의미는 John W. Peterson이 고백한 것처럼, “백만 년이 지나도 알 수 없네, 너와 나를 위해 죽은 십자가의 고통을(Never in a million years, if that could be; Could we know the reason why He suffered on the cross for you and me:)” 그대로이며, Isaac Watts의 표현대로 아무리 우리가 십자가를 연구하고 이해한들103)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on which the Prince of glory died,) 그저 개론(suvey) 정도이리라. 필자는 고대근동의 고고학적 문헌적 유산들이 어떻게 성경신학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긍정적 실례로서 창세기 28:12과 요한복음 1:51을 기초로 하여 지구랏과 십자가에 대해 개략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History is His Story)”라는 말 그대로(계 22:13) 인류 역사 어느 시대라도 비중생 문화종교의 모든 탄식들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종식되어야 하며, 또 그러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히 12:2) 그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벧전 1:8) 신앙 경주에 이 졸고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Sola Fide in Solo Chris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