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상 대설(大雪)이라면서도 눈은 커녕 올 겨울 들어 기온이 가장 높고 바람까지 없는 따뜻하고 포근한 날이다. 해서리 나 혼자서 모처럼 한국민속촌 걷기에 나섰는데...
한 시간여를 걷다 보니 전에 없이 발바닥이 아파 오는데, 아마도 엊그제 주인님이 사준 운동화를 신었던 게 문제였나보다. 하지만 신발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주인님 면전에 대고 입만 벙긋했다간 그 순간부터 냉수 한 그릇 얻어 먹을 수 없다는 걸 진작부터 알기에 절대 불만을 얘기하진 않는다. 그런 참에 그만 걷고 귀가하라는 주인님의 말씀에 언능 집으로 왔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저녁을 먹자 마자 잠이 스르르 오는 게, 안 되겠다 싶어 바로 내 방으로 올라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는데...어느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주인님이 옆에 들어와 슬며시 눕는다. 그리곤 함께 KBS 클래식 FM 라디오에서 전기현님이 진행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 프로그램을 듣는다.
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40여 년전부터 주인님과 함께 들어왔으니 역사가 꽤나 오래 되었구만그랴. 당시에는 프로그램 제목이 '세계의 유행음악'이었고 진행은 김자영 아나운서가 맡았었는데...전대협 두목으로 허구헌날 경찰에 쫓겨다녔던 애인(남편이었던가?) 김민석의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 없었을 터인데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김자영님의 고운 그 음성은 아직도 나의 귀에 생생한 듯 하지만...
그렇게 조강지처(糟糠之妻)와 같이 애인을 보살피면서 마침내 결혼까지 하고 애들까지 두었지만 그들은 결국 20여 년만에 갈라섰다는구만. 이혼의 이유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술지게미를 함께 먹으며 고생해 왔던 부인과 이별한다는 건 일찌기 우리들의 사전엔 없는 단어일지니...
문득 흑인 가수 그랜트(Earl Grant)가 부르는「The end」가 흘러 나온다. 감미로운 음악에 실어 사랑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주인님의 손을 꼬옥 잡아 본다.
강의 끝에 이르면 강물은 흐름을 멈추고
고속도로의 끝에 다다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지만
당신은 나만의 것, 우리의 사랑은 시간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니...
놀라운 사실 하나! 조금 전 주인님이 말씀을 옮겨 본다. 50대 초반의 우리 뒷집의 K여사님은 '세상의 모든 음악' 시그널이 흐르는 가운데 진행자 전기현님의 '오늘도 수고하신 당신을 위해 '세상의 모든 음악'은 다양한 음악으로 당신의 저녁을 채워 드립니다.' 라는 맨트를 들으면 눈시울이 더워진다고 말씀하셨단다. 장소와 세대를 뛰어넘는 장수 프로그램이란 건 확실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