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사약이 된 술
“글쎄요....... 내 판단으로는 수술이 별다른 효과가 없지 않을까 합니다. 오히려 수술했
다가 상태가 더 악화되는 수도 있습니다. 암이란 게 아주 묘하고 고약한 병이 돼서요.”
의사는 한마디. 한마디를 더디고 무겁게 말했다.
“선생님. 그래도 수술을 해봤으면 합니다. 본인이 원하고....... 저도.......”
얼굴 수척한 임채옥은 초조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에도 말에도 물기가 젖어있었다.
“아직 젊으니까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더 나빠지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앉음새를 고치며 임채옥을 주시했다.
“네.......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임채옥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지요. 날짜는 2~3일 뒤로 잡힐 겁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임채옥은 고개를 숙였다.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괴롭더라도 환자 앞에서는 눈물 보이지 마세요. 암이라는 걸 눈치 채면 병세가 갑자기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가 측은한 얼굴로 위로했다.
임채옥은 눈물을 삼키며 과장실을 나왔다. 아무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
나 완치가 아니라 요행을 바라며 마지막 방법으로 선택해야 하는 수술 앞에서 눈물을 감추려
는 의지는 허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임채옥은 남편의 병실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지나쳤다. 남편은 신경이 몹시 날카로
워져 있었다. 울어서 붉어진 눈을 보고 남편이 뭐라고 캐묻고 넘겨짚고 할지 모를 일이었
다. 남편은 그동안 앓아온 간경화가 더 악화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네 번째 입원
인 이번에 내려진 진단은 간암이었다. 그리고 남은 수명이 1년 정도라고 했다.
임채옥은 긴 복도의 끝에 가서 섰다. 복도의 끝. 더 나아갈 수 없는 거기가 불현듯 자신
이 처한 막다른 현실처럼 느껴졌다. 두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사의 예측대로 남편이 1
년을 산다 해도 삶의 벼랑은 바로 앞에 닥쳐와 있었다. 두 아이를 양쪽 손에 잡고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자신을 의식하며 눈을 감았다.
왜 처음부터 술상무 노릇을 막지 못했던 것인가.......
임채옥은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해 온 후회에 또 가슴을 쳤다. 남편은 남들보다 빠른 출세
를 꿈꾸고 있었고. 자신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술에 부대끼면서도 술상무
는 어느 회사나 있는 거라고 했고. 자신도 으레 그러려니 하며 남편의 출근만 늦지 않게 하
려고 부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오늘과 같은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앞을 막아섰다 하
더라도 남편은 술상무 노릇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임채옥은 눈을 훔치고 또 훔쳤다. 운 흔적을 지우며 새로 솟으려는 눈물을 목젖이 아프게
삼켰다. 병실을 너무 오래 비울 수도 없었다. 남편은 무슨 예감이라도 있는 것인지 자신의
병세와 병명에 대해 무언가 달라진 것이 없는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
다.
“왜 이렇게 늦었어?”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임채옥은 남편의 짜증스러운 말에 부딪쳤다.
“미안해요.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좀 다녀오느라구요.”
임채옥은 남편의 눈길을 피하며 얼른 둘러댔다.
“배탈? 배탈은 왜 나?”
그녀 남편은 신경 날카로운 환자답게 또 까탈을 부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근데 여보. 수술날짜는 2~3일 뒤로 잡기로 했어요.”
어쨌거나 남편을 감싸야 된다고 생각하며 임채옥은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랬어? 수술하면 완쾌된대지?”
그녀 남편의 목소리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났
다. 그러나 병색 짙은 얼굴은 홀쭉하게 마른데다 검푸르게 변색되어 있어서 그 웃음에서 밝
은 기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요. 사회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아무 걱정할 것 없대요.”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 병이 났을 때 수술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
“괜찮아요. 그땐 수술을 할 정도로 아프지 않았으니까요.”
“그랬었나? 좋아. 당장 수술해서 거뜬하게 일어나야지. 내 자리를 딴 놈들한테 뺏길 수
있나.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차지한 자린데. 이젠 그놈의 술상무 면하고 편하게 회전
의자 돌릴 일만 남았어.”
“그래요. 힘을 내세요.”
“근데 수술이 많이 아프겠지?”
“아니래요. 기술이 좋아져서 오래 걸리지도 않고 별로 아프지도 않대요.”
“그래. 의술이 많이 발달했으니까.”
“좀 자도록 하세요. 체력을 보강하려면 수술 전에 많이 자는 게 좋대요.”
“아. 그런가? 그렇지. 모든 병의 회복에는 숙면이 최고 약이라는 말이 있지. 그래. 많이
자둬야겠어.”
그녀의 남편은 몸을 편히 고르고는 눈을 감았다.
임채옥은 소리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이 듣기 좋도록
말을 꾸며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에 대한 남편의 집착은 조금도 퇴색해 있지 않았
다. 어쩌면 몸이 아픈 만큼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편의 안색은 너
무나 나빴다. 몸이 자꾸 말라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하루가 다르게 검푸르게 변해가고 있는
안색은 순간순간 절망을 느끼게 했다. 본래의 색깔을 찾기 어렵게 변하고 있는 그 얼굴색은
마치 상해가는 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만 했다. 얼마 전부터는 검푸른 색에서 푸른색
을 밀어내면서 검은 색이 점점 진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기운 없이 입을 벌린 채 남편이 잠들고 있었다. 임채옥은 눈물을 삼키며 가만가만 창가로
옮겨갔다. 멀찍하게 보이는 동산에 겨울이 가득했다. 잎이라고는 없이 가지들을 송두리째 드
러내고 있는 나무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있었다. 작은 새 서너 마리가 헐벗은 나무 가지들 사
이사이를 옮겨 날고 있었다. 임채옥은 가슴속으로 끼쳐오는 추위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
을 움츠렸다. 추위에 떨며 먹이를 찾고 있는 새들이 마치 자기 자신과 아이들처럼 여겨졌
다. 나무들은 알몸을 드러내고. 벌레들이 자취를 감춘 저 추운 동산에서 새들은 먹이 구하기
가 얼마나 어려울까....... 그녀는 두 아이 생각에 가슴이 시려 눈을 감았다.
막상 수술을 결정했지만 대수술의 수술비도 걱정이었다. 남편이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
던 지난 1년 동안 병수발로 저금통장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 전해부터 병원에 입원하는 일
이 잦아지면서 저금통장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휴직을 하면서 용하다는 의사와
약을 찾아 양. 한방을 가리지 않았다. 병을 빨리 낫게 하려는 조바심은 남편이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라서 용한 것을 쫓으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남편의 안색은 자
꾸 나빠지기만 했다.
임채옥은 돈을 급히 구할 수 있는 데를 생각해 보았다. 시아버지. 유일민. 정동진 사장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세군데 모두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어서
돈 이야기를 꺼낼 처지가 못 되었다. 가장 마음 편할 수 있는 친정은 너무나 머나먼 바다
저 편이었다.
남편과 사이가 나빠 평소에도 남과 다름없이 발길을 끊고 지냈던 시아버지를 찾아가는 것
은 면구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면 찾아갈 수도 있었다.
자식이 위급한데 아버지기 모르는 척 할리 없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재산은 많으면서 돈
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시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은 젊은 새 부인
에게 모든 경제권을 빼앗겨버린 시아버지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었다.
시아버지는 와이셔츠 공장을 하는 알부자였다. 돈에 눈 밝은 어머니가 골라낸 시집이었
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에 불화가 일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는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6개월이 못되어 새장가를 서두르고 나섰다. 그런데 장
남인 남편부터 시작해서 그 아래 네 자식들 모두가 아버지의 재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
는 새어머니가 될 여자가 다방 마담인데다가 턱없이 젊어서였다. 그러나 결혼문제를 두고 부
모의 반대가 소용없듯 시아버지에게도 자식들의 반대는 아무 효과도 나타내지 못했다. 시아
버지 재혼이 불러온 첫 번째 불화는 집안이 두 쪽으로 쪼개진 것이었다. 자식들은 새어머니
와 살기를 원하지 않았고. 새어머니도 그것을 트집 잡아 따로 살 기회를 잡고 나섰다. 시아
버지는 새 아내를 따라 새 집을 장만해 나가면서 자식들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런데 두 번째
로 닥친 불화는 시아버지와 자식들을 완전히 남남처럼 등 돌리게 만들었다. 시아버지가 재혼
을 하고 1년 남짓해서 와이셔츠공장의 운영권이 새어머니 친정 식구들 손으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분명 사장이었지만 그 아래 중요 직책은 새어머니 친정식구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서 시아버지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남편이 출세하려고 기를 썼던 것도 그 사태와 무관하지 않았다. 남편은 뒤늦게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공장에서 떠밀려 나오는 수모를 당했고.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
가 따지다가 새어머니한테 따귀를 맞는 봉변까지 당했다. 남편은 큰 회사에 취직해 경영을
제대로 익힌 다음 아버지의 사업을 키우려고 했던 계획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며칠이고 술
을 마셔댔다. 그러고 나서 결심한 것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빨리 출세하려는 것이었다.
유일민에게 연락을 하면 당장 돈을 가지고 달려올 거였다. 자신에게 도움을 받아서만이 아
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쪽에 마음을 쓰고 있었고. 플라스틱 제품들의 호경기를 따라 사업
이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일도 아니고 남편의 일로 차마 신세를 질 수가 없었다.
그건 서로 괴로운 일이고. 남편에게 죄 되는 짓이라 싶었다.
국회의원 한인곤까지 나서는 바람에 마지못해 아버지가 보내준 얼마간의 돈으로 사업을 다
시 일으킨 정동진 사장은 뜻밖에 작년에 찾아왔었다.
“내가 조그만 사업으로 자식들 키우는데 걱정 없이 됐어요. 그러니까 이젠 임 양이 준 돈
은 갚아야지요. 임 양이 아버지한테서 돈 오기 전에 급한 대로 쓰라며 임 양의 돈을 내놓았
을 때 난 참 감격했고. 부끄러웠어요. 그 돈으로 아내의 생명을 건졌으니 그건 돈이 아니
고....... 뭐라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 꼭 갚고 싶었어요. 몇 배로 갚고 싶었지만 받을 것
같지도 않고 해서....... 혹시 세상 살다가 무슨 급한 일 생기면 연락해요. 내가 입은 고마
움 다소나마 갚고 싶으니까.”
그러나 정동진 사장한테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그분에게 입힌 상처는 너
무 컸고. 자신이 도움을 청해 그분에게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것은 서로 괴로운 일이었
다. 그리고 자신의 구차한 모습이 자칫 아버지를 몰인정한 사람으로 오해하게 할 수도 있었
다. 정 사장과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말고 서로 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임채옥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살림이 군색스럽지 않게 자리 잡히고 남편 모르
게 자기네들 돈을 따로 챙기고 있는 몇몇 친구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행복을 조금씩 뽐내고 시샘해가며 부담 없이 수다를 떠는 사이였지 솔직하게 궁색함을 드러
내고 도움을 청할 처지가 못 되었다. 괜히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이쪽의 초라해진 꼴만 내보이
게 되기 십상이었다.
임채옥은 이튿날 집에 가서 패물들을 다 챙겼다. 그중에서 두 아이의 백일과 돌 때 받은
금반지들은 따로 골라 놓았다. 그것들마저 처분해 버리면 아이들의 인생을 팔아치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아이들에게 무슨 액운이 끼칠 것 같은 느낌을 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패물들을 처분해야 된다고 생각하자 서러움과 함께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그 하나하나에
삶의 의미가 새겨져 있었고. 그것들은 평생토록 간직하며 그 의미를 음미해야 할 행복의 상
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남편의 부모와 남편한테서 받은 것들을 남편
을 위해서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채옥은 보석상을 서너 군데나 들렀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보석상들은 이 트
집. 저 트집 잡아가며 값을 형편없이 깎아내렸다. 그녀는 보석상을 옮길 때마다 서러움이 자
꾸만 커져가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딴 것도 아니고 병원비에 쓰려는 거예요.”
임채옥은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며 목이 메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곧 쏟아져 내릴 것처
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수술비가 많이 들 텐데 어쩌지?”
수술하기 전날 밤 그녀의 남편이 검게 마른 얼굴을 찌푸리며 근심스럽게 말했다.
“아무걱정 말아요. 내가 다 준비해 뒀으니까. 당신은 힘내서 수술만 잘 받으면 돼요.”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만한 요령은 다 있어요. 놀랬죠?”
임채옥은 밝게 웃으며 명랑한 척 꾸몄다.
“그래.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 내가 꼭 병 나아서 당신 고생시킨 것 다 갚을게. 난 꼭 다
시 회사에 나갈 거야.”
그는 아내의 손을 움켜잡았다.
네 시간이 넘게 걸리리라던 수술은 두 시간이 못 되어 끝났다. 임채옥은 불길한 생각에 휘
둘리며 허둥지둥 담당 의사를 찾았다.
“죄송합니다.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나빴습니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어서 그냥 봉합을
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이렇게 건드려놓으면 암은 급속도로 퍼지게 마련입니다. 죄송합니다
만. 애초의 예상보다 더 빨리 일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임채옥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여보. 수술이 아주 잘됐대요. 이젠 아무 걱정 말고 회복이 잘되게 더 힘을 내세요.”
임채옥은 마취에서 깨어난 남편을 붙들고 기쁨이 넘치는 듯 말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야?”
수술의 통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그는 반색을 하고 있었다.
“큰오빠. 작은오빠께.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두 분 다 무고하시기를 부처님 앞에 빌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오랫동안 소식 전하지 못한 것 용서해 주세요. 수없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할 연유가 있었습니다.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어야 하는 출가의 길에 혹시 편지가 저의 마
음을 그릇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비구니계를 받고 부처님의 도량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한평생 살게 되었
습니다. 득도의 길은 앞으로 멀고멀지만. 이제 속세의 인연으로 마음 흔들리거나 흐려지는
일에서는 벗어나게 되어 소식을 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저의 마음이 불도로 바위처
럼 단단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제 겨우 법랍(法臘) 세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법
랍 나이 쉰을 넘긴 노스님들도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 진다고 합니다. 부처님 앞에 어
린애일 뿐인 저는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수없이 마음을 다졌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하
자 벌써 가슴이 뛰고 눈물이 앞을 가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오빠들에 대한 그
리움과 서러움이 절 옆의 사철 마르지 않는 계곡물처럼 가슴 한복판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오빠들께 출가의 뜻을 미리 밝히지 않고 집을 떠나왔던 것이 지금까지 죄로 남아 있습니
다.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때 이유를 말씀드렸더라면 집을 떠나지 못했을 거라
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빠들이 순순히 저를 보내주셨겠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이 너무나 무섭고 싫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는데. 그런
아버지 때문에 아무 죄도 잘못도 없는 어머니와 큰오빠가 경찰서로 끌려 다니며 끝도 없이
당하고. 또 큰오빠 작은오빠가 사회생활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세상이 너무 무섭고 싫
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경찰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내려오면 어찌되겠습니까. 경찰
이 시키는 대로 신고를 해야 하나요? 안 그러면 감춰 드려야 하나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
면 가슴이 벌떡거리고 숨이 막히려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내려오는 꿈을 수도 없이 많이 꾸었습니다. 그리고 신고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안절부절 못하다가 놀라 잠이 깨고는 했습니다. 정말로 아버지가 내
려오셨다면 제가 어떻게 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신고를 안 하면 우리식구들 모두가 그것
(무서워서 그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으로 몰리게 되고....... 신고를 하게 되면 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되고....... 저는 그런 험하고 무서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저는 세상이 더욱 무섭고 싫어져 저도 어머니 따라 죽을 생각
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나 어머니한테 혼날 것도 같고. 죽는다는 것이 무섭기도 했어요. 더
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죽어야 한다는 그 일이 무서웠던 거예요. 마음은 환한데 글로 쓰려
고 하니까 글 쓰는 게 서툴러 생각대로 잘 써지지를 않는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머니
가 돌아가셔서 괴로운 오빠들한테 또 괴로움을 남기는 일이라 쉽게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들은 저더러 결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처지에 있는 여자들은 시집
을 가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빠들한테는 전혀 얘기를 안 했는데. 아주 불행하
게 된 여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우리 동네에 우리하고 똑같은 처지인 여자가 시집식구들한
테 구박이란 구박은 다 받아가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 때문에 시집식구들까지 피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죄인처럼 사는 그 여자가 너무나 가엾고 불
쌍했고. 저도 시집을 가면 그 여자 같은 신세가 될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찾아낸 것이 출가의 길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가끔 절에 갔었
던 것이 인연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절들이 대개 깊은 산중에 있다는 것도 저를 안
심시켰습니다. 무서운 세상을 떠나 숨어버리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데가 없었으니까요. 그러
나 지금까지도 오빠들을 버리고 저 혼자서만 도망쳤다는 죄스러운 마음을 씻을 길이 없습니
다.
삭발한 몸으로 날마다 거듭거듭 생각해 보아도 인생사는 정녕 무상입니다. 허망하고. 허망
하고 또 허망한 것이 인생 만사고. 수억 겁의 세월 속에서 티끌 아닌 것이 없는 게 인생 잡
사들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무서운 세상을 만들어가며 악업을
짓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어리석기가 짐승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일입니다.
저와 같은 사연을 지닌 비구(남자 승려)객승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헌 바랑에 누더기
승복을 입고 절을 찾아 끝없이 떠돌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쯤 바람인 듯 우리 절을 스쳐 지나
갑니다. 그분은 때가 되면 공양 한 끼를. 때가 아니면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아무 말도 없
이 절에서 사라집니다. 그분이 문득 큰오빠 같기도 하고 작은오빠 같기도 해 그 모습이 사라
질 때까지 지켜보고는 합니다. 인생이 무상하다고 하면서도 한 남자가 잘못된 세상사로 바
람 같은 객승이 되어 한평생을 떠도는 모습은 서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 마음
으로 번뇌를 키우고 있으니 저는 아직도 설되었고 득도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큰오빠는 결혼을 하셨는지요. 작은오빠는 아이를 보셨는지요. 새언니와 함께 모두 건강하
시기를 부처님 앞에 늘 축원 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그간에 또 궂은일은 당하지 않으셨는지
요.
처음 드리는 소식이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다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생활의 정
진을 소홀히 하지 않고 틈을 내서 편지를 쓰다 보니 며칠이 걸렸습니다. 혹시나 걸음하실까
저어하여 거처를 밝히지 않으니 용서하시고 이해하여 주십시오. 저의 마음이 더 단단해진 어
느 날 조용히 찾아뵙겠습니다.
집안 두루 평안하시기를 빌며 안녕히 계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연화(蓮花)합장”
유일표는 속으로 ‘선희야.......’ 하고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연화라는 한자에서 눈
을 떼지 못했다. 그 생소한 이름은 여동생의 모습과 겹치면서 자꾸 흐려지려 하고 있었다.
“이만하기 참 다행이다.”
유일민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유일표는 편지를 놓고 담뱃갑을 꺼내며. “얘가 생각보다 지독해. 어디
있는지는 알려야지” 하는 그의 목소리도 축축했다.
“그래. 보통 맘으로야 그런 길을 갈 수나 있었겠냐. 일단 무사한 걸 알았으니 기다리기
로 하자.”
유일민이 한숨을 쉬며 평소에 피우지 않는 담배를 빼들었다.
“차암........ 가끔 여승들을 보면서 어떤 여자들이 여승이 되나 했더니.......”
유일표는 성냥을 켜서 형의 담배 끝에 대며 한숨을 쉬었다.
“안쓰럽고 괴롭기는 하지만....... 어쩌면 잘되었는지도 모른다. 제 말마따나 시집가서
그런 고통 받고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어떻게 보면 선희가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그렇기도 하지. 괜히 시집가서 구박당하고 살면 지옥이 따로 없을 테니까. 우리가
해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유일표의 아내 서경혜가 밥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편지 저도 읽어봐도 되지요?”
서경혜가 자리 잡고 앉으며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따가 읽어봐.”
유일표가 편지를 아내에게 넘겨주었다.
“어서 식사들 하세요. 저는 속독이니까 금방 읽고 밥 먹을게요. 궁금해서 밥 먹은 다음까
지 못 참아요.”
서경혜는 밥상에서 몸을 좀 틀어돌렸다.
“사람 성질하고는.......”
유일표는 아내에게 눈 흘김을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아. 네가 읽어보라고 했던 『전환시대의 논리』저자 있잖냐?”
유일민이 국을 뜨며 이야깃거리를 바꾸었다.
“응 리영희 씨.”
“그분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모양인데. 사실이냐?”
“응. 한달이 좀 넘은 것 같은데.”
“『전환시대의 논리』때문이냐?”
“아니. 새 저서 『8억 인과의 대화』때문이야. 그 내용 일부를 문제 삼은 모양이야 근데.
형이 어떻게 그런 걸 나한테 묻지?”
“글쎄. 그것도 사업이라고 벌이고 있으니까 점점 더 신문 읽을 시간도 없어지고 그런
다.”
“그거 참 잘됐네. 사업 잘되어 가니 좋고. 읽을거리 없이 시시껄렁한 신문들 안 읽어 눈
보호하니까 좋고.”
“그래. 신문들이 갈수록 특색 없이 똑같아지는 게 문젠 문제다. 히틀러시대에 그랬다던
데. 그나저나 그 『8억 인과의 대화』를 빨리 사서 읽어봐야 되겠구나. 8억 인이라면 중공
에 관한 얘기겠지?”
“형. 참 순진하긴. 저자를 구속한지 한달이 넘었는데 그 책이 지금까지 서점에 있겠어?
이 친구들이 그런 일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도록 속전속결이잖아.”
“아. 그렇구나. 그게 무슨 내용인데 구속까지 되지? 너 혹시 읽었냐?”
“응 나도 구속 발표를 보고나서 집사람이 구해 와서 읽었는데. 대목 대목이 얼마든지 트
집잡힐 만해.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문화혁명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거든.”
“문화혁명.......? 이런 상황에서 그 문제를 다루는 책을 내다니. 리영희 그분 참 대단하
구나. 난『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면서도 아슬아슬하고 위험하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
다. 그런데 결국 구속이 됐으니.......”
“형 말이 맞어. 그때부터 노리고 있었던 거지. 어쨌든『전환시대의 논리』는 대단한 책이
야. 책이 지식을 주고. 스승 노릇을 한다는 거야 상식이지만 사람의 의식을 그렇게 바꾸는
힘을 발휘한다는 건 처음 느낀 체험이었어.”
“그래. 우리의 왜곡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아가씨도 참 야속하네요. 어느 절인지나 좀 밝힐 일이지.”
서경혜가 편지를 접으며 물기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젠 아가씨가 아니야. 연화 스님이지. 승려든 수녀든 목사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모
든 성직자들에 대해선 ‘님’ 자를 붙여 존칭하는 것 알지? 선희가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었
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여동생 하나 잃은 거야. 언젠가 머리 깎은 선희를 보게 될 것도 걱정
이지만. 선희를 보고 연화 스님이라고 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큰 걱정이야.”
유일표의 얼굴에 서글프고 허전한 웃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참 기막혀요.......”
서경혜가 눈을 훔쳤다.
“괜찮아요. 상처받으며 사는 것보다는 선희가 잘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승려로 좋은 일하
면서 살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고요. 우리 다같이 선희의 뜻을 따라 감정을 정리하도록 합
시다. 그래야 선희도 마음 편해질 테니까요.”
유일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현명한 방법이지 뭐. 자아. 당신도 그만 밥 먹어.”
유일표는 아내를 끌어당겼다.
“내가 한 가지 의논할 게 있는데 말이다. 사업상 일본에 좀 갔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
해?”
유일민은 분위를 바꾸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일보온.......?”
형을 쳐다보는 유일표의 눈에는 ‘시원조회는 어쩌고?’하는 말이 담겨 있었다.
“응. 한 2~3년 전부터는 사업상 외국에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규제가 풀렸어. 딸라는 많
이 벌어들여야 하고. 규제당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고 하니까 도리 없이 완화를 시킨 거
지.”
“참. 엿장사 맘대로라니까. 형은 왜 일본에 가야 하는데?”
“응. 기계 때문이야. 플라스틱 산업이 본격화되는데 언제까지 하청 업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고 새로운 상품들을 개발해 일반 시장을 상대해야만 사업이 도약할 수 있는데. 그러
자면 새 기계들이 필요하단 말야. 국내서 구입하면 기계 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기계도 한정
되어 있어. 일본에 가서 다양한 기계들을 직접 살펴보고. 그쪽 플라스틱 시장도 돌아보면 여
러모로 도움이 클 거야.”
“그 말 다 일리가 있는데....... 그렇지만 난 형이 일본에 가는 건 반대야. 아니. 그냥
반대가 아니라 절대 반대야.”
유일표는 고개까지 내저으며 완강하게 말했다.
“아니 여보.......”
서경혜는 민망해 하는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며 다리를 질벅였다.
“절대 반대?”
유일민은 의아스럽게 동생을 쳐다보았다.
“형이 일본에 가는 건 위험천만이야. 사업상 이익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는데. 잘못하다
간 사업 다 거덜 나고 인생까지 망가질 수도 있어. 형. 그때 당한일 잊어버렸어? 일본에서
왔다는 사람이 연락한 사건 말야. 그리고 요 몇 년 사이에 일본을 왕래한 사람들과 조총련
이 얽힌 사건들이 부쩍 많이 터지고 있는 것도 보고 있지? 형이 일본에 갔다하면 그 올가미
에 얼마든지 걸려들 수 있어. 형은 사업상 일만 보고 왔는데. 잡아다가 조총련과 내통했다
고 얽어대면 어떻게 할 거야? 특히 일본 쪽 사건에 조작이 많다는 소문 듣고 있어? 빌미를
줘선 안 돼.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구. 값이 비싸더라도 기계를 그냥 여기서 사. 플라스틱
산업의 전망이 무한하다는 말 나도 얼핏얼핏 듣고 있는데. 사업 크게 할 욕심도 내지 말어.
플라스틱 제품 찍어내서 어차피 재벌 되긴 틀린 거고. 좀 적게 벌더라도 더는 당하지 않게
철저하게 방어하면서 살아야 돼. 이 시점에서 조총련과 엮어져 당해봐. 어떻게 되겠어? 이
정권이 갈수록 궁지에 몰리면서 탈출구로 삼는 건 반공이고 간첩 사건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
들은 다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난 절대 반대야.”
유일표의 말은 뒤로 갈수록 흥분기를 띠며 빨라졌다.
“그래요. 말 듣고 보니 그러네요. 아주버님. 가시지 마세요.”
서경혜가 두려운 얼굴로 유일민을 쳐다보았다.
“그래요. 나도 무언가 께름칙해서 얘기를 꺼냈던 것인데........ 둘 다 생각이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게 좋겠지요.”
유일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위험은 미리미리 피하는 게 좋지요. 세상이 갈수록 무시무시해지고 있으니까요.
요샌 택시에서도 맘놓고 말을 못한다는 소문이잖아요. 박 통에 대해 욕을 하거나 정부를 비
판하다가 그대로 남산으로 실려 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험하고 살벌한
세상에서는 꼬투리 잡힐 일은 아예 안하는 게 상책이지요. 왕복 비행기 요금. 호텔비. 식비
같은 경비를 다 계산하면 기계를 여기서 사나 별 차이도 안 날 거예요.”
서경혜는 시아주버니를 위로하듯 말했다.
“예. 일본 구경하는 게 덤이라는 말도 있어요. 일본 구경할 생각 별로 없으니 딱 안가기
로 결정을 내리지요.” 유일민은 계수를 안심시키는 듯 웃음을 짓고는. “오나가나 그 소문
이 부쩍 심해지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인심 잃어 언제까지 가려고 이러나 원. 딱한 노릇이
야.” 그는 밥상에서 물러나 앉으며 중얼거렸다.
“한마디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공포 정치지 뭐. 갈 데까지 다
간 독재의 말기현상이니까 그러다가 종말을 고할 때가 오겠지.”
“아이고. 당신도 말조심해요. 거기가 코앞인 데서 살면서.”
서경혜가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염려 마셔. 난 택시 탈 돈 없는 몸이니까.”
유일표는 담배를 빼들었다.
유일민은 며칠동안 기계판매 상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팸플릿은 구할
수 없었다. 기계들을 선전하는 팸플릿에서 일본회사의 주소를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일
본 회사에 직접 연락하면 일본에 가지 않고도 기계를 구입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싶어
서였다.
유일민은 며칠을 망설이며 보내다가 대진의 심동환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종합상사 대진
을 통하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싶었다.
대진의 새로 지은 사옥 앞에서 유일민은 다시금 기가 질리고 잔뜩 위축되고 말았다. 전에
썼던 사옥도 예상보다 훨씬 크고 좋은 건물이었는데 새 사옥은 그보다 몇 배 엄청나고 멋 부
린 건물이었다. 몇 년 사이에 대진은 이름 그대로 또다시 대 약진을 이룩한 것이었다. 돈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놓은 것 같은 그 위압적인 새 사옥은 재계의 새 별로 꼽히는 손진권의 존
재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증거물이었다. 회충 한 마리에 1달러씩 수출을 하던 손진권 사
장이 불과 10년 동안에 이렇게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도 없었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마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 같은 그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이런저런 말들이 따라다
니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철저하게 봐주고 있다느니. 남달리 은행 특혜를 누리고 있
다느니. 8.3조치의 최대 수혜자라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사실. 그다지 오래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손진권은 무슨 묘술을 지닌 탁월한 인간이 아니
었다. 그의 장점을 꼽자면 일류대학을 나온 머리와 의욕. 그리고 부지런함이었다. 그러나 그
는 사업가로서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단 10년 동안에 나이
든 세대들이 형성하고 있는 재벌 대열에 거침없이 끼여든 것이었다. 역시 위대한 것은 권력
의 힘이었다. 권력의 힘을 잘 이용한 손진권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업가라기보다는 정치인이
었다. 자신의 신원조회에 문제가 생기자 지체 없이 내친 것도 손진권이 발휘한 예민한 정치
감각이었다.
유일민은 그런 생각들을 지우며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았다. 수시로 공장에 드나들기 편
하도록 입은 점퍼 차림은 자신의 눈으로 보아도 구지레하고 궁상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대진
의 새 사옥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은 거의가 매끈매끈한 양복 차림이었다. 그 사람들에 비
하면 자신은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손진권 사장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듯 그 우람한 사옥도 거부의 손을 내밀고 있었다.
회사가 이렇게 커졌으면 상무였던 심동환은 얼마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 있을지 모를 일이
었다. 높은 자리에서 거액의 일만 처리할 그가 자신의 부탁을 귀찮아하지 달가워할 것 같지
가 않았다. 그때 찾아갔을 때도 반기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제 세월도 더 흘렀고.
회사도 엄청나게 변모해 있었다. 그와 자신은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딴 세상에 살고 있었
다. 대학 동문이라는 것도 인간관계를 이어주거나 인연이 될 수가 없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나 사회적으로나 귀족이 되어 있었고. 자신은 천민이었다.
유일민은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를 생각하며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더 이상 개발독재에 순응해선 안 돼. 정치와 경제가 결탁해서 전체 민중들을 갈취하는
이런 구조는 하루빨리 부셔야 돼. 신흥 재벌들이 생겨나는 걸 경제 기적이라고 떠들어대는
데 그거야말로 고등사기 선전술이야. 그건 권력의 비호와 노동자 착취가 얼마나 극심하게 이
루어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야. 세계 어느 나라에도 단 몇 년 사이에 신
흥 재벌들이 생겨나는 일이란 없어. 지금부터 노동자들을 조직화해서 개발독재의 구조를 깨
고. 노동자의 몫을 제대로 찾아야 할 때야.”
동생 일표의 말이 쟁쟁히 울려왔다.
유일민은 길을 건너다가 섬찟 놀랐다. 저쪽 길로 승려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승
려가 여동생일 리 없는데도 가슴이 뛰었다. 선희의 저런 모습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
지.......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일표의 일도 걱정이었다. 일표가 재건대에서 불쌍한 아이들
을 가르치고. 취직시키고 하다보니 자연히 노동문제에 관심을 쓰게 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도 분명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였
다. 그러나 일표가 노동운동에 나선다는 것은 참 난처한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정권에 대
한 정면 도전이었고. 정권에서는 노동운동을 사상불온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일표는 너무나
위험한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표 스스로 그 위험을 모를 리 없는데. 어떻게 그 길로 가
는 것을 막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4.19때 데모를 못하게 하려고 무작정 찾아 나섰던 방
식으로는 통하지 않을 거였다.
일표야. 우리 없는 것처럼 살자. 나를 일본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을 보면 너도 세상의 위험
을 환히 꿰뚫고 있는데. 네 앞에 놓인 위험도 좀 피해 서라. 네가 하는 일이 올바른 일인 줄
은 안다만. 딴사람이 하는 것 하고는 다르니까.
유일민은 대진의 신사옥을 멀리 바라보며 버스를 탔다.
며칠 동안 생각한 끝에 유일민은 플라스틱으로 생활용품을 개발하고 싶은 욕심을 일단 보
류했다. 일본에 가고 싶었던 것은 기계 구입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살펴보고 싶었
던 것이다. 이미 물통. 바가지. 장바구니. 조리까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양철과 나무.
대 제품들을 시장에서 몰아내고 있었다. 전국적인 그 시장은 엄청났고. 플라스틱으로 대체
할 수 있는 생활용품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시장이 넓은 만큼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자본이 필요했다. 그리고 유통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도매상들의 부도 위험도 부담
이었다. 그런 어려움들을 쉽게 피하려면 제품이 남다르게 특이해야 했다. 색다른 상품으로
인기를 끌게 되면 도매상에서 절반이라도 현찰을 받게 되고 그러면 자본의 부족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보다 플라스틱 활용이 훨씬 앞서있는 일본 시장을 둘러볼 수 없는 처
지이니 새 사업 구상은 헛꿈이 된 셈이었다.
유일민은 습관처럼 체념을 했지만 우울한 마음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사업 범위를 넓혀
보고 싶은 것은 하루이틀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삶의 새로운 의욕이었다. 플라스틱
제품들에 파묻혀 지낸 것도 어느덧 5년째였다. 2년이 지나면서 어음을 할인해서 쓰지 않아
도 될 만큼 숨통이 트였다. 어음 할인으로 없어지던 이자가 이익으로 남게 되자 돈이 모아지
기 시작했다. 원료 구입도 현찰로 하면서 어음 기간만큼의 이자를 깎으니 그 돈은 그대로 이
익으로 돌아왔다. ‘돈은 쓰지 않는 것이 모으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철칙으로 지켰
다. 말의 효과는 스스로 놀랄 만큼 컸다. 2년 동안 저금만 하고 축내지 않은 돈은 새 사업
을 꿈꾸게 할 정도로 많았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이 형용
할 수 없이 기쁘고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 떳떳했다.
플라스틱 시장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 제품 개발만 앞서면 큰 회사로 키울 수 있다!
이런 자신감으로 가슴의 떨림을 느꼈다. 그리고 손진권 사장의 대진에서 생각했던 기대가
또 떠올랐다. 많은 돈이 나를 보호할 수도 있다....... 이 기대가 새 사업 구상을 더욱 자극
했다.
유일민은 납품업체에서 수금을 해가지고 돌아오자 경리 아가씨가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분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 빨리 좀 연락해 주십사고요.”
쪽지에는 임채옥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유일민은 곧바로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임채옥씨 부탁합니다.”
“오빠. 저에요.”
자신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듣는 것에 유일민은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응. 전화했다면서.”
“오빠. 저 좀 빨리 만났으면 해서요.”
“왜. 무슨 일 있어?”
유일민은 임채옥의 목소리에서 어떤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 뵙고 말씀드릴게요.”
“알았어. 어디로 나갈까?”
“바쁘진 않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나 곧 갈 테니까.”
점점 물기가 느껴지는 임채옥의 목소리에 유일민은 마음이 다급해지고 있었다.
공장을 나선 유일민은 평소에 멀리하는 택시를 잡아탔다. 왜 채옥이가 울먹이는 것 같은
지........ 여러 가지 불길한 생각이 엇갈리고 있었다. 채옥이는 여간해서는 속상하는 감정
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이 세상에 오빠만큼 억울하고 원통하고 속 터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채옥이가 더는 참기 어렵다는 듯 가끔 하는 말이었다. 그런 사람의 심중을 헤아
려 채옥이는 속상하는 일을 감추고 될 수 있으면 즐거운 이야기만 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
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기에.......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딱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유일민은 다방에 들어서며 금방 임채옥의 자리를 알아보았다. 임채옥은 창가 구석자리에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채옥이. 무슨 일이야?”
유일민은 의자에 앉으며 대뜸 이렇게 물었고.
“오빠. 저 좀 도와주세요.”
눈에 눈물이 크렁한 임채옥은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래. 뭘 어떻게 도와야지? 어서 말해 봐.”
“돈 좀 빌려주세요.”
“그래. 얼마나?”
“좀 많아요.”
“아무 걱정하지 마. 나 돈 모아 놓은 것 꽤 많으니까. 무슨 일이지?”
“오빠한텐 면목 없고 죄송한 일인데....... 남편이 위독해요.”
“아니. 왜? 그 간 때문인가?”
“네. 결국 간암 수술을 했어요. 20일쯤 전에요. 근데 의사의 말대로 날이 갈수록 급속도
로 나빠지고 있어요. 의사는 시한부라며 수술을 단념하라고 했고. 수술을 하는 경우 병세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고 했거든요. 남편은 자신의 병을 모르고 있어서 수술하기를 강하게 원
했구요. 의사는 앞으로 길어야 두 달 정도라고 하면서 그만 퇴원을 하라는 눈친데.......
그럴 수는 없어요. 환자 본인이 완치해서 병원을 나가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고. 저도 마지
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근데 병원비가 너무 비싸요. 그래서 아파트를 내놨는데. 그
게 팔릴 때까지만 돈을 좀 빌려주세요.”
“이거 참 큰일 났군. 아파트 내 놓을 것 없어. 빌려주긴 뭘 빌려줘.”
유일민은 지체 없이 말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은 임채옥의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빠한테 이런 말 안하려고 했었는데.......”
임채옥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런 소리하지 마. 내가 당장 가서 돈을 가져올 테니까.”
유일민은 곧 일어날 기세를 취했다.
“오빠. 커피나 드시고요. 모래까진 괜찮아요.”
유일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가씨를 손짓으로 불렀다. 임채옥은 또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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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6.03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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