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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용정촌과 서울
1장. 묘향산 북변의 묘
상현으로부터 소상하게 설명을 듣고 왔으므로 용정촌 최서희의 집을 찾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역두에서 짐꾼보고 물었을 때 서슴없이 방향을 손가락질해 보이며 이리저리 해서 가면 근방에서 제일 두드러진 새 기와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최부자네 집이라는 것이었다. "오나가나 최부자라," 변발한 청인 모습에 혜관의 눈을 쫓아가는데 입술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해가 지는구먼. 기화야 가자." "네."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터이지만 용정촌 역두에서부터 최서희의 콧김이 세다는 것을 혜관과 기화는 실감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비대해지면서 생긴 버릇인데 땅바닥을 지신지신 짓누르듯 걸어가는 혜관 뒤를 여행 가방을 든 기화가 계집아이처럼 조르르 따라간다. 회령 여관에서 당목치마는 벗어버리고 법단 남치마에 옥색 주의로 갈아입고 미색 비단 목도리를 목에 감은 기화는 서울서도 다방골 일류 기생의 면모가 약여하건만 그의 걸음걸이는 혜관의 법의자락이라도 거머잡아야 온전할 것처럼 불안해 보인다. 그리운 사람을,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면 훈훈한 열기에 싸였어야 했을 것을 기화는 오소소 떨며 한기를 느끼듯 마음이 추운 것이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것이다. 하긴 만주 땅 벌판을 불어젖히는 바람은 아직 매웠고 건너온 두만강 나룻배에 몸을 실은 고향 잃은 백성들 모습은 황량했었다. 기화의 화사한 봄 의상도 이곳 풍토에선 너무 일렀었고, "기화야." "네." "아무래도 저것들이 반중인갑다." "반중이라뇨?" "머릴 반만 깎지 아니 했느냐?" 기화는 끼루룩 웃는다. 혜관은 변발의 청인들이 신기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치다. "그는 그렇고, 이 큰길에서 꺾이면은... 여보시오 행인, 길 좀 물읍시다." 우렁우렁 울려펴지는 혜관 목소리에 앞서 가던 사내가 돌아본다. 얼굴이 거무튀튀한 응칠이다. "뉘기 말입매까?" "댁이오." 혜관은 턱을 주억거렸다. "어째 그러십매까?" 응칠의 거무튀튀한 얼굴에 빨끈거리는 기색이 있다. 혜관의 태도가 너무 거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응칠이는 기화에게 곁눈질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오면서 얘기는 들었지만 되놈의 땅이라, 뭐 그는 그렇고 경상도서 온 최참판네,"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이, 댁은 뉘기시오?" 응칠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보다시피 응, 이쪽은 중이고 저쪽은 꽃다운 여인네, 그러니까 고향땅에서 온 사람인데 댕그마니 높이 솟았다는 새 기와집 알거든 가르쳐주오." "그리하옵꼬망. 날 따라오시기요." 응칠이는 여태껏 고향땅에서 주인댁을 찾아온 손님을 본 적이 없어 허둥지둥 머리에 올려놓은 털모자를 고쳐쓰며 걷는다. 털모자는 러시아 제품으로 썩 훌륭했다. 얼마 전 상전 혼인날 썼던 신품이다. "스님." "왜 그래." "어째 겁이 나네요." "되놈의 채갈까봐서?" "스님도, 차암." "좋이 뭘 그래. 되놈들은 여편네 세숫물까지 떠다 바친다더구나. 하하핫." 응칠이 핼끔 돌아본다. '무시기, 무실 하능 안깐이지비? 되세 잘으 생겠궁.' "스님이 그러심 시주 못 받으셔요." "중도 사람이니라. 오장육부 한푼 다를 것 없네." 응칠이 얼른 맞장구를 치며 나선다. "옛꼬망, 그렇습매." "..." "여기 운흥사 중도 남으 안깐하고서리 정으 통하잲앴슴? 그렁이 길이 좁다아 쨏겨났지비." "대체 안깐이 뭐요?" 혜관이 묻는다. "여자라는 말입매다." "흐응, 여자랑 정을 통하고 쫓겨났다아?" "옛꼬망, 그 중 땜서리 집안이 콩가리 됐잲앴슴? 용정서 천하절색으로 잘으 생겐 안깐이 무시레 그 따위 중하고서리 눈 맞았답매. 여자 맴으 무시라 했슴..., 모르겠슴둥." 응칠이는 서희의 경우도 그렇거니와 날로 변모되어가는 송애를 두고서도 그저 여자라면 모르겠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러면은 이곳에도 절이 있다 그 말인데," "그렇습매. 절이 있소꼬망. 친일파들이 설동으 해서리 지은 절이니끼, 부처도 친일파, 무시기, 그 이용구라? 그자가 부처님으 보내주었잲앴슴? 그렁이 중놈도," 하다 말고 응칠이는 아차 싶었던지 입을 다물고 우물쭈물 털모자를 고쳐쓴다. 혜관이 "중놈치고 친일파 아닌 놈이 없지." "어째 그리 스님은 어깃장만 놓으셔요?" 응칠이는 또 다시 기화를 핼끔하니 돌아본다. '집난이 같쟁쿠, 취화루 난관보다 월등으 미인으로 생겠슴.' "헌데 친일파 이용구라면 일진회 그자일 터인데 하눌님을 앞가림하고 나선 그자가 불상을?" 혜관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제 다 왔습매다. 여기 기다리고 계시오다." 응칠이는 두 사람을 대문 밖에 세워놓고 급히 집안으로 들어간다. "오나가나 최부자라." 혜관은 집 둘레를 살펴보며 아까 역두에서 한 말을 되풀이한다. "스님." "왜 또 겁이 나나?" "네, 어쩐지." "겁이 나기는 뭐가 겁이 나아." 두 번씩이나 겁난다는 말을 토로하는 기화 심정을 혜관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 낯선 땅처럼 사람들도 그렇게 날 대하잖겠어요?" "그런 생각이 든다면은 따라오긴 왜 따라와." 사람들이라 했으나 서희와 길상을 두고 한 말인 것도 혜관은 알고 있다. "안 그렇다 장담할 순 없지. 되놈의 땅에 와서 이만큼이나 재물을 모았다면 더 말할 나위 없지. 독사같이 모질지 않고서야." "그건 스님이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 애기씬 맨주먹으로 오신 게 아니 아니어어요. 다 이리 될 만큼," 하는데 응칠이 달려나왔다. "들어오시라 하옵꼬망." 별채처럼 된 곳으로 안내되어 간다. 뒤꼍에서 새침이와 달애어망이 쑤군쑤군 귀엣말을 하곤 한다. 문전에서부터 안내되어 가는데도 시종 손님 대접이다. 손님임엔 틀림이 없었지만. "오고 보니 이집에 사는 사람인가본데 왜 아무말 안 했을꼬?" "묻지 않는 말으 무시가 자청해 할 수 있겠슴둥?" 지신지신 걸어가며 혜관이 묻고 응칠이 대꾸한다. 그들 뒤를 따라가는 기화는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여전히 떨려오고 때론 머릿속이 화끈 달아올라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기도 하다. 오목한 뒤뜰이 있는 별채의 사랑 비슷해 보이는 방은 사람이 거처한 흔적이 없는데 훈훈하고 따스했다. 한참을 기다렸건만 바깥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혜관과 기화는 무서운 침묵으로 빠져들어간다. 이 때 서희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활자 하나하나는 선명하게 눈에 보였지만 뜻은 모른 채 다른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응칠이가 사십 넘어 뵈는 중과 이십 안팎의 어여쁜 여자가 경상도에서 찾아왔다 했을 때 서희는 혜관과 봉순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직감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성명도 알아보지 않고 거래를 올리는 응칠의 실수를 나무랄 겨를이 없었다. 실상은 직감이 강렬했다기보다 한순간 감정이 강렬했었다 하는게 옳을 성싶다. 엉겁결에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읽던 신문을 들여다본 채 생각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 할 수는 없다. 봉순아! 하고. '내가 이만 일로 마음이 약해져? 봉순이가 누구야? 내 곁에서 시중들던 아이 아니냐?'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서희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확고부동한 권위 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봉순이... 하인하고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거는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야. 이곳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나를 바라본다. 고향 사람들은 힐난의 표정으로 내 얼굴을 외면한다. 모두들 나를 격하하여 들고 있다. 봉순이 그 아이는 더욱더 그러하겠구나. 최참판네 가문이 시궁창에 던져졌다 생각할 게 아니냐? 시녀였던 그 아이가 사모하던 하인이 지금은 내 남편이야.' 서희는 웃는다. '그도 내 편에서 애걸복걸한 혼인이라면? 모멸의 뭇시선 속에서 그러나 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게야. 나는 손상당하지 않어! 최참판 가문은 손상되지 않는단 말이야! 알겠느냐? 나는 지키는 게야. 최서희의 권위를. 최참판 가문의 권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게야. 영광도 재물도,' 권위 의식의 뿌리는 깊게 아주 깊은 곳으로 뻗어만 가는데 그러나 서희는 날이면 날마다 깊은 뿌리를 썰어대는 톱질소리를 듣는다. '필경엔 종놈 계집이 될 최서희! 그 어미에 그 딸이로구려?' 상현이 마지막 던지고 간 말을, 그것은 비단 상현 혼자만의 비웃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종을 최서희의 머리칼 하나 안 다치고 최서희 윗자리에 앉힐테다!' 날이면 날마다 보이지 않는 뭇시선 속에서 서희는 깊은 곳을 뻗쳐 들어가고 있는 뿌리를 썰어대는 톱질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마다 뿌리는 더욱 깊은 곳으로 뿌리는 더욱더 강인하게, 그것은 서희의 욕망이요 생리요 아집이다. 불도 사르어 먹으려는 집념이다. 서희는 신문을 문갑 위세 얹어놓고 일어섰다. 경대 앞에서 얼굴을 비춰본다. '조준구놈! 홍가 그 계집!' 오만과 존엄을 뿌리째 뽑으려 들던 지난날의 사건들이 만화경처럼 일시에 눈앞에 펼쳐진다. 만화경 한귀퉁이에 비치는 기괴한 꼽추의 모습도. '나를, 그 병신놈한테?' 증오의 불길은 끈덕지게 멎지 않는다. 더욱더 치열하게 타오른다. 주홍빛 감댕기에 금봉채를 찌은 쪽머리가, 하얀 목덜미가, 흔들린다. "새침아." "옛꼬망!" 새침이 이내 달려왔다. "손님 여기 건넌방으로 오시라구." "옛꼬망!" 새침이는 다시 달려간다. 이윽고 혜관과 기화는 몸채 건넌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기다리고 앉아 있던 서희는 습관된 신심때문이겠지만 몸을 일으켜 혜관을 맞이하였다. 합장한 혜관은 헛기침을 하였고 기화는 말뚝처럼 서서 넋을 잃고 서희를 바라본다. 서희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오래간만이군, 봉순아." 손을 내민다. "애기씨!" 손은 싸늘했다. 기화의 울음은 목구멍에서 아래로 심장으로 내려가 응어리진다. '아아, 애기씬 혼인을 했구나. 길상이하고...' 시새움도 일지 않았고 그리움도 사라진다. 여태껏 만나본 일이 없는 타인이 손을 내어밀었다. "스님, 앉으시오." "네, 앉겠소이다." 혜관은 방문을 등지고 앉고 기화는 소매 속의 명주 손수건은 꺼내어 손에 쥐며 앉는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세상 밖에 나온 후 처음 밟는 남의 땅이니 수고는 당연한 것 아니겠소이까?" "그는 그렇겠소." 서희는 기화에게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이공에 오는 길, 묘향산 북변 쪽에 들렀다. 왔소이다." "묘향산 북변? 그곳엔 어째서요?" "별당아씨 묘소를 찾느라구요." "뭐라구요!" 서희는 두 주먹을 쥔다. "별당아씨, 애기씨의 어머님의 말씀이외다." 혜관은 서희의 독기 어린 눈을 응시한다. 기화의 얼굴이 핼쑥해진다. "무덤을 찾아서 어쩌시겠다는 건가요, 스님께서?" 음성은 냉랭했다. "소승이 어찌어찌 하겠다는 말씀 드릴 계제도 아니거니와 어쩌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없는 일, 애기씨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소승의 소임은 끝나는 것이오." "어느 누구의 지시였나요?" "우관선사께서 현몽하시었소." "뭐라구요? 우관선사께서 현몽하셨다구요?" "네. 분명그렇소이다." 혜관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허 참," 서희는 실소하듯 웃었으나 그의 창백해진 양볼엔 희미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기화는 묘향산의 무덤 얘기며 현몽 얘기며 모두가 다 뜻밖의 일이었다. 어째서 혜관이 서희를 만나는 벽두부터 그 말을 하는 것이며 별당아씨의 무덤이 어째서 묘향산 북변에 있다는 것인지 놀랄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관스님께서 극락왕생을 못하신 모양이오. 사바의 일을 그토록 궁금해하시어 현몽까지 하셨다니 말씀이오." 서희는 혜관의 말을 철저히 무시한다. "네, 옳은 말씀이오." "성불은 못할지언정 그 따위 잡귀의 흔적을 찾아다니셨다니," "왜 아니랍니까. 염라국의 수문장이 하품을 할 일이지요." 약이 올라서 서희의 입매가 뱅긍뱅긍 돈다. "네. 그렇소이다. 소승 생각에도 우관선사께서는 삼악도에 거하심이 분명할 터인데, 중생을 섬긴다 하옵시고 갖은 허언을 떡먹듯, 그뿐이겠소? 나무토막이나 쇠붙이로 만든 가짜 부처를 내세워 어진 백성들 주머니나 훑어먹는 중이고 보면 하하핫... 네. 우관선사께 옵서는 죄인들과 거하심이 분명할 것이오. 관음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스스로 부처 되기를 사양하신 것이온데 우관선사를 말씀드리잘 것 같으면 관음보살까지 이르자면 수백유순 밖에서요, 오백만억천 삼천대천세계의 티끌이온데 염라국의 구문장과 벗하기는커녕 삼악도 옥졸들과 썩은 고기나 나누어 잡숫는 게 고작일 것이오. 하니 고독 지옥을 소요하시다 묘향산 북변에 있는 무덤의 주인을 만났을지 모를 일 아니겠소?" 혜관은 말대꾸를 그만두어버린 서희를 깊이 응시하며 농담이라기엔 너무 진지한 얼굴이요, 진담이라기엔 얘기가 황당하고, 성한 사람이라 할 수도 없고 미친 사람도 아닌, 중도 속도 아닌 종잡을 수 없는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애기씨, 못난 자식도 내 자식 나이겠소이까? 나쁜 부모도 내 부모요, 삼세 인연을 사람으로서 어찌 끊을 수 있겠소이까. 목련존자께서도 악모를 꺼리지 아니 하고 석존께 애걸을 하셨사옵니다. 넓은 천지간에는 자식을 돈으로 팔아먹는 부모도 있고 기근에 자식을 잡아먹는 부모도 더러는 있사옵니다. 그와 같은 인면수심의 중생도 법력으로 회심시키려는 게 불법이온데 애욕에 눈이 어주웠다고는 하나 어머님께서는 패륜을 범한 그 시각으로부터 눈을 감으실 때까지 살아 지옥을 겪었을 것이요, 한점 핏줄에 대하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거이오. 애기씨께선 어머님을 용서하시고 법사로써 극락왕생을 비옵소서. 그것은 어머님을 위하기보다 첫째는 애기씨 자신을 위함이요 자손을 위하는 일이오이다. 소승 듣건대 애기씨께선 칠서에 통달하시고 경전도 널리 섭렵하시었다 하니. 그뿐이겠소? 신학문에도 조예가 있으니 소승 구구한 말씀 더는 아니 올리리다." 혜관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든 하여간 대단한 열변이다. 서희는 어렸을 때 본 혜관을 생각한다. 많은 중들 중에 무지렁이 같았던 혜관이, 외모도 관록 있게 비대해졌거니와 가마를 타고 할머니 윤씨와 함께 절에 가면은 항시 우관스님의 주위를 맴돌며 심부름이나 하던 중이, 말주변도 별로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중이 어느새? 그러나 서희는 혜관의 언변이 두드러져서 인내심 깊게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심상찮아서다. 생모의 얘기를 하는 때문만도 아니다. 어딘지 심상찮고 만만찮은 것을 서희는 직감한 것이다. "그러면 대사께선," 스님이라던 칭호가 대사로 승격했다. 비꼬임도 있었으나 새롭게 인식한 점도 없지 않았다. "최참판네 묵은 사연을 들추기 위하여 이곳까지 오시었소?" "아, 아니외다. 소승 그리 한가한 몸도 아니옵고 두루 만주 벌판으로 해서 아라사든가 눈알이 시퍼런 인종이 사는 나라까지 주유할 심산으로, 네, 석존께서도 설산수도를 하시었는데 하하핫... 그렇지마는 이 북국에서도 겨울은 이미 지나가고 있으니 주유하다 보면 염천수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듭니다만 그는 그러하옵고, 길상이는 이곳에 있지 아니 합니까? 아까부터 하마하마나 하고 인사 있길 학수고대하였는데, 네, 그 아이를 말할 것 같으면 어릴 적에 소승이 업어 기르다시피 하였고 소승의 영분이 금어이고 보니 길상이는 이른바 소승의 직제자라," 숨 넘어갈 듯 한바탕 지껄여대는데 서희는 능청을 떠는지 구경을 하는지. 혜관의 광대기엔 차츰 여유가 없어진다. "수천리, 이 땅을 찾아오게 된 이유 중에는 길상이 그 녀석 멱당가지를 거머잡고서 절로 끌어가고 싶은 심정 그것도 있었고, 왜냐할 것 같으면 우관선사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천수관음 조성을 절실하게 원하셨으니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소.우관선사께서는 늘 길상이 얘기를 하시었소. 천수관음을 조성할 자 그놈밖에 없노라고. 소승도 동감이었구요. 그는 그렇고, 길상이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소이까?" 혜관은 비로소 말을 중단하고 기화에게 재빠른 시선을 던진다. "서방님께서 회령나가셔서 안 계시오. 내일께나 오실는지요." 기화의 머리가 앞으로 수그러지고 혜관은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처럼. 혜관이나 기화가 다같이 예상했던 대로다. 그러면서도 충격이었다. 능글맞은 혜관도 숨이 막히는 듯 짓눌린 한숨이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그러면은 스님께선 별채에 가셔서 쉬시겠소?" 서희가 침묵을 잡아젖혔다. "쉬기보담 허기부터 달래야겠소." 얼버무린다. "네. 저녁을 곧 올리도록 하겠소. 봉순인 나랑 함께..." "네." 기화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혜관이 부산스럽게 나간 뒤 "애기씨!" "응." 서희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돈다. "애기씨! 전 기생이 되었답니다." "짐작은 했다." "저도 짐작을 했어요." "..." "서울서 이부사댁 서방님께 이곳 소식은 들었구요." "내가 혼인한다는 얘기도 하시더냐?" "그 말씀은 아니 하셨소. 하지만," "그분은 왜 서울에 계시는고?" "일본으로 공부 가실려구 준빌 하시는가보지요." "그래?" 웃는다. "저도 서울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부사댁 서방님께서 여기 저기 줄을 놔주셔서 지내가기 편안합니다." "편안하기만 해서 쓰겠니? 기와 그 길로 나갔으면 명기가 돼야지. 국창도 되구. 그래 그곳에 못 가보았느냐?" "이부사댁 서방님이 간도에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었지요. 하동까지만. 서울 오기전엔 진주에 있었구요." "조준구가 여지껏 살아 있다더냐?" "죽진 않았소." 서희와 기화의 눈이 강하게 부딪친다. "하지만 망할 날이 머지 않았을 게요. 소문에 의할 것 같으면 광산을 해서 땅이 절반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하더이다." "절반," "그자는 거처를 서울로 옮겼고 꼽추 그 병신만, 그보담 평사리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지요? 월선아지매는 어디 계시어요?" "밤이 길어. 차차 얘기하자꾸나." 드디어 말아놓았던 지나간 세월은 풀어지고 연못가 그 자리로 돌아온 서희와 봉순이는 한 사내를 의식 밖으로 몰아내버린다. 공동의 기억이란 순수한 것이다. 특히 어린 날의 그 공동의 기억 때문에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이라는 의식의 유대가 지속되는지도 모를 일이라면, 이들이 비록 혈육이 아니요 신분의 또랑이 깊다 하여도, 서희가 남다른 아집의 여자라 하여도 이들의 해후가 슬프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윽고 저녁상이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집안은 호젓했었는데 저녁상은 그 색채에서부터 호화스러웠다. 저녁상뿐인가, 가옥이며 방안의 세간이며 청나라풍을 곁들인 호화스러움이 알맞게 조화되어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차츰 마음을 가라앉힌 기화 눈에 그런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서희의 생활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에 쓰이는 물건 하나하나 식기에 이르기까지 대개가 박래품이면서도 섬세한 서희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생활의 풍도는 옛날 최참판댁 시절보다 월등하고 새롭다는 것을 깨달으며 기화는 서희가 고향도 잊고 조준구에 대한 보복도 잊어버리고 이곳에 눌러 살 작정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최서희, 그 여자는 자기 일문밖엔 도통 다른 생각이라곤 없어. 어찌하여 최참판네가 몰락을 하였느냐, 아니할 말로 열 손톱이 다 빠져나오는 한이 있어도 종국엔 조준구 목을 누르고 말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참판네를 일으켜세울 것이며 옛날보다 더한 번영과 영광을 누릴 게야. 으음... 그렇지. 최참판네 여인 아니냐? 서희는 오대 육대 최참판네 여인들의 마지막 꽃 야차 같은 계집이지.' 상현은 그런 말을 했었다. '아니다. 이부사댁 서방님은 여자의 마음을 몰라. 애기씬 고향에 안 돌아갈 작정을 하시고 길상이랑 혼인하신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천년 만년 살 것같이 이렇게 좋은 집을 짓고...' 기화는 산해진미가 실린 저녁상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늘 각박한 심정의 서희에게 있어 호사스런 생활이 그 삭박함의 중화제하는 것을 기화는 알 턱이 없고 더더군다나 용정촌의 조선인 사회를 휘어잡기 위한 일종의 신화를 서희가 의도하고 있는 것을 알 턱이 없다. 잣죽이 든 옥식기를 들고 새침이 들어온다. 리리양실에 물방울 같은 구슬을 끼워서 만든 정등갓이 흔들린다. 귤빛깔의 전등불이 방안 구석구석 비춰주고 유리 들창에선 시꺼먼 바깥 어둠이 방안을 넘겨다본다. 서희는 잣죽을 들다 말고 별안간 "우관선사라니? 호호호호... 우관선사께서 현몽을 하셨다구? 봉순아, 아까 그 혜관인가 하는 중 미친 중 아니냐? 호호홋..." 기화는 드높은 서희 웃음 소리에 질린다. "묘향산에 무덤이 있다는 것도 해괴한 얘기구, 그래 너도 그 무덤이라는 걸 보았느냐?" "아니옵니다. 금시초문이오." "그렇다면?" "..." "그 중이 거짓을 말했단 말이냐? 물론 거짓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동행한 너도 보지 못한 무덤이 그럼 공중에 둥실 떠 있었더란말이냐?" "아니옵니다. 저어," 서희는 숟가랏을 든 채 기화를 빤히 쳐다본다. "이상하지 않나. 거짓치고도 해괴망측하구나." "저, 저는 묘향산에 가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다녀오시는 동안 평양에 머물렀어요." "그렇다손 치더라도," "스님은 제게 아무 말슴 안 하셨구요. 함께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스님은 굳이 저를 떼어놓고 가셨어요. 다만," "다만?" "저는 묘향산에 있는 절에 볼일이 있어 가시나부다 하구." "그래?" 서희는 죽을 들기 시작한다. 위장이 좋지 않아 죽을 먹노라 하면서 서희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생각한다기보다 혜관의 말이 거짓 아님을 깨달은 얼굴이다. 별채에서 역시 산해진미의 저녁상을 받은 혜관은 말끔하게 그릇들을 비우고, 혀를 두드리며 입속에 남은 뒷맛을 음미하더니 나간다는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 무렵 객줏집을 몰래 빠져나온 송애는 운흥사 뒷숲 쪽으로 숨어들 듯, 백양나무 밑으로 간 그는 나무를 의지하여 몸을 바싹 붙이고 선다. 밝은 한낮에도 행인이 뜸한 외진 곳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나무숲을 타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밤에 우는 새 소리, 모두가 음산하고 기분에 좋지가 않다. "내가 나올 때 아버지가 보지는 않았을까?"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고 바람을 피하며 송애는 중얼거린다. 어둠과 바람 소리와 인적이 없는 외딴 곳이 송애는 불안하다. 기다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불안하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가 날 보았을지도 몰라. 나중에 물으면 뭐라 하지?" 며칠 전에 공노인은 요새 송애가 왜 그리 덤벙대느냐고 했다. 심상치 않다는 말도 했다. 속마음을 뚫어보듯 쳐다보던 눈이 무서웠다. 냉정한 눈이었던 것이다. 마음이 심란할밖에 더 있겠느냐 하며 방씨가 감싸듯 했으나 공노인은 영 마땅찮아하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다 안다 해도 이젠 할 수 없어. 난 버린 몸이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이지?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걸... 어쩔 수 없어. 없단 말이야! 죽을 수도 없잖아. 왜 죽어? 나도 살길 찾아서 보란 듯이 잘 살아보는 거야." 그러나 송애는 자기 한 말이 믿어지지 않아 흐느낀다. 어떻게 보란 듯이 살 수 있단 말인가. 백옥 같은 양반댁 규수, 아름다운 최서희는 또한 거대한 자산가, 그를 상대하여 송애가 어떻게 보란 듯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칠흑의 어둠은 시꺼먼 먹물같이 송애 심장을 타고 내려간다. "나는 부모도 모르는 객줏집 양딸, 하인인 길상이는 그런 곳에 장갈 들었지만 내게도 그같은 천운이 있을 리 만무. 그것들이 망하고 망해서 거지꼴이 안 되는 이상 어찌 보란 듯 내가 살 수 있을꼬." 송애는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 처절하게 웅얼거린다. "왔어?" 어둔 속에 불쑥 솟아난 사내가 송애 등을 툭 친다. 김두수다. "많이 기다렸나?" "아, 아니오." 송애는 몸을 웅그린다. "누가 잡아먹겠다나? 떨기는 왜 떨어." "추우니까 떨죠. 잡아먹긴 누가 잡아먹어요!" "허허어. 땡삐같이 그리 쏘지만 말고, 모로 가나 옆으로 가나 볼일은 다 본 처지 아냐? 추우면 내 목도리 끌러줄까?" 등을 어루만진다. "일없어요." "윤가 생각이 나서 그래?" "그 사람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게요." "그했던가? 하하핫..." 김두수는 너털웃음을 웃는다. "그렇담 더욱 좋고, 어디 따끈따끈한 방에나 들어갈까? 절방을 말해놨으니 우리 거기 가서 얘기하자구." 김두수는 송애의 손목을 잡아끈다. "싫어요. 얘기가 있음 여기서 하세요." "물론 얘기야 있지. 그 동안 송애가 일 자알 해주었으니 치사도 하구 말이야." 송애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김두수르르 따라서 걷는다. 중도 없이 절지기만 사는 절마당으로 그림자처럼 들어간다. 절지기에겐 돈푼이나 집어주었는지 김두수가 방문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기침 소리 한번 나지 않는다. 등잔의 기름이 타고 있었다. 무장을 풀어버린 듯 송애의 몸짓은 나른해 보였으나 눈빛에는 험악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목도리를 풀고 두루마기도 벗어 한구석에 밀어 놓고 자리에 앉으면서 김두수는 "불이 난 지 일 년 다 돼가는데 용정엔 아직도 불탄 자리가 그냥 있는 곳이 있더구먼. 공가 그 늙은이 요즘도 깐깐한가?" "..." "하긴 명색이 양아버지라, 그럼 나한텐 장인뻘이 되는가?" "쓸데 없는 소리 말아요." "흥, 그 늙은이 마음만 돌리면 이런 사위 둔 것도 과히 나쁘진 않을 텐데 말이야." 싱글벙글 웃는 김두수 얼굴을 송애는 빤히 쳐다본다. '돼지 같은 놈. 뭣이 어째고 어째? 윤선생을 말할 것 같으면 사람 똑똑하고 유복하고 가문이 어떻고 시집을 가면 썩 잘 가는 거라구? 그러던 놈이 인두겁을 써도 유만부득이지.' 윤이병이 똑똑한 사내도 아니고 유복하고 가문 좋은 집안의 자식도 아닌 것을 이제는 다 알아버린 송애다. 뿐인가, 좋아 지낸 여자가 있었다는 것도. "왜 그리 원망스리 쳐다보나. 윤이병 생각이 나서 그런가?" "그래요!" "그래? 그러잖아도 이번 길은 윤이병을 만나러 가는 길이야.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그렇지만 그말 거짓말이지?" "..." "길상이 그놈 생각하는 거지?" "..." "부질없는 짓이야. 윤이병이라면 내 애초부터 말하지 않았어? 그날밤 일은 싹 묻어둘 수 있지. 내야 뭐 여자에 궁한 처지도 아니니까 말이야." "듣기 싫어요! 남의 신세 망쳐놓고." 참다 못해 송애는 울어버린다. "그건 송애 너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나도 윤이병이 빈털터린 줄 몰랐고, 자아 자아, 한번 엎지른 물을 줏어담을 수 없고," 순간 김두수는 짐승처럼 송애한테 달려든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저항이 약할 수 밖에 없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도 아니었고. "내 말만 들어. 내 말만 들으면 되는 게야. 호강도 할 수 있고 큰 돈도 만질 수 있고 장차는 큰 요릿집 안주인 노릇도 할 수 있는 게야. 송애도 알지? 새로 지은 매월관 말이야. 겉으론 주인이 따로 있지만 말이야." 김두수는 둔중한 몸뚱이로 짓누르면서 송애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혼인하여 같이 살자는 얘기만은 하지 않는다. 어느덧 송애는 자신이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몸을 버린 이상 그 남자하고 해로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윤이병에게 걸었던 희망이 산산이 쪼개지고 만 것에서 온, 자기 자신에 대한 타협적 심리라 할 수도 있다. 예쁘장하고 글방 도련님 같은 윤이병에 비하여 산돼지같이 생긴 김두수지만 사내로서의 능력은 김두수 편이 월등하리라는 새로운 희망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옷을 챙겨 입고 담배를 붙여문 김두수는 부숭하고 조맨한 눈을 지레 감듯 만족스럽게 송애를 바라본다. "나, 아버지가 이 일 알면 쫓겨나요." 소애는 가렵지고 않은 손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쫓겨나면 걱정인가? 이 김두수가 있는 한." "나 어서 가야해요." "그렇겠군. 당장엔 쫓겨나도 곤란하니까. 그럼 말이야, 종전같이 앞으로도 내가 보내는 사람한테 좀더 자세히 보고할 것이며," 송애는 떼쓰는 아이처럼 갑자기 몸을 흔든다. 그 동안 송애는 객줏집 손님으로 가장하여 하룻밤씩 묵고 가는 정체 모를 사내에게 실상을 위시하여 공노인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정을 보고해야 했다. 송애는 결코 능동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객줏집에 묵고 가는 김두수의 끄나풀들은 교묘하게 협박도 하고 김두수가 굉장한 인물이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 좋을 것이라는둥 무엇보다 윤이병이란 대수로운 인물이 아니며 김두수의 부하라는 말이 송애에게 절망을 안겨준 대신 김두수를 평가하는 데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윤이병을 빙자하여 송애를 불러들여 능욕한 후 두 번째 만나게 된 김두수였으나 그간 싫든 좋든 김두수가 송애 머릿속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해서 운흥사 뒷숲에서 김두수가 만나잔다는 전갈을 받고 어김없이 나오게 된 것이기도 했다. "왜? 내 말이 마땅찮아 그러는 게야? 왜 몸을 쩔쩔 흔들어대누." "이 이렇게 된 바에야 호, 혼사를 해야 하잖겠어요?" "뭐?" 김두수의 부숭하고 조맨한 눈이 둥글해진다. 입가에 비웃음이 지나간다. '흥, 한두 번 건드렸다고 혼인을 한다면 이 김두수 골백번은 장갈 갔겠다. 어리석은 계집애.' "아아니, 송애 너도 딱한 계집애로구나." "뭐라구요?" 나락으로 떨어진 절망의 눈을 들어 송애는 김두수를 쳐다본다. "윤이병은 어떡하구 나하구 살자는 겐가? 싹 덮어주고 묻어주고 한다지 않았나." "하, 하지만 내 몸은," "그렇지. 길상을 생각하면서 윤이병한테 시집갈려 했고오, 윤이병한테 시집갈 작정을 하고서 몸은 다른 사내, 하하핫... 참말로 뜻 같이 되지 않는게 인간사로군. 하하핫..." 송애의 눈알이 시뻘개진다. 김두수의 소의 혀를 연상케 하는 허연 혓바닥을 드러내며 이목을 가리는 밀회인 것도 아랑곳없이 너털웃음이다. 김두수는 이곳을 떠나면 하얼빈으로 간다. 윤이병이 데리고 왔을 금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아무튼 좋아. 송애 마음먹기 탓이니까. 내 너의 진심을 알기 때문에 한 얘기지." 송애는 김두수의 눈을 피한다. 속을 환하게 들여다 보고 하는 말에 질린 것이다. 더 이상 확약을 받으려고 바둥거릴 수 없다. "너 하기 탓이야. 일일이 보고를 받는 터에 널 구태여 만나야 할 일도 없으련만 생각이 달사서 만난 거니까 앞으로 내 시키는 대로만 해. 좀 더 길상이 동태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알겠나?" "나를 의심하는 눈치던데..." "그러니까 조심을 해야지. 그 집에 응칠이라는 일꾼 있잖아?" "응칠이를 어떻게 알지요?" "내 모르는 일 없지. 응칠이란 놈이 송애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알구 말이야." "어머." "응칠이를 슬슬 구슬러보면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을 알 수 있을 게야. 눈치채지 않게, 알았어? 길상이놈이 잘되면 너도 배아플 것 아니냐 말이다." "한데 저어 그 사람을 어찌 그리 잘못되길 댁은..." "아아 그건," 처음으로 표시한 송애 의문에 김두수는 당황한다. "그건 내 개인의 원한 같은 건 아니고 또 그자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까놓고 얘기하잘 것 같으면 내 임무가... 마 그런 건데, 더 이상 송애는 알 필요가 없어." 김두수는 무섭게 눈알을 굴린다. "송애가 쓸데없이 이런 얘기 남한테 함부로 했다간 귀신도 모르게... 흐흐흣... 알겠나? 윤선생 같은 사람도 나한테는 찍소리도 못하지. 흐흐... 흣." 송애는 떤다. 그만큼 김두수의 형상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 대신 잘하기만 하면 사내는 출세가고 돈 벌고, 계집은 호강하고 좋은 서방 얻는 거라. 자아, 그럼 송애는 가보아. 윤이병을 만나면은 송애를 단념하라 할 터이니." 마지막 한 김두수의 말에 송애는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절문을 나선다. '국밥집에 들렀다 가야겠구나. 아버지가 물으면 거기 갔다온다 하구.'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송애는 마음에 차츰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윤이병을 만나면은 송애를 단념하라 할 것이라구? 그렇담 자기 사람이다 그 말이겠네.' 발길이 빨라진다. '그 사람 밑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많은 것만 보아도... 이마는 좁고 뻐드렁니, 눈은 조그맣고 생긴 거는 꼭, 하지만 사내가 인물 뜯어먹구 사나 뭐. 우리집에 다녀간 그 사람들도 자기를 상전만큼이나 떠받드는 모양이던데 생각해보면 그래. 내 진심이 자기 한테 없다는 것 때문에 혼인하자는 말을 입밖에 못 내는 거야. 사내 오기에 그럴 수도 있게. 나를 겁탈해놓고서 차츰 맘을 돌리려 했던 거야.' 자기 유리한 곳으로만 생각을 몰고 가는 송애 마음에 그러나 검은 구름이 없었다 할 수는 없다. 남한테 함부로 얘기했다간 귀신도 모르게, 했을 때 김두수의 무서운 형상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그 사람이 그래봬도 꽤 여자가 따르는 편이라구. 하지만 비윗장 한번 거슬러놓으면 없지, 없어. 황소 같은 사내도 뻥뻥 나자빠지는 터에." 하룻밤을 묵으면서 송애로부터 서희네 사정을 소상하게 들은 김가라는 사내가 이튿날 아침 세수하러 나와 송애에게 한 말이다. "그렇게 힘이 센가요?" "힘이 세냐구? 하하핫, 힘이 센 게 아니구 옆구리에 찬 육혈포 힘이지."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송애는 그다지 무섭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상대가 무섭다는 것은, 헤어날 수 없다는 체념으로 낙착된 때문이요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도 무서움만큼의 유혹이다. 이득이 기재된 이상 진실은 없고 진실이 없는 한 자애심은 두려움을 수반하기 마련. 송애는 그 함정에 깊숙이 빠져들어갔고 김두수는 아주 쓰기에 생광스런 끄나풀을 하나 불렸고 또 그것은 향락의 도구도 되어준다. 송애가 국밥집 월선옥으로 들어섰을 때 가게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보기 드문 중이 한 사람 월선이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월선의 옆에는 홍이가 붙어앉아서 중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아아 송애가?" 울고 있는 모양이다. 월선의 눈이 시뻘개져 있었다. '웬일일까?' 월선은 연신 눈물을 닦으며 "시님을 이곳서 만나볼 줄은 참말 몰랐습니다. 그저 그만 아무말도 못하겄십니다. 이곳에 온 후로는, 아이구 참." 월선은 눈물을 주테할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한다는 것은 "그저 그만 아무말도 못하겄십니다." "많이 늙었구먼." "예." "이 아이는..." "예, 이서방 아들입니다." "그놈 참 잘생겼구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으나 잘생겼다는 말이 반가워서 월선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다. "얼굴만 잘나믄 뭐합니까. 공부도 잘해야 하고 말도 잘 들어야 할긴데," "치이, 옴마는 넘 보믄 언제든지 그러더하. 치이." 홍이는 여위어서 보다 가늘어진 월선의 팔을 머리빡으로 쿵쿵 찧으며 입을 불어댄다. "운냐, 운냐. 하지마는 옴마 때리는 아아 시님이 숭보신다." "옴마는 숭 안 볼까봐서? 와 자꾸 우노." "반갑아서 안 그렇나. 자아 니는 송애아지매한테 가거라. 옴마한테 이리 치대싸으믄 이야기도 못하고." "치이, 없었이믄 인사하라꼬 막 찾아댕깄일 기믄서, 사돈팔촌이 와도 인사하라고 찾아댕기믄서." "이놈아 여기 사돈팔촌이 어딨노." 월선은 또 웃고 혜관도 빙그레 웃고 홍이는 착잡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송애 곁으로 간다. "애기씨랑 길상, 아니 저어," 월선이 하던 말을 되마시듯, 그러더니 어색하게 미소한다. "시님을 만내시믄 얼매나 좋아하실는지, 거기 지하고 가실까요." 월선은 봉순이가 온 것을 모른다. 혜관이 가게에 들어선 것을 우연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거기서 오는 길이구먼." 혜관은 입맛을 다시며 눈을 들어 송애를 한번 쳐다본다. 송애 얼굴이 다소 빳빳해진다. "거기서 차담상을 받고서 거리 구경을 나온 셈이지요." "아아 그라믄 역부러 여까지 오싰구마요." "뭐 최참판네 손녀를 찾아온 것은 아니고 청국 땅에 와서 조선중이 포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온 길에 들렀는데 길상이가 장가를 들었더구먼." "예--" 모깃소리 같은 대답이다. "천대만대 참판 하라는 법도 없고 하인이라는 법도 없으니 못 할 일도 아니지요." 혜관은 느긋하게 봉순이도 함께 왔다는 얘기를 미룬다. "기왕 이리 왔고 만났으니 이곳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얘기나 물어보아야겠소. 길상이를 만났더라면... 서희가 어디 가고 없다더구먼." "예 회령 가싰다 카더마요. 여기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고생 안 한다 할 수 없십니다." "이동진 그 양반 자제한테 대강 얘긴 들었소만." "그, 그라믄 이부사댁 서방님을 만냈십니까." "서울서 만나보고 오는 길인데요." "일전에도 이부사댁 나리가 연추서 오싰다가," 송애는 이동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연추에서 손님이 온 것은 새침이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이름은 중 입에서 처음 듣는다. "지가 그만 정신이 없어서 무신 말을 해야 할지, 저어, 저어, 거기서는 모둔, 봉순이랑..." "봉순이는 음, 그러니까 함께 와서 지금 최참판네 손녀하고," "머라 카십니까? 보, 봉순이가 와, 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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