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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애종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皇素
구분 |
문화재지정 |
특징 |
강화지석묘 |
사적 제137호 |
?고려산 북쪽 봉우리인 시루메산의 능선끝자락 부분의 능선
밭 가운데 독립해서 있는 것으로 경기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중부지역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거대한 북방식(탁자식) 지석묘
로 남한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지석묘로 알려져 있다. |
내가지석묘 |
지방기념물 제16호 |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4벽을 판석으로 석실을 축조한 후
대형 판석 한장을 덮은 모양으로 지석묘의 석실 구조를 정확
히 알수 있는 가장 완벽한 원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대산리 지석묘 |
지방기념물 제3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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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리 점골지석묘 |
지방기념물 제3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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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리 고인돌군 |
지방기념물제44호(16기) |
? 사적 제137호인 강화지석묘를 중심으로 300m 이내에 있는
지석묘들이다. |
삼거리 고인돌군 |
지방기념물 제45호
(9기) |
?고려산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5부 능선상에 위치하며 이
지역에서는 지석묘 축조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수
있는 채석을 한 흔적이 있는 채석장이 발견되었다. |
고천리 고인돌군 |
지방기념물 제46호
(18기) |
?해발 350m 지점 능선에 위치한 최고 높은 곳에 있는 지석묘
군으로 북방식 지석묘 1기는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
나 그 외의 지석묘는 대체로 자연적인 붕괴로 인하여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학술적 보존가치가 높으며 특히 능선 정상부분에 지석묘 석재를 떼어낸 흔적이 있는 채석장이 있어 중요하다. |
오상리 고인돌군 |
지방기념물 제47호 |
?고려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75m의 조그마한 야산
오목한 곳에 12기의 지석묘가 집중되어 있다. |
교산리 고인돌군 |
지방기념물제48호
(11기) |
?봉천산능선 해발 200m 지점에 능선을 따라 산재하고 있으며
강화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대부분 북방식 지석묘로 원
형을 유지하고 있다. |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 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쇄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라 불리 었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군으로 불리웠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 2의 서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써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는 39년 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수차의 천도가 있었던 바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그 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 세력인 몽고군이 송경, 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그 다음 대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전후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서울이었다.
그 뒤 25대 충렬왕은 재위 17년 12월에 또다시 거란군의 화를 입어 강화에 들어 왔다가 2년 후에야 겨우 송도로 환도하는 등, 강화는 양차에 걸쳐 고려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고려는 고종때의 천도를 계기로 당시의 서울인 송도를 폐하고, 강화를 항구적인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고려 제23대 고종은 그해 8월(음 6월)에 송도에서 강화로 옮기면서 이령군으로 하여금 국도의 방어선인 내성의 축조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궁전 구장과 사찰, 사직 등을 모두 당시의 왕도인 송도를 모방케 하고, 궁전 배후의 산에 송악이라는 산 이름까지 짓게 했던 것이다.
내성이 완공되자 익년 겨울에 외성을 쌓게 했고, 22년 9월에는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24년 12월에는 외성 등을 또 중수했다.
그러나 몽고병의 세력이 날로 강화되어 강화도의 임시 왕도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마니산 남쪽에 별궁인 흥왕이궁을 마련했고, 5월에는 가궁과 혈구사를 삼랑성에 창설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끝내 강화는 몽고군에게 유린되었고, 태자는 볼모가 되어 46년 6월에 몽고 내지로 납치되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자를 몽고로 보낸채 고종은 강화에서 천명을 다했고, 뒤를 이은 24대 원종도 강화를 서울로 이어받을 생각이었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이를 실현치 못하였다. 이로써 강화는 천도이후 39년간 고려의 국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강화서울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 25대 충렬왕 10년에는 원나라의 반적, 흡단의 내구로 충렬왕이 일시 강화로 피했던 일이 있고, 고려 말의 공민왕 10년에는 또 홍두적의 난을 당해 강화천도가 논의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정종, 태종의 3대왕이 일시적이나마 강화에 잠행한 일이 있고, 특히 태종은 강화에 도호부사를 두어 방어를 강화했으며, 14대 선조도 강화의 방어에 주력해 왜병을 근접치 못하게하여 남북간 적병의 연락 차단에 성공했던 일도 있다.
병자호란 때도 인조는 제 1차의 난에서 40일간을 강화로 몽진, 겨우 난을 피했었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한지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고 제 2차 내침 때에도 강화로의 몽진이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옮겼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17대 효종으로 하여금 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을 강화케 했고, 19대 숙종은 인조시대부터의 유수에 진무사를 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진, 보를 증설하고, 각 진에 돈을 설치하여 분담 수비하게 하였으며 문수산성의 축성 등 모든 방비를 강화시켰다.
강화도의 수난은 현대사에까지 미치는데 조선 고종3년의 프랑스 군함사건과 동 8년의 미국 군함사건, 동 12년의 일본 군함사건 등 조선 최후의 비극을 연출시킨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 곧 강화도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별도로서 또는 요새지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지녀온 강화 인 만큼 당시의 왕궁을 중심한 고적과 유적이 전도에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도처에 승경이 있어 어디를 가나 왕도를 찾는 기분이 충만해 있다.
이상과 같은 윤곽만으로도 다난한 역사를 지닌 강화를 인식하게 될것이고 옛 곳을 한번 찾아 볼만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니(리)산(인천)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화도면 , 흥왕리
개 요 : 수도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화도의 마니산 (468m)은 등산과 함께 바다 구경까지 겸할 수 있으며, 산의 높이는 낮지만, 주능선이 바위능선으로 되어 있어 등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산이다.
특히 이 산에는 사적 제136호인 참성단이 있어 매년 개천절에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전국체전 때는 성화가 이 곳에서 채화된다.
주요 산행코스는 상방리 매표소에서 계단로를 거쳐 정상까지 왕복하는 코스와 계단을 싫어하는 등산객을 위해 우회하는 단군로 코스, 정상에서 함허동천 야영장 또는 정수사 방면으로 하산하는 코스등이 있다.
정상에 서면 석모도와 장봉도, 영종도가 손에 잡힐듯하고 동남쪽으로 인천시가 보인다.
마니산의 매력은 정상에서부터 드러난다. 함동천 까지의 아기자기한 능선 코스가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왕때 회정선사가 창건하고 함허대사가 절을 중수했다.
함허동천은 함허대사가 수도하며 썼다는 글씨가 남아 있다.
마니산 정상에서의 일출은 동해안의 일출과는 다르지만 장관을 이룬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동해안과 달리 산넘어에서 시뻘건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이 주변의 산과 바다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매년 새해 일출을 보려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일몰 또한 아름답다.
마니산 정상에 있는 사적 제136호인 참성단은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훼손되고 있어 현재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개천대제, 체전성화채화, 연말연시 해맞이 행사시만 개방하고 있다
< 강화도 철새 >
강화도내 일주도로를 달리다 보면 추수가 끝난 논에 날아든 청둥오리 떼와 쇠기러기, 큰기러기등을 만날 수 있으며 물빠진 갯벌의 장엄함도 만날 수 있다
주요문화재 : 1). 정수사 법당(보물 161호)
2). 사기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79호)
산행코스 :
1) 상방리관리사무소 -> 기도원 -> 계단로 -> 정상 (헬기장)-> 하 산 ->
약2시간 소요
2) 상방리관리사무소 -> 단군로 -> 정상(헬기장) -> 하산 -> 약2시간30분 소요
3) 상방리 관리사무소 -> 계단로(단군로) -> 정상 ->함허동천(정수사) 약 3시간 소요
참성단(사적 제 136호)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화도면 상방리
개 요 :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라고 전한다.
제단은 돌로 하부는 둥글게, 그위에 네모난 단을 쌓아 올렸다. 둥근 단의 지름은 8.7m이며, 네모난 단은 6.6m의 정방형이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하였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에 수축하였고, 숙종 26년(1700)에도 보수하였다.
지금은 해마다 개천절에 이곳에서 단군의 제사를 지내며, 한편 전국체육대회 때마다 대회장에 타오르는 성화가 이 참성단에서 7선녀에 의해 채화되어 대회장으로 봉송, 점화되고 있다.
특히 1988 세계장애자 올림픽대회의 성화도 이곳에서 채화되어 대회 기간을 밝힌 바 있다.
정족산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길상면
개 요 : 정족산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산이다.
정족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강화도에서 가장 큰 사찰인 전등사와
정족산성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특히 정족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터가 남아 있어 유적답사 및 가족산행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산행은 전등사에서 시작된다.
전등사의 요사채 뒤로 난 길을 곧바로 올라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정상에서는 나무에 둘러싸인 전등사의 고풍스러운 모습과 마니산과 서해바다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
주변 유적지
갑곶돈대
1988년 개관한 강화역사관은 석기시대부터 일제치하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와 인천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는 말 그대로 역사문화전시관이다. 총 4개의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으며, 역사관 옆의 가파른 절벽에는 1679년 축조되어 강화도의 관문이자 한강 의 요새 역할을 해온 갑곶돈대가 자리하고 있다.
광성보
광성보는 조선조 효종 때(1658년)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인근에 신미양요 때 순절한 어재연 장군 형제의 쌍충비각과 신미 의총이 있는데, 그 바로 아래로 뱃사공 손돌의 슬픈 전설이 깃든 빠른 물살의 손돌목이 지나간다.
입구에 해당 하는 안해루에서 부터 요새에 해당하는 용두돈대까지의 깔끔한 성곽로는 인근 주민들에게 한적한 산책로로 인기가 높다.
손돌목의 전설
한강에서 나룻배의 사공으로 손돌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병란으로 배를 타고 피난길을 서둘러야 하는 인조(1623-1649)는 극히 불안하였다.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며 성이 복 바친채 갑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이대로 나간다고 하면 이 배는 여울목에 휘말려 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배는 하는 수없이 침몰하고야 말 것이다. "자∼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사공이라 했는데도" 만일 이 사공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한패가 아닐까 왕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기분인지 사공의 하는 동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되었다. "저 물살은 여울이 아니인가?" "폐하 그러하옵니다" "배는 그 물살을 향해 나간다. 어찌된 일인지 위험하지 않는가." 옆에 있어 모시던 신하가 사공에게 주의를 주었다. "예" "사공, 눈앞의 물살은 위험한 여울이 아니냐. 이대로 가도 좋은가" "예, 나는 잘 알고 있지요. 걱정마셔요 맡겨주셔요" 왕은 더욱더 불안하여 견딜수 없었다. "또 한번 뱃사공에게 주위를 줘라" 하고 분부하니 뫼시는 신하는 손돌에게 주의시킨다. 물길을 잘 살펴 배를 젖도록 하라" "주의하고 있습니다" 반응이 있는 것인지 손돌은 그런대로 물살 따라 화살 같이 지나간다. 왕은 기분이 대단히 불쾌하였다. "어쨌든지 저 사공은 괴상하니 목을 쳐라" 왕은 명령을 내린다. 뫼시는 신하들이 달려들어 칼을 휘두른다. 손돌은 왕 앞에서 공손히 하고 말한다. "폐하 모쪼록 믿어주십시오. 나도 이 나라 백성인데 어찌 임금의 은혜를 잊으리까 이 여울목을 무사히 건너도록 하겠습니다. 그후엔 무슨 벌이라도 기꺼이 받겠습니다. 바라건대 잠시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이괄의 반란사건으로 뜻밖에 신경을 쏟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여울목을 피할 수로가 없다는 말인가" "네 이수로 만이 있어 여울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한곳이 있습니다. " 손돌은 여기까지 의혹이 같으니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단념하게 되었다. "폐하 이 사공의 말씀을 어쨌든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제발 목을 쳐주십시오. 일껏 이곳까지 모시고 왔으니 죽기전에 한 말씀 들이고자 합니다. 앞에 있는 손돌이 죽은후 뱃길을 볼 수없게 될 것입니다. 그럴때엔 이 바가지를 물에 띄어 주십시오. 흐르는 데로 배를 가게하면 반드시 무사히 섬에 건너게 될 것입니다." 손돌과 손을 바꾸어 사공이 노를 잡았는데 여울을 피할 수 있는 뱃길을 알 수 없었다. 배는 점점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은 더욱 불안에 떨고 있었다. 거세게 물구비치며 여울목의 물발 손에 익지 않은 물길이라 사공이 벌벌 떨기만 한다. 위험이 바싹바싹 다가온다. '빨리 저 바가지를 띄워 안전한 물길을 찾도록 하라" 시종은 재 빨리 바가지를 띄워 사공은 그뒤를 따라 배를 가도록 했다. 손돌이 죽어 바다에 버려지면서 지금껏 맑은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덮히고 세찬 하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거치른 파도는 미친 듯이 뱃전을 두둘겨 배는 나뭇잎 인냥 파도에 휩 쌓인다. 인조왕은 이때에 비로소 손돌의 마음씨를 깨달아 그 죽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짐은 강화에 난리를 피하였을 때 될 수 없는 예감에 얽혀 죽음을 낳게 했다. 손돌의 원혼을 위로토록 해라" 왕은 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바다는 험준하여 배 타려는 나그네들은 배질 하기 전에 사당에서 빌어 손돌의 원망하는 혼을 달래주어야만 했다. 세월이지나 사당이며 비석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해방후 복원하여 유서를 남기고 있으며, 아직도 손돌목, 손돌바람이라 불러 전하여 진다. |
전등사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개 요 :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
내에 위치한 전등사는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왕실의 원찰로서 眞宗寺(진종사)라 불리워 왔다.
지금의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공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보물 178호인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집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華麗精緻(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보물179호인 약사전을 비롯한 10동의 건물과, 11세기 중국 북송때 만들어진 보물393호인 범종, 유형문화재 26호인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 지방문화재인 7호인 대조루와 실록과 王室世譜(왕실세보)를 보관했던 장사각지와 선원보각지가 있는 나녀상, 열지 않는 은행나무, 우는 나무 등 많은 고목이 있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후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가는 것으로 꼽아야 하겠다.
특히, 내부의 불 단위에 꾸며진 닫 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전등사에 전해지는 유물로 대표적인 것 중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한 중국의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163cm이며 밑 지름이 1m로 종루는 쌍용이 움크리고 있고 음통이 없으며 종 몸에 상중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종 몸을 살펴 보면 종 몸의 상하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삼랑성 이야기
강화도에는 정족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높이는 약 700척이고 세 봉우리로 되어 있고 그 산에 폭 9척 높이가 7척의 석성으로 에워 쌓여 있다.
기나긴 세월이 흘러 이 성터는 삼랑성이라고 불러왔고 또는 정족산성이라고 불러오는데 이제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되어 버려 옛날의 모습은 희미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동서남북의 큰 문을 갖춘 보기좋은 성이었다.
그 성문의 하나는 지금 전등사 입구에 홍예문으로 남겨져 있고 남문만이 정화 복구되어 옛 면모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벽 곳곳에는 망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 옛날 단군 시조께서는 세 아드님이 있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은 시조 단군은 정족산에 성을 쌓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큰 규모의 공사이기에 간단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조는 항상 생각을 기울여 끊임없는 꿈만이 젖어 있었다."
정족산에 성을 쌓아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아야만 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으나 좀처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너희들 좋은 방책은 없겠느냐" 시조는 어느날 세 왕자에게 의논을 했다.
왕자들은 어이하려는지 자신있게 답을 한다.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들 세 자식의 힘으로 반드시 훌륭한 성을 쌓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성을 쌓으려면 많은 돌이며 흙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너희들에게 일임하기로 한다"
세 왕자는 재빨리 다음날 아침부터 성 쌓기를 시작하였다.
시작하고 보니 뜻밖에 응원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전국 각처에서 구름같이 큰 남자들이 공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미안하지만 단군 시조의 왕자들은 스스로 축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달려왔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동일한 말을 하면서 가지런히 체격 좋은 사람이니 근력이 두드러진 장사들이었다.
주변에 있는 산으로 나갔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바위를 주먹으로 두드려 쪼개 내여 적당한 돌을 만들어 이쪽 산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 돌은 하나 하나가 들어맞는 중량으로 보이는 즉시 성벽이 되어진다.
공사는 점점 박차를 가해 진척되었는데 겨우 한달도 못되어 난공사인 산성이 이루어 졌다.
"어찌되었던지 참으로 훌륭히 쌓아 올렸다.
이로써 베개를 높이하고 잘 수 있겠다.
너희들의 충성은 후세 자손들까지 반드시 말로 이어질 것이다. " 단군 시조는 공사에 관계한 장사들에게 두터운 인사를 베풀고 세 왕자에게는 정족산의 봉우리를 각각 하나씩 안겨주고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세 왕자들은 축성하고 각기 세 봉우리를 지킴으로써 이성을 삼랑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3.전등사 은행나무 이야기
배불숭유의 정책을 폈던 조선에 들어오면서 전국의 사찰은 조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승려는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일에 사역을 나가야 했고, 사찰에서는 제각기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만 했다.
강화도에 있는 전등사에서는 매년 은행을 공물로 바치도록 명령했는데 절어귀에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서는 열매가 가장 많이 달릴 때에 열가마니 정도 은행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바쳐야 한다고 관아에서 명령해 왔다. 전등사의주지 스님과 그 밖의 스님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풍년이 들어야 열 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은행을 사드릴 재력도 없었다. 스님들의 걱정은 더 커졌다.
"은행이 많이 수확되도록 염불을 올립시다." 주지스님의 제의에 따라 은행나무 밑에 제단이 차려지고 3일 기도회가 열렸다. 이 소문이 절 아래 마을들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기도제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관가에서도 이 말을 듣고 신기하게 여기며 몇몇 포졸들을 파견했다. 주지 스님의 염불이 한창 진행될 때 포졸 한 놈이 스님에게 모독적인 언사를 했다. 곧 벼락이 치드니 포졸 한 놈이 꼬꾸라졌다.
"이 은행나무에 제발 은행이 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주지스님은 이 은행나무에 향후 천년 만년 은행이 열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을 했다. 그러자 벼락과 뇌성이 울리면서, 은행나무에 달렸던 은행 알은 모조리 떨어지고 기도회를 드리던 제단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후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는 은행이 열리지 않게 되었다
보문사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번지
개 요 : 강화군 서부에 위치한 석모도에는 해명산, 상봉산, 상주산의 세개의 산이 있어 삼산면 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보문사는 상봉산과 해명산 사이에 위치하는데 , 특히 절이 자리한 곳을 낙가산 이라 부른다. 곧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보타낙가산의 준말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하듯이 창건 연도나 창건에 얽힌 연기 설화등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못한 상태이나, 근대의 고승인 석전 박한영 스님이 작성한 "보문사법당중건기"에 작성한 글을 토대로 하면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 화정대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새벽 동틀 무렵에 듣는 절 앞바다의 파도소리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 보살상은 예로부 내려오는 강화 8경에 드는 명승지로 꼽혔다.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서해바다의 비릿한 냄새를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보문사에 오르면,지방기념물 17호로 지정된 수령 약 600여년이나 된 향나무가 절 마당에 늘 은은한 향을 머금고 있다.
향나무 뒤에는 어부가 건져 올렸다는 전설이 있는 23 나한 님이 모셔져 있는 자연석으로 되어있는 거대한 석실이 있다.
또한, 석실 옆으로는 민속 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지름 69cm, 두께 20cm 나 되는 보통의 것보다 약 2배 가량 큰 맷돌이 있으며, 중창불사를 끝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이 절마당에 위치해 있다.
눈썹바위의 마애석불은 절마당에서 약8분정도 올라가면 서해 바다의 경치와 시간이 맞는다면 석양까지 볼 수 있다.
백련사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231번지
개 요 : 고구려 장수왕 4년 병진(서기416)에 고려산을 답사하던 천축조사가 이 산 상봉 오련지 (다섯개의 연못)에 오색연화가 찬란히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오색 연꽃을 채취하여 공중에 날려 그 꽃잎이 떨어진 곳마다 가람을 세웠다. 이곳은 그 중 백련이 떨어 진 곳에 세운 절이다.
조선 순조 6년 병인년(1806년) 3월에 서산대사 제 6대손 천봉후인 의해당 처활대사의 사리비와 부도탑이 건립되었다.
조선 고종 광무 9년 (서기1905년) 을미년 봄에 인암화상이 화주 박보월과 함께 본가람을 중건하였다.
서기 1967년 정미년 봄에 비구니 한성탄이 극락전과 삼성각을 중수하였다.
철불아미타불 좌상은 보물994호 지정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이 한 때 이 곳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청련사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550번지
개 요 : 강화군청에서 약 7km 떨어진 고려산(436m) 동쪽 기슭에 있다. 절 건립과 관련하여 오련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스님이 고려산 꼭대기에서 오련지(오색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를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
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마다 절을 세웠는데, 하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백련사, 파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청련사,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적석사, 노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황련사, 검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흑련사라고 하였다.
백련사 철제아미타불좌상이 1989년에 보물 994호로 지정되었는데, 도난 당했다.
강화향교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개 요 : 고려 인종 5년(1127)에 강화읍에 세워진 향교로, 그 후 조선 인조2년(1624)에 당시 강화 유수 심열이 소동문 밖 송악산 기슭에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강화여중, 종합여자고등학교 옆에 있으며, 강화읍의 문화 유적지로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고인돌 (총33기 있음)
위 치 :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6번지
관 리 자 : 강화군청 문화청소년과 (032-930-3621~7)
개 요 :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서 사적 제 137 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710cm, 높이 260cm, 넓이 550cm의 커다란 돌을 사용했으며,
형태는 북방식 고인돌로서 상고사와 고대사의 좋은 연구 자료가 되고있다.
2000.11.29 호주 케인즈 제 24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며, 특히 저녁 해질 무렵에 찾아가면 좋다.
현지 교통 : 강화읍에서 고인돌까지 가는 완행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강화산성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신문리, 관청리, 남산리
개 요 : 강화읍은 고려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잠시 도읍을 옮겼던 곳으로 이와 관련한 유적들이 많다. 강화산성 역시 그같은 문화유산으로 고려시대에 쌓은 산성이다.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고자 착공되었다.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축성되었다.
고려의 성은내, 외, 중성이 있었는데 외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7,122m이고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축성하였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 성들은 모두 토성이었으나 1677년에 강화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석성으로 쌓았다.
1709년에 강화유수 박권이 다시 개축했고 조선 후기에 보수가 이어졌다.
강화산성에는 안파루(남), 첨화루(서), 망한루(동), 진송루(북)의 4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성 주위가 원래 약 18km였으나 지금은 1,947m만 남아 있다.
강화산성은 구한말에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강화도조약 체결 등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사적 제132호.
주변명소 : 고려궁지, 백련사, 강화동종, 갑곶돈대, 부근리 고인돌
현지도로 : 1). 강화중앙시장 사거리 - 고려궁지 - 강화 북문
2). 공설운동장 방향(중앙로)으로 900m 지점에 서문 위치
3). 온수리 방향으로 150m 지점에 남문 위치
강화 전적지
위 치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관 리 자 : 강화군청 관광진흥과 (032-933-8011/930-3521~8)
개 요 : 몽고 항쟁 39년간을 비롯, 조선 인조 때의 병자호란 및 정묘호란을 피했던 곳으로 개화기에는 프랑스, 미국의 함대가 넘나들었으며, 일본의 운요호가 침입해 강화도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서울 방위를 위한 중요한 국방요지이며, 1977년 복원 및 보수작업을 마무리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관, 고려궁지 ,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鎭 : 지금 군의 연대와 대대 단위의 중간
堡 : 지금의 중대 단위
墩臺 : 지금의 소대 단위
津 : 은 또 다르다
고려궁지
위 치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전화번호 : 고려궁지 매표소 (032-930-3579)
개 요 :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후 고려왕실은 원종 11년(1270)에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한다.
이처럼 고려궁지는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 간의 궁궐터로 1232년 6월 고려 고종 당시 항몽의 기치를 들고 강화에 도읍을 옮긴 후 2년 뒤인 1234년에 관아와 궁궐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당시 불교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이 이 곳 강화에서 만들어졌고, 금속활자도 개발되었는데, 1270년 5월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성과 궁궐이 무너졌다.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고 1637년 병자호란 시에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치욕을 당하였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강화 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재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동헌은 강화 유수부의 건물로서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되었다.
이방청은 1654년 효종 5년 강화 부에서 건립한 관아로서, 1783년 정조 때에 개수한 ᄃ자 형의 건물로 크기는 79평 정도이다.
현재의 고려궁터는 1977년에 보수 정화한 것이다. 사적 제133호.
주변 관광지
용흥궁, 성공회 사옥, 강화산성, 강화역사관, 갑곶 돈대
홍릉(고려고종 왕릉)
위 치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29-2
개 요 : 고려 제23대 고종(1213-1259)의 능인 홍릉은 사적 제 224호로서 본래 3단의 축대로 정자각, 석인, 왕릉 순으로 배치되었다.
원형 봉분 직경이 4m 정도로 작지만, 봉토에 호석이 있고, 1988년 재실이 신축, 복원되었다.
광성堡
진[鎭]
신라시대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경지대
에 설치된 특별행정구역.
신라 시대에는 말갈(靺鞨)을 막기 위해 실직(悉直:지금의
삼척)에 북진(北鎭)을 설치했고, 782년(선덕왕 3)에는 평산(平山)
에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여 서해안의 거점으로 삼았다.
828년(흥덕왕 3)에는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이듬해에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에 당성진(唐城鎭)을, 846년(문성왕
8)에는 강화도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다.
고려시대에도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신라와 후백제의 접경
지대에 진을 설치했다.
백제지역에 예산진(禮山鎭), 신라지역에 일어진(於鎭)을 설치하
고 병력을 파견했다.
후삼국 통일 이후에 남쪽의 진은 모두 없애고 북쪽의 거란 및 여
진과의 접경지대인 양계에만 남아, 백령진(白翎鎭)과 같은 경우
를 제외하고는 양계지역에 집중되었다.
1018년(현종 9) 지방제를 정비했을 때 진의 수는 28개였다.
이 진들은 성곽으로 둘러싸고 무장했으며 독립된 단위의 전투부
대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군현체계와는 달리 군사행정체계로 속현을 거느리
지 않았다.
안북(安北)과 안변(安邊)의 두 도호부(都護府)가 이러한 여러 진
을 거느렸다.
후대에 점차 진이 행정구역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면서 일반 진에
는 7품 이상의 관원을 진장(鎭將)으로, 방어진(防禦鎭)에는 5품
이상의 관원을 방어진사(防禦鎭使)로 파견했다.
양계의 여러 진에 배치된 군대 병력은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
휘 아래 에 있었다.
진은 국가방어의 의미를 지닌 기구이기 때문에 원의 간섭기에는
진이 가진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290년(충렬왕 16) 서경에 설치했던 동녕부를 고려가 회
수한 뒤 평양부 이외의 주진 명칭을 본래대로 되
돌리는 조처가 취해졌다. 동계의 경우에는 원나라가 강제로 설
치한 쌍성총관부를 1356년(공민왕 5)에 수복하면
서 이 지역에 많은 진을 설치했다.
1455년(세조 1)에는 이제까지 북방의 익군과 남방의 영진군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군사조직을 북방의 예에 따라 군익도(軍翼道)
의 체제로 통일했다.
전국의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를 다시 중·
좌·우의 3익으로 편성하여 인근의 군현을 여기에 소속시킴으로
써 하나의 군사 단위를 이루었다.
연해지역에만 설치되었던 진을 내륙에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소속시켰다.
1457년 이 익군(翼軍) 체제가 진관체제로 변경되었다.
군익도의 중첩성을 지양하고 거진(巨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
러 진들을 여기에 속하게 해서 하나의 진관으로 편성했다.
진관체제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있는 곳을 주진이라 하
고 그 아래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거진 등의 크고 작은 진이 있어
병영(兵營) 또는 수영(水營)의 통제를 받았다.
진관체제에서 병력의 근간은 양인 농민이었다.
이러한 진관체제가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의 역부담 방식의 변
화로 그의 근간인 병력의 확보에 문제점이 드러나, 〈제승방략
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제승방략〉에 문제점이 들어나
진관체제를 다시 복구하자는 견해도 있었으나,
속오군제를 성립 시키면서 진관체제는 다른모습으로 바뀌었다.
진관체제에서 거진이 행정상의 단위에 설치된 데 반해 속오군의
경우에는 각 영(領)이 군사적 요새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군제상의 변화가 진의 중요성을 약화시킨 것은 아니었으
나 조선후기 병자호란 등에서 보듯이 실제의 전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진에 대한 방비의 치중도 그때그때 정세에 따라 달라졌
는데, 1683년(숙종 9) 무창·자성의 2진이 설치되었다가 곧 혁파
되었으며 그뒤 1788년(정조 12) 다시 무창진이 복설되었다.
그리고 해안을 통한 외세의 침투가 잦았던 고종연간에 경강입
구, 경기 연해지역, 강화의 진무영에 대한 집중적인 재정 지원이
있었고, 경기뿐만 아니라 연해지역과 변방에 대한 방비를 강화
하고 새롭게 진을 설치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압록강·두만강 연변과 남부 해안지대에
여러 개의 진을 설치했다.
고려시대인 1356년부터 경상도·전라도·양광도의 해안에 도순문
사(都巡問使)와 수소(戍所)로 이어지는 방어체제를 마련했으나,
이 체제에 문제가 있어 조선시대인 1397년(태조 6) 그에 대한 해
결방안으로 각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폐하고 첨절제
사제로 바꾸면서 진을 설치했다.
1398년 다시 도절제사를 두어 영(營)을 맡고 각 진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때의 영진군은 주로 마병이었다.
연안지역의 진에는 이밖에 군관(軍官)·정군(正軍)·유방군(留防軍)
·진속군(鎭屬軍)·패속군(牌屬軍) 등이 배치되었다.
진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의 인정(人丁) 가운데 일부를 군사
력으로하여 진군(鎭軍)을 이루어 이후 진관(鎭管)체제가 성립되
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세종초에 여진의 압력이 강화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1432년
(세종 14) 석막(石幕:富寧)에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했다.
그후 1434년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도절제사로 삼고 6진 설
치에 착수했다.
특히 서북 방면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압록강 상류지역에 국방
상의 요지인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武昌)·우예(虞芮)의 4군
과 동북방면의 두만강 하류 남안에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
(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6진을 설치했다.
보[堡]
조선시대 국경 지역의 요충지에 설치한 작은 요새.
대개 소수의 군사를 배치하고 하급 지휘관을 임명하
여 지휘하도록 했으며, 일부는 군사만 배치했다
.
본래 堡는 흙이나 돌로 쌓은 작은 성(城)을 뜻한다.
때로는 돌로 쌓은 것을 성이라 하고, 흙으로 쌓은 것
을 堡라 하여 구별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의 堡는 대
부분 석성이었으며, 토성이나 목책은 소수였다.
규모도 둘레가 100자가 못 되는 것부터 3,000자가 넘
는 것까지 다양했다.
1433년(세종 15)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지역에 장
성(長城)과 행성(行城)을 쌓으면서 진(鎭)에 버금가
는 국방 요충지에 구자(口子)를 증설하고 만호(萬戶)
를 임명하여 지키도록 하는 한편, 구자에 성을 쌓아
주민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조치에 따라 堡가 설치
되기 시작했다.
뒤에 장성을 따라 2개 도에 걸쳐 수십 개의 堡가 신
설되어, 만호나 권관(權管) 등을 두어 지키도록 했
다.
15세기 말엽 이후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국방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남부 해안지역인 김해·흥양과, 남해도
·거제도 등큰 섬에도 몇 개의 보를 설치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북방에 설치되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30년(중종 25) 당
시 사용 중인 堡만 북방의 2개 도에 84개였고, 남방
은 6개에 불과했다.
堡는 조선 후기에 다소 줄었으나 말엽까지 남아 있었
다.
위 치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개 요 :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 돈대 위에 서있다.
1998년에는 해변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11:00부터 봉행 된다.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오기에 좋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과 돈대의 곡선 모양이 인상적이다.
주변 관광지 : 덕진진, 초지진, 전등사, 마니산
덕진진
위 치 : 인천 강화군 불은면 신현리
개 요 : 고려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외성의 요충으로서 원래 수영에 예속된 첨사의 진(鎭) 이었으며 1677년 만호를 두고 군관 26명, 병 100명, 돈군 12명, 배 2척이 배치되었다.
1679년 축조된 용두, 덕진돈대 포좌 15문이 설치된 강화 제 1의 포대인 남장포대와 대포 10문이 설치된 덕진포대가 이 진에 소속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밤에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 승리를 거두었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여 미국함대에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당시 미군의 전사 속에 남북전쟁 때에도 이와 같이 짧은 시간에 맹렬한 포격전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미양요 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면서 남장포대에는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를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초지진
위 치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전 화 : 초지진 매표소 (032-937-4388)
개 요 :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1656년 구축한 요새이며, 1679년에 축조된 초지진, 장자평돈, 섬암돈이 초지진 소속이었다. 진장(鎭將)으로 1666년에는 병마 만호가 있다.
1763년에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3척의 배가 배치되어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군함 운양호 침공 등 근대외침에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 휘하의 아시아 함대 침공시 450명의 미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 광성진을 공략하였고, 1875년 8월 21일 초지진 포대에서는 일본의 운요호와 격렬한 포격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73년에 초지진을 복원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노송과 성벽에는 당시의 포탄 자국이 남아 있고, 초지진 내에는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섬
석모도
위 치 : 인천 강화군 삼산면
개 요 : 강화도의 서편 바다위에 길게 붙어 있는 작은 섬으로 산과 바다와 갯마을과 섬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 풍광 좋은 곳이다.
서울 도심에서 차로 1시간 반이면 강화 본섬의 서쪽끝 외포리 포구에 닿는다. 여기서 맞은 편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까지 1.5km 바닷길을 페리호을 타고 건너가야 한다. 페리호는 여러 척이 수시 왕복운항한다.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건널 때 뱃전으로 날아드는 갈매기떼의 장관은 빼 놓을 수 없다.
석모도는 아직도 자연의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화 땅에는 온통 사적지와 전적지 명소들이 즐비하지만 석모도는 빼어난 도서경관과 해상풍광, 아름다운 산들이 어우러져 한 번에 자연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석모도에는 해명산, 상봉산, 상주산의 3개의 산이 있어, 삼산면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상봉산과 해명산 사이에 보문사가 위치한다.
보문사는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관음보살의 터전이다. 또한 보문사는 전등사, 정수사와 함께 강화의 3대 고찰로,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금강산에서 내려온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새벽 동틀 무렵에 듣는 절앞바다의 파도소리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 보살상은 예로부터 강화 8경에 드는 명승으로 꼽혔다. 마애석불에서 내려다 보면 서해바다의 경치와 시간이 맞는다면 석양의 장관을 볼수 있다.
석포리와 보문사를 잇는(8km) 섬내버스는 배 시각에 맞춰 다니고 있어 굳이 승용차가 없더라도 가는 길이 수월하다. 보문사까지는 차로 15~20분 정도 걸린다.
보문사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상점,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석모도에는 보문사 말고도 가 볼만 한 곳이 여러 곳 있다. 석포리항에서 보문사 방향으로 5km가면 왼쪽으로 어류정항 표지판이 보이고 이쪽으로 가면 염전, 해수욕장, 갯벌, 포구 등이 차례로 나타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고 특히 석모도에서 하나밖에 없는 민모루 해수욕장은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 아이들과 함께 갯벌탐사를 하기에 좋다.
◆ 민모루 해수욕장
모래는 일부 뿐이고, 곧 갯벌이 나타나 해수욕보다는 갯벌 체험이 제격인 곳이다.
물이 빠지면 약 1km 정도의 갯벌의 나타난다. 갯벌의 감촉이 부드럽고, 조개, 게 등 갯벌에 서식하는 생물을 관찰할수 있다.
맨발로 갯벌에 들어 갈 수도 있지만 발을 다칠 수 있으니 장화나 여분의 신발 등 을 준비하는게 좋다.
◆ 장구너머포구
민모루 해수욕장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포구로 멍석 위에 새우나 밴댕이를 말리 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장구처럼 보인다 하여 장구너머란 이름이 붙었다 한다. 어선이 드나드는 작은 포구지만 통나무로 그럴듯하게 지은 횟집과 찻집이 몇 군데 있다.
여기도 물이 빠지고 난 뒤 돌을 들추면 게, 조개 등을 잡을 수 있다. 돌과 굴 껍데기가 많아 발을 다칠수가 있으므로 신발이나 장화를 신어야 한다. 숭어, 망둥어 낚시터로도 이용된다.
◆ 어류정항
장구너머보다 훨씬 큰 포구이다. 이곳에는 어선 이름을 딴 포장마차 형 횟집들이 늘어서 있다.
직접 잡은 횟감을 팔기 때문에 값이 싸다. 출어기 에만 개장하며 금어기(7월15일 ~8월15일)가 되면 철시한다.
◆ 삼량염전
오후 4시쯤 되면 수북히 쌓인 소금탑을 불 수 있다. 염전 바로 건너편에는 15만 평의 저수지와 수로를 갖춘 어류정 낚시터(032-932-1333)가 있다.
◆ 드라이브코스
석모도의 일주도로는 총연장 19km 정도 된다.
전부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드라이브에 무리가 없다.
볼음도 (인천 강화군)
위 치 : 인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리
개 요 : 볼음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리에 위치하고, 상주인구 285명(2001. 4 현재)이며, 6.36㎢의 면적에 2개의 섬(유인도1, 무인도1)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북쪽으로는 북한의 연백군과 5.5㎞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서해 북단에 위치해 있다.
강화 외포리에서 여객선으로 1시간 내지 2시간(북방의 경우) 소요되는 거리로서 깨한 하늘, 바다, 땅 ...... 모두 청정 지역이며 무공해 천혜의 고장이다. 영뜰 해안, 조개골 해수욕장 등 천연자연 경관을 간직한 채 조용히 살 아가고 있는 순수한 마을이며, 북녘 땅이 희미하게 보여 손 뻗으면 북한의 연백이 닿을 듯 앞에 펼쳐져 고, 넓은 갯벌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큼 널따랗고 많은 자원과 생물(모시조개, 상합, 소라, 굴 등)들이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작은 섬이지만 내부에는 35.5ha의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말 그대로 깨끗하고 맛있는 청정미가 일품이며, 바다에서는 특히 5,6월 밴댕이 및 병어, 숭어의 감칠맛 나는 횟감이 년중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 섬은 조선 인조때 임경업 장군이 명나라에 원병수신사로 출국하던 중 섬 부근에서 풍랑으로 기착하여 15일간 체류하다가 둥근달(보름달)을 보았다하여 발음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조말기 교동군에 편입되었다가 1915년 경기도 강화군에 부속 도 서로 1962년 볼음 출장소가 설치되고,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 산 물 : 현지에서 직접 잡은 싱싱한 숭어, 밴댕이 병어를 비롯 한 어류와 상합(대합), 모시조개(가무락), 동죽, 소라, 굴 등 싱싱한 패류, 강화 인삼(소포장 단위로 판매, 최재동 032-932-6822), 또한 35.5ha의 넓은 논에서 생산한 갯바람 맞은 볼음도 청정미가 서울 등 대도시 유명 백화점에서 높은 값으로 거래될 만큼 유명하다.(볼음도 쌀 작목반 대표전화 반장 김희신 032-932-6891), 또한 뻘그물을 이용하는 이곳의 특성을 이용하여 숙식과 숙박, 바다뻘 그물 현장 체험을 패키지로 상품화 하여 현지 어민과 함께 뻘에 경운기를 타고 직접 나가 현지에서 싱싱한 고기(숭어, 밴댕이, 병어 등)도 잡고, 맛있는 횟감을 바다 가운데에서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도 있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조금(보통 음력 9, 10, 11, 24, 25, 26일 경)때는 병어, 사리(보통 음력 15, 16, 17, 30, 1, 2일경)때는 밴댕이가 잡히기 때문에 물때를 잘 맞추어 이용하면 풍성한 고기를 맛볼 수 있다.
그 외에 숭어 낚시, 망둥이 낚시도 즐길 수 있다.
볼 거 리
조개골 해수욕장 및 천연기념물 볼음도 은행나무(제304호), 소곳, 영뜰 갯벌, 갓바위, 또한 새로운 등산로가 개척되어 봉화산(해발82m) 및 선녀탕에서 볼음도 전체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서해안 낙조를 즐길 수 있다.
강화 동막해변
위 치 :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개 요 : 우리나라 각 시대의 역사가 곳곳에 새겨져 있어 '국토박물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라고 불리는 강화도에서 낙조를 감상하기에 좋은 산은 마니산 (469.4m)을 비롯해 하점면과 양사면의 경계에 솟은 봉천산, 하점면과 내가면의 경계에 솟은 낙조봉, 강화도의 부속섬인 석모도 상봉산과 해명산 등이다. 바닷가 명소로는 강화도 남쪽의 화도면 장화리에서부터 동막리에 이르는 해안도로가 으뜸으로 손꼽을 만하다. 도로변이나 인근 음식점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서도 편안하게 일몰을 감상할 수 있고, 분오리 돈대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석모도에서는 민머루 해변이나 장구너머포구가 일몰 감상의 포인트이다.
[동막해변 갯벌체험]
동막해변은 갯벌 체험을 하기에 좋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갯벌에서 게랑 조개랑 그리고 물이 들어오면 망둥어 낚시, 숭어낚시 등을 하였으나 이제는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 지면서 어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고 하니 바닷가 생물들을 무분별하게 체집하는 것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
주변명소
마니산, 전등사, 정수사, 보문사,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외포/후포항 횟집촌
볼음도
위 치 : 인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리
개 요 : 볼음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리에 위치하고, 상주인구 285명(2001. 4현재)이며, 6.36㎢의 면적에 2개의 섬(유인도1, 무인도1)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북쪽으로는 북한의 연백군과 5.5㎞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서해 북단에 위치해 있다.
강화 외포리에서 여객선으로 1시간 내지 2시간(북방의 경우) 소요되는 거리로서 깨끗한 하늘, 바다, 땅 ...... 모두 청정 지역이며 무공해 천혜의 고장이다. 영뜰 해안, 조개골 해수욕장 등 천연자연 경관을 간직한 채 조용히 살 아가고 있는 순수한 마을이며, 북녘 땅이 희미하게 보여 손 뻗으면 북한의 연백이 닿을 듯 앞에 펼쳐져 있고, 넓은 갯벌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큼 널따랗고 많은 자원과 생물(모시조개, 상합, 소라, 굴 등)들이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작은 섬이지만 내부에는 35.5ha의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말 그대로 깨끗하고 맛있는 청정미가 일품이며, 바다에서는 특히 5,6월 밴댕이 및 병어, 숭어의 감칠맛 나는 횟감이 년중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 섬은 조선 인조때 임경업 장군이 명나라에 원병수신사로 출국하던 중 섬 부근에서 풍랑으로 기착하여 15일간 체류하다가 둥근달(보름달)을 보았다하여 발음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조말기 교동군에 편입되었다가 1915년 경기도 강화군에 부속 도 서로 1962년 볼음 출장소가 설치되고,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 통 편 : 강화 서쪽 외포리에서 삼보해운의 삼보11호가 1일 2 회 왕복운항. 차량 선적 가능하며, 여름철에는 증편된다.
특 산 물 : 현지에서 직접 잡은 싱싱한 숭어, 밴댕이 병어를 비롯한 어류와 상합(대합), 모시조개(가무락), 동죽, 소라, 굴 등 싱싱한 패류, 강화 인삼(소포장 단위로 판매, 최재동 032-932-6822), 또한 35.5ha의 넓은 논에서 생산한 갯바람 맞은 볼음도 청정미가 서울 등 대도시 유명 백화점에서 높은 값으로 거래될 만큼 유명하다.(볼음도 쌀 작목반 대표전화 반장 김희신 032-932-6891), 또한 뻘그물을 이용하는 이곳의 특성을 이용하여 숙식과 숙박, 바다뻘 그물 현장 체험을 패키지로 상품화 하여 현지 어민과 함께 뻘에 경운기를 타고 직접 나가 현지에서 싱싱한 고기(숭어, 밴댕이, 병어 등)도 잡고, 맛있는 횟감을 바다 가운데에서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도 있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조금(보통 음력 9, 10, 11, 24, 25, 26일 경)때는 병어, 사리(보통 음력 15, 16, 17, 30, 1, 2일경)때는 밴댕이가 잡히기 때문에 물때를 잘 맞추어 이용하면 풍성한 고기를 맛볼 수 있다.그 외에 숭어 낚시, 망둥이 낚시도 즐길 수 있다.
볼 거 리 : 조개골 해수욕장 및 천연기념물 볼음도 은행나무(제304호), 소곳, 영뜰 갯벌, 갓바위, 또한 새로운 등산로가 개척되어 봉화산(해발82m) 및 선녀탕에서 볼음도 전체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서해안 낙조를 즐길 수 있다.
식 당 : 볼음수산(032-932-5564), 볼음식당(032-932-6825)
지역기관 : 서도면 볼음출장소(032-932-6801),
삼도농협 볼음지소(032-932-7518)
서도면 보건소 볼음출장소(932-7104)
교 동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남산포. 연산군 적거지. 교동군현터 고구 저수지. 교동봉수대. 화개산 성지. 교동읍성.교동향교.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은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 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를 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신부가 한국전통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고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 또 건축수법이나 치목형식에서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주문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여 기술적인 적용을 하였는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건물 형식은 'ᄃ'자형 연와 구조로 된 5량 4간의 홑집이다.
지정번호 : 41호
지정년월일: 2002. 2. 4
관리자 : 대한성공회유지재단 온수리교회
소유자 : 대한성공회 유지재단
종파명 : 성공회
규 모 : 1동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7번지
철종의 외가(생가)
이 집은 조선 철종 4년(1853)에 지어진 것으로 철종 임금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았다.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는 H자집 배치였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어져 지금은 ᄃ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있다.
사랑채를 일자로 곧장 연결시켜 화장담으로 간략하게 구획한게 특이하다 당시 일반 사대부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건축법도에 맞도록 고졸(古拙)하게 지은 건물이다.
지정번호 : 8 호
지정년월일: 당초:1983.9.19 변경:1995.3.1
관리자 : 파주염씨대종회 소유자 : 종중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264 번지
전 설
손돌의 여울
한강에서 나룻배의 사공으로 손돌 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한강의 물은 손쉬어 배를 지어 건너는 일쯤이야 기타 뱃사람보다 잘한다는 평이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병란으로 배를 타고 피난길을 서둘러야 하는 인조(1623-1649)는 극히 불안하였다.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며 성이 복바친 채 갑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전방은 물살이 세고 이 배는 여울에 향하여 전진하였다. 이대로 나간다고 하면 이 배는 여울목에 휘말려 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배는 하는 수없이 침몰하고야 말 것이다. "자~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사공이라 했는데도" 만일 이 사공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한패가 아닐까 왕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기분인지 사공의 하는 동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되었다.
왕은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혼자 말을 건넨다. "저 물살은 여울이 아니인가?" "폐하 그러하옵니다" "배는 그 물살을 향해 나간다. 어찌된 일인지 위험하지 않는가." 옆에 있어 모시던 신하가 사공에게 주의를 주었다. "예" "사공, 눈앞의 물살은 위험한 여울이 아니냐. 이대로 가도 좋은가" "예, 나는 잘 알고 있지요. 걱정 마셔요 맡겨주셔요" 손돌 사공은 버젖이 물살을 향하여 배를 몰고 있었다. 왕은 더욱더 불안하여 견딜수 없었다. "또 한번 뱃사공에게 주위를 줘라" 하고 분부하니 뫼시는 신하는 손돌에게 주의시킨다.
"임금님의 행차이시다. 물길을 잘 살펴 배를 젖도록 하라" "주의하고 있습니다" 반응이 있는 것인지 손돌은 그런 대로 물살 따라 화살 같이 지나간다. 왕은 기분이 대단히 불쾌하였다.
사공은 이괄의 한패로 되었던 자로서 나를 없애려고 계교를 하는지 생각이 든다. "어쨌든지 저 사공은 괴상하니 목을 쳐라" 왕은 명령을 내린다. 뫼시는 신하들이 달려들어 칼을 휘두른다. 손돌은 왕 앞에서 공손히 하고 말한다. "폐하 모쪼록 믿어주십시오. 나도 이 나라 백성인데 어찌 임금의 은혜를 잊으리까 이 여울목을 무사히 건너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엔 무슨 벌이라도 기꺼이 받겠습니다. 바라건대 잠시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손돌은 한참동안 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왕은 이괄의 반란사건으로 뜻밖에 신경을 쏟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여울목을 피할 수로가 없다는 말인가" "네 이수로만이 있어 여울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한곳이 있습니다." 손돌은 여기까지 의혹이 같으니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단념하게 되었다. "폐하 이 사공의 말씀을 어쨌든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제발 목을 쳐주십시오. 일껏 이곳까지 모시고 왔으니 죽기 전에 한 말씀들이고자 합니다. 앞에 있는 손돌이 죽은 후 뱃길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엔 이 바가지를 물에 띄어 주십시오. 흐르는 데로 배를 가게하면 반드시 무사히 섬에 건너게 될 것입니다."
손돌은 배 밑에서 바가지 하나를 꺼내어 비치면서 조용히 죽고 말았다. 손돌과 손을 바꾸어 사공이 노를 잡았는데 여울을 피할 수 있는 뱃길을 알 수 없었다. 배는 점점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은 더욱 불안에 떨고 있었다. 거세게 물굽이 치며 여울목의 물발 손에 익지 않은 물길이라 사공이 벌벌 떨기만 한다. 위험이 바싹바싹 다가온다. 옹은 손돌 사공이 남기고 간 말이 생각난다. '빨리 저 바가지를 띄워 안전한 물길을 찾도록 하라" 시종은 재 빨리 바가지를 띄워 사공은 그 뒤를 따라 배를 가도록 했다.
때는 음력으로 10월 20일이니 바다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손돌이 죽어 바다에 버려지면서 지금껏 맑은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덮히고 세찬 하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거치른 파도는 미친 듯이 뱃전을 두둘겨 배는 나뭇잎 인냥 파도에 휩 쌓인다.
그러나 바가지에게 길을 트이게 한 배는 손돌의 혼이 담겨 있는 듯 거센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여울목을 빠져나가 목적지인 강화도에 다다랐다. 인조왕은 이때에 비로소 손돌의 마음씨를 깨달아 그 죽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이괄의 난리가 평정되어 대궐로 돌아간 왕은 곧바로 각 대신들을 소집하여 손돌의 죽음을 탄식하게 되었다. "짐은 강화에 난리를 피하였을 때 될 수 없는 예감에 얽혀 죽음을 낳게 했다.
그 사공 손돌을 나는 잊을 수가 없구나. 전혀 내가 살리지 못한 일이니 당시 돌아보니 가슴 아프기만 하니 강화섬에 사당을 세워 매년 그 날을 지정하여 제사를 올려라. 손돌의 원혼을 위로토록 해라" 왕은 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그 후 이상하게도 손돌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거센 바람이 불어 추워졌다. 바다는 험준하여 배 타려는 나그네들은 배질 하기 전에 사당에서 빌어 손돌의 원망하는 혼을 달래주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10월 20일에 거칠고 세찬 바람을 손돌의 탄식하는 숨소리라고 하며 이를 손돌이 바람이라 한다.
손돌이가 죽은 여울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월이지나 사당이며 비석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해방후 복원하여 유서를 남기고 있으며, 아직도 손돌목, 손돌바람이라 불러 전하여 진다.
세 왕자가 쌓은 城이야기
강화도에는 정족산 이라는 산이 있는데 높이는 약 700척이고 세 봉우리로 되어 있고 그 산에 폭 9척 높이가 7척의 석성으로 에워 쌓여 있다. 기나긴 세월이 흘러 이 성터는 삼랑성이라고 불러왔고 또는 정족산성이라고 불러오는데 이제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되어 버려 옛날의 모습은 희미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동서남북의 큰문을 갖춘 보기 좋은 성이었다.
그 성문의 하나는 지금 전등사 입구에 홍예문으로 남겨져 있고 남문만이 정화 복구되어 옛 면모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벽 곳곳에는 망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 옛날 단군 시조께서는 세 아드님이 있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은 시조 단군은 정족산에 성을 쌓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큰 규모의 공사이기에 간단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조는 항상 생각을 기울여 끊임없는 꿈만이 젖어 있었다.
"정족산에 성을 쌓아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아야만 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으나 좀처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너희들 좋은 방책은 없겠느냐" 시조는 어느날 세 왕자에게 의논을 했다. 왕자들은 어이하려는지 자신있게 답을 한다.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들 세 자식의 힘으로 반드시 훌륭한 성을 쌓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성을 쌓으려면 많은 돌이며 흙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너희들에게 일임하기로 한다"
세 왕자는 재빨리 다음날 아침부터 성 쌓기를 시작하였다. 시작하고 보니 뜻밖에 응원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전국 각처에서 구름같이 큰 남자들이 공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미안하지만 단군 시조의 왕자들은 스스로 축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달려왔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동일한 말을 하면서 가지런히 체격 좋은 사람이니 근력이 두드러진 장사들이었다.
주변에 있는 산으로 나갔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바위를 주먹으로 두드려 쪼개 내여 적당한 돌을 만들어 이쪽 산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 돌은 하나 하나가 들어맞는 중량으로 보이는 즉시 성벽이 되어진다. 공사는 점점 박차를 가해 진척되었는데 겨우 한달도 못되어 난공사인 산성이 이루어 졌다. "어찌되었던지 참으로 훌륭히 쌓아 올렸다. 이로써 베개를 높이하고 잘 수 있겠다. 너희들의 충성은 후세 자손들까지 반드시 말로 이어질 것이다. " 단군 시조는 공사에 관계한 장사들에게 두터운 인사를 베풀고 세 왕자에게는 정족산의 봉우리를 각각 하나씩 안겨주고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세 왕자들은 축성하고 각기 세 봉우리를 지킴으로써 이성을 삼랑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전등사 추녀밑에 나 여인상
전등사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했다. 그 까닭은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