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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 대담 “자벌레의 날갯짓처럼 인간은 홀로 상승해야 한다”
* 출처: 월간 《북새통》(2008년 7월호)
신종호(편집장, 시인): 선생님의 열혈 독자들이 신작을 애타게 기다린 걸로 압니다. 이번에 출간하신 《잡설품》을 한 문장 한 문장 집중하여 읽다보니 미처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신화를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사유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횡단하는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대한 일반 독자(열혈 독자와 굳이 분류하자면)들의 반응은 ‘당혹함’으로 요약됩니다.
박상륭: 일반 독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모든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읽히고 싶은 독자란 어떤 특수한 독자가 아닌, 일반 독자 아니겠습니까. 사실 작가란 모든 독자를 다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는 쪽에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저의 잡설(경전과 소설의 중간쯤에 위치한 글로 박상륭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지칭하여 사용한 말)을 어렵다, 난삽하다 하는데… 작가들이 독자의 요구에 부응해 낮춰 작품을 쓰는데, 막상 작가가 쉽게 써도 독자들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는 요상한 일이 생깁니다. 그러다보니 조금만 어려워도 독자들이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반 독자들도 조금 난해(사상적으로)하더라도 참고 홍역 치르듯 한두 번을 읽고 나면 수준이 높아지죠. 그래야만 우리가 인류의 업적과 유산으로 삼는, 소위 말하는 고전이나 제일의 고급한 문학까지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너무 쉽고 부드러운 것만 삼키는 것은 문화적으로 후퇴되는 감이 듭니다. 작가들이 너무 일반 독자들의 입맛에 맞춰 글을 쓰면 문화적인 후진성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신종호: 《잡설품》을 논하려면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견해입니다. 선생님의 신생(新生) 독자들을 위해 세 작품의 흐름과 연관성을 짚어주시지요.
박상륭: 저의 맨 처음 소설이 〈아겔다마〉입니다. 본격적으로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보인 첫 소설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저는 9남매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홉씩이나 자식을 낳다보니 어머니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통해 죽음을 대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환경에 영향을 받아 죽음에 대한 것을 다룬 장편이 바로 《죽음의 한 연구》입니다. 그때 나는 ‘메시아 콤플렉스’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나를 천재라고 부추긴 형님들 때문에 생긴 증상입니다. 세상이 물질주의에 빠져 이상한 곳으로 흐르고 있는 데, 내가 이 세상을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아주 맹랑하고 당돌한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러나보니 자연스럽게 죽음과 삶에 대한 사유에 천착하게 됩디다. 그 천착의 결과가 《죽음의 한 연구》인데, 불교다 기독교다 뭐 이런 오만가지 생각을 죽음이라는 통에 버무린 작품입니다. 《죽음의 한 연구》가 삶과 죽음에 대한 연구였다면 《칠조어론》은 정신이 구원을 성취하거나 해탈을 이루려면 어떤 식의 고행이 필요한 가를 말한 것이고, 이번에 쓴 《잡설품》은 그런 식의 고행을 치루고 난 뒤에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쓴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시리즈라 할 수 있겠죠.
신종호: 《잡설품》을 통해 선생님이 세상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요.
박상륭: 인간의 재림입니다. 서구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구상적으로 이미지화한 결과 신(神)을 잃었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대신에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얻었습니다. 그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은 저하되고, 위축되고, 땅에까지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 사람들을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것이 강한 인도주의와 문화적 결속이라는 허약한 끈입니다. 그것을 잘못 수입해서 우리도 인간을 잃었습니다. 인간의 재림을 위해서는 다시 구상적 이미지로부터 추상적 아이디어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을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책에도 나오는 이야긴데, 자벌레가 오체투지로 나비가 될 때까지 수많은 고행을 겪습니다. 나비의 날개는 하늘에서 손이 나와 달아주는 게 아니잖아요. 자체에서 그 날개를 만들어내듯이 우리들 속에서 신을 찾아야 합니다. 이원론적인 세계에서는 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도 창조했다고 하지만 기실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거죠. 그리고 다시 인간이 그 신을 죽입니다. 그 과정이 서양의 정신사입니다. 신(정신)이 죽은 현실은 축생도와 같습니다. 축생도로부터 다시 인간을 깨워내야 합니다. 자벌레가 날개를 돋운 모양으로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신에 도달할 때 인간의 재림을 볼 수 있다는 거죠. 기독교식으로 신을 밖에서 구하면 정신의 몰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해탈이란 곧 인간의 재림입니다. 그것이 《잡설품》의 메시지입니다. 자벌레의 날갯짓처럼 인간은 홀로 상승해야 합니다.
신종호: 그 날개는 모든 인간이 달 수 있습니까?
박상륭: 자벌레도 나비가 될 때까지 수많은 엑시던트(accident)를 만날 겁니다. 그 엑시던트를 피하고 이겨내면 모든 자벌레는 나비가 되죠. 인간도 엑시던트의 고행을 이겨내면 누구든지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간의 엑시던트는 욕망과 카르마(karma, 業)여서 자벌레보다 억만 배로 어려운 엑시던트를 만듭니다. 당연히 해탈에 도달할 수 있지만 욕망과 카르마를 끊을 수 없어 돌고 돕니다. 현재의 인간은 오관유정(五官有情)입니다. 육신으로서의 진화는 이미 정점에 도달한 존재라는 거죠. 그 다음부터는 정신적으로 진화를 해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해야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사관유정(四官有精)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릭직톤’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내려가면 인간을 잃어야합니다. 인간이 짐승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을 하는 것도 진화를 위한 동력을 만들 것인데, 자꾸 자기합리화를 찾아 욕망과 카르마에서 맴돈다면 축생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늘 반성하며 높은 곳을 향해서 가는 것이 정신 진화가 되겠죠. 스스로 날개를 달아 하늘로 오르는 고행과 해탈의 다룬 것이 《잡설품》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했으니, 더 궁금한 것은 책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신종호: 앞서 말씀하신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구상적으로 이미지화했다는 말이 알듯 말듯 합니다.
박상륭: 니체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화하는데 아주 능한 철학자입니다. 신이라는 추상적 아이디어를 구상화시킨 것이 ‘초인’입니다. 우리는 초인을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니체의 초인은 땅의 사상가, 땅의 정치가나, 땅의 독재자처럼 자신을 신격화한 구상적인 존재입니다. 뭐, 히틀러도 니체적인 의미에서 초인입니다.
신종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선생님의 《잡설품》을 비교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몰락의 축에서, 《잡설품》은 상승의 축에서 쓴 작품이라 했더군요.
박상륭: 제가 기자 간담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계에 두 개의 잡설이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 하나입니다. 순수한 의미에서 철학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차라투스트라라는 영웅의 로맨스 무용담이나 서사시라 할 수도 없는, 허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소설은 소설인데 또한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아시겠지만 무신론이라든가 허무주의라는 것에 무슨 경전이 써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걸 뭐라고 불러야 되느냐? 그러면 이것이 잡설 아니겠느냐는 것이 제 생각이죠. 그리고 1백여 년이 지나서, 문잘배쉐(Munsalvaesche: 소설에 나오는 성배가 안치된 장소를 뜻하는 독일어 지명인데 ‘문잘배셰’로 표기될 수 있다)를 배경으로 삼은, 한국어로 쓰인 또 하나의 잡설이 바로 《잡설품》입니다. 니체는 추상적 아이디어를 구상화(具象化)했기 때문에 몰락의 축에서 썼고, 박모는 구상적 아이디어를 추상화 했기에 상승의 축에서 썼다고 말했습니다.
신종호: 신을 ‘죽인 자’와 ‘살린 자’의 차이란 말씀이신가요?
박상륭: 그렇죠. 신은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일 수 없습니다. 서양의 니체가 신을 죽인 것은 이원론이 지배하였기에 가능한 건데, 우리는 그게 가능하지 않죠. 우리한테는 내재해 있기 때문에 죽일 신도 없는 거죠.
신종호: 소설가 김훈이 “박상륭의 문장은 주어, 목적어, 동사가 당당하게 제자리에 버티고 있어 문장의 용(用)과 체(體)를 두루 갖추고 있는데, 주어는 구만리장천의 우주공간을 헤매고 난 후에야 비로소 목적어와 만나며, 그 목적어가 동사와 만나기 위해서는 또다시 첩첩이 가로막은 악산들을 넘어가야 한다.…독자는 그의 문장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다음 문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가 그려내는 아름다움에는 징그러움이 스며들어 있다.”고 상찬을 했습니다.
박상륭: 김훈은 단문에 아주 능수능란한 소설가 아닙니까. 단문에서 시도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율(律)’이죠. 짧으니까 율이 되질 않아서, 얼핏 남성적인 문장으로도 읽힙니다. 왜냐하면 건조하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말은 정직한 의미에서 문법체계가 확고하지 않죠. 작가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점이지만, 기가 센 작가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부분입니다. 얼마정도 자유를 느낄 수 있죠. 영어처럼 문법구조가 완벽한 언어에서는 내용으로는 모르지만 문장 자체로는 길게 쓰느냐 짧게 쓰느냐를 빼놓고는 별다른 재주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한편 우리에게는 단어가 적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표준말만 쓰면 글쓰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단어가 적습니다. 그것을 한자가 보강해줍니다. 그래서 한문과 한글을 조합해 사유의 지평을 넓힌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능력 있는 작가에게는 좋은 부분이고, 능력 없는 작가에게는 좋지 않은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종호: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것과 곳’을 합성한 ‘궛’이라든가, ‘몸과 마음과 말’을 합성한 ‘뫎’ 등과 같은 신조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단어의 확장을 통해 사유의 지평을 연 예시가 되겠군요.
박상륭: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말은 열려있어 지평이 넓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말에서 가장 미묘한 것이 토씨입니다. 토씨에는 죽어있는 문장을 살려내는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가령 ‘해가 진다.’를 ‘해를 지게 한다.’는 식으로 토씨를 적절하게 잘 바꿔주면 어떤 문장이 살아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뉘앙스 같은 것이 절로 묻어납니다. 우리말의 토씨를 잘 쓰면 아주 생생한 문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종호: 선생님의 작품 《죽음의 한 연구》가 《유리(羑里)》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이 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셨습니까?
박상륭: 누워서 침 뱉기 식이 되는데 그것은 참 잘못 만든 영화에요. 영화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어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너무 성급해요. 가령 존자 스님이 물속에 들어가서 다짜고짜 손장난(자.위)부터 시작하고 그러는데, 그게 원래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몸은 시시때때로 닦아야 된다는 마음에 때를 씻어내다가 우연히 손장난을 하게 된 거지 무조건 그것부터 시작하는 건 아닙니다. 또 스승을 죽이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바위를 굴려 떨어뜨리고 그러는데, 너무 직설적입니다. 사실은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면서, 스승이 왜 그런 말을 했는가, 그런 말의 올가미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해서 하게 된 행위인데 너무 성급하게 처리했더군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처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 것이 소설적인 논리를 형성한 것인데 그런 논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 어떤 놈이 물속에 들어가면서 손장난부터 시작하나요. 그거 추악하기 이를 때가 없지 않나요? 영화가 그런 식으로 너무 성급함을 부리면 설득력이 없어요.
신종호: 선생님 소설을 보면 상식과 윤리로는 판단되지 않는 사건이 자주 나옵니다. 제자가 스승을 죽인다든지, 섬뜩한 폭력과 일탈적 행동이 쉽게 다가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박상륭: 그것도 뭐 말하자면 무의식의 깨우침 같은 행위일 텐데요, 우리의 무의식은 만능이며, 전지전능하다고 하잖아요. 십관(十官)까지 깨우치고 나면, 깨우친 사람만이 아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는 윤리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주가 환하게 보이고, 그 자신이 우주화해 있는 존재에게 이 세상은 그냥 허(虛)이고, 그냥 무생(無生)이고, 무소(無所)이기에 그런 세속적 사태란 별 문제가 아니겠지요.
신종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에게는 소수정예의 광(狂)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상륭: 그런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고, 있다면 혹간은 자기네들 뜻하고 부합했기에 그런 거겠죠. 저에 대한 광팬이 아니라 그분들 자신들에 대한 광팬들이겠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왜 나는 이걸 표현하지 못했는가, 라는 것을 발견한 것일 겁니다. 세상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이 다 그렇지 않나요? 듣기 전에는 몰랐었는데 듣고 나면 어 나도 알고 있었는데, 라고 하지 않나요.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그 개인에게 보편적인 진리로 화(化)하면서 대상에 몰입하게 되는 거죠.
신종호: 《죽음의 한 연구》를 읽으면서 많이 좌절했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 이후도 여전합니다. 《잡설품》을 읽으면서도 사전 찾고, 검색하며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아니 읽은 게 아니라 공부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박상륭: 저 자신은 소설을 쓴다고 써본 적은 없습니다. 모두다 소설가로 불러주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합니다. 자꾸 말하지만 구상적인 이미지를 추상적인 아이디어로 전환하려면 구상성이 축소되거나 탈락을 하거나 하는 현상이 당연히 일어나기 마련이 아닌가요. 구상성을 탈락 시키면 산출되는 것은 사상이며 정신입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소설의 내러티브라는 것이 제 잡설에는 적어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좌절하지 마시고 이왕 들여 놓은 발이라면 끝까지 걸어가 보세요.
신종호: 잘 새겨듣겠습니다. 캐나다에서 잠시 귀국하여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박상륭: 저도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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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그림은 15세기후반 유럽에서 활동한 신원미상판화가의 1488년작 목판화 〈성배를(聖盃를) 찾으러 문잘배쉐(문잘배셰)에 도착한 원탁기사 랜슬럿(Lancelet arriving at Munsalvaesch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