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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북 이순테니스연합회 원문보기 글쓴이: 쟈니
박영석 그는 누구인가?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완등, 남극점·북극점 원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산악인이다. 서울 오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1년 동국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유럽 알프스 3대 북벽을 오른 뒤 1991년 에베레스트 산 남서벽에 올랐고, 1993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1997년 6개월 만에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고봉 6개를 등정하였다. 2001년 8월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를 8년 2개월 만에 모두 등정해 세계 최단기간 완등 기록을 가졌다.
신동민(37)·강기석(33) 대원은 박영석 대장이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8848m)에 도전했던 2008년부터 함께 등반팀을 이뤘다. 이듬해 '코리안 루트(에베레스트 남서벽과 서릉을 통과하는 루트)' 개척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5cm·74kg의 체격을 갖춘 신동민 대원은 동료 산악인들에게 '괴력의 사나이'로 통했다. 박 대장이 "8500m가 넘는 고도에서 바위에 못질하면서 숨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신동민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신 대원은 2007년 엄홍길(51) 대장과 함께한 로체(8516m) 남벽 등반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히말라야의 최난벽이라는 로체 남벽 1캠프(6000m)부터 4캠프(7900m)까지 루트를 혼자 구축하면서 산악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신 대원은 10살 연상인 부인 조순희(47)씨와도 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2001년 신 대원이 에베레스트 산줄기 푸모리 원정에 나섰을 때 조씨는 여자 동료 한명과 함께 신 대원을 응원하기 위해 푸모리 베이스캠프를 찾았다. 당시 동료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신 대원과 조씨는 슬픔을 나누다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호준(8)군이 있다.
강기석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꼽힌다. 대학생 때인 2003년 세계 4위봉인 로체 등정에 성공했고, 이듬해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 정상에 올랐다. 그는 추위에 적응한다며 해발 5000m 베이스캠프에서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하는 등 개성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강 대원은 박영석 원정대의 막내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지난해 4월 박 대장이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을 때 캠프를 구축하러 나갔다가 낙석에 맞아 오른쪽 무릎이 찢어지고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차돌 같은 사나이'라 불렸던 그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이번 등반에 따라나섰다.
7대륙 최고봉인 유럽의 엘브루즈 산(5,642m),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산(5,895m), 라틴아메리카의 아콩카과 산(6,959m), 북아메리카의 매킨리 산(6,194m), 아시아의 에베레스트 산(8,848m), 오세아니아의 스디르만 산맥 주봉인 자야 산(5,030m), 남극대륙의 빈슨매시프 산(5,140m) 등을 모두 등정했다. 2004년 1월 13일 남극점 등반, 2005년 5월 북극점 원정에 성공했다. 이로써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북극점·남극점을 모두 밟은 산악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006년 봄 에베레스트 횡단등반에 성공하였고, 2009년 5월 20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루트를 뚫었다.
현재 대학산악연맹 이사, 골드윈코리아 이사, 박영석세계탐험협회 회장, 한국산악회 이사, 대한산악연맹 이사, 서울특별시 홍보대사, 대한민국 희망원정대 대장으로 있다. 2010년 1월 모교인 동국대 석좌교수로 임용되었다. 1993년 체육포장, 1994·1998년 올해의 산악인상, 2002년 대한민국 산악대상, 2003년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다. 2003년에 〈월간중앙〉 선정 '35년간 세계에 한국을 빛낸 35인'에 선정되었다. 저서로 〈산악인 박영석 대장의 끝없는 도전〉이 있다.
지난 18일 히말리아 안나푸르나(8091m) 등반도중 눈사태 여파로 2명의 대원과 실종되어 그를 찾기위한 구조작업이 계속되어 왔으나 진전을 보지 못하고 그 곳에 겨울이 시작되고 실종추징 지역에 눈이오고 돌리 떨어지는 탓에 올해 수색작업을 종결하고 내년 이후
수색작업을 계속할것이라고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이 밝혔다.
"안나푸르나"은 어떤산인가~~~?
세계 제10위봉 안나푸르나(네팔어:अन्नपूर्णा, 영어:Annapurna)
산스크리트 어로 '풍요의 여신', '제공자'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 중부에 줄지어선 고봉으로 등반역사상 최초로 등정된 8.000m 산으로 길이가
무려 55km에 달하고, 최고봉인 안나푸르나 제1봉은 높이가 8,091m로 8,000m이상의 고산을 의미하는
14좌중의 하나이다.
서쪽에서부터 최고봉인 안나푸르나 제1봉, 안나푸르나 제3봉(7,555 m), 안나푸르나 제4봉(7,525 m),
안나푸르나 제2봉(7,937 m), 강가푸르나(7,455 m)가 연이어 서 있고, 안나푸르나 제3봉의 남쪽에서
갈라져 나온 끝에 마차푸차레(6.993m)가 있다.
1950년 이전까지 안나푸르나는 거의 탐사된 일이 없었는데,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가 본래 공격목표였던 다울라기리(8.167m)의 등반로를 정찰하기 위해 안나푸르나로 진입했다가 등반 가능성을 발견하고 목표를 변경, 부적절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등반을 감행, 6월3일에 정상정복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짜릿한 성공과 달리 하산 때 여러 어려운 상황을 겪었는데 당시 흥분제를 과다복용해
자기통제에 실패한 에르조그와 그의 파트너 라슈날이 크레바스에 떨어지며 눈사태에 휩쓸리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하산 중 많은 대원들이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1970년에는 Chris Bonington이 이끄는 영국등반대가 안나푸르나의 남벽을 처음으로 등정하였다.
이 1970년의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은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의 한 획을 그은 등반으로 평가받는다. 1978년에는 Arlene Blum이 이끄는 미국등반대가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였는데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팀으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1987년2월 3일에는 폴란드의 Jerzy Kukuczka와 Artur Hajzer가 등반에
성공하여 14좌 최초의 겨울 등정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안나푸르나 남벽
☐ 박영석 원정대 개요
○ 원정대명 : 2011 박영석 안나푸르나(8,091m) 남벽 원정대
○ 원정기간 : 2011. 9. 12 ~ 11. 18(67일간)
○ 등반방식 : 알파인 스타일
○ 원정대원 : 박영석 대장 외 4명
☐ 사고경위
○ 10월 17일(월)
- 오후 7시 15분(현지시간 오후 4시)
: A.B.C(5,100M) 출발(박영석, 이한구, 신동민, 강기석, 김동영)
- 오후 10시 55분(오후 7시 40분)
: 임시텐트 도착(5,670m) 도착, 휴식
○ 10월 18일(화)
- 오전 5시 55분(현지시간 오전 2시 40분)
: 임시텐트 출발(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 오전 7시 25분(오전 4시 10분) : 남벽 출발점 도착
- 오후 4시 15분(오후 1시) : 무전 연락
〈상황이 안좋다. 가스(안개)가 많고 낙석이 많다〉
- 오후 7시 15분(오후 4시) : 무전 연락
〈오늘 목표지점인 A지점 도착 실패, 눈과 가스(안개)를 동반한 낙석으로 운행 중단(6,300m 부근)한다. A.B.C로 하산할 예정이다〉
*실종자 약력*
박영석 등반대장 (1963년생, 동국대산악부OB)
1993 아시아 최초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정
1993-2001 세계 최단 기간 히말라야 8,000m 14개 봉 등정(8년 2개월)
1993-2002 7대륙 최고봉 등정
1993-2005 3극점 도달(남극점 최단기간 무보급)
2005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2005. 4. 30 기네스북 등재)
2006 세계 최초 단일팀 에베레스트 횡단 성공(북릉, 북동릉~남동릉)
2009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등정(Park's Korean Route)
2010 안나푸르나(8,091m) 남벽 등반
2010 남극 그린 원정대 남극점 도달
현 박영석탐험문화재단 상임이사
현 (사)대한산악연맹 이사
신동민 대원 (1974년생, 대구대산악부OB)
1995 알프스 3대 북벽, 드류 등정
2000 에베레스트(8,848m) 북릉-북동릉 등반
2007 히말라야 로체샤르(8,400m) 남벽 등반
2008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등반
2009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코리안 신루트 등정
2010 안나푸르나(8,091m) 남벽 등반
강기석 대원 (1978년생, 안동대산악부OB)
2003 히말라야 로체(8,516m) 서벽 등정
2006 히말라야 로체(8,516m) 남벽 등반
2008 파키스탄 가셔브룸II(8,035m) 등반
2008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등반
2009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코리안 신루트 등정
2010 안나푸르나(8,091m) 남벽 등반
2011 가셔브룸 2봉(8,035m) 등정
******대한산악연맹 박영성대장 사고관련 보도자료 에서 ******
일반 트레커들이 갈수 있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130m
일명"ABC" Annapurna Base Camp
네팔 제2의 관광도시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 산군이 지척이다
안나푸르나 산군의 대표적인 봉우리인 마차푸차레 6,993m(마차=물고기 + 푸차레=꼬리)
물고기 꼬리모양의 신성한 산으로 등반이 금지되어 있고 세계 10대 美峰에 하나이다
푼힐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안나푸르나 산군(좌로부터 안나푸르나 남봉, 히운출리, 마차푸차레)
포카라에서 페와호에 비친 안나푸르나 산군의 일출모습
2001년 파키스탄 K2 (8,611m)원정시 K2메모리얼 앞에서 박영석대장과~
(메모리얼: 등반하다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에 기념비를 모아놓은곳)
소설가 박범신 "그는 그렇게 산이 되었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박영석 대장이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는 이미지가 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작년 이맘때던가, 남극탐험을 얼마 앞두고 재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성공했으니 안락한 생활을 할 때도 되지 않느냐고, 왜 또 그 험한 길을 굳이 가려 하느냐고 범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했다. "이렇게 살아있잖아요!" 그는 거두절미 자신의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탁 두들겼다. 나는 찔끔해서 섬광 같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뻔한 일상에 습관적으로 기대 살고 있는 내 유약한 삶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와 신동민·강기석 대원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는 뉴스가 들리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지금 나는 조사를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산악소설 '촐라체'에서 나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죽고자 가는 게 아니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고 모든 대륙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북극과 남극점을 발로 찍었다. 일찍이 어느 산악인이나 탐험가도 도달하지 못한 대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기록과 함께 그도 나이가 들었고, 올해로 꽉 찬 마흔여덟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새로운, 더 위험한 길을 향해 담대하게 떠났다.
그에게 있어 자본주의 문명이 주는 달콤한 일상은 가짜이고 허울에 불과했다. 이미 그의 발밑에 깔린 히말라야 14좌에 새로운 '코리안루트'를 내겠다는 꿈은 그의 꿈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계속 가지 않겠나?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계속 갈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말하자면 누군가의 등대, 뒤따라오는 누군가의 지도가 되기 위해 이미 위대한 정상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길을 간 것이다. 그러니 그와 그들이 왜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히말라야 14좌를 처음으로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는 빙벽에 둘러싸인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고산 등반가들에겐 한 발 한 발이 모두 ‘무덤과 정상 사이’에 걸쳐져 있으므로 그곳에서 그들은 ‘지각이 더 맑아지고’마침내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는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대인에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존적 모럴이며 비전이다. 그들은 그러므로 야성을 거세당한 우리 대신 그곳에 갔으며, 걸었다. 놀라운 생의 비전을 우리 앞에 열어 보이려고.
차세대 산악인이라 손꼽혔던 신동민 대원은 고된 등반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동료들을 위해 묵묵히 ‘청국장이나 홍어찜’까지 맡아서 조리했던 덕인이었으며, 서른세 살의 강기석 대원은 베이스캠프에서 늘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아카데믹한 산악인’이었다는 말을 뒤늦게 듣는다. 박영석 대장은 물론, 그들에게도 ‘코리안루트’는 개인의 꿈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이상향의 뜻으로 쓰이는 샹그릴라는 본래 ‘언덕 저쪽’이라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언덕 저쪽’에서 신들메를 고쳐 신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산을 내려오며 손을 흔들어줄 것 같다. “산에 가야 산악인이지!” 박영석 대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렁우렁 귓속을 울린다. 그와 그들은 단지 산악인이 아니었다. 우리의 꿈을 대신 짊어지고 간 극상의 모럴, 참된 비전이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들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신동민(37)·강기석(33) 대원은 박영석 대장이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8848m)에 도전했던 2008년부터 함께 등반팀을 이뤘다. 이듬해 '코리안 루트(에베레스트 남서벽과 서릉을 통과하는 루트)' 개척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5cm·74kg의 체격을 갖춘 신동민 대원은 동료 산악인들에게 '괴력의 사나이'로 통했다. 박 대장이 "8500m가 넘는 고도에서 바위에 못질하면서 숨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신동민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신 대원은 2007년 엄홍길(51) 대장과 함께한 로체(8516m) 남벽 등반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히말라야의 최난벽이라는 로체 남벽 1캠프(6000m)부터 4캠프(7900m)까지 루트를 혼자 구축하면서 산악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신 대원은 10살 연상인 부인 조순희(47)씨와도 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2001년 신 대원이 에베레스트 산줄기 푸모리 원정에 나섰을 때 조씨는 여자 동료 한명과 함께 신 대원을 응원하기 위해 푸모리 베이스캠프를 찾았다. 당시 동료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신 대원과 조씨는 슬픔을 나누다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호준(8)군이 있다.
강기석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꼽힌다. 대학생 때인 2003년 세계 4위봉인 로체 등정에 성공했고, 이듬해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 정상에 올랐다. 그는 추위에 적응한다며 해발 5000m 베이스캠프에서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하는 등 개성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강 대원은 박영석 원정대의 막내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지난해 4월 박 대장이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을 때 캠프를 구축하러 나갔다가 낙석에 맞아 오른쪽 무릎이 찢어지고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차돌 같은 사나이'라 불렸던 그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이번 등반에 따라나섰다.
신동민(37)·강기석(33) 대원은 박영석 대장이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8848m)에 도전했던 2008년부터 함께 등반팀을 이뤘다. 이듬해 '코리안 루트(에베레스트 남서벽과 서릉을 통과하는 루트)' 개척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5cm·74kg의 체격을 갖춘 신동민 대원은 동료 산악인들에게 '괴력의 사나이'로 통했다. 박 대장이 "8500m가 넘는 고도에서 바위에 못질하면서 숨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신동민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신 대원은 2007년 엄홍길(51) 대장과 함께한 로체(8516m) 남벽 등반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히말라야의 최난벽이라는 로체 남벽 1캠프(6000m)부터 4캠프(7900m)까지 루트를 혼자 구축하면서 산악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신 대원은 10살 연상인 부인 조순희(47)씨와도 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2001년 신 대원이 에베레스트 산줄기 푸모리 원정에 나섰을 때 조씨는 여자 동료 한명과 함께 신 대원을 응원하기 위해 푸모리 베이스캠프를 찾았다. 당시 동료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신 대원과 조씨는 슬픔을 나누다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호준(8)군이 있다.
강기석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꼽힌다. 대학생 때인 2003년 세계 4위봉인 로체 등정에 성공했고, 이듬해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 정상에 올랐다. 그는 추위에 적응한다며 해발 5000m 베이스캠프에서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하는 등 개성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강 대원은 박영석 원정대의 막내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지난해 4월 박 대장이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을 때 캠프를 구축하러 나갔다가 낙석에 맞아 오른쪽 무릎이 찢어지고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차돌 같은 사나이'라 불렸던 그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이번 등반에 따라나섰다.
신동민(37)·강기석(33) 대원은 박영석 대장이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8848m)에 도전했던 2008년부터 함께 등반팀을 이뤘다. 이듬해 '코리안 루트(에베레스트 남서벽과 서릉을 통과하는 루트)' 개척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5cm·74kg의 체격을 갖춘 신동민 대원은 동료 산악인들에게 '괴력의 사나이'로 통했다. 박 대장이 "8500m가 넘는 고도에서 바위에 못질하면서 숨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신동민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신 대원은 2007년 엄홍길(51) 대장과 함께한 로체(8516m) 남벽 등반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히말라야의 최난벽이라는 로체 남벽 1캠프(6000m)부터 4캠프(7900m)까지 루트를 혼자 구축하면서 산악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신 대원은 10살 연상인 부인 조순희(47)씨와도 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2001년 신 대원이 에베레스트 산줄기 푸모리 원정에 나섰을 때 조씨는 여자 동료 한명과 함께 신 대원을 응원하기 위해 푸모리 베이스캠프를 찾았다. 당시 동료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신 대원과 조씨는 슬픔을 나누다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호준(8)군이 있다.
강기석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꼽힌다. 대학생 때인 2003년 세계 4위봉인 로체 등정에 성공했고, 이듬해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 정상에 올랐다. 그는 추위에 적응한다며 해발 5000m 베이스캠프에서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하는 등 개성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강 대원은 박영석 원정대의 막내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지난해 4월 박 대장이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을 때 캠프를 구축하러 나갔다가 낙석에 맞아 오른쪽 무릎이 찢어지고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차돌 같은 사나이'라 불렸던 그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이번 등반에 따라나섰다.
신동민(37)·강기석(33) 대원은 박영석 대장이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8848m)에 도전했던 2008년부터 함께 등반팀을 이뤘다. 이듬해 '코리안 루트(에베레스트 남서벽과 서릉을 통과하는 루트)' 개척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5cm·74kg의 체격을 갖춘 신동민 대원은 동료 산악인들에게 '괴력의 사나이'로 통했다. 박 대장이 "8500m가 넘는 고도에서 바위에 못질하면서 숨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신동민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신 대원은 2007년 엄홍길(51) 대장과 함께한 로체(8516m) 남벽 등반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히말라야의 최난벽이라는 로체 남벽 1캠프(6000m)부터 4캠프(7900m)까지 루트를 혼자 구축하면서 산악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신 대원은 10살 연상인 부인 조순희(47)씨와도 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2001년 신 대원이 에베레스트 산줄기 푸모리 원정에 나섰을 때 조씨는 여자 동료 한명과 함께 신 대원을 응원하기 위해 푸모리 베이스캠프를 찾았다. 당시 동료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신 대원과 조씨는 슬픔을 나누다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호준(8)군이 있다.
강기석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꼽힌다. 대학생 때인 2003년 세계 4위봉인 로체 등정에 성공했고, 이듬해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 정상에 올랐다. 그는 추위에 적응한다며 해발 5000m 베이스캠프에서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하는 등 개성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강 대원은 박영석 원정대의 막내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지난해 4월 박 대장이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을 때 캠프를 구축하러 나갔다가 낙석에 맞아 오른쪽 무릎이 찢어지고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차돌 같은 사나이'라 불렸던 그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이번 등반에 따라나섰다.
첫댓글 박영석 대장은 산악인이 산에서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세분 그토록 염원하던 안나푸르나에서 영원히 안식하시길 기원합니다 ~~~~~~~~~~~~~~~
현실의 안락함 보다는 산악인으로서의 가치에 더 중심을 뒀던 님....생사의 고비를 몇 번씩 넘나들면서도 행복해 했던 님...영혼이 묻힌 그곳이 그 분께는 천국이겠지요..
산악소설 촐라체를 읽었던 기억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자본주의 문명이 주는 일상의 안락함을 외면하고 히말라야 14좌에 새로운 루트를 내겠다는 그의 꿈이 하늘나라에서라도 이루시길..
어제 sbs 에서 실종된 산악인 대한 방송을 보면서 !~어쩌면 그들은 보람된 삶이였다는 생각들였읍니다 !~좋아하는 곳이 천국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