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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일본 총리가 트럼프랑 부부처럼 나와서 질투가 날 지경인 가운데, 트럼프 선물로 금관 & 훈장까지 제작해서 공을 들인 관세 협상이 일단 타결되었습니다. 3500만 불 투자 중 2.000만 불을 10년 분납으로 한다는 것 같으니, 관계자들은 꼼꼼히 분석해서 브리핑해 주시라. 한국 측에서는 핵잠수함 연료를 공급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트럼프가 즉답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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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회담은 시진핑 얼굴에 띤 미소만큼 성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트럼프가 가장 공을 들인 북미 회담은 미사일을 쏜 걸 보면 물 건너갔습니다. 아이러니인데 트럼프를 막 대하는 건 지구상에 정은이가 유일합니다. 같은 악동으로서 트럼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정은이를 리스펙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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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아가 죽는 므깃도 전투를 다루는 본분(대하 35:20-27)에서 히스기야보다 한 수 위인 요시야의 마지막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죽음이었습니다.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흡사합니다. 애굽 왕 느고는 요시야를 대적하러 올라오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무슨 연유인지 요시야는 싸움에 나섰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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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텍스트를 살펴봐도 그가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결정한 것이 문제였다고 보는 건 너무 억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온 요시야의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도 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까? 공주야! 살면서 종종 안타까운 죽음을 본다. 너무 때 이른 죽음, 그것도 선량하고 재능 있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듭거듭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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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느낌이야 자연스럽지만, 역으로 오래 살고 많은 일을 하면 원이 없는 인생인가? 그건 아니더라도 요시야가 애급의 전력을 얕잡아 본 것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데 있는 것도 아니질 않으가? 결국 죽음의 문제는 변화의 패턴(생성-소멸)으로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동의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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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과 알튀세르의 차이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지젝과 알튀세르는 표면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철학자처럼 보이지만(구조/알튀세르vs주체/지젝) 사실 그들의 공통 기반은 매우 깊고 철저합니다. 두 사람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20세기 후기 사상 속에서 다시 과학적·이론적으로 세우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만나며, ‘인간주의적’ 혹은 ‘경험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동일성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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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지젝은 마르크스를 ‘소외된 인간의 해방’으로 읽는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진정한 자아’, ‘인간 본질’ 같은 개념을 의심합니다. 주체는 결핍과 분열 그 자체로, 인간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구조에 의해 호명된 효과라는 겁니다. 인간은 완전한 주체가 아니라 상징적 구조의 균열로 봅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여 사회질서를 재생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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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욕망과 쾌락의 구조 속에서 주체를 ‘붙잡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기 위한 필수적 메커니즘인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거짓임을 알아도, 쾌락적으로 그 안에 머뭅니다. 지젝이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허위의식이 아니다”라는 입장으로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실질적 구조”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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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한 부분이다" 알튀세르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등 각 구조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복합체로 보고 지젝은 상징계(사회 구조)는 주체의 욕망과 관계없이 자체 논리로 작동한다는 것 같습니다. 둘 다 사회적 구조는 개인의 의식이나 의도에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 체계라고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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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주체의 의식이 아니라, 기호적·구조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사회는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구조적 체계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한다”고 보고, 지젝은 라캉을 따라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적 욕망의 구조”라고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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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과학”으로 재정립하려 했고, 지젝은 마르크스를 라캉과 헤겔의 변증법으로 다시 읽어 “주체적 변증법의 갱신”을 시도 한 걸 보면 둘 다 단순한 정치 이론이 아니라,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실천주의적 경향을 넘어, 이론적·철학적 수준에서 마르크스를 재해석하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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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알튀세르와 지젝은 모두 인간주의적 마르크스 해석을 거부하고,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자율성을 인정하며,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작동을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적으로 갱신하려 했습니다. 단지 알튀세르는 구조의 과학’에서, 지젝은 주체의 균열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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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기계(구조)다(알튀세르)” “그 기계가 작동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지젝)"언뜻 보면 같은 기계(이데올로기 구조)를 분석하지만, 하나는 기계의 논리에, 다른 하나는 기계에 매혹된 주체의 욕망에 주목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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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4>회입니다. "윤국이가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서울에 갔으니 네다바이 당하는 건 수순입니다. 윤국이 집을 나가자 환국이가 서울로 찾아갑니다. 환국은 온 김에 아비 길상이를 면회합니다. "혹시 윤국이에게 문제가 생겼느냐?(길상)" "사실은 윤국이가 집을 나갔습니다(환국)" "만약 나를 찾아오면 잘 타이를 테니 너는 돌아가서 어머니를 잘 지켜드리거라(길상)" 어미 집을 떠난 윤국은 상거지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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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거리 주막집 처마에 윤국이 서성거립니다. "거지새끼다! 재수 없어!" "애! 너 갈 데 없지. 옷은 거지꼴이라도 옷은 귀공잔데.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창녀)" 집나간 아들을 걱정하는 어미가 서성거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울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어요. 울면 어머니가 슬퍼한다고 했어요(양현이 서희에게)" "명희 씨 보십시오. 난 누구보다도 얽매여 산 사람이오... 도피의 길을 헤맸소. 난 지난날 어떤 기생을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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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동정이라 생각했고 나중엔 남자의 바람기로 치부했소. 남몰래 내 딸을 낳았다는 걸 말았을 때 난 수치를 느꼈소. 그 딸을 서희 씨가 돌보고 있소..." 상현은 명희에게 자신의 딸에 대해 알려 주면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달라며 자신의 원고료를 동봉합니다. 명희의 집입니다 "취직을 부탁드리러 왔어요. "누군가를 위해, 나를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게 중요하지요(유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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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미상 데리려 왔어요(오가다)" '"당신은 일본인이고 나는 조선 여자예요. 우리는 절대로 합칠 수 없어요(유인실)" "우리 일본/중국으로 가요(오가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해주시겠어요!" 유인실은 오가다의 품에 안겨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고... 그래도 나는 내가 당신에게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어요(유인실)" "혹시 윤국이 아니니! 윤국아! 나는 교장선생님 댁 딸이야!" "너의 생각을 네 아버님은 다 알고 계셔(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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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의 설득 이후 윤국은 그 길로 아버지 면회를 갑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관록이 빛바랜 벽돌 컬러에서 절절히 느껴집니다. "서울에서는 무엇을 봤니?(길상)" "내일이 없는 이들을 보았어요" "윤국아! 과거는 죽어버린 거야!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야!" 아들 둘의 면회를 받은 길상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길상은 힘을 기르라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나는 집을 떠나는 것으로 자식을 지켰지만, 네 어머니는 목숨을 내어 놓으며 너희들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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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머니를 슬프게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동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울었습니다. 결국 윤국은 명희와 함께 서희에게 돌아옵니다. 성경의 <탕자>메타포가 차용된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입니까?(윤국)"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명희)" 누가 기다린다고 준구도 기차를 타고 평사리로 내려갑니다. '5만 원을 모았으니 한 달에 사오백을 써도 10년은 족히 쓸 수 있어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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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수는 준구가 내려온 것에 예의주시합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통영으로 갈 모양이구먼(두수)" "먼 길까지 오셔서 고맙습니다. 어서 오세요!" "양현아! 인사 올려야지!(서희)" "실은 하얼빈에서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원고료를 양현이를 위해 써주시라는 내용입니다(명희)" 서희를 만난 명희는 양현을 보고는 자신이 기르면 안 되겠느냐고 합니다. "그건 상현 씨의 의사입니까?(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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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그럼 안 되겠습니다(서희)" "무사히 돌아왔으니 꾸중은 하지 않겠다. 아버님을 뵈었니?(서희)" "힘을 키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슬프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어머니(윤국)" "아버님이 어쩐 일이십니까?(병수)" "거두지 않았다 하여 자식이 아닙니까? 아버님이 원한다면 앞으로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여길 떠나지는 않겠습니다(병수)" "다시는 널 찾지 않을 것이야(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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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구가 아들 병수를 찾아갔지만 자신의 뜻과 다르자 성질을 부리며 나갑니다. 앗! 두수입니다. 조준구가 놀라서 뒤로 자빠집니다. "종족을 감추고 숨으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두수)" "제발 목숨만 살려줘!(준구)". "내 아버지는 네 네놈 때문에 죽었어(두수)" "두수가 고름을 주자 준구가 쓰러집니다" 형수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조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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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지? 같이 들어오니 말이오!(용하)" "아주 오랜만에 동생이 왔는데 우리 저녁은 밖에서 먹지" "그래서 결론을 냈어. 우리 이혼을 해야겠어" 조용하는 명희와 찬하가 함께 들어오자 보기 좋다며 식사를 하면서 이혼을 선언합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두 사람이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 찬하는 형을 별장으로 데려가 설득하려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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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오해를 했다 그 말이지(용하)" "이제 당당하게 이혼하고 형수와 결혼하겠습니다(찬하)" "형이 이혼하면 반드시!" "네놈이 그렇게 그 여자를 사랑하냐!(용하)" 조용하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명희는 "이혼에 동의한다"는 쪽지를 남겨 놓고 벌써 떠나버렸습니다. '역관의 딸 주제에 백자 부인의 자리를 차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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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사장이 생겨서 당분간은 편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현이의 사진을 동봉합니다(명희가 상현에게)" "김길상이 곧 사면된다고... 여기저기 손을 썼나 보군(두수)" "우리 집엔 뭐 하러 오셨소(윤국)!" '넌 의기도 있고 총명하긴 한데 지혜롭진 않은 것 같아. 곧 니 아부지가 출소를 한다니 네놈도 자중하는 게 좋을 거야(두수)" "장 서방! 송관수 그 사람을 만나고 싶네!"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고 있습니다(혜관)" "500석 땅문서요(서희)" "어찌 순수 내주십니까? 도대체 마님은 친일파요 독립군이요(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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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두수가 찾아와 협박하자 송관수를 만나 어차피 빼앗길 땅을 군자금으로 주는 시퀀스도 성경의 <지혜로운 청지기>를 그대로 빼다 닮았습니다. 악명 높은 서대문 교도소 벽돌이 소름 끼칩니다. 길상의 출소 마중을 서희가 직접 나갔습니다. 지금 길상의 느낌이 뭔지 아는 사람만 알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을 하시겠습니까?(서희)" "알고 있습니다. 제가 찾은 땅은 제 삶을 지켜주지 않고 한낮 재물일 뿐입니다.(서희)" "집으로 갑시다. 아이들이 보고 싶소!(길상)" "그 아이가 양현입니다" "봉순이를 닮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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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선 알고 있소. 하지만 그 아이는 이부사댁 핏줄입니다" "자존심 많은 사내가 상처를 입었겠군" "아이들을 데리고 평사리에 다녀오겠소(길상)" 평사리 최 참판 댁 가는 길에 만난 두수가 길상을 희롱하며 조심하라고 고름을 줍니다. "분하냐?(길상이 윤국에게)" "길상아! 나온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오랜만이네(영팔)" 하동 평사리입니다. 인제 아무도 안 남겠구나" "형님! 한복아! 잘 있었나!" "나리라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예! 예! 나리!(강봉기)"
2.
이 글은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 구조와 주체, 신앙과 구원의 문제를 한데 엮은 사유의 모자이크다. 다카이치-트럼프의 정치적 풍경으로 시작해, 요시야의 비극적 최후, 지젝과 알튀세르의 철학적 대화, 그리고 박경리의<토지> 속 인물들이 겪는 구속과 해방의 이야기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정치적 현실은 ‘구조’로서 주체를 호명한다. 트럼프와 시진핑, 정은으로 이어지는 국제 관계의 드라마는 알튀세르의 “기계처럼 작동하며,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를 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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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글쓴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젝의 말처럼 “우리가 그 기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안에 머문다. 이데올로기적 현실 속에서 쾌락과 욕망이 주체를 붙잡는다는 것이다. 이 사유의 여정은 요시야의 죽음으로 전환된다. 하나님을 따르던 의로운 왕의 비극적인 종말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왜 이런가?”라는 물음은 신앙의 본질을 묻는다. 그러나 글쓴이는 그를 단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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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죽음은 생성과 소멸의 패턴”으로, 변화의 필연성 속에서 읽는다. 여기서 요시야는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로서의 인간, 구조 속에서 깨어지는 주체의 상징이 된다. 이후 인용된 <토지>44회의 줄거리는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문학의 구체성으로 끌어온다. 윤국의 방황과 길상의 귀향, 명희의 결단, 서희의 지혜는 모두 “주체의 균열”과 “구조의 압력”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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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장면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주체가 다시 ‘호명’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탕자의 귀향’과 ‘지혜로운 청지기’의 성경적 은유가 겹치며, 인간의 구원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끝없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순환임을 드러낸다. 결국 이 글은 세 가지 층위에서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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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의 층위... 세계는 냉혹한 구조의 기계다.
2. 철학의 층위... 그 기계는 우리의 욕망으로 작동한다.
3. 신앙과 문학의 층위... 그럼에도 인간은 귀향을 꿈꾸며, 변화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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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길상, 요시야, 그리고 우리 자신은 모두 구조의 한가운데서 뜻을 묻는 존재다. 알튀세르의 구조가 인간을 호명하고, 지젝의 욕망이 인간을 묶을지라도, 여전히 인간은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 자체가 바로 신앙의 증거이자 주체의 마지막 자유일 것이다. 구조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주체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25.10.31.fri.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