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쿨링의 길을 여는 어느 아빠 선교사의 고백
-임스데반 선교사(태국, GMP)-
홈스쿨링을 하게 된 구체적인 동기들
우리 가정이 홈스쿨링을 결심한 주된 동기 중의 하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한국적 정체성을 심어주고 싶어서였다. 한국 커리큘럼을 통해 우리 아이에게 한국적 정체감을 심어주고, 어느 정도 한국어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적절한 홈스쿨링 교재도 없었고, 선례가 거의 없었기에 불안하기도 했다. 선교지에 있는 일반학교에 보내면서 한국 커리큘럼을 병행해서 하는 경우는 있지만 전일제로 한국 커리큘럼만을 운영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새로운 시도였기에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의 동기는 무엇보다 실제적인 문제, 즉 재정적인 면이었다. 우리가 일하게 될 방콕은 국제학교들이 여럿 있었고 어느 정도 선택의 폭도 있었다. 그러나 재정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나는 소속된 선교부의 정책을 따라 “페이스 미션”(Faith Mission:재정적 필요에 대해 직접 요청하지 않고 오직 기도를 통해 공금받는)을 하기로 했다.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고, 신학 학위도 국내 교단 배경이 없는 해외에서 받은 나로서는 모금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때문에 홈스쿨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또 다른 동기는 좀더 선교 정책적인 면이다. 우리 가정의 사역대상의 경우 대부분 교육환경이 어려운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서 적절한 자녀교육 대안이 없으면 이들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홈스쿨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두 텀 또는 세 텀(초등학교 졸업 때까지)정도는 지역에 구애됨 없이 사역적 필요를 따라 융통성 있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기에 이 점에서 우리 부부는 선구자적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홈스쿨링이 한국 선교의 새로운 자녀교육 대안이 되려면 그 열쇠는 그 누구보다도 선교사들 자신에게 있다. 선교사 자신들이 어느 정도 부담을 갖고 시도하고 다양한 케이스들을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새로운 교육대안을 만들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홈스쿨링을 시작하기까지의 어려움
우리 가정이 선교지에 도착하여 홈스쿨링에 대해 선배 선교사님들께 말씀드렸을 때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여러 분들이 염려를 하셨다. 아직 홈스쿨링의 개념도 정착되지 않은 우리 교육상황에서 홈스쿨링은 모험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분들은 특히 영어에 대한 나름대로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다. 또 하나는 한국사회에서는 대학진학이 중요한데 학적이 없는 홈스쿨링은 아이 장래에 어려움이 될 수 있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 홈스쿨링의 현실: 우리 교육의 황무지 오지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 어쩔 수 없이 홈스쿨링 하고 계신 분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이 분야는 거의 개척되지 못한 황무지였고, 한국 상황에서는 이해가 전무했다. 선교부 자체도, 우리가 느끼기엔, 학교에 보내면서 병행해서 한국 교과를 보충하는 것을 선호하는 듯했다. 심정적인 지원을 해 주는 분들이 있었지만, 외로운 시도였다.
- 실패에 대한 심리적인 두려움: 자녀교육에 대한 모험은, 실패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만약 잘못하여 아이 생애에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이 된다면..’하는 불안감이 가장 싸우기 힘든 싸움이었던 것 같다.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에 우리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평가해 볼 수 없었고, 그러기에 이 불안감은 우리가 늘 안고 가야 할 부담이었다.
은혜스러운 시작
여러 예상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셨다. 예사랑 초등학교(우리 홈스쿨링의 이름)는 98년 8월초에 개교식을 갖고 성대히(?) 시작되었다. 학교명, 교훈도 함께 정하고 교실 단장도 했다. 가까운 선교사 몇 분이 오셔서 예배와 함께 축사도 해주었다. 의미 있는 출발이 무척 중요함을 깨닫게 하는 모임이었다.
수업은 집의 한 방에 교실을 꾸미고 진행되었다. 시간 진행은 법정 시간수를 약간 축약하고(40분수업), 영어를 첨가하는 등 우리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시간은 오전 8시 30분에 경건의 시간을 시작으로 두 과목을 하나로 묶어 80분씩 두 차례 수업을 했다. 경건의 시간을 합쳐 오전에 5교시의 수업을 한셈이다. 오후에는 주로 영어 홈스쿨링 교재를 중심으로 영어과목과 예체능 과목을 했다. 예체능 과목은 미술을 전공하고 근처에 살던 홍지아 자매와 다른 지역에 피아노 단기 교사로 온 정혜정 선생의 도움을 받아 실시했고, 수영을 중심으로 체육시간도 가졌다. 교사 이동이 잦아 정기적이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지빈이는 예체능 시간을 그리워한다. 영어과목은 아빠가 담당했는데 더운 오후에 지친 상태에서 영어를 하니 짜증도 내고 자주 교실이 전쟁터로 변하곤 했다.
공부하면서 겪은 이런 저런 이야기들
짐작하듯이 홈스쿨링의 가장 큰 어려움은 부모가 교사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조금만 힘들면 짜증내고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한다. 학교라는 그룹 속에 있었다면 참을 문제도 홈스쿨링에서는 문제가 된다. 부모라도 절제되고 원칙적인 성격이었다면 어느 정도 보완이 되겠지만 우리 부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해 수업시간이 자주 험악해지기도 했다. 아이의 학습동기를 유발해주고 흥미 있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교재 등이 없는 상황에서 수업을 하자니 자발적인 수업분위기 유도가 힘들었다. 그러니 힘들어하는 과목이나 주제는 한동안의 긴장을 거친 후 부모, 자녀 양측 모두 포기 하고 넘어갔다. 이런 과목은 아이의 발전이 없었는데, 지빈이의 경우 작문이 그 한 예였다.
전환기의 고민들
우리는 홈스쿨링을 진행하면서 세운 한가지 원칙이 있다. 우리 가족 모두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합의가 되면 언제든지 그만 두는 것이었다. 실제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한번은 지빈이기 잘못을 해서 반성문을 썼다. 초등학교 3학년 초였던 것 같다. 그런데 써 놓은 글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가슴이 내려 앉았다. 써 놓은 글이 유치원생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번은 지빈이의 학습태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홈스쿨링을 혼자 하다보니 경쟁상대가 없는데다가 지빈의 낙천적 성격이 가미되어 도무지 학습진전이 없어 보이는 때가 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차례 중도하차 하고픈 순간이 있었다. 이때마다 가족 전체의 토론과 재합의 과정을 거쳤고 다시 힘을 모으곤 했다. 학적 문제도 전환기의 고민거리였다. 나름대로 학적을 유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성적표를 만들기도 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무학적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한국의 대학입학 문제와 연관하여 문제가 됨을 나중에 발견했다. 이 점은 앞으로 홈스쿨링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또 다른 고민은 교재에 대한 것이다. 교과서를 사용하다 보니 한국적 상황을 기초로 한 학습내용 전달이 어려웠다. 올 초(2001년)부터 국내의 한 유명 학습지를 이용하고 있는데 흥미유발, 학습평가 등 여러면에서 기존의 문제해소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교재 역시 홈스쿨링용 교재는 아니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간의 시간을 뒤돌아보면서-얻은 것과 잃은 것
아마 홈스쿨링 시도를 통해 약간의 ‘희생’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희생은 홈스쿨링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해외 선교로 부르심을 받을 때 이미 내표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바라기는 또 다른 분이 ‘수용 가능한’ 희생을 감수하고 홈스쿨링이 이어져 선교사 자녀교육에 새로운 발전이 있길 바랄뿐이다.
우리 지빈이는 타고 난 성품을 고려해 볼 때 그룹 속에서 자랐다면 좀 더 리더쉽도 있고 자신감 있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3년간 가정이란 제한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이런 장점을 개발할 기회를 잃지 않았나 싶다. 또 하나는 모든 MK의 고민일 수도 있지만, 지빈이는 영어도, 태국어도 한국어도 모두 어중간한 수준인 것 같다. 한가지 언어로 학습 했다면 더 자신감을 가진 아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집단 속에서 자란 아이에 비하면 학습동기도 약하다.
그러나 홈스쿨링을 통해 얻은 것이 더 많다. 먼저 지빈이는 늘 부모와 함께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부모와 깊은 사귐을 가졌다. 이 하나만으로도 위의 아쉼움들을 보상하고도 남는다고 믿는다. 또 지빈이는 한국인으로서 분명한 정체감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과로 4학년 1학기를 마쳤기에 한국어 학습능력도 어느 정도 구비될 수 있었고, 한국적 정서를 가진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동시에 지빈이는 태국적인 아이로도 자랄 수 있었다. 마을에서 태국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기에 태국어도 잘 구사하고 무엇보다 태국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아이의 신앙교육이다. 홈스쿨링을 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기도 속에서 자랄 수 있었고 이것은 아이의 생애에 커다란 축복이었다. 좋은 단기 선생님들, 방문자들과 사귀면서 다양한 배움을 가질 수 있었다. 홈스쿨링은 부모와 자녀 중심의 프로젝트이지만 동시에 많은 분이 함께 의미를 갖고 동역할 수 있는 장이었다.
발전을 위한 생각들
3년 여 짧은 홈스쿨링 경험을 통해 우리는 홈스쿨링이 한국 선교사 자녀교육의 대안으로 개발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쉽지 않은 걸음이었지만 아이 생애 전체를 놓고 봐도 결코 손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발전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홈스쿨링 교재가 개발되어야 한다. 학습목표를 이루되 흥미를 갖고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한국에 나와 있는 다양한 교육교재를 생각할 때 이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본다. 둘째, 영어에 대한 방안이다. 많은 분들이 영어를 생각할 때 홈스쿨링이 주저되리라 생각된다. 셋째, 홈스쿨링 가정 지원을 위한 네트웍이다. 홈스쿨링은 어떤 면에서 외로운 싸움이고 자주 낙심을 경험하는 여정이다. 여러 모양으로 서로 교류할 수 있는 틀들을 개발해야 한다. 서양 사람들처럼 한국 홈스쿨러들을 위한 세미나 등도 대안이 되리라 본다.
나는 그렇게 가정적인 편이 못된다.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홈스쿨링을 하면서 변했다. 아내와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 것 같다. 홈스쿨링은 우리 가정이 선교지 내에서 견고한 선교기지가 되도록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지빈이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선교사이기에 어느 정도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단다. 그러나 아빠와 엄마는 언제나 너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해 왔단다. 아빠는 지금도 홈스쿨링이 네게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믿는다.”
<자료제공: 엠케이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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