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7. 10. 9 프랑스 베르사유~1836. 11. 6 프리울리 고리치아(지금의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음).
프랑스의 왕(1824~30 재위).
그의 재위기간은 왕정복고 이후 신수권(神授權)에 의거한 군주제의 전통과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인 민주주의 정신을 조화시키려다 실패한 부르봉 왕가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왕세자 루이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사이에서 5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르투아 백작 작위를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1782년 지브롤터 포위전 당시 프랑스군에 복무했는데 이는 군경력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한 기분전환을 위해서였다. 결국에는 방탕한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정치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프랑스 혁명이 임박한 시기에는 제3계급에 대한 양보조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바스티유 함락(1789. 7. 14) 직후 형 루이 16세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를 떠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갔다가 나중에 피에몬테의 토리노로 갔다. 이로써 그는 망명한 최초의 왕족이 되었으며 1791년까지 형 프로방스 백작(루이 18세)과 합류하지 못했다. 명목상의 왕이 된 프로방스 백작에 의해 국왕대리관으로 임명되었고,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까지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영국 등지를 돌아다녔다. 이 기간중에 방데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봉기를 지도하기 위해 방데에 상륙하려다 실패했다. 1814년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 18세의 집권 동안 극단적인 반동세력이었던 초왕당파(Ultras)의 당수가 되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죽자 샤를 10세로 왕위에 올랐으나 3차례의 반동주의 내각을 거치는 동안 그의 인기는 추락했다. 첫번째 내각은 주로 정부 공채를 보유하고 있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희생시킴으로써 국유화된 망명 왕당파들의 토지를 보상해주었고 성직자들에게 더 큰 권한을 주었으며, 특정한 '불경죄'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하도록 했다. 2번째 내각은 좀더 온건하기는 했으나 1828년 1월부터 1829년 8월까지 존속하다가 자유주의자와 극우파의 연합으로 무너졌다. 그러자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샤를은 여론을 무시하고 반동적인 극우 교권주의자이며 악명 높은 쥘 드 폴리냐크 공에게 내각구성을 위촉했다. 이로 인해 커다란 소요가 뒤따랐으나 그는 더욱 완강해졌을 뿐이며 급기야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1830년 3월 자유주의 의원들이 폴리냐크 내각을 반대하자 샤를은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5월의 선거에서 국왕의 반대파가 다수당이 되었다. 7월 26일 국왕은 4개 칙령을 공포했는데 이러한 탄압조치가 오히려 파리 급진파들을 부추겨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미처 이런 사태에 대비하지 못했던 그는 우선 베르사유로 피신, 랑부예로 옮겼고 반란을 진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8월 1일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국왕대리관으로 임명하고 다음날 자기 손자인 보르도 공작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루이 필리프가 왕권을 차지하자 영국으로 물러났고, 결국 프라하에 정착해 죽기 직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