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는 일본의 대조선 우민화 정책, 식민통치 수단이었다!!!
<위 것이 한국화투, 아래 것은 일본 하나후다>
화투(花鬪)는 일본에서 전래되었는데, 이 역시 일본의 전통적인 놀이도구는 아니다. 하나후다(花札)로 불리는 화투는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군대진영의 하나인 시코쿠(四國)지역 영주(長宗我部 元親,ちょうそかべ もとちか)가 1597년 가신들에게 ‘도박가루다(博奕かるた)를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일본을 드나들었던 포르투갈 선원들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칭도 포르투갈어 종이판의 의미를 가진 ‘carta’란 단어에서 유래된 가루다(かるた, カルタ, 歌留多、加留多、嘉留太、骨牌)로 표기되어 오다가,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서서 놀이도구로서 보다도 도박용구로 사용되자 경찰에서 불법단속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 후다(ふだ, 札)를 붙여 하나후다(花札)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유럽에서 전래된 초기카드에는 컵․동전․곤봉․칼 등이 그려져 있었으나 에도(江戶)시대(1603~1867) 중기(1716~1789)에 이르러서는 봉건영주(大名)들의 정원의 꽃과 나무를 모티브로 일류 화공들이 화조(花鳥)를 그려넣은 카드, 즉 하나가루다(花かるた)를 상류층 부녀자들이 사용하였고 일반대중들은 목판화로 찍은 카드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주사위(さいころ, 賽子)도박과 함께 카드도박이 성행하자 1791년 카드의 제조,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어 음지에서 통용되다가 군벌통치(幕府, ばくふ)가 끝나고 사회분위기가 바뀌자 메이지 20년대(1887~1896) 들어서서 화투붐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1902년에는 골패세법(骨牌稅法)을 제정하여 화투가 합법적인 도박용구로 통용되게 되었다. 헌법학자이자 화투연구가인 에바시 타카시(江橋崇)씨는 《花札》란 책의 서문에서 화투치는 것(花札で遊ぶ)을 “수목이나 사계절 꽃 그림들을 손에 들고 맞추어 가면서 자연을 경애하고 감상하며 그 변화를 따라가며 아름다움과 느낌을 즐기는 일본문화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하나후다와 한국화투가 다른 점은 ①한국화투 사이즈가 일본 하나후다 보다 좀 더 크다, ②한국화투의 20끗 5장에는 원안에 붉은 글씨로 광(光)자가 쓰여 있다, ③홍단에 쓰인 글자가 일어, 한국어로 각기 다르고 한국화투 청단에는 글자가 있으나 일본 하나후다에는 없다(초단에는 모두 없음), ④오동과 비의 달 순서가 바뀌어 있다(일본은 비가 11월, 오동이 12월)는 점 등이다. 화투장에 그려진 그림들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①1월의 새가 발톱모양이나 체중을 고려할 때 소나무 가지에 앉을 수는 없어 황새가 아니야는 의문도 있으나 가지에 앉은 것이 아니라 땅을 디디고 있는 학이다, ②2월 매화의 새는 색갈로는 다갈색인 꾀꼬리(ウグイス)보다 녹색인 동박새(メジロ)에 가까우며, 벌레를 먹는 꾀꼬리와 매화는 관련성이 없지만 동박새는 매화꽃의 꿀을 먹기 위해 날아 앉는다, 지방에 따라 그리는 사람에 따라 색갈이 다르므로 어느 새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한국 무지개 화투는 녹색도 다갈색도 아님), ③홍단에 쓰여진 “あかよろし(붉은색좋다)”의 두 번째 글자 か는 の처럼 보이지만 한자 可의 초서체다. 3월 벚꽃 홍단에는 みよしの라고 쓰여 있는데, 나라현 벚꽃 명소인 요시노(吉野)의 벚꽃을 의미한다, ④팔공산의 달 아래에는 원래 억새(芒,すすき)가 그려져 있었으나 점차 사라져 검은 색만 그렸다. 공산 10끗 그림의 기러기 3마리 중 제일 아래 기러기는 한국에 수출할 당시 일본 국내 것과 다르게 붉은 색으로 그려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⑤6월 모란꽃 10끗 짜리는 꽃 위에 나비, 그 위에 구름을 그린 것으로 위아래를 구분한다, ⑥4월은 흑싸리가 아니고 등나무이며, 5월은 난초가 아니고 창포다.
동양화 읽는 법의 저자인 조용진교수에 따르면 꽃과 새, 나비 등의 의미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 건너가면서 제도와 풍습의 차이, 화투를 그리는 화공들의 이해부족 등으로 인해 본래의 그림이나 의미와는 변질되었다고 하는데, 5월 모란의 경우 모란은 부귀를 의미하는데 나비를 그리면 80세까지만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제한적 의미가 되어 그리지 아니함만 못하게 되었고, 3월은 과거에 급제하라는 어사화인 살구꽃 이어야 맞으나 과거제도가 없었던 일본에서 벚꽃으로 바뀌었으며, 2월 매화의 새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2월의 새인 봄의 전령사 까치가 아닌 5월 철새 꾀꼬리(동박새)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12월의 비는 손님을 의미하는 데, 이는 비 피(붉은 화투장)가 의미하는 사립문 비(扉)에서 문이 열리면 손님이 온다는데서 유래하였던 것으로 비 광의 우산을 쓴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로 잘못 알고 있다고 한다.
화투를 돌리고 치며 화투장별 끗수(20끗-광, 10끗, 5끗, 1끗-피)계산방법은 기본적으로 같으나 단과 약은 우리와 다소 다르다. ‘88の遊ひ方’의 경우 3인 이상이 칠 때 죽는 사람, 즉 안 치는 사람 몫을 10점으로 계산하여 이긴 사람에게 10점을 더하여 주고 판을 마쳤을 때 88점을 기준으로 제일 점수가 많은 사람이 승자가 되며 승자와 점수 차 만큼을 승자에게 지불한다. 고스톱처럼 이미 이겼는데도 점수를 더할 자신이 있으면 ‘下げ’(사개-고)를 선언, 계속 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거나 자신이 점수를 더 내지 못하면 지게 되는 것은 우리나라 고스톱과 유사하다. 판을 끝낼 수 있는 약(出來役-できやく)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고도리(매조 10끗의 동박새, 등나무 10끗의 두견새, 팔공산 10끗의 기러기 3마리) 대신에 猪鹿蝶(이노시카쵸우, 붉은 싸리 10끗의 멧돼지, 단풍 10끗의 사슴, 모란 10끗의 나비) 약이 있고 피(かす, 槽)로 날 수 있는 약이 많고 점수도 높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일본화투는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었는데, 1888년에는 놀이기구로서가 아닌 토산품으로 미국에 수출되기도 하였으며, 일본인이 이민 간 하와이에는 트럼프크기의 화투인 ‘사쿠라카드’가 제조되었고 미 서부지역에 노동자로 일했던 일본인들 사이에는 화투도박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1889년 헌법개정으로 대일본제국이 출범하면서 대외팽창정책을 추구, 홋카이도, 타이완, 한국, 대화태, 만주, 청도, 남양군도 등 개척지나 식민지, 조차지, 신탁통치지역에는 많은 일본병사나 근로자들, 상인들이 진출하였는데 어김없이 화투가 놀이기구로 따라다녀 하나후다는 ‘대일본제국의 표준장비’가 되었다. 한반도 전래와 관련하여 에바시씨는 1894~5년 청일전쟁 기간 중 일본병사들이 화투를 대량으로 휴대반입한 것이 한반도에 화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계기였으며, 이후 1904~5년 러일전쟁기간 중에 또다시 대량의 화투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조선인들)도 즐기게 되어 새로운 수요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2년 일본에서는 ‘사회의 풍교를 해하는 유희’인 하나후다에 과세하는 골패세가 도입되어 한 몫당 소매가격과 동일한 20전의 세금이 부과되자 판매가 격감하여 재고가 쌓였는데, 한반도에서 신규수요가 발생하여 재고화투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국내 판매용에는 세금이 부과되었으나 수출용은 당초부터 비과세하였는데, 1904년에는 34만 몫이 수출되었고 1910년에는 86만 몫, 1911년에는 120만 몫 넘게 수출하여, 1907~11년 5년간 국내소비량 312만 몫보다 많은 376만 몫이 수출되었는데, 대부분이 한반도(조선) 대상 수출이었다고 한다. 일본 각지에 체재하다가 귀국하는 사람이 늘어나 일본 각 지방의 게임규칙이 한반도에 전래되었으며, 을사늑약 전후로는 인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연도에 화투를 판매하는 상점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일본 후쿠오카 오무다시립 미이께가루다역사자료관 소장 에도 중기 그림화투>
한편 《賭博の 日本史》 저자인 마쓰가와(増川 宏一)씨는 “가루다류의 수출이 급증했던 시기는 조선침략과 식민지화가 한층 더 노골화된 시기로 반일운동이 격화되었던 시기와는 대조가 되는데, 개개의 무역상들의 상술만이 아니라 정부와 군부가 정책적인 의도를 갖고 조선에 들어가게 했다”고 기술하면서 “1908년에 설립된 동양척식회사도 조선 농민에게 화투류를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다. 또 “군국주의 고취를 위해 일본국내에서는 도박을 금지했지만 식민지에서는 반일운동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우민화정책을 진행시키는 데에 화투는 좋은 도구가 되는데, 1917년 화투류 수출량은 1763만 몫이라는 놀라운 수량이었으며, 1914~17년 4년간 5000만 몫의 화투가 한반도에 수출되어 일본국내소비량의 20배에 이르고 이는 1인당 50몫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량”임을 적시하고 있다. 또“1919년 독립운동 여파로 화투수출은 급감하였으며 자각한 인민들의 저항은 일본의 도박강요를 거절하고 일본의 우민정책은 파탄했다”고 언급하면서 “1898년 인천일본영사관의 허가를 얻은 武裝行商團인 '鷄林奬業團'(단원1,380인)은 도저히 상행위라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약품 등 물건을 팔았는데, 일본정부는 이들 악질적인 무역상들에게 경제조사사업에 대한 조사보수 명목으로 (거금인) 1만엔을 지원하였으며, 이들이 대량의 화투류를 조선에 들여왔을 가능성이 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조선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매춘숙이 급증하고 아편이 비밀리에 확산되었으며 화투도박은 공연히 장려되었다. 민중의 오락으로서 정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도박도 지배계급의 의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말로 일본 하나후다의 한반도 유입과 우민화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