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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現代文學思潮 (현대문학사조) 원문보기 글쓴이: 靑峰 金大殷
이종석 시인/현대문학사조 명예회장
출생: 서울
약력:
- 1963년 5월 시3편으로 문단 데뷰
- 첫시집<이종석시집>이 1975년 현대문학사에서 출간
- 구름산과 우매한 나비<부부합동 시집>
- 두 시인의 사랑<부부합동,시와수필집 등 13권
현) 한하운 뮨학상 운영위원장
현) 김포 장릉, 한하운 묘소 묘주
현) 연세대학교 총동문회 상임이사
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동문회 상임고문
현) 현대문학사조 명예회장
<한하운 詩 재조명>
별과 호수와 사랑이라 하였네
ㅡ万里 이종석 시인
◆하운의 詩 이해와 감상
문학적 유산을 돌보지 않는 국민은
미개해 지는 것이다
문학을 생산치 않는 국민은 사상과 감정의
활동도 멈추게 된다.
한 국민의 시가는 민중의 말에서 생명을
얻으며 그대신 그것에 생명을 불어주며
그것의 최고 절정과 그 위력과 그 가장
미묘한 감정을 표시하는 것이다.
<T.S. 엘리엇>
문학은 인생의 기록이요, 또는 인간 자체이다.
좋은 인간이라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먼저
인간을 알고 인간을 배우라.
그 다음에 필법이 필요하다.
<톨스토이>
한하운의 詩들이 데카당스(Decadence)하냐?
아니면, 아방가르드(Avantgarde)하냐를 구태여 따진다면,
필자는 후자이고 싶다.
강통을 들고, 명동거리를 헤매이고 있을 그 당시
앞을 내다보지 못한 무리들은 하운의 詩가 장타령이라고 했었지만,
미당 서정주는 하운의 시편들을 일컬어서
<참으로 장하다>고 토로를 했었다.
하운이 시집을 상재했었을 그 당시 미당은 거짓없는 토로를 이와같이
했었다 더구나 이 황토의 메마른 땅 위에서 또 거칠은 환경 속에서
한하운 형이 그 무서운 병을 지니고 이 일을 해내온 것은 참으로 장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갈파했었다.
여인이 옷을 활활 벗는 본능은 세상과 타협을 하려는 어쩔 수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월 이상가는 한국의 시인이라고 극찬한 전
대한나협회장이며 현 고문이신 유준 박사는 하운의 詩에 대하여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하운은 소월 이상가는 한국의 유명한 시인이셨지만 나환자들의
<자활정착촌>운동에 적극 호응한 용감하고 선구적인 역할을 한 동지 중의 한 사람인 것을 기억한다.
당시 신명 . 청운 보육원생 이영순님은 꽃동산 꽃청산 영원의 나라로
한하운 선생님은 보리피리와 더불어 갔다.
세상에 하고 많은 이름도 있는데 그 이름이 서러워 당신은 일찌기 파랑새로 노래하셨거늘 우리는 남아 헤일 수 없는 서자가 아닙니까?
휘파람 불며 불며 필닐니리
어느 강 어느 언덕도 내 고향은 아닌데 당신은 보리피리 불며 마음을 달래셨습니다. 이 무슨 애타는 인생의 외침입니까?
쑤세미같은 태양은 서산에 지는데 가도 가도 머언 황톳길을 쩔름거리며 무아(無我)를 노래한 한하운 당신.
明洞의 백수건달 베렛모 (실은 한국신학대학 교모) 문학청년 이종석이여.
흙먼지 바람부는 애오개(현, 마포구 아현2동56의 1)에 드리우시고 사과나무 아래를 노래하시던 서글픈 멋쟁이 한선생님, 왜 그렇게 쉽게 가실 수 있었습니까?
네, 네 말씀해 보십시오.
한선생님.....,
라고 피터지게 외치고 있었다.
국 토 편 력
이 강산 가을 길에
물마시고 가 보시리
수정에 서린 이슬 마시는 산뜻한 상쾌이라
이 강산
도라지꽃 빛 가을 하늘 아래
전원은 풍양(豊穰)과 결실로 익고
빨래는 기어이 백설처럼 바래지고
고추는 태양을 날마다 닮아간다
山은 山대로
들은 들대로
빛도 고운 색채 과잉의 축연(祝宴)
그 사이로 가도가도 붉은 항톳길은
이제 나보고 병들었다고
저 느티나무 아래서 성한 사람들이
나를 쫒아내었다
그날부터 느티나무는 내 마음 속에서
앙상히 울고 있었다
다 아랑곳 없이 다 잊은 듯이
그 적자생존의 인간의 하나 하나가
애환(哀歡)이 기쁨에 새로워지며
산천초목은 흐흐 느끼는 절통(切痛)으로
찬란하고 또 찬란하다
아 가을 길 하늘 끝간 데
가고 싶어라 살고 싶어라
황톳길 눈물을 뿌리치며
천리 만리 걸식 길이라도
하늘과 구름과 가즈런히 멀기도 한데
마을 느티나무 아래
옛날이나 오늘이나 흙과 막걸리에
팔자를 묻은 사람들이
세월이 다사로움을
물방아 돌아가듯이
운명을 세월에 띄워 보낸다
전설이 시름없이 전해지는
저 느티나무 아래서
나는 살아왔었다
저 느티나무 아래서 나를 기르신
선조들이 돌아가셨다
저 느티나무 아래서 저 사람들과
적자생존의 이치를 배웠다.
국토편력 길은 슬기로운 天道길이다
--한하운 <국토편력> 전문
한 하운은 대한민국 땅 어디라도 아니 가본 데가 없었을 것이다.
슬기로운 천도길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이 <국토편력>에 대한 한 하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자라난 어머니의 땅이여 내 나라의 땅이면서 어찌 이다지도 의
지할 곳이 없어 정처없는 방랑길의 나그네로서 푸대접을 받고 유리 방황하여야만 한단 말인가?
인간이면 누구나가 그 인간들 속에서 오욕칠정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이 부모 형제 자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낯선 이방처럼 객관적으로 쳐다 보고만 있어야 하겠다.
이것이 뼈저린 아픔 아니겠는가.
이것이 인간으로서 될 말이겠는가. 그러나 시인 자신은 겪고 있으니 가슴이 아니 쓰리고 배겨나겠는가?
황천에 가 계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상황을 알면 얼마나 눈물질까?
이런 엄청난 천형을 받고 이 세계에서 버림을 당하고 난 뒤의 그의 눈에 비치고 어리는 세상이란 정말 전에는 미쳐 느껴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이토록 자연과 인간의 생명 생활이...... 세월이 영원으로 흘러가고 또한 조국 땅 흙 속에 가라앉은 것을 관조하고 어떤 체념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이 시는 이러한 나의 관조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로 가나 볼 수 있는 국토의 가을 모습의 최대 공약수 같은 풍경화의 풍물을 이 시에 시도해 본다.
금수강산에 있는 그대로의 산하의 모습을 꾸밈없이 엮었다.
◆사회에 복귀한 후에 출판사
명동 유네스코 회관 뒤 무하문화사 시절의 1960년대 초. 하운은 자기 사무실 안에서 기거할 때가 있었고, 토요일은 어김없이 성계원 (인천 부평 소재. 십정동)을 갔다. 그런데 그 무하문화사 출판사 사무실에는 두 분의 여성이 근무하고 있었다.
한 분은 이대 기독학과 3년생인 백수자(白秀子)님과 하운의 수발을 들었섰던 <미쓰 박>이란 여인이 있었다.
어느 하루는 이현우 시인이 대낮인데도 술이 취해 가지고 와서 백수자님에게 이유없는 까닭을 부렸다. 물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물 한컵
을 떠서 이현우 시인 앞에 갖다놓았는데도 다시 떠 오라고 귀찮게 시키는 것이다.
그럼, 이현우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짚고 넘어가 보자 고전 소설 중 그 당시 지가를 올렸었던 <찔레꽃>장편 소설의 저자 김말봉 (基長. 성남교회 최초의 여자 장로) 여사의 배다른 아들이었다. 술을 먹지 않으면 부들부들 손을 떨었었다.
이 뿐만 아니라, 술을 먹지 않으면 그처럼 얌전할 수가 없었다. 그는 <끊어진 한강다리>란 詩로 모윤숙의 추천으로 그 당시 발행되던 <자
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60년대 그 당시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 둘 밖에 없었던 시절이요, 교양지로서는 <사상계>가 있었다.
<사상계>는 대학생의 큰 인기였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냉철히 생각을 해 볼 때, 한점 부끄러움은 없는가?
한하운을 운운 하면서 문학적 도전을 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운이 중국 베이징 시절, 한하운 때문에 자살한 의과대학 여대생 최은령 씨가 있었다. 그녀는 베이징에 있는 협화의과대학생이었다. 지금도 베이징 수도 길가 옆에 낡은 건물 그대로 협화의과대학이 존재하고 있으며, 협화병원도 지금 있다.
◆심정환. 권하운. 김백....등
노르웨이의 한센 박사가 최초 발견한 한센병(Hansen's Disease)을 완치한 후, 한센병 文人들이 탄생했었다. 이들이 명동의 한하운을 심정환,권하운, 김백 등이 찾아왔었다.
<새빛>이라는 한센병 계몽 월간지가 있었다.
오늘의<복지>(경기도 의왕시 소재)가 새빛지를 계승한 것이다.
한센병을 무서워하던 시대에 늦장부리지 않고 빨리 치료만 하면 낳는다는 한센병을 그 시절, 가정치료가 어떻게 존재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가정치료가 가능하다. 한센병 환자를 조선 땅 어느 곳에서나 무참히 집단 학살을 일삼았던 그 시절에 비교하면 오늘의 국립 소록도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조용히 살아가던 조그마한 마을에
이 어쩐 참혹한 재앙이었나
밀어붙인 훤한 벌판은
일찍이 우리의 낯익은 상점들이 있던 곳
할매 때부터 정이 든 우리들의 집이
서 있던 자리에
문둥이가 우는 밤
진주사 더 섧게 통곡하는 것을
진주사 더 섧게 두견마냥
목메이는 것을.
--(곡 (哭) 촉석루 일부. 노천명)
노천명 시인의 시귀대로 <문둥이가 우는 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이다.
그러나 현대는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라는 것. 한센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고 치유되는 병이다.
그리고 한센병은 조기에 치료하면 장애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무서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센병 文人들의 작품을 감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 명시 <보리피리>를 빨치산 시라고 몰아부쳤다.
하운은 실존인물이 아니고 가공인물이라고 했다.
어느 사람은 문둥이의 구걸타령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그런 허물들은 다 사라지고, 한하운 시의 애독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하운을 혹평하던 사람들도 다 사라져 갔다.
<보리피리> 명시가 어째 빨치산의 노래인가?
그 당시 그를 옹호하던 언론인 오소백씨는 지금 건재하고 계시며, 그를 문단에 내보내었던 이병철 시인은 90세를 바라보며 지금 북(北)에 건재하고 있다.
나균 (Leprosy)이 전염병이라고 그를 멀리하던 文人들도 이미 고인이 된 상태가 아닌가?
그의 출판사 사무실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구름인 양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지금 다 무엇들을 하고 계실까?
북에 두고 야밤을 틈타 남하한 유가족을 찾으려고 대한적십자사에 3년 전에 <이산가족> 신청서를 필자가 냈었다.
감감무소식 답답할 뿐이다.
하운의 아버지 한종규(韓鍾奎)씨와 그의 첫사랑의 이경희(李敬姬)는 성악가였다.
그의 남동생 한태섭(韓泰燮)과 여동생 한인숙(韓仁淑), 여동생의 남편
조하일(趙夏日)씨, 할아버지는 한상열씨.
그가 한센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한 베이징 협화의과대학생 최은
령 씨는 하운의 두번 째 리베(애인)였었다.
그런데, 최은령 씨는 한중 혼혈아였다.
그녀가 자살했었을 그 당시 중국 신문에도 보도가 됐었다.
아버지가 문둥이 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 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 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 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합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 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 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전문
자기가 한센인이 아니라는 강력한 신념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스스로 문둥이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정하는 그 배후에는(Background)오히려 스스로가 자못 한센병 환자였다는 물증을 더 한층 확고 부동하게 해 주는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 올시다.>
이 얼마나 강력하게 제 자신 한센인이란 것을 긍정하는----싯귀인
가? 하운을----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센인일 뿐이지----하운 자신은 결코 한센인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센인의 새끼가 어찌 본의겠느냐는 것이다.
스스로 문둥이라 주장하는 것과 스스로 문둥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이러한 갈림길에서 한하운은 허공에 뜬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돌 꽃
운악산
아으 높벼랑
천화수(天花水) 돌살이 돌꽃
고산식물 에델바이스 꽃
꽃이여 잎잎 성애 서리듯
눈송이 송이 희부연 운초(雲草)는
수하(水河)의
애처러운 삶의 환희
사랑하기에
사랑하기에
순결을
금단의 높벼랑 하늘에 피어
살아도 죽어도 불변의 꽃은
흐느끼는 불만의 사랑
위 시는 나중에 발표된 시펀에서도 빠진 詩다
이 시가 말해 주듯 돌꽃의 그의 순수한 사랑 속에 애처로운 삶의 환희
가 있고, 살아도 죽어도 변하지 않는 돌꽃의 숨결에서 인생의 그윽한 향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한하운 시인에게 보낸 여학생들의 편지
한하운 선생님께
선생님
윤이 흐르는 새까만 종이 위에 이
하얀 눈꽃송이로 글자를 만들 수 있다면
다하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기쁠까요.
메아리도 없는 밤.
샛하얀 눈발처럼 미쳐버린 보헤미안에겐
어둠도 무섭질 않답니다.
선생님
헫, 라일에 비친 눈발의 난무.
영 붙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꼭 같다고 느꼈습니다.
환희
꽃보다도 진한 향기
이 흰 눈을 봉투 가득히 담아드립니다.
선생님껜 부디
더 커단 환희가 있으시길 빌면서....
1960. 1. 25
눈오는 거리에서 돌아와....
김영자 올림
선생님 전 상서
선생님 늦게야 펜을 잡았습니다.
도서관의 오후 정원에 드리운 따스한
열과도 같이 잠자린 아늑합니다
많은 시간들이 그처럼 숨 죽인 채 떠나버리듯
이제 보드라운 숨결을 뿌려가며
고이 잠든 인간들의 얼굴엔 티끌 하나 없어
보입니다.
지금쯤은 누구 보다도 보람있는 꿈을.....
선생님
아마 산다는 그 자체가 단 하나를
위해서 투쟁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고
때로는 인간의 본의가 아닌 가면을 들쳐쓰고
행동을 개시하는 것만 같더니
이 순간 인간은 아름다운 꽃보다도 아니 향기보다도
짙게 물들이고 마는군요.
사람의 전부를 산 채로 앗아가는 Dream 그것은 분명 사실이 아닌 어떤
무엇을 형상한 채 그대로 인간을 흐뭇하게 만드는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라 믿어집니다.
지난 밤 이 시간에는 저도 이와 같은 꿈 속에서 방황한 채로....
그러나 오늘 전 어제의 기억들을 생각할 수 있는 현실에 누워있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영원한 감사를 저만이 아듯 입속 멀리 얄얄이 간지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받던 날 저의 <희> <락>이 거듭거듭 반복되었습니다.
저의 생전 예상치 않았던 일과 기쁨들입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선생님의 건강 변함없으시길 주님께 빌며 오늘의 안녕을.
1960. 1. 25
이 춘애 올림
<필자주 : 한선생님께 편지를 한 이춘애씨는 그 당시 인천에 살고 있었다.
지금쯤은 필자와 같은 초로인생.
필자와도 그 당시 서신왕래가 서너번 있었다. 기독교 장로회 동부교회에서 행한 <문학의 밤>
작품집을 보냈더니 잘 받았다는 요지의 편지 1963년 재일교포지 漢陽 6월호에 발표한 졸시 3편을
율목동 인천시립도서관에 가서 잘 읽었다는 내용의 서신이 왔었다.
◆라일락꽃 던져서
창작가는 제2의 인간을 산출하는
어머니다.
제2의 인간은 가장 우리와 친하기
쉽고, 우리와 이야기하기 쉽고,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기 쉬운
가리움 없는 사람이다.
<토마스. 만>
라일락 (Lilac) 꽃 (Syringa vulgaris)은 목서과에 딸린 갈잎 중키 나무다. 키는 5~7m.
그러나 하얼빈에 가서 본 라일락은 그 이상의 나무들이 많다.
잎은 마주 나며, 긴 잎꼭지가 달린 달걀 모양이다.
아니면, 심장 모양이고 짙은 녹색을 띈다.
5月에 끝이 네 갈래진 작은 대롱 모양의 꽃이 원추 꽃차례로 피는데, 개량 품종에 따라 엷은 자줏빛, 붉은 빛, 흰 빛, 푸른 빛 등이 있으며 겹꽃, 홀꽃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수수꽃다리, 자정향, 정향나무 등
◆중국 하얼삔의 시화(市花) 라일락
라일락꽃 던지고
천형의 벗을 수 없는 죄벌을 뒤집어 쓰고 세상을 등지고, 어둠과 다가서는 죽음을 뼈져리게 보고 느끼는 한센병 시인 한하운 씨는 우리에게 인간 죄업의 바닥없는 고통을 대변하여 우리로 하여금 인간 지옥의 전율 비통한 사실들을 깨닫게 하여 주었습니다.
인간만사가 나를 위하고, 나의 사소한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조금도 아끼지 않는 현실에 천형 시인 한센씨병에 내 사랑을 바친 여인 아니 소녀가 있었다고 하면 우리는 놀라움을 넘어서 거짓이라고 할지 모릅니다만 이 <리라꽃 던지고>시에서 나오는 P양(편리한대로 박양이라고 하여도 좋음)은 병리학을 전공하는 의학도로써 불치의 병,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한마디씩 떨어져 나가는 병, 한센씨 병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는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다고 믿을 때 이는 분명 하늘이 점지하여 보낸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리라꽃>은 <LILAC>이라고 하여 그 향기 10리에까지 풍긴다는 숨막히는 향기를 지닌 꽃입니다.
따라서 <리라꽃>하게 되면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여서 말하기 때문에 <리라꽃 던지고>는 <이 열렬한 사랑을 여희고>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름도 얼굴도 알지못하는 소녀.
더구나 의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이 혼자 천벌을 받아 죽어가는 시인을 향하여 몇차례씩 아무 소식도 주지않는 이를 향하여 자기의 순정을 바치는 박양의 눈물어린 편지.
불타는 정열과 순정이 뚝뚝 듣는 사연을 읽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한센씨병 시인. 소설보다 더 희귀한 사실에 우리는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알지못하는 순간에는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맺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로운줄 모릅니다.
외로움이란 내 친한 사람이 나의 옆에 없을 때에는 사람이 떠들썩하는 거리일 수록 더욱 그리워지고 외로워지곤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사랑하는 이 한사람도 없을 때는 외로운 감정이 있 을 수 없지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모르는 이에게서 뜨거운 사랑의 고백을 들었을 때의 새로운 외로움은 무인고도의 외로움도 이에서 더 할 수 없을 것으로 어쩔줄 모르는 충격에 외로워지기만 합니다.
하여, 몸서리치는 외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말도 건네보지 못한 여학생이 보내준 편지 속 얼굴이 5월 아침 이슬에 맑게 씻기어 산뜻한 향기를 풍기는 아까시아꽃이라 표현한 것은 얼굴 모습과 얼굴에 나타난 마음 향기로움을 함께 나타낸 교묘한 수법입니다.
보내준 사진을 병실 한 구석 책상 앞에 마치 마리아 초상같이 걸어두고, 병마에 시달렸을 때, 새로운 힘을 얻고 우울할 때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은 나의 구세주요, 나의 수호신 마스코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러한 이기도 없는 자기 자신을 고이 바치는 이 희생적 사랑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부조리가 개재해 있을 때.
즉 천벌을 입어 손가락이 떨어지고 발가락이 물러나고 코가 떨어지고 귀가 없어져 급기야 시력마져 잃어야 하는 병
한센씨병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 죽음을 불빛처럼 환희 쳐다볼 수 없을 것입니다.
허나, 자기에게 주어진 절통한 비애를 참는 곳에 인간의 인간다운 위대함이 있으며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위하여 한 평생 그리워하며 그 행복을 위해 <마음이 가도록 그 노래를 눈물 삼키며 부릅시다>라고 애절한 사랑은 하늘나라의 숭고한 사랑이라 함에 좋을 것입니다.
바이올린이나 키타선에서 가장 슬픈 음성이 흘러나오는 선이 이 <리라꽃 던지고> 시에서 말하는 <G선>입니다.
이 선에서 흐르는 비가 엘레지는 성한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흐르는 소리와는 달라 그 처절함은 글자 그대로 단장지비(斷膓之悲)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 노문천 (전 수도여고 교사. 이미 작고)
◆하운의 수필
<수 필>
성 계 초
한 하 운
이 땅에 나단체의 이름을 살펴보면 애락(愛樂), 애생(愛生), 애경(愛敬), 애양(愛養), 이밖에 성자(聖字)까지 비상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나요양소 이름 그대로 글자도 틀리지 않아 마치 일본 분원(分院)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왠 사랑字 투성인데 사랑도 눈물도 그 아무것도 없는데 愛字, 聖字 항렬로서 행배(幸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식과 주체성이 없는 나로서는 지금의 부평병원이 창설할 때 이름은 성계원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이런 명칭은 나자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고 의표의 것이었다.
이 성계의 어원은 <桃李之下, 自成溪 >란 것에서 얻은 것이며 ,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곳에는 스스로 지름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 성계원은 나요양소의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작업을 거역하고 나자에게도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찾게 하고 무엇보다도 경제력을 갖게 하여 잃었든 인생을 되찾은 내연작용에 불을 질렀다.
경제력 향상책으로서는 축산장려책을 강행하여 한때 성계원을 곧잘 成雞園이라 까지 대양계장화하였다.
이와 아울러 금융 및 산업의 경제기구를 만들고 이 활용에서 오는 돈이 힘과 속력을 효용하였다.
온 나자들은 성계원을 무하유향(無何有鄕)으로 부러워하고 이 해피 , 랜드(Happy Land)의 바탕은 붐으로 번지었다.
성계원의 경제가 과실이 성숙하려는 무렵 정착촌이 실시되어 이 기구가 애석하게도 분화되고 말았다.
앞으로 한센인의 살길은 경제적으로 뭉쳐져야 한다. 적어도 경기지방의이 단체만이라도 단일 경제기구로 통합되어야만 비약을 가져올 것 같다.
그 이유는 많겠으나 사료나 축산물 처분 ...... 등등에 언제나 상인의 농간으로 적정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사료만 하더라도 사료공장을 세워야 하며 매년 수만 수의 퇴화된 병아리를 기르나 이것을 지양하고 해외에서 우수한 다산계(多産系) 종란
(種卵)을 수입하여 자가부란을 하여야 한다.
사업은 비단 축산뿐일까? 눈부신 기업도 얼마든지 있지않은가?
무엇인들 못할까?
이윤은 한센병연구에 또는 국민에게 자선하여 나자의 인간복귀의 갱생상(更生相)을 보여야만 비로소 한많은 나자해방이 있고, 이것이 나자의 인간에의 성계의 길이다.
<수필>
나의 인생 기산하
볼성없는 주체스러운 인간이 우득히 땅 위에 서 있다.
보잘것 없은 나의 인생 기산하는 험하기만 하고 처참에 가득차 유리표박의 유망(流亡)에 어느 동서남북이 없이 노숙과 걸식으로 둥 둥 떠가는 평신(萍身)거러지로서 인간된 자랑마자 폐리(敝履)가 되었다.
숙라의 병고 속에 기아와 저주와 학대에 오늘까지 생존해 있다는 것은 기적같이 용하게 살아왔다고 하겠다.
이런 생존 불가능의 극한에서 살겠다는 의욕의 힘은 오로지 시도를 정진하였다는 데에 있었다고 말하겠다.
그리고 시의 지혜는 인간을 강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망과 자학과 저주에.....참을 길없는 울음이 구천에 사무칠 나위없는 처절한 생명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뿌리며 매마른 황토길을 걸어가며 나의 영혼의 영가를 불렀다.
나는 시를 읊지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이 영가는 언젠가 나를 저주하고 학대하는 성한 사람들 앞에 서게 하였다. 꼭 서 보리라 그리고 살아보리라 하던 염원이 볼성없고 주체스러운대로 우득히 서있는 땅은 언제나 위협이 다가서있다.
이제 한센병도 완치하고 사회에 복귀하여 사람들과 동화하려고 하나 동화작용이 되지않고 아직도 옛날의 고루한 오류의 제물로 되어있다.
제1, 2시집을 발표하는 그간 그후 절망의 심연에 빠져있는 한센병자를 구하는데 나의 전력을 다하여 인도적 열성을 다 하느라고 시작의 촌여도 없어서 나의 문학에 많은 공백이 생겼다고 하겠다.
이제부터는 어제날까지의 인간폐업에서 오늘의 인간개업의 벅찬 생명을 연효시켜 보려고 한다.
그리고 문학에도 충실해 보려고 다짐도 해 본다.
이번 세계적 판화작가 이항성 선생님의 후의로 졸시 제1, 2시집에다 선
생님의 명판화를 부쳐 시화집을 내게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62. 9. 8
<서울 명동에서>
*그 당시 신문회관 (현, Press Center)에서 성대하게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다.
◆ 동료문인들의 방담
천형의 벌칙은 살아지고 그의 시만은 영원히
박거영 (시인, 전 도서출판, 인간사 대표)
한하운은 한센병 환자가 아니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꽃과 나무와 물과 태양의 빛이 그를 반가히 맞아 주었다.
하늘이 이 모든 것을 거역하고 천행의 벌칙을 그의 육체 속에다 부어담은 것 뿐이다
허기 때문에 한하운은 하늘을 저주하고 하늘을 외면하고 살기 위해서 슽픈 구름이 된 것이다.
이 엄청난 절망 속에서 자기의 생명을 놓치지 않고 살기 위해서 또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한하운은 한센병 환자라도 좋았다.
비록 육체적인 조건은 그러했다 하더라도 그의 생명만은 그의 시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시는 그의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데서 우리는 한하운의 육체는 몰라도 좋다.
그냥 한하운의 시를 알면 되고 한하운의 생명을 바라보면 된다.
세상에서는 한하운에 대해서 너무나 말썽이 많다.
그를 미워하고 그의 육체를 외면하고 그의 생명을 증오하고.....온갖 인색을 쏟아놓는다.
그러나 나는 하는 수가 없었다.
그의 시가 어떤 체온처럼 내 영혼 속에 스며드는 것은 나는 막아낼 수는 없었다.
시업(詩業)의 보람이 우리 문단에 무색을 면하고 오히려 찬란한 빛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우리는 하나의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애정을 받아 드리는데 조금도 인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천형의 불구 폐질을 시로써 영원히 소생 회복
조영암(원로시인, 스님)
항용 예술의 본질과 그 구경의 목적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보는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 본질과 목적을 구명해 보려는 기본적인 인간 탐구의 자생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예술이란 것을 영위하는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이른바 <예술가>라고 자처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애매한 점이 없지않은 것이다.
이 애매하다는 이야기는 자신의 예술 탐구의 의욕이 소극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술을 한 개의 미의 추구라든가 보편적인 완성된 미학의 추구라고만 생각지 말고 그것을 한 개의 도(道)라고 인정할 때에 비로소 예술의 가치 창조에 있어서 그 중량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 불우하고 괴로운 시인 한하운을 논하는 마당에 왜? 이러한 전제를 내거느냐 하면, 요즈음 생산되는 대부분의 시가 이 엄숙하고 경건한 생명 영위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작품들이 생산되는 데서 오는 혐오감 때문이다.
우리의 시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하운의 생명의 고민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하운의 생명적 위치는 이른바 나균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대결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하고 비약하는 데에서 하운의 시가 새로운 광망(光芒)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인류 역사 위에서 한 때는 한센병 환자를 일정한 장소에 모아놓고 가열한 초형에 처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 한센병 환자를 경원하는 성한 사람들의 태도는 그것이 자기 생명 방위의 한 개 수단이요 방법으로써 행위하였다는 데 묘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천형의 불수 폐질- 영원히 소생 회복될 수 없는 인간의 막
다른 어두운 골목.
그것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한센병 환자들만 소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비극만이 아니다.
인류 전체가 부하하고 있는 <생명> 원초 (이런 어휘를 사용할 수있다면)의 불가피한 비극의 잉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운은 그러한 의미에서 행복(?)된 위치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 생명 원초가 최초에 당면한 천형의 존체다.
이 둘레를 잘 벗고 잘 벗지 못하는 데서 그 생명의 비약과 함몰(이런 문자를 써도 좋은지)이 있는 것이다.
하운의 시를 지적하여 나는 일찌기<눈물의 언덕을 넘어섰다>하였거니와 그 눈물의 언덕도 보통 정도의 고민과 통상(痛庠)으로 도저히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천형의 벌칙에서 유래되는 뼈아픔이 비탄과 애수에서 감상과 눈물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것을 의미함은 아니다.
하운의 시의 도처에서 우리는 이따금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눈물들은 그의 생명의 심부에서 걸효(乞哮)하는 그의 지고한 영혼에의 절규가 아닐 수 없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 아니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죄이올시다 죄올시다
--<나> 전문
이러한 시는 오히려 그의 다른 <개구리>와 같은 시 모양으로 한 방울의 눈물도 없이 그대로 읊어진 것이긴 하나 그가 자기의 생명의 위치를 객관화하려고 하면 할 수록 그의 생명의 심부에서 부르짖는 눈물의 강도는 더 한층 농도가 진해지는 것이다.
그 진해지는 어느 생명의 농도에 서서 하운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바 있었던 것이다.
한센병이면 더욱 한센병의 핍박해 오는 생명의 허무가 안타까울 뿐인 것이다.
그는 구경에 새로운 도피는 아니었으나 묵고 낡은 도피이기는 하였으나 인간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종당한 사람의 거룩한 타력(他力)에 의지하려고 시도하였으니 그것이 그의 시 <관세음보살>이다.
그는 그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이 피할 수 없는 모순과 당착을 관음의 구세 의욕에 의해 영합함으로써 생명 영속의 신비를 체험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시로선 어쩔 수없는 도피이기는 하나 생명 현상의 지엄한 순수 판단은 결국 하운으로 하여금 안온과 평화의 균형을 요구하였던 때문이다.
한하운 시인을 추억하며
이종석
보리피리 불며 불며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한하운을 만나러 전라도 길을 간다
전라도 소록도를 가는 길에
하운이 적을 두었었던
이리농림학교를 들렸었다
지금은 그곳이 익산대학교가 되었다
그 학교 교정의 하운의 시비에서
필닐리 필닐리 푸른 보리피리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
함흥 땅을 떠나 이곳까지 와서
청운의 꿈을 불태웠었던 하운이여
그대의 너털 웃음이 지금 들리는 것 같다
아, 방랑의 기산하(機山何)여
1. 나의 시작수업
2. 눈물 젖은 요오들가
3. 문학에의 욕망
나의 시작수업(詩作修業)
한하운
아직도 시작수업 도상에 있는 중에 이 명제에 대하여 집필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 하겠다.
숙나의 반생 속에 시세계의 환상을 쫒으면서 사유의 무한을 빙과 표백하는 시정신의 추구에서 시작수업이라 하는 이 수업이 하나의 道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詩道를 생활에 실천화하니 人間道의 수련이 되고 이 비호(庇護)로써 서식의 거절을 당한 모진 역경을 초극하게 된 재생된 길을 피력하고자 한다.
나의 가계를 대대로 소급하면 조상들은 황권(黃券) 속에서 일생을 묻
은 선비의 가계이다.
내가 문학수업을 하게 된 것도 아마 가계의 유전적인 소인(素因)이 아닐까 한다.
내가 학령이 되어 나의 교육을 염려한 부친은 함흥으로 이사를 하였다.
유치원 마치고 보통학교에 입학한 나는 4학년 때부터 학교공부는 차치하고 함흥 공자묘의 도서관에서 날마다 닥치는 대로 무슨 책이고는 독서하였다.
그래도 학교 성적은 항상 우등생으로 통하였고 특히 남보다 특출한 것이 작문이니 도서니 창가니 수공 등의 과목이었다.
학예회 같은 데에는 나의 것이 언제나 전교의 이채적인 존재를 차지한다.
학교 선생께서는 나에게 예술방면으로 진출하라고 권고를 하는 것이었다.
부친은 나를 장래 목축업에 종사키 위하여 수의축산학을 전공시킬 의향으로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최난관인 일본인과 공학인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지원케 하여 19대 1의 경쟁을 돌파하고 입학하였다.
14세의 나는 3월이라는 데도 보리가 파랗게 욱어지고 매화꽃이 피어있는 교정의 아경(雅景)에 황홀하였다.
북국에 있던 나로서는 신기하였고 더욱이 서화나 온실에서만 보던 청죽(靑竹)이 어데나 숲을 이루고 있어 어린 가슴에 남국 정서를 만끽케한다.
이 부풀은 가슴에 시를 나날이 읊어본다고 국문으로 일문으로 감회를 엮어본다.
감정이 흐르는 대로의 자연 발생적인 나의 시가 과연 시로서의 형태를 가져있는가에 의문을 가져 일어로 된 시론, 시학 또는 시작강좌의 전집을 보았으나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어서 납득이 가는 부문만을 공부하면서 소위 시작을 하여 본다고 하였다.
학교에서는 일어 한문 작문시간에는 일본인 교사가 일본의 단가니 화가(和歌)니 비가니 한시의 작시법을 교수한다.
일본인 교사는 시의 세계는 동양적인 적(寂)이라 할까 유현이라 할까.....이런 것이 근본이 된다고 강조하는 데에는 당시 이해치 못할 불만을 품고 바이론, 하이네, 릴케, 또한 타고오르의 詩에 정열이 뛰고 워어
즈 워즈, 베르레느의 목가적인 서정에 심취하였다.
일본 시인으로서는 北原白秋, 石川啄木의 시를 애송하였다.
당시 한국 시인의 시에는 아주 환멸을 느꼈다.
추기가 있는 시조쪼로 되어있어 다만 김소월의 시에 부서질 듯한 슬픔에 서러워서 눈물을 짓곤 하였다.
학교 당국에서는 절대적으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사용시에는 시말서를 쓰이고 정학을 시켰으나 우리들은 오히려 반항적으로 우리말을 의식적으로 쓰고 <삼천리> <조광> 잡지를 비밀로 보곤하였다.
시 습작을 하면서 부터는 나의 사색시야는 비상함을 느낀다.
자연과 人生을 정확히 관찰하려고 애썼다. 말하자면 감각적 관찰의 수련을 쌓는 중 일목일초(一木一草)가 인간의 희로애락이....더욱 아름다워지는 다정다감은 열애할 수 있는 대상자의 환상을 추구하곤 연애란 것을 몽상해 보곤한다.
학교 공부는 포기상태에 던지고 시험 때만 공부를 하고 번역물의 문학작품을 닥치는대로 독파하고 명작품을 수집하면서 시도 하루에 몇편씩 줄줄 쓰고 <어머니> <뻐꾹새> 등의 소설을 무작정 습작하고는 제일 가는 걸작이라고 열광(熱狂)하고는 잡지사에 투고하였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보기좋게 종무소식의 운명에 빠진 것도 있고, 너무 장물(長物)이라고 반환된 것도 있다.
가친께서 상급학교 수험준비를 하라는 말씀에 문과에 진학하여 장래 문학을 하겠다고 하니 질책을 하시고 문학을 한다면 학비 송금을 거절
하신다는 최후 통고를 몇 번이나 받고 편지마다 이과나 고등농림에 가
라는 바람에 생각다 못해 수험준비를 열중하게 되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나결절이 육체의 양역(陽域)에 도색(桃色) 소구(小丘)를 이루어 진찰한 바 한센병이라는 선고에 의사를 불신인(不信認)하고 다시 성대 세의전 京專의 피부과를 찾았으나 성대 세의전에서 틀림없는 한센병이라는 선고에 실신하여 황색인생과 회색인간의 절망 속에 침잠하였다.
공부고 문학이고 세상이고 팽개질하고 금강산으로 입산하였다.
신계사에서 나날이 온정리의 온천에 다니며 탕치(湯治)하고 조석의 범종 목탁소리에 제행무상의 허무에 빠진다.
수험공부하다가도 한센병 환자가 공부해서 어데다 쓰는 거야 하면서 포기하고 로서아 시인 에세에닌, 프랑스 시인 포오드 레엘의 시 헬만 헷세, 지이드의 작품을 탐독한다.
어떤 날 나의 애인(이혜경=필자 주)이 금강산으로 찾아왔다.
여기서 이혜경과 한센병의 엄청난 거리의 심각한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구룡연폭포에서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애인의 굳은 사랑으로 실패로 돌
아가고 말았다.
푸라토닉한 애인은 내가 한센병 환자래도 좋다는 것이고 어떤 일이 있드라도 내 곁에서 일생의 반려가 되겠다고 하며 한센병도 완치한다는 신념으로 치료를 하고 인생을 개척하자는 비원에 나는 용기를 얻었다.
여기서 사랑의 불가사의한 마법에 붙들렸다.
이듬 해 도일하여 고교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
동경의 3년간은 일본 문물의 견문과 사조의 첨단 흡수와 더 고답적인 문학 공부도 하고, 좋은 서적들이 많은 분위기 속에서 독서에 삼매되고 그리고 술도 양흠......
재차 한센병이 재발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금강산으로 입산하였다.
몇 달 동안의 치료에 나결절이 소퇴(消褪)한다.
인생 포기의 도피행으로 심양 산해관 경유로 중국 베이징으로 갔다.
山을 볼 수없는 심양 산해관의 아득한 대평원이 망막(茫漠)에 나 하나의 인간의 운명 따위는 일진의 진토같이 느껴진다.
또 베이징의 자금성 만수산의 성곽이 시공에 다양성의 장엄한 윤곽과 찬란과 신비의 명상에 잠기게 한다.
며칠을 가도 가도 보리밭에 이어서 지축을 꿰뚫어 가는 것같은 양자강의 양양한 모습.....
만리장성, 몽고 사막, 무주의 석불총의 수많은 석불군 등에 인류의 과거
와 현대와 미래를 이어서 가교하는 궁륭의 무한한 명상에 잠기게 하니 인간의 운명 따위는 다시금 초개같이 느껴지고 예술의 길에 정진하려는
의욕을 새롭게 한다.
학적을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두고 걷잡을 수 없는 대륙과 인류의 원시적 목가경(境)인 몽고를 방랑하며 독한 술을 마시며 5년 가깝게 살았다.
여기서 비로소 문학이란 것,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궁리한다.
문학이란 마냥 붓대의 기교작업이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급선무가 자신의 인간의 수련과 중폭의 비약이 있고 세계의 확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런 인식하에 대인간 대인세(世) 대자연, 대문학의 형이상학적 세계의 방황과 탐구를 하고 대학의 자연이학의 학구 중에 다시 한센병이 재
발한다.
그래도 나 자신의 한센병에 대하여서는 불안보다도 오히려 불관(不
關)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또 다시 금강산에 입산하여 치료를 몇달하니 나결절이 소퇴(消褪)하여 운무처럼 가신다.
귀향하여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취직한다. 어쩐지 고향인 함흥에서 관청생활을 한다는 것이 싫어져서 전근운동을 하였드니 해발 천백미터나 높은 개마고원에서 면양의 연구와 우마의 증식사업을 하는 직장인 강진으로 갔다.
천고의 처녀림을 불질러버리고 농사짓는 원시생활의 화전민이 사업의 대상자였다.
靑草期가 3개월 밖에 없는 이 엄동의 고원에 5월에도 눈이 내리고 8월에도 눈이 내리는 자연 환경 속에서 사람은 감자를 주식하고 목기생활하는 원시에 가까운 하늘 아래 첫 동리의 인간생활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 높은 정신의 통찰이 없이는 이해가 서지 않고 문학적인 시안이 서지를 않는 것 같다.
죽음같은 영하 30도의 고원의 동장군에 나는 건강상 항복하고 인크라인 철도를 타고 1000백미터의 고원에서 하산하고 말았다.
다시 경기도청에 전근하여 수의사로써 조선 소의 연구를 하게 되었다.
한편 개마고원에서 면양을 연구하였다고 용군 양지(陽智)에 있는 송백작댁의 면양목장의 면양사양(飼養) 지도의 의명(依命)에 송백작댁의 자
유출입이 허용되어 고귀한 골동품 서화 합병 당시의 문서철 고서 등을 관람하게 되었다.
내가 이 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려 할 때 한센병은 그 악질적인 발악을 남은 연맥과 감자를 주식하고 목기생활하는 원시에 가까운 하늘 아래 첫 동리의 인간생활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 높은 정신의 통찰이 없이는 이해가 서지않고 문학적인 시안이 서지를 않는 것 같다.
죽음 같은 영하 30도의 고원의 동장군에 나는 건강상 항복하고 인크라인 철도를 타고 1000백미터의 고원에서 하산하고 말았다.
분화산 같이 막을길없이 만연하여 황급히 퇴치하고 귀향하였다
한 방에 3년간이나 유폐되어 태양빛도 보지못한 채, 치료약도 없고
태평양 전쟁의 결핍과 온 전신에 궤양이 수천군데나 터져 옷도 입지 못한 채, 육체는 나날이 썩어가는데 생각만 깜밖이고 실오리같은 목숨만 쇄진하여 금방이라도 숨이 꺼져갈 것만 같은 죽음이 눈 앞에 다가서 있
는 데도 병고와 고독과 격리 속에 수천권에 달하는 장서 중에서 문학 部面의 서적을 유일한 벗으로서 살았다.
내일의 생명도 모르면서 문학을 하겠다는 나는 문학가와 정치가는 이
세상의 서적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없는 바에 의하여 광범위한 지식의 흡수에 노력한다.
음악의 감상, 세계 미술전집의 감상 등을 하니 표현방법이 다를 뿐이지 창작의식은 시나 소설과 똑같다는 것, 각 유파와 발생원인과 세대에의 영향을 계통적으로 분류하여 유파별로 작가 군상을 카르테를 만들고 국적별로..... 또한 작가의 전향 등을 본격적으로 작품을 읽어가며 탐구하였다.
운명의 한센병에 신음하면서 남은 여명을 문학에 귀의하지 않고는 나를 구원할 길이 없음을 나의 심혼에서 백열처럼 내연하였다.
문학세계의 배회에서 여러 유파를 나의 문학세계의 정신의 도가니다 넣고 혼합 탐구하여 빙과작용을 한 후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여 세대에 어떤 멧세에지를 던지느냐?
그 멧세에지(Message)가 과연 민족의 혈관 속에서 따스히 순환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식 아래 시습작을, 소설습작을 하게 되었다.
8.15 해방
이 역사적 격류는 나의 유폐 칩거생활에도 큰 감격을 주었다.
그러나 조국 광복의 감격이 가시기도 전에 쏘련군이 점령하게 됨에 더 불어 폭력 군정의 횡포가 온갖 질서를 전복하였다.
하나의 인간의 존재는 컴미니스트가 아니면 이 폭력의 해일에 갈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탁류하며 인간파산에 전락한다.
우리집 우리 가족은 不在地主라는 소위 불노소득의 착취층이라 지탄을 받고 가산 일체를 몰수당하고 거리에 추방되고 말았다.
아무리 한센병 환자이지만 빈곤에 먹고 살기위하여 고서적상을 하였다.
무수한 서적을 다루면서 서적의 진부를 선별할 수 있는 안식이 생기고 아직도 한권도 상재치 못한 무능을 탄식하면서 어두운 생활 속에서 시습작에 몰두하였다.
그러자 해방 이듬해 3.13 함흥학생 사건에 투옥되었다.
병 보석에 가출옥하자 모친이 병사하시고 불행은 이중 삼중으로 겹쳐 다가선다.
다시 반국가 음모의 반동분자라는 혐의를 받고 투옥하여 3개월여 영오생활에 한센병의 악화에 병보석의 가출옥을 받고 한센병 치료약 구득차 월남하여 다시 월북하다가 신고산에서 병 보석 중에 월남하였다고
체포되어 함흥까지 연행 투옥.
이감 이송 중 원산에서 파옥하여 죽음의 길을 도보로 1개월여를 걸어 월남.
월남하여 만 2년간 인간과 사회에서 쫒기고 다시 그 인간과 사회의 가진 학대를 받고, 문전걸식의 신산고초에서 정신이상이 걸린 것만 같은 숙명을 허덕거리며 현실의 잔학을 부정하고 썩은 육체에서 내연하는 시혼의 백광이 나의 삶을 이었다.
무너져가는 육체에 박차를 부비고 찢어진 원고지에다 언손을 불어가며 10여편의 시작을 1949년 3월에 잡지 <신천지>에다 투고하였다.
영원히 빛을 보지못할 것만 같은 나의 작품이 활자화될 때, 나는 자기의 무능을 깨달았다.
이것이 무슨 詩가 이런가 하는 환멸의 비애에 울었다.
그해 5月에 <한하운시초>를 출판하고 내가 반평생 시작수업을 고투한 소산이 이런 것 밖에는 되지 않는가 할 때 나는 나의 세계의 빈곤에 다시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책광고와 바람에 나부끼는 거리거리에 깡통밥이 아니면 이 징글맞은 생명을 연명할 수 없어서 문전걸식을 하니 소위 시인이 걸식한다는 야유가 뒤통수에 치는 거리에 나는 아직도 시인으로서 자학하고 싶지도 않고 詩가 밥도 죽도 되지않는 냉수같은 것이지만 나에게는 시와 생명을 버릴 수는 없다.
시가 나에게는 제2의 생명이다.
아니 전생명을 지배하고 있다.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스스로 自光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길로 나를 인도한다.
나는 이 詩作修業에서 한센병을 극복하였고 슬픔과 고독을 초극할 수가 있었다.
슬픈 윤회 속에서 이 人世의 하나 하나가 더욱 아름다워지고 산천초목이 아름다운 흐느끼는 절통으로 찬란히 조국 땅에 길이 갈아앉는 한줄기의 꽃,
한 마리의 새, 한가람의 물, 한줌의 흙.
詩는 하나의 道인 것을 확실히 인식한다. 또 고원한 곳에 있다.
세계운행의 근저와 무한 무궁의 예지와 오묘를 탐구하여 정말로 인간에게 진실한 이상을 줄 수있는 새로운 신화의 창조를.....아니 예언을....나는 써야겠다.
나의 문학이 성장하기 위하여서는 아직도 더 좀 수업의 시간이 있어
야 하겠다. 너무 급히 서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詩가 냉대를 받아도 좋다. 오히려 비약하려는 수업 도상에 있는 나에게 高遠한 곳을 지향할 수 있는 자극이 되는 것이다. 나는 詩道를 닦음으로서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고, 아직도 내 가슴에는 뜨거운 피가 있고 사랑이 있다.
눈물 젖은 요오들가(歌)
한하운
-정본. 한하운 시집 간행에 부쳐
이 시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
그 까닭은 나의 젊은 날의 슬픔과 절망이 이 책에 담겨져 있어서 나의 눈에 흙이 덮일 때까지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의 詩들은 모두가 나의 영혼으로 쓴 영가라 하겠다.
이 눈물젖은 요오들가가 무서운 슬픔과 절망을 넘게 하였으며 이 푸른 지혜가 나를 다시 세상에 서게 하였다.
이 시들은 여러 책으로 많이 출판된 작품이지만 간간이 틀린 데가 있어서 이번에 <정본.한하운시집>으로 정확을 기한 셈이라 하겠다.
이 시집을 나의 <제1시집> <제2시집>과 최초의 작품을 아울러 엮은 것임을 밝혀둔다.
1964. 12. 16
서울 명동에서
문학에의 욕망
--인천 만월산 아래서
한하운
또 하나의 불은 문학이다
내가 이 표현예술로서 이 땅 위를 美化시키고 또한 인간의 꿈을 행복하
도록 땅 위에다 현실로 구현시키겠다는 타오르는 불.......
또 하나의 불은 한줄기의 피어나는 꽃이 꽃을 보고 내가 살아가는 기쁨.
구름이 떠가며 흐터지는 것.
한 마리의 새가 우짖는 소리. 몇만년 유구히 흘러가는 한줄기 강물을 보면서 보람있고 자꾸만 희열을 느껴지는 것 또 남자와 여자가 유별한 것과 또한 이 남녀가 빚어내는 희로애락이 모두가 꽃같이 애절한 것.
살아야 할 생명이 살아가는 생에 대한 인식을 발견시켜 가는 기쁨에 불타오르는 불.
이 삼중의 불타오르는 불에 대한 열애가 나의 한센병과 현실 사회와의 어그러진 괴리에 통일할 수 없는 불통일을 원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영원의 나라에의 사람으로 또한 아름다움으로 맺어지며 승화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를 황홀하게 하는 것이다.
비가 그친다. 몇 달이나 계속해서 내리던 장마가 맑게 개인다. 얼마나 기쁜 일이냐.
무슨 중병을 치르고 난 경쾌한 기분이다.
소련이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보도가 벼락같이 강향히 전
해지는 것이다.
세계에서 물량을 자랑하는 강국인 미 영과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그야말로 전 세계를 적으로 하여 싸우는 것이니 세계를 호령하던 대일본제국이 제아무리 굳세고 무적이라 할지언정 망할 것이 명약관화 한 일이 아닌가.
대일본이라고 자랑하던 일본이 주검의 임종에 가까운 단말마의 아우성으로 통곡할 때가 온 것이다.
내 골방생활도 하늘이 푸른 일요일이며 삼천리 반도 조국땅이 만약 전쟁터가 되며는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불안에 앞이 캄캄하여 진다
<4291. 10. 30씀>
*1960년대 희망잡지의 사장 김종완씨와 송지영 (민족일보 간첩사건으로 사형언도를 받다. 후에 문예진흥원장과 국회의원 지내다. 붓글씨에 능하다) 씨의 간곡한 청탁으로 2년여 연재한 것을 인간사 . 박거영씨가 <나의 슬픈 반생기>라는 冊으로 출판. 수기(手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