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은 바다로 둘러싸여 오래전부터 육로보다는 해로를 통한 교통이 더 발달한 곳이었다. 통일신라 해상무역의 거점지 중 하나였던 황원포(黃原浦 입암포)와 고려시대에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남리역(南利驛), 조선시대의 삼지원(三枝院)은 육상과 해로를 잇는 주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일본침략기에는 성산 입암포(笠岩浦)를 비롯해 우항포(牛項浦), 연호포(燕湖浦), 산덕포(三德浦) 등 포구의 활성화로 물류의 유통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문화와 문명의 유입을 빠르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지역의 옛날 도로는 소로(小路)에 해당하여 11척(3.3m)의 폭으로 배수로 기능을 위한 측구의 2척(0.6m)을 두었고, 해남에서 이목마을 흰재(고개)를 넘어와 원호리 공동묘지 뒷길-원호분교(황산동초등학교)-와등리 원다리개-행치산-송호리 명당골-관두리 맥주맥창고-면사무소 앞-남리역-소정리-옥연리-문내면으로 이어졌다.
한편 오늘날의 도로교통은 자동차가 실용화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자동차가 주행하는 데 적합하도록 개량되었으며, 곧 개통 될 해남~진도 간 고속국도의 개막은 우리지역의 도로교통을 현저하게 진보시킬 것으로 보인다.
대동지지에 나타난 남리역과 삼지원)
1. 역(驛)과 원(院)
1) 남리역
▶ 위치-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 810번지
역(驛)의 의미가 오늘날에는 철도역으로 축소되었지만, 옛날에는 역마(驛馬)를 갈아타고, 인마(人馬) 또는 마차(馬車)가 머무르는 여관과 차고(車庫)의 구실 이외도 통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역은 옛날의 교통통신 수단 중에서 매우 중요하여 주로 30리 거리에 하나씩 역을 두어 말과 역정(驛丁)을 갖추고 공문을 보내거나, 공무(公務) 여행자에게 말을 제공하며, 숙식을 알선하였다.
남리역은 계곡면 성진의 별진(別津)역, 해남읍 신안리의 녹산(綠山)역과 함께 조선시대 해남 3역 중 하나였다(동국지리승람1486). 남리역은 고려 때 설치되어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잠시 소멸되었다. 이후 조선 초기에 다시 설치되어 운영되다 1896년 혁파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리역은 해남현에서 서쪽방향으로 40리(16km)에 위치하고, 우수영과 삼지원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척 공사 전 남리역은 우리지역의 개미허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목(目)으로, 동쪽으로는 해남현, 서쪽으로는 문내·화원면과 남쪽으로는 진도군, 북쪽으로는 뒷개의 나루터를 이용해 영암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여지도서를 통해 본 남리역은 ‘영암-별진역-녹산역-남리역-삼지원-진도’로 연결도로를 설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이른 아침에 우수영에서 출발한 이순신 장군이 남리역에 도착해 점심을 먹은 후 해남현으로 떠난 기록이 보이며, ‘전라도 서남부지역 동학혁명운동사’에서는 당시 남리역의 대접주 김신영과 천여 명의 농민들이 우수영을 공격하기 위해 남리역에 집결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어 이는 남리역이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 삼지원(三枝院)
▶ 위치-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305-6번지
원(院)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출장한 관원들을 위해 각 지역의 주요도로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국영(國營) 숙식시설로 삼지원은 해남과 진도 사이를 연결하며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해남에는 만희원(萬喜院), 적량원(赤良院), 삼기원(三岐院) 모두가 현(지금의 해남읍)의 서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중 만희원이나 적량원은 그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삼기원(三岐院)은 현의 서쪽 60리에 있었으며 진도로 통한다고 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도 벽파진과 마주한 현재의 삼지원과 그 위치가 일치한다.
삼지원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남과 진도를 오가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진도사람들에게는 육지로 나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그러나 삼지원은 현재 옛 포구의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1984년 울돌목에 세워진 해남-진도를 연결하는 진도대교가 건설 된 이후 육로를 통한 직접적인 왕래가 가능해져 삼지원은 해남-진도를 연결하는 해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삼지원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진도와 육지인 해남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도 전고(典故)에 보면 삼지원이 한때 여·몽 현합군의 진도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였음이 나타나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해남의 3역(驛)과 3원(院) 중에 삼지원이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