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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집 연보 (1591년 -
1. 만력 18년(1590, 선조 23) 경인. 선생 53세
○ 3월 5일에 조정을 하직하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 상사(上使) 황윤길(黃允吉),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드렸더니, 주상께서 대궐 뜰에서 술을 내렸다. 물러나와서 율시 한 수를 읊었다.
○ 16일에 가다가 고향 집에 이르렀다. - 유지(有旨)를 내려 선영에 들러 성묘할 것을 허락하였다.
○ 19일에 석문정사에 올라갔다. - 내한(內翰) 황여일(黃汝一)이 마침 찾아왔으므로 선생이 오언시 한 편을 읊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이번 길에 산 밑으로 내 지나옴에 / 今來過山下
원숭이와 학이 모두 성을 내누나 / 猿鶴皆生嗔
나랏일이 중한 것만 생각하노니 / 但念王事重
내가 어찌 잠시나마 머뭇거리랴 / 我何小逡巡
내 마땅히 충신에 의탁을 하여 / 會當仗忠信
한번 가서 양국 우호 이룩하리라 / 一成兩國親
그런 뒤에 시 읊으며 돌아와서는 / 然後賦歸來
길이길이 산에 사는 사람 되련다 / 永作山中人
하였다.
○ 21일에 천전리로 돌아와서 가묘(家廟)를 배알하고 선영에 성묘하였다.
○ 23일에 집을 하직하고 길에 올랐다.
○ 4월 3일에 동래(東萊)에 머물면서 바람을 기다렸다. - 짧은 율시 한 수가 있다.
○ 27일에 배를 출발하여 다대포(多大浦)의 사립산(蓑笠山) 아래 바다 어귀에서 묵었다. - 절구 한 수가 있다.
○ 28일에 목도(木島)를 지나다가 바람을 만났으므로 다대포로 되돌아와서 묵었다.
○ 29일에 대포(大浦)의 관소(館所)에 이르렀다. - 이날 대양(大洋)에 정박하였는데 태풍이 갑자기 불어 닻줄이 끊어지고 돛대가 부러졌으므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홀로 단정히 앉아 시를 읊으면서 사자관(寫字官)을 시켜 돛에다가 큰 글씨로 쓰게 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베돛이 큰바람에 잔뜩 부푸니 / 布帆飽長風
인간 세상 온갖 생각 부질없구나 / 人間萬慮空
외론 신하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 孤臣判死生
거친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섰도다 / 獨立大荒中
하였다. 섬에 닿은 뒤에 어떤 사람이 “그렇게 위험하였는데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던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이르기를, “죽고 사는 데는 명이 있는 법이므로 오로지 조용히 기다린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천풍해도사(天風海濤辭)’를 지어 회포를 적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선생에게 묻기를, “돛대가 기울어져 위태로울 때에도 선생께서는 홀로 조용히 앉아 시를 읊었으니, 참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不動心]’고 하겠습니다.” 하자, 선생은 웃으면서 이르기를, “시를 읊은 것도 억지로 마음을 붙잡은 것이니,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식자들은 선생이 처한 경우에 따라서 체험하면서 맹렬히 반성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점이라고 하였다.
○ 5월 1일에 배를 출발하여 사흘을 바다에서 자고 4일에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도주(島主)에게 명을 전하였다. - 왜사(倭使)가 미처 와서 영접하지 않았는데, 상사(上使)가 ‘조정의 지휘(指揮)에도 선위사(宣慰使)가 오기를 머물러서 기다리라는 말이 없다.’는 이유로 선위사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출발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이르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보통 왜인이 왕래할 때에도 오히려 접대하는 관원을 보내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통신사의 행차인데 영접하고 호위하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듣건대 저들 또한 차관(差官)이 온다고 하였으니, 길이 막혀 중간에서 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간다면, 우리들이 자처하는 도리가 중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저들이 장차 선위사가 있고 없고가 관계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 뒤에는 드디어 이것을 끌어대어 전례로 삼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도 상사가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 뒤에 보니 과연 평행장(平行長)이 선위사로서 일기도(一岐島)까지 와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동쪽 봉우리에 올라가 일기도(一岐島)를 바라보았다. - 부관(副官) 평의지(平義智)가 와서 작은 술자리를 벌였으므로 즉사(卽事)로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그 시 중에, “나랏일에 마음 걸려 돌아갈 뜻 급하거니 모름지기 망향대서 슬퍼를 하지 마소.[王事關心歸意急 不須惆悵望鄕臺]” 하였다.
○ 국분사(國分寺)를 유람하였다. - 평의지 등이 국분사에 볼 만한 경치가 있다고 하면서 사신에게 가보기를 청하였는데, 현소가 중당(中堂)에 앉아서 영접하였으며, 평의지는 나중에 오면서 가마를 타고 계단을 지나서 올라왔다. 이에 선생이 그들의 무례함을 싫어하여 상사에게 함께 나갈 것을 청하였으나, 상사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만약 이대로 앉아 있으면서 술잔을 주고받는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는, 곧바로 일어나 나오니, 서장관도 뒤따라 나왔다. 평의지가 이상히 여겨 물으니, 역관(譯官) 진세운(陳世雲)이 ‘병이 나서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왜사(倭使)가 보는 자리에서 진세운을 곤장 친 다음 ‘거짓말로 왜인들의 환심을 사 일행의 체모를 그르쳤다’고 죄를 따졌다. 그러자 도선주(都船主)가 사람을 시켜서 사죄하였으며, 평의지 역시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가마를 멨던 자에게 죄를 돌려 목을 베고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다음 걸어서 문으로 들어와 공손한 말로 사과하였다. 이로부터는 겸손한 태도로 의리에 복종하면서 감히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않았다.
○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분사에서 욕을 당한 일을 논하였다. - 허 서장관은 선생이 진세운을 곤장 친 것은 너무 심한 일이라고 여겼으며, 또 평의지가 가마를 멘 종을 죽였다고 듣고는 더욱더 불편해 하였다. 그래서 선생에게 글을 보내기를,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는 상규(常規)로 대할 수 없으니 옛사람도 ‘잘 달래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지 어찌 일찍이 체모를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였으며, 상사 역시 말하기를, “오랑캐와는 겨룰 필요가 없으며, 자그마한 예절은 다툴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선생은 이에 대해 답하는 글에서 나라의 체면을 높이고 체모를 중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되풀이하면서 쟁론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문집과 행장에 상세히 나와 있다.
○ 6월에 배를 출발하여 일기도에 닿았다. - 구봉(龜峯)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상사와 서장관이 진세운을 평의지 등에게 보내어 출발하기를 청하였는데, 걸어서 도선주가 탄 말 뒤를 따라가면서 출발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말하기를, “진세운이 욕을 당하는 것은 곧 사신이 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격왜(格倭)를 앞장 세우고 사신이 출발하면 저들은 뒤쫓아오느라고 겨를이 없을 터인데, 하필 평의지에게 물어본단 말입니까.” 하면서 굳게 다투었으나,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일기주(一岐州)에 이르렀을 때에는 왜인이 와서 쌀섬을 바치는 것을 상사와 서장관이 배를 맞대고 친히 받으므로 선생은 또 대의(大義)로써 다투었다. 또 선위사와 국왕사(國王使)가 모두 여기서 머무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사와 서장관이 그들에게 만나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또 “주인이 마땅히 손님을 청해야지 손님이 스스로 만나 주기를 청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면서 논변하여 마지않았는데, 두 사람이 듣지 않고 곧바로 왜사에게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 16일에 바다를 건너 계빈관(堺濱館)의 인접사(引接寺)에서 묵었다. 서해도(西海道)의 왜인이 보낸 글 가운데 적혀 있는 ‘내조(來朝)’ 두 글자에 대해 상사와 서로 다투었다. - 처음 절에 이르렀을 때에 서해도의 왜인이 예물과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 글 가운데 ‘조선 사신이 내조하였다.[朝鮮使臣來朝]’는 말이 있었다. 일행들이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깨닫고 물어보니, 이미 여러 종자(從者)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준 뒤였다. 선생이 상사와 서장관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몹시 욕되게 하였으니 장차 어찌 하겠습니까.”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몰라서 그런 것이니 어찌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오랑캐는 참으로 무지하다 하더라도 사신 또한 무지하단 말입니까.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음식을 받아 먹은 것은 그 부끄러움이 발로 차서 주는 것보다도 더한 것입니다. 저들이 보낸 음식을 보니 모두 저자에서 사온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 수효대로 다 구해서 돌려주면서 이르기를, ‘너희 주인이 말을 잘못하였는데, 이미 그것을 알았으므로 받을 수 없다. 그러니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그렇게 전하라.’ 한다면 욕됨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와 서장관이 처음에는 매우 어렵게 여기다가 선생이 계속해서 논하여 뭇 의논이 마침내 정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이 사과하기를, “남을 시켜서 대신 쓴 탓에 실언한 것으로, 저희 주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다시 고쳐 써서 바치겠으니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사죄하여 마지않으니, 두 사람이 허락하려고 하였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마지못하여 그에 따랐다.
○ 7월에 일본의 국도(國都)에 들어갔다. 【보(補)】 22일이다. - 왜국의 지경에 들어오면서부터 상사와 서장관은 왜인들의 가마 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혹 갓을 벗거나 허리를 구부리고 타야만 겨우 용신할 수가 있는 것은 자중(自重)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관디를 갖추어 입었다. 왜도(倭都)에 이르렀을 때 두 사신은 그대로 평상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그 잘못을 말하였는데도 오히려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생만 홀로 예복을 입고 갔는데, 이날 왜도의 사녀(士女)가 전부 쏟아져 나와 보았으며, 궁녀와 고관들까지도 대궐 아래에 모여서 보면서 모두 선생에게는 두 손을 교차시켜 공경하는 뜻을 표하였으나, 다른 사람은 보는 둥 마는 둥 하였다.
○ 8월 2일에 서장관과 함께 대덕사(大德寺), 대선원(大仙院), 정수원(正受院), 흥림원(興臨院), 금모각(金毛閣) 등을 유람하였다. - 바위 동굴, 소나무, 대나무,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 등이 있어 경치가 좋으므로 한가한 날에 둘러본 것인데, 시를 읊어 본 것을 기록하였다.
○ 서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관백(關白)을 만나 보는 절목(節目)에 대해 논하였다. -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관백이 그 나라의 왕인 줄 잘못 알고 국서(國書)에도 서로 대등한 예로 썼고, 사신들이 서로 만나 보는 데 대해서도 일정한 지휘가 없었는데,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가 국왕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선생은 “마땅히 올라가 기둥 밖에서 절해야 한다.” 하였으나, 서장관은 “마땅히 뜰 아래에서 절해야 한다.” 하면서, 서로 며칠 동안이나 쟁론하였으나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은 글을 보내어 변론하였는데, 그 글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여국(與國)입니다. 그리고 일본을 맡아 다스리는 자는 소위 천황(天皇)으로, 관백이란 자는 그의 대신(大臣)일 뿐입니다. 그런데 임금과 대등한 예로 대한다면, 이는 우리나라를 몹시 낮추어서 굽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전에 온 사신들은 모두 당 위에 올라가서 절하였는데, 이번에 어찌 스스로 먼저 굽혀서 욕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우리 국서에 어휘(御諱)를 쓰고 평수길(平秀吉)을 국왕이라 일컬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대개 당초에 조정에서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이런 지나친 예가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비록 국서를 고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사신이 그를 만나 보는 예는 마땅히 전에 한 의식대로 해야만 합니다. 어찌 그것을 가지고 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참으로 평수길이 진짜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뜰 아래서 절을 하여 소위 천황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반복하여 수천 마디의 말을 하였다. 또 현소(玄蘇)의 무리가 이미 우리나라에 왔을 때 뜰 아래에서 절하였으므로, 혹 그와 서로 같게 하려고 할까 염려하였다. 이에 가만히 현소에게 물어보았더니, 현소 또한, “사신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고는, 선생의 뜻을 관백에게 통보하여 기둥 밖에서 절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 28일 주산(舟山)에 올라가 왜의 국도(國都)를 구경하였다. - 주산은 왜도(倭都)의 진산(鎭山)이다. 시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 9월에 왜의 부관(副官)이 우리 음악(音樂)을 청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 당시에 총견원(摠見院)에 머물러 있었는데 평의지 등이 와서 우리나라의 음악을 청하자, 일행 사람들이 허락하고 싶어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말하기를, “사명을 받들고 와서 아직 왕명을 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처녀가 아직 시집 못 간 것과 같습니다. 왕명을 풀밭에 내팽개친 채 국도 가운데서 음악을 베풀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처녀가 노래를 팔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물며 일정하지 않은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인데, 악공(樂工)이 악기를 안고 밤새도록 국도 가운데 있을 경우 어찌 걱정될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를 지었다. - 왜승(倭僧) 종진(宗陳)이 와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여 주었는데, 그 책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풍속이 비루하고 속되어 터무니없는 내용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국내에서 통행하는 예절과 풍속을 거론하고 각각 그 아래에 주를 달아 잘못된 것임을 밝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종진이 감복하여 곧바로 관백에게 전해 보였다.
○ 10월에 서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관광(觀光)하는 것이 잘못임에 대해 논하였다. - 관백이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서 오래도록 밖에 있다가 9월 초에 비로소 환도(還都)하였다. 평의지가 와서 말하기를, “관백이 내일 일찍이 천궁(天宮)에 갈 것이니, 사신이 관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선생은 왕명을 아직 전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굳이 청하는 것을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자 왜승이 와서 말하기를, “평의지가 청한 것은 실은 관백의 뜻이니, 따르지 않으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일행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제상(堤上)의 화(禍)를 입을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울었으며, 서장관은 말을 재촉하여 도중(都中)까지 들어갔다가 관백이 가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이튿날도 잔치가 있다 하여 서둘러서 갔다가는 실망한 채 되돌아왔고, 세 번째 가서야 만나 보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또 글을 보내어 엄하게 꾸짖었다.
○ 객난설(客難說)을 지어 상사에게 답하였다. - 관백이 돌아와서는 궁전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왕명을 받지 않았으므로, 상사는 오래 지체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예물이라고 핑계 대고는 관백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이 객난설을 지어 상사에게 보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사신이 왕명을 받고 국경을 나와서는 비록 한결같이 예절에 맞도록 행동하여 구차함이 없게 하더라도 오히려 몸가짐을 잘못하여 왕명을 욕되게 할까 두려운 법이거늘, 하물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진실로 예물을 주고받는 법이나, 명을 전한 뒤에 주면 예물이 되겠지만 오늘 준다면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임금의 위엄과 덕을 선양하지 못하였는데 도리어 뇌물을 보내어 아첨한다면, 몹시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죽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사도 굽히고 말았다.
○ 11월 7일에 비로소 명을 전하고, 11일에 계빈관(堺濱館)의 인접사(引接寺)로 나가 묵었다. - 관백이 명을 받고는 4일에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서계(書契)는 뒤따라 지어서 보낼 것이니, 사신은 계빈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호구(虎口)를 벗어난 것만 다행으로 여겨, 그 말을 듣는 즉시 말을 재촉하여 출발하였는데, 선생은 이르기를, “서계를 받지 않았으니 이는 사신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 것으로, 지레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계빈은 100리 밖에 있는데, 만약 일이 생겨 서로 왕복해야 할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면서, 고집하였다. 그러나 행차가 이미 멀리 갔으므로 홀로 뒤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 마침내 계빈으로 나간 것이다.
○ 입도출도변(入都出都辨)을 지었다. - 국도에 들어갈 때에도 상사와 서장관이 모두 편복(便服)을 입고 갔으며, 국도를 나올 때에 또 서계도 받기 전에 지레 계빈으로 나왔으므로, 선생이 모두 쟁론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이에 입도출도변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 왜인예단지(倭人禮單志)를 지었다. - 일본에 들어간 후에 수직왜인(受職倭人)들이 앞다투어 보내오는 하정(下程)을 사신이 모두 받으면서 회례(回禮)하였다. 앞서도 이미 서해도(西海道) 왜인(倭人)이 보낸 예단에 ‘내조(來朝)’란 말이 있어 다툰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도 비전주(肥前州)의 원구성(源久成) 등이 예물과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 글에 적힌 내용이 또 앞서와 같았다. 그러자 진세운(陳世雲)이 사사로이 원구성이 보낸 사신에게 전에 있었던 일을 알려 주어 그로 하여금 고쳐 올리게 하였다. 이에 선생은 ‘진세운이 사신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은 채 지레 예물을 물리쳤으니, 이는 진세운이 사신이 된 것이다.’고 하면서, 진세운을 곤장 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사신과 서장관에게 이르기를, “앞서의 왜인이 글을 잘못 쓴 데 대하여 엄하게 물리치지 않았으므로 지금 또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 욕됨이 큽니다. 의리상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상사와 서장관이 이르기를, “의당 거친 것을 포용해야지, 어찌 지나치게 분명하게 따져서야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받았다. 그러자 선생은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서 회례에는 선생의 이름을 쓰지 말아 달라고 청하였으며, 종자(從者)들에게도 나누어 주지 말게 하였다. 그리고는 인하여 왜인예단지를 지어 밝힌 것이다.
○ 25일에 서계(書契)가 왔다. - 서계의 말투가 매우 패만스러웠는데, 심지어는 ‘전하(殿下)’를 ‘각하(閣下)’라고 하고, ‘예폐(禮幣)’를 ‘방물(方物)’이라 하였으며, 또 ‘한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겠다. 귀국은 앞장 서서 입조하라.[一超直入大明國 貴國先驅入朝]’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 현소(玄蘇)에게 편지를 보냈다. - 선생은 그 서계를 보고 크게 놀라서 즉시 물리치고 현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서계를 고치지 않으면 사신은 죽음이 있을 뿐, 의리상 돌아갈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러자 현소가 각하(閣下), 방물(方物), 영납(領納)의 6자만 고칠 것을 허락하고, ‘한번 뛰어 대명국에 들어가겠다. 귀국은 앞장 서서 입조하라.’는 말은 ‘대명국에 입조한다.[入朝大明]’는 말이라고 핑계 대면서 끝내 고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현소가 보낸 편지에 답하였다. - 상사와 서장관이 현소가 속이는 말을 믿고 다시 고치라고 요청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정색을 한 채 이를 꺾어 버리고는, 재차 현소에게 글을 보내어 서계에 있는 말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단락별로 명백히 밝혔으며,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 조정은 예의를 중하게 여겨서 귀국과 우호를 통한 지 200년이 되었으나, 일찍이 털끝만큼도 무례한 말을 가한 적이 없었던 것은 귀국에서도 아는 바입니다. 지금 귀국에서 포로로 잡아간 우리나라 백성을 돌려보내고, 우리나라를 침범한 무리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옛날처럼 수교하기를 청했습니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는 신의가 있는 것을 몹시 가상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사신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귀국의 서계 안에는 그에 대해 감사해 하는 뜻은 생략해 버리고, 도리어 귀국의 위세에 대해 떠벌린 다음, 위로는 대명국을 엿보고 옆으로는 이웃 나라를 위협하여, 우리를 업신여기고 위협하는 말을 함부로 늘어놓았습니다. 이웃을 예로써 사귀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존사(尊師)께서는 좋은 말로 관백에게 아뢰어 서계를 고쳐 지어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두 나라가 잘 지내어서 우호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 다시 현소가 보낸 편지에 답하였다. - 현소가 앞서 보낸 글을 보고 역관(譯官)을 대하여 끊임없이 칭찬하고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면서 선생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입조(入朝)’니, ‘범대명(犯大明)’이니 하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오히려 앞서 한 말을 고집하였다. 이에 선생은 재차 글을 써서 보내어 기필코 고치고야 말 작정을 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문집에 나와 있다.
○ 상사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 상사 이하의 사람들은 이미 ‘각하’나 ‘방물’ 등의 말을 고친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며, 또 변고를 일으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억지로 따질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다시 상사에게 글을 보내어 따졌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만약 ‘입조’ 두 글자를 고치지 않으면, 이것은 우리 조정이 왜놈의 속국이 되고, 온 나라의 관원들이 죄다 그들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이니, 또한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송(宋) 나라 고종(高宗)은 이미 신하가 되어 금(金) 나라를 섬겼는데도 금 나라에서 보낸 조서에, ‘강남에 조유한다.[詔諭江南]’라는 문구가 있자, 호담암(胡澹庵)은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속국으로 된 조정에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당당한 우리나라가 오랑캐와 이웃하고 있으면서, 도리어 ‘입조’라는 욕을 달갑게 여기고 죽음으로써 고치기를 다투지 않는단 말입니까. 대부(大夫)가 사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선 뒤에는 사직을 편케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일이면 재량껏 처리하는 것이 옛날의 도입니다. 하물며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이런 말은 죽음으로써 다투어 고치기를 청하더라도 제 마음대로 처리한 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일신의 이해만을 염려하여 벌벌 떨면서 머리를 숙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는 치욕스러운 서계를 싣고 가서 임금에게 바치게 되었습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분통이 터져 팔을 걷어붙이게 됩니다.” 하였다.
○ 선위사(宣慰使) 평행장(平行長)에게 답장을 보내려고 하였다. - ‘우리 조정에서는 지성껏 중국을 섬기고 있으므로 차마 이웃 나라와 한 무리가 되어 범하지 못하겠다.’는 의리로 되풀이해서 변론하여 기어코 서계 중에 있는 말을 고쳐 쓰도록 하려고 장차 글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행 사람들이 모두 일이 생기게 하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서로 선동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저지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使不得專] 대개 현소는 이미 선생의 말을 옳다고 여겨 자못 부끄러워하고 굽히는 뜻이 있었는데도, 일행의 일은 상사에게 절제권이 있으며 서장관도 그와 합세하였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그 뜻을 행할 수 없어서 그 글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인하여 시를 지어 분한 마음을 쏟아 내었는데, 그 시 가운데 ‘물속의 어룡 응당 글자를 알아보리[水底魚龍應識字]’란 구절이 있다.
○ 12월 11일에 배를 출발하여 병고관(兵庫關)에 돌아와 묵었다. - 갈 때나 돌아올 때나 여러 추장(酋長)들이 각자 전별(餞別)하는 물품을 보내왔는데, 모두 여관(旅館)의 중들에게 나눠 주어 터럭만큼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 17일에 남포(藍浦)에 닿았다. - 병고관에서 어두운 밤에 돛을 올려 수십 리 길을 와 남포에 정박하였는데,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함께 타루(柁樓)에서 술을 마셨다. ‘오산의 시에 차운하다.[次五山詩]’라는 율시 한 수가 있다.
○ 20일에 남포를 출발하여 조호관(竈戶關)을 지나 적간관(赤間關)에서 묵었는데, 10여 일을 바람으로 인해 가지 못하고 있었다. - 이상의 기행시(記行詩)와 주고받은 여러 시는 《해사록(海槎錄)》에 실려 있다.
[주-D001] 제상(堤上)의 화(禍) :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죽은 일을 말한다. 박제상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신라 왕의 동생인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켜 신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억류되어 있다가 피살당하였다.[주-D002] 서계(書契) : 조선과 일본 사이에 주고받던 문서를 말한다.[주-D003] 수직왜인(受職倭人) : 조선 조정으로부터 임관(任官)의 사령서(辭令書)를 받은 왜인을 말한다.[주-D004] 하정(下程) : 사관(使館)에 도착한 외국 사신에게 술과 음식 등 필요한 물품을 보내 주는 것을 말한다.[주-D005] 호담암(胡澹庵) : 담암은 송 나라 호전(胡銓)의 호이다. 남송(南宋)의 정신(廷臣)으로, 고종 때 추밀원 편수(樞密院編修)로 있으면서 진회(秦檜) 등이 금 나라에 대한 유화책(柔和策)을 주장하자, 봉사(封事)를 올려 진회를 목벨 것을 주장하였다가 폄관(貶官)되었다.[주-D006]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使不得專] : 이 부분의 두주에, “어떤 데에는 ‘전(專)’이 ‘전(傳)’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2. 만력 19년(1591, 선조 24) 신묘. 선생 54세
○ 1월 10일에 일기도(一岐島)에서 대마도(對馬島)로 돌아와 묵었다. - 평의지가 잔치를 베풀어 전별하면서 보검(寶劍)을 내어 사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출발할 때 선생은 후왜(候倭)에게 명해 도주(島主)에게 보검을 되돌려주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데리고 갔던 원역(員役)들은 선생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의리에 복종하여 절대로 시장에서 물품을 교역하지 않아 한 가지 물품도 가져오지 않았다. ○ 상원일(上元日)에 학악성(鶴嶽城)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시를 지었다. 【보(補)】 영귀(靈龜)에 대한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네 성질은 언제나 남쪽 향하고 / 爾性長指南
내 마음은 언제나 북극 향하네 / 我心長拱北
그댄 보라 흘러가는 황하수 물이 / 君看黃河水
일만 번을 꺾이어도 동쪽 가는 걸 / 萬折必東域
지향하는 방향 비록 서로 달라도 / 所趨雖異方
그 이치는 같은 데서 나온 거라네 / 此理本一極
하였다.
○ 2월 초에 바다를 건너와 부산(釜山)에서 묵었다. - 행낭이 비어 쓸쓸하였으며, 석창포(石菖蒲)와 종려나무 분재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보(補)】 사신으로 가는 도중에 의정부 사인에 제수되었다. 운천(雲川) 김용(金涌)이 지은 언행록(言行錄)에 나와 있다.
○ 이달에 환조(還朝)하여 복명(復命)하였다. - 서계(書啓)를 올린 것이 있다.
○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사퇴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 가다가 안동(安東)을 지나면서도 집에는 들르지 않았다.
○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수기(手記)에 이르기를, “황윤길(黃允吉)이 돌아와 부산에 닿아서는 일본의 정세에 대해 치계(馳啓)하기를,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복명한 뒤에 주상께서 인견(引見)하고 물으니, 황윤길의 대답은 앞서와 같았고, 김성일은 아뢰기를, ‘신은 그런 낌새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황윤길은 인심을 동요하게 하니 마땅치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이 황 상사의 말과 다른데, 만약 병란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였더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낸들 어찌 왜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마는,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하여 중외(中外)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므로, 이를 풀어 준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 임진란 초에 평창 군수(平昌郡守) 권두문(權斗文)이 포로로 붙잡혀 갔다가 지은 《호구록(虎口錄)》에 이르기를, “왜장 원개연(源介緣)이 평창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 권두문과 아들 권주(權𪐴)를 포로로 잡아갔는데, 하루는 선생의 이름을 글로 써서 묻기를, ‘지금 무슨 벼슬로 있는가?’ 하기에, ‘현재 적을 정토(征討)하는 책임을 맡아 영남에 있다.’고 대답하니, 또 묻기를, ‘이덕형(李德馨)은 어디 있는가?’ 하므로, ‘국왕을 모시고 있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또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 김성일이나 이덕형 같은 이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다. 이는 대개 깊이 공경하고 꺼린 것이다.” 하였다.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 23)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 동안 전후로 일본에 사신의 명을 받들고서 갔다가 돌아온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왜놈들은 더욱 선생을 존중하여 마지않는다.” 하였으니, 아, 선생이 전대(專對)한 절개에 대해 왜인들이 경복(敬服)하고 있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도 그 사이에는 혹 빗나간 의론을 하는 자가 있어 침해하고 배척하기를 가차없이 하는데, 안방준(安邦俊)의 《임진록(壬辰錄)》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이르렀는바,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이에 그에 대해 변증하는 자료 몇 가지를 아래에 붙인다.
○ 상서(尙書) 김시양(金時讓)이 지은 《부계기문(涪溪記聞)》 가운데 선생이 일본에 봉사(奉使)하였을 때의 일을 논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절목(節目) 간의 일로 성을 내는[悻悻] 것은 전대(專對)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요령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한 고조(漢高祖)를 만났을 경우에는 앞서 사신으로 갔던 자 10명의 베어 죽임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그 글이 세상에 나오자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가 김시양의 아들 김휘(金徽)에게 글을 보내어 변론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적에 진(晉)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쳤을 때 제 나라에서 국좌(國佐)를 진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할 것을 청하게 하였다. 진 나라 사람이 ‘제 나라의 밭을 모두 동쪽으로 두둑을 내라.’ 하였는데, 이는 대개 제 나라로 하여금 굴복하는 뜻을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국좌는 의연히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그 말을 따를 수는 없다.’ 하니, 진 나라 사람도 감히 그 뜻을 꺾지 못하고 드디어 화친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송(宋) 나라 이종(理宗) 때 원(元) 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오자, 송 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면서 원 나라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일체 다 들어주었다. 그러자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가 상주(上奏)하기를,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마음만 불어나게 할 것입니다.’ 하면서, 국좌의 일을 예로 들어 증명하였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밭의 이랑을 동쪽으로 내는 것은 크게 이해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런데 오히려 죽기로써 다툰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참으로 이를 허락하고 허락하지 않는 사이에는 국가 형세의 무거워지고 가벼워짐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국분사(國分寺)에서 일어나 나온 것과 서해도(西海道)에서 바친 음식을 물리친 일에 대해서는 모두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백(關白)의 행차를 관광하려 한 일이라든지, 예복(禮服)을 입지 않고 왜도(倭都)에 들어가려고 한 일이라든지, 국서(國書)도 전하기 전에 가까운 자에게 뇌물을 주려 한 일이라든지, 국서에 대한 답이 오기도 전에 지레 계빈(堺濱)으로 나오려고 한 일이라든지, 뜰에서 관백에게 절하여 굴욕을 달갑게 여기려고 한 일 등은 모두 국가의 큰 체모에 관계되는 일이다. 그러니 어찌 말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으며, 또한 변론하여 따지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계빈으로 나온 후에 관백의 답서가 비로소 이르렀는데, 그 말투가 지극히 거만하여 더욱더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몇 번이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논변하여 기어코 고치고야 말려고 하였던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은 일들을 제 나라의 국좌가 다툰 바와 비교해 보면, 그보다도 훨씬 더 중대한 문제이니, 어찌 단지 소소한 절목 사이의 일일 뿐이겠는가. 섬 오랑캐의 사나운 마음을 철저히 꺾었으며, 우리 문화 민족의 기운을 편 것이 가을 서리나 뜨거운 햇볕과 같았으니, 소소한 절목 사이의 일이라고 핑계 대어 다투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하물며 선생이 왜노와 더불어 논변한 말은 오직 이치로써 꺾어 그들의 완악함을 깨우쳤을 뿐이지, 애당초 그들을 격분시켜 노여움을 불러일으킨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이른바 성을 내었다는 뜻의 ‘행행(悻悻)’이란 글자를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사신으로 갔던 자 10여 명’ 운운한 글은 또한 모두 박절한 말인바, 아마도 이 말을 선생에게 써서는 마땅치가 않을 듯하다. 일찍이 선생이 복명하였을 때에 올린 서계(書啓)를 보았는데, 그 서계에는 단지 ‘신은 그들이 반드시 쳐들어오리라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臣則未見其必來]’ 하였으며, 물러나와서 나의 선인(先人)과 함께 말할 때에도 이르기를, ‘낸들 어찌 왜놈들이 끝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마는,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하여 마치 왜놈들이 곧바로 뒤따라서 쳐들어올 것처럼 말하였으므로, 이를 풀어 준 것일 뿐이다.’ 하였다. 이런 말들이 과연 강경하게 결정하고 굳게 고집을 부려 ‘반드시 쳐들어오지 않는다.[必不來]’고 말한 것인가. 또 황 상사가 ‘왜놈들이 반드시 쳐들어 온다.’고 한 말도 어찌 참으로 왜적들의 정세를 알고서 한 말이겠는가. 대개 일본에 있었을 때 마음이 약하여 겁을 먹은 잘못을 가리려고 그렇게 말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조정에서도 애당초 이런 말들로 인하여 왜적을 방비하는 일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선생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고 하면서 선생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부계기문》의 이 한 조항은 마땅히 삭제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 안방준(安邦俊)은 호남(湖南)의 장흥(長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음험하고 글을 잘 지었는데, 선배들을 침범하여 거짓을 꾸며 대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에 없는 일을 있다고 하고 헛 말을 사실이라고 하여 문자로 적은 것이 아주 많았다. 그가 선생이 일본에 봉사하였을 때의 일을 가지고 헐뜯은 것이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글 가운데서 징험하여 믿을 만한 것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변증한다.
안방준의 말에, “황윤길 등이 왜사(倭使)와 함께 왔는데, 현소와 평의지는 조령(鳥嶺)으로, 평조신(平調信)은 죽령(竹嶺)으로 길을 나누어 올라왔다.” 운운하였는데, 선생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평의지는 본디 함께 오지 않았으며, 또 길을 나누어 올라온 일도 없었다. 또 “황윤길과 허성 이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왜적이 반드시 크게 쳐들어올 것이다.’ 하였는데도, 김성일만은 홀로 절대로 쳐들어올 리가 없다고 하였다.” 운운하였는데, 선생이 올린 서계 및 문충공 유성룡과 말한 것은 다만 진정시킬 생각에서 한 말이지,
애당초부터 ‘절대로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또 “서계한 가운데 ‘평추(平酋)도 용렬하고 범상한 인물이다.’ 하였다.” 운운하였는데, 서계한 가운데에는 원래 이런 말이 없다. 또 “묘당(廟堂)에서는 김성일을 훌륭한 사신이라고 여겨 왜적을 방비하던 모든 일을 모조리 혁파하였다.” 운운하였는데, 선생이 올린 옥당(玉堂)의 차자에는 이르기를, “군정(軍政)을 닦아 변방을 튼튼히 하소서.” 하였고, 또 이르기를, “관방(關防)이 옛부터 있던 곳은 해마다 튼튼한 성을 쌓아 견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러니 조정에서도 애당초 이 때문에 왜적을 방비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황윤길이 데리고 간 군관(軍官) 황진(黃進)이 분하고 원통하여 팔을 걷어붙이고는 말하기를, ‘황윤길과 허성은 어리석고 못난 사람인데도 오히려 왜적의 정세를 알았는데, 김성일 같이 재주 있고 눈치 빠른 사람이 어찌 몰랐겠는가. 서계 가운데에 상국(上國)을 범하는 부도(不道)한 말이 많았는데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받아 왔으므로, 김성일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차라리 알지 못한 죄에 빠지려고 한 데에 불과한 것이니, 그 마음이 망측하다.’ 하면서, 상소를 올려 목을 베라고 청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이 말려서 그만두었다.” 운운하였는데,
서계 중에는 이미 힘써 다투어 각하(閣下)와 방물(方物)과 영납(領納)의 여섯 글자를 고쳤으며, 상국을 범하는 부도한 말은 이리 끌리고 저리 견제당하여 마침내 고치지 못하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른 ‘말 한마디 못한 채 받아 왔다.’는 말은 또 어찌 심하게 날조하여 꾸며 댄 말이 아니겠는가. 누군가가 이르기를, “임진년에 서쪽으로 피란할 때에 사관(史官)이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도망하였으며, 《정원일기(政院日記)》도 난민(亂民)들이 다 불태웠다. 그러므로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뒤에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명을 받들어 《선조실록》을 수정하면서 중외(中外)의 여러 신하들의 행장(行狀)과 민간에 흩어져 있는 문서를 가져다가 이루었는데, 안방준이 이것을 알아차리고 제멋대로 하고는 한 세상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안방준은 사람들의 양심 속에 있는 옳고 그름은 끝내 없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소인배가 기탄 없는 짓을 함이 한결 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였다.
○ 3월에 성균관대사성 겸 승문원부제조(成均館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에 제수되었는데,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 기축년의 변고(變故) 뒤에 선비들의 기운이 꺾이고 성균관 학생들 사이에도 의론이 분분하여, 갑론을박하면서 나뉘고 각각 기치를 세워 주장하였다. 그런데 대사성이 된 자도 사사로이 자기 당파를 편들면서 진정시킬 뜻이 없었다. 이에 주상께서는 당세의 이름난 선비를 뽑아서 모범이 되어 이끌게 하고자 하여 조정의 의논에 따라 특별히 선생에게 본직을 제수한 것이다. 그러자 행동이 분명치 않았던 자들이 대부분 물러갈 생각을 하였으므로, 선생은 조용히 타이르기를, “배우는 자의 일은 오직 글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고, 도를 강론하여 공부하는 것뿐이다. 조정의 시비와 득실은 유생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명륜당(明倫堂)은 사사로운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니며, 성균관이 어찌 벼슬길에 나가기를 다투는 길이겠는가. 자신의 본분을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놀면서 떠들기만을 일삼으면, 몸과 마음에는 이로움이 없고 군자에게는 버림을 받는 법이다. 나라에서 인재를 기르는 뜻이 어찌 그렇겠는가.” 하면서, 지성으로 가르치고 차별하지 않았다. 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가르쳐 성현(聖賢)의 학문으로 인도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모두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뒷날에 선생이 영남우도 절도사(嶺南右道節度使)로 있을 적에 의금부에서 선생을 잡아오라는 명이 내리자, 관학(館學)의 제생(諸生)들이 함께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하소연하려고 하다가, 마침 잡아오라는 명이 거두어졌으므로 그만두었다.
○ 상소하여 공신록에 녹훈(錄勳)된 것을 사양하였다. - 전년에 광국훈(光國勳)을 녹훈할 때, 전후로 주청(奏請)한 사신과 칙지(勅旨)를 받들고 와 은전(恩典)을 반포한 신하가 모두 끼어 있었는데, 선생만 누락되었다. 그러자 당시의 역관(譯官) 가운데 글을 올려 억울함을 하소연한 자가 있었다. 이에 선생은 광국공신(光國功臣) 원종(原從) 1등에 녹훈되었으며, 부친의 관작은 이조 참의로 봉해졌고, 모친의 호는 숙부인(淑夫人)으로 올라갔다. 선생은 이를 듣고 즉시 상소를 올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술하였다.
○ 7월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보(補)】 이달에 또 대제학으로 천거되어 의망(擬望)되었다. 주상께서 여러 대신들을 불러 문형(文衡)을 주관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고, 또 이르기를, “일반적인 규례에 구애되지 말고 적임자를 얻는 데 힘쓰라.”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천거하여 세 사람을 의망하였는데 선생이 수망(首望)으로 의망되었다.
○ 경연에 입시하여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의 원통함에 대해 극론하였다. - 당시에 막 정여립(鄭汝立)의 역변(逆變)을 겪고 나서 권간(權奸)이 일을 주관하면서 함정을 만들어 놓고 선비들을 잡아 죽였다. 최영경은 세상 일을 초월해 의리를 지켜 사림에서 추중받았는데, 죄를 얽어 붙잡아 들인 다음 옥중에서 말라 죽게 하였다.
그런데도 대신 이하가 모두 숨을 죽인 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선생이 최영경이 무함당한 상황을 일일이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그 사람의 얼굴은 알지 못하나 그가 세속을 초월하여 의리를 행한다는 것은 익히 들었는바, 바로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평소에 의론하는 것이 당당하여 회피하는 일이 없었던 탓에 간사한 자에게 크게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에 간사한 자가 때를 틈타 죄를 얽어서 역적의 당으로 지목한 것이니, 만고의 원통함 가운데 어느 것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주상께서 캐묻기를 마지않으므로, 선생은 더욱더 소상하게 논계(論啓)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으나, 선생은 말투가 한결같았다. 얼마 있다가 최영경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주상의 노여움이 비로소 걷힌 것을 알았으며, 여러 사람의 심정이 크게 시원해졌다. 이로부터 상께서 총애하면서 의지하는 것이 더욱 중하였으므로 조야(朝野)에서는 우러러 흠모하였고, 선생 또한 상께서 인정해 주는 데 감격하여 나라의 안위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이에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다 말하여, 우뚝하게 중류(中流)의 지주(砥柱)가 되었다.
○ 겨울에 잇따라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의 덕과 시국의 일을 논하였다. - 첫 번째 올린 차자에서는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기를 청하면서 이어 다섯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첫 번째는 공부(貢賦)에 대한 일이고, 두 번째는 역역(力役)에 대한 일이고, 세 번째는 군정(軍政)에 대한 일이고, 네 번째는 조정(朝廷)에 대한 일이고, 다섯 번째는 저군(儲君)을 세우고 왕자(王子)들을 교육시키는 데 대한 일이었다. ○ 두 번째 올린 차자에서는 모두 10가지 조목을 말하였는데, 첫 번째는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학교(學校)를 일으켜서 교화(敎化)를 밝히는 것이고, 세 번째는 내치(內治)를 엄하게 해서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백성들의 폐막을 제거해서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군정(軍政)을 닦아서 변방을 견고히 하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형옥(刑獄)을 심리해서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대신(大臣)에게 내맡겨서 조정을 높이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간쟁(諫諍)하는 말을 받아들여서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성학(聖學)을 밝혀서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열 번째는 사치 풍조를 금지시켜 절검(節儉)을 숭상하는 것이었다. ○ 세 번째 올린 차자에서는 내지(內地)에 성을 쌓는 것을 중지하기를 청하고, 이어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백성들이 아래에서 원망하고 있는데도 위에서는 알지 못하고, 속이는 일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임금께서는 듣지 못합니다. 이에 어지럽게 되어 마침내 정치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고 운운하였다. 한 가지 차자가 올라갈 적마다 말이 더욱 간절하여 사방에서 전해 가면서 익혔으며[傳習] 심지어는 육 선공(陸宣公)의 주의(奏議)에 비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동료들 가운데에는 혹 물러가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으며, 척리(戚里)와 권귀(權貴)들은 공을 몹시 미워하였고 삼공(三公)들은 대죄(待罪)하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문충공 서애 유성룡이 글을 보내 치하하기를, “곧은 말이 한번 올라가자, 상께서 마음속으로 감동하였다.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가 잘 다스려지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전후로 올린 차자가 이 세 차자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서 전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 임진년에 서쪽으로 피란하였을 때 상께서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려 전에 한 일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는데, 성지(城池)를 쌓는 역사(役事), 궁금(宮禁)의 폐단, 왕자(王子)가 이익을 노리는 해독, 형옥(刑獄)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일 같은 것은 모두 선생이 차자와 서계 중에서 진달한 것들이었다. 여기에서 선생이 말한 것이 그 당시의 병폐에 꼭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11월에 계씨(季氏) 남악공(南嶽公)의 상을 당하였다. - 제문(祭文)이 있다.
○ 12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는데, 사양하였으나 윤허 받지 못했다. - 정원(政院)의 폐습 가운데 두껍고 얇은 차이가 있는 시지(市紙) 같은 따위를 모두 가벼운 쪽으로 제도를 고쳤으므로, 지사(紙司)의 여러 하인도 모두 감격하여 서로 치하하였다.
○ 얼마 안 되어 일로 인하여 체차되고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부쳐졌다. - 형조(刑曹)의 죄수가 옥을 넘어 달아난 것을 잡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마침 대방(代房)으로 입직(入直)하였기 때문에 체차되어서 본직에 부쳐진 것이다.
【보(補)】 낙연(落)의 남쪽 언덕에 옥병서재(玉屛書齋)를 지었다. - 언덕은 장륙원(藏六原)이라고 일컫는데, 선유정(仙遊亭) 북쪽에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이는 곳에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이 감돌아 흘러 그윽한 경치가 있는 곳으로, 선생이 일찍이 여기에서 학문을 닦을 뜻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을 시켜 공사비를 모으고 집을 짓게 해 아이들이 글을 배우고 익히는 곳으로 삼은 것이다.
[주-D001] 영귀(靈龜) : 지남석(指南石)을 말한다.
[주-D002] 앞서 …… 베어 죽임 : 한 고조 7년에 한 고조가 흉노를 치고자 하여 사자(使者) 10인을 보내 흉노의 정상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흉노가 장사(壯士)와 살찐 말은 다 숨겨 두고 노약자와 수척한 말만 보이게 하였다. 이에 10인의 사자가 돌아와서는 모두 흉노를 쳐도 된다고 하였다. 고조가 다시 유경(劉敬)을 사신으로 보내 탐지하게 하였는데, 유경은 돌아와서 복명하기를, “흉노가 장점은 내보이지 않고 약점만을 내보이니, 반드시 복병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고조는 유경의 말을 듣지 않고 흉노를 정벌하였는데, 평성(平城)에 이르러서 흉노의 기병(奇兵)에게 포위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와서는 앞서 사신으로 갔던 자 10명을 베어 죽였다.
[주-D003] 진(晉) 나라가 …… 허락하였다 : 춘추 시대 성공(成公) 2년에 진 나라가 제 나라를 쳐들어가자, 제후(齊侯)가 빈미인(賓媚人), 즉 국좌를 시켜서 진 나라와 화친을 성사시키게 하였는데, 진 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소(蕭) 나라 군주 동숙(同叔)의 딸을 인질로 보내고, 제 나라 영토 내의 밭두둑을 모두 동쪽을 향하게 하라.” 하였는데, 빈미인이 이를 거절하자, 진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렸다. 《春秋左氏傳 成公 2年》
[주-D004] 기축년의 변고(變故) :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를 말한다. 이해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이 정여립 등이 모반하였다고 고변(告變)함으로써 옥사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옥사로 인해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최영경(崔永慶)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언신(鄭彦信), 정개청(鄭介淸) 등이 유배되었다.
[주-D005] 광국훈(光國勳) : 선조 23년(1590)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훈명(勳名)이다.
[주-D006] 전해 가면서 익혔으며[傳習] : 이 부분의 두주에, “초본(草本)에는 ‘습(習)’이 ‘송(誦)’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주-D007] 육 선공(陸宣公)의 주의(奏議) : 선공(宣公)은 당 나라 덕종(德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육지(陸贄)의 시호(諡號)이다. 육지는 주의(奏議)에 아주 뛰어났으므로, 후세에까지 존중되었다.[주-D008] 11월 : 이 부분의 두주에, “11월은 마땅히 8월로 되어야 한다.” 하였다.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 봄에 특별히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 본조에서는 계복(啓覆)한 중죄인(重罪人)을 제외하고는 으레 속(贖)을 징수하는 까닭에 타사(他司)의 죄수들이 모두 본조에 옮겨 갇히기를 원하였다. 이에 간사하고 교활한 짓이 날로 불어나 징계되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선생이 실정과 죄를 잘 살펴서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니, 본조는 맑아졌고 각사도 따라서 맑아졌다. 소 잡는 것을 더욱 엄하게 금지시켰다.
○ 4월에 측실(側室) 아들 명(溟)이 출생하였다.
○ 11일에 특별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 통신사(通信使)로 갔다가 돌아온 뒤에 조정에서는 전적으로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것으로 방비하는 방책을 삼아, 민정(民丁)을 끌어모아 곳곳마다 성을 쌓았는데, 예전에는 성이 없었던 내지(內地)에도 아울러 새로 성을 쌓았다.
부월 들고 남쪽 향해 길을 떠남에 / 仗鉞登南路
외론 신하 한번 죽음 각오했다네 / 孤臣一死輕
늘상 보던 저 남산과 저 한강물을 / 終南與渭水
고개 돌려 바라보니 남은 정 있네 / 回首有餘情
하였다.
○ 왜적이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쉴새없이 달려 곧장 창원(昌原)의 본영(本營)으로 향해 갔다. - 가는 도중에 충주(忠州)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렀을 때 왜병이 이미 상륙하여 부산과 동래를 잇따라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주야로 달려갔는데, 의령현(宜寧縣)에 이르렀을 때 왜적이 이미 강 오른쪽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러자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서로 모의하기를, “정진(鼎津)으로 가는 길은 적이 있는 곳과 가까워서 곧장 갈 경우에는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니,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형세를 살펴보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병사(兵使)께서 반드시 듣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로 핑계 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선생의 둘째 아들 김역(金湙)에게 부탁하여 들어가서 말하기를, “정진에는 배가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합니다.” 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군교(軍校) 김옥(金玉)을 시켜 가 보게 하였는데, 김옥 역시 돌아와서 거짓말로 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일이 급하니 길을 돌아갈 수 없다.” 하고, 곧장 달려가 보니 배가 있었다. 이에 곧바로 김옥과 김역을 끌어내려 베려고 하였는데, 여러 아랫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다투어 말하기를, “거짓말을 한 죄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제(子弟)가 임시변통으로 말하는 것도 한 가지 도이며, 김옥은 장사(壯士)이니 용서하여 앞으로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김옥 또한 자원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하니, 이에 용서하였다. ○ 장령(掌令) 조정(趙靖)의 《진사일기(辰巳日記)》에는 이르기를, “4월 17일에 우병사의 행차가 상주(尙州) 죽현(竹峴)으로 향해 갔다는 말을 듣고 곧 말 앞에서 맞이하여 절하였다. 어제 저녁에 충주에 있었는데,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밤새도록 달려 훤하게 밝을 무렵에 이미 본주에 들어왔으며, 물 마실 겨를도 없이 급히 본영으로 달려갔다.” 하였고, 통제사(統制使) 정기룡(鄭起龍)의 일기(日記)에서 말한 것도 그러하다.
○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도내에 포고(布告)하였다. - 이때 온 도가 마구 무너져 열읍은 이미 텅 비었으며, 사민(士民)들은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어, 원근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그 자리에서 초유문을 지었는데,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바라는 내용으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말 수천 마디를 하였다. 그러자 온 도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이 감화되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 이노가 본디 글을 잘 짓기로 이름났으므로 선생이 초유문을 짓게 하였더니, 이노가 곧바로 지어서 바쳤다. 선생이 그 글을 보고 이르기를, “그대가 지은 글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수식이 많다.” 하고는, 그 자리에서 손수 지었는데, 모두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서 붓에 먹물을 묻힐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 각 고을의 소모관(召募官)을 차임하고,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을 의병 대장(義兵大將)으로 삼았다. - 선생이 조종도와 이노 두 사람을 시켜 각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내 명망이 있어서 사람들이 믿고 복종할 만한 자를 골라 뽑아 소모관으로 삼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권장하고 격려하면서 병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이때 김면은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인홍은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나머지 향병(鄕兵)을 끌어모아 왜적을 치러 나선 자가 또한 많았는데, 관병(官兵)과 의병(義兵)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이 김면과 정인홍을 의병 대장으로 삼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의병을 합쳐 거느리면서 협력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또 수령이 없는 곳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며 순수하고 성실한 자를 골라 임시 수령으로 삼고, 용감하고 재략(才略)이 있는 자를 뽑아 가장(假將)으로 삼은 다음, 사유를 갖추어서 치계하였다. 이에 고을에는 수령이 있고 군대에는 주장(主將)이 있어서 원근에서 서로 호응하여 차차 회복할 만한 형세가 이루어졌다.
○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에게 글을 보내었다. - 곽재우는 의령(宜寧) 사람이다. 난이 일어나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 자기 집 재산을 흩어서 군사들을 먹이고, 혹 방치해 둔 세미(稅米)를 모으거나 수령이 없는 고을의 창고 곡식을 가져다가 군량으로 쓰면서 날마다 왜적을 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그를 미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웃 고을의 수령이 토적(土賊)이라고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관문(關文)을 보내 그를 잡으라는 명까지 있게 되자, 의병들의 사기가 꺾여 장차 흩어질 형편이었다. 곽재우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장차 모두 버리고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이곳에 이르러서 글을 보내 장려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감격해하면서 용기를 얻어, 곧바로 선생의 글을 깃대에 매달아 향리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로소 그가 의거(義擧)하였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감사나 수령들도 감히 가로막지 못하여 군대의 위세가 다시 떨쳐졌다.
○ 함양(咸陽)에서 산음(山陰), 단성(丹城)을 거쳐 진주(晉州)로 나아가 머물렀다. - 산음의 수령 김낙(金洛)이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내오자, 선생은 김낙을 불러 깨우치기를, “이것은 오늘날 신하 된 자가 먹을 것이 아니다. 비록 먹더라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얼굴빛이 변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김낙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였다. 단성에 이르렀을 때 곽재우가 싸우러 나가다가 관복(冠服) 차림으로 와서 뵈었다. 선생은 그와 말을 나눠 보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겨 함께 가서 진주에 이르렀다.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으로 삼고, 군사 수천 명을 얻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사인(士人)들이 모여들어 뵈었는데, 선생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의리에 대해 말하였더니, 모두들 흐느껴 울면서 나랏일에 진력할 것을 생각하였다. 선생은 또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는 곳이라서 왜적들이 반드시 칠 것이라고 여겨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집하게 해 수천 명을 얻었다. 그리고는 성과 못을 수축하고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성첩을 헤아려서 군대를 나누어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선생은 여러 차례 적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면서 일찍이 변복(變服)한 일이 없었으며, 휘하 사람들도 다 붉은 옷에 우립(羽笠) 차림을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갔다. 이전에는 감사나 병사, 수령들이 모두 떨어진 옷을 입고 백성들 사이에 섞여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오늘날에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였다.
○ 선생이 처음 진주에 이르렀을 때 목사 이경(李璥)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숨어 있었으며, 성은 텅 비어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선생은 조종도, 이노와 함께 눈을 들어 산하(山河)를 바라보다가 분통함을 참지 못하였다. 조종도가 손을 잡고 함께 강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한번 죽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죽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서로 눈물을 닦았다.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 矗石樓中三壯士
한 잔 술에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 一杯笑指長江水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 長江之水流滔滔
물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안 죽으리 / 波不竭兮魂不死
하였다. 시집에 나와 있다. 【보(補)】 이때 이순신(李舜臣)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막고 있었으며, 김성일은 진주를 지켰으므로, 왜적들은 금산(金山)을 지나 전라도로 들어가려 하다가 여러 번 막히어 오던 길을 따라 물러갔다. 이에 호서(湖西)도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고, 국가도 이 두 도에 힘입어 군량(軍糧)을 댈 수가 있었으니, 당시의 장사들이 막고 지킨 공이 많다고 하겠다. 이 말은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나와 있다.
이 시는 일휴당 최경회 선생으로 시작으로 영조때 일휴당의 시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이 위작임 . 대산 이상정 정재 유치명이 편찬한 중간본에 실린 바 초간 본(학봉 두째 사위 김영조 편)에는 없고 그 후 는 청강지수로 된 부분을 진주성 2차싸움과 관련 진주 남강의 홍수인 실정과 달라 장강지수로 바꾼 것으로 추정하나 그렇다면 계사년 조에 있어야 하는데 계사년 6월에는 학봉이 이미 서거하여 부합하지 않고 또 자기 종사관(전속 부관)을 壯士로 칭하는 것 또한 궁색하다. 연보는 제자 밀암 이재선생이 작성한 것을 중간본에 부록화 한 것이다.. 문제는 학봉선생의 제자 연원이 덧 치장하여 학봉선생의 문충 시호에 누가 되게 한 것이다.
( 道德博聞 果太濫。以勤學好問。改其諡註 이이명 김수항 주장)
○ 막하(幕下) 사람들을 나누어 보내 여러 고을의 군사들을 사열하였다. - 조종도는 단성(丹城), 산음(山陰), 함양(咸陽)으로 가고, 이노는 삼가(三嘉), 의령(宜寧), 합천(陜川)으로 갔다.
○ 6월에 진주에서 삼가를 지나 곧바로 거창(居昌)으로 갔다. - 선생이 장차 의령, 초계, 합천을 순시하고 거창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도중에 ‘개령(開寧), 금산(金山), 지례(知禮) 세 고을의 왜적이 힘을 합하여 장차 우현(牛峴)을 넘으려고 하는데, 김면(金沔)의 군사가 고개 위에 머물러 있으나, 형세상 제압할 수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드디어 삼가에서 그 곳으로 달려갔는데, 마침 이웃 고을에 있던 군사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선생은 뒤에서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모두 죽기로써 싸워 왜적을 물리쳤다. 이번 길에 김면을 진중(陣中)에서 처음으로 만나 보고 이틀 밤을 자면서 위로하였다. ○ 이때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형의 아들 용(涌), 철(澈), 약(瀹)과 조카 유복기(柳復起), 유인영(柳仁榮)에게 부쳤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국사(國事)가 이에 이르렀으니 통곡이나 할 뿐,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나는 4월 중에 명을 받들고 이곳으로 왔는데, 왜적들이 사방에 꽉 차 있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을 이미 결단하였으니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그 곳에서는 의병(義兵)을 안집사(安集使)가 불러모으지 않았는가. 열읍에서 도망하여 숨어만 있는 것은 적에게 항복하거나 빌붙는 것과 같으니, 그러다가는 온 나라가 마침내 오랑캐가 되고 말 것이다.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되도록 너희들도 의당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나중에 김용은 전 검열(檢閱)로서 길이 막혀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성을 지켰는데, 왜적을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많았다. 김철은 진사(進士)로서 향병(鄕兵)이 되어 의병장 유종개(柳宗介)의 진(陣)으로 나아갔는데, 역시 왜적을 참획한 공이 있었다.
○ 전 정랑(正郞) 박성(朴惺)이 와서 만나 보았다. - 박성은 본래 선생의 친구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고는 함께 일하기로 약속하고 막하(幕下)에 머물게 하였다.
○ 의병장 이정(李瀞)을 함안(咸安)으로 보내어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게 하였다. - 이정은 함안 사람으로,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하에 있었는데, 어질고 믿음이 있는 장자(長者)라고 일컬어졌다. 이때에 이르러 군사를 모집하면서는 한 달 동안에 수천 명이나 모집하였으며, 군량을 모은 것도 수백 섬이었다. 선생이 회답하는 체문(帖文)에 이르기를,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들의 소굴로 들어가 수천 명의 향병을 모았으니, 충의가 본디부터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함안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두 번이나 성을 버리고 도망친 죄로 인해 백의(白衣)로 종군하면서 진주(晉州)의 성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정이 고을에 수령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유숭인을 되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유숭인으로 하여금 빨리 고을로 돌아가서 이정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 거창에서 합천으로 돌아와서 머물렀다. - 정인홍을 진중에서 만나 보았다. 이노, 박성 등을 파견하여 열읍에서 곡식을 모아 여러 의병들의 군량을 도와 주게 하였다.
○ 영산(靈山), 창녕(昌寧), 현풍(玄風)의 가장(假將), 별장(別將), 소모관(召募官)을 차임하고, 격문(檄文)을 지어 사민(士民)들을 깨우쳤다. - 이때 영남은 가운데가 나눠져서 강 오른쪽[江右]은 텅 비어 있었으므로, 왜적들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나다니면서 노략질하였다. 그러자 사족(士族)들은 모두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아전과 백성들은 왜적들을 위하여 복역(服役)하였으므로, 선생은 탄식하기를, “좌도(左道)의 내지(內地)는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강 건너편의 세 고을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각각 그 고을 사람을 가장, 별장, 소모관으로 차임해 보내었으며, 인하여 격문을 지어 충의에 힘쓰라고 숨어 다니면서 효유하게 하였다. 이에 왜적에게 빌붙었던 아전과 백성들이 서로 뉘우치고 두려워하여 앞을 다투어 모집에 응하였다.
○ 여러 고을에 선악적(善惡籍)을 두게 하였다. - 왜적을 치는 자는 선적(善籍)에 적고 왜적에게 빌붙은 자는 악적(惡籍)에 적었다. 이에 왜적에게 빌붙었던 백성들이 앞다투어 왜적들의 수급을 가지고 와서 앞서 지은 죄를 씻어 주기를 청하였다.
○ 7월에 왜적이 진주를 친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제군(諸軍)을 독려하면서 힘껏 싸웠는데, 왜적들이 밤중에 몰래 도망쳤다. 이에 드디어 사천(泗川), 진해(鎭海), 고성(固城) 등의 고을을 회복하였다. - 선생은 오래도록 거창에 머물러 있었는데, 창원(昌原)에 있던 왜적이 진주에 방비가 없음을 알고는 진해에 있는 왜적과 서로 호응하면서 크게 쳐들어와 노략하였다. 이에 선생은 급히 단성(丹城)으로 가서 함양 등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두 동원해 진주로 달려간 다음, 김시민(金時敏)을 신칙하여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 곽재우가 먼저 성에 들어가 있어서 군대의 위세가 자못 왕성하였으므로, 왜적들이 남강(南江)까지 와서는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잇따라 선생이 이르러 여러 장수들이 더욱 명령을 잘 따랐으므로, 왜적들이 밤에 도망쳐서 마침내 함락되었던 세 고을을 회복한 것이다.
○ 곽재우를 보내어 현풍, 창녕, 영산에 있는 왜적을 치게 하였다. - 이때 세 고을의 왜적이 다 물러갔고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두 대장 및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이 강가에 있는 여러 왜적을 쳐서 내쫓았으므로, 무계진(茂溪津) 아래에서부터 정진(鼎津)에 이르기까지는 왜적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에 낙동강의 좌우가 비로소 통하였다.
○ 곽재우에게 또 글을 보냈다. - 처음에 감사 김수(金睟)가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의병장에게 예속되어 있던 군병들을 많이 빼앗아갔으므로, 의병이 무너지고 뭇사람들이 몹시 화를 내었다. 이에 곽재우가 격문을 전하고 김수를 목베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글을 보내어 의리로써 깨우쳤다. 그러자 곽재우가 크게 느끼고 깨달아 곧바로 달려가 포위된 진주를 구원하였다.
○ 관찰사 김수에게 글을 보냈다. - 김수는 곽재우가 격문을 보낸 일로 해서 군사를 벌여 놓고 스스로를 지키면서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조정에 아뢰어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 글을 보내어 힘껏 화해시켜 감정을 풀고 함께 일하게 한 것이다.
○ 치계(馳啓)하여 곽재우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 선생은 또 조정에서 김수 한쪽의 말만 듣고 곽재우의 마음은 살피지 않은 채 패역(悖逆)으로 몰아 죽일 경우, 형벌을 잘못 시행해서 한 도의 민심을 잃게 될까 염려하여, 곧바로 사유를 갖추어 치계해서 마침내 아무 일도 없게 하였다. 그러니 곽재우로 하여금 기공(奇功)을 세워 당세(當世)에 드러나서 충의 있는 사람이 되게 한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다.
○ 전 봉사(奉事) 권응수(權應銖)를 차임하여 좌도 의병 대장(左道義兵大將)으로 삼고, 이어 각 고을의 의병장을 차임하였다. 드디어 영천(永川)을 회복하였다. - 영천의 정세아(鄭世雅), 조희익(曺希益), 곽회근(郭懷瑾) 등 60여 명이 사람을 시켜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이용해서 걸어 와 글을 올리면서 선생의 절제(節制)를 받기를 원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산속에 숨어 있으면서 의병을 방해하고 억누르는 실상을 진술하였다. 이에 선생은 따뜻한 말로 위로해 깨우친 다음,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를 의병 대장으로 삼고 근방에 있는 몇몇 고을에도 모두 의병장을 정하여 권응수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그러자 권응수는 선생이 추천해 준 데 대해 감격하여 더욱 분발해서 여러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성에 웅거하고 있던 왜적을 쳐서 남김없이 섬멸하였다.
○ 전 검열(檢閱) 정경세(鄭經世), 전 찰방(察訪) 권경호(權景虎), 사인(士人) 신담(申譚)을 차임하여 상주(尙州), 함창(咸昌), 문경(聞慶)의 소모관으로 삼았다. - 선생이 상주(尙州) 일로(一路)의 소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마침 ‘이봉(李逢)이 군사를 모아 왜적을 친다.’는 말이 들려오므로, 즉시 이봉을 진급시켜 의병장으로 삼고, 세 고을의 소모관을 차임한 것이다.
○ 8월 11일에 좌도 관찰사에 제수하는 명이 이르렀다. - 행조(行朝)에서 경상좌도는 왜적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어서 관찰사의 직임을 맡길 만한 적임자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대신의 천거를 받아 본직을 제수한 것이다. 6월 1일에 제수하는 명이 내렸는데, 이날에야 비로소 이르렀다. 교서에 대략 이르기를, “경의 강직하고 방정함은 사대부 중에 소문이 났으며, 충신(忠信)스럽고 독실함은 오랑캐를 감동시켰다. 경은 이미 본도 사람이며 또 특별한 공적을 세웠으니, 지금 더러운 왜놈들을 섬멸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경을 버려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아, 평소에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과감하게 간하는 선비가 없고, 난리에 임하여서는 절개를 다하고 의리에 죽는 신하가 없다. 나는 경이 착한 말을 올린 것이 이미 충성스럽고 붉은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는바, 경이 오늘날에 공을 세울 것을 바라는 마음 또한 보통보다 만배는 되노라.” 하였다. 선생은 제수하는 명을 받은 뒤에 ‘평양(平壤)을 지키지 못하여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가고 세자는 안협(安峽)에 돌아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었는데, 말과 심정이 의분에 복받쳤으므로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 우도(右道)의 기의(機宜)에 대해서 조목별로 아뢰고, 그 다음 날 좌도 감영을 향해 갔다. - 선생은 이미 좌도 감사의 명을 받았으니 우도의 일을 관계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처음부터 의병을 관리하였으므로, 드디어 그 편부(便否)에 대해 조목별로 하나하나 진달하였다. 그런 다음 초계(草溪)를 경유해서 낙동강 왼쪽으로 향해 가자, 우도의 인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허둥대어 마치 물고기가 물을 잃은 것만 같았으며, 여러 의병들이 모두 맥이 풀려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노와 곽재우는 군사를 파하고 따라갈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은 의리상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뜻으로 깨우치고 위로하여 보냈다. 이때 선비들이 물결처럼 몰려와서 날마다 뜰 아래에 서 있으면서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며, 수레를 붙들고 글을 올리는 자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이미 임금의 명이 있어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 9월 4일에 강을 건너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 밀양(密陽), 청도(淸道), 경산(慶山), 하양(河陽)을 거쳐 신녕(新寧)에 이르렀을 때 다시 우도 관찰사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 박성(朴惺)을 가도사(假都事)로 삼아 함께 낙동강을 건넜는데, 좌도의 백성들이 선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서 날뛰었으며, 산골짜기로 도망쳐서 숨어 있던 수령이나 장사(將士)들은 풍문만 듣고도 넋을 잃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런데 우도의 여러 고을 유생들이 이미 억지로 머무르게 할 수 없음을 알고는, 연명으로 상소를 작성한 다음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상께 유임시켜 주기를 하소연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가자 즉시 도로 우도 감사에 제수하는 명이 내려졌다.
○ 안동(安東)에 이르러 사당에 참배하고 묘소를 둘러보았으며, 하루를 묵고나서 곧바로 돌아갔다.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이 찾아왔다. - 선생은 새로 내린 명을 듣고 말하기를, “도로 강을 건너가자면 반드시 본도의 군병들이 마중 나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잠깐 가서 성묘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달려와 청송(靑松)에 이르러 외가의 선영에 성묘하였다. 이때 부사(府使)가 먼저 제전(祭奠)에 대한 일을 묻자, 선생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왜적을 칠 일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상사(上司)를 위하여 사사로이 지내는 제사에 대해 말한단 말인가.” 하였다. 안동에 이르러서 사당과 묘소에 참배하는 일을 마치고 곧바로 떠났는데, 온 가족이 작별에 임하여 붙들고 큰소리로 우는데도 선생은 못 본 체하였다. 그리고는 아들들을 돌아보면서 가족을 잘 보전하고 나라와 사생을 같이하는 의리에 힘쓰라고 하였으며, 둘째 아들 역(湙)에게 자신을 따라오게 하였다. 이에 두 아들은 울면서 작별하였으며,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누군가 선생에게 마음에 걸리지 않느냐고 묻자, 선생은 이르기를, “어찌 마음에 걸리지 않겠는가마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알 뿐이다.” 하였다.
○ 14일에 대구(大丘)의 동화사(桐華寺)에 가 머물렀는데, 좌도 병사(左道兵使) 박진(朴晉)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 하루는 밤에 군중(軍中) 사람들이 공연히 놀라서 왜적이 문 앞에 당도했다고 소리치자, 편비(褊裨)와 하리(下吏)들이 모두 흩어져 숲 속으로 숨었으나, 선생만 홀로 동요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안정되었다. 좌도의 의병들이 박진에게 저지당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선생은 박진을 만나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힘껏 말하고, 또 치계(馳啓)하여 좌도 사람들의 충의가 가상함과 박진이 의병의 활동을 막고 있는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아뢰었다. 이에 전사한 정의번(鄭宜藩), 유종개(柳宗介) 등이 모두 표창받는 은전(恩典)을 입었고, 권응수(權應銖)는 병사로 승진하였으며, 의병들도 박진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 16일에 도로 강을 건넜다. - 정병(精兵) 100여 명을 거느리고 빠른 속도로 100여 리를 가서 밤을 틈타 강을 건넜는데, 이날 새벽에 대구(大丘)와 성주(星州)의 왜적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 하빈(河濱)에 모였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일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귀신이 도와 준 것이라고 하였다.
○ 19일에 전 관찰사 김수(金睟)를 거창에서 만나 보고 산음으로 옮겨가 머물렀다. - 이보다 앞서 우도의 의사(義士)들이 모두 흩어져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선생이 관찰사의 직인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조종도(趙宗道)는 함양(咸陽)에서 오고, 이노(李魯)와 오장(吳長)은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왔으며, 사민(士民)들은 서로 치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공이 왔으니 우리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회복도 기약할 수 있겠다.” 하였다.
○ 김시민(金時敏)을 독려하여 다시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 처음에 김수가 진주는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김시민으로 하여금 우현(牛峴)에 있는 김면(金沔)의 진으로 가 돕게 하였는데, 선생이 이르러서 데려오게 해 도로 진주를 지키게 한 것이다.
○ 10월 10일에 조정의 지휘로 인하여 편의에 따라 사람을 뽑아 차임한 다음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 당시 수령 중에 결원이 많았는데, 조정 명령에 따라 정기룡(鄭起龍)을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김준민(金俊民)을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강덕룡(姜德龍)을 함창 현감(咸昌縣監)으로, 박사제(朴思齊)를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박정완(朴廷琬)을 거창 현감(居昌縣監)으로, 변혼(卞渾)을 문경 현감(聞慶縣監)으로, 여대로(呂大老)를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이정(李瀞)을 사근 찰방(沙斤察訪)으로, 정인홍(鄭仁弘)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삼았다. 차임해 보내기를 마친 다음에 하나하나 계문(啓聞)하여 아뢰었는데, 사람을 뽑아 배치한 것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맞았으므로 인심이 흡족해하였다. 여러 진(陣)에서 왜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 반드시 친히 검사하여 거짓을 막았다. 이로부터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간사한 짓을 하지 못하였다.
○ 왜적이 또 진주를 친다는 말을 듣고 의령(宜寧)으로 달려가 싸움을 독려하여 크게 이겼다. 공을 세운 데 대한 장계를 올려 목사 김시민이 드디어 우도 병사(右道兵使)로 승진하였다. - 선생은 산음(山陰)에 있다가 창원(昌原)의 왜적이 부산(釜山), 김해(金海)의 왜적과 합세하여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아 진주에서의 패배를 보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김시민은 목사로 승진하였는데, 선생은 죽기로 힘써 싸워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고 면려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말을 달려 의령으로 가 여러 장수들에게 합심해서 왜적을 제압하라고 독려하기도 하고, 혹 정진(鼎津)에서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보여 왜적이 돌아갈 길을 막기도 하였다. 이때 왜적은 이미 진주성을 열 겹으로 에워쌌으며, 대오가 수십 리에 걸쳐서 뻗쳐 있었다. 이에 선생은 결사대를 모집하여 활과 화살을 많이 준 다음 밤을 틈타 남강(南江)의 허술한 곳을 통해서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해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였으며, 첩자를 많이 보내 왜적의 정세를 정탐하게 하였다. 또 호남에 통문을 보내어 호남의 의병도 와서 살천(薩川)에 진을 쳐 형세를 돕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마다 모두 감격하면서 용기를 내어 죽기를 다짐하였으며, 김시민은 일체 명령대로 따라 계책을 내고 복병을 숨겨서 응전하였다.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의 막사를 불태우고 쌓여 있는 시체를 태워버린 다음 도망하였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보고서가 밤중에 이르자 선생은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성을 지킨 절차에 대해 자세히 물은 다음 막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성을 지키지 못하였다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 도의 나머지 성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호남도 당장에 왜적들의 침입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인심을 안정시켰다. 군교(軍校)들이 들어와 치하하면서 승전한 공을 대부분 선생에게 돌리자, 선생은 이르기를, “이것은 목사와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머리가 허연 썩은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하고서, 왜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우라고 면려한 다음 즉시 공을 세운 데 대해 표창하라는 계문을 올림으로 인해 김시민이 병사로 승진되었다.
○ 곽재우가 영을 어긴 죄를 추문(推問)하여 다스렸다. - 처음에 정진에서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드러내 보일 때 곽재우에게 의령과 함안의 경내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기병(奇兵)을 내어 패주하는 왜적을 치게 하였는데, 곽재우가 지휘에 따르지 않아 왜적들이 편하게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곽재우를 뜰에 잡아다 놓고 군율로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박성(朴惺)과 오운(吳澐)이 힘껏 말리므로 그만두었다. 곽재우의 벗이 곽재우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어찌해서 전과 같이 뻣뻣하게 굴지 않았는가?” 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아니면 어찌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하겠으며, 나 또한 어찌 제재를 받으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을 보내어 진주의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고 삼가(三嘉)로 향해 달려갔다. - 선생이 진주의 장사들을 직접 위로하려 하였는데, 마침 개령(開寧)의 왜적들이 지례(知禮)를 범하고, 성주(星州)의 왜적들이 고령(高靈)을 범한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보고 내용이 몹시 급박하였다. 이에 드디어 도사를 진주로 보내고 빠른 속도로 삼가로 달려가 휘하 장사들을 나눠 보내어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두 대장을 돕게 하였으며, 남은 군사로 성원하였더니, 왜적이 모두 패하고 돌아갔다.
○ 여러 진에 영을 내려 싸움터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묻게 하였다. - 이정이 함안과 진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싸우다가 죽은 사람의 뼈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으니 여러 진에 영을 내려 시신을 거두어 파묻게 하십시오.” 하였다. 그때는 한밤중이었는데도 선생은 곧 글을 써서 보낸 다음 이르기를, “좋은 말은 하룻밤도 묵혀 둬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정인홍의 군교(軍校)를 추문하여 다스렸다. - 당시 전진(戰陣)에서는 으레 거짓이 많아 조그마한 승첩이 있어도 번번이 크게 떠벌려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가 없어 사람들이 분통해하고 사기(士氣)가 해이해지는 것이 온 도의 공통된 근심거리였다. 이에 선생은 철저하게 조사해서 엄하게 꾸짖었는데, 일찍이 정인홍에게 통첩을 보내 이르기를, “공을 과장하여 상을 바라는 것은 무변(武弁)이나 하는 일로, 대장의 휘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엄하게 다스려서 이런 거짓이 없도록 하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뢰지 않고 경솔히 움직여서 성주(星州)에서 패하였으니, 우두머리 아장(牙將)을 추문하여 군율로 논해 곤장을 치라.” 하였다. ○ 김면과 정인홍이 중망(重望)을 받고 있으면서 제재를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으며, 곽재우도 고집이 세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제재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공문을 보내어 영을 전할 즈음에 매우 엄하게 대하였다. 누군가가 이것을 가지고 말하자, 선생은 이르기를, “행조(行朝)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명령이 통하지 않으니, 어찌 여러 장수들이 영을 어기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충성을 다하는 자를 기리고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막는 방편이다.” 하였다. 당시에 두 사람이 명성과 지위가 모두 높아서 그들의 휘하와 문생들이 서로 시기하여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은 이르기를, “마땅히 마음을 합쳐 함께 일해 나가야지, 부박한 말에 현혹되어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요망한 말을 만들어 내어 이간질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법으로 다스려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였더니, 그로부터 부박한 말이 줄어들고 헐뜯는 일도 조금 그쳤다.
○ 11월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제수되었다. - 상께서 선생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가자(加資)하여 다른 사람들을 면려시키라.” 하였다.
○ 12월에 힘껏 싸워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 - 그 계문에 이르기를, “장사(將士)들은 한 해가 다 가도록 무기를 들고 싸운 탓에 칼집에는 이와 서캐가 득실대고 있습니다. 비록 전쟁터에 나아가 왜적을 쳐죽인 공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노고는 역시 큽니다. 그런데 하물며 적의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운 군사들이겠습니까. 당초에 왜적을 포획한 자에게 상을 준다는 영이 내려졌을 때 사졸들이 모두 감격하여 흥기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조정에서 논공(論功)하고 행상(行賞)하는 것을 반드시 변경의 신하가 공을 아뢴 뒤에야 하고 있으므로, 혹 일일이 공에 맞추어서 상을 주지 못하고 있는바, 이는 참으로 이치와 형세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에 장사들이 자못 실망하면서 수근거리고들 있습니다. 이처럼 큰 난리를 당하여서 군사들이 기꺼이 싸움터로 달려나가지 않을 경우, 아무리 뛰어난 장수가 있더라도 역시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수급 하나 이상을 참획한 자 및 여러 차례 힘껏 싸운 전사는 각자 그의 이름 아래에 공을 기록하여 계문하면, 조정에서 이를 참작하여 상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뒤늦게 상을 받는 폐단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도내의 사세는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밖으로는 흉악한 왜적들의 기세가 날로 치성해지고 있으며, 안으로는 군량이 다 떨어져서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백성들의 힘이 이미 고갈되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이 날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인심을 수습하지 아니한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죽더라도 계책을 세울 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관문(關文)을 여러 고을에 보내어 진제장(賑濟場)을 열고 구휼하게 하였다. - 난리로 불탄 뒤끝에 기근마저 닥쳤으므로 도내의 유민(流民)들이 도처에서 큰소리로 울부짖으면서 길을 막고 뜰을 가득 메웠다. 이에 선생은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소금과 쌀을 가지고 가서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이어 여러 고을로 하여금 진제장을 설치해 곡식을 나누어 주어 구휼하게 하였는데, 마음을 다해서 구휼하도록 신칙해서 형식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간혹 불시에 죽을 맛보기도 하고, 병이 심하게 든 자는 약을 지어서 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비록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관문을 직접 지어 간혹 밤중이 지나 잠들기도 하였으므로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이 생겨 장차 큰 병을 얻게 되었다. 이에 친한 벗이 혹 자질구레한 일까지 번거로이 하지 말라고 하자, 선생은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조정 관리들이 제대로 못해 인심이 흐트러진 탓에 섬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는 화를 불러들이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의 죄를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번거로이 수고하는 것을 꺼리겠는가. 그리고 큰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였다. 중국 군사가 많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왜적을 소탕할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면서도 미리 내년에 쓸 곡식 종자를 걱정하여 전후로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중간에서 지체되거나 혹은 밖에서 막혔다. 선생은 밤낮없이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으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어 버렸다.
만력 21년(1593, 선조 26) 계사. 선생 56세
○ 정월 초하루에 본 고을에서 올리는 세찬(歲饌)을 올리지 말게 하였다. - 그 고을 수령이 휘하 및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뵙자 선생은 추연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해는 바뀌었으나 왜적들은 아직도 나라 안에 가득하고 평안도는 멀기만 하여 소식을 전할 수 없으니, 아직 죽지 않은 외로운 신하가 무슨 얼굴로 하늘의 해를 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수령에게 세찬을 올리지 말라고 경계시켰다.
○ 2월에 거창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병사 김면(金沔)과 만났다. - 이때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새로 병사가 되었으므로 선생이 그와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손을 잡고 회포를 풀었는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며, 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그를 모시고 있는 아전을 불러들여 수죄(數罪)하기를, “의병장으로 있을 때는 혹 지휘에 순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병사의 사체에 있어서는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이노(李魯)를 보내어 서로(西路)에 가서 중국 군사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어 체부(體府)에 첩문(牒文)을 보냈다. - 처음에 여러 차례 편비(褊裨)를 보내어 중국 군사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모두 길가는 사람의 말만 듣고 중간에서 돌아왔다. 이에 특별히 이노를 보내어 서로에 가서 기다리게 하면서 이르기를,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은 다 떨어졌는데, 중국 군사가 또 나왔으며, 농사철에 씨뿌릴 종자도 급하다. 온 나라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그리고는 편지와 첩문을 써서 체부로 보냈는데, 이노가 ‘지금까지는 중국 군사가 오지 않고 있다.’고 치보(馳報)하였으므로, 곧바로 여러 고을로 하여금 우선은 중국 군사를 지대(支待)하는 일을 늦추게 하여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였다.
○ 3월 4일에 또 군교(軍校)를 보내서 전공(戰功)을 갚고 곡식을 옮겨오는 데 대한 사의(事宜)를 계청하였다. - 논상(論賞)하는 것이 미더웁지 못하다는 것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유망(流亡)하는 상황에 대해 극력 진달하면서 속히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과 허통첩(許通帖), 면천첩(免賤帖) 등을 내려보내어 상전(賞典)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호남에 있는 곡식 수만 섬을 일찌감치 옮겨와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하고 군사들을 먹이고 제때에 파종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을 보전해 나라를 회복하는 기반을 마련하기를 청하였다.
○ 유지(有旨)를 내려 특별히 호남에 있는 곡식 2만 섬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 이노가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체부(體府)의 정승으로서 임진(臨津)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 편을 통해 선생의 글을 보냈는데, 유 문충공이 선생이 보낸 글과 첩문을 보고는 즉시 계사(啓辭)를 작성해서 계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가엾게 여겨 특별히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해 2만 섬을 제급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종사관(從事官)을 나누어 보내 수로와 육로로 아울러 운반해 온 다음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어 제때에 씨를 뿌리게 하였다.
○ 12월 경신일에 안동부 북쪽에 있는 가수천(嘉樹川)의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하였다. -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주-D001] 경상좌도 순찰사(慶尙左道巡察使) : 이 부분의 두주에, “경상좌도 순찰사는 마땅히 경상우도 순찰사로 되어야 한다.” 하였다.
年二十一年癸巳 先生五十六歲 元朝。除本官所進歲饌。主倅與麾下及諸人入謁。先生愀然泣下曰。歲換。寇猶滿國。西關杳杳。消息不傳。未死孤臣。何顔見天日。仍戒主倅除歲饌。 二月。進次居昌。會兵使金沔。時沔新代。時敏爲兵使。先生對酌數椀。握手吐懷。或至泣下。及曙而罷。進其陪吏而數之曰。爲義將則或不順指揮。在兵使事體。不可以自專。 遣李魯往候天兵于西路。仍牒體府。初屢遣褊裨。探候天兵。皆傳聞行言。半道而回。於是。特遣李魯。往候西路曰。師老糧盡。天兵又至。農時穀種又急。一國存亡。繫于此行。具書及牒。送體府。魯以時無天兵馳報。則卽令列邑姑緩支待。民以不擾。 三月四日。又遣軍校。 啓請酬功移粟事宜。極陳論賞失信及凶饉民流之狀。請亟下空名告身。許通免賤等帖。以行賞典。仍乞早移湖南穀數萬斛。以賑飢禦賊。及時播種。庶完湖南保障。以爲恢復之基。 有 旨特題給湖南穀二萬石。李魯到稷山。聞西厓柳文忠公。以體相駐節臨津。路梗不得達。因便順付。文忠公見先生書牒。卽具辭 啓請。 上爲之惻然。特命湖南伯題給二萬石。先生分遣從事。水陸竝運。散糶列邑。使之及時耕種。 十二日。馳 啓右兵使金沔死事事。沔陞兵使未久。遘癘不起。先生驚慟曰。長城壞矣。國事去矣。卽馳 啓極陳其倡義起兵。誓不與此賊俱生之意。沔自爲義將時。雖聽先生節度。而號令之間。或多頡頏。先生嘗病其褊滯。頗有不慊言色。人或疑其兩不相好。至是悼死褒 啓如此。人又服其處心公平也。 四月。還次晉州。所至餓殍載路。蓬頭鬼面。且泣且祝。先生令牧使徐禮元專主賑濟。判官成守慶專掌軍器。而作粥煮藥。必親看護。巡城閱兵。必親檢勅。時癘疫處處鴟張。飢民咸聚城中。啼呼呻痛。慘不忍聞。先生惻然垂淚。臨食輟匙。左右曰。廢食成疾。柰國事何。先生曰。自不能下咽。或請臥閤治事。以避癘氣。先生謝曰。代人行事。例不稱意。非不自惜。不得已也。且死生命也。烏可避哉。 十九日。寢疾。先生自受 命以來。夙夜憂勞。至是內傷外感。癘氣乘之。日漸危劇。有老毉來診曰。疾不可爲也。時朴惺李魯等在傍。請進藥物。則曰吾非飮藥而生者。諸君且休矣。子湙亦遘癘在傍室。問不一及。惟謂朴,李兩人曰。天兵當到。何以支待。諸君勉之。雖在昏迷不省中。喉中語如夢譫者。皆國事也。有側室流寓近境。遣女僕來問疾。揮之不納。○時吳澐,趙宗道亦來候。澐曰。天兵長驅南下。京城已收復。一路屯賊。當次第退遁。先生瞪視曰。志未就。身先死。其如命何。且賊若退歸。恢復可期。朝廷朋黨。誰能打破。 二十九日。卒于晉之公館。朴惺,李魯,趙宗道及姊子柳復立。自初常在軍中。同臥起。至是主其喪。時城內外仰活士民。扶携顚仆。拊膺頓足。嗚咽不成聲。分散四去。如不知所之曰。天奪爺孃。命之盡矣。訃出遠近莫不驚痛。如聞骨肉之喪。至於道路行旅。亦皆慘然相弔。○柳復立。先生姊節婦柳氏夫人出。而於次爲季。卽先生所撫育二孤之一也。出後伯祖小宰潤德家。居畿甸。幼有氣幹。亂初從先生南下。與幕府諸賢同事。比先生歿。猶嬰城固守。竟以身殉。 肅宗朝畿伯以狀聞。 命追贈吏曹參判。其終始效死不去。亦可謂無負先生平日勉勵之意云。○西厓柳先生素簡重。少許可。每敬重先生。嘗語人曰。士純非吾所可及也。及見先生晩年詩文歎曰。信乎有德者必有言。遂薦文衡望。以通政擬文衡。蓋絶無而僅有也。旣而先生歿。則深慟之日。平生知友。惟士純一人而已。不幸今亡矣。至臨終。猶稱道不已云。○崔大諫晛所撰言行錄曰。嶺南之不胥爲夷。雖曰義士倡率之功。而義兵之終始成就。實由先生處置之得宜。晉城之堅守不陷。雖曰時敏力戰之功。而亦由先生指授之有方。其身存而使一道人心。倚爲長城。其身歿而使大小士民。涕泣相弔。李正言魯題龍蛇事蹟後日。學有淵源。能得師也。節義動世。乘間氣也。盡悴死國。出天性也。餘事文章。從韓杜來。不朽芳名。幷山嶽存。後之論者。以爲皆實錄云。○(補)慶尙左巡察使金誠一卒。誠一誓死討賊。平生不解軍旅。而至誠諭衆。調劑官義諸軍。保全一隅。皆其統率之效也。見國朝寶鑑。 棺殮訖權厝于智異山 柩行至一村停樹下。後人名其村曰停柩。樹曰大樹。以寓沒世之思云。旣權厝訖。諸人相與失聲號痛而歸。先生歿兩月而城陷。江右稍完之地。盡被屠衄。一道保障。皆爲賊藪。論者以爲天若緩先生一死。事豈至此乎。○寒岡鄭先生所撰行狀後論曰。公資挺英特。氣稟剛方。質直而毅。才敏而豪。自少激昂。志趣不凡。長益慷慨。力行所聞。持身必以孝弟爲本。制行必以忠恕爲主。及登師門。心悅誠服。知學之有本末。而取舍已定。於書無所不讀。而最愛李先生節要朱子書。體認服膺。以爲持身標的。潛心玩味至忘寢食。鷄鳴而起。必抽誦一二牘。然後方始明燈盥櫛。終日端坐。精思明辨。不少放過。如近思錄,心經附註。皆所愛賞不釋。諸生有請業者。剖柝開曉。傾倒切至。必竭其兩端焉。家居從容雅飭。未嘗見其有異於人。至於立朝當事。糾紛錯綜之際。則發越精悍。斷以義理。無所回避。雖賁,育莫奪。而誠心悃愊。則藹如也。迨其晩歲。所造益平正。無復少年凌厲之容。而人自生敬。不敢慢也。及其奉使海外。則幾微無所見。操履若素定。凶狡變幻不測。死生在於呼吸。而守正不撓。神疑益厲。理必審於毫釐。義必爭於顚沛。必欲使本國威靈。益尊重而不敢慢。當一國存亡之機。奉招諭征討之 命。人心渙散。時事已去。雖一時負重名專方閫者。倉卒蒼黃。縮手而却步。公以經幄宿儒。軍旅之事。非所嘗聞。而道內無乾淨之地。手下無尺寸之兵。惟將血誠。鼓發士氣。片片赤心。推置人心腹。言必涕泣而道之。文必和淚而寫之。處置擧錯。動適機宜。賞罰號令。大服民志。卒能收拾創殘之餘。吹噓灰燼之中。保全江右一帶。作恢復之根基。惜其長星徑墜。大勳未集。而扶持人紀。撑拄一方。則功不可與汗馬被創而幷論也。旣歿之後。朝野翕然稱服以爲。亂後純臣。宜爲第一。而識者謂之夷險一致。臨大節而不可奪。實非阿好之言也。僻區構齋。擬爲暮境退藏之所。庶幾優游閒靜之地。專意問學之工。上承先師之遺緖。下迪後生之成就。而時事艱虞。君臣義重。黽勉不得自由。而竟値大亂。憂勞畢命。勳業則光顯矣。而志願則莫伸。豈非公之遺恨。而斯道之不幸也耶。惟此一段。足以盡先生之蘊。故節約附見焉。 五月。長子潗聞喪。間道南奔。廬墓下。屢經賊鋒。終無所犯。人謂有所扶佑而非人力也。 十一月。始奉柩還鄕。雖當喪亂之餘。而所經諸邑。士民擧皆至誠悲嗟。奔走致力焉。 十二月庚申。葬于安東府北嘉樹川午向之原。從先兆也
二十二年甲午二月六日。朝講。大臣諸宰請追 贈。領府事金應南進曰。金誠一盡心嶺南之事。當追 贈副提學。金宇顒曰。誠一爲招諭使。收合義兵。盡心捍禦。倭不得大肆。而湖南尙有孑遺。皆誠一之力也。其功甚大。 上曰。此則然矣。但渠爲秀吉所欺。謂其不足畏。黃允吉則以爲可憂。此人却有見識。金宇顒,鄭經世曰。誠一正直不撓。倭人敬憚云。 上曰。必是欺之也。李恒福曰。當時臣爲承旨。見誠一問日本事。誠一却深憂之。但云南方防禦諸事甚煩擾。民心騷動。敵未至而將先潰。故如是言之。欲以鎭伏人心耳。
二十三年乙未 (補)二月。副提學金宇顒上箚請追 贈。其箚略曰。金誠一奉使日本。抗節不屈。使異俗有敬憚之心。雖以玄蘇之狡黠。猶不敢不以尙節義爲言。其不辱 君命。可知矣。及受任嶺南。當創殘之餘。乃能收拾人心。糾率義旅。把截防守。使賊兵不得恣行蹂躪。而孑遣之民。得免魚肉。其功甚茂。慷慨焦勞。僵死軍中。南人思之。無不隕涕。當時如金沔,郭再祐之徒。倡義討賊。顯立功勳。無非誠一主張成就之力。今追贈之 命。及於沔。而獨遺誠一。 恩典欠闕。民情怫鬱。何以答一道之望。而爲他日激勵之地哉。其後關東巡察使鄭逑 陛辭引見時。亦請 賜祭以奬其忠。
三十三年乙巳 (補)九月。 朝廷錄宣武原從功一等。 贈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幷封父母爵○先生勳業。如彼其巍顯。而庚寅乙巳。俱未錄勳。莫不嗟怪。然先生之道德勳業。自可留宇宙而垂無窮。其錄勳與否。於先生。有何加損哉。○(補)乙巳當作甲辰。蓋庚寅錄光國勳而先生不與。甲辰錄宣武勳而先生又不與。至是因諸臣陳請。始追 贈。此云未錄勳。當爲甲辰無疑。
三十五年丁未。建臨川鄕社于臨河縣西。奉安位版。一鄕士子以爲。先生桑梓之鄕。不可無俎豆之擧。遂就縣西古書堂。立廟以祀之。 寒岡鄭先生。以地主操文祭墓。有忠義骨髓。道理心腸。古人此言。公實承當等語。
三十七年 光海元年 己酉八月。遣官 禮曹佐郞李天樞 賜祭。
四十六年戊午。陞臨川鄕社爲書院。從寒岡鄭先生之議云○(補)後庚申。位版移奉于廬江。更以不可無本院。議復設于鶴皐而未就。
四十七年己未夏。刻墓傍石。先生之葬。得異石於壙中。形如賁鼓。膩理可剞劂。轉置墓左。寒岡鄭先生爲文以刻之。略曰。奉使日本。則正直不撓。而 王靈遠暢。受 命招諭。則至誠感動。而控制一方。忠存社稷。名載竹帛。早登退溪李先生之門。得聞心學之要。德行勳業。皆足以輝映百代云。 立墓表。(補) 純宗癸酉。以舊碣不載加 贈及節惠。改豎新碣。參判金㙆撰碣銘。
光宗泰昌元年庚申十一月。配享于廬江退溪李先生之廟。移奉臨川書院位版。與屛山書院西厓柳先生位版。東西幷配。
仁祖大王二十七年 己丑。文集成。(補)趙龍洲絅撰序文。金鶴沙應祖撰跋文。李澤堂植識海槎錄。
孝宗大王六年 乙未。建英山書院于寧海英陽縣。奉安退溪先生。以先生配享。寧之士林。以英陽密邇陶山。靑杞爲先生往來之所。遂建院立祠。肅宗甲戌。 賜額。
顯宗大王五年 甲辰九月。立神道碑。愚伏鄭文莊公所撰也。成侯後卨以知府至。士林會者數百人。
(補) 肅宗大王元年 乙卯。士林上疏請 賜諡。疏略曰。故臣 贈參判金誠一。資稟忠義。氣節勁直。少遊先正臣文純公李滉之門。服膺義理之學。心術之正。制行之高。已造正大高明之域。李滉亟稱其賢。形諸筆札。旣又手書堯舜以來。聖賢相傳之統以畀之。所以奬與期許之者。至重且切矣。惟其蘊之爲德行。而發之爲事業。故立乎本朝。則有犯無隱。深得事君之體。奉使殊隣。則專對不辱。無負使乎之職。敷文 帝廷。感動天聽。昭雪國家累世之恥。受任危亂。董率義旅。以抗方張凶虐之鋒。卒乃鞠躬盡瘁。以身殉國。嗚呼。若此輩人。求之往古。亦罕其儔。雖竹帛所載。聖賢所稱。何以加焉。不幸多亂之際。事難摭實。後復媕娿莫有爲之言者。爵不列剖符之勳。名不登太常之狀。雖其忠貞自信。精爽凜然。必不以此爲慊。而在 聖朝褒善報功之義。則議者猶竊恨焉。誠一以德則有臨難不可奪之節。以功則有禦亂勤事之勞。宜有賢者以諡尊名之典矣。見葛庵集。
二年 丙辰二月初八日。大臣重臣請加贈 依允。請贈諡。 令該曹稟處。同知事洪宇遠 啓曰。 宣廟朝名臣金誠一。乃先正臣李滉之門人。而與柳成龍齊名者也。壬辰之亂。以嶺南方伯。歿於勞悴。似當有 贈諡之事矣。領議政許積曰。金誠一學問高明。直節過人。壬辰。興起嶺南義兵。皆其功也。正二品以上。例有贈諡之典。至於名臣。亦不拘此例。且當初 贈職。只加一階。故士論皆慊然。似當別例追贈。 上曰。正卿追贈贈諡事。令該曹稟處。○十二日。禮曹回 啓曰。金誠一學問忠節。表表炳偉。此固通朝之所知。嶺南人士。誦德不衰。將叫閽請諡云。不待其呼籲。特 賜易名之典。以示象賢之意。實合奬勵之道。而事係恩典。 上裁何如。 答曰。特爲賜諡。以表尊賢之意可矣。 三月。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賜額廬江書院。改爲虎溪書院。
五年 己未十一月。 贈諡曰文忠。道德博聞曰文。危身奉上曰忠。○(補)延 諡之日。道內營鎭州縣。咸助其費。士林會者六百餘人。
十一年 乙丑三月。配食景山景德祠。一縣人士。依四令祠故事。就靑溪公墓下。奉靑溪公影像。以先生兄弟配。後移建洞門外。改號泗濱。
十四年戊辰 月。奉安位版于羅州大谷書院。
十五年 己巳七月二十一日。筵臣請復諡註 允。特進官睦昌明 啓曰。先正臣金誠一。 賜諡文忠。而初以道德博聞之文懸註 啓下矣。其後李頤命謂之過濫。
金壽恒亦以爲金誠一是一節之士。道德博聞果太濫。以勤學好問。改其諡註。蓋誠一非特節義之士。其學問道德。實非諸儒所及。而壽恒,頤命輩乃敢輕改諡註事。當還用舊註矣。祭酒臣李玄逸 啓曰。誠一卽先正臣李滉之高弟。早歲聞道。平生立心行己。皆從道義中出。李滉嘗書堯舜以來道統眞訣以畀之。可謂得師門衣鉢之傳矣。壽恒輩安得知其道德之淺深。而敢爲輕改。士論莫不憤惋。今若仍用初註。實爲士林之幸矣。 上曰。公議皆以改註爲非。以初註道德博間。仍存可也。 十月。奉安位版于義城氷溪書院。
二十五年 己卯十一月。建永溪書院于河東。奉安一蠹鄭先生。以先生配享。
二十八年 壬午九月。建松鶴書院于靑松安德縣。奉安退溪李先生。以先生配享。
(補)
英宗大王二年 丙午七月。年譜成。李密庵栽撰 譜
첫댓글 졸고 남강몽유록과 연계하여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현종 14년 1673년에 나주 대곡서원에 배향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장은 한강 정구선생 신도비명은 우복 정경세 선생이 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