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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두월동 거리 | 중성리에서 쿄마찌
조선 중기, 대동법이 시행되자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漕倉)이 설치됐다. 경남에는 영조 36년(1760)에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駕山倉)이, 1765년에는 밀양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됐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마산포구에 석두창이란 조창이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없어지고 이 때 다시 신설됐다.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파출소 주변 1700여 평의 부지에 총 8동, 53칸(間) 규모에 ㄷ자 형태로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창이 설치되자 먼저 관원과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이들을 상대로 생업을 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동리를 이루었다. 동성, 중성, 오상, 서성, 성산, 성호 등 6개 이(里)가 그것인데 그때의 지명 대부분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현재 사용하는 창동(倉洞)이란 지명도 조창에서 따온 것이다.
조운(漕運)제도는 그 때까지 미미했던 전국적 유통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조창을 둔 지역은 교통요충지나 화물집산지로 부각됐으며 정기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마산포도 도시적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19세기말 경에는 중서부 경남의 대표적 곡물집산지로, 화폐경제와 함께 발달한 굴지의 시장으로, 동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원격지 상업의 중심지 역할까지 하는 유수한 항구로 성장했다.
20세기 초, 마산포에는 약 2000여 호의 가옥이 조밀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상점들도 많았으며 해변에 면한 가로에는 선박화물이 가득했다. 조창 일대, 즉 남성동 지역이 상업중심지였으며 현재의 동성동 일대는 배후 주거지였다.
당시에 사용하던 길은 손수레나 지게 정도가 겨우 다녔을 정도로 좁고 꾸불꾸불했는데 이 골목은 지금도 동성동 일대(코아 양과점에서 아귀찜 골목까지)에 존속하고 있다.
해변에는 오산선창, 어선창, 백일세선창, 서성선창 등 4개의 선창과 동·서 두 굴강이 있었다. 그러나 항만시설은 천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고 인위적 시설이라고는 석축돌제로 된 원시적 접안시설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외부로 연결되는 도로는 창원·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길과 칠원·창녕·현풍을 지나 서울로 가는 길, 그리고 삼진지역(당시는 진해라고 불렀다.)을 거쳐 진주로 가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이처럼 마산포에는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지만 약간 벗어난 곳들, 즉 자산동에서 서남으로 이어진 현재의 신마산 방면과 북동쪽 일대는 민가가 산재한 경작지였다.
1899년 5월 1일, 마산은 개항이라는 대전환을 겪는다.
마산포 남쪽2km 거리에 있는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에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후에 신마산이라 부르게 되는 계획도시가 들어섰던 것이다. 같은 해 11월 1일, 부산해관 마산출장소로 사용되던 남성동 조창건물에서 시행된 1차 경매를 시작으로 총 네 차례의 경매를 통해 조계지는 외국인들의 소유가 됐다.
1차 경매에서는 무려 토지정가의 100배까지 응찰할 정도로 외국인의 마산 선점욕은 극에 달했다. 1·2차 경매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하여 공동조계 성격이 있었지만 뒤에는 일본이 독차지해 버렸다.
1900년, 조계지에는 도로 폭이 8m 이상이어야 된다는 조계장정에 따라 마산최초로 신마산 지역에 남북을 가로지르는 폭 14m의 신작로가 뚫렸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동서방향의 몇 갈래 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마산의 일본인은 15여 호 30여명에 지나지 않았고 조계지의 비싼 지가와 그들의 생업 때문에 대부분 마산포에서 살았다.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80여 호 26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들 중 조계지에서 상점을 차린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러일전쟁으로 모여든 군인들과 그들을 대상으로 생업을 가지게 된 일인들이 생기면서이다. 1904년 이후 일인 소학교(현 월포초등학교)와 병원이 생겼고 이사청과 일본제일은행출장소 등 공공시설들이 줄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인 어업이민촌 지바무라(千葉村)가 가포에 들어선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일본인의 마산진출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 그리고 마산과 삼랑진 사이에 건설됐던 철도 마산선의 개통으로 본격화됐으며 이 변화의 물결은 마산포에도 밀어 닥쳤다.
원래 마산선은 한국 민간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가 착공한 마산과 삼랑진간의 철도였다. 이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을 빌미로 사업권을 강제 접수하고 일본에서 기술자를 동원, 1905년 5월 개통하고 11월부터는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산선 철도는 경부선과 경인선에 이어 설치된 것으로서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킨 것은 물론, 해로와 육로를 통해 마산을 일본과 한반도 내륙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했다. 이때 들어온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일본의 유곽도 들어왔다.
이때까지도 마산포와 조계지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중앙부는 대부분 논밭으로 인가가 거의 없었고 진주가도라 불렸던 꾸부렁한 외길만이 두 지역을 연결하고 있었는데 바로 크리스탈 호텔 앞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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