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朴愈) (16世)
1339 ∼ 1400
처음 諱는 유(悠) 호는 유은(柳隱) (대흥파)
충선공(忠宣公) 통의대부 봉상사정(通議大夫 奉常寺正). 호 매곡(梅谷). 길우(吉佑)의 장남으로 송경부(지금 개성)에 살았다.
고려 공민왕조때 종형인 사은공과 동방대과에 급제하여 초선(初選)으로 한림학사에 오르고 남평감무(南平監務)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종형인 사은공과 아들 근(根)과 함께 부조현(不朝峴)어 올라 두문동(杜門洞) 제현들과 더불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결의를 하였다. 이어 갓을 벗어 나무에 걸고 충청도 대흥군(현 충남 예산군 대흥면)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낙향에 앞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죽기를 맹세하고 각자(各自)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데 矢死自靖我將安適(시사자정아장안적)
세상과 함께 날로 거듭하니 이름이 천추에 빛나리 幷世貫日令名千秋(병세관일령명천추)
《조야집(朝野集)》에 이르기를 "마치 도연명(陶淵明)과 같이 자연을 벗하여 유유사적 하였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두문불출하여 이름을 감추고 다섯 포기 버들을 심고 자호를 유은(柳隱)이라 하니 오늘날까지 오류동(五柳洞)이 란 마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죽음이 임하여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장례는 간략히 하고 묘 앞에도 작은 비석에 이름만 표각하라, 그리고 시제는 동지에 지내며 앞으로 수 대에 걸쳐 출사하지 말라"
아들 근(根)은 고려조에 정랑(正郞)이고 손자 자번(自蕃)은 조선조에서 세마(洗馬)를 제수하며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선훈(善訓)을 끝까지 지켰다.
태학생(성균관유생) 제현들과 눈물로서 이별하고, 사은공은 관향 사량동에 은둔하고 공은 낙후된 미개척지인 호서의 대흥 오류동에 은거하여 뗏집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일과로 경서를 읽으며 여생(餘生)을 보내다 충분(忠憤)으로 병이되어 세상을 떠나니 이때 사람들은 애련히 여기지 않은 이 없었다.
묘소는 충청남도 대흥 일남면 광시리산 신좌(辛坐) 언덕에 있으며 해마다 동지(冬至)가 되면 지방사림들이 그 지절을 사모하고 그 자손들과 더불어 지금까지 향사를 받들고 있으며
2006년 8월에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학산서원에 배향하였고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