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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학연구> 18집, 안양대 인문과학연구소, 2001.
나비와 광장의 시학
― 김규동의 시
맹문재(국어국문학과)
1.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에는 그의 작품세계가 압축되어 담겨 있다. 그의 첫 시집인 『나비와 광장』의 표제시인 이 작품에는 어머니, 남북, 통일, 자유, 두만강, 희망, 고향, 아침, 염원, 백두산 등 시인이 50여 년 동안 추구한 세계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비와 광장」은 김규동의 작품세계가 시작되는 기점이자, 작품들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는 자장이다. 또한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지도이다. 「나비와 광장」이 특히 중요한 것은 작품세계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사적 차원에서이다. 문학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면서 또한 계승시킨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은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계승한 것이면서 최인훈의 「광장」에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이렇게 보면 「나비와 광장」은 이전 세대의 문학을 계승했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이후 세대의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를 갖는다. 일제 강점기의 문학을 극복한 산물이면서 분단의 극복을 지향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또한 김기림의 모더니즘을 계승한 것이면서 최인훈의 모더니즘에 토대가 된 것이고, 김기림의 리얼리티를 반영한 것이면서 최인훈의 리얼리티에 거울이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버텨온 지식인의 고민을 이어받은 것이면서 동시에 분단 상황에 처한 지식인의 고민에 나침반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영향관계는 다분히 인상적인 진단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만큼 서로 간에는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김규동이 김기림이나 최인훈과 직접적인 영향관계에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문학사의 차원에서 계보를 만들 필요가 있다. 마치 이상과 조향과 김춘수가 서로 간에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모더니즘 계보를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김기림, 김규동, 최인훈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데, 특히 분단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차원에서이다.
우선 김기림, 김규동, 최인훈의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기림은 1908년 함북 학성 출신이고, 김규동은 1925년 함북 종성 출신이며, 최인훈은 1936년 함북 회령 출신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울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단지 동향이라는 전기적 사실이 아니라 지금까지 진행된 분단 극복을 지향한 문학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 그동안 이루어진 분단 극복을 지향한 작품들은 남한 출신 작가에 의한 것보다도 월남한 작가들에 의한 것이 압도적이었다. 양적으로도 그 절실함에 있어서도 인정되는 사실이다. 만약 월남한 작가들에 의해 추구된 분단 극복의 작품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남한 문학은 매우 편파적이고 협소한 상태일 것이다. 따라서 월남한 작가들이 추구한 분단 극복을 지향한 문학은 민족문학의 건강성과 역사성의 제고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김규동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차원에서 그 존재성을 획득하는데, 김기림이나 최인훈과의 영향관계를 고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김기림의 경우는 6․25전쟁으로 인해 납북되어 행방을 알 수 없지만, 김규동의 작품세계에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2.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바다와 나비」 전문
위의 작품에서 ‘나비’는 시적 자아를 상징하고, ‘바다’는 시적 자아가 지향하는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세계란 하루하루의 삶이 영위되는 일상일 수 있고 유토피아의 공간일 수 있지만, 결국 ‘나비’가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터전을 의미한다.
‘나비’는 그 ‘바다’를 향해 날아간다. 기대와 희망이 부풀어 있기 때문에 무서움이나 두려움은 전혀 갖지 않고 다가간다. 그러나 ‘바다’를 향해 날아갔던 ‘나비’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오고 만다. 이상세계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실망감과 좌절감을 안고 되돌아온 것이다. 다시 말해 이상세계로 생각했던 ‘바다’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기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품고 도망쳐온 것이다.
이상과 현실 간의 이와 같은 괴리란 결국 일제 강점기에 대한 현실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바다와 나비」가 1939년 『여성』지 발표된 점을 생각하면 그 정황이 충분히 이해된다. 일제 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단말마적으로 치닫던 때이기에 ‘나비’와 같은 한 조선인의 존재 가치는 여지없이 뭉개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푼/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은 그와 같은 세계인식을 계승하고 있다.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 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흰 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 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김규동, 「나비와 광장」 전문
한국전쟁 중 피난지인 부산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위의 작품에서 ‘나비’는 김기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적 자아를 상징하고 있는데, 그가 처한 상황이 다소 다르다. 김기림의 ‘나비’가 ‘바다’와 관계한 것에 비해 김규동의 ‘나비’는 ‘광장’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규동의 ‘나비’가 존재하는 ‘광장’은 김기림의 ‘바다’보다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최후의 절정에서 흰 나비는/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피 묻은 육체의 파편을 굽어”보고 있다. ‘나비’는 드넓은 ‘광장’에서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단지 피 묻은 자신의 육체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환경에 처해 있는 ‘나비’의 모습이다. ‘나비’는 안온한 세계가 아니라 ‘활주로’ ‘파편’ ‘기계’ ‘허망’ ‘묘지’ ‘Z기’ 등이 존재하는 ‘광장’에 놓여 있다. 따라서 ‘광장’은 ‘나비’에게 놀이의 공간도 삶의 터전도 되지 못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일 뿐이다. “기계처럼 작열한 심장을 축일/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곳이고, “신도 기적도 이미/승천하여버린 지 오랜 유역”에 불과한 곳이다. 진정 ‘광장’은 ‘나비’의 이상세계가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비’는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라고 의아심을 갖는다. 기대감이나 희망을 품는 것이 아니라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나비’가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역사적 상황, 즉 6․25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비’에게는 희망보다도 허망함이나 상실감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비’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 나비는/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김규동의 ‘나비’는 김기림의 ‘나비’로부터 단순히 인유한 것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상황에 처한 한 지식인의 자아를 김규동은 자신이 처한 시대로 옮겨와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김기림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 문학운동을 이끈 시인이며 비평가였다. 또한 문학사에서는 가려져 있지만 인정할 만한 소설가였고 극작가였으며 수필가였다. 서구 모더니즘 문학이론을 도입하여 낡은 인습과 전통에 휩싸인 채 진행되고 있는 조선의 문학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김기림의 문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했다. 특히 문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쪽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심해, 임화는 김기림의 작품세계를 기교주의라고 비난했고, 김동석도 김기림의 기상도를 신문기사를 가지고 몇 번 재주를 넘은 희극적 비판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계열은 다르지만 송욱, 김종길, 김윤식, 김용직, 김춘수, 김우창, 박철희, 문덕수, 김인환 등도 김기림이 서구 문학을 1930년대의 한국 문학에 접맥시킨 선구적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의식과 전통의식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김기림의 문학사적 평가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김기림은 형식주의자나 기교주의자가 아니라 언어와 표현력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며 동시대를 반영하려고 했다. 시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작품에 성실하게 활용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객관적으로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문학사에서 나타난 감상주의와 편내용주의를 부정하고 과도한 감정이나 이념의 노출을 지양했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라는 암흑의 상황이었지만 감각적인 이미지와 형식적인 기교의 측면으로 기울지 않았고 친일문학도 하지 않았다.
김규동은 김기림의 그와 같은 세계인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김규동이 1948년 2월 김일성대학 교복과 교모를 착용한 채 단신으로 월남한 이유는 김기림이 월북을 하지 않고 있기에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해서였다. 즉 임화, 김남천, 한설야, 이태준, 오장환, 이용악, 이태준 등 조선문학가동맹 소속의 작가들이 대거 월북하는 상황인데, 자신이 스승으로 삼고 있는 김기림이 월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궁금해서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만큼 「김기림」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김규동에게 김기림은 문학의 푯대였다.
해방의 군대 붉은 군대가
트럭 타고 진주해 오는데
가만있을 수 없다 하여
시인 김기림 선생이랑
플래카드 들고
읍으로 환영을 나갔다
한 소련놈 병사가
미심쩍은 웃음을 띠고 다가서더니
선생 안경을 후딱 벗겨 갖고 달아났다
이 녀석 봐
안경을 잃은 선생이 벙벙하여
이 사람들이 장난하는 건가라고 외이며
멍하니 서서 서글피 웃었다
혼란통에 새 안경을 구할 수도 없고
잘 보이질 않아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면서도
건국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젊은이들 앞장서서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문화란 좋은 환경 없인 안돼라고
새삼스런 말을 탄식처럼 했다
어느덧 40여년 전 일이다.
―김규동, 「김기림」 전문
실제 김기림은 김규동의 스승이었다. 김규동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에 김기림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인해 김규동이 단신으로 월남해 의정부 경찰서에 스파이 혐의로 구금되어 있을 때, 김기림이 신원보증을 서서 풀려날 수 있었다. 김규동이 상공중학교(현재 중대부고)의 교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김기림의 주선에 의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플라워다방」에서 잘 그려주고 있듯이 김규동은 남한의 문단 상황에 대해서도 김기림의 소개에 의해 이해했고 그리고 적응해 나갔다.
1948년 여름에
소공동 ‘플라워다방’에
들렀다
정월달에 남으로 온 나는
남쪽 문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그곳을 찾았다
‘플라워다방’에는
《문예》잡지 필진들이 모인다 했다
과연 그곳에는
김동리 조연현 곽종원 조지훈
서정주의 아우 서정태, 이정호 이한직 등이
모여 있었다
안쪽 구석 테이블에서
한창 원고를 갈기고 있는
베토벤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한 이는
중국서 온 소설가 김광주라 했다
처음에 나는
저 사람이야말로
남쪽 큰 작가가 아닌가 하고
그쪽만 주목했다
김동리는 수인사 끝나자
이태준의 안부를 묻고
북에서 「농토」를 발표했는데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다
서울 물정에 어두운
초면의 문학청년에게
김동리는 비교적 친절했다
그의 경상도 말씨는
여기가 과연 ‘남조선’이구나 싶은
감명을 안겨줬다
내과의사 같은 인상을 한
깡마른 조연현은
콧등에 밴 땀방울을
훔칠 생각도 않고
임화 안막 최승희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내가 학교시절 김기림 선생한테 배웠다니까
그분은 지용과 함께 문학가동맹을 해서
요즘은 활동 못하게 됐다고
잘라 말했다
다른 테이블로 옮겨 가더니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누구보곤지
경주 갈라나? 나 안 갈련다 마
하고 소리쳤다
아마 조지훈 보고 건네는 말이 아니었던가 싶다
오늘도 서울역에 나가/우리 쪽이 좌익 네댓 명 잡았다고
무용담을 비쳤다
그가 쓰는 평론은 읽은 적이 없으나
네모반듯한 얼굴이 아주 건장해보였다
미쓰 윤이라는 자칭 시인이
머리를 올 백으로 곱게 빗어 올린 이정호를
사모하는 모양으로 애교를 한창 떨었다
서정태는 윗저고리에
장미꽃 한 송이를 꽂고 좋아했다
과연 문예파들이구나 싶은 감흥이 솟았다
검은 안경테가 유난히 굵어 보이는
조지훈의 턱은 고고하게 긴데
창백한 얼굴의 지식인 시인 이한직이
그와 다정스레 담소했다
촌놈이
다방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으랴
두어 시간 땀을 흘리며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인사 나누며
된 소리 안된 소리 지껄인 후에
카운터에 가 접대한 분들 커피값을 계산하니
일금 900원이라
수중에 단돈 100원밖에 없는
이북내기는 참으로 큰일이었다
아리땁게 생긴 마담이
향수냄새를 확 풍기며
다방이 처음이신 모양이죠 하고
비웃는 눈치로 살짝 웃었다
창졸지간 무슨 궁린들 나겠나
겨드랑에 끼고 갔던
책을 꺼내놓으며
이걸 맡기고 내일 돈 갖고 와
찾아가겠노라는 궁색한 사정을 하고
겨우 다방문을 나섰다
현기증이 났다
그 책은
보들레르의 호화 양장 『악의 꽃』 시집이었다
내무부 들어가는 골목 ‘문예빌딩’에서
(박종화 김영랑 모윤숙 유치환
이분들이 하는 시낭송회를 보러 갔다
처음 보기는 했으나
생각하면 태반의 글쟁이들이 월북하고
남은 문인이 얼마 안 되는구나
하니 절로 쓸쓸해졌다
어두워지는 거리에 발을 옮기며
하나 나는 이제 여기서 살아야만 한다
라고 멋없는 한마디 중얼거려보았다)
이 ‘남조선’ 첫 체험담을
김기림 선생한테 얘기하니
김군 친구를 아무나 사귀면 안돼요
차차 내가 좋은 친구를 소개할 테니
너무 서둘지 마시오
라고 훈계하였다
―김규동, 「플라워다방-보들레르, 나를 건져주다」 전문
3.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은 최인훈의 「광장」에 또한 영향을 끼쳤다.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의 세계인식을 최인훈은 1960년 「광장」으로 계승하고 심화시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이 젊은이들의 해이었다면, 그것은 또한 최인훈의 해이었다. 전후 발표된 가장 중요한 장편 중의 하나라고 평가된 「광장」이 바로 그해 10월에 독자에게 주어졌던 것이다.”(『광장/구운몽』,문학과지성사, 1976,표4)라고 김현이 흥분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대의 반향이 대단했다. 민족 분단의 역사적 상처를 4․19혁명과 함께 극복하려고 나섰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를,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여실히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것은 곧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에서 ‘나비’가 ‘광장’을 날아오르려고 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날아오르려는 ‘나비’의 의지를 최인훈은 적극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최인훈이 지향하고 있는 ‘광장’이란 밀실과 현실이 아무런 매개 없이 뚫려 있는 세계이다. 구성원들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 열린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최인훈이 추구한 ‘광장’이란 모더니즘적인 세계만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만도 아니라 그 변증법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모더니즘적인 세계도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도 포함하는 제3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랍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아닙니다. 무지한 형사의 고문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제 나이에 아버지 없어서 못 살 건 아니잖아요? 또 제가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가 여기서 활약하신다고 그들이 저를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저는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거기서 탈출하신 건 옳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옳았습니다. 제가 월북해서 본 건 대체 뭡니까? 이 무거운 공기. 어디서 이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짓눌려나옵니까? 인민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정권을 세운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을 얼굴에 지닌 그런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바스티유를 부수던 날의 프랑스 인민처럼 셔츠를 찢어서 공화국 만세를 부르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프랑스 혁명 해설 기사를 썼다가, 편집장에게 욕을 먹고, 직장 세포에서 자아비판을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이라구, 인민의 혁명이 아니라구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프랑스 인민들의 가슴에서 끓던 피, 그 붉은 심장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최인훈, 「광장」 부분
‘광장’은 해방 후 누구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제재였고 이데올로기였다. 그렇지만 최인훈은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분단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그 세계를 당당하게 제시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 모두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시대에 한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이 죽어버린 남한을 비판하고 월북했다가 다시 개인을 위한 밀실은 없고 공허한 광장만이 있다고 비판한 주인공 ‘이명준’의 행동은 실로 용기라고 볼 수 있다.
최인훈이 그와 같은 용기를 내보일 수 있었던 것은 민족의 정체성이 깊게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 분단의 상황을 진정으로 아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극복을 추구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상실된 고향을 회복하고자 하는 절실함에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다. 진정 자기 존재의 토대인 고향을 상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또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최인훈의 고향 의식은 민족 분단의 극복을 지향하는 중요한 기저가 되었다. 그것은 김규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두만강’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얼음도 하도 단단하여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못 타고
썰매를 탔다
얼음장 위에 모닥불을 피워도
녹지 않는 겨울 강
밤이면 어둔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
우리 독립군은
이런 밤에
국경을 넘는다 했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
이런 밤에
나운규는 『아리랑』을 썼고
털모자 눌러쓴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
지금 두만강엔
옛 아이들 노는 소리 남아 있을까
통일이 오면
할 일도 많지만
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놓아 울고 나서
흰 머리 날리며
씽씽 썰매를 타련다
어린 시절에 타던
신나는 썰매를 한번 타 보련다.
―김규동, 「두만강」 전문
겨울이 왔다.
꽝꽝 얼어붙은 두만강 위에 주먹 같은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린다. 푸석푸석 가벼운 소리를 내며 강을 따라 심어진 버드나무 실가지에 앉으려다가는 미끄러져 내려간다. 강기슭에 자리잡은 제재 공장 마당에 산더미같이 쌓인 재목 위에도 눈이 내려앉아서 마치 거인들이 사는 나라서 사온 얼음사탕처럼 보인다. 공장 가까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이 제재 공장과 펄프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중략)
스케이팅을 할 재주가 없는 아주 조무래기들은 썰매를 탄다. 송곳을 두 손에 잡고 힘차게 얼음을 찌르면 씽씽 달아난다.
동철은 스케이팅 구두를 달고는 강에 들어섰다.
동철은 손을 뒤에 얹고 밀고 나간다. 꽤 잘 타는 편이다. 썰매를 타거나 팽이를 돌리는 아이들은 틈을 용하게 살살 빠져서 이리저리 지쳐간다. 여름에는 이 강에서 헤엄을 친다. 아낙네들이 빨래를 한다. 고기를 잡는다. 그리고 이 강을 통해 백두산 처녀림으로부터 재목떼가 흘러 내려온다.
그뿐만 아니다. 독립 운동가들은 이 강을 넘어 지치고 잠든 백성에게 민족의 정기를 불어넣으려 온다.
이 강은 H의 상징이요, 어머니다.
어머니 두만강.
―최인훈,「두만강」 부분
‘두만강’은 김규동이나 최인훈에게 고향의 상징이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아련한 추억들이란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고 아름답고 풍요롭기만 하다. 그러므로 “통일이 오면/할 일도 많지만/두만강을 찾아 한번 목놓아 울고 나서/흰 머리 날리며/씽씽 썰매를 타련다”라는 김규동의 희망은 절실하기만 하다. “이 고장 사람이라는 지방 의식은 두만강을 같이 가졌다는 것으로 뚜렷해졌다.”라는 최인훈의 진술 또한 설득력을 얻는다.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은 이와 같은 동질감으로 형성된다.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강 건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 들려왔다/우리 독립군은/이런 밤에/국경을 넘는다 했다/(중략)/털모자 눌러쓴 독립군은/수많은 일본군과 싸웠다”라는 김규동의 의식이나, “독립 운동가들은 이 강을 넘어 지치고 잠든 백성에게 민족의 정기를 불어넣으려 온다”는 최인훈의 의식은, 썰매를 함께 탄 공동체 의식이 있기에 실재성을 주는 것이다. 나아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휩쓸리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며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도 전해져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김기림, 김규동, 최인훈이 지향한 분단 문학의 계보는 더욱 세워지고 고찰될 필요가 있다. ‘나비’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광장’을 날아오르는 모습은 애처롭지만 그 지향에 동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제어 : 김규동, 김기림, 최인훈, 나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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