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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을 받는 박재만님.
LA에서는 지낼만 하신지요?
주 안에 있는 님은 복있습니다.
이러한 님으로부터 오랜만에 질문을 받았었습니다.
이번의 질문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간의 구조)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 질문에 답변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번에는 시일이 좀 많이 걸릴 것임을 알려 드리고 양해를 구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님에게 답글을 올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그러면 이제 답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님의 질문은 인간의 구조(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표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몸과 영혼과 혼으로 되어있는지, 그리고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혼과 영혼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양심은 도대체 영과 영(혼) 중 어디에 속하여 있는 것인지를 비롯하여서 하나님의 형상과 죄의 본성 등에 대하여 정리가 되어 있지 않는데서 갖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내용이 어렵고 설명하기가 힘들어서라기 보다는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가져오면서 굳어져 있는 사고 방식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답변을 통해서 님을 설득하여 이해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사용하여 의미해 주고 있는 관점에서 말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님이 이해를 갖는 유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께 의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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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구조(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한 이해'
Ⅰ. 인간의 구조에 대한 제설(諸說)
1. 2분설과 3분설
님이 알고자 하는 인간의 구조(인간의 구성 요소)를 조직신학(교의신학)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본 이해는 인간은 신체(몸)와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는 전제에서 갖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루어지는 인간의 구조는 크게 두 가지의 학설이 있습니다. 2분설(二分說)과 3분설(三分說)이 그것입니다. 2분설이란 인간을 몸(*몸은 육, 또는 육체, 또는 신체로도 말합니다)과 영혼(*2분설에서 영혼은 이 외에도 영, 또는 혼으로도 말합니다)의 두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몸과 혼과 영(또는 영혼)의 세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중에서 정통적인 교리의 견해로 갖는 것은 2분설입니다.
2. 인간의 구조를 2분설과 3분설로 보게 된 까닭
2분설이 인간론에 있어서 정통적인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3분설의 영향을 받고 있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꽤 되는 것입니다. 이 3분설은 인간의 성질을 몸과 혼과 영으로 구분하여서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철학적 사고에 따른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서 헬라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사람을 먼저 물질적부분인 몸과 비물질적 부분인 혼과 영으로 분류하고서 비물질적 부분으로 분류한 혼을 감각적 기능을 발휘하는 요소로 그리고 영을 하나님과 연결되어 이성적 기능을 발휘하는 요소로 이해하여서 이성적 영과 동물적 혼과 물질적 몸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3. 철학적 사고에 의한 인간의 구조 이해가 신학 사상에 끼친 영향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 사고에 의한 인간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잘 아는 교부들의 신학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교부들에게서 3분설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은 이레네우스(A.D. 140-202?)입니다. 그는 비신자들은 단지 혼과 몸만을 갖고 있으나 신자들은 몸과 혼과 영혼을 갖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내리우스도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벌카워는 아폴리내리우스가 최초로 삼분절의 의미로 그의 잘못된 기독론을 전개해 나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 150?-221)와 오리겐(A.D. 185-254)과 닛사의 그레고리 등이 3분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단지 철학자들의 인간 이해를 그대로 수용하여서 3분설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교회지도자들로서 인간의 구성요소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3분설로 말해지고 있는 몸과 혼과 영이라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용어를 가지고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하여 나갔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은 주요 인용구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또 히브리서 4장 12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하지만 3분설은 오래지 않아 이단적 사상을 띤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가령 그노시스파들이 3분설에 의하여서 사람의 영혼은 신적본체의 일부라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범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에까지도 말해지고 있는데 사람의 영혼을 신적본체의 일부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만 있게 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과 같은 영적인 것으로 중생한 자의 영혼은 범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방교회의 웟치만 니와 그의 제자 위트니스 리가 대표적인 사람이며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서 동일한 이해에 의해서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에게서 영혼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관계를 맺는 중요한 요소이며 혼은 이러한 영혼에 속해 있으면서 혼적인 기능을 발휘해야 하고 육은 그 혼에 의해서 행동해야 하는 관계라는 이해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범죄하는 것은 육과 혼이며 영혼은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다. 한편 반펠라기우스파는 인죄론에 있어서 원죄를 다룰 때 사람의 영은 제외되고 몸과 혼만이 원죄의 주체가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런 3분설이 교회사에서 반드시 이단적 사상을 띤 위험한 것으로 배척만 받아온 것은 아닙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독일과 영국에서 신학자들에 의하여 계속 주장되어왔습니다. 델리취, 허드, 벡, 오힐러 등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3분설은 그 이해에 있어서 좀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혼을 말함에 있어서 영의 유출로 보고 혼이 영과는 실체는 다르지만 본질은 영과 같다고 보는가 하면, 혼은 영보다 판이한 실체가 아니라 몸과 영과의 사이의 연합점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혼은 인격적 생활의 주체이며 영은 그 주체의 원질(原質)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혼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통일되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3분설은 고타드에 의해서 옹호되어 왔으며, '스코필드 주석 성경' 구판과 신판 모두에서도 옹호되어 왔습니다.
이런 3분설이 우리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영국의 형제교회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지방교회의 위티니스 리와 웟치만 니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4. 정통 교리로 받아들여져 온 2분설
이런 3분설에 비해서 2분설은 그동안 정통적인 교리로 받아들여져 왔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인간 이해로 가르쳐져 왔습니다. 이에 따라서 교회의 신자들은 인간의 이해를 구조적으로 받아들여 인간은 육과 영혼의 이원론적으로 되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학(神學)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도 인간의 기원을 육과 혼의 두 근본적 부분들을 가지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인간 이해를 이분설의 구조적 의미에서 말한 것은 성경에서가 아니라 철학에서였습니다. 플라톤(B.C. 427-347)은 육[신체]은 죽은 물질이었으나 혼은 천계에 순수한 형식(形式) 혹은 관념(觀念)으로 존재하다가 사람의 육에 화신(化身)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혼은 창조되지 않았으며 불사적이고 신격(神格)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육의 혼과의 관계는 신체는 혼의 감옥으로서 혼이 육에 갇혀있는 것이 굴이 그 껍데기에 폐쇄되어 있듯이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을 때에 혼은 육을 떠나 천계(天界)로 올라가거나 다른 어떤 몸으로 재화신(再化身)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도 인간을 이분설의 의미에서 말하였으되 혼을 동물적인 국면과 이성적인 국면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이해는 토마스 아퀴나스(A.D. 1225?~1274)를 통하여 정착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A.D. 1596.3.31~1650.2)는 인간을 물질과 정신의 상이한 본질적 이원성이 있다고 보면서 이 상이한 본체가 서로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물질의 동작은 마음에 미치고 마음의 동작은 물질에 미친다는 이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 후에 인간 이해에 대한 철학은 육과 혼을 각각의 독립적 기원을 가지는 것으로 보면서 이 둘이 함께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을 시계의 두 바늘이 잠시 상합하는 상호관계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인간 이해는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인간 이해를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구절이 창세기 2장 7절인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인데, 이는 창세기 1장 26-27절인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와 함께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의 생령을 '生靈', 그러니까 살아있는 영(혼)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습니다. 즉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요 사람에게 영혼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영을 인간에게 불어 넣어주어서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다. 그래서 교회가 인간을 몸과 (영)혼의 합일체로 보는 것을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신학교에서 인간이 이렇게 육과 영혼의 합일체라는 이해의 견해를 성경적 가르침으로 말해옴에 따라서 이분설은 성경 교리로 굳혀졌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신학자로서 거두(巨頭)로 평가하는 박형용은 그의 저서인 '박형용박사저작전집 3권 교의신학 인죄론, 3장 인성의 구조와 번식'에서 "성경에 성행하는 인성의 묘사는 분명히 이분설이다. 성경은 사람을 신체와 혼 혹은 영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으로 제시한다. 성경은 '네페쉬'-'수케'(혼)을 말할 뿐 아니라 또한 '루아크'-'프뉴마'(영)을 말하나 이것들을 두 종류의판이한 요소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분설은 허다한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으며 또한 견실한 합리적 증거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신체와 영혼의 이분법적 구조를 말하는 성경 구절로 창세기 2장 7절을 들어서 "인류 창조에 관한 보도는 사람의 구성분을 신체(흙)와 영(생기)의 두 부분으로 말한다"고 하면서 '생령'을 '생혼'이 있는 실유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의 역문(譯文)을 "문자적 해석대로 보면 사람은 영의 불어 넣음을 받아서 혼으로 되었으니 그는 영인 동시에 혼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람의 빗물질적 부분(정신적 요소)을 혹시는 영이라 혹시는 혼이라 칭함은 적정(適正)한 어법일 것이다. 우리 동양에서 이 두 말을 결합하여 '영혼'이라 칭하게 된 것도 매우 기묘하다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창세기 2장 7절을 사람의 복합성(複合性)과 함께 그의 통일성(統一性)을 지시하는 최초 또는 모범적인 구약성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류 창조의 보도에서 인간을 신체와 영의 두 부분으로 말한다고 분명히 하면서 그러나 "생령의 원어에 포함된 의미를 보다 더 원만하게 살피면 이것은 영혼만 아니라 신체도 포함하여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원어대로 '생혼'(生魂)이란 말은 다른 생명의 형태들에게 적용된 것과 꼭 같은 표현으로서 이 말이 창세기 1장 20절, 21절, 24절에서는 '생물'(生物)이라고 역술되었는데 이 구절은 사람 안에 두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동시에 오히려 사람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인간 이해를 두 부분으로 된 구조적인 면에서 보면서 '생령'이란 원어가 의미하는 바가 사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와 영혼의 존재를 통일성을 띤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2분설에 의해서 3분설에서 말하고 있는 '혼'과 '영'을 각각 말하고 있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이 두 용어는 다같이 생물에 대하여 사용되었는가 하면, 혼이 여호와에게도 사용이 되었고, 신체와 분리된 죽은 사람들을 혼이라고 칭하였는가 하면, 혼이 몸에게도 또는 마음에게도 사용되었으며, 영혼이 목숨(생명)에게 사용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혼과 영은 내용적 의미에서 구별없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은 혼과 영을 교대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혼이 떠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또는 그것을 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어떤 경우에는 '목숨'으로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몸과 영혼'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분설에 의한 인간 이해는 그레샴 메이첸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기독교 인간관'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성경은 사람에게 두 개의 독특한 요소 또는 본질, 즉 육체와 영혼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창조의 기사에서 창세기 2장 7절을 들었습니다. 그는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육체를 벗어버린 상태가 우리가 갈망해야 하는 자유로운 상태라고 하는 헬라적인 관념 철학을 성경은 전혀 고무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반대로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것이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상태이며 육체를 벗어버린 상태란 그리스도인들이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벌거벗은 상태임을 성경은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육체 부활의 교리는 헬라의 영혼 불멸과는 아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다른 별개의 본질이며 또한 영혼은 육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죽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실제로 육체와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고 보았습니다. 과연 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것이 성경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인간의 영혼의 본질을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을 그는 인간은 인격체라고 하는 것에서 그리고 또한 도덕적인 유사성이 있는 것에서 보았습니다.
메이첸의 2분설에 의한 인간 이해는 그가 자신의 견해를 성경적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데 따른 것이긴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삼대 표준문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때문이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2항에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을 지으신 후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으며, 이성적이요 불멸적인 영혼을 주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영혼을 지닌 존재로 창조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에 따라서 "성경은 사람에게 두 개의 독특한 요소 또는 본질, 즉 육체와 영혼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라고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을 대체적으로 2분설에 의한 구조로 이해하는 것에 반해서 안토니 A. 후크마는 그의 저서인 '개혁주의 인간론' 11장에서 인간은 영과 육의 통일체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측면과 정신적 혹은 영적 측면을 갖고 있으되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육체를 갖는 영혼 혹은 영혼을 갖는 육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상이한 부분들의 복합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으나 동시에 비육체적 측면의 두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것은 2분법으로서가 아니라 영-육의 통일체라는 개념을 가졌습니다. 그가 이러한 개념을 가진 것은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두 측면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도 인간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잠정적이나마 일시적으로그들의 현재의 몸을 떠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의 때에 인간은 다시 한번 통일체로 온전케 회복되어서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현재는 영-육의 통일체로 존재하고 있지만 죽음의 때에는 잠정적이나마 일시적으로 분리될 것이며 이 분리된 것이 부활에 의해서 다시 통일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Ⅱ. 인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의 바른 이해
철학에서나 신학 사상의 고금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3분설이든 2분설이든 또는 영-육의 통일체이든 인간을 구조적으로 보는 것은 동일합니다. 특히나 신학 사상에 따른 인간 이해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어서 그 정당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져왔습니다. 여기에 신앙고백서의 교리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철학 사고에 의한 인간 이해는 배제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신학 사상은 과연 그럴까요? 즉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을 그렇게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우선 신학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지고 있는 인간의 구조 이해가 철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임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해가 왜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조직신학[교의신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음에 신학자들이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의한 인간의 이해는 인간에게는 영혼이 주어졌다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생령'이라는 원어의 의미가 사람 전체의 개념이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인간은 육과 영혼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그러한 개념으로 갖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2분설(또는 3분설)로 인간을 육과 영혼으로 되어 있는 존재라고 하는 기원의 근거로 삼고 있는 '생령'의 본래의 원어적 의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영혼으로 이미 단정하고서 이것으로 인간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것이 사용되고 있는 창세기 2장 7절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이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1. 창세기 2장 7절의 해석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는 현재 우리 나라 교회가 채택하여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 한글판인데 이는 또한 우리 나라 말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
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표준새번역 성경입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하는데 주요 성경으로 삼은 영역본에서는 '생령'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NIV에서는 'a living being', 그러니까 '산 사람'(살아있는 존재)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NASB에서도 'a living being'이라고 '산 사람'(살아있는 존재)으로 번역하였습니다.
KJV에서는 'a living soul', 그러니까 '산 목숨'(생명이 있는 존재)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개역 한글판 외의 다른 한글판 및 영문판 번역 성경에서는 '생령'을 산 사람(살아있는 존재)의 의미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개역 한글판이 '생령'(산 영혼)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는 그 앞에 함께 말하고 있는 내용과 함께 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호흡[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에서는 사람이 영혼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방법으로 흙으로 빗은 사람의 코에 생기[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사람이 '산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나라 말 번역본인 개역 성경은 '생령' 곧, '산 영혼'으로 번역한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생령'으로 번역한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생령'에서 의 히브리어 단어는 '네페쉬 하야'이며 그 뜻은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여기서 '영혼'으로 사용된 단어는 '네페쉬 '인데 이렇게 영혼으로 번역된 '네페쉬'의 본래의 의미는 영혼이 아니라 '목숨',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생령'으로 번역한 '네페쉬 하야'는 '살아있는 목숨' 즉, '산 목숨'이라는 것으로서 '산 자'(산 존재)를 의미합니다. 공동번역 성경, 새번역 성경, 현대어 성경 등은 이를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영어 성경인 NIV와 NASB, KJV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말 성경에서 개역 성경은 목숨을 '영혼'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영에서 나왔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에서 나온 영원한 생명의 영을 받았으며 사람이 받은 이 영은 영적인 혼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과는 구별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혼을 소유했으며 이 영혼은 '불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에는 한국 토속적이고도 무속적인 개념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의 'soul'을 하나님의'영'이라는 뜻을 가진 Spirit의 성질의 것에서 이해하면서 또한 Ghost(혼백;사람의 넋)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KJV에서의 'a living soul'을 '생령'(살아있는 영혼)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생령'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한글 개역 성경은 '산 영'(a living soul)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런데 이 '산 영'은 첫사람 아담에게 쓰고 있는데 생명을 주어서 살리시는 영적인 일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대비적인 의미에서 쓰고 있는 것으로서 영혼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첫사람 아담은 사람의 몸을 받아 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첫사람 아담은 그렇지만 둘째 사람 아담으로 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적인 일을 하는 분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산 영'으로 번역한 원어 헬라어는 '프쉬케 조산'인데 그 뜻은 히브리어'네페쉬 하야'인 '산 목숨'처럼 동일한 의미인 '산 목숨', '산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산 영'으로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한 것은 '생령'처럼 오역(誤譯)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나라가 soul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Spirit와 구분하면서도 Ghost의 개념에서 이해한 데 따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soul은 '목숨'(생명)이 바른 번역으로서 '네페쉬'와 '프쉬케'를 영어로는 모두 이 soul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a living soul은 '산 목숨’으로서 '생명이 있는 존재'를 일컬으며 이는 a living being인 '살아있는 존재'와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soul 곧 영혼은 '영'이라는 뜻을 가진 Spirit와 전혀 다른 것인데 이런 것을 Spirit의 성질의 것에서 혼백의 뜻인 Ghost처럼 사용하여 왔습니다. .
우리 나라 말인 개역 성경이 영혼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 실은 우리가 알고 있고 그렇게 여기고 있는 영혼이 아닌 단지 '목숨'(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그 생명이 있는 자라는 존재의 개념인 것이라는 사실은 영어에서 soul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원어인 네페쉬와 헬라어 원어인 프쉬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네페쉬(또는 프쉬케)는 '목숨'과 '생명'이라는 뜻과 함께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물'로 번역될 때도 있는가 하면 '사람이라는 존재' 특히 '사람 자신'을 표현하여 말할 때도 사용되어졌습니다. 그것을 우리 나라 말의 개역 성경은 이러한 구분 없이 네페쉬(프쉬케)를 때로는 '목숨'과 '생명'이라는 원래의 뜻에 맞게 번역하기도 하다가 때로는 영(靈), 혼(魂) 또는 영혼(靈魂) 등으로 혼용하여 번역하기도 함으로써 전혀 원래의 뜻과는 맞지 않게 다르게 받아들이게 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한글판 개역 성경이 이처럼 네페쉬(프쉬케)를 일관된 뜻으로 번역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번역한 것은 원래의 단어가 지닌 개념과는 무관하며, 단지 용어가 혼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일 뿐입니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개역 성경에서 '혼'이나 '영혼'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백(魂魄)이 몸을 떠나서 귀신이 된다고 하는 속설이 지배적이며 이 혼백을 줄여서 혼(魂)이라고 부르는 영향의 흔적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개역 성경은 곳곳에서 '목숨'과 '생물'과 '영'과 '혼' 그리고 '영혼'이라는 용어를 혼용함으로써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과 같은 불멸의 성질의 것으로 알고 있는 영혼이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의 존재적 의미에서 말해지는 것이라는 것은 이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네페쉬(프쉬케)가 생명(출 21:23; 신 19:21)을 비롯하여서 생명에 꼭 따르는 여러 가지 현상과 관련하여서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호흡(창 35:18; 욥 41:13, 21), 피(창 9:4; 신 12:23; 시 140:8), 욕망이 분출되는 마음(삼하 3:21; 잠 23:2)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을 통해서 구약에서 영혼은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가 아니라 사실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사람 전체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영혼은 사람의 생명, 또는 의식을 지닌 개별적 주체의 생명을 의미하였습니다 (마 2:20; 6:25; 누 12:22-23; 14:26; 요 10:11, 15, 17; 13:37).
그렇다면 말이죠. 영혼(soul)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영(Spirit)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영(Spirit) 은 원어에서는 네페쉬(히브리어)나 프쉬케(헬라어)가 아닌 루아흐(히브리어)와 프뉴마(헬라어)로 사용하여서 구별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별이 되는 것이면서도 혼용되어 같은 성질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영혼과 영을 올바른 이해 속에서 구별하여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같은 영적인 실체이며 또한 불멸로 창조된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에서의 '생령이 된지라'는 'became a living soul(being)'로 이것이 영혼을 불어넣어 영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사람의 영혼은 사람 그 자체, 그러니까 살아있는(생명있는) 사람이라는 전체적 개념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사람의 영혼은 물질적 요소인 육에 반해서 빗물질적인 요소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빗어 몸[육]을 창조하시고 또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영혼을 창조했다는 식의 이해에서는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몸을 창조했다는 것이요 이 몸은 생명있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이죠. 어떻게 말입니까? 이를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정의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과 같은 영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과 닮은 존재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이것이 흙으로 빗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되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있는 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 살아있는 존재, 곧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생명있는 몸으로서 영원히 사는 것은, 즉 영생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있음으로써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에서 되어집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떠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다만 아담의 형상, 곧 흙에 의한 육의 형상으로만 남습니다(창 5:3). 이러한 아담의 형상은 흙의 형상이며 이는 육의 형상입니다. 더 이상 영적인 존재이지 않고 다만 육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육의 형상인 아담과 그의 후손은 아무리 자녀를 낳고 향수하더라도 그 결과는 죄의 형벌인 죽음입니다. 이러한 육의 형상으로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선택과 영원한 작정에 의한 언약적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하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한몸이 됨으로써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이시기에 그를 모시고 섬기는 그의 몸된 우리도 함께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의 신령한 하늘에 속한 몸을 입게 하여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있게 하십니다(고전 15장). 우리는 그 때를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봄으로써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 때가 임하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로 있으며 따라서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통해서 그가 죽으실 때 그와 함께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함께 죽은 자가 되었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하여 함께 산 자가 됨으로써 죽음을 이긴 자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롬 6:3-11).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사람의 영혼은 육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사람(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백성)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회복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사람은 지음을 받을 때 처음부터 불멸의 영혼을 받았고, 이제 육이 부활하여서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서 육도 불멸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불멸의 영혼과 불멸이지 못한 육이 하나가 되어서 그동안 사람으로 존재해 온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말 성경에서 사람을 '영' 또는 '영혼'으로 언급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사용되어 말해져 왔는가를 알면 사람을 2분설로나 또는 3분설의 개념으로 이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2분설로 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람을 사람의 몸에 영이 합쳐진 존재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첫사람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인 모든 인류는 생명이 없으며 그래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인류에게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회복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입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자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자는 그들도 썩지 않을 몸을 입을 것이지만 지옥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심판이 주는 고통을 영원히 겪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어떤 현상이 있는가 하는 것이죠. 이를 2분설의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즉 사람을 비물질인 영혼과 물질인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서로 다른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을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의 죽음에서는 이 둘이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육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육으로부터 빠져나와 그 영혼이 낙원(천국)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한편으로는 육으로부터 분리되어 빠져나온 그 영혼이 음부(지옥)에 들어간다고 보구요. 이런 사상이 지배적이기에 한창 종말의 날을 주장하며 활개쳤던 다미선교회를 비롯해서 잘못된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시끄러웠던 때에서는 죽은 자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영혼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습니다. 그 증거로 사진을 제시하면서요.
성경에서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부터 나와 천국과 지옥의 세계로 가는 듯한 표현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한 비유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한 예입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돌아올 수 있는 재산의 몫을 받고자 하여서 이를 자기 형에게 말해 달라고 하는 한 부자에게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으니 탐심을 버리라"고 하면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부자가 기름진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농사를 지어서 풍년을 맞아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었는데 곳간을 가득 채우고도 수확한 곡식이 남아서 더 곳간을 지을 것을 궁리하면서 그렇게 하면 몇 년을 풍족히 쓰고도 남을 것이니 이제는 편안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절)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영혼이란 단어는 목숨이라는 단어와 병행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에서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는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 스스로를 두고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혼자말로 자신을 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영혼이란 단어는 자신의 몸에 있는 영혼을 의식하고서 그 영혼을 향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서 표현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20절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에서의 영혼은 "오늘 밤에 네가 목숨을 빼앗기면...."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20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영혼의 의미는 실상은 '목숨', '생명'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죽음에서 그의 영혼이 육[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빠져나가는 개념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도서 3장 20-21절에서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줄을 누가 알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인생의 (영)혼은 하늘에 올라가고 짐승의 (영)혼은 땅, 곧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있는 혼이 짐승에게도 있단 말입니까? 사람의 혼은 하늘로 올라가는데 짐승의 혼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사람의 혼은 죽음을 보지 않는데 짐승의 혼은 죽음을 본다는 말입니까?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앞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라고 말하며 매일반으로 말해 놓고서요. 그런데 인생의 혼을 히브리어 원어는 '영'이란 '루아흐'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혼과 짐승의 혼을 차이를 두고 말하기도 합니다. 짐승의 혼은 영(혼)이 아니고 단지 감각적인 혼에 불과한 것으로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구절에서의 '루아흐'는 사람에게만 사용된 단어가 아니고 짐승에게도 사용된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데, 사람과 짐승이 다 같이 똑같은 죽고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존재인데, 그런데도 사람의 영은 하늘에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서는 (영)혼을 소위 우리가 말해 온 불멸의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 육[몸]에서 영(혼)이 분리되어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존재의 본질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군데를 더 예를 들겠습니다.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땅에서 지내고 있던 시기에 사무엘이 죽어 그의 고향인 라마에 장사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이에 크게 놀라 당황한 사울왕은 싸울 힘을 잃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여호와께 묻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선지자를 통해서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사울왕은 놉의 제사장들을 전멸시킬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갔기 때문에 그 우림이라는 제비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행위를 행합니다. 그것은 신하에게 명령을 내려서 자기를 위하여 죽은 사람을 불러 올 수 있는 신접한 여인(무녀)를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신접한 여인에게 가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으면 그 방법을 알려 주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왕복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 변장을 하고서 신하 두 사람을 데리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사울왕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죽여 없애 버렸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이 신접한 여인은 살아남았었습니다. 그래서 신접한 여인은 처음에는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올무를 놓으려는 줄로 알았으나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그녀를 해치지 않겠다고 하므로 안심을 하고 "내가 왕에게 누구를 불러 올리면 되겠습니까?"라고 묻고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하니까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과 사울과의 관계를 알고는 사무엘을 불러 올리는 것을 주저하였으나 사울이 안심시키며 거듭 말하므로 사울의 말대로 죽은 사무엘의 신[神; 영(혼)]을 불러 올렸으나 사무엘은 사울이 여호와께서 일찍이 아말렉 족속을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한 것을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제 그를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블레셋의 손에 붙여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여 자신(사무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무섭게 책망하면서 여호와께서 사울의 왕위를 빼앗아 다윗에게 주실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 올렸다는 내용이 나오며 또한 그 사무엘이 사울과 말하면서 그와 그의 아들들을 블레셋의 손에 붙여서 그들도 자신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블레셋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사무엘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의 내용에서 보는 것처럼 죽은 사무엘의 영(혼)이, 그리고 이제 죽을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영(혼)이 있다는 것으로 말해 지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찌 된 것이겠습니까? 과연 죽은 사무엘에게서 그의 영(혼)이 그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빠져 나간 것일까요? 또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할 경우 역시 그들의 몸으로부터 그들의 영(혼)이 분리되어서 빠져나가서 사무엘의 영(혼)이 있는 곳으로 가 함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 만난 죽은 사무엘의 영(혼)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습니다. 우선 유대교에서, 그리고 기독교의 초대 교부들 중에서 저스틴 마터, 오리겐, 어거스틴은 실제로 죽은 사무엘이 나타났던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울의 멸망을 선포하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신접한 여인을 사용하여서 특별한 명령으로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보낸 것이라고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터툴리안, 제롬, 루터, 칼빈은 사신(邪神; 사악한 영)이 사무엘의 형상을 입고 나타난 것으로 보았는데 이들은 신접한 여인이 불러 올린 사무엘의 영(혼)은 사실은 죽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신으로서 사무엘의 영(혼)인 것처럼 나타나 말한 것이라고 이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것은 무녀에 의해서 있는 귀신의 장난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이번의 경우에만 특별히 허락해서 무녀를 통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모두 아닙니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자는 사악한 마귀요 귀신이 아니며, 신접한 여인인 무녀도 아닙니다.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인 무녀를 통해서 불러내고자 한 죽은 사무엘을 사울 왕 앞에 나타내신 분은 사울왕이 찾아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울왕이 무녀를 통해서 불러내고자 한 죽은 사무엘을 무녀가 아닌 하나님이 불러내신 것은 왜인지요. 하나님이 이처럼 죽은 사무엘을 정작 죽은 사무엘을 사울왕 앞에 나타내셔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사울왕에게 죽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죽은 사무엘이 사울왕 앞에 나타나서 그가 사울왕에게 무슨 말을 하여 하나님이 전하는 말씀을 사울왕이 듣게 하였는가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죽은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전한 말은 무녀가 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무녀가 전해줄 수 있는 거짓된 예언을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이미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사울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예언하였었으며(삼상 13:13-14; 15:22-26), 또한 사울은 다윗을 핍박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보복하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바가 있고, 또한 사울의 악함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기도 하였었기 때문에(삼상 24:12, 26:19),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왕에게서, 즉 일찍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시켜 버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기르는 가축을 모두 죽여 없애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따르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울을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일 것이니 사울이 내일이면 그의 아들들과 함께 죽어 죽은 사무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무녀를 통해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 마치 그의 영험한 효력으로 자신과 이스라엘을 지킬 수 있는 듯이 생각하는 그의 어리석음을 사울에게 죽은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를 떠나셨으며, 그에 대한 것으로 결코 그가 살지 못하고 죽음으로 망하게 될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죽은 사무엘이 사울왕 앞에 나타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씀을 전해준 사건은 죽은 사무엘의 몸(육체)은 땅 무덤 속에 있고 그의 영(혼)이 몸으로부터 나와 영(혼)이 머물러 있는 곳에 있다가 부름을 받고 나타난 죽은 사무엘의 영(혼)이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죽은 사무엘이 살아났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는 죽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부활이 없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거나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서의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죽은 사람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죽은 나사로의 비유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의 후손됨을 가르치는 것에서 다루어지는 천국과 지옥에 있어서 한 번 죽었던 사람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갈 수도 없고 지옥에서 천국으로도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설사 죽은 자가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지옥의 실상을 말하여 준다고 할지라도 전혀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주시는 것에서 하시는 것이지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설사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지옥의 실상을 자세히 알려 줄지라도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데 죽은 사무엘이 그것도 사신을 부리는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다고 해서 불러져서 사울에게 말하였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이미 죽은 사무엘을 사울왕 앞에 나타내신 것은 신접한 여인에 의해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서 그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오 또한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께는 사람의 살아있음과 죽음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사무엘을 땅의 무덤 속에도 두시기도 하시고 그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도 하시는 것에서 있게 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졌으며,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옛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마 27:51-53). 무덤 속에 있던 죽은 자의 영혼이 나온 것이 아니라, 무덤 속에 잠자던 자가 일어나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하는 표적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이적으로 있는 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이 일은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신 그대로 과연 일어난 것이란 사실에 믿음이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무엘의 경우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덤에 묻히므로 자신의 품에 있는 사무엘을 사울왕 앞에 그가 요구하는 대로 이적을 행하셔서 나타나게 하여 그의 내일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여져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음을 당하여 사무엘과 함께 있을 것을 알려 주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을 전하게 하고는 다시는 그에게나 다른 사람 누구에게나 나타내 보이지 않게 하십니다.
해서 말입니다. 사울왕 앞에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것은 죽은 사무엘이 살아나서이거나 또는 죽은 그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어 빠져나와서 그 영(혼)이 있는 처소에 있다가 신접한 여인에 의해서 그 영(혼)이 불러 올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영(혼)과 육의 분리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까지 우리네 교회가 가진 인간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영과 육이 하나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과 육이 죽음을 통해서 서로 분리되어 떨어져 육은 흙으로 돌아가 썩고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 때에 썩은 육이 다시 살아나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 분리되었던 영혼과 다시 합쳐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이 합쳐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사고(思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결코 영혼과 육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면서 이 두 부분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으며 그 몸에 생명을 주셔서 살아있는 몸으로서의 존재가 되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과 함께 하시며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영적인 존재로서 살게 하십니다. 아담이 사단의 시험을 받아 죄를 범하고 타락함으로써 더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단지 흙에서 취해진 형상인 육의 존재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아담의 후손은 영적이지 못하고 다만 육적인 존재로서 생명없는 죽은 자로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에 의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택하신 자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산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죽음을 보지 않는 것에서 입증이 됩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에가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때에서입니다. 이 사람은 죽는다 하여도 지금 현재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을 이긴 자이기에,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는 산 자이기에 그러한 그의 몸은 죽음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고 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나타나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입고 그리스도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경배[예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영혼과 육의 두 부분으로 보면서 영혼이 육에서 분리되어 따로이 떨어져 있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은 사람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일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인간의 구조(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한 답글을 마칩니다. 인간론에 있어서 2분설이든 3분설이든 교회사 속에서 하도 오랫동안 일관되게 굳어져 온 사상이요 또한 인간에 대한 교리이기에 나의 글이 님에게 과연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성경적 관점에서 바르게 말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부디 님의 이해에 유익하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주께 구합니다.(*)
* 답글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였슴(2017. 4. 8)
첫댓글 Thank you so much for your devotion to my question. I really appreciate it. I think it is beyond my understanding. Even though it is very difficult, I will ask God to help me to understand it deeply. Thanks a lot.
You understood well my writing and I received well. Thank you. I pray that Lord's grace does together. And I inform one kind. It is that mistyping was in my writing. So, I wrote according to word. However, I desire that understand even if other mistyping appears.
I thank to God. Also, I am thankful to a pastor. I realized your article. So, glad and happy. Please, be healt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