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시편 18편 1절 ~ 6절). 545. 544.(14. 8. 24주)
작년7월에 많이 알려진 한 PD의 자살 (김종학Pd 13년7월 23일) ‘수사반장’,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등을 통해 ‘히트작 제조기’, ‘스타피디’, ‘마이더스의 손’이란 별명이 붙여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4page분량의 유서, 간단한 소지품을 남긴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만일 그 곁에 누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그 누가 있었다면 결과가 어떠했을지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굴속에 웅크리고 있습니까? 혼자입니까?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습니까? 시편 142편, 다윗이 캄캄한 굴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원수를 오히려 긍휼히 여겼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 캄캄함 굴속에서 기적을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했습니까? 시편 18편의 표제를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18편은 시편 142편에 이어지는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8편을 가장 영감 있고, 비중 있는 작품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무엘하 22장을 보면, 내용 전체가 시편 18편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그는 시편 18편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는 믿음의 후예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사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
하박국 선지자(합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 무명의 시인들(시 94:22, 시 91:2), 특히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그 사상이 그대로 녹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시편 18편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라고 노래합니다. 그만큼 이 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 있습니다. ‘성전’이란 단어를 다윗이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시 18:6). 다윗시대에는 성전이 없었고, 대신 천막 모양의 성막이 있었을 뿐입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성전’이 없던 그 시대에 ‘성전’이라는 단어를 시편 18편을 통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 속에 담긴 비밀은 무엇일까요?
83세 된 아버지가 53세 된 아들에게 까치가 날아들었는데 아버지가 ‘저게 뭐냐?’라고 자꾸만 물었습니다. 아들은 ‘금방 까치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못 알아먹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서러웠던 아버지가 50년 전 일기를 펼쳐보니, 세 살짜리 아들이 까치를 보고는 스물 세 번이나 ‘아빠, 저게 뭐야?’ 물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아들을 가슴에 꼭 안아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세 번 물었는데 자식은 벌컥 화를 냈지만, 자식은 스물 세 번이나 ‘아빠, 아빠’하며 물어봐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다윗의 입에서, 어떤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건성으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됩니다. 그것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다양하고 풍성한 표현으로 ‘아버지의 귀’에 들려지고 있습니다(시 18:6).
그의 상황은 가벼운 상황이 아니었는데(시 18:4-6), 불평이나 원망의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아버지를 향해 ‘힘, 여호와, 주,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경우에 만족이시다. 완전하시다. 실수가 없으시다. 제한이 없으시다.’라는 뜻입니다. 열 두 번이나 하나님을 부릅니다. 완전 숫자입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내 아버지시다란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하고, 그 아버지를 ‘나의 힘이십니다.’ 고백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스물 세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을 불러도 부를 때마다 전혀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인생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아픔이 있습니다. 한계상황으로 내몰릴 때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실 줄 믿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캄캄한 굴속에서 나를 건져주실 줄 믿습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서’란 단어 속에 감춰져 있는 비밀입니다(시 18:6). 분명히 그 당시 성전은 없었습니다. 이 성전이 도대체 어디를 가리킬까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참고/고전 6:19).
우리가 성전이랍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자녀(내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 거룩함이 있는 성도)’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현장,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 기적, 은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시 133:1-3).
어떤 집사님이 의사로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어려웠을 때 그가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자. 일 년에 한 주간 병원을 닫고, 해외의료선교를 하자.’ 그 후부터 그는 자신이 다 부담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수년 째 이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 병원을 닫으니 얼마나 손해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점점 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환경에 던져져 있습니까? 나의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대상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다윗을 배웁시다. 다윗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하고, 나아갑니다. 이렇게 ‘아빠, 아버지’를 부르는 다윗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교제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굴속을 놀랍게 변화시켜서 ‘터널’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굴은 막다른 골목이지만, 터널은 들어가면 출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환한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출구를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면, 내가 도무지 넘을 수 없었던 높은 산을 터널 때문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구나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