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가 그렇다니... 뭐, 다른 말은 하지 않을게."
음... 눈치가 100단인가. 역시 변했다, 변했어. 옛날의 그 순수한 언니
로 돌아와줘... 가 아니지, 옛날에도 결코 순수하진 않았던 것 같군.
뭐, 내 기억엔 말이다.
"어, 그래. 아아, 우리 애쉬는 언제나 오려나..."
난 말을 돌리려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왕명 보냈다니까? 곧 있음 오는데 뭘 그렇게... 참내, 너 완전히 팔불
출 다 됐다? 빨강머리... 애쉬녀석... 등등의 말을 하면서 마구마구 씹어
대던게 엊그제 같은데. 역시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니까. 너와 레드포드
자작이 이어질 줄 그 누가 알았겠니."
언니가 갑자기 나의 과거지사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참, 말도 많아졌지.
"우웅? 엄마가 아빠를...?"
크리스랑 어울리느라 우리의 말은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던 란이가 어느
새 언니의 말을 들었는지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감.히. 끼어들고 말았다.
어, 어떡해!
"엇! 언니 왜 갑자기 그런 말은 꺼내고 그래. 애들도 있는데."
언니가 갑자기 옛일을 들추자 나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랐다. 정말, 애들
도 있는데 그런 말을 꺼내면 어떻게 하냐구. 나중에 란이가 지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아빠, 엄마가요, 어쩌구... 저쩌구... 해서 우리 부부사
이에 금가면 책임질거야? 책임질 거냐구우~!
"뭐, 들으라고 하지. 어차피 레드포드 자작도 옛날에 네가 자기를 어떻
게 생각했었는지는 다 알고 있잖아. 달라질 건 없어."
언니가 샌드위치를 집어들면서 눈웃음을 살짝 지었다. 으으, 여우같단 생
각이 든다. 아무리 여자는 여우같아야 한다지만... 아, 여기엔 해당사항
없겠군.
"아린이모, 맛있게 드세요. 이거, 햄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언니에 대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는 나에게 문득 귀여운 어린아이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조그마한 두 손으로 꽉 쥔 접시 위에 맛깔스러워 보이는
햄을 들고 내 앞으로 내밀며 방긋 웃는 그는 다름아닌, 내 아들도 아닌,
애쉬의 아들도 아닌, 루실 언니와 에릭대공의 아들, 크리스였다. 오오,
크리스. 내 정녕 나를 이리도 감동을 시킬수가 있단 말이더냐... 이 이모
의 것까지 손수 챙겨주다니... 내 오른쪽 옆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충실
히 해치우고 있는 어디사는 누구네 아들내미하고는 차원이 다르구나.
"에취!"
그러던 도중, 갑자기 옆에서 재채기 소리가 드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내 아들 란이였는데 한참 얼굴을 접시 가까이에 두고 입속으로 맛
난 음식을 넣고 있던 터인지, 그 여파가 얼굴 전체에 튄 것이다. 내 아들
이지만... 더, 더럽다. 갑자기 재채기라니... 내 저주가 통한 건가? 으
음, 명색이 드래곤의 저주니까... 하지만 난 아직 용언 마법 못 쓰는데.
"어? 란아. 괜찮아?"
크리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얼굴 전체에 토마토 소스로 범벅이 된 크리스
를 향해 말했다. 자상함까지... 멋있다. 앞으로 태어날 딸내미가 부러워
질 정도니... 딸, 넌 복받은 거야. 아아, 애쉬가 저 녀석 반만 닮았어도
좋을텐데. 유전인가? 에릭 대공도 다정하니... 아들도 당연히 다정할 수
밖에. 아들은 아빠의 성격을 닮는다고 들었는데. 그냥 이번 유희 때려치
고 저 녀석 클때까지 기다렸다가 덮쳐버릴까... 난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머, 란이야. 갑자기 웬 재채기니. 무슨 일이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언니는 마치 엄마처
럼 란이를 챙겼다. 물묻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것도 있지 않고
말이다. 쩝, 이거 누가 엄만지. 아, 난 역시 엄마로서의 자질이 없는 걸
까. 옛날 한때에는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던 신사임당을 동경했던 내
가 이 무슨 꼴이란 말이냐. 란이야, 너도 역시 엄마보다 루실 이모가 더
엄마같은 거니.
'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저 눈초리. 언니가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동안 란
이는 눈을 깜박이며 내쪽을 보고 있었는데 자구 날 째려보고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설마... 내가 안 닦아줘서 삐진 건가? 으음, 가능한
얘기다.
"무슨 일이긴요, 그냥...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갑자기 추워서요."
란이야, 지금은 8월 초란다. 4계절이 뚜렷한 이 나라에서는 제일 더울 때
라구. 거짓말도 상황 봐 가면서 하려무나. 내가 그렇게 안 가르치던? 아
님, 그냥 어린아이라는 티를 팍팍 내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아, 그래? 란아, 있지. 누가 그러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면서 추워
지는 건 귀신이 몸을 통과해서 그러는 거래."
크리스가 갑자기 아는 체를 하면서 란이에게 말했다. 뭐, 지 딴에는 겁
을 주려 하는 것 같다만. 뭐 란이가 그런 거에 무서워 할...
"...에? 정말...?"
...것 같구나. 아니 무서워하는 구나. 저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
을 것이다. 입을 옆으로 삐죽이며 눈은 떨리고 얼굴은 창백해져서는...
금방 눈물이 떨어져도 이상할 거 없는 얼굴이군. 후후, 평소에 어른스러
운 척은 다 하면서 이럴 땐 영락없는 어린애라니까. 음, 내가 나서야겠
다. 정말 내가 말하는데, 엄마 노릇하기 참 힘든 거다. 참, 옛날엔 어떻
게 대여섯씩 그렇게 많이도 낳았나 모른다. 난 이번만 낳고 그만 낳아야
될 것 같다. 하나로도 벅찬데...
"아냐, 크리스. 그건 말해준 사람이 잘못 안 거예요."
난 크리스가 준 접시 위에 놓인 햄을 포크로 힘차게 내리찍었다. 역시 조
언은 이렇게 하는거야.
"음, 그런가요? 아린이모...?"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크리스.
아아~ 넌 정말 내 조카만 아니었으면... 흠흠. 난 다시 햄을 입에 집어넣
고 우물거리면서 대답을 해줬다. 순진한 아이니까 바로 넘어오겠지.
"글웨(해석: 그래)."
"아, 그렇구나... 란아, 아니래."
곧 크리스가 란이에게 말을 전달했다. 잘하고 있군. 흐뭇해라.
후후, 역시나... 내 말은 곧 진리인 법, 더군다나 이 쪼끄만 꼬맹이들 앞
에서는 더하다. 누가 감히 나의 말에 토를 달겠는가?
"다행이다.."
란이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훗, 누가 내 아들 아
니랄까봐 귀신 무서워하는 것까지 그리 똑같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고막을 찌르는 음성, 놀라워라.
"레드포드 자작님 드십니다~!"
언제 들어도 큰 시종장의 목소리. 마이크로 외쳐대도 저 정도는 아니겠
다. 혹시 전생에 음량 확대기가 아니었을까. 으음, 이건 좀 황당한 생각
이군. 근데, 이게 문제가 아니지. 누가 온다고? 으아, 애쉬잖아! 왜 이렇
게 늦은거야.
곧 저~ 만치서 한 인영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태양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릿결과, 파란 눈동자. 햇볕
에 적당히 그을린 매력적인 갈색 피부. (막 운동을 하고 왔는지 땀방울
이 군데 군데 맺혀 있었지만 내 눈에는 안 씻고 왔냐는 생각보다는 멋있
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180cm에 이르는 훤칠한 키. 망토와 갑옷으
로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운동으로 단련되어 온 몸이라는 걸 증
명하듯이 탄탄한 몸매가 드러나는게 굉장히 매력적인 느낌의 소유자, 그
의 정체는 방년 25세의 미청년인 애쉬였다. 나, 아시리안 플레이저의 남
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그러니 엄연히 말하자면 청년은 아닌
것이다. 능력있고, 평소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런... 남자. 물론 이것
들만 본다면 아주아주 이상적인 남편상이다. 단지, 약간 과묵한 것만 뺀
다면. 아, 눈이 마주쳤다.
"...!!"
애쉬가 웃었다. 시원하게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너무 멋있는 모습에 나
는 주책맞게도 얼굴이 화악 달아오는걸 느꼈다. 흠, 그래도 체면이 있으
니까 아닌 척 해야지. 아, 이 모습 루실 언니도 봤으려나? 난 루실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얘, 얘. 아린. 지금 그거 너 보고 웃은 것 맞지? 너무 멋있다."
"언니는~ 그거 불륜이야~"
쿡쿡거리면서 수다를 떠는 우리들의 모습을 봤는지 못 봤는지 애쉬는 달
려와 곧 루실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신, 레드포드 자작. 여왕폐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그리고 대공전하도 안
녕하셨습니까."
"어머, 차암. 레드포드 자작도 사적인 자리에선 이런 에의 차리지 않아
도 된다고 했잖아요."
인사를 마지못해 받으며 애쉬에게 말을 건네는 언니였다. 언니는 예의 같
은거 따지기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니까. 음, 나는 그럼 일국의 왕한테 반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일어나세요. 레드포드 자작, 반갑습니다. 오랜만이군요. 그리고... 크리
스..."
에릭대공 또한 애쉬에게 일어나길 권했다. 자신의 아들쪽을 힐끗 바라보
면서... 이 사람도 예의 같은 걸 형식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타입은 아
니니 말이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부부가 똑같다니까.
"레드포드 경! 안녕하세요.."
아버지의 눈총을 받은 크리스가 마지못해 애쉬에게 인사했다. 란이도 에
릭대공에게는 이모부라고 부르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상하게도 크리스
는 애쉬를 이모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마도 나에 대한 질투심 때문인
것 같다. 아, 어린애지만 질투심이란 게 정말 무서운 것 같다. 홀홀홀,
내가 매력이 넘쳐흐르긴 하지만.
"예, 왕자전하도 안녕하셨습니까."
한창 단란한 가족적인 분위기였는데... 형식적인 것 같은 애쉬와 크리스
의 인사치례에 그 좋. 은. 분위기는 행방을 묘연히 감추고야 말았다. 에
잉, 이러면 오늘 모인 의미가 없잖아.
"애쉬, 옆에 있는 우리들은 안 보여요?"
내가 약간 찡그린 얼굴로 애쉬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격식 차릴 것도
없는데 이러면 왠지 내가 꼭 애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잖아.
"아, 아린... 그게 아니고..."
애쉬가 내 맘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땀을 삐질거리면서 곤란한 듯 변
명을 하려 했다. 정말 순진한 사람이라니까. 이왕 넘어온 거 제대로 해야
겠다.
"흑흑, 애쉬. 너무 하는군요. 날 이렇게 등한시하다니... 요즘에 누누이
느꼈던 거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어요.. 너무 슬퍼요.. 내가 슬픈 건
괜찮지만, 이 뱃속에 있는 아이는 얼마나 더 슬프겠어요... 흑흑, 아가
야. 아빠가 우릴 버렸어..."
씨익~ 쿡, 내가 헐리우드 액션에 더욱 오버된 동작까지 선사하며 황당한
행동을 보이자 모두들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루실 언니랑 에릭대공은 약
간 얼빠진 얼굴을 했고, 크리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아린이
모 불쌍해서 어쩌나... 라는 표정을 지었으며, 란이는 특유의 무표정으
로 세워라 내워라 자기 몫의 생과일 주스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애
쉬는...
"아린... 내가 잘못했소."
정말 넘어갔다, 넘어갔어! 쿡쿡...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이다지도 순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뭐가요? 애쉬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어요... 속 좁은 내가 죄지. 괜찮아
요. 뭐, 아이랑 이대로 둘이서..."
난 두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울음을 겨우 참는 얼굴을 하고서는
쓸쓸히 석양을... 바라보려 했으나 아침인 관계로 동쪽 하늘에 뜬 태양
을 바라보았다. 아, 눈부시는 이 햇살... 뜨겁다.. 덥다. 뭐야, 태양!
너 누가 거기 떠 있으래! 뜨겁잖아.
"아린, 용서해주오. 생각해보니 내가 요즘 소홀했던 것 같소. 그러니..."
애쉬가 간절한 어조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음, 태양도 뜨거운데 어
서 고개를 돌려야지 안 되겠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엔 웬지 좀 아쉬
운 감이 드네.
"그러니...? ...뭐라는 거예요."
애쉬의 말이 여운을 남기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틈을 타서 고개를 돌렸
다. 곧이어 내 얼굴쪽으로 쏴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역시, 사람은 기
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
"하아~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소?"
애쉬가 나에게 물었다. 주위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지금 주
위의 상황을 생중계(?) 하자면, 루실 언니, 에릭 대공, 크리스, 란이. 그
리고 몇몇의 시종들은 어느새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애쉬에게 동정표를 던지면서... 아, 크리스는 빼고 말
이다. 그런데 사태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
다. 그냥 '쿡, 장난이예요. 애쉬.' ...라고 해버려? 아닌데, 그러기엔 너
무 일이 커져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왜냐구!
"..."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애쉬의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지는 애쉬. 짜식,
예나 지금이나 저런 모습이라니 정말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까지 했
는데도 불구하고 신체 접촉(?) 비슷한 종류의 것들에 민감한 이 시대의
순진남! 아, 우리 란이는 어떻게 태어났냐고 묻는다면... 뭐, 뭐 그런
걸... 하핫,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요? 그럼, 키스해줘요."
나의 도발적인 이 한마디. 이에 따라서 그렇지 않아도 새빨간 토마토가
된 애쉬의 얼굴이 더욱더 달아올랐다. 으음, 그럼 그렇지. 이젠 장난이었
다고 말하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
"정말... 그렇다면 용서해 줄 거요?"
어.. 에에엣?
어니, 애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그걸 할 수 있을 것 같
냐!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냥 평소대로 나가자구. 난 순간적으로 당
황한 나머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말이 없는 걸 보니 진담 같군요."
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애쉬. 아, 자.. 잠깐! 난 농담이라구우~
당신 나 몰라? 내 성격 잘 아는 사람이.. 잠깐만. 그런데 여기서 또 아니
라고 하면 애쉬 체면이 구겨지는데... 어떡하지.
"..."
난 여전히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애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아니라구우~
"...아린, 그래요. 당신이 정 그렇다면..."
뭐가 정 그렇다면... 이야? 애쉬, 똑바로 말해봐. 너 왜 이렇게 변했니.
저 옆에 있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가증스럽게 눈을 손으로 가리면서 손
가락 사이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거란 말이냐.
"으음, 꽤... 힘들겠네요."
"그럴 거요, 루실. 그래도... 참 재밌게 사는 것 같지 않소?"
"흠, 재밌게 사는 거라면야... 우리도 만만치 않잖아요?"
관람석(?)에서 우리들을 지켜보던 루실언니와 에릭대공이 나눈 말이었
다. 재밌다고... 지금 이 사태가? 루실언니 나중에 두고봐, 기억하겠
어... 그때였다.
"...!!!"
애쉬가 내 허리를 살짝 안으며 눈을 감고는 갑자기 내 앞으로 얼굴을 들
이밀더니 자신의 입술을 살짝 내 볼에 갖다댔다. 맞아! 바로 이거야! 볼
에 하는 키스, 자연스럽지 않은가. 애쉬의 머리가 좋다는 걸 새삼 실감하
는 순간이었다. 나는 키스라면 입술에 하는 키스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데... 비교된다.
그리고는...
"이제 됐소? 아린?"
평소 무뚝뚝, 무표정의 대명사인 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애
쉬가 오늘따라 굉장히 신기해 보인다. 웬일이래.
"훗... 괜찮아요. 이제는... 자, 자리에 앉... 아니다! 일단 언니, 그리
고 대공저하는 자리에 앉아 계세요. 난 애쉬랑 크리스와 삼자대면을 해
야 할 것 같아서요."
"삼자대면?"
에릭 대공이 물었다. 아들이랑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그러나? 후,
별말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구요. 아무래도 좀 전, 내가 애쉬
에게 했던 행동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 어떡한다. 아, 그동안
쌓아올린 나의 이미지가 무너지다니... 오늘은 최악의 날인 걸까. 제길,
오늘의 운세에 행운이 온다는건 역시 거짓말이었어. 그러게 그런건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내가 다신 오늘의 운세를 보나 봐라!
"예, 잠시만요. 잠시만이면 된답니다..."
나는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조심스레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에릭 대
공에게 빙긋이 웃으면서 양해를 구했다. 이윽고 에릭 대공은 내 말에 따
랐고, 더 이상 주위의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 좀 전에 뭐라 그랬니? 레.드.포.드.경?"
나는 주위에 바람을 끌어들이면서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바람으
로 누구를 날려 보낸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고 말이다, 난 친절한 레
드 드래곤. 이 연약한 아이에게 그런 짓은 못한다.
"네...? 아린이모, 왜..."
크리스가 나의 기운을 알아차렸는지 약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
며 말했다. 나는 '크리스. 레드포드경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니. 응?
이 이모가 그러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저길 봐, 란이도 크리스 아빠보
고 이모부라고 부르는데 안 그럼 애쉬 이모부가 섭섭하지 않겠어? 지금,
어른들 다 모여서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데 이렇게 분위기 깨면 되겠
니! 엉? 이 이모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너 한 번 오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솔직히...
"..."
하지만 그래도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명색이 왕자. 그 앞에서, 것도 부
모가 있는 자리에서 애 야단칠 수는 없고... 해서 친절하게 약간의 설득
(?)을 했다.
"크리스, 있지 이모가 오늘 조금 기분이 안 좋아요. 왜 그런지 아니?"
"왜, 왜요..."
크리스가 약간 말을 더듬으며 반문했다.
"응, 그건 말이지. 이모 뱃속에 있는 아이가 슬퍼서 그래요. 왜 슬플까?
한번 생각해볼래?"
"우우웅...."
머리를 싸매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크리스였다. 역시 애를 달랠 때는 잘
구슬러야 한다구.
"...아린, 왜 그러는 거요?"
애쉬가 파란 눈동자에비친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건, 뱃속에 있는 아이가요. 크리스가, 애쉬 이모부 미워하는게 싫대
요, 그러면서 막 울고 있어요. 자 여기! 이곳에서 아이가 우는게 느껴지
죠?"
난 내 배에 크리스의 손을 갖다 대었다.
"...!!"
깜짝!
크리스가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황급히 손을 떼었다. 훗, 아이
가 있는 배에 손 댄건 처음일테니 그럴만도 하지.
"막, 쿵쾅거려! 어, 어떡해... 막 화나서 우나봐요."
어린아이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정말 자신이 뱃 속의 아이와 동화되기
라도 한 듯이 말했다. 너도 3년 전까진 루실언니 뱃속에 있었단다, 얘야.
"응, 그래. 어떡하지? 자- 이제 애쉬 이모부한테 어떻게 해야 할까. 아가
가 화나면 나중에 결혼 안 해줄지도 모르는데..."
"네?"
크리스는 '결혼 안 해준다' 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는지 황급히 소리
를 질렀다. 참 내, 아직 태어난지 4년도 안 된 것이 결혼이 뭔 줄은 알려
나? 요즘 애들은 너무 조숙한 것 같다.
"애쉬 이모부. 크리스, 크리스 미워하지 말아요... 난 결혼 할 거란 말
야.."
울먹이면서 말하는 크리스, 으음. 이제사 말문이 트였군. 너, 앞으로 우
리 애쉬 무시하면 안 돼! 에구, 또 달래줘야겠네.
"애쉬, 뭐해요? 이럴땐 애쉬가 나서야 되는 거라구요."
나는 애쉬이 팔을 살짝 치면서 소근거렸다. 이 정도 머리는 돌아가겠지.
잘 달래줘야 할 텐데.
"음, 으음..."
애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말문을 열었다.
"크리스, 이모부는 크리스 안 미워한단다. 오히려 너무 좋은걸."
오옷! 애쉬에게 저런 면이 있을 줄이야. 다정한 모습이 보긴 좋구나. 앞
으로도 계속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요?"
크리스가 환히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런이런, 이제야 표정이 되돌아
오네. 그래야 귀여운 조카답지.
"그럼."
"다행이다."
크리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평소에 찔리는게
많았었나...?
"자자, 그만하고 앉죠. 조금 앉아서 있다 했더니 다시 일어서 있었네요."
왕궁의 주인이자 이 후원의 주인인 루실언니가 모두 앉기를 권했다.
"후후, 애쉬 앉아요. 이런, 땀좀 봐. 도대체 운동을 얼마나 했길래... 여
기 시원한 물."
난 애쉬에게 물잔을 건냈다.
"고맙소."
잔을 들이키는 애쉬. 아, 이럴게 아니지. 이왕 모였는데 하고 싶었던 말
은 해야겠다.
"저, 언니."
"응?"
.. "저기 있지..."
난 뜸을 들이면서 고민했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차피
여자대장부로 태어난 이상,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배야 하는 법.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여 마침내 나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언니, 휴가 언제지? 이제 슬슬 한창 더울 땐데, 아무리 왕이라도 몸은
쉬어 줘야하지 않겠어?"
바로 이거다, 이름하여 '해피 여름나기 대작전!' 언니를 비롯한 왕가 사
람들과 함께 오붓하고 평범한 휴가를 즐기는건 결혼 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일. 그러나 언니가 여왕의 자리에 등극하고 나서 바쁜 업무에 시달
리고, 아이들 출산에. 시부모 공양하랴, 우리들은 엄청 바빴던 것이다.
그 후, 겨우 한숨 돌리고 정신 차려보니 올해. 거기에 나는 둘째까지 가
지게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물론, 시간에 관한 개념이 나에게는 그닥 중
요하게 적용하지 않지만 이번 유희는 나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로는 첫 유
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에. 더구나 어느덧 애
쉬는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고, 루실 언니와 에릭 대공만 하더라도 어
느덧 30이라는 세월의 무게에 영향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이
들어서 어딜 다니겠는가. 몸 한번 움직이려면 피곤하고 힘들다. 그 후의
일도 그렇다. 온몸이 쑤시고, 몸살에 몇주를 끙끙대며 앓아야 하는 처지
가 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젊어서 움직이는게 누이좋고, 매부좋은 것이
다.
"무슨 소리야?"
루실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물었다. 내 말의 속뜻을 안다면
그럴 만도 하지. 세상에 만삭의 몸으로 어딜 다닌다는 것인가.
"응, 그러니까... 아~ 우리 가족이랑, 언니네 가족이랑 같이 어디 잠시
한적한 곳으로 떠나서 여름의 묘미를 맛 보자는 얘기지. 정확히 얘기하자
면 한마디로 놀러가자... 라는 말이라구요~"
나는 머리를 괜시리 배배 꼬면서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린!"
"아린!"
"백작!"
"엄마!"
"이모!"
거의 동시에 모두의 입에서 경악스런 외침이 터져나왔다. 첫번째 외침은
애쉬, 두번째 외침은 루실언니, 또한 세번째 외침은 에릭 대공이었고, 네
번째, 다섯번째 외침은 란이와 크리스였다.
"...음, 목소리가 다들 좋네요."
모두의 외침이 끝나고 한동안의 정적에 쌓인 가운데, 나는 용기있게 입
을 열었다. 음, 용기라기보단 뻔뻔함에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
이다.
"아린, 그게 무슨 소리요!"
"아린,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니?"
"백작, 그대는 만삭의 몸이 아니었던가요?"
"엄마?"
"이모..."
지금, 다들 내 이름을 외치고 있지만 각각의 의미는 다를 것이다. 왜냐!
일단, 애쉬와 루실 언니와 에릭대공은... 이 몸의 안위와 아기를 걱정해
서 그러는 것일 테고, 아직 4살 밖에 되지 않은 꼬마들인 란이와 크리스
는 '놀러간다' 것도 다같이 '놀러간다' 는 말에 혹해서 그러는 것일 거
다. 아무리 란이가 어른스러운 척을 해도, 아직 논리적인 사고를 지니기
에는 어린 나이인 것이다.
"제정신으로, 진심으로 하는 소리랍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언니가 나를 보면서, 것도 반쯤 벌린 입을 부채로 가릴 생각도 못한 채
로 말에 여운을 남겼다.
"오홋, 제가 좋은 장소를 알고 있거든요. 과도한 업무로 인해 오는 스트
레스는 반.드.시. 풀어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거나 죽
을 수도 있다구요!"
"호호, 아린. 비약이... 좀 심한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언니. 이건 실제로 있었고,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일
이며, 미래에도 일어나는 일이라구."
나는 언니를 가볍게 흘기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내 눈빛에 드
래곤 피어를 조금 섞어 봐주었으니 당분간은 암 말 못 할거야. 미안해,
언니. 악의는 없다우.
"아니, 그렇다고 해도 자작은 지금 현재 만삭의 몸입니다. 잘못하면 백작
뿐만 아니라 아기까지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셔야죠."
조용한 언니를 대신해서 에릭 대공이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
었다.
"아린, 당신은... 정말."
애쉬까지 나에게 뭐라 말을 하려던 것 같았지만 끝내 뭐라고 말하진 못했
다. 하긴, 오죽하면 저럴까. 에휴. 미안하긴 한데...
"괜찮아요. 제가 누굽니까. 제 능력이라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답니다.
저의 실력을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거야... 어디까지나 실력아니니. 아린, 네 몸은 두개가 아니라고. 아
무리 능력이 좋아도 건강이 나빠지면 너도 할 말 없잖아."
'음, 그건 그렇... 자, 잠깐! 루실언니, 어떻게 금방 부활(?)한 거야? 분
명히 드래곤 피어를 살짝 섞어서 말했는데. 으음, 역시 강적이었어.'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한나라의 왕 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루실언니는 드래곤 레어앞에 갖다놔도 끄
떡 없을지도 모른다.
"아린. 당신은 지금 만삭이란 말이오, 그 몸으로 지금 어딜 움직이겠다
는 말입니까."
애쉬까지 합세해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럼 어떡해요, 아기가 아름다운 숲과 경치를 다같이 감상하고 싶다는
데."
나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자 다들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럼, 아기가 가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나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와! 그럼 크리스도 가고 싶어요!"
"어, 엄마. 나도요. 동생이 가고 싶다는데 이 형이 안 갈수는 없지 않아
요. 그리고 정말로 예쁜 풍경! 에헤, 란이도 보고 싶단 말예요."
잠시 조용한 틈을 타서 나의 아군들이 기습공격을 가해 주었다. 거기에
더 이상 다그칠 수 없게 된, 우리의 부모들. 애쉬, 그리고 루실언니와 에
릭 대공이었다.
"하긴, 어쩌겠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가고 싶어하는데... 언니, 아니
여왕폐하. 신, 플레이저 백작이 청하오니 즐거운 피서길을 동행하는 것
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평소와 다른, 여왕폐하라는 호칭까지 쓰면서 언니에게 간드러진 목
소리로 부탁을 하자 언니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무언가를 다짐한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아린, 그 곳이란 어디를 말하는 거니?"
'오오, 예스! 아자~ 아자~ 아자~ 후후후, 넘어왔다.'
난 언니의 말을 듣자 이제 드디어 넘어왔다는 생각에 무지 기뻤지만 자고
로 겉과 속이 달라야 큰 일을 하는 법! 난 나의 속을 숨기고, 서서히 입
을 열었다.
"...물 좋고 공기좋은 곳. 한마디로 지상낙원이라 칭할 수 있는 곳."
'그럼, 레어 근처에 내가 아~ 주우 좋은 곳을 봐뒀지.'
난 속으로 쿡쿡 거리면서 금방 기분좋은 얼굴로 바꾼 채,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으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거기에, 란이와 크리스까지 합세해서는 굉장히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고개
를 갸우뚱거리며 내게 물었다. 아, 아이들의 저 표정은 언제 봐도 귀여
운 것 같다.
"무슨 소리긴. 좋은 소리지! 음, 내가 설명을 하자면... 애쉬, 저번에 내
가 말했던 곳 있죠? 그곳이예요. 기억하고 있겠죠."
갑자기 설명하기 귀찮아져서 그냥 애쉬에게 떠넘겼다. 그 방대한 분량의
설명을 언제 다하고 앉아 있겠는가. 혹시 애쉬라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린! 그 곳이라면 거기잖소?"
"네, 맞아요. 바로 그 곳이에요."
우리는 둘만의 대화를 계속 진행해 나갔다. 그런데 그걸 본 주위의 시선
이 썩 좋지만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모두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곳이라니, 도대체 어디야. 아린? 빨리 말해봐. 그래야 결정을 내리
지. 음, 참고로 난 5일 후인 다음주 첫날부터 1주일간 시간을 비울 수 있
어."
언니가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애쉬."
나는 애쉬에게 눈짓하면서 어서 언니에게 보고(?)하라는 무언의 지시를
했다.
"아, 그건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애쉬가 나의 눈공격에 결국 굴복을 했는지, 그는 결국 입은 열리고야 말
았다.
"그래요, 레드포드 자작. 말해 준다면 고맙겠군요."
언니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으음, 그 곳은... 소르드 왕국의 동쪽에서 약간 남하하는 곳에 위치한
다도이 강변입니다."
"다도이 강변?"
"예, 그 곳은 아시다시피 '드래곤의 숲' 과의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곳으
로서, 아직까지 그다지 발달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경치가 매
우 아름답고, 수산물들의 양이 꽤 되는 곳이라 앞으로 계발한다면 꽤나
유명한 관광지가 될 수도 있는 곳입니다만. 한쪽으로는 신께서 내리신 축
복이라 할 수도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쪽으로
는 '드래곤의 숲'과의 경계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다가가길 꺼리는 불행
한 곳. 비록 800년 전 이후로 드래곤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지만,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배척되고 있는 곳이죠. 덕분에 영지 내에 있는 소
수의 사람들만이 쉬쉬하면서 비교적 조용하게 살아왔던 곳이기도 합니
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서서히 변화하려 하고 있지요. 아무래도 드
래곤이라는 존재가 세월에 묻혀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덕분에 요즈음
그 곳에 대한 계발이 추진중입니다. 현재 작위가 낮고 돈이 많은 하급귀
족이나 부호들은 앞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서 투기도 서슴없이 하고 있는
태세입니다. 폐하, 물론 이 정도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장하다~ 애쉬! 장장 5분에 달하는, 숨 한번 쉬지 않고 한번에 뱉어낸 저
저력!
내가 들어도 대단한 것 같다. 어떻게 내가 딱 한번 해주었던 얘기를 토시
하나 빼먹지 않고 똑같이 옮겨 얘기할 수 있는 것일까. 난 분명히 딱 한
번 해주었는데 말이다. 으음, 역시 애쉬도 기억력 좋다는 드래곤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아님, 원래 알고 있었던 건가. 추리를 해보건대,
본 내용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지 몰라도 순서까지 같다는 건 내 말을 외
웠던 게 틀림없다.
'어, 잠깐만. 그럼 내 말을 그렇게 하나하나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는 말
이 되잖아. 이거, 웬지 기분이 좋은데.'
나는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생각이 착각이 아니기
를.
"우훗, 그럼 알고 말고요. 많이 들어봤죠. 저 역시 전부터 꼭 한번 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고요."
언니가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허락하는 거야?"
난 눈을 반짝거리면서 한껏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언니에게
물음을 던져 보았다.
'후후, 거부하지는 못 할걸.'
때마침 언니의 입이 열렸다.
"아, 대신에 조건이 있어. 아린."
"무슨 조건?"
"음, 아린아. 너 갈 때 어떻게 갈거니? 무수한 호위병들과 기사들을 데리
고 갈 생각이니, 아니면..."
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었기 때문이
다. 으으, 언니. 저 고단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면서. 정말 나
의 앞길을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놨군.
"어쩌겠어. 대답은 한 가지지. 무수히... 는 아니지만 얼마만큼의 호위병
들과 동행할 생각이야. 언니도 알잖아. 난 사람 많이 몰리는 거 싫다구.
그리고... 그래, 의사도 데리고 갈거야. 뭐니 해도 난... 지금 홀몸이 아
니니깐. 대신에 실력있는 정예들만 뽑아서 가면 되잖아. 괜히 왕이 행차
하는 사실 알려봐야 좋을 것도 없구. 언니도 거기까지 가서 귀족한테 시
달리는 거 귀찮을 거 아냐."
"음, 그건 그래."
드디어 넘어온 듯한 언니의 말투. 난 기회라는 걸 직감하고 속으로 만세
삼창을 부르짖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렇지, 언니. 그렇죠? 대공전하. 그리고 애쉬."
"아린?"
"뭐라 말해도 소용없어요. 사실이잖아요. 어쩌면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
일 수도 있는 거랍니다. 최고의 여름을... 후회 없는 여름을 보내고 싶
지 않으신 가요."
왠지 광고성 짙은 문구를 내뱉으며 난 그들을 설득했다.
"좋아, 아린. 그럼 내 말에 따라줄 수 있겠지."
"응...?"
언니의 얼굴이 오늘따라 사악하게 보였다.
"내 말이란 즉, 이런 거야. 갈 때 우리들의 신분을 비밀로 하고 그냥 어
느 나라의 중급귀족이라고 칭하는 거야. 그리고, 한적한 변방마을이긴 해
도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는 귀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웬만하면 얼굴
은... 아니다. 만약 고위급의 귀족이라면 변방에 갈 리가 없겠지. 대체
로 작위가 낮은 귀족들이 땅 투기 같은 짓을 많이 하곤 하니까. 이런 문
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고... 일단 호위병들은 최정예들만 엄선해서
동행하자. 숫자는 얕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략 10명 정도면 될 것 같고,
거기에 마법사도 1명 추가하자. 시종들은 한사람 당 한 명씩. 애들은 아
무래도 유모가 필요할테니 유모랑 동행하도록 하고. 아린같은 경우는 의
사가 필요할 테니 의사 2명 정도와 동행하도록 하고. 물론 교통수단은 마
차. 그럼 되겠지?"
신속, 정확. 일목요연하게 요점만 딱딱 간추려서 말을 해주니 속이 다 시
원하다. 이제 궁금증은 풀렸지만 불만이 있다. 최정예 10명이랑, 한 사람
당 시종 하나씩이랑, 그 외에 별도로 붙는 의사 둘. 거기에 말은 안 꺼냈
지만 마차에 당연히 붙는 마부까지 합하면...
최정예 10명 + 마법사 1명 + 애쉬와 나, 란이, 루실언니 부부와 크리스,
이렇게 6명 + 별도로 배정된 시종, 시녀 6명 + 의사 2명 + 사람수가 많
은 관계로 하나의 마차로는 부족할 테니 적어도 마부 2명 = 27명.
27... 비록 루실 언니 측에서는 적게 잡아 말한 거라지만 나에겐 경이로
운 숫자다. 여행가는데 사람이 이렇게까지 필요한가? 비공식적인 왕의 행
차라지만...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구! 거기에 소드 마스터인 애쉬까지 있
는데 이렇게까지 필요한가. 으음~ 시녀들 몇이면 충분한데. 하긴, 애쉬한
테 험한 일 시킬 수는 없으니... 정말 류미르랑 세이몬이랑 같이 여행다
니던 때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식들, 잘 있으려나...
"..."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훗, 아린. 걱정마.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테니... 먼저 말 꺼낸 사람은
너라는 걸 잊지 말아줘. 그럼, 5일 후 떠나는 거다? 5일 후 아침 9시까
지 왕성으로 와줘."
"그래.."
난 그날,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
언니에게 당했다는 분한 생각이 들어 편히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휴우~"
잠자리에서까지 뒤척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였다. 한숨을 내쉬면
서... 그런데 이놈의 밤은 좀 멈춰주면 좋으련만 밤은 점점 깊어져만 가
고 있지 않는가. 으음, 열대야 현상도 아니고 이게 웬 주책인지. 덥지도
않은데, 나도 이제 아줌마 다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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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후, 아침이었다. 오늘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피서를 즐기러 가는
역사적인 날, 나는 매우 두근거리고, 흥분되어서 새벽에 일찍 깨기까지
했다. 이 흥분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아주 오래 전 내가 초등학교에 처
음 입학해서 소풍을 가던 바로 그날 아침의 기분, 그것이었다. 엄마 손
잡고, 맛있는 음식을 싸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었던... 그때와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내가 그 '엄마'란 걸 생각해
보니 두근거리는 마음이 약간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왕궁에서 돌아와서 그 후의 5 일 동안, 나는 관광 코스를 모조
리 정독하고 그 외에 비상시에 대비할 마법 상식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
으 훓어본 뒤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출발 날짜
만을 기다리고 있엇던 것이다. 아마도, 마차와 그외의 용품들은 루실 언
니가 해결해 줄 테니까 우리 가족은 몸이랑 몇 가지 옷만 챙겨서 가면 된
다 이거다. 애쉬는 역시 왕성 근위대에 몸담고 있는 몸이지만 여왕의 동
행인 만큼 비밀리에 휴가를 허락받아 같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
다.
...그런 이유로, 현재 우리는 레드포드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에 앉아
서 왕성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음, 애쉬는 그래도 결혼 후 제대로 맞
는다고 할 수 있는 첫 휴가여서인지 평소의 표정과는 달리 무척이나 부드
러워 보였다. 행복해 보인달까... 아무래도 '가족과 함께' 라는 전제 하
여서 그런 것인지 옛날 '그 존재'를 물리치러 다녔을 때의 포커페이스와
는 자뭇 비교되는 표정. 나랑 결혼하고 나서 꽤 달라진 그였다. 란이와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
게 란이의 말에 대답해 주고 있는 애쉬를 보니 가족이란 이런 거구나 하
는 느낌이 들어 나까지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았다. 하긴, 가족의 일
원인데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또... 아.
'그러고 보니... 뭔가 빠뜨린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잘 기억이 안 난
다. 역시 나는 무늬만 드래곤이었단 말인가...'
나는 잠시 가슴 한구석을 저려오는 무언의 느낌에 왠지 이름모를 허전함
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에이, 별 거 아니겠지."
그래, 별 건 아닐 것이다. 아무렴, 중요한 거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
을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난 혼잣말로 자기암시를 걸며 앞으로 어떻게
즐겁게 놀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 하기로 했다.
"엄마..."
"란아, 왜 그러니?"
갑자기 란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친절한 나는 역시 다정하게 그에 따
른 답변을 해주었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란이는 나에게 꿀밤을 맞아야
했다. 그 내용인즉...
"엄마는 왜 맨날 혼자서 말해요... 혼자서 말하는 건 바보가 하는 짓이라
고 알렌 형이 그러던데..."
"응? 그래, 맞아라."
따닥!
"아얏! 히잉..."
"란아, 엄마 앞에서 그런 말 다시 한번만 더 하면 그땐 더 아프게 맞는단
다.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렴."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 즉시 애쉬의 반격이 이어...
"아린, 애를 때리다니요. 순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너무 심하지 않
소."
"어머, 애쉬이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해도 이렇게 개기는
건 어렸을 때 잡아놔야죠.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해요. '드워프의 천재교
육' 이란 책도 안 읽어 보셨나요? 거기에선 아이는 어렸을 때 바로잡아
야 바르게 자란다고 쓰여 있다고요. 실제 사례도 있고요. 틀린 말 하나
없잖아요. 솔직히, 제가 지금까지 란이에게 말로 얼마나 가르쳤었나요.
엄마에게 버릇없이 굴지 말라고. 아무리 폭력은 좋지 않다지만 때로는 채
찍도 필요한 거예요. 지금 아직 어려서 뭘 모른다면 이 상태에서 더욱더
잡아놔야 나중에 찍소릴 못하죠. 오홋."
"아빠..."
"란이야, 엄마의 말엔 틀린 게 없는 것 같구나. 그래, 앞으로 말 잘 들
을 거지?"
"네."
"그래."
...지려 했으나 나의 화려한 말솜씨에 밀려 그냥 란이를 토닥토닥 다독이
기만 할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린, 몸 상태는 어떤 것 같습니까?"
자식, 나 걱정해 주는 건가? 음, 아니면 뱃속의 아이를? ...둘 다인 것 같다.
"아, 괜찮아요. 주치의가 어제 확인도 했구요, 나 건강하다고요. 이대로
다녀도 끄떡없어요! 후후."
"아, 그런가요? 아린.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길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즉시 말해 주도록 하고 말이오."
"걱정 말아요."
난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마냥 즐겁다는 얼굴표정을 지은 채, 왕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데. 뭐, 여차하면 워프 하면 될 테고... 의사들도 바로 뒤에 따라
오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요~'
"아, 저기 보이는군요. 아린. 자아~ 란아. 왼 쪽 창문 밖의 풍경을 보거
라. 멋있지?"
"우와~"
란이는 감탄을 내질렀다. 역시 언제 봐도 예술인 듯한 장엄한 궁전. 레드
포드 공작가 저택도 무식하게 크지만 역시 왕궁에는 견줄게 못 되었다.
저번에 왔던 길은 서쪽 성문으로서 그쪽도 멋있긴 했지만 높은 언덕에서
보이는 동쪽 성문과는 사뭇 달랐다.
"다 왔네요.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아, 빠르네요. 어서 마차 갈아타고 다도이로 출발했으면 좋겠네요."
우리가 가고 있는 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동쪽 성문 안쪽으로는 몇대
의 마차와 시종, 그리고 평범한 여행자 복장을 한 소수의 최정예 기사들
이 보였다. 그리고...
"엥?"
나의 놀라운 시력.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놀라운
나의 천리안은 곧바로 동쪽 성문 안쪽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인물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엄마, 왜 또 그래..."
"란아, 이제 엄마에게 그런 말투는 쓰지 말라고 했잖니."
내 레이더망에 포착된 인물은 안중에도 없는지 내 옆에서 쓸데없는 대화
를 하고 있는 저 부자. 그래그래, 내가 저러라고 했으니 참아야겠다. 나
는 그 들을 무시하고 마부를 향해 소리질렀다. 정확히 확인해야겠다는 생
각이 들어서...
"폰트, 마차의 속도를 조금 더 높여봐욧!"
"네? 네!"
일정한 속도로 잘 가고 잇는 마차를 왜 빨리 달리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 같았지만 마님인 나의 명령에 군말 없이 복종하는 마부였
다. 훗, 역시 권력이란 좋은 것이여~
아, 제발 아니길... 마음속으로 바라면서 난 내려가는 족족 그 자를 바라
보았다. 그런데...
"!"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비록 먼 거리지만 꽤나 높은 거리지만. 각도 상
으로 본다면 저건 필시 나를 발견한 것이다. 또한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확실한 물증은.
"활짝~"
그 인물은 나를 향해 웃음을 선사했다.
역시 맞는 것 같았다. 아, 내 팔자야.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
는 건지...
어쨌든 10분간의 짧고도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우린 성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성 앞에, 아미 정확히 말하자면 성의 동쪽 임구겸 출구 앞에 말
이다.
"레드포드 자작이다! 물러서도록."
성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은 가문의 마차와 문양을 보더니 군말 없
이 문을 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성 밖
을 나가려면 이 곳을 거쳐야 했으니까 언니가 미리 뀌띰을 해 놓은 것일
테지.
거대한 성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에는 1대의 화려한 마차, 꾸밈없이 소박
해 보이는 4대의 마차와 루실 부부, 크리스... 그 외 시종들과 호위병
들. 그리고...
"..."
나에게 할 말을 잃게 만들어준 한 인물이 서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벙
쪄서 그 인물을 무시한 채 루실언니 쪽으로 걸어가 인사했다.
"언니, 안녕.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카페 게시글
아린이야기 팰디
☆패러디연재☆
<100년의 시간이 흐르고 > 2부 - 제1화-태어난 아이, 그 이름은 페롤린-(2)
루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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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1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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