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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조선일보 일면에 실린 한명숙 총리에 대한 기사는 분명 추측기사를 빙자한 전형적인 왜곡보도이자 과장보도이다. 조선일보 보도는 검찰과 짜고 친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 시나리오의 일환이라고 판단 할 수 밖에 없다. 밝혀야 할 밝혀져야 할 진실은 묻고, 이들은 오로지 정권연장을 위한 시나리오에 광기에 가까운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방법이 없으니까 대안이 보이지 않으니 몸부림 치는 거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여론이 땅에 떨어지고 국면전황용 카드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명숙 총리를 희생양 삼은 것이다.내년 지방자치 선거나, 물 오른 국민참여당의 지지율. 무언가 지워내고 싶었을 거다. 조선일보가 총대를 맨 것이다. 난 조선일보가 스스로 놓은 덫에 걸렸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폭력성은 지난 권위 군사정권의 총칼과 고문, 주먹다짐이 아니라 새로운 폭력이다.
언론과 거짓 홍보 법치를 위장한 통제. 눈에 보이는 주먹다짐없지만 폭력보다 더 나쁜 '신야만시대'라 부르고 싶다.
진실을 알고나니....
-운동권 대학생 유시민 27세-
판사들에게 외친 그의 한마디
" 전@@@의 @들아 백년만년 잘처먹고 살아라 ! "
이젊은 청년의 눈빛은 군사독재에 대한 원망으로 살기가 가득했다
그의 살기어린 눈빛은 386세대 젊은시절 독재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 해주고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유시민曰 "전@@@의 @들아!!!!!!!"
슬픔과 노여움 - 노무현 대통령 연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 헤세의 ‘데미안’ 中 -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진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공기와 같아서 없어져야(후퇴해야) 깨닫는다(충격).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어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달콤한 자유의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한명숙 총리의 살아온 행적한명숙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드는 인상비평이 부잣집 마나님이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이 포근한 얼굴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 사람들을 따뜻한 손으로 잡아 줄 때면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이고 살았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한명숙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소위 말하는 부자로 살아 온 적이 없다. 어려서는 빈민에 가까웠으며 나이 들어 서민으로 살다가 늘그막에 겨우 이사 걱정 없이 집 한 채 지니고 사는 게 재산의 전부다. 하지만 그 집 마저 갚아야할 융자금이 남아 있다. 한명숙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안의 6남매 중 맏딸로 자랐다. 날 때부터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한명숙 부모님은 모두 북한 평양이 고향이다. 아버지는 당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평양의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유복했으며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인해 가족의 윤택한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양시이다. 그 곳에서 나고 다섯 해를 살았다. 하지만 다섯 살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고향에 대한 나의 기억을 유년으로 격리시켜 버리고 말았다. 다섯 살 코흘리개에게 무슨 고향의 추억이 아련할까마는 난 하시라도 내 고향이 평양이라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부모님이 평생토록 가슴에 저미고 살아오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전쟁이 일어나자 몇 달만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믿음으로 값나가는 집안의 전 재산을 고향땅에 묻어 둔 채 변변한 차림도 없이 월남하셨다. 그러나 그 짧은 몇 달은 평생의 한으로 남아 결국 50년이 넘는 세월을 고향을 그리다 끝내 타향에서 망향의 넋이 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분단의 한을 보고 느끼며 자라 온 내가 이후 통일과 평화운동에 참여하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백하거니와 난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까지 현실과 세상물정에 까마득하게 눈먼 청맹과니였다. 나는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는 불문학도였으며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고픈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너무도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적어도 그를 만나기전까지... 꿈만 먹고 살던 순수 몽매한 나에게 한 명의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나의 전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버렸다. 그로 인해 내 인생은 평범한 삶에서 고난에 찬 삶으로, 문학소녀에서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변해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변모시킨 키다리 아저씨. 그가 바로 내 남편 박성준이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생 연합단체였다.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점점 남편의 철학과 삶의 태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미 둘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였다. 당시 군사독재에 저항한다는 것은 개인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며 목숨까지 걸어야할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한 위험한 결정임에도 내가 기꺼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들 것을 결심한 것은 남편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드디어 우리는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남편이갇혀있던 대전교도소는 일제시대에 정치범 수용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서울에서 약 세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남편이 수감되던 그 날부터 출옥하는 그 날까지 (교도소 규정에 따라) 단 한 번의 어김도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남편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 붙여오는 답장을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았다. 비록 교도소의 검열을 거쳐 서로의 생각을 온전하게 전달할 순 없었지만 남편과 나의 옥중서신은 13년 동안 서로의 이상과 사랑을 오롯하게 확인할 수 있는 창구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 이화여대 사감을 지내던 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다 결국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새롭게 직장을 옮긴 곳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나의 인생을 뒤 바꾼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교육과정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등 가난하고 소외 받는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감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다. 그 때 만난 분들은 지식인 여성들과 더불어 한국 진보 여성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6년 동안의 교육은 실질적인 한국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상에 그 어떤 폭력도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폭력은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이며 폭력은 인격에 대한 살상이다. 폭력을 응징하기 위한 폭력조차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고문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때의 두려움으로 손이 떨린다. 나는 정말, 정말, 정말 그 모멸의 순간이 영원히 내 기억에 지워져 고문이라는 범죄를 알기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만 싶다. 나는 아직도 가끔 하나님께 나를 고문했던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아무리 짓이겨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고문의 기억은 여전히 내 상념의 어두운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숨어 있다. 아! 나는 패배했다. 나의 믿음과 나의 각성과 나의 정의감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인간의 믿음은 얼마만큼 우습고 허약한 것인가? 내가 입고 있던 푸른 수의는 처절한 추위를 막아주기에는 너무도 얇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잠시라도 추위를 잊고 싶었지만 시간은 더디 가고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깜빡 자다 소스라치게 깨어나면 매서운 칼바람의 울음이 옥방을 스쳐갔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추위와 싸우다 보면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하얗게 동이 터왔다. 머리맡에 놓아 둔 자리끼는 꽁꽁 얼어붙어 정오의 햇살이 옥창을 넘나들 때 쯤 간신히 녹았다.
내가 남편 박성준을 만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나는 당시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 단체 ‘경제복지회’에서 마르고 껑충한 박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연합 써클의 회장이었고 나는 부회장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숨긴 채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우리의 결합은 동지와 동지의 연대였으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었다. 1967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는 서약과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그야말로 꿀과 같은 신혼생활이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채 익히기도 전에 신혼의 단꿈은 무참하게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1968년 7월. 남편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당시 한국사회에 산재해 있던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위하여 창설되었지만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간자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그 실질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를 다섯 계층으로 나누어 집중적인 중간집단 교육을 실시했다. 나는 당시 여성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집단 여성교육 과정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교육생 보다는 나 스스로였다.
그 무렵 어쩌면 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인지도 모른다.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으며 남편이 출옥될 가능성은 단 1%도 없었고, 서슬 퍼런 독재정권은 살벌한 감시의 눈길을 한시라도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참으로 씩씩하고 용감했다. 어머니가 사다주신 평화시장의 싸구려 티셔츠와 까만 바지를 입고서 거침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누비며 헤집고 다녔다.
나는 매사에 감사했으며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세상을 바르게 살아간다는 자부심과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정의감으로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마지막 발악은 나와 우리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한 순간에 깨트려버렸다.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 말기 결국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동지들은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밤새도록 구타를 당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온 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고 부은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귓전에 울려오는 욍욍거림 속에 나를 고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아스라하게만 들려왔다. 셀 수 없을 만큼 정신을 잃었고 차라리 그 순간이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나를 짓눌렀다.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빨갱이’임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나는 삶에 희망을 잃고 절망했다. 언제 다시 되풀이 될지 모를 고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안으로 안으로만 웅크려들고 있었다. 고문에 굴복한 나의 사라져 버린 정체성이 혐오스러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전의 한명숙은 사라지고 한명숙이 아닌 또 다른 나라는 사람이 지금의 나를 혐오하며 저주하고 있었다.
1979년 11월 13일 그 날의 기온은 영하 13도였다. 내가 구치된 서울구치소에는 난방장치는 물론이며 온기가 퍼질 불씨라곤 단 한군데도 없었다. 정치범인 나는 독방에 구치되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 가질 동료조차 없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나의 가냘픈 몸뚱이를 쩍쩍 갈라터질 듯한 맵고 아픈 추위가 파고들었다.
기어서 배식을 하는 식구통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길고 좁다란 교도소의 복도가 보였다. 그곳은 밖이었고 내 몸뚱이는 여전히 갇혀 있었다. 저만치 교도관이 보였다. 사람, 사람을 보았다. 비로소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눈물이 야윈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고 말 것인가?
그렇게 암울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그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기력을 찾고 자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나를 한없는 절망의 끝 언저리에서 건져 준 것은 여동생 한이숙이 넣어 준 한 권의 책이었다. 그 책은 본훼퍼의 옥중서간집이었다. 디트리히 본훼퍼,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나찌 정권에 대항하다 결국 게슈타포에 붙잡혀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지만 종전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끝내 총살을 당한 실천적인 종교인이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은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본훼퍼의 이 한마디는 나를 천 길 낭떠러지에서 건져 올려주는 동아줄이 되었다. 나의 처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고통을 이겨 내어 결국 승리의 세계를 열어가는 본훼퍼의 글은 너무나 큰 감동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면 다시 읽곤 하였다. 특히 재판을 받으러 나가는 날은 꼭 그 책을 읽고 마음의 무장을 다시 했다.
조금씩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지만 가끔씩 발작처럼 찾아오는 호흡 곤란증과 외로움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겨울은 깊어만 가고 교도소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은 다가왔다.
1979년 12월 24일 성탄전야. 내 인생에 차마 잊혀지지 않는 소중하고 고귀한 성탄전야이다. 성탄이 다가오자 나는 더 외로워졌다. 가족과 동지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잊을 남편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난 그리움이 얼마만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새삼 깨달아야만 했다.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목젖이 울컥거리며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그 때 꿈결처럼 아득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 울림은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난 마치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점점 또렷해지는 소리를 따라 방 옆에 붙어있던 악취 풍기는 변소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옥창의 창살을 부여잡고 세상 밖으로 귀를 내밀었다. “한명숙, 한명숙. 힘내라!”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수인번호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 나, 한명숙을 부르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그 소리는 겨울바람에 실려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며 나의 귓전을 힘차게 울렸다. 동지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동지들의 목소리였다. 동지들은 성탄 새벽, 교도소의 뒷산에 올라 갇혀있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합창했던 것이다.
조금 후 멀리서 옥에 갇힌 우리를 위해 불러주는 동지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성탄의 새벽을 잔잔하게 깨우고 있었다. 나는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답고 강렬한 성탄 메시지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한명숙! 이 이름 석 자에 담긴 동지애가 빛을 잃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좌절해 있던 나를 극적으로 소생시켰다.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옥방의 창살에 매달려 그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탄의 새벽을 맞았다. 나는 그 날 나를 불러 준 동지들의 목소리에서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내 곁으로 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를 짓누르던 외로움과 호흡곤란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교도소 측은 면회를 금지시켜 외부로 부터 일체의 정보를 차단했다. 때문에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교도소 측은 재소자를 방에 가두고 일체의 사역을 금지시켰다. 우리는 그 열흘 동안을 전쟁 비상식량인 건빵 하나만으로 견뎌야 했다. 무료하고 불안한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교도소 운동장에서 요란한 헬기의 굉음이 들려왔다. 작은 옥창을 올려다보던 한 재소자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삐ra다!”
재소자 모두는 일제히 감방 꼭대기에 붙어있던 옥창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럴 수가... 감방의 벽을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한 대의 군용 헬리콥터에서 는 빨간 삐ra가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전쟁이구나! 재소자 모두가 전쟁을 직감했다. 북한군이 아니면 대체 누가 붉은 색 삐ra를 뿌린단 말인가? 광주시민군과 진압군이 대치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재소자들은 교도소 밖의 교전 상황을 전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라를 지키는 국군이 보호의 대상인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감방 안은 전쟁의 불안으로 술렁거렸다.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만약 현 사태가 전쟁이라면 정치범은 제일 먼저 총살되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서의 여성 정치범은 나 혼자였다. 간수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며 방안 식구들에게도 내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난 열흘 내내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에워 싼 감시망 아래 난 철저하게 고립되고 있었다. 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죽음이라는 공포와 이름 모를 열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심리적인 극한 상황에 열병까지 겹쳐지자 고문의 후유증으로 피폐된 나의 건강은 결국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열흘 후 교도소 당국은 소내 방송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발표했다.
광주에서 일부 폭도들의 난동이 있었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잘 해결되었으니 안심하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나는 그 때서야 겨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삶의 의욕이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헬기에서 흩뿌려지던 빨간 삐ra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열흘간의 감방 감금이 끝나고 교도소 운동장으로 나가던 날 나는 그 빨간 삐ra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삐라가 아니었다. 오월 교도소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선혈처럼 빨갛고 고운 진달래와 철쭉의 꽃잎이었다. 성난 헬리콥터 프로펠러의 돌개바람에 옥뜰의 곱디고운 꽃잎의 주검들이 소용돌이 친 것이었다. 오월이 되고 오월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난 파란 오월 하늘에 붉게 흩날리던 그 날의 꽃잎이 광주의 아픔과 함께 되살아난다.
1981년 8월 15일. 나는 광복절에 특사로 석방되었다. 2년 6개월만의 석방이었다. 나를 고문하고 핍박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했던 민주화는 아직 이 땅에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신군부가 더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의 삶을 옭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방의 기쁨과 싸움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허탈감 보다 새롭게 싸워야할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1981년 12월 25일 오후 2시, 남편은 13년의 기나긴 형기를 마감하고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스물일곱 청년의 모습으로 나를 떠났던 남편은 이제 마흔 한 살의 중년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역시 어여쁜 새색시에서 중년을 바라보는 서른일곱의 아낙이 되어있었다.
남편과 나의 늦은 신혼은 다시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 온 행복에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남편은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했다. 감옥에서 보낸 13년 동안의 삶 속에 남편에게 신앙은 크나 큰 삶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나는 여성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 당시 한국 여성운동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6월 18일. 여성연합회회원들은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수 백 개의 빨간 카네이션을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섯다. 우리들 뒤로는 수십 만 명의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수 십 만의 목소리가 함성으로 변해 종로 한 복판을 쩌렁거리며 울렸다.
좌우의 빌딩에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창을 열어 우리의 구호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종로 네거리로 수 천 명의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진입해 오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 난 전경들의 위압에 눌려 시위대는 잠시 술렁거렸다. 눈 감짝할 새 우리 여성연합회 회원들 앞으로 수 천명의 전경들이 열을 맞추어 한발자국씩 다가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우리 여성들은 떨리는 입을 열어 단 세 글자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쏘지 마!” “쏘지 마!”
하지만 우리의 소리는 너무 작았다. 수십만 명의 구호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쏘지 마” “쏘지 마”
그것은 독재와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피 맺힌 절규였다. 우리의 외침이 울음으로 바뀌어 갈 때 쯤 우리의 작은 소리는 점점 메아리를 타고 있었다. 조금씩 거세지던 외침은 끝내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종로 네거리가 “쏘지 마” “쏘지 마” 우레와 같은 절규로 물결치고 있었다.
수 십만이 외치는 함성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한 손에 빨간 카네이션을 들고 한 발씩 전투 경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피곤에 찌들어 무표정한 전경들의 가슴에 한 송이 카네이션을 달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의 고요를 타고 사랑과 용서가 담긴 카네이션 향기는 거기 있는 모두의 가슴에 전율로 와 닿았다. 전투경찰들 역시 평화의 향기에 취해 한동안 최루탄을 쏘지 못했다.
비록 시위대와 전경은 독재정권의 폭정으로 대치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우리의 형제이고 아들이며 살을 부비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의 동포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꽂아 준 카네이션을 멍하게 바라보던 전투경찰의 크고 순진한 눈망울을 기억한다.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용서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노무현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
박근혜씨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인지 너무 편한?생활을 하셔서 저 노래를 모르는 것인지..
이해찬 총리의 살아온 행적 !!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이해찬 총리는 1971년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에 진학,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공학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의 시국상황에 분노를 느끼고 학교를 그만 뒀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청년 이해찬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한창이던 1973년 백기완 함석헌이 김대중 납치 사건 뒤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벌이면서 당시 서울대의 핵심 학생운동을 빨갱이 공작으로 조작하면서 학생운동 지도부 인물들을 잡아들이면서 조작 발표된 민청학련 사건을 통해서였으며, 이에 연계되어 조작된 사건이 지금 사법 살인으로 밝혀진 인혁당 사건이다.
사형을 선고 받는 이해찬의 모습은 실로 당당했다고 한다.
판사 : "피고인 이해찬 사형!"
이해찬: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980년 비상군법회의에서 이해찬 최후 진술
“이 목숨 다바쳐 이 땅이 민주화 될 때까지”
“이 재판이 과연 정당한 재판이냐. 이 군사법정이 혁명 재판부인지 쿠테타 재판부인지를 분명히 밝혀라. 만일 이 재판이 혁명 재판부라면 혁명의 대의명분이 무엇이냐. 수천명의 광주시민을 살상하고 전국에서 수천명의 학생 시민을 구속한 혁명의 명분이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라. 명분이 없는 혁명은 없다. 그것은 바로 권력을 뺏는 쿠테타다.
이 재판이 혁명재판부가 아니라 쿠테타 법정이라면 내란음모를 자행한 것은 여기 이 자리에 오랏줄로 묶여있는 김대중 선생.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고은시인,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한 우리 24명의 동지들이 아니라 전두환일당인 바로 당신들이다.
박정희가 비참한 종말을 고했듯이, 당신들 전두환일당도 10년이 못가 망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남녘땅 광주등지에서 무수한 동포들이 비명에 사라져 갔는데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당신들의 총칼에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원혼이 구만리 청천 하늘을 떠돌고 있는데 내 어찌 편한 잠을 자겠는가.
이 영혼들을 위로하는 길은 이 땅을 민주화하는 것뿐이다. 나는 이 목숨을 다바쳐 이 땅이 민주화 될 때까지 싸워 나가겠다. 전두환일당인 당신들을 붙잡아 이 법정에 세우겠다. 나는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첫 모습이었다.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제적과 복학을 반복했다. 대학에 입학한 지 15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된 것도 다 민주화운동의 결과였다. 그는 1979년 유신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영어의 몸으로 있다. 잠시 출소한 이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관련자로서 이름을 올린 이후,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노동부 장관을 ‘매섭게’ 몰아붙여 사무금융노련 합법화 약속을 받아내고,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편법 예산을 ‘치밀한’ 방법으로 찾아내는 등 두드러진 의정활동을 보여 각종 여론조사에서 의정활동 1위 의원으로 주목받았다.
유시민은 이해찬을 사무사(思無邪)의 정치인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삿되거나 간사한 언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정당화할 수 없는 타협이나 아부를 절대 하지 않는다. 이해찬은 측은지심이 깊은 사람이다. 측은지심은 맹자가 말한 4단 가운데 하나로서 인의 실마리가 되는 본성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어진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해찬은 어진 사람이다.
이해찬 추억의 영상 !!
부엉이의 눈 - 이해찬
후광 김대중 평전/[17장] 고난의 세월, 군사재판 사형선고
9월 11일 제16차 공판에서 검찰관 정기용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지난 한달 동안 재판 과정에서 김대중과 관련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반국가행위 내란음모를 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미 ‘짜여진 각본’은 바뀌지 않았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가족과 피고인들이 “내란은 총칼을 가진 놈들이 했지 우리가 무슨 내란을 했느냐”고 고함쳤다. 이에 검찰관들은 재빨리 법정을 빠져나가고 재판부는 서둘러 폐정을 선언했다.
다음 날부터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있었다. 다음은 몇 사람의 김대중 관련 진술 요지다.
△ 김종완 〓 이미 당신들이 김씨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만 그를 죽이는 것은 역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다.
△ 예춘호 〓 관대한 처분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은 다시 생각해 달라.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를 죽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 문익환 〓 나는 무죄이지만 석방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앞으로 기도를 할 것이다. 첫째 김대중 선생을 위해 기도하겠다. “김대중 선생님을 살려달라”고 벽을 향해 앉아 내 몸이 뜨거워질 때까지 기도하겠다.
△ 이해동 〓 내가 죽지 못하고 수사조서를 시인해 김대중 선생께서 사형 구형까지 당하게 돼 죄송하다.
△ 송기원 〓 내가 공소사실을 시인해 김대중ㆍ고은 선생님께 누를 끼친 점 사과 드린다. 공소장과 논고문은 3류 주간지 소설보다 못하다. 현재 정권은 토지라는 소설에 나오는 임이네와 같은 작태를 보이고 있다.
△ 이해찬 〓 여태까지 살아 있어 죄송하다. 강요에 못이겨 허위사실을 시인한 사람을 사형구형까지 당하도록 한 데 대해 뭐라 할 말이 없다. 현정권은 합법을 가장하여 정적을 살해하려 하고 있다. 조봉암 선생 재판 때와 유사하다.
김대중은 9월 13일 18차 공판 날에 최후진술을 했다. 재판부는 다른 피고인들이 영향받을 것을 우려한 것인지 24명 중 맨 나중으로 배치했다. 최후진술은 1시간 48분 동안 진행되었다.
마치 유언하듯, 비장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어지는 김씨의 최후진술은 법정을 완전히 압도했다.
모니터실의 합수부 사람들도 인간적 감회는 어쩔 수 없었다. 당시 합수부 핵심 관계자의 회고.
“그의 최후진술을 들으면서 왜 사람들이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됐습니다.” (주석 21)
다음은 김대중의 긴 최후진술 중 일부이다.
나는 총 한방 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제일 바랐던 것은 선거였습니다. 나는 비폭력 저항주의자 입니다. 나는 해방 당시 스무 살이었습니다. 해방 후 건국을 한다기에 건준에 가담해서 심부름을 좀 했습니다. 그후 신민당에 가입했으나 좌익임을 알고 46년 여름에 싸우고 나왔습니다. 그 이후 한번도 좌익이라고 기소된 적이 없고, 6.25때는 공산당에 의해 구속됐다가 처형 직전 탈옥했습니다.
한민통 관계는 지금 내 목숨을 앗아가려는 중대한 문제가 돼 있는데 공소내용과 사실이 다릅니다. 나의 해외에서의 활동이 어떻게 기소됐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햇빛도 없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60일 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멀쩡한 사람도 공산주의자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옆방에서 고문 당하는 소리가 들리고 발가벗기고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납치 후 6년의 기간 중 3년은 감옥에 있었고 3년은 연금상태에 있었습니다. 주일 한국대사관의 공사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한민통이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는지 내사를 해보았으나 아니다 (주석 23) 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고, 이것이 일본신문에 크게 보도됐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내란음모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엉뚱하게 몰린 느낌이 있습니다. 내가 10.26 이후 만난 몇 만 명 중에서 데모하라고 종용하거나 정부를 전복하자고 얘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적어도 내란음모를 했다면 어떤 활동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내란음모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국이 나의 형을 집행하려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법의 정의에 합당하며 민주국가로서 옳은 일인가를 심사숙고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는 다른 피고들에 대한 관용을 바랍니다.
지금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합니다. 여기 앉아계신 피고인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김대중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피고인들과 가족 방청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고 이어 흑인영가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했다. 그리고 <김대중 만세>를 외쳤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버린 법정은 어느새 ‘민주화의 광장’이 되었다. 너무나 돌발적인 ‘음악회’와 ‘민주광장’에 놀란 정병들이 가족들을 끌어내고, 피고인들은 다시 수갑이 채워져 구치소로 끌려갔다. 김대중은 다시 남한산성으로 끌려갔다.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신 분!!!
1987년 ‘6월항쟁’은 한 대학생의 어이없는 죽음에서 시작됐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은 1월13일 신림동 하숙집 앞에서 경찰에 불법 연행된 지 11시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그는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밤새 이어진 물고문을 이기지 못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댈 것을 추궁받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스물한 살의 젊은 죽음이었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민통련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2월7일(2·7국민추도대회)과 3월3일(3·3평화대행진)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남대문시장 앞에서 기를 쓰고 소리를 질렀다. 인천을 근거로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동료들과 전철을 타고 남대문으로 향했다. 그는 83년부터 수배 상태였다. 그해 여름을 감색 겨울바지 한 벌로 났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대규모 야외집회를 부담스러워했다. 두 번의 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에 막혀 작게 사그라졌다. 박종철의 주검은 한 줌의 재로 변해 얼어붙은 임진강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민청련) 회원들이 수련회를 나섰다.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선 이가 이해찬 전 총리다. 왼쪽에서 두 번째는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 오른쪽에서 세번째는 성유보 전 방송평가위원장. 서른여섯의 이해찬은 재야 운동권의 살림꾼이자 ‘꾀돌이’였다. 그해 시위 기획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2·7과 3·3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지난 두 번의 집회로 경찰이 움직이는 논리를 알게 됐습니다. 경찰 1개 중대는 160명인데, 3개 중대가 한 팀으로 몰려다니죠. 전체 경찰이 100여 팀이라고 한다면 가용 병력은 4만8천 명입니다.” 그는 이 병력이 서울에 동시에 깔리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지만, 전국 분산 시위로 병력이 2만 명 정도만 된다면 뭔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대 앞의 사회과학 서점 ‘광장서적’을 운영하면서 책 운반용으로 고물 ‘브리샤’ 자동차를 한 대 구입했는데, 그 차를 끌고 서울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경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고물 브리샤는 그해 여름 민주화운동권의 ‘이동 상황실’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민청련 초대의장 김근태는 경주교도소에서 6월10일을 맞았다. 그는 삼민투 배후조종 혐의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그의 머리·가슴·사타구니를 소금물에 적셔 전기로 지졌다. 그는 고문 사실을 부인 인재근을 통해 폭로했고, 양심수의 대명사가 됐다. 그는 옥중에서 동료 재소자들과 바깥 일정에 맞춰 민중의례를 하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구호도 외쳤다. ‘집회와 시위’ 방법은 문짝 두드리기였다. 나중에 그와 함께 옥중 생활을 했던 김영진 현 이기우 의원 보좌관(중앙대 총학생회장 출신)은 “섣불리 지도자로 나서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러 의견을 취합해 가장 현실적인 ‘처방’을 내놓곤 했죠.” 청년 고진화도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공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항쟁의 승리로 양심수들이 석방됐을 때 그는 나가지 못했다.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조직한 노회찬 투쟁의 물결은 지방으로도 이어졌다. 노회찬은 인천 부평역 앞에 있었다. 인천에는 조직화된 넥타이부대나 학생운동 세력이 없었다.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집회는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밤 9시께 시작돼 새벽 2~3시까지 이어졌다. 그가 이끈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창립된 것은 5월18일 부평역 앞 아스팔트 위에서다. 그는 “가로등만 켜진 부평역 앞을 가득 채웠던 그 함성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변호사 천정배는 시국 사건 변호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애초 그의 꿈은 판·검사였지만, “전두환이 주는 임명장은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변호사가 됐고, ‘김&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했다. 사람들은 잡히고, 감옥으로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결국 죽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다. 85년 10월이었다. 2년 남짓 바쁘게 일하던 중 6월항쟁이 터졌다. 이후 시국사건 변호 업무가 줄을 이었다. 87년 대선 때 벌어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을 시작으로 그 뒤 임수경 방북, 문익환 방북, 리영희 방북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 변호를 받았다. 1988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 창립됐고, 창립 멤버가 된다.
이주 노동자 만난 노무현 대통령
flying 이름 없는 묘 ㅡㅜ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황수정 시낭송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따뜻한 눈으로 나를 봐줬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내가 감기로 고생할 때 내 기침소리에 그 사람 하도 가슴 아파해 지금 그 사람,
언젠가 그 사람, 이런 얘길 한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하두 웃어서, 너무 너무 행복해서 인연이 아닐뿐이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 사람 끝까지 나를 생각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탁자에 그렇게 많은 눈물 떨구면서도 고개 한번 안 들고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인연이 아닐 뿐이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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