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계절이 왔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가을날 갈대밭을 찾는다는 건 나의 낭만성을 오랜만에 부풀려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가을 들녁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처럼 나도 여름내 더위로 퍽퍽해진 가슴을 한없이 그 황금벌판에 원없이 뒹굴도록 놓아두고 싶었다. 나는 무엇을 거둘 것인가? 저 들판의 벼들도 온 힘을 다해서 저렇게 익은 벼가 될 수 있는 것인데. 온 힘을 다해서……
한산모시관 관람을 마치고 콜택시를 부르고 3대에 나누어 타서 가게 되었다. 드디어 신성리 갈대밭 입구 도착! 너르게 펼쳐진 논답 위로 오후의 햇살이 살포시 내려 앉아 있다.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보드라운 벼의 물결! 마음이 쿵쾅쿵쾅 거린다. 간간이 농부들의 움직임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의 또 하나의 혜택인 셈이다. 얼마 전 추석 때 내 고향 제주에서부터 난데없이 몰아친 태풍 매미의 엄청난 수해의 고통과 더불어 충격적으로 보도되었던 캐나다 칸둔에서 자살한 농부 고이경해 씨의 죽음도 아프게 떠올랐다. 날로 강팍해져 가는 고단한 농부들의 생활을 이제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걸 보면 이제 나도 좀 철이 드는가.
차량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게 도로를 점령해 버리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것 조차 힘들게 느껴져 논 사이를 경계 짓는 흙길-아주 짧았지만-을 걷자고 철마야! 님이 제안한 덕에 논 사이를 걸으니 정겨워 진다. 붕 ….하고 먼지나는 아스팔트 길을 참고 오르니 갈대밭이다. 건너편으로 금강이. 이 보다 더 멋진 광경을 기대했었나? 제주에서 보았던 오름(기생화산) 사이로 들쑥 날쑥 도로변으로 나있던 억새들의 모습을 상상했나 보다.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으니 신성리 갈대밭과 강은 내가 늘 보고 자랐던 억새와 바다 보다는 훨씬 여성적이란 생각이 든다. 곧고 늘씬하게 하늘로 쭉 뻗어 수많은 갈대들이 사각사각 거리며 나를 유혹한다.
가자 철마야! 님이 입구까지 안내해 주었다. 장승과 팻말로 표시를 해 놓은 입구를 지나 오른 편으로 걷다보니, 금강이 바로 내다 보이는 공간에 평상이 놓여져 있다. 불쌍하게 음침한 구석에 신문지를 깔고 모여 앉아 약간의 간식을 먹었고, 1시간쯤 후에 갈대밭 산책로 입구에 모이기로 하여 제각기 흩어졌다.
난 첫날 밤을 맞는 새색시 마음이 되어 갈대밭 사이를 고요히 걸었다. 생각보다 취해서 걷기엔 길이 짧게 느껴졌고, 앉아서 생각을 할 만한 아늑한 공간이 마련되지 않아 아쉬웠다. 군데 군데 아침고요 수목원처럼 시가 적힌 현판들이 놓였는데, 내겐 좀 거북스러웠다. 그냥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극적일 수 있는 예술 작품을 노파심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려 드는 바람에 느낌이 감해 버렸다고나 할까? 무시하고 걷고 또 걷다보니 갈대향기-바짝 마른 볏단 냄새 같다-가 이런 거였구나 하고 향기가 문뜩 내 코를 간지럽혔다. 사람들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 순간에 바람의 손이 갈대의 현을 타며 스으윽…울려나오는데 그 적막한 갈대숲 사이의 그 소리에….아아… 드디어 탄성이 흘러나왔다. 갈대의 머리 끝으로 슬며시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눈부신 하늘은 갈대 사이사이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아름답다!
금방 꺽일 것만 같이 흔들리는 이 갈대들이 부대끼는 소리는 사랑하는 두 연인간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닮았다. 잠시동안 서서 그 완벽한 조화에 내 몸을 맡긴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였고, 슬며시 그들을 따라 입구를 향해 걸었다. 슬슬 여행 벗들 소식이 궁금해 진다. 조금 가다보니, babylion, 준규님 무리가 긴 갈대 하나를 들고 사진을 찍느라고 귀엽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하며 의자에 앉아 갈대밭과 금강을 배경으로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고 지친 다리를 쉬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만날 시간이 다 되어 입구 쪽으로 가서 보았더니 이미 나머지 무리들은 포장마차에 앉아 한 잔씩을 한 모양이다. 으이쿠! 미워할 수 없는 인간들이야!! 싶어 몇 마디 구박으로 일축하고 우린 택시를 타고 갈대밭을 떠났다.
서천역으로 돌아오는 버스엔 우리 여행객들만이 타게 되었는데 떠나올 때와는 다르게 우리는 굉장히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스피디한 사회 속에서도 인간들은 느리게 더디게 서로에게 길들여질 시간들을 가지고 난 다음에야 서로가 진솔해 질 수 있는 것이란 걸 느끼해 해 주었던 따뜻하고 다정한 버스 안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아쉽게 추억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여행기 부탁드려요.
와~ 시리즈로 계속된 졸리언니의 여행기.... 정말 문학적인 맛이 듬뿍..느껴져여~~^^*
너무나도 재미있는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박준규 올림
지금에서야 꼬리말 달아드리네요...이놈의 귀차니즘은...ㅠㅠ아무튼 너무 잘 읽었습니다....그리고 셤끝나고 선택인가요?그 영화 꼭 보고싶네요....언제나 즐거운 하루되시길...*^^*
졸리 언니... 여행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하네요... 한 편의 좋은 글을 읽은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