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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협의 창립과 항쟁의 태동
6월항쟁은 87년 전두환 정권의 집권 연장기도에 반대해 6월 10일부터 6·29선언까지 이십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5백만 명 이상, 부산에서만 30만 명 이상이 참가한 전 민중적인 투쟁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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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인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송기인, 최성묵, 김희로, 노무현 등 당시 부산의 민주인사들을 총집결해서 지역 재야민주세력의 구심이 되었다. 부민협은 군사정권 타도라는 명확한 목표를 내세운 대중적 정치조직이었고 주로 공개강좌와 시국강연회를 중심으로 하는 홍보활동과 함께 다른 운동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거대한 항쟁을 추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부산민주공원의 차성환 관장을 만나 항쟁의 배경에 대해 들어봤다.
“그해 1월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이 부산 사람이다 보니 이 지역의 분노와 아픔은 더욱 각별했습니다. 게다가 4월 13일에 돌연 호헌조치를 발표하니 전국적인 호헌철폐투쟁과 정권퇴진운동이 전개된 거죠. 이처럼 민중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면서 부산에서는 5월
20일 민부협을 중심으로 종교계, 노동자, 학생, 민주당 등이 모여 전국에서 가장 빨리 '호헌반대 민주언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톨릭센터에서 6월 8일부터 13일까지 광주 민주항쟁 사진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많은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정권의 실체를 깨닫게 했지요."
독재타도의 절규 폭발하다
6월항쟁 기간 부산에서는 연일 가두시위가 계속됐다. 시청과 가톨릭센터가 있는 남포동과 광복동, 충무동과 대청동 중심으로 부산역과 서면을 거쳐 사상과 동래에 이르기까지 부산 전역이 가두시위의 현장이 되었다.
'국민운동 부산본부'는 현장에서 전달되는 시위대와 경찰 병력의 대치 사황을 수시로 접수해 다음 시위 장소를 결정하는 등 항쟁을 주도했고 자체 제작한 <속보>, <민주부산>등 각종 유인물로 항쟁의 의미와 정당성을 알렸다.
10일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날, 부산의 학생들과 민주진영은 대각사로 모이기로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부영극장 앞, 자갈치 시장, 충무동 로터리 등에서 산벌적으로 시위대를 형성했다. 그들은 "호언철폐", "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 라는 구호를 한목소리로 외쳤고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를 불렀다. 경찰들은 시위 군중을 향해 최루탄, 사과탄 등을 부차별 난사했으나 그럴수록 시위대는 격렬한 투석전과 연좌시위로 맞서면서 전경 1개 소대를 무장 해제시킨다거나 파출소와 민정당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명동성당 농성이 지작되었고 인천, 충북, 광주, 전주, 목포, 대구, 마산 등 전국의 광장의 거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민중의 호응은 뜨거웠다.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박수로 응원하거나 폭력 경찰에게 야유 보내기, 쫓기는 시위대 숨겨 주기, 성금과 물품 지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독재투쟁을 지지했다. 그리고 시위가 계속될수록 회사원, 상인, 가정주부, 택시기사, 공장 노동자 등이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이는 사람들에게 군부독재정권의 종말을 확신하게 만들어 주는 모습이 되었다.
“그때 참 엄청났지요. 시위대가 차도를 점거하고 지나가면 육교 위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이 힘내라고 음료수나 돈을 던져 주는 거예요. 경찰에 쫓기다가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상인들이 숨겨주고 가게 셔터를 그냥 내려 버려요. 거기서 민중의 힘을 느낄 수 있었지요.”
가톨릭센터 농성과 서면 광장 시위
한편 명동성당 농성이 외부의 압력과 회유로 아무런 성과 없이 6일 만에 해산되자 부산에서는 다음날 그 열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가톨릭센터 농성을 시작으로 다시 시위의 불길을 키웠고 22일까지 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날 밤의 상황을 본 일본의 NHK뉴스와 신문들은 한국의 시위를 1면 기사로 다뤘다. 아사히신문은 '부산이 행방구처럼 되었다고 썼고 요미우리신문은 '부산 등지에서 최대 규모의 데모가 발생,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당시 외신 기자들은 부산 시위의 특징을 이렇게 분석하기도 했다. 첫째, 한번 시작하면 오래 끈다. 16일부터 19일까지 연 3일 동안 철야 시위, 논수톱 시위를 했다. 둘째, 시민들의 자부심과 관심이 대단하다. 부산과 마산이 움직이면 정국이 바뀐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셋째, 부산 시민들은 직접적이고 행동적이다. 시위를 구경하다가 흥분하면 대학생들보다 더욱 격렬하게 경찰을 공격한다.
부산의 싸움꾼, 박행원
항쟁 기간 내내 거리의 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역사의 순간을 촬영했던 사진가 박행원 씨를 만났다.
박씨는 70년대 후반부터 국제사면위원회 부산지부 활동을 시작으로 부마민주항쟁에 가담했고 5.18민주항쟁 때는 항쟁 상황을 부산에 알리다가 구속된 적도 있으며 유월항쟁 때는 부민협 선전 담당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그는 현재 바다가 보이는 해운대의 한 빌라에서 글 작업과 필름 정리를 하면서 병든 몸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유월항쟁을 단지 6월 크게 데모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틀린 겁니다. 그 배경을 제대로 보자면 전두환 등장부터 봐야 하고 그것을 얘기하자면 박정희, 이승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면 일제의 침략과 동학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 결국 우리 모순의 본질까지 가야 합니다."
30년 투쟁의 삶을 통해 얻은 몸과 마음의 병으로 아직 유월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정리해볼 시간이 없었다는 박씨는 잠시 잠자다가 말을 이어갔다. "항쟁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긴박성의 연속이었어요. 모든 하루가 소홀하지 않고 이쁜 날들이었어요. 환희심으로 가슴 안 졸인 날이 없었고...... . 유월항쟁의 의미는 인간이 다시 직립했다는 거예요. 형상만 인간이었지 소수의 쓰레기 같은 집단들에 의해 우리가 짐승 취급당했잖아요? 부마항쟁 때나 광주 때도 직립을 하려 했으나 계엄군들 군홧발이 하도 세서 꺾여버린 것이죠. 그러나 유월항쟁 때만큼은 우리가 제대로 싸웠고 직립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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