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는 72만 명으로 추산된다. 전체 노인 인구 중 10.2%이니,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환자라는 뜻이다. 치매 환자와 함께 사는 가족은 약 270만 명이다. 꼭 이렇게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니더라도 치매의 심각성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집마다 가까운 친척 중 한두 분은 꼭 치매를 겪는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치매선별검사(MMSE-DS) 가이드북
지금 당장 가족 중에 치매가 없더라도 ‘언젠가 내가 혹은 내 부모가 치매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치매를 겪는 부모님을 모시면서도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나도 늙어서 치매에 걸리면 “주변에 민폐가 되지 않도록” 정든 동네를 떠나 요양기관에서 지내야 할까?
이런 질문들로 가슴이 막막하다면, 아마도 김정헌 극동대학교 교수(작업치료학과)가 가장 좋은 답변자가 될 것이다. 그는 치매 보조기기 효과성 연구를 하는 국내 최초의 학자이다.
국내 선행연구 없고, 조사대상자 소통 어렵고… 연구해야 할까
아름다운재단은 지난 2017년 ‘재가 치매노인 보조기기 지원 시범사업’을 진행했고, 올해부터 규모를 확대해 3년간 저소득 치매가정에게 보조기기를 지원하기로 했다.
정책 연구도 시작했다. 2018년에는 ‘사업 수행을 위한 타당성 기초연구’를 하고, 이어서 2019년에 ‘재가 치매어르신 보조기기 지원 효과성 연구’를 한 뒤,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2020년 정책 제안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한다. 김정헌 교수는 바로 이 연구의 담당자다. 그는 “아름다운재단이 먼저 연구를 제안해서 참 놀랐다.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선진적이고 진보적 이슈”라고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올해 김정헌 교수는 전 세계 웹사이트를 뒤져서 약 175개 품목을 뽑았다. 재단과 함께 사업을 수행하는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와 실제 보급할 기기를 다시 추렸다. 치매 환자마다 필요한 보조기기를 무엇인지 평가하는 양식지도 개발했다. 이 양식지 역시 실무적인 검토를 마친 뒤 이미 현장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보조기기 지원 효과성 검증하기 위한 기초연구를 8월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벌써부터 많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사실 김 교수에게 이번 연구는 여러모로 도전이다. 무엇보다 국내 선행연구가 전혀 없다 보니 외국 자료를 샅샅이 뒤져야 했다. 그는 아름다운재단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산더미 같은 자료를 들고 나타났다. 수백개의 외국 논문 중 주요 논문 출력본이었다. 관련 있는 자료는 모조리 털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생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르신들은 오랜 세월 쌓은 자신만의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외국 문화에 맞는 사례를 그대로 쓸 수가 없어요. 또 유럽은 집 밖에 나가도 길이 복잡하지 않고 어르신들도 동네에 오래 살아서 배회 문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집 바깥이 굉장히 복잡하고 빨라요. 상황이 다른 거죠.
그래서 외국 자료를 찾아본 뒤 국내 전문가들에게 다시 자문을 구해야 하는데 다들 갸우뚱하세요. 각자 자기 분야의 프레임으로만 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결국 치매 전문가에게는 “치매 환자에게 어떤 보조기구가 필요할 것 같냐”고 묻고, 보조기기 전문가에게는 “당사자의 인지적 어려움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어요. 통합적인 자문은 못 구한 거죠. 뭐, 이 정도는 충분히 각오하고 시작한 연구였습니다.”
이뿐이 아니다. 보조기기의 효과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당사자 의견을 듣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치매 보조기기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보다 세심하게 전인적 접근을 해야 한다. 환자나 보호자의 활동에 보조기기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직접 관찰하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실무자와의 협업도 돋보인다. 김정헌 교수는 이번 연구 과정에서 발굴한 아일랜드 치매 보조기기 가이드라인을 번역했다. 80쪽 분량의 책자이다. 자신이 일일이 교육하지 않아도 현장의 실무자들이 직접 자료를 읽고 역량을 키우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새로운 자료는 어찌 보면 연구자로서는 ‘밑천’일 수 있지만, 그는 “실무자들의 역량이 증가해야만 지속 가능한 프로그램이 된다. 이 사업이 정착하면 저는 다른 연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업의 정착과 지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도 “앞으로도 이 연구가 많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그의 솔직한 생각이다. 치매는 결국 시간이 갈수록 기능이 감퇴하는 것이 본질적 특성이다. 반면 보조기기는 활동의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치매 보조기기는 효과를 검증하기가 참 어렵다.
이런 보조기기들이 있다면, 좀더 안심하고 늙을 수 있겠다
이런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연구를 해야 할까? 김정헌 교수는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답했다. 즉, 치매 환자 역시 똑같이 존엄하며 자신만의 감정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삶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생산성에만 가치를 둬요. 아무리 의로운 일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가치 있다고 보지 않죠.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에 투자하는 게 익숙하다 보니 노인, 그 중에서도 치매 노인에게 투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치매를 ‘사회적 부담’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람들의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치매 환자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매 환자들은 우울증에 걸리는 확률이 높고, 특히 시설에 들어가면 우울증도 치매 증상도 급격히 심해진다. 새로운 환경에서 단순한 활동에도 자꾸 실패하면서 일상적으로 좌절하는 것이다. 즉, 치매 환자도 자립과 자존의 욕구가 있고 그것이 좌절될 때 고통스럽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말이다.
’치매라는 병이 원래 그런데 어쩌겠나’ 싶지만, 김정헌 교수가 들려준 다른 나라의 사례는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이미 외국에서는 치매 환자 특성에 맞춘 다양한 보조기기들이 개발됐다. 예를 들면 약통은 “약 드세요”라고 알려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통에서 약이 나온다. 이 보조기기 덕분에 환자들의 약 복용이 늘면서 병원에 가는 횟수가 줄었고 진료비도 낮아졌다는 연구가 눈에 띈다.
또한 문에 달아놓으면 환자가 나가려 할 때마다 “어디 가세요?”라고 묻는 기기도 있다.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하면 불이 자동적으로 켜져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유도한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오늘이 며칠이고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달력도 인기 상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치매 환자의 요양시설 입소를 늦추기 위해 지역사회가 ‘잘 나이 드는 곳(에이징 플레이스, aging place)’으로 활성화됐다. 이런 곳에서는 치매 환자도 혼자 지낼 수 있다. 옛 물건을 그대로 쓸 수 있도록 작업 치료사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요리도 문제없이 해낸다. 평생 몸에 익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들은 이렇게 평생을 살아온 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설혹 신체 기능까지 감퇴하여 시설에 들어가도 삶은 멈추지 않았다. 규정상 시설에서는 치매 환자가 일정 시간 이상 누워있지 못하도록 한다. 휠체어에 앉혀서라도 모시고 나와 사람들과 어울리게 한다. 이런 삶은 병원 침대 밖을 벗어나기 힘든 한국 치매 환자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한국은 이제야 막 연구를 시작한 걸음마 단계이다. 아직 길이 멀고 험하지만, 김정헌 교수는 그래서 더 욕심이 난다. 김 교수는 “지금은 치매 보조기기의 개념과 방향을 다잡는 시기인데, 이를 바탕으로 공학적인 연구를 하고 보조기기를 만들면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실정에 맞는 기능과 디자인의 치매 보조달력 개발을 탐내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에서도 치매 보조기기가 더 많이 연구되고 개발된다면, 더 나아가 치매 환자의 삶을 지켜주는 사회를 구축한다면, 그때는 우리 모두 더 안심하고 늙을 수 있을 것 같다. 치매도 조금은 덜 두려울 것 같다. 그런 사회에서 치매는 분명 지금보다 덜 고통스럽고 더 존엄한 질병일 테니 말이다. 아름다운재단과 김정헌 교수의 연구는 그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