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죽의 <망선대(望仙臺)>
오래 익은 술일수록 그윽하고 깊은 맛이 나는 것처럼 사진도 오래 묵어 낡은 것일수록 소중한 것. 금방 현상소에서 빼낸, 따끈따끈한, 화려한 컬러 사진보다는 누추한 풍경을 담은, 빛바랜, 촌스러운 흑백 사진이 오히려 빛을 발할 때가 많다. 그것은 사진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얽히고설킨 주변 이야기를 사진 속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이야기는 총천연색이 아닌 빛바랜 흑백의 이야기이다. 우리들의 고향 양죽마을, 고향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진하게 느낀다. 그리고 우리가 살았던 고향이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지역의 여러 가지 사료를 참고로 하여 양죽마을의 지명 기행을 떠나보자. 누가 말했던가 아는 만큼 느낀다고.... 오늘은 양죽 마을 동북쪽에 우뚝솟은 <범바위끝>, <망제산>의 <망선대>로 피서를 떠나자.
<망선대>는 <범바위끝>, 즉 <망제산>의 정상이 평평하고 넓고 전망이 무척 뛰어나 예부터 봄이면 부녀자들이 화전놀이를 하던 곳으로 추정한다.
남구문화원 초대원장을 지냈던 김송태 선생은 『울산 지난날의 얼굴』에서 <망선대>에 대한 내용은 울산의 여러 읍지 등 다른 문헌에는 볼 수 없고 오직 송순(宋純)의 <면앙집>에만 실려 있다고 한다.
선생은 매암동 양죽 본동 동북쪽에 동쪽을 향해 바다 속으로 우뚝하게 뻗어 있는 산을 <망제산(望帝山)> 또는 <범바우끝>이라고 하고 그 정상을 <망선대>의 위치로 추정하고 있다.
우선 송순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경상도관찰사, 한성판윤 등 많은 관직을 지낸 정치가이며 면앙정제영 등 한시 505수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그리고 단가(시조) 20여 수 등을 지어 조선의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고 문집으로 면앙집을 남긴 당대의 문장가이기도 했다.
김송태 선생은 앞의 저서에서 <면앙집>에 실린 <망선대>의 기록을 번역하여 두 번이나 소개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다.
좌병병(左兵營)의 남쪽 삼십 리가량 되는 곳에 어떤 대(臺)가 바닷가에 임해 있다. 이곳은 해운대(海雲臺)와 서로 명성을 다툴만하다.
하루는 병사(兵使) 장세호(張世豪) 공(公)과 수사(水使) 봉승종(奉承宗) 공과 함께 울산에서 배를 타고 염포(鹽浦)를 지나니 곧바로 그 대 아래에 도달했다. 이날따라 바람이 적당하고 날씨가 화창하여 대에 올라서 관람하기에 꼭 알맞았다.
그때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대가 아직도 좋은 이름이 없는 것이 흉입니다.”하기에 내가 이를 <망선대>라 이름을 지으니, 뛰어난 편호(扁號)라고 하였다. 장세호 공이 이를 조각하여 병영의 동헌에 달아 두고 오래도록 전하겠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병사와 수사는 물론 각각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말한다.
이 기록에서는 송순이 언제 울산에 왔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명종실록을 보면 장세호가 1551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고 2년 후인 1553년에 경주에서 노략질한 도적들을 잡아내지 못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遞職)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모순되는 것은 경상우도가 분명하다면, 관할권이 경상좌도인 경주의 일로 사간원에서 파직을 청해 결국 체직을 당했다는 것이다. 또 임명을 할 때의 기록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삼았다라고 하고 체직할 때는 단지 경상도 병사라고 통칭한 것도 의문이 든다.
어쨌든 송순은 장세호가 임명된 해와 체직된 해의 중간 해인 1552년에 경북 선산의 도호부사로 임명된다. 그는 개성부유수, 전주부윤, 나주목사 등 지방의 관직도 두루 거쳤으나 선산이 다른 곳들과 비교해 울산과 훨씬 가까운 편이다. 개성, 전주, 나주 등에서 아주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울산을 방문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수사 봉승종에 대해 중종실록과 명종실록에 기록이 있는데, 1547년에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삼았다고 하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장세호가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시기에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따라서 세 사람이 함께 <망선대>에 온 시기는 송순이 선산 도호부사로 임명된 1552년과 장세호가 체직된 1553년 사이로 추정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록에서 병사와 수사가 송순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품계는 오히려 선산 도호부사가 낮기 때문이다.
이 <망선대>를 제목으로 한 송순의 한시가 전해오는데 다음과 같다.
망선대(望仙臺)
三山縹渺滄溟外 十二樓頭繁繫畵船
早晩東風應借我 月明臺上望來仙
太和樓下聯三袂 鹽浦門前放一船
風日淸和天水闊 登臺誰信我非仙
멀리 바다 밖에 삼산이 아득한데
열 두 누대 아래 유람선이 매여 있네.
머잖아 동풍이 내게로 불어오면
달 밝은 대 위에서 오는 신선 맞겠지
태화루 아래서 세 사람이 손 맞잡고
염포 앞바다에 한 척 배를 띄웠네.
맑은 바람 화창한 날씨, 바다도 더 넓은데
망선대 오른 사람들, 누가 우릴 신선 아니라느냐.
*송순은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대가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면앙정가>가 실려 있다.
면앙정 송순은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호남 제일가단(歌團)의 대부, 누정(樓亭)문학의 지존, 송강문학의 본류이기도하다. 송순은 전남 담양군 가곡면(현재 봉산면)의 기촌(企村)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서 김인후, 금호 임형수, 옥계 노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등의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77세에야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선조의 부름을 받았지만 고사하고 14년 동안 면앙정을 오르내리면서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다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을 때는 흰 기운이 지붕에서 하늘에 닿아 무지개와 같았고, 또 붉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 찼다가 흩어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이 영감이 어떤 목적으로 울산에 왔을까? 아마 풍류를 좋아하다보니 전국의 명승을 찾다가 양죽 <망제산>의 빼어난 경치를 동경하여 <망선대>에 올라 한 수 읊조리지 않았나 한다. 하긴 경치가 <해운대>에 버금간다고 하니 두 말할 필요가 없을 듯.....
신선의 풍류를 아는 사람! 그대가 곧 양죽인(楊竹人)이라는 사실을.........
첫댓글 동네에 이런 역사가 또있었네안타깝다 양죽이여
참
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
고향이야기 코너로 이야기를 실은 돛단배가 상큼하게 몰려온다.. 수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화물칸에 거덕하니 싣고서 고향노래를 들려주노나... 그렇다..! 고향송은 자막없는 라이브 한곡이요.. 흑백 필름 휘날리는 구닥다리 활동사진이다... 빛바래 진부하다만 속내 깊숙한 동치미 맛나는 고향의 정이야 비할바 있을랴고...
고향 양죽에 감춰진 옛얘기들이 스르르 소개되는구나... 망제산(望帝山)을 터전삼는 망선대(望仙臺)를 만나게 됨에는...망제산의 돌출된 암벽 그정상이 어떠하였는가를 '망선대'가 나타내 주는구나...고향 지명을 따라 고향나들이에 초대해준 김구한 후배..고마우이... 아늑한 상상의 고향 골짜기를 거닐어 볼까보다...
요즈음 태화교를 건너노라면.. '태화루' 복원공사를 쉬이 접하리라... 옛적 루각이 있던 절벽터가 온전한 까닭으로.. 자문을 구하고 문헌을 들추면 원형비스무리 쯤은 가능타 말다...울산을 뒤흔든 '공업입국'의 깃발아래 사라저버린 명승지급 자연부락의 오늘날과는.. 원형보존 차원에선.. 참으로 격세지감이 교차하는가 싶은 것이다...
옛말에 재주가 뛰어나면 귀신이 샘을내고..미인이 박명타고 떠들지 않는가...주변경관이 너무도 빼어남에 시기의 대상이 될법도 함인지...공업입지의 희생타에 망제산의 위용과 더불어 망선대도 사라짐이더라...直木先伐이요, 甘井先竭이라..(직목선벌, 감정선갈 :곧은 남기 먼저 베어지고..물맛 좋은 샘이 먼저마른다..)...고향 양죽에 딱맞는 말이쟤...ㅉㅉ...
면앙정가를 쓴 조선중기의 시조대가 '송순'... 그가 읊은 '망선대'란 시를 읽노라면.. 오늘의 병영성 위치에서 바라본 삼산뜰 저너머의 망제산을 조율케한다...병영성에서 30리쯤에 동북을 향해 우뚝 돌출된 망제산..그정상에 평평하니 넓따란 고원같은 모임터..누각하나 있음에서'망선대'라 불럿음이구나...
저건너 태화루의 복원공사를 보면서.. 망제산의 운명적 멸실만 아니엇더라도..망선대에 올라 삼산뜰 저너머의 태화루도 보고.. 병영성 저너머의 경주 남산도 볼듯하다만... 공업화의 소용돌이가 헤꾸지 해버린 망제산의 오늘앞에선 한줌 희망가일 뿐이라... 아~ 망제산이여~~ 망선대여~~실향의 합창곡이 목메여 노래부른다...아~~~아~~~
상상의 날개를 따라 노니는 망제산의 풍광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느끼게한다.. 동해 바닷물이 화암등대길의 안내를 받아.. 죽도섬에 기웃더니 장생포를 힐끗하고는.. 되돌아 나오니 염포 뻘밭이 예구나..가지산 저안끝 태화강 발원지를 도는 강물들이 삼산을 거쳐 모여 인사드리니...망제산하(望帝山下)가 예구나...아~아~ 그립구나 .. 망제산상의 망선대여~~
고향이야기 하면서.. 망제산어쩌고 망선대 저쩌고 하다보니..글만 길어지는구먼...그것 생각 대로 다쓸량이면.. 꼬박 몇밤 새울 노릇 되겠고.. 적당히 쓰자꾸나...망제산을 함께할 얘기들은 기회되면 별도로 적어볼까 하오만은...그렇게 함이 옳고말고쟤.. 면앙정가를 휘날리는 송순선생의 시조한수나 감상할까나..후후...
..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송순선생의 시조한수를 없어진 망제산의 망선대에 올라 목놓아 부르노라... 아~자연이여~~고향이여~~ 천연의 때묻지 않던 순수의 고향그시절이 그립구나...
끝맺는 그 손길 한켠으로 수석감 한점이 망선대 되어 나타난다... 범의 형상을 닮은 절벽경 암봉하나..범의 턱부분으로 자연을 노래하는 주름이 가득쿠나.. 세월을 생활한 돌표면에서 고태미가 자욱하다...망선대 상봉을 다듬은 평원경이 또한 일품일세...떠억 균형잡은 자태미에선 지축을 견딜만 함이더라... 그런 수석감 한점을 상상하며...석복(石福)있는 꿈속으로 갑니다요...
새콤하면서도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내음. 고향을 느끼는 냄새와 맛입니다. 형님의 글에서 고향의 정겨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무생물인 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혜안! 아는만큼 느낀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새기며....열정적인 댓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不狂不及'
참 맛있는 글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