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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우학당 원문보기 글쓴이: 한이정(韓 頤井)
대한민국 대통령궁 청와대 풍수 얼마 전 국회의사당 기자회견실에서 야당의 모 인사가 추천한 풍수쟁이(감히 쟁이란 표현을 쓰겠다.) 하나가 나타나서 운하공사를 하게 되면 산맥이 파헤쳐지고 그리하면 국토의 정기가 끊어져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더 나아가 소위 국회의원이란 사람은 풍수검증까지 요구했다는 웃지 못 할 해괴한 사건이 있었다. 풍수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고 우리나라 전통학문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산맥이 끊겨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국토를 동서로 또는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로 인해 수없이 파헤쳐지고 잘려나간 백두대간의 산맥은 이미 갈라지고 찢어져 걸레가 되어 버렸는데 과거에 비해 경제는 더욱 번창하고 국민소득은 높아져만 가고 있으며 또한 일제시대에는 왜놈들이 조선의 정기를 끊겠다고 삼천리 강토의 명산혈에 모조리 쇠말뚝을 박아 민족 말살을 기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방이 되었고 이후로 눈부신 국가발전을 이룩한 것은 어찌된 노릇인가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고속철도 건설로 인해 산맥을 뚫고 생겨난 수많은 터널들과 잘려나간 백두대간이며 곳곳에 신도시 건설로 허물어져 나간 산과 산맥이 무려 몇 개이던가. 이 모든 것들이 국토의 정기를 훼손하여 망국의 길로 가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은 망해도 몇번은 망했어야 한다.
이런 개발의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뿐이랴.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국들 치고 경제부흥을 위해 국토를 훼손하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다. 아니 국토를 훼손하지 않고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 환경문제를 별개 차원으로 놓고 경제발전만을 따져 본다면 자연 훼손을 많이 한 나라일수록 더욱 부강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산맥의 단절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 주장하는 그 풍수쟁이는 먼저 이것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환경보전과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경제발전을 위하여 자연을 훼손해도 좋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운하공사를 찬성하는 쪽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연을 사랑하고 풍수를 좋아하며 전통학문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써 자연의 훼손에 대해서는 질겁할 만큼 반대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환경의 보전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풍수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입장이니만큼 자연에 대한 언급은 차치하고 풍수적 입장만 말하려고 한다. 언제나 주장하는 말이지만 풍수가 좋아서 출세를 하였다느니, 풍수가 나빠서 흉한 일이 일어났다느니 하는 주장은 정말이지 이제 좀 안했으면 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모두 진짠 줄 안다. 이것이 바로 혹세무민이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연과 하나 되어 쾌적한 환경을 만듦으로써 친환경적으로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풍수사상이다. 요즈음 말하는 웰빙(참살이)이 바로 풍수의 원리이다. 그런데 어디 얼치기 풍수(이를 줄여서 '얼풍수'라 한다)들이 제 잘난 체하여 국민들을 대상으로 공포감이나 조성하고 이로 인해 한 몫 잡으려는 속셈에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해대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선무당 같은 작태다. 그것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사당에서 수천만 국민이 지켜보는 백주대야에 그리했다고 하니 지나가는 소가 보고도 웃을 짓거리다. 그러니 내가 풍수에 대한 모독이라 감히 표현 할 수밖에. 풍수란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한 나라의 국운이란 것이 산맥의 정기 하나에 좌우될 만큼 그리 간단히 정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한 개인의 운명도 천지인 삼요소에다 자신이 현재 처한 환경의 제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정지어진다고 보아야 하거늘, 하물며 수천년 역사를 지켜온 일국의 운명이 어찌 그리 산맥의 정기에 쉽게 좌우될 수 있겠는가? 3초만 생각해 보아도 쉬이 알 수 있는 일이거늘 억지는 왜 저리도 부리는지 스스로가 무지몽매한 함량미달 인간이란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풍수공부를 하면서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소위 풍수쟁이들에 대해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으나 오늘의 집필 주제가 그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접어두고 다만 글의 서두를 떼는 의미에서 잠깐 언급해 보았다.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는 까닭은 대한민국 대통령궁인 청와대의 풍수에 대해 논해 보기 위함이다. 세간에서 많은 풍수가들이 청와대는 흉지이며 청와대의 터가 나빠서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가 나쁘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풍수를 주술적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와대는 천하명당이고 대한민국 제일의 복지이다. 조선왕조 왕실의 비극과 역대 대통령들의 비참한 말로는 그들이 스스로 지은 업보에 의한 결과이지 청와대 터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은 결코 인간을 헤치는 악마가 아니다. 자연은 순수하다. 인간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천지만물 모든 생명체를 위해 자연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제공한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지극한 모성애로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보듬어 안아주고 감싸주는 온갖 생명체의 어머니인 것이다. 이처럼 대자대비한 자연이 어찌 하찮은 인간을 시비하여 해하겠는가? 인간의 비극은 스스로가 만든 업보의 소산이라는 것이 오늘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결론이다. 이쯤 했으면 앞으로 전개할 글의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먼저 청와대의 풍수부터 살펴본 다음 청와대가 결코 흉지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 보기로 하겠다. 1. 청와대의 역사 대한민국 대통령궁의 공식명칭은 청와대이다. 푸른 기와집이란 뜻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벗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취임하여 과거 이곳에 있던 경무대의 이름을 따서 "경무대"로 명명하고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하였다. 1960년 4.19혁명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무대에 대한 국민의 인상이 좋지 않다 하여 "청와대"로 개칭한 이래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청와대가 위치한 세종로 1번지 - 종로구청에서는 앞으로 ‘청와대로(靑瓦臺路) 1번지’로 지번을 바꾼다고 한다 - 일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때인 1104년경, 고려의 이궁(離宮)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開京, 개성)과 함께 서경(西京, 평양), 동경(東京, 경주)의 세 곳을 삼경(三京)으로 삼았는데, 숙종 때 동경 대신 이곳에 이궁을 두고 남경(南京)으로 삼았다. 숙종 이후 예종, 인종 때까지 계속 번성했던 이곳은 충렬왕의 삼경제 폐지로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가 본격화 되면서 부터이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3년째인 1394년 새 수도건설을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물색하게 했는데, 고려 숙종 때의 이궁터는 협소해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좀 더 남쪽으로 이동해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다. 태조는 1394년 12월 정도전(鄭道傳)으로 하여금 궁궐 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명하였고, 이듬해 9월에 궁을 완성하니 이것이 바로 경복궁(景福宮)이다. 경복궁이 완성된 뒤 세종 8년인 14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의 후원이 조성되었다. 이때 후원에는 서현정 등 각종 정각, 누각과 함께 연무장(鍊武場)과 과거시험장이 만들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경복궁과 후원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그런 상태로 270년간 방치되었다가 고종 2년인 1865년 대원군이 중건하였다. 이때 광화문, 건춘문, 신무문, 영추문 등 4개의 문이 들어섰다. 고종은 현재 청와대 지역인 신무문 밖 후원을 북원(北苑)이라 이름 짓고 중일각(中日閣), 오운각(五雲閣),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춘안당(春安堂) 등을 세웠으며 또한 이와 함께 건축되어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경무대(景武臺)를 두었는데,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잇게 된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일제는 1910년 10월 남산 왜성대(倭城臺)의 총독부 청사부지가 협소하다 하여 새 총독부 자리로 우리나라의 중심이었던 경복궁내로 부지를 정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정기를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경복궁을 유린하는 한편 1926년에는 총독 관저마저 경복궁 일대에서 물색하다 경복궁보다 지대가 높은 경무대 자리 즉 오늘날의 청와대 구 본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북쪽의 높은 땅에 총독 관저를 지으면 남쪽에 있는 총독부 건물과 함께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완벽하게 눌러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고, 풍수상 용맥(龍脈)에 해당하는 자리를 끊어 보겠다는 속셈과 과거 조선의 관리를 뽑던 과거장을 차지해 버림으로써 우리나라 인재산실의 정기를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는 야욕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총독관저는 7, 8, 9대 총독이 사용했으며, 이것을 종합하여 높은 곳에서 관찰 해 보면 총독관저 건물은 ‘큰 대(大)’자의 모양을, 총독부 청사건물은 ‘날 일(日)’자의 모양을, 서울시청건물은 ‘밑 본(本)’자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세 글자를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이으면 대일본(大日本)이 된다. 일제의 민족말살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국민의 원성을 들어야 했던 경무대(景武臺)에서 청와대로 이름까지 바뀌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어 왔던 구청와대 본관건물은 1989년 7월 22일 새 본관건물의 신축으로 인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수궁터라는 새 이름을 달고 기념비만 서 있다. 수궁터란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守宮)들이 있었던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 현재 대통령이 집무를 하는 청와대 본관은 옛 기맥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북악산 정상으로부터 경복궁과 광화문, 그리고 조산인 관악산을 잇는 축선에 세워져 있다. 규모는 지하1층, 지상2층의 대형 청기와 집으로 건물의 연면적은 1층 1천2백2평, 2층 4백58평, 지하층 4백96평등 총 2천5백64평이다. 지붕을 얹은 청기와는 총 15만장으로 도자기 굽는 방식으로 한 장 한 장 구워내어 단단하기가 백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정도의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본관의 구조는 1층에는 중앙홀, 대회의실, 대식당, 영부인 접견실이 있고, 2층에는 집무실, 접견실, 회의실, 소식당이 마련돼 있으며, 지하층에는 기관실, 전기실, 공조실이 설치돼 있다. 청와대 본관 건물은 대한민국과 정부를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얼굴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전통 목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내부구조는 현대적인 감각과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2층 본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단층의 별채를 배치했으며 우리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 현재 청와대 부지의 총 면적은 76,685평이다.(청와대 경호실 안내원의 설명과 청와대 홈페이지 자료를 요약하여 인용하였음) 2. 청와대의 풍수 청와대 풍수를 보기 전에 먼저 경복궁 풍수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서울은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 땅이다. 조선왕조는 개국과 동시에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당터에 도읍을 선정하였다. 따라서 한양이야말로 조선팔도 최고의 명당 터인 것이다. 특히 경복궁은 한양에서도 최고의 으뜸 혈에 택지시킨 왕궁이므로 이를테면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혈은 바로 경복궁이 되는 셈이고 이는 명당중의 명당이 되는 것이다. 청와대는 이러한 경복궁 터에 기조 하여 자리 잡았기에 청와대 풍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경복궁 풍수를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이다. 한양 명당설의 유래는 고려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도선국사는 개성에 고려왕조의 도읍을 정해 주며 800년 이상 왕조를 지켜 줄 대명당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맑은 날 개성의 형국을 다시 살펴보니 전 날 도읍지를 정할 때 흐린 날씨 탓으로 보이지 않던 한양 땅 삼각산(북한산)의 봉우리가 규봉(窺峰)이 되어 개성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이에 도선은 고려왕조는 400년 밖에 지속할 수 없다고 왕실에 고하였고 그 후 고려왕실에서는 철로 개를 만들어 규봉이 있는 동남방에 배치하고 장명등을 세우는 등 비보책을 강구하였으나 별 효과도 없이 건국 후 474년만에 이씨왕조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풍수적으로 그런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개성에 규봉이 되는 삼각산이 한양 땅에는 대단한 왕기를 불어넣어 주는 명산(名山)이 되는데, 이는 개성 땅의 지기를 훔쳐다가 모조리 한양으로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성의 삼각산 규봉설로 인해 이후 고려시대에는 십팔자 위왕설(十八子 爲王說, 李씨가 왕이 된다는 말)과 함께 이씨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풍수도참설이 횡행하였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도참설에 따라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정한 한양을 왕조의 천년사직을 이끌고 나아갈 도읍지로 정한다. 고려왕조의 왕권을 탈취한 이성계가 건립한 경복궁이니 이로 인하여 이성계는 경복궁터가 왕권을 이어줄 명당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이기도 하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에도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에서 이러쿵 저러쿵 논쟁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시대를 한참 지난 다음에 훗날 술사(術士)들이 조작하여 지어낸 무슨 무슨 비결(秘訣)이니 하는 책들 속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라 하등 믿을 게 못된다. 소위 비결(秘訣) 또는 비록(秘錄)이라 알려져 있는 책들은 위작(僞作)임이 판명된 지 오래다. 각설하고 경복궁의 풍수를 살펴보자면 먼저 경복궁의 주산은 북악산(옛 지명은 백악산)이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한북정맥을 타고 도봉산에 이른 다음 이어 서울의 진산 북한산(삼각산)을 솟구친다. 남으로 내달리는 대간의 정기는 연이어 보현봉을 일으키고 바로 앞에 나지막히 북악을 세우니 이로써 북악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경복궁에 넣어주는 현무봉이 된다.
봉우리의 형상은 목형(木形)으로 물형론에서는 이런 모양을 사람으로 본다. 사람에는 남녀가 있는데 봉우리가 단정하고 부드러운 형상이면 여성으로 보아 옥녀봉이라 하고 약간 삐뚤어지고 거친 형상이면 남자로 보아 장군 또는 신선에 비유한다. 북악은 우측으로 약간 기울어진 모습에 산정(山頂)에 바위가 많아 험상한 형국이므로 남성으로 보아야 하는데 장군보다는 신선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장군대좌형이 되기 위해서는 말과 깃발, 북, 병사, 창검이 도열해야 하는데 북악산 줄기에는 그것들이 부족하다. 북악산은 신선이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춤을 추는 형국이다. 이름하여 취선무수형(醉仙舞袖形)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 그 옛날 정도전도 북악을 신선이 술에 취하여 기쁨에 겨워 춤을 추는 형국으로 보아 궁궐의 이름을 복이 넘쳐 난다는 뜻인 경복궁(景福宮)이라 지었다고 한다.
즉, 시경(詩經) 주아편에 나오는 旣醉以酒(기취이주)/이미 술에 취하고 旣飽以德(기포이덕)/이미 덕에 배부르니 君子萬年(군자만년)/군자 만년에 介爾景福(개이경복)/큰 복을 누리리라 에서 마지막 두글자를 따와 경복(景福)이라 지은 것이다. 동으로 흘러내린 낙산(駱山)의 줄기와 서쪽으로 뻗어내린 인왕산(仁王山)의 줄기는 노래가락 따라 흔들리는 신선의 소매자락이 되고, 남산은 땅바닥에 엎어져 나뒹구는 술병이 된다. 이로써 경복궁터는 형국에서부터 이미 복이 넘쳐흐르는 대명당임이 드러난다. 우측 백호자락인 인왕산(仁王山)은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돌산이다. 울던 아이도 그치는 인왕산 호랑이의 사나운 기세가 그대로 나타난다.
백호는 준거(蹲踞)해야 하거늘 저렇게 사납게 날뛰니 조선왕조 오백년에 당쟁과 외침이 그렇게 많았던가? 인왕산 너머의 무악은 외백호가 되는데 멀리 덕양산과 더불어 서울의 서쪽을 겹겹이 감싸주고 있다.
경복궁의 청룡은 낙산(駱山)자락이다. 그런데 경복궁의 앞마당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낙산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청룡이 약하다는 증거이다. 청룡이 약해서 조선왕조는 적자보다 차자 또는 서자가 대통을 많이 이은 것인가? 이를 비보하고자 조선왕조에서는 낙산자락에 토산(土山)을 조성하여 청룡의 허한 점을 보완하여 놓았다. 청룡자락 너머 중랑구의 용마봉 산줄기는 외청룡이 되어 배봉산, 불암산, 아차산과 함께 서울의 동쪽 외곽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청룡자락이 허하다고 하나 외청룡의 기세가 드높으니 그다지 흉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안산(案山)은 목멱산이라 불러왔던 남산이다. 남산은 둥그런 금체형으로 재물발복을 상징한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도읍지이고 현재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은 전국의 물자가 모여드는 한국경제의 중심지이다. 단연코 재물의 양으로 따진다면 나라 안에서는 최고임이 틀림없다.
조산(朝山)은 관악산이다. 남산타워에서 글로즈업하여 찍은 관악산의 봉우리는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을 한 화형(火形)이다. 저렇게 극심한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궁궐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고, 또한 대원군 시절에는 해태상까지 세웠다고 한다.
경복궁의 명당수는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수하는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경복궁의 내당수가 되며 궁터를 둥글게 감싸 흐르다 동으로 빠지는 서출동류형(西出東流形)이다. 얼마전에 복원공사를 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기에 다시금 경복궁의 명당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젖줄이자 민족의 애환이 서린 한강(漢江)은 경복궁의 외당수가 된다. 한강은 경복궁에서 보면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한강은 동출서류형(東出西流形)이 된다. 한강과 청계천, 즉 외당수와 내당수의 흐름은 서로 반대방향이 되어 역수(逆水)가 된다. 역수형 물줄기가 명당을 만든다. 생기의 흐름이 서로 반대가 되어 강한 지기를 응집하기 때문이다. 대략으로 살펴본 경복궁 풍수형국은 이러하다. 청룡자락이 부실한 점과 백호자락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 외에 나머지 형국들은 모두가 완벽할 정도로 짜여져 있고 주산인 북악을 등지고 청계천과 한강을 바라보는 경복궁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대명당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좌향까지 삼대(三代)를 적선해야 얻을 수 있다는 정남향을 하고 앉았으니 길지 중의 길지요 명당 중의 명당이라 아니할 수 없는 대복지인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에서 최대의 심혈을 기울여 잡아놓은 대명당의 터전 위에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청와대터의 풍수는 고려 때 이궁을 세운 것으로 보아 이미 검증이 되었다. 따라서 청와대 터 역시도 길지 중의 최고길지라 할 수 있겠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해 주듯이 1990년 2월 20일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중에 관저 터 바로 뒤에 있는 바위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로 2m 50cm, 세로1m 20cm 크기에 화강암 암벽을 깎아 만든 해서체의 이 표석은 암벽 전면이 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태로 방치돼 있었는데, 낙관자리에는 연릉 오거(延陵 吳据)라는 글을 쓴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이름까지 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라는 임창순(任昌淳)옹을 초청해 자문을 구했는데 임옹이 내린 결론은 “글이 약 3백∼4백년 전인 조선조 중기 것으로 보이며 글씨체는 중국 청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라 했다며 청와대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다. 물론 표석의 연유라든가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3. 청와대 흉당설에 대한 견해 앞서 살펴본 경복궁 풍수를 토대로 하여 볼 때, 누가 뭐래도 나는 청와대터가 천하복지임을 주장한다. 조선조 시대에 경복궁터를 놓고 설왕설래 했던 말들이야 엉터리 비기(秘記)들에 적힌 말이니만큼 하등 믿을 바가 없으므로 무시 하여도 좋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도 풍수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들이 청와대 흉당설이다. 일제 총독을 지낸 인사들이나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가 비참하였다는 것 등을 이유로 청와대 터는 지기(地氣)가 강하여서 대통령궁터로는 부적합하고 심지어는 그래서 청와대를 이전해야 한다는 말까지 수시로 나오고 있다. 소위 청와대 흉지설을 주장하는 세간의 풍수설들을 모아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가 있다. 이제 이런 말들이나 주장에 대해 하나씩 들추어서 반박을 해 보겠다. 쓸데없는 논쟁은 하고 싶지 않기에 주장한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북악산의 모양이 곧추세운 엄지손가락 모양이라서 산이 저 홀로 “내가 최고야” 하듯이 잘났다고 서 있으니 남의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의 기가 드세다
경복궁 앞마당에서 바라본 북악의 모습은 단정하다기 보다 한 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양은 앞서 밝힌 대로 신선이 술에 취하여 춤을 추는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풍수에서 가장 말이 많고 해석이 분분한 것이 물형론의 형국이다. 같은 모양을 놓고도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갖가지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악산의 모양도 엄지 손가락을 세운 듯 제잘난 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주산의 형국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 곳에 사는 주인의 성품도 그러하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인걸은 지령이므로 산천의 형국이 사람의 성품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풍수가 인품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30%정도에 불과하다. 풍수 한가지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주산의 형상이 괴상하게 생겨도 주인의 인품은 어진 경우가 많이 있다. 조선 최고의 정승이자 검소하며 청백리로 소문난 맹사성 선생의 생가 주산은 설화산이다.
이를 생가에서 보면 보기에 따라서 봉우리가 삐죽하고 삐딱하게 솟은 것이 그리 단정한 모습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맹사성 선생은 조금도 잘난체 하지 않는 겸손하고 어진 성품의 소유자였다. 다음의 일화를 보면 정승 맹사성의 인품을 알 수 있다. 맹사성은 어느 초여름 날 집 근처 연못에 낚시를 하러 나갔다. 물 가운데로 낚시대를 던져 놓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있는데 마침 인근 마을에 전첨지라는 시골 노인이 낚시를 하러 와서 함께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져서는 서로 전첨지, 맹첨지라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이윽고 점심때가 되었다. 원래 서민적이고 소박한 성품의 맹사성은 보리떡을 호박잎에 싸서 점심으로 가져왔는데, 이를 전첨지와 맛있게 나누어 먹고는 해가 질 때까지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질 때 맹사성은 전첨지에게 “17일이 나의 생일이니 차리는 것은 변변찮으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나 나눕시다”라고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생일날이 되자 평소 가난했던 전첨지는 마땅히 선물할 것이 없어 맹첨지가 보리떡을 좋아하는 줄 알고 보리떡 몇 개를 보자기에 싸서 맹사성의 집을 찾았다. 그러자 가난한 시골 노인인 줄 알았던 맹첨지의 집 앞에 고관대작들이 타고 온 말과 가마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으며 온 마을이 동네잔치라도 하는 듯 떠들썩한 것이 아닌가? 잔치가 끝나고 전첨지는 맹첨지가 일국의 정승인것을 몰라보았다며 땅에 엎드려 사죄하였다. 이에 맹사성은 그를 일으키며 “여보게, 전첨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으니 내 비록 정승이라하나 온 백성이 나의 친구요, 모든 나라 물건이 다 같이 가질 수 있는 것이어늘 윗자리에 있다고 하여 권세를 부리고, 아랫사람이라 하여 그 권세 앞에 굴하는 것은 나라 다스리는 근본이 아니니 그대 비록 촌로일망정 우리나라의 죄 없는 소박한 백성이 아니겠오. 그런 소리 말고 이후로 자주 만나 낚시질 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평생을 두고 친구로 지내시게나.”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도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며 정승의 신분을 감추고 겸손하였던 맹사성의 생가 설화산도 생김새에 있어서는 북악 못지않게 삐딱하며 단정하지 못하다. 여기에 비하면 북악은 오히려 단정한 모습이다. 청와대에 사는 사람은 일국의 대통령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아무에게나 고개 숙이고 몸을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군사정권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은 자존심이 지나쳐 조금은 오만하였다고 치자. 그러나 모든 대통령이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일국의 수반으로써 그 정도 자존심마저 없다면 차라리 대통령의 자질이 부족하다 할 것이다. 더구나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29선언의 노태우 대통령이나 그 밖의 대통령들은 그리 못 봐 줄 정도로 오만하지도 않았으며, 혹은 물소리를 들을 정도로 물렁한 대통령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북악산의 형세 때문에 대통령이 오만하고 고집불통이었다는 주장은 쉬 납득이 가지 않는다. -북악산에 바위가 많아 살기를 내뿜고 있고, 터를 주산에 너무 가깝게 잡아 험한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므로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 명혈은 주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형성된다. 금낭경에 현무수두(玄武垂頭)라는 말이 있다. 이는 혈처(穴處)의 주산인 현무봉은 머리를 길게 들이밀어 혈장을 받아들이는 형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과일나무의 가지 끝에 과일이 달리듯이 명혈도 주맥에서 멀리 떨어진 평탄한 곳에 맺힌다는 풍수언도 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계수즉지(界水則止)라 하여 산줄기 따라 물은 흐르고 물은 산을 경계하니 용맥을 타고 흐르는 땅 속의 생기(生氣)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는 뜻이다. 이렇게 생기가 멈추어 응집된 곳이라면 어디에나 혈은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주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명혈(名穴)이 맺힌다는 논리보다 계수즉지의 원리가 더 높고 앞서는 원칙이기에 산의 중턱에도 물이 흐른다면 혈은 맺힌다고 보는 것이 풍수원리상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 천년을 넘기도록 번창하고 있는 명산대찰을 보라 모두가 산자락을 끼고 산의 중턱이나 또는 산꼭대기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삼보대찰인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대명찰에 속하는 영주의 부석사도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더욱이 오대관음기도도량에 속하는 남해의 보리암과 설악산의 봉정암은 산꼭대기 바로 밑에 자리하여도 그 오랜 세월동안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오히려 세월 따라 더욱 번창해만 간다. 혹 절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들기에 산기운을 누를 수 있어 그렇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어떤가. 청와대야말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그것도 기가 가장 센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아무려면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에 모여드는 신도(信徒)의 수가 많을까, 청와대에 출입하는 사람의 수가 많을까? 청와대에 근무하는 비서실과 경호실의 근무요원숫자만 하여도 세 개의 사찰을 합한 스님들의 수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청와대를 경비하는 군인들 숫자만 하여도 일개 여단규모는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루도 빼지 않고 지기를 누르고 있는데 어찌 청와대 터의 기가 강해서 흉지라 말할 수 있겠는가? -청와대 터는 산 사람의 터가 아니라 귀신의 터다.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의 말이다. 풍수를 한 달만 공부했다면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귀신의 터란 음기가 강한 곳을 말한다. 산 사람은 양이고 죽은 사람은 음이어서 나온 말이다. 음기가 강한 터라 함은 깊은 산속 계곡처럼 햇빛이 잘 들지 않고 습기가 많아 어두운 곳이나 또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 지기가 매우 강하여 소위 무당들이 굿을 하기 좋은 곳을 말한다. 여기서 청와대 터가 귀신의 터라고 하는 것은 지지가 강하여 무당 굿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도 수긍하기 곤란하다. 지기가 강하려면 혈처의 바로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야 된다. 청와대는 조선제일의 명당이라는 경복궁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다. 북악산 아래 정남향으로 배치되어 햇빛이 잘 드는 양지인데다 북악산의 바위는 청와대에서 한참 올라간 산 중턱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곳은 양기가 강한 산사람의 집터로써 좋은 땅이라 할 것이며 음기가 강한 귀신의 터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청아대 본관 앞에서 안산인 남산쪽을 바라다보면 앞이 시원스레 열려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곳으로 양기가 강한 터임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역대 총독들의 불행: 1939년 처음에 그 터를 잡은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종전 후 전범으로 몰려 복역 중 병사했고, 8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등 역대 총독들도 정적에 의해 제거되거나 징역을 사는 등 말로가 비참했다. 남의 나라를 침탈하여 갖은 만행을 저지른 원흉이자 주범격인 조선 총독들의 말로가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칙에 의해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더구나 일본은 대동아전쟁의 패전국이다. 패전국의 전범들이 승전국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역사의 당연지사이거늘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조선총독들의 말로가 비참했던 것이 어찌 청와대 풍수가 나쁜 탓이란 말인가. 차라리 일본 황궁의 풍수를 따져보아야 할 일이지, 청와대 풍수 탓은 어불성설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말년에 청와대에서 쫓겨나 해외에서 객사했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부하의 총에 맞아 숨지고, 이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재임시절의 비리로 인해 수감되는 초유의 사태를 빚었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은 ‘IMF 신탁통치’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초래한 책임자라는 오명과 함께 차남이 구속되는 치욕적인 사건을 겪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청와대 풍수의 흉지설보다는 인과응보의 원리로 보아야 더 정확하다 하겠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왕조 어느 나라건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살해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32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프랑스의 나폴에옹 황제는 52세에 귀양가서 죽었다. 로마의 시이저도 그의 부하 부루투스에게 살해당했으며,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도 49세의 나이에 신하로부터 독살 당했고, 미국의 케네기 대통령과 링컨 대통령도 암살당했다. 또한 2차 대전의 주범인 독재자 히틀러는 권총자살하였고, 국민에게 쫓겨 국외로 도망갔던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와 그의 부인 이멜다의 비참한 말로도 그들의 악업에 따른 업보이지 그들이 살던 궁궐의 풍수 탓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세상에 번창했던 수많은 왕조 중에서 도대체 어느 왕조가 개국에서 멸망까지 비극 없이 온전했으며, 궁궐의 풍수가 좋아 영원무궁토록 번창했단 말인가? 청와대의 풍수가 나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면 위에서 열거한 모든 통치자들도 모두 궁궐의 풍수가 나빠 그리되었다는 말인가? 백악관의 풍수가 나빠 케네디 대통령이나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것이라면 지금 이 시대 세계를 주무르는 미국의 힘은 백악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의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말로도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의 결과이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악업을 지었던가. 모두가 인과응보이지 풍수를 탓할 일은 아니다. 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의 비극은 청와대에서 물러나 각각의 자택에 머물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물론 원인이야 재임시에 있었던 업으로 인해 빚어졌지만 어쨌든 청와대 안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모두가 무사하였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복지가 아닌가. 차라리 전직대통령들의 비극을 풍수로 탓하려면 청와대보다 자택의 풍수를 탓해야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복궁은 조선왕조를 5백년이나 지켜주었다. 유사 이래 5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왕조는 그리 많지 않다. 경복궁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민족의 영도자도 나왔다. 임진왜란 때에는 7년간이나 왜놈들에게 삼천리 강토를 짓밟혔지만 이순신 장군 같은 성웅이 나타나 나라를 구제하지 않았는가? 어느 왕조나 겪게 되는 국난을 조선왕조도 겪었지만 나라만은 온전히 보전하였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도 한 때는 탄핵의 위기를 맞았으나 결국은 구제되어 임기 마칠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다. 청와대 터가 흉지라면 벌써 탄핵되어 하야되어야 했다. 청와대 터의 영험으로 인해 탄핵을 모면했다면 억지라 할까. 하여간에 지면상 길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이정도만으로도 역대 통치자들의 비극이 청와대 풍수 탓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청와대는 옮겨야 한다 도대체 청와대를 어디로 옮기란 말인가. 태조 이성계가 삼천리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지고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당이라고 판단한 자리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조성하였다. 이보다 더 좋은 명당 터가 대한민국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감록에 운운하는 계룡산 도읍지는 이미 경복궁을 짓기도 전에 하륜의 주장으로 흉지임이 판명되어 공사를 하다가 중단하였다. 파주 교하 땅은 광해군 때 이미 검토되었으나 도읍지로 부적격하다고 판정 받은 지 오래다. 또 그 밖에 북악산 자락을 빼고 여기보다 더 좋은 대통령궁 자리가 어디란 말인가. 한 나라의 수도는 통치 원리상 국토의 중앙에 자리 잡아야 한다. 도선국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토의 변방인 경주에 수도를 계속 두었기에 통치력이 누수되어 망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개성에 도읍을 정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지금의 서울은 대한민국 국토의 중앙에 있다. 괜히 남쪽으로 옮겼다가 남북통일이 되고 나면 북쪽 땅의 통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요즈음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 대단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통치능률에 있어서 분명히 비효율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더구나 풍수를 탓하여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는 것은 첨단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문명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게다가 현재의 청와대만한 명당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라!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 골프, 마라톤, 월드컵 4강의 축구 등 스포츠 강국,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보릿고개를 넘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민족의 쾌거는 세계가 성장모델로 삼아 배우러 오기까지 한다. 반도체 분야 세계1위, 조선업 세계1위, 학구열 세계 1위, 단시일의 경제성장,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인터넷 가입과 휴대전화 소지율 세계 1위인 통신강국,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기업군들과 한류열풍, 현직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 노벨 평화상 수상국, 그 밖에도 국토는 조그만 나라에서 국가적 자랑거리가 수없이도 많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대충으로만 열거해 보아도 대한민국은 분명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우리 국민이 지닌 저력으로 볼 때 국가의 발전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렇게 잘 나가는 나라가 세계에 그리 흔하던가. 무엇으로 풍수가 나빠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는 것인지 반문해 보고 싶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에나 희비가 교차하기 마련이다. 어찌 허구헌날 좋은 일만 생기겠는가? 완벽하게 행복한 일들만 존재하는 개인의 인생이나 나라의 역사가 있더란 말인가? 한 마디로 이만하면 좋은 게 아닌가? 뭘 얼마나 더 바란단 말인가? 청와대 옮기면 이보다 더 잘 될 수가 있다는 것인지. 그리해서 혹 나쁜 일이 또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청와대를 또 옮겨야 한다는 것인지. 아서라 그래서 혹시 풍수 동티라도 나면 그 땐 무엇을 탓할 것인가. 4, 청와대 풍수에 대한 소견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풍수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받아들인다. 땅은 그저 무대일 뿐이다.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각본일 터이고 그 위에서 일을 꾸려 나가는 사람은 배우이다. 무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무대가 좋은 것이라고 해서 엉터리 배우들이 비윤리적 각본을 가지고 공연을 한들 좋은 연극이 될 까닭이 없다. 반대로 훌륭한 배우들이 인간적인 각본을 가지고 연기를 한다면 비록 무대의 품격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을 연극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자고로 지리(地理)는 인사(人事)와 같다고 했다. 땅을 사람 대하듯 하면, 땅으로 인한 문제는 대부분 해결 가능하다. 뭘 바라기 전에, 먼저 사람 대하듯 땅에 정을 주어라. 땅 탓만 하지 말라. 당신이 집이나 그 터를 싫어하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은 땅의 역할보다 거기에 살아가는 사람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이며, 인간사의 논리에 맞추어 땅의 논리를 안다면 어느 곳이든 문제 있는 땅은 없다는 말이다. 또 ‘청와대 풍수논쟁’이란 책을 쓴 최세창씨는 청와대 흉당설에 대해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풍수가 미신이다 뭐다 하면서 냉대를 받고 있는 판에, 아무런 논리적 근거나 대안도 없는 이와 같은 황당한 이야기는 한낱 흥밋거리가 되기에 알맞다. 이와 같은 현실은 풍수를 사랑하는 강호의 학자로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야 할 때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제는 소모적인 논쟁을 중지하고 보다 실용적인 풍수이론의 개발에 나서야 할 때다.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묘지풍수에서 벗어나 환경이나 건축 도시개발 등의 실생활에 풍수를 응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실용화단계를 넘어서 산업화단계에 이르렀다. 하루 빨리 묘지풍수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풍수의 발전 추세에서 낙오가 되고 말 것이다.” 풍수를 미신적으로 해석하는 얼풍수 반풍수들을 경계하는 말이다. 풍수언에 ‘살아서 적선적덕(積善積德)하면 시신(屍身)을 개골창에 묻어도 발복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가 만든다는 뜻이다. 풍수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다. 물론 자연의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땅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풍수의 주술적 맹신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청와대를 거쳐간 통치자들의 말로는 그들 스스로가 저지른 업보의 결과이지 풍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 점은 비단 청와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땅 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이다. 5. 청와대 구경하기 아름다운 정원 녹지원
청와대는 풍수적으로 명당길지에 자리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궁답게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각종 야외행사가 치러지는 녹지원(綠芝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고, 일제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 1968년 에 약 1,000여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 5월 28일에는 인근 주민 약 3,000여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한 곳이다.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150여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 정도이다. 영빈관
대규모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청와대의 연회장인 영빈관은 1978년 1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준공이 되었다. 이 곳 영빈관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규모이다. 특히 전면에 받치고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으며, 높이가 13m에 둘레가 3m인 거대한 규모로 전라북도 익산에서 이음새가 없이 한 개의 돌로 만들어 가져왔다는 것이 청와대 경호실 안내원의 설명이다. 영빈관의 내부는 무궁화, 월계수, 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되거나 100명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무궁화동산
무궁화동산은 1993년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후 청와대를 국민과 더불어 살아 숨쉬는 곳으로 만들고자 안가(안전 가옥)를 헐어 내고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청와대 개방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쉬어 가고 있으며 특히 인근 주민들에게는 편안한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공원 내에는 많은 꽃들과 나무들이 있으며 무궁화 동산의 이름에 걸맞게 무궁화꽃이 많이 있다.
무궁화동산 맞은편에는 분수대가 있으며 분수대 중앙에는 봉황상이 있고, 사면에도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청와대를 찾는 관광객들이 배경삼아 기념 촬영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청와대 홈페이지 자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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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풍수란 극단적 개념으로 볼것이 아니요 조화의개념입니다. 청와대의 터가 좋다 안좋다하는것은 그 풍수가의 이론이므로, 맞다 틀리다하는것을 두부 칼 자르듯이 단정할수야 없겠지요..중요한것은 근현대사를 거쳐서 역대 대통령의 최후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면 자명하게 나옵니다. 동일한 에너지로서 더좋은 역량을 발휘할수도 있는데 굳이 안좋은 터에서 억지로 좋다라고 억지를 부릴 이유까지야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한국의 산맥과 바다 강을 경제개발시대에 저토록 처참히 파헤치치 않았더라면 ...국민소득은 아마 4만불은 넘을것이고 살인 강도 납치등 범죄또한 아주 적을것입니다. 이처럼 풍수란 보는관점에따라서 너무나도 다른것이니... 중요한건 실제적 검증이 이루어진 터를 기준으로 판단하는것이 옳지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나와의 주장이 조금 다르다고해서 다른쪽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수고하세요...
학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것은 다른쪽의 의견은 틀린것이고 나의 학문만이 오로지 유일하게 옿은 것이다하는 것입니다.학문에도 정과 부는 있으나 정과 부는 다시합하여 개선된 논리 정 과 합을 다시 만들어갑니다. 나의 논리와 마음을 깨부수어야 또다른 참된 이론을 하나 더 발견할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다음에 만나서 검증된 내용으로 의견교환을 했으면 합니다..어떨지 모르겠네요..혹시 나의 의견이 조금 과격했다면 혜량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지금 님의 얘기를 하시고 계시는듯 하네요.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