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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선생의 시조이야기
청익회 동기생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문태일입니다.
지난해 4월에 앞으로 동기생 자주 방문도 하고 글도 쓴다고 해놓고 지금까지 그냥 방문만 했습니다. 오늘 카페지기 서일수 동기생의 다음카페 시스템 변경 안내를 보고 글을 하나 올림니다.
이 글은 제가 작년에 서울문화유산해설사가 되어 해설을 하고 있는 코스 중에 최순우옛집․길상사코스가 있는데 방문지는 최순우가옥과 서울성곽, 선잠단지, 길상사, 이재준가옥, 한용운 가옥인 심우장 그리고 이태준가옥이며,
이 코스에서 소개되는 근대인물 이태준, 최순우, 백석시인, 법정스님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이 바로 한용운 선생이며 그래서 이분의 시조를 주제로 글을 한번 썼습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신 독립투사였는가 하면, 평생을 통해 불교를 신앙하면서 시와 소설을 쓰신 문학가이십니다.
이분의 저서는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 88편을 비롯하여 “시조(時調)”, “한시(漢詩)” 등 3백 여 편에 이르며,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 “후회(後悔)” 등 5편에 이르고,
불교 관련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을 위시하여 다수의 불교논문, 번역지, 기행문 등이 있습니다.
또 이분은 한때 중국과 일본 등지의 해외여행을 통해 개화된 서구문명을 익혔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 서양에 관한 서적을 통하여 근대적 지식도 갖추었으며,
불교 경전의 대중화를 위해 통도사에서 보통사람은 평생을 읽어도 다 못 읽을 6,802권이 나 되는 팔만대장경을 독파했으며,
그 가운데 1,000권을 선정하고 내용 중에 주제별로 중요한 구절을 가려내어 재편집을 하여 국한문 혼용으로 800쪽이 넘는 “불교대전”을 집필하는 등 불교이론에도 해박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한용운 선생의 문학작품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이분의 불교개혁사상이나 구국투쟁정신을 먼저 폭넓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분의 작품에 나타난 ‘님’의 정체가 무엇이고 하는 등 겉핥기 수준에서 맴돌 가능성이 큼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분을 한국 근대문학 출발기에 거성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래서 이분의 작품 중에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 88편과 “흑풍” 등 소설 그리고 “한시”에 대하여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표현이 뛰어난 작품들은 이미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좀 덜 알려졌다고 생각되는 시조를 몇개 소개합니다.
시조란 한국 고유의 정형시를 말하며, 3장(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성되고 그 형식에 따라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연시조로 구분되며, 45자 내외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한용운 선생의 시조 작품은 그의 전집에 실린 32수와 그밖에도 “불교”라는 잡지 표지에 실린 작품 등 여러 수가 더 있다고 합니다.
이 분의 시조를 읽다보면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독립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 보이며,
궁핍한 생활상을 묘사한 시조도 눈에 띄고, 또 정서적이고 지적인 삶을 묘사한 시조도 보입니다.
그래서 이분의 시조를 영역별로 몇 작품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제목이 없는 시조 한수를 소개하면,
이순신 사공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북마 하여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 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에 등장하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찌르신 명장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며,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역시 고구려의 명장으로 수나라군이 쳐들어 왔을 때 살수대첩으로 물리친 분입니다.
파사검(破邪剣)의 파사란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한 생각을 깨뜨린다는 뜻이며 파사검이란 사악함을 물리치는 검을 말한다.
이 시조를 읽어보면 모를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의 두 명장들과 함께 남쪽에서 배를 타고 북쪽에서 말을 타고 나라를 구했으면 하는 바램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용운 선생의 독립투쟁과정을 살펴보면 왜 이순신 장군과 을지문덕 장군 같은 애국심이 투철한 지도자를 애타게 원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최남선이 3․1운동에는 가담치 않고 선언서만 작성하겠다는 나약한 행동을 보이는데 실망하고,
또 3․1운동 후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 33인의 민족대표들에게 모두가 역경을 이겨내며 옥중에서도 독립투쟁을 지속하자면서,
3원칙 ①변호사를 대지 말 것 ②사식(私食)을 넣지 말 것 ③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을 끝까지 지키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결수로 있는 동안 일제의 협박에 일부 민족대표들은 벌벌 떨고 있거나, 극형에 처한다는 헛소문을 듣고 대성통곡하는 인사도 나타났다.
이분은 공포에 떨고 있는 몇몇 인사에게 똥통에서 인분을 집어다 우는 얼굴에 퍼부으며 질책을 하면서,
민족대표라고 도장을 찍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거나 비겁한 행동을 하면 당신을 따르는 민중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하며 크게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 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저항과 투쟁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분은 일제와 한 치의 타협함이 없이 형무소에서 장기간 외롭게 옥중투쟁을 하면서,
이순신장군과 을지문덕장군과 같이 제대로 된 민족지도자가 나타났으면 하는
간절했던 바람을 이 시조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다음은 “남아(男兒)”라는 제목의 시조를 한수 소개합니다.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 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덥고 칼을 살까
아마도 칼 차고 글 읽는 것이 대장부인가 하노라
이 시조를 읽으면 삼일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로서 투철한 역사 인식에 기반을 둔 한용운 선생의 인생철학과 신념이 느껴지며,
확고한 인생관에서 나오는 지식인의 선각자적인 긍지와 교시의 목소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께서 하신 말씀 “스스로 상당한 가치를 낼 수 없어 남의 도움을 기다린다면 이것은 생존의 권한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는 것이니, 죽으려면 몰라도 살려면, 어떠한 천대와 멸시라도 다 달게 받아야 한다.”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다음은 궁핍한 생활을 묘사한 “직업부인”과 표아(漂娥)”라는 제목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첫새벽 굽은 길을 곧게 가는 저 마누라
공장 인심 어떻던고 후하던가 박하던가
말없이 손만 젓고 더욱 빨리 가더라
맑은 물 흰 돌 위에 비단 빠는 저 아씨야
그대 치마 무명이요 그대 수건 삼베로다
묻노니 그 비단은 뉘를 위해 빠는가
이 시조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공장에 다니는 직업부인이 아침 새벽에 일하러 가는 부인의 모습과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형무소의 어둡고 좁은 독방 마룻바닥에서 추위와 더위에 장기간 시달렸던 처절한 고통에 대한 기억과,
출옥 후에도 호적이 없는 무적자로 배급도 받지 못하고 부인은 삯바느질을 하고 자신은 병고와 추위에 시달렸던 경험을 거울삼아,
나라 잃은 서민들의 어렵고 궁핍한 생활을 걱정하는 따듯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정서적이고 지적인 삶을 묘사한 “춘화(春畵)”라는 제목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따슨 빛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어 꽃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유마경(維摩經)이란 말로 설법하지 않고 다만 향기를 풍김으로서,
부처님의 세계를 가르친다는 반야유마경(般若維摩經)에서 나왔고,
문답식으로 대승(大乘)의 진리를 설한 경전을 말하며,
이 시조는 이분이 따뜻한 양지쪽에 느긋하게 앉아서 경전을 읽으면서 망상에 얽매지 않고 집중하여 경지에 이르면,
꽃잎이 떨어져 글자를 가리거나 옆에서 가벼운 잡음이 나는 것은 전혀 불경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자신감이 엿보입니다.
다음은 한용운 선생의 성북동 자택이름을 주제로 작성한 “심우장(尋牛莊)”이란 제목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이란 이름은 원래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묘사한 10개의 장면으로 되어 있는 “심우도”에서 나왔으며,
목동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조에서 “심우장”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찾지 말면’으로 전개되는 부정적 의미 지향은 인간적 갈등과 번뇌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적인 번뇌와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한용운 선생께서는 지식인이요 선각자로 능히 개인적 고뇌를 극복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와 같이 한용운 선생의 시조들을 읽어보면,
많이 알려진 “님의 침묵” 등의 자유시 작품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시조작품 속에서도 지적 능력을 완비한 민족지도자로서
또한 종교적으로는 경지에 이른 선각자로서 확고하게 정신적 주춧돌을 세워가고 있는 모습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동기생 여러분 중에 혹시 한용운 선생에 관심을 갖고 최순우옛집․길상사코스를 방문하시고 싶은 분은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첫댓글 태일형, 옛날 공사 정훈관실장하던 시절이 그립네그려...
잘 읽고나갑니다.
문형, 횡성시절이 삼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