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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진보’가 거머쥔 대한민국 문화권력 |
“인민군이 남한 점령해도 이렇게는 못한다”(모 연극인) |
홍찬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의 경질 파문이 불거진 8월31일, 문화관광부는 국립현대미술관장과 국립국악원장 인선 결과를 발표했다. 두 자리 모두 전임 원장과 관장이 그대로 재임명됐다. 김윤수(70) 국립현대미술관장과 김철호(54) 국립국악원장은 노무현 정부 출범 6개월이 지난 2003년 9월5일 임명됐다. 이번에 재임명됨으로써 3년 임기를 마치고 ‘3년 더’ 임기가 연장 된 것이다. 이들의 재임명이 눈길을 끄는 것은 3년 전 문화계에 ‘편파 인사’ 파동을 일으킨 주역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이들을 임명하자 문화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전국대학 국악과 교수 포럼’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립국악원장 임용 철회와 장관 사퇴를 요구했다. 120명의 국악 교수 가운데 60여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국악인의 집단 반발은 사상 초유의 일. 곧바로 연극계 인사들이 ‘연극인 100인 성명’을 발표했다. 연극인들은 문화관광부 소속 기관과 산하 단체장 인사가 편파적이라며 항의했다. 이들이 말하는 ‘편파 인사’란 노 정부 출범 이후 이른바 진보 진영 사람들이 문화단체의 요직을 ‘접수’해버린 것을 일컫는다. 국립현대미술관장과 국립국악원장 임명은 현 정부가 취임 초부터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인 문화계 ‘새 판 짜기’의 완결편이었다. 먼저 노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이창동씨가 문화부 장관에 임명되어 문화행정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문화계의 돈줄을 쥐고 있는 문예진흥원(現 문화예술위원회)은 원장에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인 소설가 현기영씨가 임명됐고, 사무총장에는 작가회의 소속 시인 강형철씨가 임명됐다. 문화관광부 산하 정책 연구기관인 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엔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소속의 미술이론가 이영욱씨가 취임했다. 문화행정, 지원, 이론 연구기관을 장악한 데 이어 실무적인 문화기관에 해당하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국악원까지 진보 진영이 싹쓸이한 것이다.
문화계 새 판 짜기 완결편 당시 연극인 100인 성명에 관여한 한 인사는 “인민군이 남한을 무력 점령하더라도 민심 수습을 염두에 둔다면 이처럼 무모하고 안하무인식 인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코드’에 맞춰 단체장들을 임명하느라 바쁘던 문화관광부 관리들의 입에서는 주저 없이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나머지 문화계 인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편파 인사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서서히 잦아들고 말았다. 이들의 재임명은 마침 유진룡 전 차관이 ‘낙하산 인사’를 폭로하면서 파문이 인 시점에 이뤄졌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재임명됐는지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심사했던 인사들에게 물어봤다. 심사는 9명의 심사위원이 5시간에 걸쳐 8명의 후보를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높은 점수를 받은 상위 3명이 가나다 순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추천됐다. 심사위원장은 한국화가인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문화관광부의 담당 국장이 먼저 심사장으로 들어와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나갔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후보를 밀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김윤수 후보는 인터뷰에서 ‘지난 3년 동안 해오던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요지로 발언했습니다. 심사 결과 높은 점수 순으로 3명의 후보가 뽑혔는데 의외의 결과는 아니었다고 봅니다.”(A 심사위원) “후보들의 편차가 심했습니다. 몇몇 분은 전공이 미술관장직을 수행하기에 거리가 있거나 지명도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최종 후보로 선정된 3명과 나머지 후보의 점수 차이가 컸어요. ‘코드 인사’가 작용했다면 3명의 후보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할 권한이 있는 문화관광부 장관이 할 수는 있겠죠.”(B 심사위원) 최종 후보에 오른 인사는 김윤수 현 국립현대미술관장, 미술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인 S씨, 문화관광부 관료 출신의 C씨였다.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은 이 가운데 김씨를 낙점했다. 한 미술계 인사는 “김윤수 현 관장을 비롯해 진보 진영의 인사들이 미술관장이 되려고 뛴다는 말이 나돌자 ‘코드’와 관련 없는 사람들은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지원해봐야 괜히 들러리나 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심사위원 A씨는 “후보들 모두 자기 스스로 추천한 자천(自薦)이었다. 이 방식은 문제가 있다. 유능한 인사 중에 자천을 꺼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타천(他薦) 방식도 도입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국립국악원장 인선도 비슷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3년 전 국악인 항의 성명을 주도한 김정수 추계예술대 교육대학원장은 “지난번에는 모처럼 국악인들이 집단행동을 해보았지만 결국 정권의 뜻대로 이뤄졌다. 이번 재임명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아 처음부터 국악인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전했다. 국립국악원장 역시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3명의 후보를 선출한 뒤 문화관광부 장관이 김철호 현 원장을 낙점했다.
실질적 선택권은 정부에 문화관광부는 공모제를 통해 심사의 공정성을 높였다고 내세우지만 심사위원들이 3명의 후보를 뽑고 장관이 최종 낙점하는 시스템이라면 실질적인 선택권은 정부가 쥐고 있는 셈이다. 코드 인사의 홍수 속에서 공모제가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고 있다는 얘기다. 김윤수 관장은 ‘민중미술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이론가이다. 그가 3년간 국립현대미술관장 재임 중에 해놓은 실적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관객 수가 2001년 139만명에서 2005년에는 79만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전시회 가운데 이렇다할 전시회가 없었던 점도 김 관장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마이너스 요인이다. 미술관장은 업무 추진능력이 중요한데 김 관장은 별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다.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관람객의 접근성이 떨어져 서울 시내로 이전하거나 별도의 전시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의 임기 중에 서울 덕수궁 내 석조전 동관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문화관광부 내에서 거론됐지만 아직까지 별 성과가 없다. 경복궁 옆 기무사 자리를 국립현대미술관 터로 확보하자는 목소리가 미술계에서 강하게 나오고 있으나 이 역시 어려워진 상황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지하주차장을 신설하기 위해 89억원의 예산이 배정됐지만 건설이 취소됐다. 코드 인사 여부를 떠나 실적 면에서 그리 내세울 게 없다. 한편 미술관 내에선 학예직과 김 관장의 불화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조직 화합과 관리 능력도 뛰어나지 않다는 얘기다. 노무현 정부가 밝힌 인사원칙 중 하나는 산하단체장의 연임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2004년 12월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언론재단 이사회가 박기정 이사장의 연임을 결정하자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은 “참여정부는 정부 산하기관장을 연임시키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그런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별 실적도 없는 김 관장을 재임명했다.
국악계 사분오열이 개혁? 김철호 국립국악원장은 진보 성향의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소속으로 고(故)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자 배우 문성근씨의 형인 문호근(작고)씨와 친분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노 대통령 측근 인사들과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다시 국악인 김정수 추계예술대 교육대학원장의 말이다. “김철호 원장은 3년 전 민예총에 관여했다는 이유만으로 평 단원에서 하루아침에 원장으로 발탁된 사람이다. 문화관광부는 그를 뽑기 위해 심사위원을 코드에 맞는 사람으로 중도 교체하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이 인사로 국악계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내부 화합이 무너지고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국악계가 침체되어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것이 개혁이고 발전이란 말이냐. 국악 분야는 이념이 필요 없는 곳이다. 국립국악원의 역사는 1300여 년 전 국가 차원의 국악기관을 신설한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에는 장학원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 아악부로 이어졌다. 우리가 대대로 해온 국악을 전승해 나가는 곳이 국악원이다. 국악에 개혁을 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다면 현 정권 사람들이 먼저 말해보라.” 노 정부의 문화계 ‘새 판 짜기’의 핵심은 문예진흥원에서 탈바꿈한 문화예술위원회이다. 문화관광부는 2003년 하반기 문화계 요직을 진보 성향의 인사들로 갈아치운 뒤 문화예술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데 매달렸다. 2005년 9월 정식 출범한 문화예술위원회는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원장인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를 비롯해 강준혁(문화기획자) 김언호(출판인) 김정헌(화가) 김현자(무용가) 박신의(미술평론가) 박종관(민예총 충북지회) 전효관(전남대 교수) 정완규(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한명희(한국민족음악가연합 이사장)씨가 위원들이다. 이들 가운데 과거 예술단체를 대표해온 한국예총(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소속 인사는 정완규씨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소위 진보 성향에 치우쳐 있다는 분석이다. 문화예술위원회는 한해 1100억원을 문화예술인에게 지원한다. 정부 예산 지원이 연간 약 300억원이고 로또 수익금에서 약 300억원이 지원된다. 여기에 더해 5000억원 규모로 조성된 문화예술진흥기금에서 300억원이 나온다. 문예진흥원이 소유한 뉴서울골프장의 연간 수익금도 약 70억원에 달한다. 적지 않은 돈이다. 문화예술인들은 이젠 자기 주머니 돈을 쓰지 않아도 문화예술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여건이 좋아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 많은 돈을 누구에게 어떻게 지원하느냐가 문화예술위원회의 손에 달려 있다.
문화예술인 속성 간과한 위원회 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 장르별로 안배되어 있고 문화예술인만이 위원이 될 수 있다. 문화예술위원에 대한 임명권은 문화관광부 장관이 갖고 있다. 위원 아래에는 소위원회가 있다. 위원회 차원의 중요한 결정은 위원들이 전체 회의를 열어 내린다. 문예진흥원을 위원회 형태로 바꾼 것은 정부가 지원금 배분에 개입하지 않고 문화예술인들이 스스로 배분을 결정하기 위해서라는 게 개혁 진영의 논리였다. 문화예술인의 사정은 문화예술인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문예진흥원 시절에도 산하에 지원금 배분을 심의하는 소위원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원회를 만든다고 해서 과거 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또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지원금을 배분하면 오히려 배분이 왜곡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문화예술위원회 결성에 반대했던 정진수(연극연출가) 성균관대 교수의 말이다. “문화예술인은 행정가가 아니다. 문화예술 분야는 세분되어 있고 상대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에 위원회를 만들어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무용 분야만 해도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 분파가 있다. 예술가 몇 명이 문화예술위원이 되어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문화예술인의 속성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자기의 예술세계를 어느 정도 구축한 사람이라면 독특한 예술적 목표와 지향점이 있으며, 자기와 반대되는 성향의 예술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다. 내가 옳다는 신념이 없다면 그는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인의 이런 특성으로 볼 때 편파적 운영의 여지가 크다.”
그러나 이른바 개혁 진영의 문화예술인들은 노 대통령 집권 이전부터 문화예술위원회를 만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9년 영화진흥공사에서 탈바꿈한 영화진흥위원회를 본보기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원금 배정의 편파성 영화진흥위원회는 문화예술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정부를 배제하고 영화인들이 위원이 되어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출범하자마자 영화계 인사들 사이의 ‘세력 대결의 장’이 되고 말았다. 당초 문화관광부는 양쪽 진영을 고루 안배해 위원을 뽑았으나 결국 목소리가 크고 조직력이 우세한 진보 진영이 위원회를 장악했다. 현재의 제3기 영화진흥위원회는 안정숙(전 ‘한겨레’ 기자)씨를 위원장으로 해서 9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진보 성향 일색이다. 안 위원장은 원혜영 열린우리당 의원의 부인이다. 이들이 한국 영화 전반에 대한 행정 지원과 돈줄을 쥐고 있음은 물론이다. 영화계 우파 진영의 이론가이며 영화진흥위원회 초창기에 참여해 부위원장을 지낸 영화평론가 조희문씨의 말이다. “기존 영화인단체는 영화인협회였다. 이 협회에서 ‘안티’ 활동을 해온 소수 영화계 인사는 대개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독립영화 계열의 단체 소속이었다. 이들은 영화계의 문화권력 구도를 근본적으로 개편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세력의 열세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정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영화진흥공사를 영화진흥위원회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진보 진영은 주도면밀한 공세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돈과 행정을 장악한 것이다. 현 정부가 문화예술위원회를 추진한 것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성공 모델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술인에게 가는 돈줄을 쥐면 손쉽게 예술판을 장악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겉으로 내세운 위원회 지지론 이면에는 문화예술 판도를 장악하려는 거대한 의도가 숨어 있다.” 문화예술위원회는 지난 9월 정부산하기관 경영평가에서 16개 연기금 운영기관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원금 배정의 편파성이다. 한나라당 박찬숙 의원이 올 국정감사에 공개한 자료를 보면 문화예술위원회는 복마전이나 다름없었다. 문화예술위원들이 자신이 대표로 있거나 관계하는 단체에 기금을 지원해준 액수가 59억9420만원에 달했다. 본인과 소속 단체에 정부 돈을 지원한 것이다. 소위원회 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88명의 소위원회 위원 가운데 25명이 자신이 대표로 있거나 관계하는 단체에 11억4300만원의 지원을 결정했다. 예를 들어 극장 경영자 출신인 강준혁 문화예술위원은 춘천인형극제 이사장과 김수근문화재단 이사, 사물놀이 ‘한울림’ 이사 등을 맡고 있으면서 이들 단체에 모두 10억9900만원을 지원했다. 미술평론가인 박신의 문화예술위원은 남편인 S씨가 대표로 있는 미술인회의와 자신이 이사로 있는 문화사회연구소 등 8건에 걸쳐 12억2100만원을 지원한 것으로 자료에 나와 있다. 민예총 충북지회에 소속되어 있고 민족극운동협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종관 문화예술위원은 민예총 충북지회 등 4건에 걸쳐 1억8700만원을 지원했다.
민예총 뜨고 한국예총 지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진 점은 정권과 코드가 같은 민예총에 대한 지원금이 대폭 늘어났고 과거 한국 예술계를 대표하던 한국예총은 찬밥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올해 한국예총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예산은 5억8000만원으로 민예총과 같은 액수이다. 민예총은 현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04년에는 65%가 늘어난 5억8000만원을 지원받았다. 한국예총은 오히려 0.85% 삭감됐다. 겉으로는 똑같은 액수를 민예총과 한국예총에 평등하게 나눠준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예총은 전국에 700여 지회를 거느리며 120만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데 견주어 민예총 소속 예술인은 10만여 명에 불과하다. 숫자와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도 같은 액수를 지원한 것이다. 문화예술위원회에 대한 정부의 경영평가 보고서도 운영의 난맥상을 지적하고 있다. “예술 단체별 장르별 지원금 규모를 결정하는 데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고 형평성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국연극배우협회는 5억원을 지원받는데 한국음악협회는 왜 3000만원만 지원받는지 근거가 불명확하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2003년 1월 민예총은 ‘새 정부 문화정책’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강내희(중앙대 교수)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은 “새 정부에서는 한국예총 같은 기득권 세력이 발을 못 붙이게 하고 민예총 등 진보 세력이 대거 전진 배치되어 개혁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여기에서도 현 정부가 벌여온 일련의 인사와 기구 개편 작업이 문화권력 교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 문화권력, ‘문화연대’ 현 정권 아래서 문화계의 실세는 민예총과 문화연대이다. 민예총은 한국예총의 반대 진영에서 활동해왔다. 그러나 규모면에서 한국예총과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 정부 출범 이전까지만 해도 소수 세력이었다. 1988년 창립된 민예총은 ‘민족예술의 구심점’임을 앞세운다. 산하단체들의 이름을 보면 맨 앞에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들의 단체 소개 글에는 ‘해방 이후 민주화와 함께해온 문화예술운동의 성과를 대중화하고 민족통일을 지향한다. 부정적 과거유산의 극복과 사회개혁을 통해 민족문화의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한다. 남북문화 교류에 힘쓰며 통일문화를 끊임없이 준비해 통일의 시대를 열어간다’고 씌어 있다. 민예총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 빈번하게 발언해왔다. 지난 5월에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에 반대하는 주장을 발표했고 4월에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에 참여했다. 민예총 산하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문단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단체다. 이들은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참다운 민족문학을 이룩하는 데 앞장서 왔다”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해왔으며 지난해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가 ‘6·25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을 때 강 교수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올해에도 한미 FTA 체결 반대,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등 좌파 진영과 같은 주장을 견지해 왔다. 또 다른 축인 문화연대는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문화예산 1%’ 목표를 달성했을 때 예산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집행되는지 감시하겠다며 결성된 시민단체다. 민예총이 현장 예술인단체라면 문화연대는 이론가들이 중심이 된 단체다. 최근 들어 민예총보다 영향력과 위상면에서 앞서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이들의 창립선언문 일부이다. “오늘날 가장 큰 문화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와 시장, 그리고 문화제국주의 세력이다. 문화연대는 국가기관과 자본에 의한 문화권력 및 자원의 독점 경향, 다국적 문화산업의 문화주권 침탈에 따른 문제점을 비판하고 시정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들 또한 미군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와 같은 정치적 문제에 자주 의견을 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졸속 교원평가제를 반대한다’며 좌파 성향의 전교조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그래서 정치단체가 아니냐는 비판도 듣는다.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김정헌 공주대 교수와 강내희 중앙대 교수,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원용진(서강대 교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이 문화연대 주축인물이다. 이 가운데 심광현 교수는 2004년 7월 친노(盧) 인터넷 매체인 ‘서프라이즈’의 서영석 대표가 부인을 교수로 임용해달라는 인사 청탁을 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서 대표는 심 교수를 중간에 내세운 뒤 당시 오지철 문화관광부 차관을 통해 부인의 교수 임용을 부탁했다는 게 청와대 조사의 결론이었다. 심 교수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당시 영상원 원장직에서 물러났으나 교수직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당시 파문은 심 교수가 문화계에서 얼마나 큰 파워를 지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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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학과 출신의 부상
2002년 대통령선거에 앞서 결성된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노문모)’ 출신들도 현 정부 들어 요직에 기용됐으나, 그리 판이 크지 않은 문화계에선 민예총이나 문화연대나 노문모 모두 한 부류로 봐도 무방하다.
2003년 이창동 감독이 문화관광부 장관직에 오른 뒤 민예총과 문화연대 출신과 여당 국회의원 보좌관 등이 문화부를 사실상 ‘접수’한 일은 지금도 문화계에 회자되고 있다. 이 장관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의 기본 틀을 마련한다며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팀원은 민예총 문화연대에 소속된 인사가 중심을 이뤘다.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이듬해 6월 발표된 ‘창의한국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문화비전)과 ‘새로운 한국의 예술정책’(새 예술정책)이다. 당시 태스크포스에 참여한 한 인사의 말이다.
“문화정책의 틀을 바꾼다며 문화관광부 내에 여러 팀을 만들었습니다. 무려 100개 가까운 팀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러 팀이 한꺼번에 회의를 하다보니 공간이 부족해 나중에는 문화관광부 구내식당에서까지 회의를 했습니다. 민예총과 문화연대의 위세는 대단했지요. 그러나 요란한 움직임에 비해 성과는 별로였어요. 기존에 나와 있던 것을 짜깁기한 정도였습니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 인사들이 문화권력의 핵심 실세로 등장한 것도 현 정부 들어 눈에 띄는 구도 변화로 꼽히고 있다.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 김용배씨는 서울대 미학과 72학번이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인사들로 구성된 ‘마당 모임’ 멤버로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전 의장,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친분이 있어 2004년 5월 임명 당시 ‘정치권 추천설’이 흘러나왔다.
현 정부 들어 임명됐다가 3년 임기를 마치고 퇴진한 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이영욱 전 원장도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고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지휘한 황지우(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씨,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강준혁 문화예술위원회 위원도 서울대 미학과 동문이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된 김홍남 관장과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들이 대거 임명된 것은 이들이 현 정부의 ‘코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게 문화계 인사들의 관측이다.
‘보은 인사’ ‘연줄 인사’
문화관광부는 9개의 산하기관과 29개의 공공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기관장이나 임원들을 좌파 진영이 장악하고 있으나 정권 후반기 들어 그와는 좀 성격이 다른 인사도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보은 인사’나 ‘연줄 인사’이다. 지난 3월 신규 임명된 문화관광정책연구원 송재호 원장은 ‘보은(報恩) 인사’의 대표적 사례다. 송 원장은 2004년 제주도지사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 경선에 참가했다가 낙선한 인물이다. 약력을 보면 경기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제주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 정부에서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지난 2월 실시된 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공모에는 모두 12명이 응모했다. 응모자들의 면면은 쟁쟁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리노이 대학과 포항공대에서 교수를 지낸 사람도 있었고, 하버드대 박사, 조지워싱턴대 뉴욕시립대 박사학위 소지자도 있었으며, 서울대,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다들 경력이나 활동면에서 송 원장에 뒤지지 않았다.
지난 10월 문화관광부 국정감사에서는 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사무처장 인선에 대한 야당 의원의 추궁이 있었다. 한나라당 박찬숙 의원은 “3월 사무처장에 취임한 K씨는 직전 근무 직장인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에서 허위 회의록 작성, 예산의 불법 전용 등으로 인해 소속 기관이 감사원 감사까지 받게 만들었던 인물”이라며 “이런 사람을 다시 기용하는 게 개혁인가”라고 따졌다. 박찬숙 의원은 K씨가 정동채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친분이 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 문화예술위원회의 P감사에 대해 “문화예술위원회가 대주주인 뉴서울골프장에 출입해 지인들과 골프를 친 뒤 그 자리에 동석하지도 않은 기관 대표와 간담회를 가졌다며 관계 서류를 허위로 꾸몄다”고 추궁했다. 개인적 모임을 공무라고 꾸며 업무추진비로 결제했다는 것이다. 이계진 의원은 P감사가 문화예술자료를 구입하면서 ‘미스터 초밥왕’ ‘영어 동요 ABC’ 같은 만화와 아동용 도서를 샀다고 밝혔다.
P감사는 광주MBC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참석한 토론회에서 “지난해 우리는 ‘광주 국민경선에서 노 후보의 승리’ ‘월드컵 4강의 진출’ ‘노 후보의 대선 승리’라는 세 가지 기쁜 일을 겪었다”고 아부성 발언을 해 MBC 노조로부터 사퇴 요구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현 정부 출범 이후 2004년 4월 문예진흥원 감사로 임명됐다.
지난해 12월 국립극장장에 임명된 신선희씨는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연줄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지낸 신기남 의원의 누나인 신씨는 무대미술가로 서울예술단 단장을 3차례나 연임하면서 이런저런 잡음을 냈다. 문화관광부는 국립극장장 임명 발표를 예정보다 한 달을 늦춰 의혹을 부풀리기도 했다. 국립극장장 인선 역시 공모제로 진행돼 신씨 이외에 민예총 소속의 연극인 박인배씨와 마당극 연출가 임진택씨가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문화관광부의 심사위원진 구성이 신씨에게 우호적이라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현 정부와 밀접한 관계인 문화연대마저 “신선희씨가 서울예술단 단장으로 있으면서 방송기금 190억원과 연간 공공기금 44억원을 썼으나 예술적 성취 및 경영면에서 부진했다는 평가가 문화예술계 내에 지배적”이라며 “개혁의 후퇴가 아니냐”고 그의 선임을 비판했다.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정치적 임명이라는 것.
“이건 정말 안 되는 일”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의 여동생인 문재숙 이화여대 교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정치적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논란을 빚은 사례다. 지난 4월 문화재위원회가 문씨와 양승희 한국산조학회 이사장을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부분 무형문화재로 인정하자 국악계는 들끓었다. 한 계파에서 한꺼번에 두 명씩 무형문화재가 나오는 것은 전례가 없는데다 권력 실세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국악계 인사의 지적이다.
“문재숙씨는 가야금 전공이라기보다는 이론 쪽에 속한다. 가야금 병창에선 작고한 박귀희씨 같은 거물급 연주가들이 무형문화재로 인정되어왔고 무형문화재 자체가 연주가를 뽑는 것인데 이론가를 무형문화재로 내세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한 문화재 위원은 심사 과정에 대해 “문씨는 2001년부터 무형문화재 심사 대상으로 올라왔으나 그때마다 인정받지 못했다”며 “이번엔 심사 회의에 배석한 문화재청 관계자가 ‘꼭 해결해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문씨는 국가정보원 이상업 국내담당 2차장의 부인이다.
지난 8월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이 6개월 만에 경질됐다. 청와대의 인사 청탁을 거부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게 유 차관 본인의 고백이었다. 청와대도 이백만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과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이 유 차관에게 문화관광부 인사와 관련된 전화를 걸었던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유 차관의 말 가운데 “이건 정말 안 되는 일이다. 더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대목에서 드러나듯이 문화관광부에는 전부터 인사 청탁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 정부 들어 문제가 된 문화관광부의 인사 청탁은 문화권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과, 정치적 차원의 ‘낙하산 인사’두 가지로 구분된다. 선거 낙선자를 위한 ‘낙하산 인사’도 큰 문제이지만 문화권력을 구축하기 위한 인사는 더욱 위험하다. 문화를 어느 한 방향으로 몰아가 이념의 도구로 추락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권력 지배하면 우파 이긴다”
좌파 진영은 현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을 필두로 거의 모든 문화권력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이들은 문화계 행정, 자금, 이론 영역을 한 손에 쥔 상태다.
영화평론가 조희문씨는 “이제 영화에서 반미(反美)는 일상적인 것이 됐다. 1999년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를 그들(좌파)이 장악하면서 다른 문화예술에 비해 먼저 판을 주도해온 결과로 보인다. 이들은 문화예술 구도 자체를 바꾸려 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문화의 특성상 내년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문화권력을 지배하면 장기적으로 우파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른 인사는 “현 정부가 헌법처럼 바꾸기 힘든 제도를 만들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문화계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문화권력을 잡은 이후 문화단체의 조직 구성원들을 그들 편으로 바꿨기 때문에 당분간 문화권력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1월4일 한 강연회에서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문화계 인사를 포함해 안티조선 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현 정권에서 줄줄이 감투를 쓰고 있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출세주의라는 강력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 진보 진영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이들의 권력욕을 비판했다.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는 “대부분의 예술인은 예술 활동에 바빠 이념에 치우쳐 있지도 않고 별 관심도 없다. 문화계의 좌파 성향 인사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한데도 문화권력을 장악한 것은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과 그들의 선전술과 전략이 주효한 탓도 있지만 나머지 문화계 인사들이 무관심한 탓도 있다”며 “문화권력의 균형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문화예술인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