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육을 위해 부모들은 한번씩 읽어봐야할 책, 다만 책의 앞 부분만"
바야흐로 스마트폰 전성시대다. 대화가 실종된 듯하다. 이제는 영유아까지 스마트폰의 매력을 만끽하는 중이다.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오히려 발달이 더뎌질 뿐이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진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 피해는 평생을 두고 나타날 것이다. 코로나19 탓에 세상은 3년 동안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겨우 눈 두 개만 세상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 눈조차 스마트폰으로 가렸다. 모두가 은밀하다. 인간교육이 사라지고 있다. 시민교육조차 실종 직전이다.
루소의 교육관
그 자리에 폭력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텔레비전에서는 매일 폭력사건을 쏟아낸다. 그래서 빛바랜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다시 꺼내들었다. 첫 문장이 강렬하다. “조물주가 처음에 만물을 창조할 때는 모든 것이 선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서 모든 것이 타락한다.”
인간은 본래부터 선한 품성으로 태어난다. 살면서 점차 그 선한 품성이 퇴색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성선설 그대로다. 루소의 교육에 대한 입장은 간명하다. 인간의 본래 모습, 즉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본래의 선한 품성을 찾는 것이다.
시민교육은 사회제도에 순응하도록 돕는 교육이라는 점에서 루소의 관심 밖이다. 루소의 교육이 핵심은 인간교육이다. 루소에게 좋은 사회제도란 그저 인간에게서 자연성을 빼앗아 그 절대적 존재를 박탈하고 그 대신 상대적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아’를 사회라는 단일 공동체 속에 옮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회제도 속의 인간(사회인)을 기르기 위해 공공교육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인은 분모와 관계하는 분자에 불과하며, 그 가치는 사회라는 전체와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한 공교육의 원형을 루소는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자연인은 그 자신이 전부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와 닮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갖는 단위수이며, 그러므로 절대 정수이다.
이러한 자연인을 기르기 위해서는 공공교육이 아니라 개인적인 가정교육과 자연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통해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이 바로 자연인이다. 그렇다면 루소가 말하는 이런 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자연 교육
루소가 지향하는 교육은 ‘바람직한 사회인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자연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루소도 인정한다. 그래서 가상의 제자 ‘에밀’을 교육하기로 한다.
루소의 학교는 에밀이 유일한 학생이다. 정해진 커리큘럼도 없다. 그저 자연을 보고 스스로 터득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전부이다. 그 동안은 소크라테스처럼 가르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질문한다.
루소의 교육방법
루소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학문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은 인간의 의무라는 학문이라고 한다. 선생에게는 가르치는 일보다 지도하는 일이 더 문제가 되는 것으로 교훈을 일러주어서는 안 되며, 그 교훈을 직접 찾아내게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육의 초점은 인간교육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교과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결국 루소의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는 부모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가정교육으로는 시도해볼만한 내용들이 상당하다.
루소는 부모의 역할에 대해 아이가 태어나 강보에 싸는 것에서부터 아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 시시콜콜하게 짚어준다. 물론 루소가 말하는 부모는 일반적인 부모라기보다는 18세기 프랑스 귀족일 것이지만 오늘날의 부모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고집을 꺾는 방법,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갖도록 하는 방법, 거짓말 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물론 이 역시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 보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나 참고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교사든 부모든 아이들 가르치기 위해서는 솔선수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루소의 교육방법은 경험교육이고, 이것이야말로 자연에 가깝다는 것이다. 동물은 아프다고 어미가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지 않는다. 질병은 자연적으로 치유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누구든 아이를 가르치려면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 사람의 교사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도제교육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머털도사가 산속에 들어가 무술 고수가 될 때까지 한 스승 아래서 수련하던 방식이 그럴 것이다.
루소는 관념적이거나 이론적인 설명을 거부한다. 무엇이든 경험을 통해서 아이가 스스로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 회복을 위한 경험중심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학문적 자수성가를 한 루소의 교사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에 의하면 교사들은 보수만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란 늘 말이고, 또 말이고, 항상 말뿐이라고 한다. 교사는 아이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암기를 시켜서도, 독서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물론 역사 교육도 시켜서는 안 된다. 그는 철학자에 대해서도 경멸에 가까운 말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론은 원리보다 사실들에 더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특정한 개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는 교사의 시범, 상황극과 같은 활동으로 통해 오랜 시간을 두고 체득하기 등이 그의 유일한 교육방법이다. 그러므로 교재가 따로 필요 없다. 행동을 통해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고 이를 자기화하고 활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전부다.
직설적으로 설명을 하는 대신 놀이처럼 접근하여 아이의 호기심을 끌고 서서히 그 원리를 알 수 있도록 놀이를 유도하는 그의 교육방법을 놀이학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육방법은 적절한 통제가 매우 중요하나 그는 그 점에 있어서 매우 방임적이어서 다소 위험하다.
루소의 교육방법은 가르치려 하는 내용에 대해 그 방법을 아이가 모르도록 하라는 것이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의 관념에 대해서는 그가 전혀 모르도록 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은연중에 그 내용을 아이가 스스로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독서도 달갑지 않게 여긴다. 독서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귀찮은 것이라 여긴다. 만약 책을 읽는다면 자연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책이 제격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고도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도구도 없이 자신을 보호하고, 나아가 어느 정도 행복까지도 얻고 있다. 그야말로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이보다잘 어울리는 책이 어디 있을까.
어떻든 루소의 이러한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인간교육은 어린 시절의 인성을 올바르게 심어주는 데는 차용할 가치가 있는 교육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학문이 고도로 발달해가고 인공지능이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되는 세상에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런 교육이 자리할 틈은 없다.
루소의 교육에 대한 당대의 평가
루소는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공공교육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이가 한참 되어서 우연히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글을 쓰게 되면서 일약 사상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일종의 학문적 자수성가의 전형이 된 셈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제도 속의 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자들이 그런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자기보다 못한 사고를 한다는 데서 오는 나름의 경멸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교육에 대한 자기 나름의 견해를 피력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것이 ‘에밀’이라는 작품일 것이다. 따라서 작품 내용은 당대의 교육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에밀’에 소개된 교육방법은 파격적임도 동시에 즉흥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필요에 따라 가르친다는 것은 아이가 교사의 능력이나 관심의 범위를 절대 벗어날 수 없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된다. 당연하게도 루소가 ‘에밀’을 통해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에밀’은 출판되자말자 학부에 의해 제소당하는 곡절을 겪었다.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하는 수 없이 루소는 체포를 피해 여러 나라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어떻든 ‘에밀’은 루소의 근본이념인 동시에 사색의 출발점인 본연의 인간, 즉 자연인의 실현에 대한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나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자꾸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