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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이씨 밀성군 백강공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왕을 바꿔라
abigail 추천 1 조회 6 09.06.07 23: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초기 군왕의 과제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이었다.

 
태조가 개국을 했지만 신료들의 힘이 셌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일종의 내각책임제를 생각했다.

 

이에 정면으로 반대한 인물이 태종이다.

 

두 차례 왕자의 난 끝에 신권을 제압하고 강력한 통치력을 확보한 태종은 왕권강화 차원에서 왕족의 역할도 제한을 했다.
 

사병을 혁파해 친족들의 군사권을 박탈한 태종은 왕의 손주와 장인, 사위도 정치참여를 막았다.

 

또 왕의 사촌이내 친족도 금고대상으로 하였다.
 

세종은 아버지가 뼈대를 만든 친족관리의 원칙을 확정했다. 세종은 친족끼리는 서로 가깝게 지내야한다는 유교논리에서 명분을 찾았다.
 

유교에서는 고조할아버지를 공동조상으로 하는 8촌까지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보고 있다.

 

아주 친하게 지내야 하는 사이인데 직무상 잘못이 있으면 처벌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세종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왕의 4대 현손까지, 즉 8촌이내 혈족은 정치를 금지시켰다.

 

대신 이들에게는 종친부가 작위를 수여하면서 최고로 예우했다.
 

태종이나 세종이나 왕 한 사람만이 우뚝 설 수 있도록 잠재적으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을 정치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하지만 조선초기엔 이 제도가 정착되지는 못했다. 세조가 조카인 귀성군 이 준을 영의정으로 임명했고, 밀성군도 국정에 많이 관여를 했다.
 

세조와 가까웠던 밀성군은 정치에 관여를 했으나 절대적인 충성을 했다. 그러나 세종의 손자인 운산군은 달랐다.

 

실덕한 연산군으로는 종묘와 사직을 수호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과감하게 임금교체를 추진하고 성공시켰다.
 

이 후 밀성군 후손은 경종과 영조 사이에서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선왕인 숙종의 고명에 따라 영조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당해 집안이 멸문의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나 가문에 일관되게 내려온 임금이 임금다워야 충성하고,

 

선왕의 고명을 죽음으로 지켜야 하다는 원칙은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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