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서기 무렵에 중국은 과거의 역사에 없었던 무서운 민족적 재난과 고통을 맞이했다. 1895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과거 중국 문화권에 있던 일본에게 패전함으로 소위 “중화제국”이라는 위명이 추락했고, 제국주의 열강들은 서로 세력범위를 확정함으로 중국을 갈기갈기 분할하는 등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역사상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유신운동, 반제국주의 운동, 자산계급 혁명운동 등이 연이어 일어나 중국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파도 열강들의 침략과 함께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패전 이후 체결된 <북경조약>을 통해 기독교의 선교활동이 합법화 된 이후,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활동은 실제적으로 이미 순수한 종교의 범위를 벗어났다. 즉,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전도하려는 순수한 동기가 당시 각 나라의 중국을 향한 정치적 침략과 혼합되어 분별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중국인민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기 시작한 중요한 역사적 시기이며 동시에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고 발전된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함께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침략이 근대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민족주의 운동은 이 시기에 “반양교운동(교난)”, “비기독교운동”, “토착화운동” 등의 내용으로 기독교에 대해 대응하였고 이 둘은 역사상 유례없는 충돌과 갈등을 빚었다.
기독교문화는 중국의 전통문화와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중국문화에는 인륜과 지행합일과 중국의 성현들을 중시하고, 신도(神道)를 멀리하고 파안의 세계를 경시하며 외래의 이설들을 반대하는 뿌리 깊은 전통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의 사상과 상반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이 부여해준 특권에 의지하여 중국민중들을 억압하였고, 범람하는 외국 물건들로 인해 중국 자급자족의 자연경제가 파산되는 등의 배경은 많은 교난을 일으켰고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의화단운동은 이런 반양교운동(교난)의 절정인 동시에 사양길의 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동양의 민족주의 운동은 새로운 역사시기에 접어들었다. 한국의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함께 세계민족주의 혁명운동의 내용이 되지만 그둘 사이에서의 기독교의 위치와 역할은 완전히 달랐다. 한국위 “3.1운동”은 한국 여러 종교 단체들이 연합하여 진행한 거국적 기독교와 한국민족주의 운간 간에는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5.4운동”은 기독교의 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고, “5.4운동”과 함께 일어난 중국신민주주의운동 중에서는 오히려 “비기독교운동”이 발생하여 중국 민중의 반제투쟁의 주요한 부분이 되기까지 했다. “비기독교운동”은 반양교운동과 더불어 중국을 침략한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중국 민중의 불만과 반항에 기초한 것이다. 반양교운동이 주로 하층인민들의 소원과 의지를 반영하였고, 중국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반제국주의운동이라면 “비기독교운동”은 청년학생과 지식층의 소원과 의지를 반영하였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공동지도 하에 일어난 조직적 반제국주의 군중운동이라 할 수 있다.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운동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비기독교 대동맹”을 구성하였으며 전국 범위의 대규모 반기독교 시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기독교운동”은 기독교와 근대 중국민족주의 사이의 또 한 차례의 큰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며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지방의 “비기독교운동”은 문서선전, 시위행진으로부터 무력행동으로까지 이어져 교회당, 교회학교가 점령되기도 하였다. 1927년 전국의 8,000명 정도의 선교사 중에 5,000명이 철수하거나 중국을 떠났으며, 기독교 청년회는 중국 청년들 사이에서 호소력을 상실하여 이때부터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운동은 자기 발전을 이루려는 노력을 가속화시키고 중국기독교의 개혁을 촉진시켜 기독교의 “자립운동‘과 ”토착화운동’ 등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독교의 “자립운동”은 19세기 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기독교 내부의 식견 있는 애국지사들은 교난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여 외국 교회의 속박과 통제를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아직 일부 지역의 실험에 불과했지만 중화민족의 특색을 가지 기독교를 건립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 기독교 에서는 제1차 “자치운동”이 발생하였다. 의화단운동 때 살해된 교민의 숫자가 선교사들 보다 많은 형세는 중국의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부득불 일어나 “자립교회”를 설립하여 “안으로는 국민들의 의혹을 없애고, 밖으로는 국제친교를 튼튼히 함”으로써 중국 신자들도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하였다. 중국인의 이러한 교권을 회수하기 위한 노력을 보면서 일부분의 외국 선교사는 중국 기독교의 자립이 막을 수 없는 조류임을 깨닫고는 중국 교회의 자립을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1922년 “비기독교운동”의 발전과 함께 중국 기독교회의 “자립운동”과 “토착화운동”은 또 한번 절정에 이르게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불평등조약을 페지하는 운동에 가담하고 교육권을 회수하는 것을 찬동하는 선언을 하는 등 기독교인의 애국심을 잘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5월 중국기독교 전국대회에서는 중국인 목사가 33명, 서양 선교사는 27명으로 중국인 목사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성정이 회장은 “토착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중국신도로 하여금 책임감을 가질 것과 나라의 문명을 계발하여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는 오명을 벗어버리자 주장하였다. 외국선교회가 통제했던 몇 개의 큰 교파들도 이를 전후하여 중화라는 두 자를 첨가하여 중서(中西)가 통합하는 교회조직을 구성하였다. 중국민족주의 운동의 발전으로 외국선교회와 중국교회 간의 관계에 변화가 발생하였고 교회는 더욱 큰 책임을 감당하기 시작하였다.
중국학자에 의하면 이 시기 “자립운동”과 “토착화운동”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교회는 마땅히 중국기독교인의 관리와 선교와 재정사용권의 책임을 져야 하고, 서방선교사는 보조적 위치로 물러서지만, 계속 서방교회의 경제 후원을 받는 것을 강조하였다.
둘째, 중국기독교 교리와 중국 고유문화가 서로 결합되는 것을 장려하였는데, 여기에는 중국 문화의 관념으로 교리를 표현하고 이해하며 예식 중에서 중국 풍속 습관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셋째, 여러 교파의 교회 대연합운동을 꾀하는 것이다. 장로회와 공리회(조합교회)는 일찍부터 통합하여 ‘중화기독교 연합회’를 구성하였고, 루터회, 성공회, 감리회 등도 연달아 전ㄱ구적인 조직을 세워 점점 통일 연합에 이르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중국 기독교의 중국민족주의는 대립과 충돌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 나타났던 “반양교운동”과 “비기독교운동”은 종교를 이용하여 중국을 침략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중국민족주의 운동의 필연적인 표현인 동시에, 중국 기독교의 “자치”와 “토착화” 개혁을 실현하게 하였던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하였다. 중국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중국 민족주의의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 속에서 부단히 자기 조정과 개혁을 실시하여 중국 고유의 정치 환경과 풍습에 적응함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중화 민족의 특색을 갖춘 기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