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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역 선돌, 정령을 깨우다...정신지주인 입석, 장승.불상.동상.기념비.위령비. 탑 등으로 이어지다
기념물, 신앙대상물
묘표(墓標)기능
풍요(豊饒)기능
수호(守護)의 기능(벽사.수구막이)
선돌=입석
마을 어귀나 평지 또는 고인돌에 위치하는 선돌,
전남 영암 지역에 있는 입석(立石)인 선돌은 어떤 의미로 세워졌을까?
전남 영암 미암면 두억리 선돌
선경의 경지에 오른 선돌
정신세계를 초월한 선돌
선돌은 신의 절대자였다.
자연석은 신앙물로서의 선돌숭배사상을 낳았다.
나를 석적(石的)존재로 보지마
나를 신적(神的)존재로 보아줘
난 돌이지만 정령이 서린 돌이야!
난 자연석이지만 정신세계 돌이야!
선돌선경의 경지에 오른 돌로서 정신세계를 초월한 선돌돌령의 신성에 이른 돌로서 이상세계를 구현한 선돌
선돌은 한 마디로'정신세계, 이상세계의 선경의 경지, 돌령의 신성' 이라고 요약, 정의해볼 수 았다.
우리 인간에 정신지주였던 선돌
선돌은 선사시대에 땅 위에 자연석(自然石)이나 또는 그 일부분만 치석(治石)하여 세운‘기념물(記念物) 또는 신앙대상물(信仰對象物)’등으로 삼은 돌기둥을 말한다.
일명 입석(立石)이라고 한 선돌은 고인돌(支石墓), 열석(列石)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하나이다.
선돌은‘입석, 돌꼬치, 도두, 석주’등으로도 부르고 있다. 돌을 세웠거나 서있다는 뜻에서 선돌 이외에‘삿갓바위(笠巖), 선바위(立巖)’라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 구지바위, 할머니탑, 할아버지탑, 돌장승, 수구막이, 수살장군’등으로도 부른다.
선돌은 주로 둥근 뿔(圓錐)이나 둥근 기둥(圓柱), 모난 뿔(角錐), 모난 기둥(角柱)이지만 드물게는 넓적한 판석도 있다. 높이는 1~2m정도 되며 큰 것은 6m 넘는 것도 있다.
선돌은 마을 어귀나 평지에 있다. 또는 남한 지방에서는 모두가 남방식 고인돌(支石墓)과 선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선돌이 고인돌과 공존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들이 같은 동시대적 배경을 가진 유적으로 생각된다. 그 기능적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아마 요즘으로 말하면 묘 앞 양 옆에 세운‘망주석(望柱石)’같은 존재로 세웠지 않는가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고인돌과 함께 공존하는 선돌을 두고 선돌이 고인돌의 존재를 표시해주는 묘(墓)의‘표지석(標識石)’, 즉 고인돌을 다른 것과 구별하며 그 내용을 알리기 위하여 그 밑에 세운 돌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또는‘제단석(祭壇石)’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도 판단하고 있다.
선돌은 어떤 믿음의 대상물이나 특수 목적을 가지고 세운 돌기둥인 선돌은 길쭉한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한 큰 돌이다. 선돌은 고인돌과 열석과 함께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이르는 거석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보고 있다. 어떤 선돌은 청동기시대 이후의 역사시대(歷史時代)에 세운 것도 있다.
선돌은 제사신앙이 수반되어 있어 마을 사람들의 신앙(信仰) 대상으로 신격화되기도 하고 다산(多産)과 장수(長壽)를 바라는 풍요(豊饒)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선돌이 성기신앙(性器信仰)이 있었으며 뾰족한 것은‘남성’, 평평한 것은‘여성’을 상징했다. 이것은 풍요나 다산의‘자손번창(子孫繁昌)’을 바라고자 했다.
기자신앙 대상물
자식이 없는 집안에서 자식, 특히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기자신앙(祈子信仰)’대상물이기도 한 선돌은 길에서 돌을 던져 선돌위에 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개인적으로 밤에 제를 지내고 돌을 던졌다. 음력 대보름날 한밤중에 남의 눈에 띠지 않게 선돌에다 금줄을 두르고 음식을 차려 놓은 다음 부녀자가 제(祭)를 행하였다.
기자암으로 보는 불암바위가 있다. 불암바위는 신통력을 지낸 것으로 여기며 불임증 아낙네들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여겨 이 바위에 치성을 들었다. 부침바위라고 부르는 불암바위는 아기잉태, 특히 남아를 선호하는 여성들의 소원풀이 또는 특효바위이다.
돌이 생명을 준다는 믿음은 여러 가지 주술적 행위로 나타내는데 성석(性石)에 올라타 가상의 성행위를 흉내 내거나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선돌을 주무르거나 돌미륵의 코를 떼어 가루를 내 물에 타서 마시기도 했다. 이런 바위나 돌을 선돌, 선바위, 기자암, 불암바위, 미륵바위, 말바위, 신석, 남근석, 양근암, 손바위, 성석 등으로 불린다.
풍요와 인구생산 기원석
선돌은‘농업생산’의 풍요와‘인구생산’의 풍요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선돌을 세울 때 남성의 상징으로 끝을 뾰족하게 치석(治石)하거나 여성의 상징으로 끝을 넓고 평평하게 치석했다.
선돌의 대부분 평지와 구릉지 등 야산의 끝자락에 샛강의 물줄기를 따라 세워진 것은 농경문화(農耕文化)와 관련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계석, 수호신 역할
또한 마을의‘경계(境界)’표시이자 수호신으로 마을을 지키는 상징으로 벽사(辟邪)와 수구막이 역할 등‘수호(守護)’기능이 있다. 지금도 선돌회를 조직할 만큼 선돌제를 올리며 주민들의 무사태평(無事泰平)을 기원하는 제의(祭儀)로서 수호적 기능의 대상물로 섬기고 있다.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수호 의지를 시사하고 있는 선돌양식은 가부장(家父長) 및 부계씨족장(父系氏族長)과 마을공동체 부계촌장(父系村長)의 강한 힘으로 마을의 안전과 안녕을 수호하고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과 심지어 질병 또는 악귀의 침입까지도 물리치겠다는 벽사(辟邪) 의지가 담겨있다. 그런 의미로써의 선돌을 마을 수호신의 표상으로 생각하여 신앙하거나 제사하는 민속풍습이 발생한 것이다.
이정표, 표지석 역할
또한 이정표(里程標)로 방향을 알려주거나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띠었다. 요즘 마을 입구에 세운 마을 이름이 새긴 표지석(標識石)과 같은 역할을 했다.
묘표의 영역 기능
또한 죽은 사람을 상징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영역(領域)’기능이 있다. 무덤의 묘표의 의미와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묘가 있는 입구에 비석을 세워두는데 그런 상징성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선돌은 마을 어귀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논밭 가운데나 고인돌 옆에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논이나 밭에 있는 것은 원래 이곳이 산이었던 게 개간으로 선돌을 둔 채 농작지를 조성한 걸로 보인다.
선사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성행
선돌은 고인돌과 마찬가지로 거석문화의 한 종류이며, 건립된 시기는 선사시대부터 청동시대를 거쳐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동안 연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이런 선돌은 최근까지도 개인 또는 마을의 숭배 대상으로 우리 문화유산 가운데 큰 치성(致誠)을 받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산.풍년 풍요
선돌은 묘나 마을 등의 표지석으로 세웠다. 수호로 두었다. 다산과 풍년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조성했다.
표지석, 수호신, 이정표
선돌에 대한 여러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선돌은 지역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 세운 선돌은 마을을 알리는‘표지석과 수호신’의 두 의미를 두고 세웠다. 마을과 마을을 알리는‘이정표’역할도 했다.
마을 앞에 선돌을 세워둠으로써 선돌로 인하여 어떤 마을임을 알렸고 혹시 우리 마을에 나쁜 악귀가 침범하지나 않을까하여 벽사의 의미를 두고 수호의 역할로써 세웠다. 선돌이 마을을 지켜주어 마을의 안전과 안녕을 가져다주길 바랐다.
선돌은 제단이었다.
농촌에서는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데, 우리나라는 예부터 3~4년에 한 번씩 한재(旱災)를 당하였으므로 조정과 민간을 막론하고 기우제가 성행했다. 이때 등장한 게 바로 선돌이라는 제단(祭壇)이었다.
비[雨]에 대한 관심은 이미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나타나 있다. 환웅이 거느리고 하강했다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세신은 모두 비에 관한 신이니 비에 대한 관심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농작물은 물을 필요로 하며 물은 곧 비를 의미한다. 특히 농업의 주종을 이루는 벼농사의 원산지가 고온다습한 동남아시아 지역이고, 우리나라는 주로 장마철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므로 그 전후인 하지 무렵까지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수리시설이 부족한 때일수록 기우제가 성행하였다. 한 해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비였으므로 기우제는 연중행사였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비가 내려주기를 홍수를 막아주기를 의미를 담고 선사시대부터 선돌을 세워 기원을 드리는 제(祭)를 지냈다.
민간에서는 산이나 냇가에 제단을 만들고,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제주(祭主)는 마을의 장이나 지방관청의 장이 맡고 돼지, 닭, 술, 과실, 떡, 밥, 포 등을 제물로 올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당이 제를 관장하기도 한다. 또 민간에서는 신성한 지역에 제물로 바친 동물의 피를 뿌려 더럽혀 놓으면 그것을 씻기 위해 비를 내린다는 생각으로, 개나 소 등을 잡아 그 피를 바위나 산봉우리 등에 뿌려 놓는 풍습이 있었다. 선돌은 민간신앙에서 탄생되어 파생돼 오늘날에는 첨성단, 기우단과 통일기원단 등으로 발전된 채 그 의미와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선돌은 고인돌 등 묘가 있는 곳의 주변에 세웠는데 이것은 묘가 누구의 누가 이곳에 묻혀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묘의 경계 지역을 알리는 것을 알리고 또 안 좋은 일들이 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게 하는 수호의 역할로 세웠다.
묘지 잎에 세운 망주석(望柱石),
망주석은‘선돌에서 비롯된 풍습’이라고 볼 수 있다.
망주석은 봉분을 위주로 묘 바로 앞에는 상석이 놓여있고 좀 뒤로 벗어나 양 옆으로 망주석이 있으며 상석 앞줄에는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을 좀 벗어난 양 옆으로는 문인석, 무인석, 양이 들어서있다. 그리고 한쪽에 비석을 세워뒀다.
중국 화표주(華表柱)에서 시작된 망주석(望柱石)은 요순(堯舜)시대에 백성의 의견을 듣기 위해 길에 설치한 방목(謗木)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화표주(華表柱))는 한대(韓代)에는 큰 길 입구나 사거리에 길이가 10자, 즉 3m 정도 되는 기둥을 설치하여 환표(桓表)라고 하였는데 이후 궁궐, 능묘 등에 표석으로 설치하였다.
망주석은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 석망주(石望柱), 화표주(華表柱)라고도 하며 줄여서 석주(石柱) 또는 망주(望柱)라고 한다.
망주석의 기능은 아름에서 나타나 있듯이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석이다.
망주석의 의미에는 여러 가지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첫 번째, 영혼(靈魂)이 쉬는 자리라는 뜻이다.
두 번째, 멀리 나갔던 영혼이 보고 찾아온다는 뜻이다.
세 번째, 자손들이 조상을 잘 모시고 있다는 뜻이다.
네 번째, 자손번창의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나라 매장 풍습에는 봉분 앞에 방향을 정해 상석, 묘비,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등을 세운다. 팔각형이 둥그스름한 생김새도 남근을 닮은 기자석(祈子石)이고 3분의1 지점에 작은 동물 형상의 세호(다람쥐.거북.이무기.해태.용.기린 등)이 디자인되어있다.
기자석은 기자란 아이를 낳기 위한 치성을 드리는 행위를 말하며 주로 산신과 생명의 원천을 연결시키는 산신신앙의 형태로 기자석을 만들어 기원하는 돌을 말한다.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細虎)는 망주석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모습이며 다람쥐처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일하러 간다는 의미이고 위로 올라가는 형상은 쉬러간다는 의미이다.
망주석을 장식한 세호는
우주상행(宇宙上行), 좌주여행(左注下行)의 원칙을 적용하여 주로 다람쥐 문양을 새겼다. 세호가 새겨진 망주석은 잡귀를 물리치고 액운(厄運)을 쫒아내는 수호신(守護神) 역할을 한다. 과거에 세호의 문양으로 새겨지는 동물은 이무기.해태.용.거북.기린 등을 새겼다. 임진왜란 전후로 하여 임진왜란 전에는 도룡뇽 문양을 임진왜란 후에는 주로 다람쥐 문양을 넣었다.
망주석은 중국에서 시작하여 통일신라에서 발전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는 왕릉(王陵)의 석물 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묘제석물(墓制石物)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에 이른다. 무덤의 사설형식에 따라 묘주(墓主)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앙과 기념족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이다.
망주석의 의미와 선돌의 의미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인돌과 함께 설치된 선돌은 요즘 왕릉 등 묘지에 설치된 망주석이라고 봐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묘지의 망주석으로 변한 화표주는 큰길가에 세워둔 표지석이었듯이 우리나라 전 지역에 분포되어있는 선돌 중에는 고인돌이 아닌 일반 마을 등에도 선돌을 세웠다.
선돌의 돌은
돌은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널리 분포되는 것은‘독’이다.
돌, 즉 암석의 갈래는 그 형성원에 대해 따라 화성암(火成岩), 퇴적암(堆積岩), 변성암(變成岩)으로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화성암은 용융상태에 있던 물질이 냉각, 고결(固結)되어 이루어진 암석이다. 화강암(花崗岩), 유문암(流紋岩), 섬록암(閃綠岩), 안산암(安山岩), 빈려암(班糲岩), 현무암(玄武岩) 감람암(橄欖岩) 등이 이에 속한다.
퇴적암은 기존 암석이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부서지거나 녹아내린 것이 다른 곳으로 운반되어 쌓인 암석이다. 역암(礫岩), 각력암(角礫岩), 사암(砂岩), 미사암(微沙岩), 셰일(Shale), 이암(泥岩) 등이 이에 속한다.
변성암은 화성암 또는 퇴적암이 지하에서 열과 압력의 작용을 받아 본래의 성질을 잃고 새로운 성질로 변화한 암석이다. 편마암(片麻岩), 편암(片岩), 천매암(千枚岩), 점판암(粘板岩)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돌에 암각화(岩刻畵)를 새기거나 선돌 등으로 이용했다. 거대한 암석은 고대인에게 외경심을 가지게 했다. 특히 암각화는 수렵에 관련한 기원 및 사냥의 동물이 혼을 위로하는 재단(財團)으로 이용되었다.
선사시대에는 돌로 돌검(石劍), 돌칼(石刀), 반달칼, 돌도끼, 그물추, 돌망차, 숫돌, 자귀, 갈판, 괭이 등을 만들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무덤 앞에 문인과 무인의 석상 외에 석수(石獸), 상석(床石), 석비, 석등을 만들어 세웠다.
도끼라는 낱말도 돌에서 나왔다. 도끼의 옛말은‘도채’ 또는‘돗귀’였다. 돛에 접미사가 붙어서 형성된 것인데 돛은‘돌’을 뜻한다.
돌이 예술로 승화되는 데는 소재가 되어 조형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상징적 제제가 되어 추상적 예술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다. 돌을 소재로 하는 조형예술로는 불상.석탑.부도.석등 및 탑비 또는 석비 외에 각종 대좌(臺座).석주류.돌다리.석수.석표(石標).석빙고 등이 조형예술로 탄생되었다.
이런 조형물에 이용되는 돌은 대부분이 화강암이다. 선돌 또한 주로 화강암을 이용했다.
돌을 이용한 석탑, 석등, 당간지주, 석비 등은 돌의 성질과 돌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돌은 생명탄생, 퓽요 및 수호
우리나라 사람에게 돌은 생명의 탄생, 풍요와 수호 등 신비로운 관능을 가진 존재로서 신앙이 되어졌다.
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기도를 하면 훌륭한 아이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위를 신성시했다. 애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설로 인해 이 바위를 기자암(祈子岩), 가석(嫁石)의 민속을 낳게 되었다.
생식번성 기자암 선돌
기자암은 성기형(性器形) 등을 하고 있으며 남근형과 여근형을 한 암석이 기자암이다. 남근, 여근형 같이 특별한 향상의 암석은 생번력(生繁力)을 가지 것으로 여겼다. 이런 암석은 생번관념은 나아가서 곡물, 특히 곡물을 대표하는 쌀의 산출과 관련된 전설로 발전하였다. 한편 암석은 생번력과 함께 수호의 힘을 가진 성석(聖石)이 되기도 하였다. 장례 기념석이라 할 수 있는 고인돌과 당산이나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선돌이 바로 그런 유형이다.
고인돌은 죽은 혼령(魂靈)의 상징적인 안식처인 동시에 사령이 끼칠지도 모르는 위해로부터 산사람을 보호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또 이 돌은 여자의 자긍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재생(再生)의 의미로 받아들어지기도 하였다.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당산과 골매기는 마을을 수호하고 주민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석(神石)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암석은 마을의 풍흉(豊凶)을 예고하는 영력(靈力)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마을에 서있는 큰 돌이 정초에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에 따라 기울어진 쪽의 마을이 풍작(豊作) 또는 풍어(豊漁)가 된다고 믿었다.
한편 암석은 인간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심리와 영원한 구원을 바라는 심리가 복합되어 많은 화석 전설을 낳았다.
이를테면『용왕이 딸이 죄를 짓고 거북으로 변신해서 인간계에 나왔다가 인간과 인연을 맺어 옥동자를 낳고 거북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는‘거북바위’전설이 그런 예다.
또는『딸이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바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죽으니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새겨졌다』는‘선녀바위’전설 등이 있다.
이러한 바위의 전설은 인간과 자연물인 바위가 생명력 연대감을 가졌다는 원시적 사유에서 발생한 것이다.
돌은 불완전성과 변질성 초월
돌은 항상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계의 모든 물체 중에서 돌은 태초의 견고성을 유지하고 있다. 돌의 이러한 독존성(獨存性), 항존성(恒存性)은 인간에게 변전하는 모래나 먼지 또는 유기체에 대해 반정립(反定立)의 존재로써 인식되었다. 따라서 돌은 언제나 인간에게 인간 조건의 불완전성과 변절성을 초월한 어떤 힘을 계시하는 것으로 사유되었다.
돌의 이러한 속성은 자신의 현실적 실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매체로써 인간이 그 자신과 다른 어떤 무엇을 체험할 때만 나타난다. 돌은 인간의 상상영역 속에서 체험되는 방식이나 만남의 방식에 따라 그 속성이 달리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고려 말의 학자 이곡(李穀)은 그의 석문(石門)에서『돌은 견고 불변해 천지와 함께 종식되는 것, 본말과 가늘고 굵음을 요량할 수 없으며 추위와 더위에도 본질을 바꾸지 않는 것, 두터운 땅에 우뚝하게 박히고 위엄 있게 솟아서 큰 바다를 진압하며 만 길의 높이에 서서 흔들어 움직일 수 없는 것, 깊은 땅 속에 깊숙이 잠겨서 아무도 침노하거나 제압할 수 없는 존재』라 하여 그 덕을 찬송하였다.
돌은 생명력과 풍요 가치, 힘 계시
이렇게 돌은 시간성뿐만 아니라 공간적 위치만으로도 하늘과 땅이라는 두 영역에 동시에 속하면서 수직적 상승으로 우뚝 서서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생명이 없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풍요로운 동적 가치나 힘을 위 앞에 계시하고 있다.
바위의 이러한 초월적 항존성은 보다 내면화한 만남 속에서 그 존재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돌은 그 기원이나 모양에 있어서 상상영역 속의 중요한 표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돌은 그 속성과 힘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시 그것과 만나고 부딪히는 체험 주체로서의 인간 조건에 의해 다양하게 이해되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체험이나 부정적 체함이나 결국 돌은 그 위엄과 두려움을 동시에 환기하는 실체로써 속성을 나나내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은 인간적 시공과 그 조건을 초월하고 있는 실제 또는 힘으로써 표상되는 것이다.
바위는 신앙적, 신비적 존재
바위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신앙적 대상으로 인식되어있다. 기괴한 형상을 한 바위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을 정상에 이고 있는 바위는 때로 신비한 힘을 드러내는 존재로 여겨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식이나 복록을 원하는 이, 신병을 고치고자하는 이, 가뭄에 비를 바라는 농민들은 바위를 신체(神體)로 해 금줄을 치고 제물을 바쳐 치성을 드렸다. 그 만큼 바위는 온갖 소망을 이루어 주는 신통력(神通力)을 가졌다고 믿었다.
또한 바위는 그 항존성(恒存性).구원성(久遠性).불변성(不變性).부동성(浮動性)으로 하여 존숭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학자나 예술인들은 바위의 그러한 속성을 흠모(欽慕)해 돌(石) 또는 바위(岩)를 뜻하는 글자로 호를 짓는 예가 많았다. 백암(白岩) 박은식, 농암(農岩) 이현보, 송암(松岩) 권호문, 일석(一石) 이희승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수수께끼에서 돌이 천년만년 사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바위가‘해.산.물.구름.소나무.불로초.거북.학.사슴’과 함께 십장생(十長生)으로 꼽히는 것은, 돌이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영생적 실재로 관념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예로부터 돌을‘산의 뼈요, 흙의 정(精)이며 기의 핵(核)’이라고 보고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지어왔다.
우리의 산조들은 돌이‘생명(生命)’을 탄생시키기도 하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로 믿고 돌을 향해‘기자치성(奇字致誠)’을 드리고‘마을의 평안’을 빌어 왔다.
돌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주는 '주술적(呪術的) 영험물(靈驗物)' 로 인식되어왔음을 의미한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선돌을 세우거나 돌탑을 쌓아왔다.
육지의 선돌은 마을 입구에 두되 장승처럼 보통 2기를 세웠다. 돌탑도 2개를 쌓았다. 이를 선돌로 불렀다. 돌탑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 여러 의미가 함축된 내장 물로 오곡단지.금두꺼비.쇠스랑.부적.숯 등을 넣었지만 선돌은 그렀지 않았다.
돌이 뾰족하면 남성, 둥글면 여성 구분
돌탑 윗머리에는 할아버지 탑에는 뾰족한 돌을 얹고, 할머니 탑에는 다소 펑퍼짐하며 끝이 둥근 돌을 얹었다. 선돌은 탑이 아니어서 돌 자체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했다. 남성을 상징하는 선돌은 끝이 뾰족한 것을, 여성을 상징하는 선돌은 끝이 평평한 것을 사용했다.
재앙을 막은 방사탑
제주도에는‘방사탑(防斜塔)’이 유행했다. 방사탑은 외부로부터의 살과 부정, 즉‘재앙(災殃)’을 막겠다는 기원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탑(塔)이다. 방사탑이 그러하듯이 선돌도 외부로부터 살과 부정을 막기 위한 세워진 것이다. 선돌을 향한 기자치성의 노력은 어느 지역이나 동일했다.
제주도에서는 탑을 쌓아 올릴 때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는데 밥주걱은 바깥의 재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이고, 솥은 뜨거운 불에도 끄떡없는 솥처럼 어떤 재난에서도 이겨낸다는 기원을 담았다.
탑 상부에는 사람의 머리 모양이나 새의 형상을 올려놓았다. 새의 형상을 까마귀로 정한 이유는 까마귀가‘태양’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이다. 돌탑이 재앙을 막겠다는 기원으로 만들었듯이 선돌도 그런 의미에서 세웠다. 선돌 위에 무엇을 얹었을까 지역에 따라 나름대로의 물건을 올려놓으며 의례를 행했다.
그런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자연석 돌을 시용해 마을 어귀 등에 세운 선돌, 선돌을 고인돌(지석묘)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세워졌다.
없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선돌을 고인돌의 표석으로 존재했다.
영암 지역에는 곳곳에 고인돌이 분포해져있다.
영암 지역의 고인돌은 166곳에 12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영암 지역 고인돌 분포는 금천 금정면 일대에 40개 군 325기와 영암천과 월출산인 영암읍과 군서면 일대 39개 군 354기 그리고 남해만과 인접한 서호면 일대 63개 군 431기가 밀집되어 있다.
고인돌은 평지나 구릉, 산기슭, 고갯마루 등 사람들이 생활하던 곳에 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평지 33%, 구릉지 48%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영암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신북면 장산리 주암마을에 55기, 영암읍 회문리 녹암마을에 50기, 영암읍 정암리 회화정마을 32기, 서호면 엄길리 서엄길마을에 35기 등이 대표적이다.
지역 사람들은 고인돌의 형태를 보고 바우배기(서호면 장천리 괴음 고인돌, 학산면 용소리 지소 고인돌), 상여바위(시종면 월송리 송산 고인돌), 칠성바우(덕진면 금강리 강정 고인돌), 두꺼비바우(미암면 학산리 노송 고인돌), 호랑이바우 또는 범바우(군서면 월곡리 호동 고인돌),배바우(신북면 장산리 주암 고인돌, 군서면 월곡리 주암 고인돌), 장군바우(신북면 용산리 용산 고인돌, 행정리 광암 고인돌)로 부르고 있다.
영산강 하류, 외부로부터 문화흡수 용이
영암 지역은 영산강 하류의 강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다. 탁자식, 기반식, 개석식 등의 고인돌을 하고 있는 영암 지역의 고인돌에는 무덤방 안의 부작용유물과 무덤방 주변의 의례용 유물이 있다. 부작용 유물은 돌검(石劍)이 발견되었고 화살촉, 세형동검, 토기, 가지무늬 토기, 대패날석기, 홈자귀, 숫돌이 발견되었다.
영암 지역의 고인돌은 남부 지역에서 보기 드문 탁자식 고인돌이다. 탁자식 고인돌이 영암 지역에 분포하는 것은 북으로부터 무덤 형태를 받아들이는 문화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영산강 유역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당시 재배 세력만이 소유하는 세형동검이나 옥, 검정 간토기가 부장된 것은 고인돌을 축조한 집단의 성격을 암시한다.
영암 지역 고인돌은
영암읍
영암읍 회문리 회의촌마을 앞 도로변에 지석묘(고인돌) 16기가 있다. 2기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파손되었다.
그리고 녹암마을 대나무밭에 지석묘 50여기가 군집하고 있고 논에도 있다. 녹암마을 고인돌이 잇는 곳에는 선돌 3기가 있다.
영암읍 대신리 월등마을 두편 야산에 고인돌 3기가 있다.
삼호읍
삼호읍 망산리 원망산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입구에 고인돌 6기가 있다.
또한 삼포리 엄포마을(삼봉마을) 장천초등학교와 삼봉마을 중간지점 남평윤씨 세장산 옆에 고인돌 2기와 삼봉마을 입구 야산에 6기가 있다.
덕진면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에 고인돌 2기, 노노동의 저수지 있는 곳에 10기, 노노동 말단부에 10기, 부항마을에 3기 등 총 25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영보리 내동마을에 10, 냉천동마을에 11기 등 총 21기가 조사되었으나 9기 밖에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운암리 대천동마을 진입로에 20기의 고인돌이 남북으로 군집하고 있다. 또한 백계리 개양동마을 신촌교회에서 덕진소재지 방향에 고인돌 12기와 새류정마을 백계저수지 주변에 9기 등 총 21기가 있다. 또한 영등리 장등마을 북쪽에 2개소 13기와 영리마을에 두꺼비바우라 부르는 고인돌 1기 등 총 14기가 있다. 또한 금강리 강정마을에 고인돌 3개소에 80기가 조사되었으나 12기만 확인이 가능하다.
금정면
금정면 연보리 연산마을 간이승강장 옆에 5기, 연산에서 석산마을로 가는 길목 하천변에 9기 등 총 14기가 조사되었으나 현재는 5기만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아천리 관송마을에 고인돌 3기, 토동마을 토동저수지 남서쪽에 고인돌 6기, 삼박마을 입구 야산에 고인돌 3기, 동령마을 밀양박씨 세장산 고인돌 2기 등 총 14기가 조사되었으나 6기만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월평리 흥리마을 우산각 주변에 고인돌(각시바우) 3기, 유재석씨 과수원 경계에 고인돌(도령바우) 2기 등 총 5기가 있다.
또한 안노리 연지마을에 고인돌 6기, 모정마을에 고인돌 2개소 8기, 안노마을 안노교회 뒤에 고인돌 4기, 나주해지 접경 감산마을에 고인돌 6기, 통정마을에 고인돌 2개소 15기 등 총 39기가 있다. 감산마을 입구 논둑에 선돌 1기가 있다.
또한 용흥리 안기마을에 고인돌 13기, 용두마을 서당골에 고인돌 2개소 10기, 옥포저수지 서편에 고인돌 28기, 학동마을 2개소 15기 등 총 66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남송리 남송마을 농협창고 뒤에 고인돌 10기가 조사되었고 창고를 건축하면서 5기가 유실되었고 현재 5기만 남아있다. 고인돌이 있는 옆에 선돌 1기가 있다.
또한 연소리 금오동마을에 고인돌과 함께 선돌 1기가 있다.
신북면
신북면 장산리 주암마을에 고인돌 2개소 59기가 있다.
또한 용산리 용계마을 앞에 고인돌 3기가 조사되었으나 현재 고인돌(장군바우) 1기만 남아있다.
또한 이천리 양지촌마을 입구 양씨 선산에 고인돌 5기가 있다.
또한 행정리 광암마을 천자산 구릉지에 고인돌 3기, 광암마을에서 유호정마을로 가는 곳에 고인돌(벼락바우) 3기가 있다.
시종면
시종면 월송리 송산마을 뒤편에 고인돌(상여바우) 8기가 있다.
또한 태간리 신소정마을 태산봉에서 북동쪽으로 내려오는 구릉지 끝자락 반남박씨 선산에 고인돌 21기와 태간리 입석마을 태산봉 구릉지 끝부분에 선돌 2기가 있다.
또한 옥야리 남해포마을 구릉지에 고인돌 5기, 장동마을 1기가 있다.
또한 시종면 월악리 송월마을 앞배월과 뒷배월 삼거리가 양쪽 잡목 속에 고인돌 3기가 있다.
군서면
군서면 도갑리 죽정마을 4개소에 25기가 있으며 그중 도갑사저수지 앞쪽 삼거리에 고인돌 4기, 평리마을 입구에서 구림으로 가는 도로에서 구림교 30m 못 미쳐 우측 야산에 고인돌 10기, 선인동마을 영모정 우측의 소로를 따라 15m 가면 가정집에 고인돌 5기, 선인동마을 김정열씨 집 뒤에 고인돌 6기, 평리마을 김용주씨 집 뒤편에 고인돌 5기 등이 조사되었으나 현재 15기만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마산리 오산마을 회관 북동쪽 구릉지에 있는 대밭에 고인돌 17기가 조사되었으나 현재 2기만 확인 가능하다.
고인돌이 있는 오산마을에는 선돌(입석)이 마을 앞 논둑에 1기, 밭가에 1기, 야산에 1기가 있다.
서호면
서호면 몽해리 몽해마을 서쪽 야산에 고인돌 1기와 복다회 미륵등에 고인돌 7기, 복다회 야산 동북쪽 구릉지 정상에 고인돌 1기, 마을 민가에 1기, 미륵불로 가는 농로 우측으로 고인돌 4기 등 총 13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몽해리 복다회마을 야산에 고인돌 1기가 있다.
또한 청룡리 신흥마을 앞 논에 고인돌 7기가 조사되었으나 현재 1기만 입석 1기와 함께 남아있다.
청룡리 영모정마을에 고인돌 9기가 조사되었으나 현재 7기만 있고, 청룡리 연정마을 3개소에 고인돌 16기가 조사되었으나 현재는 4기만 확인할 수 있으며, 노동마을에 고인돌 5기가 조시되었으나 확인이 안 된다.
또한 엄길리 서엄길마을 서호보건지소와 중앙교회 앞에 고인돌 17기가 있고 이곳에는 선돌 1기가 함께 있다.
또한 장천리 효성마을 서호농협 앞에 고인돌 7기, 우체국 위쪽 감나무과수원에 고인돌 10기, 정자 주변에 고인돌 18기가 있고 정천리 괴음마을의 신흥마을에서 산소마을로 가는 농로 변에 6기, 선사주거지 주변에 고인돌 11기가 있으며 효성마을 서호우체국 뒤편 밭가에 선돌 2기가 있다.
또한 쌍풍리 영풍마을에 고인돌 7기, 장천초등학교에서 성재리 방향의 100m 지점의 논 가운데 고인돌 2기, 장천목장 주변에 5기가 있다. 신풍마을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 좌측에‘산골정’이라 새겨진 비석 뒤에 고인돌 1기, 신풍마을로 넘어가는 야산 고개에 고인돌 2기가 있다.
또한 소산리 소흘마을 300m 지점의 숲속에 고인돌 4기, 영암수출농업인 건물 뒤편에 고인돌 11기, 논 가운데 2기가 조사되었으나 경지정리로 유실되었다. 소흘마을 마을회관 앞에 선돌 1기, 수로 변에 선돌 1기, 학파저수지변 논둑에 선돌 1기가 있다.
학산면
학산면 용산리 용산마을 서호면 아천리에서 용산마을로 들어서면 김해김씨 선산에 고인돌 12기, 아천리쪽 150m 지점에 고인돌 12기, 용산리 북쪽 동산에 고인돌 3기, 용산리 당산나무 앞 대밭에 고인돌이 여러 개 있었던 걸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상월리 상월마을 금영저수지의 상월정수장을 못 미쳐 논 가운데 고인돌 3기가 있다.
또한 학계리 광암마을 입구 첫 번째 집에 석불과 함께 담장 안에 고인돌 21기가 조사되었는데 그중 2기는 수로공사 때 파손되고 집안의 장독대로 이용하고 있다.
또한 용소리 지소마을 민가에 고인돌(바우백이) 4기가 있다. 또한 금계리 독천간 지방도와 독천 묵동간의 국도 사인 독천주유소 뒤쪽 야산에 고인돌 13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독천리 학산파출소 좌측에 민간 묘지와 함께 고인돌 6기가 있다.
미암면
미암면 두억리 달산마을 미산초등학교에서 우측으로 도로변 야산 경사면에 고인돌 6기가 있다. 두억리 장수마을에 선바우라는 선돌 1기가 있으며 두억리 수산마을에서 장수마을로 향하는 길옆 논두렁에 선돌 1기가 서있다.
또한 선황리 율리마을 민가에 고인돌 3기, 당리마을 율리마을에서 당리마을로 가는 길목에 고인돌 10기,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고인돌 8기와 당리마을에서 미암초등학교로 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농로 주변에 민간인 묘와 함께 고인돌 13기가 있다고 조사되었으나 6기는 유실되고 현재 7기만 확인이 가능하다.
율리마을 입구에 선돌 1기, 마을 입구 창고 옆에 선돌 1기가 서있다.
선황리 대초지마을 구릉지 정상 부분에 고인돌 9기, 노송마을 노송마을에서 당리마을로 가는 농로의 노송마을 가장 동쪽 민가에 고인돌 3기가 있다.
또한 춘동리 춘동마을 면사무소 전방 오수처리장 뒤편에 고인돌 3기가 조사되었으나 매몰되고 1기는 파손되었다. 또한 채지리 장정이산과 선황산 사이의 낮은 곳에 고인돌 1기가 있다.
또한 채리 시기마을 고인돌 1기가 잇다.
고인돌(지석묘)이 있는 곳에 세워진 선돌(입석)은 영혼을 달래주는‘혼위석(魂慰石)’이다.
선돌은 망주석, 위령비, 현충탑
오늘날 무덤에 세우는‘망주석(望柱石)’의 역할을 띠었다. 무덤의 영혼(靈魂)을 지키는 일종의‘위령비(慰靈碑) 또는 위령탑(慰靈塔)’이다. 국립현충원의 현충탑도 선돌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선돌에서 제의(祭儀)를 하며 고인돌에 묻힌 넋(魂)을 기렸다. 선사시대에서는 고인돌의 넋을 기리기 위한 선돌을 세웠으며 오늘날에는‘위령비’나‘위령탑’이 됐다.
선돌은 방패석, 수호석
또는 선돌은 무덤을 지키는‘방패석(防牌石)’또는‘방위석(防衛石)’으로 외부로부터 무덤의 침입 막는, 이 무덤들은 산성한 곳이니 함부로 들어오거나 훼손하지를 말라는 묘지를 지키고 보호하는 수호(守護)의 의미로 세웠다.
또는 무덤의 맑은 영혼을 지키는‘수호석(守護石)’으로 이 무덤에 나쁜 악귀(惡鬼)나 액운(厄運)을 막아주고 부정(不淨)이 안타게 하거나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로써 선돌은‘수호신(守護神)’역할을 띠었다.
또는 무덤의 위치를 알리는‘이정표(里程標)’또는‘안내석(案內石)’으로 무덤이 어느 쯤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무덤가의 선돌은 방향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는 매장자의 성향을 알리는‘신분석(身分石)’으로 묻힌 분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렸다.
또는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유허비(遺墟碑)’로 유지비(遺址碑), 유적비(遺蹟碑), 구기비(舊基碑)와 같이 남긴 터(자취), 옛터의 뜻으로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歸養)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키는 알림 표석이다.
돌의 형태로 인품, 풍모, 생애 살펴봄
또는 무덤의 이미지를 알리는‘형상석(形象石)’으로 돌의 생김새를 통한 이 무덤에 묻혀있는 사람은 어떠한 인품(人品)이었고, 풍모(風貌)였고, 생애(生涯)였고,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나타냈다. 돌의 형태에 따라 그 사람의 생김새나 생활, 사상철학이나 정신, 살아온 발자취를 보여주는‘태어나고 자란 환경의 생활상, 정신세계의 철학과 인생관, 성립배경과 변천과정, 시대상황 및 생활풍습, 문화와 역사’등 그 무덤의 모든 내용을 읽어볼 수 있게 했다.
원시인들은 형(形, shape)을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 전달 수단이자 방법으로 삼았다. 원, 세모, 네모, 오각형, 육각형, 팔각형, 마름모, 사다리꼴 등으로 성격을 알아보게 했고 사상을 표시했다.
형은 면과 함께 입체(from)와 공간(space)을 표현하게 되는데 이것은 2차원의 화면에 3차원의 환영(幻影)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점이 모여 선이 만들어지고 원이나 삼각형과 같이 닫힌 선의 경계로부터 형이 만들어진다.
사물의 외곽선을 둘러싸고 있는 면이나 공간을 하나의 형태로 지각하게 하며 이것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원(구), 삼각형(뿔), 사각형(육면체), 원통, 원반 등의 구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원형
원은 평면의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點)을 모두 모아 놓은 집합과 우주의 순환을 뜻하며 원은‘완전성, 전체성, 불멸성, 동시성’등을 투영한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결핍과 불완전성을 절감하며 원의 형태에서 필멸(必滅)하는 세상의 것들과는 달리 불멸(不滅)하는 신적인 무엇인가를 발견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원은 끝도 없이 반복되는 무한이며 자기 충족적인 형태로 고대인들에게 받아들어졌다. 하늘의 통일성의 태양과 달의 순환, 창조와 완성과 지속 등 창조자와 창조자가 만들어낸 무한한 우주가 원으로 표상된다. 영원무궁한 우주(宇宙)를 둥근 원이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성(無限性)이 원의 의미에 내재해 있다. 원은‘하늘(天, heaven)’을 상징한다.
삼각형
삼각형은‘천지인(天地人)’삼재(三才)의 조화를 의미한다. 삼각형은‘인간’을 상징한다. 삼각형의 모는‘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을 상징한다. 또한 정삼각형은‘영적인 세계’를 말한다. 삼각형문은‘여근(女根)’또는‘재생(再生)’의 의미를 지닌다. 삼각문의 배열에는‘다산(多産)’을 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사각형의 정사각형은‘땅(地, earth)’을 상징한다.
사각형
사각형은 수직이나 수평이 아닌 기울인 각도 또는 화면 안에 비스듬하게 나타난 그림, 즉 이 각도는 수평선과 수직선이 옆으로 기운 것 같기 때문에 긴장. 초조. 불안정,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 사각형의 각도는 무게중심이 사선 방향으로 쏠리므로 운동감과 속도감이 증가한다.
그래서 사각형 형태는‘불균형한 느낌, 속도감, 긴장, 혼란, 심리적 갈등, 긴장, 변이, 불안정감’들을 연출하는데 쓰인다.
사각형은 사면을 나타내며 동서남북을 의미한다. 또한 변의 길이를 말한다. 사면의 길이가 같다면 안정(安定), 사면의 길이 다르다면 불안정(不安定) 상태를 말한 것으로 한쪽 면이 짧게 표현됐다면 길게 된 쪽보다 못하거나 부족하다는 의미로 나타낸다. 한 쪽 면이 구부러져있다면 구부러진 쪽으로 방향을 지시를 하거나 무언가가 치우쳐져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반듯한 돌, 비틀어진 돌, 울퉁불퉁한 돌 뾰족한 돌 등 돌의 형태로 점술(占術)을 보거나 미래의 세계관(世界觀)을 내다봤다. 그 형태에 기원의 마음을 달리하며, 돌을‘구원자적(救援者的) 신석(神石)’으로 또는 영혼이 피어나게 하는‘영석(靈石)’으로 삼았다.
정사갹형
정사각형은‘온전함’을 이룬 상태, 직사각수직형은‘상하조합’을 이룬 상태, 직사각수평형은‘안정’을 이룬 상태, 마름모는‘역동성’을 이룬 상태, 정오각형은‘구성’을 이룬 형태, 정육각형은‘다양성’을 이룬 상태, 정팔각형은‘완벽’을 이룬 상태, 마름모는‘생동’을 이룬 상태, 사다리꼴은 자유분방함을 이룬 상태를 뜻한다.
선돌이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면 선돌이 세워진 곳이 온전함을 낳기를 바란다는 뜻이며, 직사각수직형을 이루고 있다면 위아래가 조화를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며, 직사각수평형을 이루고 있다면 안정적인 상태로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오각형
정오각형을 이루고 있다면 형태적 정신적 구성이 잘 짜졌으면 하는 의미이고, 정육각형을 이루고 있다면 다양한 일들이 막힘없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함이 담긴 것이며, 정팔각형을 이루고 있다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잇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완벽한 세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유토피아(utopia)의 사상을 담은 것이다.
마름모형
마름모를 이루고 있다면 항상 생기가 넘친 인간의 삶이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을 바란다는 뜻이며,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자재(自由自在) 또는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이 자유로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모든 일이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원, 세모, 네모의 도형(圖形)을 보면 원은‘낙천적, 긍정적, 공동체, 협동심, 사람중심, 대인친화력’이 특성이며‘누가?’또는‘우리 조직(팀)은 누구죠?’하며‘평화’를 갈구하고 유지하려 한다. 세모는‘카리스마, 보스기질, 강한 리더십, 체계적 능력’이 특성이며‘완료!’또는‘마무리 해!’하며 미래지향적인‘생산적 사고’를 한다. 네모는‘카리스마, 보스기질, 부지런한 일꾼, 일 중심, 성실성’이 특성이며‘어떻게?’또는‘잘 처리하세요?’하며 대지의‘평온함, 안정감, 단단함’을 이루려한다.
스퀴글형(S자형)
또한 S자 같은 구불구불한 스퀴글(squiggle)의 도형을 보면 표현성, 독창적, 창의적, 독창적, 완벽한 준비성이 특성이며‘왜?’또는‘왜 그렇게 해야 하지?’하며 미래지향적인 상상력으로 혁신의‘기발한 아이디어’를 남기려한다.
형의 요소와 도형에서의 보듯 선돌의 형태에 따라 그 선돌의 특성과 지향점을 엿볼 수 있다. 선돌의 형태는 나름대로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소망이 담겨져 있음을 읽어볼 수 있다. 선돌의 형태학적 생김새에 따라 그 지역의 특성(特性)과 내면(內面)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선돌이 윗부분이 뾰족한 상태라면 남성을 뜻한다. 양(陽)에 해당하며 그런 선돌이 세운 지역은 음에 기운이 넘쳐 음기를 조절하거나 막기 위해서다. 반대로 음(陰)의 기운이 세면 윗부분이 둥근 형태를 세워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한다. 마을 주변에 양의 기운 센 바위 등이 있어 그 바위로 인한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판단에서 이를 막으려면 음의 바위를 세워 두면 그 강한 양기운의 바위가 음 바위로 인한 기가 약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역의 상태를 보고 그에 타당한 선돌을 새웠다.
그 지역에 뾰족한 돌을 세웠다면 분명 그 지역은 음의 기운이 세다는 증거다. 마을에 남성에 해당된 나무나 바위가 있어 나무나 바위가 짝을 못 이루고 있으면 성질을 부릴 것이라는 맏음에 짝을 지어주고자 암 바위를 세우거나 나무를 심어줬다.
마을의 당산나무와 선돌은 그런 이유에서 함께 한 것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건너 마을에 선돌은 남성이어서 자기 마을에 헤를 끼칠까 싶어 여성 바위를 세우기도 했다.
선돌의 전설에는 한 마을의 샘이 있는데 이 샘은 음수이기 때문에 자손 중에 음기가 강한 아이가 배출된다고 봤다. 그래서 풍수상 이런 형세에는 음기를 흘리든가 충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렇지 않으면 음탕한 여자들의 득세로 마을이 음탕짓을 한 마을로 안 좋은 이미지가 심어져 결국 마을은 좋지 않은 마을로 여겨 부끄러움이 생기는 등 위상이 추락해지고 하여 음탕한 여자가 많이 배출되지 않게 그 방법으로 양기를 모을 남성 성기를 닮은 돌을 세워뒀다. 그후 마을에선 음탕한 자손이 배출되지 않았고 훌륭한 인재만 배출되었다. 이러한 풍수의 비보는 음기를 양기로 충화시킨 사례이다. 요즘은 음기가 강한 술집이나 모텔의 양택풍수에도 많이 적용한다고 한다. 강한 음기를 막기위해 양기의 돌 등을 갖다 놓은다.
다른 예로 영암 독천의 뒷산에 오일장이 내려다 보이는 천하의 명당에 어느 갑부가 선조의 묘를 써서 날로 번창하였다. 호사다마라고 산소 앞에 음수(陰水)가 흘러 후손들이 간음(姦淫)을 일삼아 음기(陰氣)를 막기 위해 우시장을 독천으로 옯겼다. 그때부터 간음하는 무리가 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음기가 세면 그에 합당한 방법으로 남성들이 소시장을 찾을 것이라고 보아 산소 앞에 음수가 흘러 후손들이 간음을 일삼은 일을 막을 수 있는 방안으로 우시장을 세운 것이다. 그렇듯 선돌 또한 남성의 돌을 세운 것도 음기를 막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우뚝 솟은 바위의 모습에 사람들은 영험을 기대하며 신비의 대상으로 신격화시켜 마을의 수호신이나 장승처럼 생각하고 선돌에 볏짚이나 새끼로 금줄을 만들어 묶고 제를 올렸다.
사냥을 하기 위해서나 농업이나 채취에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방법 중 하나가 비로 노동력의 인구인데 인구를 늘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출산이라 이를 중요시 하며 남성의 성기처럼 우뚝 솟은 돌을 생식적 기능과 연고나시켜 신비한 기운을 가진 것으로 보고 숭배하던 자연주의적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선돌이다.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해온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선돌,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는 선돌에 숭배대상으로 의지하며 기원을 해왔다. 주로 정월 초나 대보름 날에 마을의 안녕을 빌고 감사드리는 기원제가 있고 가뭄에는 기우제를 올렸다. 또 주민들은 출산과 무병장수를 빌었으며 특히 어린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등의 그 어린이를 선돌 신에게 팔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선돌을 세워 간절함을 전하며 빌었다.
선돌은 사람들에게 신체(神體)로 받들어져 제의를 수반하는 게 보통 나름의 사연을 담은 전설과 함께 신성불가핌의 대상으로 여졌다.
학자들은 선돌의 그 연원에 대해 원시사회의 정령숭배와 연결짓는데 남성생식기 숭배, 고대사회에서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원시신앙물이 조선시대에는 마을 제사나 기자암 정령의 힘을 빌려 아기를 낳고자 한 기자(祈子) 풍습과 결부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기자암인 남근석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여근석도 곳곳에서 양기를 발휘하고 있다. 여근석이 잇는 것에는 반드시 근처 어디엔가는 남근석도 함께 존재함을 찾아보게 된다.
이밖에도 남근석, 여근석이 아닌 산의 지형이 여근곡(女根谷)을 한 곳도 있다. 다산의 기운이 서려져있다고 보고 있다. 여근이 있는 곳 어디엔가 필시 조화를 이룬 남근석 또는 여성의 기가 너무 세서 이를 완화하거나 달래기 위해 남성의 선돌이 있으리라 본다.
한 예로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에 있는 남근 모양의 자연석이 있다. 이 남근석은 여근과 닮은 마을의 형국을 누루기 위해 세워잔 남근숭배사상의 상징이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땐가 마을에 돌림병이 만연하여 주민들이 크게 걱정하고 조심하던 차에 마을 형국이 여근과 비숫하기 때문이라고 여겨 마을의 재앙을 막고자 남근석을 세웠다는 구전이 있다.
또한 충북 괴산 연풍면 은티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은티마을이 다른 산골 마을처럼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된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마을도 역시 여근곡이기 때문에 이를 맞춰줄 어떤 장치가 필요했다. 마을에서는 마을이 번창하고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는 남근석을 세워야한다는 논리가 가마되었다. 여근과 남근을 합체함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인식 때문이다.
여근곡만 있을 경우 마을이 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여자들이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는 풍수 비보(裨補)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봤기 때문에 남근석을 마을 입구, 여성 성기가 있는 곳에 세움으로써 그 바람기를 막는 역할을 하게 했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남근석보다는 탑(塔)이라는 장치로 많이 이용되었다. 마을이 배(船)의 형국일 경우가 그러하다.
과거에 배라는 것은 돛이 달렸기 때문에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한다. 그렇기에 바람이 불면 마을이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돌탑 또는 선돌을 세웠던 것이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도마2리 탑골 또는 탑동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마을 입구에 아름들리 소나무 아레 쌓아 놓은 누석은 3층으로 되어 있다. 누석 상단에는 뾰족한 돌이 하나 놓여 있고 주위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오랜된 노송의 소나무가 지키고 있다.
이 누석이 읶는 도마리는 배 형국으로 배는 물위에 뜨고 배가 떠내려가면 마을 전체기 떠내려가게 되아 마을이 없어지게 되면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는 믿음 때문에 배가 떠내려 가지 못하도록 배를 묶어 두는 말뚝이 필요한데 이 말뚝 역할을 하는 누석인 것이다.
또한 누석으로 왕산면 목계리 목계초등학교 가기 전에 있는 오른쪽으로 목계교를 건너 마을길로 조금 들어가면 금방 찾을 수 있는 돌탐을 쌓아 놓은 누석을 찾아볼 수 았다.
이곳은 풍수지리설상 배형국이어서 배를 안정시키고 균형을 위하여 돌을 쌓아 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쌓은 돌은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마을사람들은 마을이 배 형국이어서 배가 바람 또는 물결에 마구 흔들거리거나 또는 난파되거나 좌초되지 않게 또는 떠내려 가지 않도록 돌을 주워 마을 입구에 돌탑을 쌓았다.
님근석은 기자신앙의 대상물만은 아니다. 마을을 수호하는 신앙체로 자리잡았다. 남근석을 아들을 많이 낳기를 다산의 의미로 세운 것이기도 하지만 남근석을 모시는 신앙의 중심은 바로 마을의 '평안과 풍요로운 수확' 을 기원하는 의미로도 세웠다.
마을을 다니다 보면 마을 입구에 조탑, 임석, 벽수(솟대), 장승 등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비보물은 마을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좋은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수구막이다.
남원시 송동면 소재지 못 미처 좌측으로 약 15분 가령 걸어가면 송내리 송내마을 정남방 100m 지점 논 가운데 남근석이 서 있다. 이 바위의 기능은 마을의 음기를 누루기 위함이다. 마을 야산이 풍수지리상 남근형국이고 마을이 잇는 곳이 여근형국이기 때문이다.
님근석(男根石)은 양근석, 입석, 선돌, 장군석, 낭근석, 좆바위, 불알바위 등으로 불리고 여근석(女根石)은 밑바위, 여궁, 처녀바위, 샅바위 등의 명칭을 갖고 있다. 이런 바위들을 통틀어 성석(性石)이라고 한다.
이러한 바위들은 에부터 숭배 대상이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 및 풍어를 기원하는 토속신앙의 대상이었다. 풍수지설의 음양조화를 이루기 위해 비보압승(裨補壓勝)의 대상으로도 성석이 이용됐다. 허한 곳이나 부정한 지형에 성석을 세워 마을의 평온을 기원했다.
선돌은 이미 자연으로부터 있어왔다.
기원전 3000~5000년 경부터 선돌문화(거석문화)가 나타났지만 선돌은 자연에서 곳곳에 세워진 채 영험함을 발휘했다. 인간이 선돌을 세우기 전에는 산 등에 자연석이 우뚝 세워져있었다. 선돌은 인간이 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부터 모든 만물을 위한 영향을 끼쳤다. 영적으로 자연의 기운을 스며들게 했다. 그런 영험한 돌은 자연의 탄생을 도왔고 잘 자라도록 온전하게 유지가 되도록 지켜줬다.
입석은 산 곳곳에서도 명칭을 갖고
인왕산 정상을 오르면서 밑으로 떨어질 듯이 바위에 붙어 세워진 입석, 그런 입석들이 설악산,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수락산, 불암산, 불곡산, 인왕산, 지리산, 월출산, 월악산, 덕유산 등 전국 곳곳의 산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 신비한 입석들이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또는 바위에 색다르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돌을 보고 신기하다 라고 감탄의 말을 내뱉는다. 우리는 돓의 형체를 보고 학바위, 매바위, 새바위, 돼지바위, 팽귄바위, 두꺼비바위 이렇게 각자 명칭을 붙어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기원을 하게 된다. 산 위의 바위에 얹어진 바위, 입석은 지상의 선돌로 자리하게 했다.
지상의 선돌 산의 입석 영감
자연 그대로의 있는 바위에 세워진 돌을 신비스럽게 여기고 신성시하였던 엣 사람들은 그런 영험이 있어 보이는 바위에서 영감을 얻어 산 위가 아닌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며 신기를 발휘해주기를 바랐다. 주변에 바위를 찾아 합당한 의미가 담긴 바위를 선택해 좋은 자리, 즉 위치와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곳의 명지에다 1톤에 가까운 큰 바위를 낑낑 거리며 운반해 세웠다. 영험의 바위로 신성시하며 신석(神石)으로 모셨다. 산에 있던 바위의 입석 등에 기원을 했던 것에서 마을에 선돌을 세워 늘 가까이서 수호, 다산, 풍요, 안녕, 평화 등의 기원의 마음을 담았던 거석문화인 선돌사상은 오늘날에는 탑, 비석, 표지석 등으로 그 명맥을 유지, 사상이 담긴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산의 기암괴석, 우리 생활 가까이 선돌로
산의 거석문화 사상개념이 지상의 거석문화 사상개념으로 발전하여 인간에게 산앙심을 심어줬다. 저 높은 곳에 자리한 기암괴석 입석을 쳐다보면서 기원했던 것을 사람과 가까이, 즉 마을 어귀에 둔 채 돌을 가까이 하며 신성시했다.
선돌은 생식번력과 자손번창
선돌은 벽사, 수구막이 역할을 등 수호 기능을 뛰면서 죽은 사람을 상징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 영역 기능이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자연숭배에서 나타나듯이 제사신앙이 수반되어 있어 마을 사람들의 신앙대상으로 신격화되기도 하고 '다산과 장수' 를 바라는 풍요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선사시대에서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생식번력과 자손번창; 이었다. 그래서 자식을 많이 낳아달라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오래 살게 해달라고 선돌이라는 자연신에게 간절함을 담았다. 바위를 여성, 남성으로 구분해 세워둔 이유가 다산과 장수를 바라는 뜻에서 그랬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까닦에 대체적으로 마을 어귀나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논밭 가운데나 고인돌 옆에 있는 경우도 있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2m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드물게 6~7m 되는 것도 있다. 선돌의 형태는 둥근뿔, 둥근기둥, 모난뿔, 모난가둥 등으로 다양하난 우리나라는 대부분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길쭉한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한 큰 돌을 어떤 믿음의 대상물이나 특수목적을 가지고 세운 돌기둥 유적을 말하는 선돌(입석), 고인돌과 열석과 함께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거석문화의 대표적 유적으로 본다.
자식을 많이 낳게 해달가고 세운 선돌
낳은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주게 해달라고 세운 선돌, 자식이 강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세운 선돌, 선돌은 그러 의미를 크게 두면서 퓽요를 빌었고 또 한편으로 지역의 경계와 수호기능을 두면서 안전.안정한 삶을 영위하게 해달라고 세운 선돌로서의 의미로 조성했다. 자연 그대로의 있는 바위의 기자임인 남근석과 여근석 우리 조상들은 그런 바위에 영험이 있다고 보고 신성시하며 기를 받고자 그 바위 앞에 치성을 드렸다. 지금도 그런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서 풍요를 바라고 있다.
국태민안, 세계평화기원탑 선돌사상 영향
선돌은 입석, 돌꼬지, 도두, 석주, 선바위 등으로도 불리며 지역에 따라 구지바위, 할머니탑, 할아버지탑, 돌장승, 수구막이, 수살장군으로 명칭을 하며 지역 민들에게 신앙의 대상물로서의 신앙시해 왔다. 국태민안, 세계평화기원을 위해 세운 탑은 선돌의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바위에도 음과 양이 서려져있다.
기자암 또는 남근석이 있는 곳에 양기가 세다고 여겼던 우리 조상들은 양기를 받기 위해 그 바위를 찾았고 지나가는 길에도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남근석뿐만 아니라 여근석에도 마음을 전했다.
하나의 돌과 바위에도, 모든 자연에는 음(陰)과 양(陽)이 서러져있다고 본 사상은 선사시대부터 있어왔다. 어떤 자연물은 양의 기운이 세고 어떤 자연물은 음의 기운이 세다고 느꼈던 선조들은 오늘날의 현세인들보다 더 자연숭배와 기운에 믿음을 가져왔다. 자연물에 정령(精靈)이 있다고 보고 영험함을 발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관점을 다를바가 없다.
그래서 선돌이라는 거석문화가 출현했고 선돌문화를 통해 안위와 번영의 삶이 되고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랐다. 선돌이라는 자연숭배사상은 하나의 미신이 아닌 '천신(天神)' 이었다. 민간신앙으로서 문화를 꽃피워왔지만 단순한 민간신앙의 대상을 넘어 하나의 국가적인 신앙물로서 인간을 이롭게 한 온 백성의 정신지주였으며 이것은 나아가 보다 더 나은 세상, 즉 온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세상을 일깨우거나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고 만들어 세우려는 천지개벽의 '신화창조(神話創造)' 였다.
선돌은 음과 양으로 구분해 지역이나 사물의 형편과 상황에 따르거나 맞춰 각기 다르게 세웠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게 하고 양의 기운이 세면 음의 기운으로 조절을 하고 하고 양의 기운이 약하면 양의 기운을 북돋을 양의 형태를 한 돌을 세운다거나 나무를 심었다. 어느 한쪽이 세지 않게 적절하게 조화로운 상태가 되고 유지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여기에 선돌이 등장했다.
도자기에도 음과 양의 표현 사상담아
청자를 보면 아래가 풍만하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가늘고 뾰족한 모양이 있는데 이 청자는 남성을 상징하고 반대로 위가 풍만하고 아래는 위보다 더 가는 형태를 한 것은 여성을 상징한다. 청자나 백자 등의 그릇이나 병, 항아리 등을 보면 음과 양의 의미를 담아 빗어냈다.
또한 풍만한 형태를 한 달항아리도 음의 해당한 여성을 상징하며 다산과 풍요를 나타낸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음양(陰陽)의 조화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음은 땅이요, 양은 하늘이다.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결합하여 하나의 우주가 탄생되었다고 본다.
모든 사물 현상은 서로 대립되고 상반되는 속성을 가진 2개의 측면, 즉 한 측면은 음(陰), 다른 측면은 양(陽)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것으로 사물 현상의 발생과 변화 그리고 발전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음과 양은 상대적이면서 대립되는 속성을 가진다. 예를 들면 물과 불, 찬 것과 더운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습한거나 젖은 것과 마른 것, 밤과 낮, 머물러 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 흐린 것과 맑은 것,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위로 올라가는 것, 땅과 하늘, 음지와 양지 등에서 음과 양으로 구분했다.
음과 양은 서로 상대적이고 대립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의존하고 통일되어 있으면서 서로 발생시키고 조장시킨다고 보았다.
음과 양은 상대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음양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정상 조건에서는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상대적인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의학서에는 몸에서 음양의 상대적 균형이 깨지면 병이 생긴다고 봤고 치료는 이 깨진 음양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풍수지리설 체계화된 학문
음과 양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상에는 풍수사상을 들 수 있다. 풍수는 생기가 흩어지고 머무는 현상에서 시작해 음양론과 오행설을 토대로 땅에 관한 이치를 체계화하여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학문으로써 풍수지리설이라고 부른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환경을 대변해주고 있는 풍수의 풍(風)은 기후와 풍토를 지칭하며, 수(水)는 물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도읍이나 마을의 자리 잡기, 집터 잡기, 물자리 찾기, 정원수의 배치, 길내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땅을 보는 기본적 시각, 즉 풍수의 사상성은 인문주의적 입장과 같다. 또한 철저한 윤리성과 인과응보적 토지관은 오늘날 사회지락학자들의 지역불평등에 대한 태도와 일치된다. 이런 면에서 풍수는 인류의 출현과 함께 자연스럽게 형성, 발전되어 온 땅에 대한 태도의 체계화라고 할 수 있다.
땅에도 생기의 혈관이 있다.
풍수의 기본 논리는 일정한 경로를 따라 땅 속을 돌아다니는 생기를 사람이 접함으로써 복을 얻고 화를 피하자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혈관이 있고 이 혈관을 따라 영양분과 산소가 운반되는 것처럼 땅에도 생기의 길, 즉 혈관인 경락이 있다는 것이다. 경락에는 음과 양을 뿌리로 둔다.
풍수지리는 만물이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이 살고 있는 땅도 음양오행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풍수지리는 양택풍수와 음택풍수로 나눈다. 집과 건물의 터를 잡는 것을 양택풍수라 하고, 묘자리를 잡는 것을 음택풍수라고 한다. 양택풍수는 사람의 주거지지고 음택풍수는 죽은 사람의 안장지다.
양택. 음택 지기로 발복
양택과 음택은 모두 지기의 영향으로 발복이 나타난다. 음택의 발복 속도는 느리지만 여러 자손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주게 되며 양택은 그 집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사람 그리고 현재 거주하는 사람에 한해서 매우 빠르게 영향을 준다.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음과 양의 기본적인 기운의 운동으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도 하며 무한한 변화를 가져다 준다. 음양은 만과 여, 낮과 밤, 해와 달 등 모든 자연은 음과 양이라는 기본적인 기운이 중심이 된다. 이러한 음양의 기운은 흐름을 가지게 된다.
기가 막히면 병이 된다.
끊임 없이 흘러야
기는 끊임 없이 흘러가야 된다. 막히면 뚫고, 많은 기운은 덜어내고, 부족한 기운은 채워주어야 되며 기는 끊임 없이 흘러야한다. 기는 막히면 병이 된다.
음양풍수는 음택도 보지만 양택을 보고 음양의 기운의 역할이 없이 소통이 되는지를 볼 수 있다. 집안 기운의 흐름이 안좋다면 병이 생길 수 있고 돈이 나갈 수 있으며 우환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주위도 기가 원활하게 소통이 되어 흘러야 되는데 기운의 흐름이 약하게 되면 병이 생기고 우환이 생기게 마련이다.
음양이 서로 조합하면
풍수는 스스로 이루어진다.
음양부합 자성풍수(自成風水다. 지리의 형태가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형세가 혈(穴)을 중심으로 모아지면 당연히 바람막이도 된다. 형세가 흩어지면 바람도 흩어지고 물도 흩어진다. 풍수에서의 장풍(藏風)은 바람을 막는 의미도 있지만 물을 가두어 두는 주작(朱雀)의 역할을 한다. 선돌은 그런 의미로 역할을 띠었다.
풍수에서의 득수(得守)는 물을 모으는 구조로 기를 의미한다. 장풍(藏風)은 모아진 물을 유지하는 것으로 역시 기를 의미한다. 기는 믈의 어머니다. 물을 낳은 것이 용호의 구조인데 아버지의 역할로 득수이고 이 물을 잘 간직하는 것은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역할로 장풍을 의미한다. 선돌은 풍수의 음양론과 오행설에서 세운 돌이며 신앙의 상징물이다. 선돌에 정령이 서려져있으며 그래서 선돌을 소중히 다루었다.
민강신앙 바탕을 이루는
정령(精靈)은 무엇일까?
아마 풍수지리와 과학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정령은 '만물의 창조자' 이며 앞으로도 만물을 무궁무진하게 생산할 수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정령은 자연과 인간의 길흉을 지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정령은 초목이나 무생물 등 갖가지 물건에 붙어 있다는 혼령, 나무, 돌, 산, 강 등 모든 것에 제각기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숭배사상으로서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한다.
동양철학에서는 우주의 본원을 에너지인 기로 여긴다. 이 기가 작용하여 만물을 형성하는데 그 과정은 음양과 오행의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우주의 생성과 변천과정을 음양오행이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을 음양으로 구분한다.
우주의 본질은 기(氣)다. 기는 어느 곳이든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존재한다. 새로 생기기도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한 것으로 불변형질(不變形質)이다. 기가 작용하여 만물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음양과 오행의 법칙에 의해서 생성한다고 봤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길흉화복(吉凶禍福) 역시 음양오행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음양의 조화는
그 어느 곳이든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생성 및 상극작용과 유사하다. 한쪽으로 기울면 바로 잡으려는 복원력이 작동하고 있듯이 음양의 상생과 상극작용은 그 어느 곳이든 다가가서 안부를 묻는 습관이 있다.
음양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과학, 공학, 역사, 예술, 체육, 철학, 명상과 우주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큼 음양의 조화는 우리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조화가 깨지면 모든 것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파괴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음양에는 음식이나 색에도 그 영향이 끼친다.
음양의 음은 '땅(地)' 이고 양은 '하늘(天)' 이다. 하늘과 땅이 통하여 만물을 생성하고 키워내며 순환하여 모든 만물이 무궁히 발전하는 것이 음양의 조화이다. 음은 한마디로 여자요, 양은 남자이다. 음양이란 따로 떨어져 각기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하면서 그 특징을 달리한다. 음양은 상대적인 개념이 없이 혼자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음양은 하늘과 땅, 남편과 아내, 밤과 낮, 빛과 그림자, 작다와 크다, 낮다와 높다, 정적인 것과 활동적인 것 등 현실적인 물질은 물론 추상적인 개념도 모두 포함된다.
음양에서 양은 기운을 말하고 음은 믈질을 말하기도 한다. 양의 기는 가볍고, 음의 물질은 무겁고 형체가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양의 기운인 기를 대표하는 것이 불(火)이 되고, 음의 물질을 대표하는 것은 물(水)이 된다. 기는 물질을 만나 생병을 잉태하고 물질은 기를 만나 활동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기운과 물질은 함께함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결합체가 된다.
음과 양으로 결합체를 이루고자 한 것에는
선돌이 있었다.
선돌의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하려고 세운 돌이다. 돌을 다루었던 기원전 2000~3000년 경 석기시대의 신석기인들은 돌을 신성시했다. 그들은 모든 삶에 있어서 돌에 의지했다. 돌을 쪼아 도끼나 칼 등의 생활도구, 화살촉 등 사냥도구로 이용했다. 그들은 돌에 정령이 있다고 보았으며 돌을 매우 신성시하며 선돌 같은 용도로 삼아 신앙시했다. 모든 삶은 돌에서 비롯된다고 봤던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었다.
돌읋 신성시했기에 그들은 돌에 정령이 담겨져있다고 보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선돌을 세웠다. 신석기인들은 음양오행의 기운을 돌에서 나오고 돌이 소통을 해준다고 믿었다. 인간과 자연, 자연 또는 인간과 우주와의 연결체는 선돌이었다.
풍수지리설은 수천 년간 전통과 맥을 같이한 생존과학이자 생활과학이며 자연과학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인생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제1의 생활기술이며 생활의 지혜이다. 우리 민족에게 풍수는 생활과 밀접한 삶의 중요한 요소였으며 살 만한 터전을 가꾸는 일 자체가 풍수였다.
한국인은 풍수 논리에 삶을 끼워 맞추기보다는 살아가는 방도로 풍수를 유연하게 활용했으며 부족하다 싶으면 보완해서 살 만한 터전으로 만드는 지혜를 발휘해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기층사상(基層思想)을 이루며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우리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 풍수지리학은 현재까지도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의 생황이자 자연과학인 풍수지리, 인생은 풍수에서 또는 세상도 그런 사상에서 좌우한다고 믿었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모든 일들이 잘 풀리기를,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선돌을 세웠다. 풍수를 좋게 하는 데는 선돌이 가장 적합하고 영험이 있다고 봤다.
풍수는 부부의 화합, 아이들의 성장과 학업능률 항상, 어르신들의 건강문제, 재산의 증식 등 인간사의 모든 길흉문제의 해결은 물론 현대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는 많은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최상의 콘텐츠다. 풍수는 인간사의 모든 길흉화복의 문제의 해결을 넘어 이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 개인의 명운을 넘어 국가의 운명도 풍수지리를 통해 내다볼 수 있다.
거석문화의 기조는 풍수(風水)이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유행했던 선돌, 거석문화의 기조는 풍수이다. 풍수지라학에 선돌을 이용해 음양을 다스렸다. 선시인들은 선돌이리는 돌에 개인사의 일과 지역과 나라의 앞날도 생운과 번영을 걸었다. 선돌은 미래의 신으로 보고 앞날에도 아무탈이 없길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랐다. 선돌을 어떤 모양으로 어느 곳에 세우냐에 따라 음양의 조화가 잘 되고 안 되고 기운이 상승한다는 것을 알고 선돌 하나를 세우는 데도 신경을 썼고, 선돌은 어쩜 풍수지리설을 적용한 선돌이 세운 자리가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 좋은 기운이 발복한 명당이 아닐까한다.
모든 삶과 미래는 선돌로 통한다.
모든 길과 세상은 우주로 통한다고 했듯이 모든 삶과 미래는 선돌로 통한다고 봤던 선돌을 중요하게 여기며 신성시한 선조들이었다.
지구상 또는 우주의 모든 것들은 음양으로 이루어졌다. 음양을 나타내 보이는 데는 다양하게 적용, 드러내고 있다. 암것이 있으면 수컷이 있는 게 만물의 생태적인 특성이다. 이런 생태적인 음양의 원리를 선돌이나 도자기 작품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선돌은 선석(仙石)이다.
선돌은 세운 돌이라고 해서 입석이지만 신성한 돌의 선석(仙石)이기도 하다. 음양설에 의하면 우주 일체의 현상은 태극(太極)에서 분한 음양 양 기운의 동정에 의하여 현멸(現滅)하고 장쇠(長衰)하는 것으로써 동물이나 인생도 공히 음양 원기의 지배를 받아 생장하고 병사한다는 것이다.
선돌에는 분명 음양의 기운이 다분하게 들어져있다. 신성의 돌이 아닐 수가 없다. 꽃이피었다 지고 융성했다가 쇠퇴한 영고성쇠(榮枯盛衰), 흥하고 망하고 융성하고 쇠퇴한 흥망성쇠(興亡盛衰), 길하고 흉하고 불길하고 복스러움의 길흉화복(吉凶禍福) ,나아가서 백반 제사에 이르기까지 음양의 작용에 따르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음양법칙을 동찰(洞察)하면 자연과 인간의 상관관계를 밝힐 수 있다.
선돌을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
선사시대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다. 원시신앙, 애니미즘, 토테미즘 등의 신들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였다. 여러 신들과 연결고리를 하는 데는 선돌이라는 거석이 있었다. 선돌을 매개체로 하여 인간과 신과의 교감을 했다. 선돌을 통해 교감을 하면서 간절한 소망을 담았다. 경계, 수호, 표석, 다산, 풍년, 안녕, 평화, 번영 등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아무 탈이 없기를 좋은 일만 있기를 그들은 선돌에 의지했고 영험함을 발휘해주길 바랐으며 믿었다. 그리고 그 선돌에 인간을 초월하는 절대자(the Absolute)로 보고 성스러운 존재로 삼고 신성, 신격 시했다.
선돌은 다른 명칭으로 변천 사용
우리나라 선돌은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전국에 걸쳐 '할머니탐, 할아버지탑, 할미바위, 장수지팡이, 구지바위, 쇠뿔미륵, 수구막이, 수살장군, 미륵' 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선돌의 활용도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의미와 형태를 달리해 각기 다르게 명칭을 하여 빌딩, 마을 표지석 등의 목적으로 세운다.
요즘도 빌딩 앞, 마을 입구 등에 기념비석 또는 표지석 등 큰 돌을 세우고자 할 때는 돌의 특성은 물론 돌의 생김새를 고려한다. 돌이 그 빌딩과 마을의 특성과 이미지를 담아 함께 의미를 전한다. 돌의 생김새만 봐도 알아볼 수 있게 돌의 생김새에 신경을 쓴다. 큰 돌은 새나 호랑이의 형상을 띠기도 하고 의젓한 장군의 풍모도 띠기도 한다.
선돌은 얼굴이자 사상이 담겨져 있다.
사람 얼굴 생김새를 두고 관상(觀象)을 본다. 인생관과 미래관이 달라지는 등 얼굴의 모양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運命)이 달라지고 결정되어지게 됨을 알 수 있다.
둥근형은 시원한 성격을 띤다. 거부감이 없는 형으로 사람들과 쉽게 친해져 그만큼 대인관계의 폭이 넓고 부지런한 모습을 띠고 있어 생활하는데 있어서 남보다 눈치와 발 빠른 행동으로 살아가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둥근형
선돌 중에는 둥근 형태가 있다. 둥글다는 것은 모나지 않은 삶과 세상을 살아가고 펼쳐가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았다. 많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며 열심히 임하면서 매사 신속 재빠르게 잔출 나아가게 해달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둥근 돌을 선택해 세웠다.
네모형
네모형(정사각형)은 용맹스럽고 부지런하며 매사에 정열적이라고 한다. 네모 스타일은 강직함, 든든함, 넉넉함이 넘친 형으로 투사적안 성격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열정을 불태우는 성향을 띤다.
선돌 중에는 네모 형태가 있다. 네모다는 것은 완벽한 상태를 이루어 삶에 있어서 연약함이 없고 세상에서 뒤지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았다. 내 자신, 내 가족, 내 이웃, 내 민족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다들 용맹스럽고 부지런한 가운데 매사 정열적인 행동과 삶을 가꾸게 해달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네모 돌을 선택해 세웠다.
긴얼굴형(직사각형)
긴 얼굴형(직사각형)은 의욕감이 강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사회의 무리 속에서 지도자의 모습으로 생애(生涯), 즉 한평생을 살아갈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선돌 중에는 긴 사각 형태가 있다. 긴 사각을 한다는 것은 강한 의지와 욕구가 충만하고 스스로 해나가려는 독립적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았다. 어떠한 사회의 무리 속에서도 지도자의 모습으로 한평생 살아가도록 해달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긴 사각 돌을 선택해 세웠다.
역삼각형
역삼각형은 두뇌가 명석하고 총명하며 관찰력이 풍부하다고 한다. 다른 형에 비해 역삼각형은 위쪽 부위가 넓고 아래쪽 부위는 뾰족하다. 위쪽이 더 넓은 면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담을 지식의 그릇이 크다는 것이며 큰 만큼 머리의 회전도 빠르고 총명해지며 이런 형은 관찰력 또한 풍부해 세상을 넓게 깊게 멀리 보려는 성향을 띤다.
선돌 중에는 역삼각 형태가 있다. 역 삼각을 한다는 것은 지식, 정신, 사상, 철학 들을 담았으면 하는 의미를 담았다. 두뇌회전이 빠르고 빠른 만큼 총명하고 관찰력 또한 탁월하여 삶과 세상을 가꾸어가고 부흥시키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어달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돌을 선택해 세웠다.
초생달형
초생달형(턱의 모양이 앞으로 나온 형)은 선이 굵고 거침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이며 두뇌회전이 빠르고 상황에 따라 대처 능력이 탁월해 어떤 일과 직업을 가져도 큰 성과를 내거나 정상의 위치에 오를 수 있고 또한 대인관계의 폭이 넓고도 깊어 마당발이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어떤 일이든 상황에서도 수동적인 면보다 자동적인 행동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발전의 속도가 다른 형에 비해 빠르다고 한다.
선돌 중에는 초생 형태가 있다. 초생 형을 한다는 것은 굵고 짧고 거침없이 나가게 해달라는 의미를 담았다. 선이 굵은 게 특징인 초생 형은 선이 굵어 거침없는 질주를 하고 싶어 하며 두뇌가 명석해 회전이 빨라 상황 대처능력이 뛰어나 어떠한 일이 주어줘도 반드시 해내어 크게 달성을 시키고 직업에 있어서도 맡은 소임에 충실히 하여 정상의 위치에 서게 해달라는 바람과 대인관계 폭 또한 커 사람과 세상을 휘어잡을 만큼 리더로 군림해주길 바라고 자신들의 자동적인 행동이 강해 발전의 속도가 현저히 빠르게 이루어졌으면 하고 이런 상황이 막힘없이 펼쳐나가 주기를 바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돌을 선택해 세웠다.
볼록형
볼록형(옆모습의 돌출형)은 한 가지 일을 선택해서 성공시키면 이내 또 새로운 뭔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 없을까? 또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게 되는 스타일로 절대 평범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한다. 무슨 일이든 본인이 직접 결정하고 행동하며 도전해보는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자유스러운 성격에 창의력도 풍부하여 성공의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선돌 중에는 볼록 형태가 있다. 볼록 형을 한다는 것은 한 가지의 일에 만족하거나 멈추지 않고 여러 일에도 관심을 갖고 추진하는 일들이 더 이루어 잘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았다.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 만큼 새로운 뭔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만들어 내주기를 바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돌을 선택해 세웠다.
살찐형
살찐형(얼굴 전체가 살이 많은 형)은 사람 전체가 무게감이 있는 스타일이며 상대방에게 따뜻함과 편안함을 주려는 성격이라고 한다.
선돌 중에는 살찐 형태가 있다. 살찐 형을 한다는 것은 중후함을 담아내고자하는 의미를 담았다. 왜소하지 않고 풍채가 큰 여유로움이 많은 형으로 되어줘 남들에게 따뜻함을 전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으면 바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돌을 선택해 세웠다.
모난형
모난형(얼굴 전체의 배합이 불규칙한 얼굴형)은 감정이 없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고 한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가진 않지만 이런 형은 한번 사귀고 나면 속마음이 진실한 스타일이라고 한다.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마음이 들지 않는 분위기에도 내색하지 않고 분위기를 맞추어주는 여유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을 할 때도 떠벌이지 않고, 자기 자랑을 하고 요란하게 하지 않고 조용하게 빈틈없이 아무지게 처리, 믿음직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선돌 중에는 모난 형태가 있다. 모난 형을 한다는 것은 울퉁불퉁 생긴 대로 어떠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본연의 모습으로 유지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생김새는 흉하게 보이지만 내면은 고운 사람들을 진득하게 느낄 정도로 꾸준하게 알고 지내길 바라고, 어떠한 환경에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그 분위기에 적응하고 맞추어 가주기를 또 빈틈을 보이지 않은 아무지게 일 처리를 하는 믿음직한 모습이 되길 바라는, 선돌로 마음을 전하고자 돌을 선택해 세웠다.
사람의 관상에서 보여주듯이 돌에도 생김새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한다. 선조들이 고인돌 군과 마을 어귀 등에 세운 선돌은 형태와 크기가 각기 다르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으로 선돌의 형태와 크기가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얼굴 생김새를 보고 그 사람의 성향과 재운과 운명을 파악하듯이 선돌도 생김새를 보면 그 내면의 세계를 살펴보게 된다. 선돌의 형태로 구원의 마음을 담았다. 선돌은 형태적으로 또는 위치적으로 형태의 신으로서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
돌은 영험해 신성시
우리 조상들은 돌에도 영험한 좋은 기운이 솟아난다고 믿고 돌이나 바위를 신성시 했다. 일부에서는 그런 신앙심에 대해 미신(迷信)으로 취급을 하지만 돌을 믿는 신앙심은 미신이 아니라 진정한 자연에 대한 경애와 신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돌은 사람과 자연과의 교감
자연숭배사상은 단순한 믿음이 아닌 진정한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나누는 사람과 자연과의 교감(交感)이다. 자연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은 기운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생기를 낳은 에너지라는 기(氣)는 모든 곳에서 발생한다. 바위뿐만 아니라 식물에도 또는 땅과 물과 공기에도 기는 있다.
기가 정신이 되고 정신은 사상을 낳고 사상이 철학을 낳으며 진리를 낳으면서 깨닫게 만든다. 우리의 종교는 자연에서 출발했다. 자연에서 잉태를 시작해 승화시키고 있다.
지금처럼 산업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선사시대에는 자연을 가까이 하며 자연에 의지한 채 자연을 숭배했다. 하나의 변변치 않은 돌이라도 그들은 그 돌을 가치 없게 취급하기 보다는 예사스럽게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며 그 돌을 신성시했다.
돌에 영험이 있다고 믿고 태양신, 수신, 지신처럼 돌신으로 보고 돌이 뭔가 이루어지게 해주고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기원의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선돌은 영험한 자연신으로 보고 고인돌이나 마을 입구 등에 세웠던 것이다.
선돌의 영험(靈驗)함,
미신(迷信)이 아닌‘미신(美神)’이다.
인간의 영혼을 맑게 하고 삶을 이롭게 하는 아름다운 정신을 보여주는 '정령(精靈, spirit.soul) 또는 정괴(精怪)' 의 신이다. 정령은 요정(妖精)으로 나타난다. 4원소 인공의 힘을 상징하는 인공정령 엘리멘탈(elemental)과 애니미즘의 영적 존재가 뒤섞인 개념의 미신(美神)이다.
힘은 모든 사물에서 나온다. 어느 특정한 곳만은 아니다. 다만 힘의 강도가 다를 뿐이다.‘기가 세다’라는 말을 한다. 기가 세다는 것은 그 사물에서 에너지가 많이 분출하고 있다는 것이며 기가 셀 정도로 그 사물이 보통 것과는 좀 다르다는 신비의 사물로 여긴다. 기가 세게 나온 것 중에는 바위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바위도 어떤 바위냐에 따라 어느 곳의 위치와 방향에 있는 것인가에 의해 바위의 기를 느끼게 된다.
선조들은 기가 있는 바위와 돌을 옮겨 부정한 곳이 아닌 음양의 기가 잘 조화된 가장 좋은 장소에 두었다. 그리고 그 바위와 돌에 기원의 마음을 전했다. 정한수(靜寒水)를 떠놓고“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간절한 소원을 말하며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소원성취를 위한 바위신에게 드리는 기도, 우리 조상뿐만 아니라 이 풍습은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졌고 지금도 그런 간절함으로 믿음을 표한다.
신앙(信仰)은 누군가에 마음을 주고 우러러 보며 의지하겠다는 뜻이다. 절대자가 사람일 수도 있고 바위, 나무, 태양, 달 등의 자연물일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불상(석가)을 두고, 기독교에서는 십자가(예수)를 두고, 힌두교에서는 시바를 두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를 두고, 유교에서는 공자를 두고 각기 다른 신들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바위신, 태양신이 있고 초월적 능력을 지닌 주술사의 '샤머니즘(shamanism)' , 동식물을 신성시하는 '토테미즘(totemism)' , 정령을 신봉하는 '애니미즘(animism)' 등이 있다.
샤머니즘은‘무당(巫堂)’을 뜻하며 신(神) 내림을 받은 사람이 길흉화복을 점치는‘점술가(占術家)’이다.
토테미즘은 토템과 인간관계가 제도화된 특정한 동식물을 신성하게 여기는‘원시신앙(原始信仰)’을 말한다.
애니미즘은 초목이나 무생물 등 갖가지 물건에 붙어 있는 혼령.나무.돌.산.강 등의 특정한 물체에 정령(精靈)또는 성령(聖靈) 또는 정혼(精魂)이 깃들어져 있다고 보고 그 정령을 신봉하는 사상을 말한 것으로 자연물에 깃들어져있는 초자연적 존재, 즉‘신.정령.영혼.사령.조령.수호령.요괴’등을 숭배한다.
선돌은 애니미즘(정령신앙)이라 할 수 있으며 토테미즘(원시신앙)의 신앙심으로 믿음을 같이하면서 샤머니즘(주술신앙)의 점술가로 사람을 만들어내어 선돌을 믿게 만들고 믿음으로 인한 선돌의 절대자로 여기게 한다.
특히 애니미즘은 만물의 근원이요, 생명력의 원천을 이루는 불가사의한 천지의 기운, 동양 전해 사상은 해와 달과 별 등이 천지만물의 정령이라 믿었다.
나라마다 타계관(他界觀), 풍양관념(豊穰觀念) 등을 배경으로 하여 거석기념물을 건립하는 풍습이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 묘지와 마을 입구, 스코틀랜드의 루이스섬, 칠레의 이스터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남아시아의 요르단 지역, 유럽의 에스파나.포르투칼 등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분포하고 있다.
선돌을 세우고 그 선돌에 영령이 서려져있다고 믿고 절대자로 여기며 믿음을 표했다. 자연석 선돌이 아닌 가공된 사람형상으로 만들어 신으로 모시며 신앙심을 갖기도 했다.
칠레 이스터섬에 있는 모아이의 거석상이 망망대해에서의 큰 바위는 길을 안내하는 등대와 같은 존재로써의 역할을 띠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모아이 거석상이 그러듯 선돌도 모아이 거석상처럼 정령을 하며 땅이나 바다.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국민 모두와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순풍에 돛단 듯 번영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하는 간절함을 선돌은 담아내고 있다.
또한 영국의 스톤헨지 선돌 등 유럽 지역의 선돌은 거대한 돌들을 나란히 원을 그리며 세웠다.
정령의 돌은 선돌뿐만 아니라 모아이 거석상에도 나타내고 있듯이 이와 같은 형태적 신(神)은 산(山)과 들(野)과 강(江)의 육지에서 또는 섬(島) 등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헤르마 형태의 사계절 신(Grand Bassin octogonal, Jardin des Tuileries)이 있다.
튀르리 정원 서쪽 입구에 있는 팔각 정원에는‘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의 신들이‘헤르마(Herma)’형태로 세워져있다. 헤르마는 영어로‘헤름(Herm)’이라 부르는데 사각 기둥 형태에 상부에는 인물의 머리가 새겨져있고 하부에는 남성의 성기가 표현되어 있는 형태의 조각을 말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천하대장군과 같은 원리의 이 기둥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되었는데 로마시대에도 이어져 내려오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테름(Term)’과‘어틀렌티즈(Atlantes)’로 다시 부활되었다.
고대 초기 그리스인들은 돌 머리 형태나 나무나 돌기둥을 길가에 세워 숭배하였는데 특히 교차로 부근과 경계가 불분명한‘땅에 경계석’으로 세워놓고 길을 오가며 이러한 신상의 머리에 돌을 던지거나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정령(精靈)들에 대한 종교적 존경을 표하고 하였다.
헤르마는‘경계석(境界石), 경계점(境界點)’이란 뜻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헤르메스(Hermes)라는 이름이 여행자의 신으로서의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경계석 헤르마이(Hermai)에서 나온‘버팀목, 돌더미, 경계석’을 뜻하는 그리스의 헤르마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헤르메스는‘건너서 넘어감’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된 신이다. 헤르메스는‘교환(交換), 전송(傳送), 위반(違反), 초월(超越), 전이(轉移), 운송(運送), 횡단(橫斷)’등과 같은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모든 활동에는‘건너감’이란 의미로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하는‘사자(使者), 재화의 교역(交易), 상품의 교환(交換), 의미와 정보의 전달(傳達), 언어의 해석(解釋), 웅변술(雄辯術), 직문(直門), 바람’이 사물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길 때 사용하는 방법, 사후세계로 건너가는 영혼이 제대로 길을 찾도록 돕는 것 둥과 관련된 신이다. 이후 경계석에 머리의 남근성이 더해지고 기둥은 사각형의 형태가 되었는데 4는 헤르메스에 신성함을 바치는 상징의 숫자이다.
이 헤르마의 상(像)이 상인과 여행자의 수호신인 헤르메스와 같은 수호신의 기능을 갖기 이전에는 액(厄)막이의 기능으로 주로‘교차로, 국경선이나 경계선’의 수호신으로서 세워졌으며 또한‘사람과 무덤, 김나지아(무련장.도서관.건축물의 포르티코인 주량현관)과 공공장소’그리고 길의 한 구석에 거리를 새겨 넣은‘이정표(里程標)’로도 세워졌다.
헤르메스는‘다산과 번식력, 행운, 길, 경계점’의 상징과 같이‘남근’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헤르메스와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선돌과의 문화적인 풍습을 정보를 얻거나 문화를 등을 교류하려고 서로 왕래하는 것은 없지만 의미적인 면에서는 연관성이 있으며 정신적, 신앙적 사상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선돌도 그리스 헤르메스처럼 그런 의미를 전달하여 수호신으로서 또는 다산의 풍요를 위한 목적으로 세웠다.
조상들은 형태에 하늘과 땅을 비롯하여 선돌이 천지만물은 모두‘음(陰)과 양(陽)’으로 성립되었다고 봤다. 즉 태초에 우주가 생성될 때에 태극(太極)이 생기더니 이 태극이 둘로 갈라져 하나는‘음’이 되고 하나는‘양’이 되어 음양의 배합으로 천지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음양이 변화하여 모든 것이 변화, 생성되고 새로워져 발전과 번영을 영원히 계속한다고 봤다.
따라서 선돌은‘하늘이고 우주’이며‘음양이 본체’로서 선돌은 음양의 화합을 통한 풍년(豊年)과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선돌은 밑 부분은‘땅(地)’, 윗부분은‘하늘(天)’을 뜻한다. 지상에서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와의 맞닿게 해주고 연결해주거나 영혼(靈魂)이 서로 오고가게 하는 역할을 띠었다. 선조들은 선돌을‘가교적(架橋的)’인 역할로 여기며 이승에서의 일을 선돌을 통해 마음을 전하거나 저승의 일이 이승 사람들에게 알도록 하는, 서로 마음과 마음을 알리는 역할 띤 선돌에 제의(祭儀)를 표하면서 소통하며 서로의 마음을 알아봤다.
선돌의 상징성, 기업의 엠블럼
정부, 기업, 학교 등 저마다 자사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성의‘엠블럼(emblem) 또는 심벌마크(symbol)’가 있다. 엠블럼이 메이커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엠블럼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일반적으로 배지(badge)나 표장(標章)을 의미하며 어떤 단체나 기업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12세기 중세 유럽에서 전쟁 시 자신의 가문이나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을 깃발이나 방패에 새겨 아군과 적군을 구별했던 엠블럼, 또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 역할을 했던 엠블럼은 점차 장식의 기능이 부각되었고 현재는 단체나 기업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도안만 보고도 철학과 사상과 지향점을 읽어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폭스바겐은 독일 브랜드로 가장 인기 있는 자동차 브랜드이다. 독일어로 Volks(국민, 인민), Wagen(자동차)를 말한 폭스바겐은 엠블럼이 위 아래로 배치된 VW모양을 한 엠블럼이다. 로고의 파란색 배경은 우수성, 신뢰성, 클래스를 의미한다. 로고의 색깔인 흰색은 고결함, 맑음, 매력적인 등을 의미한다.
또한 메르세데스 벤츠의 삼각별이라 칭하고 있는 엠블럼은 굉장히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보인다. 엠블럼이 새 개로 뻗어있는 모양은 육지, 바다, 하늘에서 최고가 되고자 함을 뜻하고 있다.
또한 아우디의 엠블럼은 내 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우디의 엠블럼 속 4개의 원은 독일 삭소니 지방의 아우디, 반더리, 흐르히, 데카베 4개 자동차 브랜드를 상징한다. 각각 회사를 상징하는 4개의 원이 바로 아우디의 엠블럼이며 내 개의 원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동일한 크기로 연결되어 있다. 4의 회사인 평등한 지위와 굳건한 단결력, 깰 수 없는 동맹을 상징한다.
또한 현대자동차 엠블럼은 타원 안에 위치한 알파벳 H가 비스듬히 자리한 것은 자동차 기업답게 속도감을 표현하며 미래에 대한 도전과 전진을 나타낸 디자인이다. 현대자동차의 엠블럼을 자세히 보면 아마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듯 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LG가 기업 심벌을 새로이 했다.
LG브랜드가 심벌마크를 활용한‘미래의 얼굴(Expressions)를 공개하며 더욱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디자인들은 미래의 얼굴이 상징하는‘젊음, 인간, 기술, 세계, 미래’의 의미를 담아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강화했다.
심벌마크의 기본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꽃처럼 싱그럽게 피어나는 젊음을 형상화하거나 LG의 고객중심 경영이념이 확산되는 파장을 연상케 하는 7개의 다채로운 표현들로 구성했다.
국가정보원의 엠블럼은 별모양 나침반을 그려 넣었다. 별모양 나침반은 국가의 미래를 제시하는 국정원의 역할을 의미하며 직권 개개인이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 일하고 이러한 나침반들이 모두 모여 밤하늘을 밝히는 이름 없는 별리 되겠다는 직원들의 다짐을 담았다.
요즘 같이 기업의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상징물로‘엠블럼이나 심벌마크’가 있다면 선사시대에는‘선돌’이 대표했다. 선사시대에는 그저 자연석으로 이미지를 나타내 보이려 했고 돌의 모양이나 크기로 또는 방향으로 그 지역과 내용에 대해 설명해주고자 했다. 선돌은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선돌을 보고 기원을 하는 신앙적 대상물로 삼고 선돌을 신성시하여 정령으로 서로 교감하며 건강, 다산, 풍년, 풍요, 변영, 번식, 수호, 안녕 등의 영험(靈驗)이 발휘되는 역할을 띠었다.
음양의 조화를 이룬 엠블럼
기업체와 국정원 등의 엠블럼 또는 심벌마크를 보면 모두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엠블럼은 타원형 안에 현대(HYUNDAL)의 이니셜인 H를 따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타원형은 하늘을 뜻한다. 우주의 세계와 지구를 나타낸 것으로 글로벌의 현대자동차, 미래의 현대자동차가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엠블럼이다. 세계 어느 곳이나 힘차게 멈춤 없이 굴러가겠다는 현대자동차의 신념이요 강한 의지이다.
엠블럼을 보면 타원형은 음에 해당된다. H는 양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과 남성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여성과 남성은 전 세계인들을 말한 것이며 이것은 음의 기운을 받아 힘차게 굴러 나아가겠다는 음양오행설의 의미를 담은 디자인이다.
또한 폭스바겐의 엠블럼도 원 안에 독일어로 국민(Volks)의 이니셜인 V자와 자동차(Wagen)의 이니셜인 W자를 따 디자인했다. 원은 하늘을 뜻하며 지구와 우주를 나타낸다. 원은 음에 해당되며 원 안의 글자는 양을 말한다. 음과 양의 조합으로 기운차게 굴러가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로 군림하겠다는 폭스바겐의 의지다.
또한 벤츠의 엠블럼도 원 안에 세개의 삼각뿔 모양이 들어져있다. 원은 하늘이며 세계 또는 우주를 뜻한다. 원은 음에 해당되며 안에 있는 삼각뿔은 양이다. 여성과 남성의 조화로움을 상징성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음양이 잘 조화가 되면 어려움이 없다는 벤츠의 철학이다.
또한 아우디의 엠블럼은 네 개의 원이 서로 결합된 상태다. 원은 하늘이며 세계 각국을 뜻하고 또 천체우주를 뜻한다. 음의 원들이 함께라면 양의 기운 못지 않게 힘차게 글러가고 최고의 품격을 자랑하는 자동차, 아우디로 그 명성을 떨칠 것이라는 아우디의 신념이다.
또한 LG의 심벌마크도 음과 양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꽃 속에 사람의 얼굴을 그려낸 디자인으로써 이 디자인의 모티브는 신라의 안면수막새에서 따왔다. 원 안에 얼굴은 여와 남을 상징하며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 음과 양이 잘 조화를 이룬다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갈 것이라는 신념으로 음과 양의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국정원의 심벌마크도 원 안에 별모양을 그려 넣었다. 이 또한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 디자인이다. 음지에 양의 기운이 스며들었을 때 비로소 밝은 빛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고 광명을 찾아 평화로운 세상을 누릴 수 있다는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려는 국정원의 사상이다.
기업체, 관청 등의 엠블럼이나 심벌마크는 모두가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신들 만의 지향점을 추구하고 이루고자 하는 데는 음양의 조화로 기운을 북돋아 그 기운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선돌도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돌의 형태를 달리했다. 엠블럼이나 심벌마크가 선돌의 의미와 그 지형점이 같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음양의 의미를 담아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엠블럼, 심벌마크는 자세히 파악해보면 음과 양의 형질이 들어져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이 한 몸이 되어 다산의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깊은 의미가 그림으로써 보여 주고 있다. 아우디의 네 개의 원은 네 명의 여성이 결합된 모습이다. 이것은 다산을 상징한다. 여기서 다산이라는 것은 '품질 좋은 자동차를 많이 생산해내겠다는 뜻' 으로도 해석된다.
현대자동차, 폭스바겐자동차, 벤츠자동차, 아우디자동차 등은 모두가 생식번식력 풍요로움의 '다산(多産)' 을 상징하고 있다.
선돌에 미래를 걸었다.
선돌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세워둔 돌이다. 원래 있는 돌을 신앙의 대상물로 삼기도 하고 선돌처럼 영험이 있는 돌을 옮겨다 고인돌이 있는 곳에 또는 마을이 있는 곳에 또는 배 등의 항해를 하거나 고기를 잡은 곳에 세웠다. 조상들은 선돌에 모든 걸 걸었으며 선돌이 삶을 윤택하게 해주길 바랐고 선돌이 앞날의 일에도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선돌은 신적 존재
선돌이든 다른 대상물이든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주거나 편안하게 하거나 일이 잘 되게 해준다면 그게 바로 최상의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신적(神的)’존재이다.
신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신의 정신세계는 넓고 깊다. 파고들면 들수록 알면 알수록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게 신(神, God)이다.
신은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고 있으며 그 신을 믿는 데에는 한정이 되어있거나 권한이 따로 있지 않다. 누구나 모두 신을 대할 수 있고 모실 수 있다. 신을 하나의 종교적으로 삼고 있는 인간들, 어느 신이 더 믿음이 크고 신자가 많으냐에 따라 그 신이 유일신이 되고 그 신이 가장 신다운 신아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신이다. 하늘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의 가장 큰 종교사상으로 보고 있다.
돌에도 신이 있다고 믿었던 우리 조상들, 돌신에 바위신에 소원을 빈다. 교회당에서 십자가를 보고 빌듯이 그들도 돌을 신적대상으로 삼고 빌고 또 빌었다. 선돌은 장승으로 영향을 끼쳐줬으며 장승은 불상이나 예수상 등으로 또는 흉상.동상 또는 건물의 표지석으로 그 정신세계를 이어줬다.
선돌은 돌을 세운 돌이라고 해서 한자어로 입석(立石)이라 한다. 설 립(立)의 갑골문을 보면‘팔을 벌리고 땅에 선 모습’이다. 입(立)은 땅 위에 사람이 똑바로 서있는 모습으로 선다는 것은 자유를 뜻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서기 위해서는 예(禮)를 알려고 했다. 어떤 이는 예에 구속되지만 어떤 이는 예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것이었기에 예를 제대로 갖춰 똑바로 서려한다. 예는 인간의 도덕성에 군거하는 사회적 질서의 규범과 행동의 표준적 절차 및 유교적 제사 의례의 구성과 절차를 말한다.
예(禮)는 어원적 의미로는 제사의례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예는 땅 귀신 기(祇)자와 풍년 풍(豊)자, 즉 땅 귀신 기(祇)의 보일시(示)와 풍성할 풍(豊)자로 구성되어 있다. 시(示)의 기(祇)는 신적 존재요, 풍은 제기인 두(豆)에다 제사를 지낼 제물을 담아 신에게 봉헌하는 제사 의례를 의미한다.
기(祇)는 시(示)로써 제물을 차려 놓은 제단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제물을 신에게 보여 준다는 의미로‘보이다’를 뜻한다. 시자는‘보이다, 알리다, 지시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시자는 신에게 제를 지낼 때 재물을 올려놓던 단을 말하는 것으로 시(示)자로 그린 것이다. 시(示)자는 신에게 제를 지매면 길흉이 나타난다는 의미에서‘보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시(示)자는 신, 귀신, 제사, 길흉과 관계된 의미를 전달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풍(豊)자는 실제로 예(禮)의 옛글자다. 주희는‘예를 하늘 이치의 절도 있는 문채요, 인간 사무의 본이 되는 행동규범’이라고 정의했다.
예는 인간 삶의 중대한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일에서부터 이웃과의 일상적인 교제에 이르기까지 음식.의복과 앉고 일어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모든 동작을 규정하는 등 생활 전반에 걸쳐 핵심적 기능을 수행한다.
예는 근원적으로 제사(祭祀)로써의‘제(祭-제사)’이다. 실천적으로 구체적 행동(行動)으로써의‘리(履-신)’이다. 공동체나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조화(調和)로써의‘화(和-화합)’이다. 분별과 구분화를 통한 질서로서 차례(茶禮)로써의‘서(序-차례)’이다. 정당성과 접합성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원리(原理)로써의‘리(理-다스림)’다.
선조들은 선돌을 세워놓고 선돌에 예를 갖추었다. 선돌은 세운 돌을 말하며 이것을 한자어로 설 입(立)자와 돌 석(石)을 따‘입석(立石)’이라고 한다. 설 립(立)자가 사람이 팔을 벌리고 땅에 서있는 모습을 그려냈듯이 자연물인 정령이 서린 돌로 여겨 세웠다. 선돌은‘세운 돌(입석)’이란 뜻이 담기도 했지만 선돌은‘신선한 돌(仙石)’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바둑, 바둑알은 선돌이었다.
바둑알은 흑백의 둥글납작하다. 재질은 돌, 사기, 조개껍질, 상아, 유리, 플라스틱, 인조석 등으로 만들어 쓴다. 바둑알은 주로 돌로 만들었으며 바둑돌이 둥근 것은‘하늘(天)’을 상징하고, 흑백의 색깔은 천지의‘음양(陰陽)’을 상징한다.
바둑이 돌, 방위, 옥석, 이정표, 체스 따위를 가리키는 인도네시아어 바투(batu)에서 왔다. 삼국시대에는 바둑을 위기(圍碁) 또는 혁기(奕棊), 난가(爛柯), 귤중지락(橘中之樂), 수담(手談), 하락(河洛), 좌은(坐隱), 오로(烏露), 목야호(木野狐) 등 여러 가지로 불이어 왔다.
바둑의 바는 나무, 둑은 돌을 말한다. 바둑을 밭 전(전)과 독(석)의 결합으로 본다. 밭(田)+돌(石)에서 밭의‘ㅌ’이 떨어져나가‘바독’이 되고 바독은 다시‘바돌’이 됐다. 경상도, 전라도, 충남, 제주 지역에서는 돌(石)을‘독’이라고 한다.
바둑은 흑백간의 경계를 지어 집을 얼마나 확보했느냐를 다투는 게임이다. 밭에 쌓은 돌, 즉 땅에 얼마나 돌을 쌓느냐에 따라 땅을 차지하고 확보할 수 있는 게임으로써 많이 쌓은 사람이 이기고 차지하는 게 바둑이다. 바둑의 어원에는 바둑돌은 바닷가 조개껍데기(백돌)와 오석(烏石, 흑돌)을 채취해서 썼기에 바다의 돌은‘바돌’이 됐고 이것이 다시‘바둑’으로 변음이 됐다고 보기도 한다. 작은 조약돌과 조개껍데기 바둑알로 바둑판 위의 구획(경계)을 그어 집(영토) 싸움을 펼치는 바둑이 바로 큰 돌로 바닷가 돌둑을 쌓는 것의 구획을 흉내 내는 데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바둑은‘소우주(小宇宙)’라고도 한다. 가로 19, 세로 19줄이 반상에서 소로 교차하는 361의 착 점이 있어 돌이 그 어느 곳으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현란한 바둑의 묘수가 마치‘천체(天體)’의 움직임과 같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바둑에 있어서 돌은 조약돌이 됐던 조개껍데기가 됐던 그 바둑판을‘우주(宇宙)’로 보고 알을 별(星) 등의‘천체(天體)’로 여긴 채 바둑을 두었고 유래되었다. 밭의 경계를 위한 돌을 쌓았다. 구획선을 그어놓고서 돌을 누가 더 쌓았느냐에 따라 밭을 차지했다. 바둑의 바둑판은‘들판(田)’이며 바둑알은 돌(石)이다.
선돌은 들판에 서있다. 선돌을 세우며‘여기가 제 구역이다’라는 표시를 알렸다. 또한 이 돌에 정령(精靈)이 깃들어져있다며 영적(靈的)인‘신(神)의 대상물’로 여겼다. 경계석(境界石)이라는‘세운 돌’의 의미를 넘어 신선석(神仙石)의‘신선한 돌’로 여기며 입석(立石)을‘선석(仙石)’으로 그 돌을 산성시하며 극진히 모시는 등 신앙(信仰) 시(示)했다. 바둑판의 흑과 백의 알은 선돌(입석)의 의미와 다름이 없는 일로 돌은‘경계(境界)’또는‘선석(仙石)’또는‘천체(天體)’이다.
선조들은 지상의 모든 만물의 탄생은‘우주(宇宙)’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우주에서 진화한 포자(布子, Spore)가 떨어져 지구의 생명이 발생했다고 믿었으며, 우주기원설(宇宙起源設)을 내세운 채 지상의 자연물 등 만물의 근거를‘우주’에 두었다.
우주기원설, 190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스반테 아레나우스, 1962년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프렌시스 크릭, 프레드 호일, 찬드라 위클라마싱 등은 높은 수준의 지적능력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생명의 씨앗인 미생물을 지구로 보냈고 그것이 진화를 거듭해 지구 생명체가 만들어졌다는, 우주에서 온 생명의 씨가 지구의 생명의 기원이 되었다고 봤다.
선돌은 단순히 경계석(境界石), 수호석(守護石), 벽사석(辟邪石), 재운석(財運石), 다산석(多産石), 풍요석(豊饒石) 등의 돌로만 여기지 않고 우주석(宇宙石)으로 보고 이 선돌을 지상과 우주와 연결하여 통(通)하게 해주는 매개체(媒介體)의 역할로 의미를 담았다.
선돌은 우주세계와 교감
선돌을 통해 우주세계와의 교감을 하며 이 지상에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했다. 영혼이 서린 선돌로서 선돌에는 영험(靈驗)한 정령(精靈)이 있기에 선돌은 지상에서 천체우주 등 다른 곳으로 가는 길목과 통로로 여기며 선돌을 세우고 선돌에 의지했다. 또는 선돌은 영혼 등 이승과 저승, 집 등 마을과 마을, 고을 등 지역과 지역, 땅과 땅, 땅과 강.바다, 땅과 하늘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짐승, 사람과 식물 등으로도 매개체 역할을 띠었다.
선돌은 지역 주민들이 마을의 수호를 바라거나 땅의 경계 또는 방위를 나타내거나 제의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대상으로 취하는 것인데 이야기에 선돌 모티브가 많이 이용된다. 영암 지방의 선돌은 돌의 강하고 불변하는 생명력을 신성시하던 선조들의 암석 숭배사상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영암 지역에도 곳곳에 선돌 또는 입석(立石)을 찾아볼 수 있다.
선돌은 미암면 선황리 율리마을, 두억리 수산마을, 두억리 장수마을, 미암리 미촌마을, 미암리 향양마을과 금정면 세류리 세류마을, 용흥리 안기마을, 남송리 뱐계마을, 남송리 용반마을, 남송리 안곡마을, 안노리 감산마을, 안노리 모정마을, 청룡리 금정초등학교 쳥용분교 옆과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 운암리 송석정마을과 서호면 화송리 화소마을, 청룡리 신흥마을, 청룡리 영모정마을, 엄길리 서엄길마을, 소산리 소흘마을, 태백리 백운동마을, 영암읍 농덕리 둔덕마을, 회문리 녹암마을과 군서면 마산리 오산마을, 동호리 동변마을과 신북면 명동리 선인정마을 등에 선돌이 남아있다.
미암면 선황리 율리마을에 있는 선돌은
마을 입구의 밭둑에 2기가 있으며 마을의 평안(平安)을 위해 세워졌다. 선돌이 쓰러지면 마을도 쓰러진다고 믿었던 주민들은 음력 2월 1일 사장나무에서 마을 안녕과 평화 그리고 풍요와 다산, 건강을 비는 제사를 지냈던 걸로 추측을 하고 있다.
2기(基)의 선돌은 하나는 사각기둥형으로 크기가 높이 118cm, 폭 58cm, 두께 46cm이다. 또 하나는 높이 116cm, 폭 70cm, 두께 20cm로 괴이한 형태의 괴석형(怪石形)으로 되어져있다.
선황리 율리마을에 있는 선돌 2기는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일 큰 것이 남성, 작은 것이 여성을 나타낸다.
마을 사람들은 선돌이 쓰러지면 마을도 쓰러진다고 믿는 걸로 봐 예전에는 매년 초에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선돌이 마을 앞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또는 안녕과 평화, 다산, 건강 등을 위한 신앙으로서의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미암면 두억리 수산마을에 있는 선돌은
수산마을 선돌을 마을 사람들은 ‘선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독은 방언으로써 세워진 돌이라는 뜻의‘선돌’을 말한다.
선돌은 수산마을에서 장수마을로 가는 길 논두렁에 위치하며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 하는 모양새다. 기둥인 밑폭에 비해 마을 쪽으로 꺾인 머리 부분의 폭은 다소 가늘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80cm, 뒤폭 56cm, 머리 높이 26cm, 중간 폭 46cm, 밑폭 59cm이다.
수산마을 선돌은 질병이 들던 해에 주민들이 질병 등 액운을 막기 위하여 세웠다. 이곳에 호랑이가 많아 마을의 피해가 심각했던 과거에는 호랑이를 쫒기 위해 두억리 수산마을 선돌에 옷을 입혀 놓기도 했다.
두억리 수산마을 선돌은 1기로 화강암이다. 원래 선돌의 머리는 드륵산을 향해 있었지만 선돌의 머리가 드륵산을 향하면 좋지 않다고 해서 1870년대 후반에 선돌의 머리를 마을 쪽으로 향하게 돌려놓았다. 선돌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에 따라 마을의 명운(命運)이 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풍수지리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그런 관점으로 볼 때 두억리 수산마을 선돌은 풍수사상에서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두억리 장수마을 선돌은
장수마을 학평마을에서 장수마을로 가는 길목에 정미소가 있는데 정미소 옆 신독거리에 위치한다.
두억리 장수마을 1기 선돌은 자연석이며 장수마을에서는 선돌을‘선바우’또는‘선독’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나쁜 일이 없고 질병을 막기 위해 세웠다.
선돌은 긴 직사각형으로 크기는 높이 230cm, 폭 85cm, 두께 20cm이다. 선돌은 1960년대 중반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인 느티나무와 함께 나란히 서있다. 선돌은 끝이 뾰족해 남성을 상징한다.
장수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밤에 당산제를 지냈으며 두억리 장수마을 선돌은 당산나무와 함께 신체(神體)로 모셔졌다. 당산제를 지내기 전 선돌과 당산나무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쳤으며 당산제가 끝날 무렵에는 당산 굿을 쳤다. 장수마을 당산제는 당산나무가 태풍에 쓰러져 고사(1940년대)되면서 중단되었으나 이후 1960년에 당산나무를 다시 심어 모셨다. 당산제는 2008~2009년 즈음에 다시 중단되었다.
두억리 장수마을 사람들이 버려두었던 선돌을 바로 세우고 당산나무를 새롭게 심어 중단됐던 당산제를 다시 지내게 된 것은 선돌이 남성, 당산나무가 여성을 상징하여 두 물체가 바로 서있지 못하거나 사라지게 되면 마을에 우환(憂患)이 생기는 등의 남녀의 음양설(陰陽說)에 의한 조화를 이루게 하여 장수마을이 자손발복(子孫發福)하고 번성하기를 바라는 풍요로움을 기리기 위한 마음으로 선돌과 당산나무를 중요시 하며 보전하고자 한 것이다.
미암리 미촌마을 선돌은
미촌마을 입구 논둑에 비슷하게 세워져있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10cm, 폭 98cm, 두께 18cm이다.
미암리 향양마을 선돌은
마을 주변에 위치한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22cm, 폭 46cm이다.
선돌은 마을 우측에 세워져 있고 남근석 형태이며 자연석이 아니고 병형의 돌에 원형을 올려놓은 것이다.
금정면 세류리 세류마을 선돌은
선독이라고 부르는 선돌은 세류마을 입구에 당산할매라 불리는 신목(神木)이 있고 그 맞은편에 세류마을 선돌 1기가 있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237cm, 둘레 188cm이며 거칠게 다듬어진 원형 형태이다.
세류마을에 세워진 선돌은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신돌이 세워진 시기가 대력 178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고 쓰였다. 선돌을 세운 이유는 영암군의 문화유적을 비롯한 기존 연구물에는‘호녁방지’를 위해 세웠다고 기록해났다. 호녁방지의 호녁은 혼역을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으로 혼역은 전라도.강원도.경기도.경상도.충청도.황해도 지방의 사투리로 홍역이 혼역이 혼역은 호녁이 되어 세류마을에서는 홍역을 호녁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호녁방지를 방언으로 판단,‘홍역방지’를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호녁방지를 세운 선돌을‘선독’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류마을 선돌은 마을에서는 해마다 제관(祭官) 2명을 선정하여 음력 정월 14일 새벽에 마을의 안녕과 풍농 그리고 질병예방 및 방지를 위해 당산제(堂山祭)를 지냈다. 당산제를 지낼 때 신목과 함께 선돌에도 제(祭)를 지냈다. 지금은 제를 올리지 않고 있다. 당산제는 1990년대 중반에 중단되었다.
세류마을 선돌 1기는 남성을 상징한다. 주민들이 당산(堂山)나무를 할매라고 불렀는데 당산나무는‘여성’을 상징하고 선돌은‘남성’을 상징하며 쌍을 이루고 있다.
금정면 용흥리 반계마을 선돌은
번계마을의 선돌을 마을 입구 서남쪽 약 30m 지점 논에 위치하고 있으며‘선독거리’로 불리기도 하며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기 위해 세웠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56cm, 둘레 160cm의 자연석으로 되어있으며 일정치 않은 삼각형 모양이다.
의례에 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다른 마을과 같이 그 의미에서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금정면 남송리 반계마을은 석장승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그 역할은 대부분 질병(疾病)과 악역(惡疫)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풍어(豊漁)와 풍농(豐農)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으며 질병뿐만 아니라 마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도 띠었다.
석장승이 있는 걸로 보아 선돌이 이 석장승을 보호하거나 석장승이 있는 곳임을 알리는 의미로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남송이 반계마을의 선돌은 길을 포장하면서 아랫부분이 조금 묻혔다가 2013년에 수해로 인해 유실되었다.
금정면 남송리 용반마을 선돌은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56cm, 둘레 140cm로 칼 모양이다.
용반마을에서는 헌관(獻官)과 화주(化主), 제주(祭主) 3명을 선출하여 풍농과 주민들의 건강, 다산을 위해 음력 정월 초닷새에 마을 제의를 지냈다.
용반마을의 제의(祭儀) 명칭은 당산제(堂山祭), 도지, 도제(度濟)이며 대상 신격은 당산할머니이다.
당산제를 지낼 때 선돌에도 함께 지냈다. 용반마을의 당산나무는 6.25전쟁 때 소실(消失)되었으며 당산제는 1970년 중반에 중단되었다.
남송리 용반마을 1기 선돌은 잡귀를 방지하기 위해 세웠다. 마을 주민들은 이 선돌을‘아랫당산’또는‘작은할머니’라고 불렀다. 주민들이 선돌을 작은할머니라고 불렀지만 그렇다고 선돌이 여성을 상징한 것은 아니다. 선돌의 형태가 남성을 상징한 칼 모양일 뿐만 아니라 주 대상 신격이 여성신인 당산할머니이기 때문에 용반마을 선돌은 남성을 상징한 것으로 봐야한다는 학자들의 견해다.
남송리 용반마을 선돌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머리에 똬리를 씌웠다.
금정면 남송리 안곡마을의 쌍계사 선돌은
쌍계사(雙溪寺) 터 반대쪽에 위치해있다. 쌍계사는 영암군과 장흥군이 경계를 이루는 보림사 가지산(迦智山) 동북 면에 있었던 절이다. 쌍계사 터 입구에서 약 400~500m 되는 곳에 장군석이라 불리는 장생(長栍) 2기(당장군.주장군)가 있다.
장군석이 있는 사찰 반대편 200m 바깥쪽에 계곡이 있고 계곡 바로 옆에 쌍게사 터 선돌이 있다. 사찰 안쪽 200n 지점에는 자연석을 반듯하게 세운 지주석(支柱石)이 동쪽과 서쪽에 세워져있다.
선돌에 관한 정확한 의례 시기나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장군석과 선돌 주변에 고사를 지낸 흔적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또는 마을 안녕과 번창을 위해서 또는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세웠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선돌을 신성시 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송리 안곡마을 쌍계사 터 주변에 있는 장생과 선돌 그리고 지주석이 존재하는데 선돌이 쌍계사 터 주변에 있기 때문에 사찰에서 세웠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돌 모양이 사람의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아 후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그렇게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선돌이 계곡 옆에 세운 것으로 보아 쌍계사 터 선돌은 물(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계곡 강에 세운 선돌은 치수의 의미와 생명의 의미 등으로 볼 수 있다. 수신(水神)은 바다.강.하천.연못.우물 등을 관장하는 신이다. 수신을 해신(海神), 용왕신(龍王神), 하천신(河川神), 독신(瀆神:도랑의 신) 등으로 불린다.
일찍이 농경사회가 발전하면서 적당한 수량에 대한 인간의 바람은 물의 힘 자체를 신의 작용으로 믿어 이를 관장하는 절대 신에 대한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수신(水神)은 관개용수나 제방의 수호신이 되고 수행방지나 기우제 등에서 숭배(崇拜)의 신으로 섬겨져 사람들은 이 신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때로는 친숙하고 또 공물(供物)을 바쳐 그 노여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더구나 생활의 터전을 바다에 의지하고 있는 어부들은 옛날부터 해신이나 용왕신에 대한 신앙이 두터워 여러 가지 제례(祭禮)를 행하여 왔으며 이는 세계 여러 민족에게 공통된 민족적 의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남송리 안곡마을 쌍계사 터 부근 계곡 가에 세워진 선돌은 수신의 역할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이 선돌에서 해마다 정초에 제를 지내며 마을의 무사안과 번영을 기원했으리라 본다.
물이 노여움이 없도록 물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선돌을 세워 이 선돌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기원의 마음을 담아 전하는 의식과 신앙심으로 선돌문화에 숭배사상을 담았다.
금정면 남송리 안곡마을의 선돌은 냇가 주변에 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물에 관련되어져 있는 선돌이다. 선돌을 세운 이유가 활성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냇가를 넘치게 하여 수해를 입어 마을이 큰 피해를 입는 등 물로 인한 고충이 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비만 오면 산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넘쳐 마을로 흘러들어와 홍수예방을 위한 선돌을 세웠다. 선돌은 또한 수구막이, 즉 마을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거나 또는 마을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역할을 하게 했다. 골짜기의 물이 멀리 돌아 흘러 하류가 보이지 아니하는 남송리 안골마을이 땅의 형세가 좋아 묏자리 등의 조건이 최적이라는 표시를 한 선돌을 수구(水口)막이로 표했다.
금정면 안노리 감산마을 선돌은
안노리 감산 마을 입구에서 남동쪽에 있는 논둑에 위치, 세워져있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95cm, 들레 150cm이다.
감산마을의 선돌은 마을의 재앙(災殃)을 막는 한편, 자손번창을 위해 안노리 감산마을 선돌을 세웠다. 이 선돌을‘선독’이라고 불린다.
감산마을에서는 1950년대 후반까지 마을 제사를 지냈다. 마을제의 명칭은 동제(洞祭)이며 동제를 지낼 때 안노리 감산마을 선돌의 머리 부분에 삿갓을 씌웠다.
감산마을은 자손 발복(發福)을 위해 안노리 감산마을 선돌을 세웠으며 동제를 지낼 때 삿갓을 씌운 것으로 보아 안노리 감산마을 선돌이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금정면 안노리 모정마을 선돌은
안노리 모정마을 선돌은 마을 입구에 있는 집의 대문 앞에 위치한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85cm, 폭 65cm이다.
안노리 모정마을 선돌과 관련된 의례가 연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안노리 모정마을 선돌에는 선돌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연도와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 글자가 세웠을 당시 새긴 건지 후대에서 새긴 건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안노리 모정마을 선돌도 다른 지역의 선돌처럼 그 의미는 같다고 보여 지며 의례 또한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안노리 모정마을 선돌은 화강암으로 1기이다. 선돌에 계유(癸酉) 1933 모정각자(茅亭刻字)라고 새겨져있는 것으로 보아 1933년에 선돌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3 현재는 마모가 심하여 새겨진 글자를 확인하기 어렵다. 선돌에 글씨를 새겨 조성시기를 알에 됐지만 이것 또한 확실치 않은 의문시되고 있다.
금정면 연소리 금오동마을 선돌은
선돌은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143Cm, 폭 112Cm이다.
서호면 화송리 화소마을 선돌은
화송리 화소마을 선돌은 자연석으로 2기가 있으며 1기는 마을 입구 정미소 뒤편 4차선도로 가의 논둑에 있으며 나머지 1기는 솔정지라고 불리는 마을 앞 하천의 제방 둑에 위치한다.
선돌은 직사각형으로써 크기는 정미소 뒤편 선돌 높이 150cm, 폭 57cm, 두께 30cm이다.
화송리 화소마을 선돌은 선돌과 관련된 으레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선돌도 다른 지역처럼 의례를 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화송리 화소마을 선돌 2기를 부부로 여기고 있다. 자손번창의 의미가 있었다는 추측을 해보게 한다.
서호면 청룡리 영모정 선돌은
청룡리 영모정마을 선돌은 마을 앞 들녘에 위치한다.
선은 생김새는 울퉁불퉁하게 생겼다.
서호면 몽해리 복다회마을 선돌은
몽해리 복다회 선돌은 마을 야산에 위치한다.
선돌을 마을에서는 석불입상으로 부르고 있다.
영암읍 회문리 녹암마을 선돌은
회문리 녹암마을 3기의 선돌을‘짐돌’이라고 부른다. 선돌은 1기 수놈은 마을 회관 옆에 있으며, 2기 정문은 예전의 마을 회관 앞에 있으며, 1기 암놈은 녹암마을 주민 김일남씨 집 마당에 있다.
선돌은 역암이며 사각 석주의 형태이다. 선돌의 크기는 수놈 높이 183cm, 두께 35cm, 윗폭 28cm, 중간 폭 33cm, 밑폭 44cm이고 정문 높이 174cm, 두께 25cm, 윗폭 26cm, 중간 폭31cm, 밑폭 35cm이며 암놈 높이 192cm, 두께 29cm, 윗폭 39cm, 중간 폭 35cm, 밑폭 36cm이다.
녹암마을 선돌은 주민들은 운이 좋지 않은 해에 택일하여 제를 지냈다. 선조들은 이 선돌을 신성시해 평소에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만약 이 선돌을 훼손하거나 옮기게 되면 재앙이 따를 것이라는 믿음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았으며 선돌을 소중하게 여겨 숭배했다.
회문리 녹암마을의 3기의 선돌은 수놈은 마을 입구를, 암놈은 마을 뒤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으며 선돌 중 예전 마을회관 옆에 있는‘정문’선돌은 과거에 돌림병이 들었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녹암마을 선돌 중 암놈과 수놈은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고 자손 발복을 위해 세워졌다. 정문 선돌은 돌림병 등 액막(厄瘼)이라는 선돌의 가장 보편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군서면 마산리 오산마을 선돌은
군서면 마산리 오산마을 3기의 선돌은 각각 마을 앞 야산에 1기(칼바우), 마을 앞 논에 1기(줄바우), 마을 앞의 밭에 1기(선바우)가 위치한다.
선돌의 크기는 마을 앞 야산에 있는 칼바우 선돌은 높이 210cm, 두께 145cm, 폭 40cm이고 마을 앞 논에 있는 줄바우 선돌은 높이 135cm, 두께 53cm, 폭 50cm이며 마을 앞의 밭에 있는 선바우 선돌은 높이 100cm, 두께 50cm, 폭 20cm이다.
마을 앞 논에 위치한 선돌 줄마우의 형태는 삼각형이며 마을 앞 밭에 있는 선돌 선바우는 사각형이다.
오산마을에 선돌을 세운 이유는 비보(裨補)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다. 오산마을 뒤 봉화(烽火)가 있었던 성묘산 밑에 지네바위가 있고 마을 건너편 주암마을에는 닭바위가 있다. 오산마을 주민들은 닭에게 지네가 잡아먹히는 형국이라 하여 이를 막기 위해 선돌 3기를 세웠다고 보고 있다.
선바우, 줄바우, 칼바우라는 별칭이 있는 선돌이다. 마을 앞 야산에 있는 선돌을‘칼바우’라고 부르는데 이는 월출산 밑 닭바위의 목을 칼로 쳤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암마을에 있는 닭바우가 오산마을에 있는 지네바우를 해치러오면 바로 칼로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의미로 선돌을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돌에 관한 의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산마을에서는 2013년 현재까지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때도 선돌과 관련된 의례는 연행되지 않았다. 의례 행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해매다 매일 선돌을 향해 마음의 기원을 했으리라 본다.
지네바위가 있는 오산마을 뒤편에는 지네가 실제로 많은 편이다. 오산마을은 예전부터 앞마을인 주암마을에 비해 인구가 많았다. 오산마을에서 칼바위를 세운 이유에 관한 설은 크게 두 가지로 주암마을의 닭 바위가 오산마을의 지네바위를 먹기 위해 오산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과 주임마을에 있는 닭바위의 부리를 오산마을의 칼바위로 잘라버린 후 세웠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마산리 오산마을 선돌은 비보의 역할과 함께 인구가 많고 힘이 있는 마을에서 규모가 작은 마을을 제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것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다.
또한 오산마을 선돌은 '수살막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살막이란 장승의 다른 이름인데 수살은 보통 수살(水殺)로 푸는데 여기선 오산마을 앞이 예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으로서 마을 앞으로 들어오는 악귀를 쫓고 막는다는 신앙적인 관념이 깃들어 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마을이 배 모양의 선주형(船舟形)이기 때문에 마을 어귀에 돛 구실을 하도록 선돌을 세웠다고 한다.
신북면 명동리 선인정마을 선돌은
명동리 선인정마을 선돌은 마을 입구에 있는 선인정 앞에 위치한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05cm, 두께 20cm, 폭 55cm이다.
선돌 주위에는 여섯 구루의 당산나무가 있다. 선돌은 수호신 역할, 마을 안녕, 마을 번창 등의 역할로 세웠다. 농지정리로 선돌이 없어졌으며 당산나무도 여섯 구루에서 일부 고사되고 두 구루만 남아있다.
선인정 마을에서는 1950년대 초까지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에 마을과 아이들과 아이들의 무사안녕을 빌기 위해 마을 제의가 연행되었다. 마을제의 명칭은 당산제이며 당산제를 지낼 때 신목과 함께 선돌에 대한 의례도 함께 이루어졌다.
보통 선돌은 하나로 세워져있지 않고 암수 짝을 이룬다. 그런데 영암 지역의 선돌은 짝을 이루는 것과 짝을 이루지 않고 하나만 있는 것으로 양분된다. 이때 하나만 있는 선돌은 대부분 남성을 상징하며 당산나무와 쌍을 이룬다. 두 선돌이 남녀 쌍을 이루지 않고 남성을 상징하는 선돌과 여성을 상징하는 당산마누가 한 쌍을 이루는 것은 영암 지역 선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런 과정에서 살펴봤을 때 선인정마을 선돌은 형태상 남성을 상징하며 당산할머니라 불리는 신목이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동리 선인정마을의 선돌은 여러 부인을 두었다. 부인인 당산나무는 여섯 구루로서 부인이 여섯 명이다. 2013년 현재는 네 구루의 당산나무는 고사되어 사라지고 없고 두 구루만 남아있다. 그래서 명동리 선인정마을 선돌은 네 부인을 잃은 채 현재 두 부인하고 함께 선인정마을을 지키고 있다.
덕진면 운암리 선돌은
운암리 선돌은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선돌의 생김새는 사각형 기둥 모양이며 남근을 연상하게 한다. 망주석 풍모도 풍긴다.
시종면 월롱리 미룩동마을 선돌은
월롱리 미룩동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마을에서는 선돌을 미룩불이라고 부른다. 미륵골에 이는 바위가 주위를 돋워 봉분과 같이 쌓은 토단 위에 있어 그 형태로 보아 원래는 불상을 새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미륵불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 선돌, 서호면 청룡리 신흥마을 선돌, 서호면 엄길리 서엄길마을 선돌, 서호면 소산리 소흘마을 선돌, 서호면 태백리 백운동마을 선돌, 영암읍 농덕리 둔덕마을 선돌, 군서면 동호리 동면마을 선돌 등이 있다.
영암 지역 선돌, 최적의 입지조건 갖춰 성행했다.
영암 지역의 선돌(입석)은 주로 바다와 인접한 곳에 산재해져 있다. 그리고 금정면 지역 같은 산이 있는 곳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은 예전은 바다였다. 현재는 이곳을 강으로 보고 있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강보다는 바다로 여겼다. 지금의 농토로 변한 것들이 거의 바다였다. 점점 바다를 막고 농토로 바꾸다 보니 넓은 바다는 물이 흐르는 강으로 변해버렸다.
바다물이 들고했던 영산강 유역, 그런 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바다를 끼고 있는데다가 곳곳에 넓은 평야나 구릉지가 펼쳐져있어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환경 조건이기에 영암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고 그로 인한 유적지가 두루 분포되어 있다.
영암은 타 지역처럼 선사유적은 신설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집단 거주지 유적으로 곳곳에서 발견, 확인되고 있다. 서호의 고인군이나 시종의 고분군은 영암 지역이 선사시대부터 정착하며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이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기원전 1만 년경 빙하기가 끝나고 안정적인 자연환경 속에서 처음으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통하여 식량생산을 하여 취락을 이루어 집단 거주를 하게 된 시기이다.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천 년경 인류가 청동주조술을 터득하여 생산 경제횔동에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사람들 간에 계급이 형성되는 등 이전의 신석기시대와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시기이다.
영암 지역 선서유적은 삶의 터전으로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이 이런 환경을 이용하며 농사짓기와 어업 또는 수렵활동 등을 영위하여 퓽요롭게 살아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 인류는 식량을 따라 이동하고 정착하였다. 사냥감을 찾아 이동하였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을 하였다. 거기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식수원인 물이다. 이동을 할 때도 정착 생활을 할 때에도 꼭 물이 있는 곳에 터전을 잡았다. 영암은 그러한 오래전 삶을 들려주는 곳이 선돌이 있는 지역들이다.
특히 바다에 인접한 지역들은 선사시대의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과 선돌은 물론 거기에서 나온 돌검.동칼.청동검.청동칼.반달칼.구물추 등 생활도구들이 발견되고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불을 피우고 고기를 잡는 수렵활동과 움집이 들었으며 영산강 수변을 따라 정착한 신석기 또는 청동기 문화의 마을이 펼쳐진다. 바다인 강을 따라 산과 숲과 벌판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정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과 집의 내부 시설과 집터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 생활모습과 농업활동, 어업활동, 예술생활까지 엿보게 된다. 당시의 사람들은 영산강의 풍부한 물과 물고기, 비옥한 충적지대 등의 환경을 적극 이용하여 활발한 농사짓기와 물고기잡이 채집활동을 하면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농업활동에 쓰였을 것으로 보인 민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 어로 생활의 필수품이었을 다양한 형태의 구믈추, 갈판자와 몸을 치장하거나 신앙의 표현물이었을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발찌 등의 치레걸이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영암 지역이 어느 지역 못지 않게 선돌문화, 즉 거석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거석문화가 성행했던 것은 영암에 사는 사람들이 신앙심이 깊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선사시대의 땅 위에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차석)한 큰 돌을 하나 이상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 등으로 삼은, 선돌이라는 돌기둥을 세웠다.
일명 '입석(menhir)' 이라고도 하는 선돌은 고인돌(지석묘, dolmen), 열석(alignement)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 의 하나이다. 고고학에서 일컫는 선돌이란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에 걸쳐 이루어진 유적에 한정시키고 있다.
선돌은 세계 도처에 널리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동아시아와 근동지방과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대게 고인돌 등 다른 여러 종류의 거석 유적과 직접 혹은 간접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어 분포에 있어서도 서로 혼재하는 경우가 있다.
우라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분포 범위는 거의 한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세우거나 극히 일부만을 치석해 세운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드물게는 원래부터 있던 거석을 선돌로 삼는 경우도 있다. 형태는 주로 등근뿔이나 둥근 기둥 또는 모난뿔이나 모난 기둥이지만 드물게는 넓적한 판석도 있다.
기능에 있어서는 대체로 선돌에 얽힌 전설이나 신앙이 주를 이루며, 에배의 대상물로서의 성격이 본질을 이루고 있다. 그까닭은 선돌 자체기 가지는 외혁적 특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뚝 솟은 모습에 따라 사람들에게 외경감을 불러들으킨다 든가 그 형태가 흡사 남성의 성기와 바슷해 생식기 숭배 같은 원시신앙과 결부되기도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선돌에 대한 외경 또는 예배, 기원의 대상으로서의 성격은 원시사회에서 이루어진 정령숭배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기념물 또는 산앙대상물로서의 선돌은 처음 세워진 후 오랜 세월동안 기능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서 여기에 각자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볏집이나 새끼로 묵는 의인화 또는 신격화시켜 마을의 수호신, 기자암 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러한 형태와 기능에 따라 여기에서부터 비석이나 장승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선돌은 대부분 단독으로 마을 어귀같은 평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간혹 낮은 구릉 위나 비탈에 세워지기도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인돌과 바로 인접되어 있는 곳도 있다. 그러한 유적으로서는 서호면 서엄길 고인돌 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상계리, 동곡리와 주산면 상곡리와 대전광역시 대덕구 교촌동과 청양군 목면 지곡리 등 충청남도 지방 일원에서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또한 전라남도 지방에서도 순천시 입석리, 석현리와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와 담양 등지에서 확인된 바 있다.
고인돌과 선돌의 공존관계로 보아서는 일단 이들이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 유적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상호간의 기능적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 이를테면 선돌이 고인돌의 존재를 표시해주는 묘표적을 갖춘 것인지 또는 제단석으로서의 가능을 가진 것이지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이고 면밀한 조사에 의해 그 성격을 밝혀내야 되지만 선돌은 고인돌을 위한 목적으로 세웠을 것으로 심증이 굳혀지고 있다. 선돌은 고인돌뿐만 아니라 마을에도 세웠던 것 또한 마을과 관련된 문화의 한 요소로써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선돌은 여러 목적을 갖고 세웠다. 여러 역할을 띤 선돌로서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존재로 여기며 정신지주로 삼고 신앙하며 신성시했다.
선돌은 여러 형태를 하고 있다.
원뿔 모양, 삼각뿔 모양, 사각뿔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저마다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선돌을 의인화하여 성(性)과 관련시켜 부르는 이름이 많다. 이러한 성 구분과 선돌의 형태를 비교하면 위 끝이 뾰족하면‘남성(男性)’으로, 위 끝이 편평하거나 둥근 형태를 하면‘여성(女性)’으로 부르고 있다.
선돌을 형태학상으로 나누며 그 의미를 달리했다. 남녀의 구분의‘성별가능’과 또는 벽사나 수구막이의 역할을 한‘수호기능’의 선돌로서 여겼다.
선돌은 어떤 기능을 하였을까?
선돌은‘묘표(墓標)기능, 풍요(豊饒)기능, 수호(守護)기능’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덤 옆에 있는 묘표기능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의 선돌, 들판 경작지에 세워진 풍요기능의 선돌, 마을 어귀에 세워진 수호기능의 선돌은 서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영암의 선돌은 주로 고인돌이 있는 곳에 많고 마을 어귀에 위치하며 고인돌의 영혼을 달래주고나 지키거나 안내를 하거나 제례를 하는‘위령(慰靈), 위수(衛戍), 표석(標石), 제단(祭壇)과 마을의‘수호신(守護神), 질병퇴치, 화재방지, 액땜, 수구막이, 농사의 풍년’등 마을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어 풍요와 수호기능의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돌이 있는 곳은 마을공동체의 제의(祭儀) 행위가 이루어지는 종교적 장소로서 신성시한다.
선돌은 인간의 의지에 의한 큰 돌을 인위적으로 세운 것으로 입석(立石), 암석(巖石)으로 불린다. 고인돌.돌널무덤과 함께 큰돌문화(巨石文化)의 한 요소를 이룬다.
우리나라 전 지역에 걸쳐 분포하며 시간성과 역사성이 길고 넓다. 선돌의 건립시기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선사시대와 청동기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오랜 시기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 선돌의 형태는 주로 둥근꼴 모양이 많고 비석 모양, 뾰족한 돌기둥 모양 등 다양한 편으로 남성의 성기와 닮은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선돌은 쌍을 이루어 세워지는 예가 많은데 끝부분이 뾰족한 것은 남성을 상징하며 뭉툭한 것은 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남성의 성기를 닮은 것은 생식기능 숭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돌에 볏 집이나 새끼를 감아 신격화하여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곳도 있다. 선돌이 고인돌과 결합된 것은 선돌이 무덤 구역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오중탑(五重塔)을 보면 오륜(五輪)을 상징하는 다섯 부분으로 이우러진 탑의 맨 밑에는‘땅’을 상징해 네모꼴이며, 그 위는‘물’을 상징해 둥글고, 그 위는‘불’을 상징해 세모꼴이고 그 위는‘바람’을 상징해 반달꼴이며, 맨 위는‘하늘’을 상징해 끝이 뾰족한 공 모양이며 날카롭다.
장승에 농사가 잘되거나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비는 등의 당산마무와 장승에 영험함을 믿고 비손(합장)을 하거나 간단히 치성(致誠)을 하듯이 선돌에 대해서도 영험함을 발휘해주기를 우리 조상들은 신앙의 대상물로 여기며 숭배했다.
선돌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선돌은 여러 신앙심으로 숭배하고자 세워졌다.
선돌은 요즘에는 탑비(塔碑), 묘비(墓碑), 능묘비(陵墓碑), 신도비(神道碑), 사적비(事跡碑), 송덕비(頌德碑), 순열비(殉烈碑),열녀비(烈女碑), 효자비(孝子碑), 열부비(烈婦碑), 사비(祠碑)와 공적비(功績碑), 기념비(記念碑), 기공비(紀功碑), 유허비(遺墟碑), 기념탑(記念塔), 위령탑(慰靈塔), 수호탑(守護塔), 현충탑(顯忠塔)과 순수비(巡狩碑)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선돌은 장승으로 장승에서 불상이나 탑 등으로 불상과 탑은 동상이나 기념탑으로 변천해왔다고 볼 수 있다. 자연석의 돌을 세워 기원을 했다가 자연석 돌인 선돌은 다시 사람이나 동물 형상(獸形)을 한 조각상(彫刻像)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다가 장승의 아이디어를 얻어 민간신앙에서나 불교문화, 기독교문화에서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내보였다.
선돌은 처음에는 구역을 알리는‘경계표시(標柱)’였다. 그러던 것이 다산과 풍년 등의 풍요의 표시로 삼았고 다시 안녕과 수호신으로 여겼다. 오늘날에는 평화(平和)와 번영(繁榮)의 의미로 선돌을 가까이 한다. 마을 앞 어귀 등의 외부에 있었던 선돌과 장승은 사찰과 집 등의 안으로 끌어들여 우리의 생활과 가까이 한 채 애지중지하며 그런 것들에 치성을 드리고 있다. 선돌이 장승이 되고 동물상(수형)이 되고 불상과 동상이 되는 이런 형상에 우리는 마음을 두며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있다.
선돌의 의미처럼 비석 등 기념비를 세우거나 돌을 다듬어 지역을 표시하거나 조각해 탑을 세우는 등의 선돌은 시대변천 과정을 거치며 의미와 형태를 달리했다.
선돌을 세워 선돌에 의지했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선돌이 정신적인 지주(支柱)로 삼았기 때문에 선돌을 중요시 했고 그를 신성시(神聖視)했다.
영암 지역의 선돌은 다양한 형태로 여러 곳에서 자리한다.
고인돌이 있는 곳에서는 분명‘선돌’이 있었다. 아마 선돌이 없는 지역의 고인돌 군(群)에서는 그 선돌을 치웠거나 선돌 대신 다른 표시로 역할을 띠게 했을 것으로 본다.
논과 밭 그리고 야산에 있는 선돌은 풍년농사를 위한 세워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말 그랬을까하는 의문점이 든다. 그 당시에는 과연 논과 밭이 개간되었을 리가 없었기에 확실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농사의 풍년보다 다른 의미로 선돌을 세웠을 것으로 보여 지며 원시시대에는 농경사회가 아닌‘수렵(狩獵)사회’였다. 농사를 지어 생(生)을 이루거나 꾸려가지 않고 짐승 등을 잡아먹고 살았다.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을 했던 시기라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선돌을 세운 이유가 우리가 판단한 풍년농사를 기원하려고 한 목적보다는 자신들의‘구역을 표시’와 또는 그 지역의‘토신(土神), 수신(水神)’등에 대한 액(厄)을 막거나 복(福)을 불러들이고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선돌이 세워진 곳에 논과 밭이 들어섰다. 그 전에는 나지막한 구릉지나 평지의 야산(野山)이었으며 세월이 흘러 그 땅을 개간하다보니 선돌이 논이나 밭에 세워지게 된 것 같이 보인 것이다. 심지어 선돌이 있었던 자리에 집을 짓고 사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집 안에 선돌이 있게 된 것이며 선돌이 마을 입구 어귀에 있는 것도 원래는 마을 형성이 된 후 선돌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선돌은 그 지역에 머무는 분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기 위한, 하늘과 땅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우주사상에 의한‘형태적인 표시’로 집 등과 관계없이 세웠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터를 잡고 마을 형성하여 호구수와 인구수를 늘리면서 선돌을 중요시했고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자신들의 안녕과 건강과 풍요를 바랐고 마을의 수호신으로도 삼으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선돌은 그냥 아무데나 세우지를 안했다.
그 지역의‘지형(地形)과 방위(方位) 그리고 사상(思想)’을 보고 세운, 일종의 풍수(風水)에 의한‘천지인(天地人)’의 조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무 돌이나 갖다 쓰질 안했다. 목적을 분명히 하고 돌을 선택했으며 돌의 모양에 신경을 썼다.
심지어 돌을 끝부분의 방향(方向)과 각도(角度), 돌의 면(面)의 방위(方位)에 또는 돌의 역할을 잘 띨 수 있도록 돌의 중심의 면 부위가 어디로 향해야 좋은지를 파악해 위치(位置)와 방향(方向)을 잡아 설치했다. 돌 하나를 세운데도 우주를 생각했고 주술(呪術)을 담으려는 정화적인 마음으로 돌을 다루었다.
선돌의 끝이 뾰족한 것은 남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밑은 네모, 세모지만 위의 끝은 하나의‘점’으로 되는 뾰족하게 했다. 이것은‘천(天).지(地).인(人)’이‘하나’라는‘합일사상(合一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초인 시작은‘여러 각도와 면’을 이루더라도 완성의 끝은 점으로써의‘하나’가 되어야한다는 바람에서 뾰족한 선돌을 세웠다. 하늘을 닿으려 면은 끝이 뾰족해야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 시작했더라도 끝은 한 갈래가 되어야한다는 의미에서 아래부위는 원과 삼각, 사각, 육각, 팔각을 이루더라도 그 위로 올라갈수록 끝은 뾰족해야한다는‘원뿔, 삼각뿔, 사각뿔’등의 개념과 사상으로 선돌에 그 의미를 담았다.
위의 끝 부분이 둥글거나 편평한 것은 여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기운은 동일시되어야한다는 땅의 기운이 하늘에서도 똑 같이 입도록 바라는 의미에서 또는 하늘의 기운이 땅에서도 같아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그런 돌을 선택했다.
어떤 선돌은 막 생겼다. 울퉁불퉁하지만 그렇다고 생각 없이 갖다가 세운 것이 아니다. 이 선돌 또한 깊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선돌을 세운 목적과 의미는 다양하다.
여러 의미 중에는 악귀를 물리치려는 의미에서 세웠다. 그래서 악귀의 생김새가 그렇듯이 선돌 또한 상대를 물리치기 위한 험하게 생긴 돌을 골라 썼던 것이다. 이런 돌을 두고‘혹뿌리돌, 도깨비돌, 마귀할멈돌’등으로 부르고 있다. 잘 생긴 장승도 있지만 못생긴 장승도 있다.
대체적으로 장승의 얼굴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주시(注視)한 것이 아닌 상대를 차갑고 날카롭게‘응시(凝視)’하는 표정이다. 그 응시는 매의 눈으로 바라보는‘응시(鷹視)’이다.
장승은 대체적으로 흉하다고 할 만큼 눈이 크거나 코가 크거나하는 등 정상적인 사람의 얼굴은 아니다. 이런 장승을 해학적으로 보는데 우습게 생겨서 그렇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우스운 얼굴 표정이지만 장승은 세상을 무섭게 응시하고 있다. 눈이 튀어나오도록 했고 코를 크게 우뚝 세웠다. 특히 나쁜 일에 대해서는 더 무섭게 다가서는 표정을 한다. 이렇듯 선돌도 장승과 같은 의미적인 생김새를 한다.
제주도에서는‘돌하루방’이 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돌하르방은 투박스런 제주의 돌인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돌하르방은 제주도를 수호하고 제주인의 어려운 삶을 보살피며 오랜 세월동안 제주와 같이해온 석상(石上)이다. 툭 튀어나온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뭉툭한 주먹코, 넓게 뻗은 귀, 곧게 다문 입, 기이한 얼굴에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양손을 단정히 배 위에 얼려놓은 모습, 표정은 화가 난 듯도 하고 반기는 모습인 듯도 하다.
돌하르방은 기능적 역할은‘수호 기능, 주술 종교적 기능, 위치표식 기능’으로 장승과 흡사하다. 돌하르방이 서있는 위치를 볼 때 그것의 진정한 기능은 마을과 대문을 지키는‘수문장(守門將) 장승’의 역할을 해왔다.
선돌의 정신적인 것이 형태적인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선돌을 두고 우리 선조들은 여러 가지의 해석을 하며 전설로써 또는 야사로써 또는 소설로써 스토리를 낳으며 이어가고 있다.
군서면 마산리 오산마을의 3기 선돌은 전설적(傳說的)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마을 앞 동네(주암마을)에 있는‘닭 바위’가 우리 마을 뒤에 있는‘지네 바위’를 잡아 먹으로고 해 세웠다는 등으로 풀어 그 의미를 전한다. 사실은 그런 의미와 목적에서 세운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어찌됐던 선돌을 기리는 뜻에서 말을 지었건 아니했건 간에 선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면 선돌은 가치를 더할 것이다.
원시인들이 자신들의 구역에 대한 경계표시나 신에 대한 숭배사상으로 선돌을 세웠던 것으로, 그 지역은 대부분의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거나 흔적을 남겼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회사나 관공서가 정신적 글을 새기기 위해 큰 돌을 건물 앞에 세우거나 또는 마을의 이름을 새겨 알리기 위해 안내판 및 이정표로서 마을 어귀에 세운 돌은 다 선돌에서 비롯된 것이며 거석문화(巨石文化)가 현재도 나타나고 있으며 그 의미는 일맥상통(一脈相通)하다고 볼 수 있다.
영암 지역 곳곳에 선돌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글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에 대해 이해를 바라며 현장 답사를 통한 보다 더 구체적으로 빠짐없이 모든 자료를 조사, 분석, 연구해 영암의 선돌문화를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겠음을 약속드리고, 아울러 영암 지역에 있는 선돌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고 그 문화가 우리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선돌이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도록 선돌을 방치하거나 없애는 등의 하나의 돌로 취급하지 말고 선돌에 정신적인 의미가 깊게 담아져있다는 것을 선돌로 인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보존에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 분출 센 돌
돌, 돐.독.바위라고 부르는 돌은 어느 물체보다 기(氣)가 많이 분출하고 세다.
그래서 바위를 신(神)으로 모시는 경향이 짙다.
기가 서린 바위나 돌을 우리 선조들은 고인돌로 또는 선돌로 또는 돌을 깎아 석장승으로 사용하였다.
선사시대부터 돌을 신성시하며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던 것처럼 인생 살아가면서 늘 마음 한 구석에‘선돌’을 놓아두자. 당신을 행복을 위해
독도는 대한민국 선돌이다.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독도, 독도는 홀로 있다고 해서 홀로 독(獨), 섬 도(島)자를 써‘독도(獨島)’라고 한다. 독도는 원래 이름은‘돌섬’이다. 돌섬을 한자어 표기로 인해‘석도(石島)’가 됐다. 돌섬이 방언으로 돌을‘독’이라고 발음하여 울릉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돌로 된 섬이라는 돌섬을‘독섬’이라 불렀다. 독섬이 한자어 표기로 인해‘독도(獨島)’가 된 것이다. 돌을 경상도.전라도.충남.제주 지역에서는‘독’이라고 한다.
독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홀로된 섬은 아니다. 짝을 이루고 있는 섬이다. 육지와 멀리 따로 떨어져있다고 해서 홀로‘독(獨)’자를 붙여 독도(獨島)라 하였다.
한반도에서 울릉도보다 더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 솟아난 독도는 어쩜‘선돌’이 아닐까한다. 한반도(韓半島)를 지켜주는‘돌섬’으로서 왜구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바다의 안전을 지켜주고, 배들의 항해를 도와주거나 만선을 기하게 하는 풍요를 가져다주고 그리고 나라의 경계표시를 하는 그런 역할을 띤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외로이 떠있는 바위섬이다. 독도는 한반도의 거대한‘선돌’이다.
선돌은 마음의 눈으로 봐야
괴테는“로마는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선돌은“마음의 눈으로 봐야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고 느끼게 된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곁에 드러나는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에 갖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보면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 우리 민족 삶의 증거
문화유산이란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 정착한 이래 오늘날까지 생활을 영위하며 남겨진 유형의 모든 것을 말한다. 문화적인 산물을 뜻한 문화유산, 문화유산은 우리 민족‘삶’의 증거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을 잘 관리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인 것이다.
척박한 자연 환경을 일구며 돌과 함께 살아온 우리 국민들의 힘은 대한민국의 돌 문화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는 일 밖에 없다.
선돌(입석)은 '세우다. 만들다. 꾸미다. 이루다. 믿디. 모신다. 전한다. 받는다. 얻다. 든든하다. 풍요롭다. 넘친다. 가득차다. 신선하다. 신성하다. 밝다. 빛나다. 따뜻하다. 포근하다. 기운차다. 햐결해주다. 막아주다. 물리쳐주다. 지켜주다. 고쳐주다. 낳게 하다. 안심되다. 평화를 부르다. 건강을 부르다. 편인하게 하다. 발전시키다. 번영.번창시키다. 도약하다. 화합시키다. 의미를 낳다. 복을 주다. 생기를 주다. 생명을 낳다. 기운차다. 힘을 주다. 신통하다. 영험하다. 예지롭다. 꿈을 주다. 희망을 낳다. 미래를 열어주다. 세상을 열다. 세상과 연결해 주다. 통하다'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무뚝뚝하게 서있는 선돌,
하나의 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돌은 신앙심으로 태어난 돌이다. 선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지켜주면서 편안하게 영위하게 해주고 있는 신성한 선돌이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기를 불어주는 신비의 선돌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보존가치가 높은 민중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임을 깨닫자.
영암선돌
영혼 깃든 돌이니 신비스럼 그지함없고
암석 혼을 피우니 신령하길 신망하도다
선돌 생을 돋우니 만물생동 원기솟우고
돌령 예를 표하니 세상이치 깨달음하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