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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대제학 눌재 양공 신도비명 병서
(弘文館大提學梁公神道碑銘 幷序)
성화(成化) 18년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 13년) 6월 11일에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남원군(南原君)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양 문양공(梁文襄公)이 자리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 68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크게 슬퍼하여 2일 동안을 정무를 정지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해 8월 23일에 통진현(通津縣)의 남쪽 대포곡(大浦谷)의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자리에 장사하였다. 23년 뒤 홍치(弘治)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 3월 초6일에 정경 부인(貞敬夫人) 변씨(邊氏)가 졸하니 향년 91세이며,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다시 16년 뒤인 정덕(正德)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공의 손자 숙천 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 양형(梁泂)과 이천 도호부사(利川都護府使) 양숙(梁淑)이 양씨(梁氏) 족보와 괴애(乖崖) 김 상공(金相公,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남원군 정안(南原君政案)과 사가(四佳) 서 상공『徐相公 :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남원군 가승기(南原君家乘記)를 가지고 와서 나 김안국(金安國)에게 이르기를, “오직 우리 양씨가 남원(南原)에서 일어나 그 원류(源流)가 된 것이 오래 되었거니와, 우리 선조(先祖)가 문학(文學)과 재략(才略)으로 그 시대에 떨쳐 일어나 더욱더 크게 드러내고 차례로 5조(朝)를 섬겨 충근(忠勤)함을 나타냈으며, 육경(六卿)의 장(長)으로서 품질(品秩)이 1품에 올라 훈공이 태상(太常)에 기록되었고 사업(事業)의 성대하였음은 그 당시의 이름난 재상들의 문필에 기록되어 있어 속일 수 없음이 있음에도, 우리 자손(子孫)들이 재력이 없고 생각이 얕아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묘도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여 우리 선조(先祖)의 아름답고 갸륵한 덕행이 비록 그 국사에 등재되어 있어 후세에 찬란하게 나타난다고 일컬어도 천백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이 우리 선조의 산소를 지나다가 혹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어찌 우리 선조의 산소임을 알고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정성스럽게 보호하려는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렇게 될까 두려워하여 비석을 이미 다듬어 놓고 감히 비석에 새길 글과 명(銘)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나 김안국이 천박하고 졸렬한 후생(後生)으로 공이 명성을 드날리는 때를 직접 뵙지 못하였으니, 어찌 유명하신 재상의 아름다운 덕행을 여러 십년이 지난 뒤에 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소청함이 완강하고 의리에 있어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차례로 족보 및 정안(政案)과 가승기(家乘記)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양씨(梁氏)는 본시 남원(南原)의 귀성(貴姓)이니, 휘(諱) 능양(能讓)이 고려의 종실(宗室) 좌복야(左僕射) 왕임(王琳)의 딸에게 장가들어, 고려 초의 망족(望族)으로 본부(本府, 남원(南原))의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선임(選任)되어 마침내 그 이직(吏職)을 세습하였다.
8대손 휘(諱) 준(俊)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으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이분이 봉익 대부(奉翊大夫) 판도 판서(版圖判書) 증(贈) 통정 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 휘 우(祐)를 출생하니 바로 공의 증조(曾祖)이며, 이분이 통헌 대부(通憲大夫)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증 가선 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휘 석륭(碩隆)을 낳으니 바로 공의 조부이며, 이분이 중훈 대부(中訓大夫) 예빈시 윤(禮賓寺尹) 증 순성 보조 공신(純誠補祚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남원군(南原君) 휘 구주(九疇)를 낳았으니 바로 공의 아버지요,
어머니는 증 정경 부인(貞敬夫人) 권씨(權氏)이니 자헌 대부(資憲大夫) 전주 부윤(全州府尹) 휘 담(湛)의 딸이다. 찬성공(贊成公)이 아들 세 사람을 두었으니, 공은 그 가운데 아들이다. 공의 휘는 성지(誠之)요, 자(字)는 순부(純夫)요, 호(號)는 눌재(訥齋)이니, 영락(永樂)
을미년(乙未年, 1415년 태종 15년) 9월 정사일(丁巳日)에 출생하였다.
총명함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서 여섯 살에 처음으로 글을 읽어 아홉 살에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世宗) 23년 정통(正統) 신유년(辛酉年, 1441년)에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의 두 시험에 합격하고 다시 문과(文科)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경창부 승(慶昌府丞)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얼마 안 있어 집현전(集賢殿)에 뽑히어 들어가서 여러 번 승진하여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기고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에 전임하였다가 다시 집현전에 들어가 여러 번 승진하여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일찍이 소(疏)를 올려 행성(行城)을 쌓는 일을 파(罷)하도록 청하였고, 다시 수차례의 소를 올려 군도(君道, 왕도(王道))와 변경(邊境)의 비어책(備禦策)에 대해 논하였다.
문종(文宗) 2년(1452년)에는 밀계(密啓)를 올리기를, “외척(外戚)에게 의탁해 맡기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를 보건대 종친(宗親)이 강하고 공실(公室)이 약해서, 모름지기 어진 외척을 골라 맡겨서 공실을 강하게 해야겠습니다.” 하였으니, 대개 소견(所見)이 있어서 미연(未然)에 도모코자 한 것이었다. 임금의 마음으로는 가상하게 여겼으나 능히 채용되지는 못하였는데, 일찍이 ‘양성지의 나라 일을 근심함’을 칭찬하고 변계량(卞季良)을 책(責)하였다.
경태(景泰) 4년(1453년 단종 원년)에 세조(世祖)가 정난(靖難)하고 보정(輔政, 섭정(攝政)과 같음)하면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고자 하였는데, 정인지(鄭麟趾)가 공을 소속시켜 맡아 다스리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장려(獎勵)와 지우(知遇)를 입게 되었다.
(을해년(乙亥年, 1455년 세조 원년)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명을 받들고 평안도(平安道)에 가 여연(閭延) 등의 세 폐읍(廢邑,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의 산형과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와 지도(地圖)와 지지(地誌)를 편수하여 올리고 아울러 도내(道內)의 편리하고 마땅한 열 여덟 가지 일을 올리었더니, 세조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듬해 정월에 세조가 조회를 끝마치고 모든 신하들을 이끌고 주연을 베풀고 각각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의견을 진술하도록 하였다.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대신(大臣)을 예우하시어 술을 드실 때마다 담론(談論)을 하시는 일은 진실로 훌륭하신 일이오나, 다만 술을 알맞게 마시어 옥체(玉體)를 조섭(調攝)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크게 탄복하여 칭찬하고 이르기를, “오직 그대만이 나를 아껴주는도다.” 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5월에 윤대(輪對)로 인하여 아뢰기를, “요즈음 대신의 집에 자주 거둥하니, 예우가 후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둡고 깊은 밤에 여염[閭巷]사이를 세자(世子)와 훈신(勳臣)들과 함께 거둥하는 일은 편치 못합니다. 또 종친(宗親)의 조아(朝衙, 한 달에 여섯 차례씩 5일 간격으로 열던 대조회(大朝會)) 또한 당번을 나누게 하는 일이 옳으며, 숙위(宿衛)하는 금병(禁兵)에게 일시에 술을 내려 장병[將士]에게도 명절의 잔치를 금하심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아뢴 일은 모두 깊은 생각이 있었으니, 임금도 또한 그렇게 여기었다. 얼마 안되어서 과연 변란의 음모가 있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공이 또 여러 번 편리하고 마땅한 일을 상소하여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는 민사(民事)를 마음에 두고 아는 일은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또 칭찬하기를, “양성지는 비상(非常)한 사람이다.” 하였다.
겨우 3, 4년 사이에 여러 번 승진하여 품질(品秩)이 가선 대부(嘉善大夫)ㆍ가정 대부(嘉靖大夫)ㆍ자헌 대부(資憲大夫)가 되었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ㆍ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승진 임명되었다.
천순(天順) 8년(1464년 세조 10년)에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양성지(梁誠之)는 나의 제갈 양(諸葛亮)이다.” 하고 며칠 뒤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하였는데, (이조 판서로) 있은 지 반년 만에 파(罷)하고 중추원사(中樞院事)가 되었다.
임금이 일찍이 열병[閱武]하다가 신숙주(申叔舟)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양성지는 왕을 보좌할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하고, 얼마 안되어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하고 이르기를, “헌부(憲府)는 나라의 이목(耳目)이다. 조금이라도 게으르고 소홀하면 백관[百職]이 능이(陵夷)해지니, 내가 경(卿)을 임용한 것은 그것을 진작시키려 함이다.” 하였다.
수년 뒤에 임금이 발영시(拔英試)를 베풀어 월등하게 우수한 재능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데 공이 2등에 합격하였다. 성종(成宗)이 즉위(卽位) 3년째인 (신묘년(辛卯年, 1471년 성종 2년)에) 보좌한 공로를 논의하여 공에게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고 남원군(南原君)을 봉하였다. 일찍이 봉교(奉敎)로서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정(參定)하였는데, 공이 이로 인하여 45사(事)를 의논해 올렸으며, 뒤에 승진하여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겸임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문묘(文廟)에 친사(親祀)하니 공이 친사 문묘송(親祀文廟頌)을 올렸는데,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내탕고(內帑庫)의 물건을 내려 주었으며, 얼마 안되어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제배하였다. 공이 여러 차례 소(疎)를 올려 군국(軍國)의 비계(秘計)와 풍속(風俗)ㆍ학교(學校) 등의 일을 논하였는데, 뒤에 남원군(南原君)에 도로 봉해졌다.
공은 독서(讀書)하기를 좋아하며 널리 많은 서책을 열람하여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평상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우리 동방(東方)에 이르기까지 위와 아래로 수천년 동안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함이며 인물(人物)의 고하(高下)와 현부(賢否)를 어제의 일과 같이 분명하게 알았으며, 또 고금(古今)의 천하 산천의 험준하고 막힘과 주군(州郡)의 연혁(沿革)을 발로 직접 걸어 다니고 눈으로 직접 본 것과 같이 알고 있었으며 또 자신을 다스리는 책략이 있어 언제나 근신하여 나라에 유익하게 하려는 생각을 일찍이 잠깐이라도 마음속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헌부(憲府)에 5년 동안 있으면서 탄핵(彈劾) 상소를 올린 일이 20번이었으며, 그 밖에 평소에도 편리하고 마땅한 일을 올린 것이 44통[道]에 3백 3조(條)로 수십만언(數十萬言)에 이르렀는데, 기타 건의한 바도 또한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나 그중에서 큰 것만 총 24가지 일이 되니,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세운 것이 세 번이요, 조정의 대정(大政)을 의논한 것이 한 번이며, 임금을 위하여 두 번이나 충간(忠諫)을 올렸다.
사헌부에 있어서는 대강(臺綱)을 세 번이나 떨쳐 일으켰고 또 변방(邊防)의 중대한 일을 다섯 번이나 논의하였으며 군국(軍國)의 비계(秘計)를 열 번이나 상소하여 올렸고, 장년(壯年)이 되어서는 병사(兵事)를 논의하기를 좋아하여 올린 상소가 무릇 10여 건(件)이었는데, 국민(國民)으로서 누적(漏籍)된 것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하고 단정(單丁)으로서 입역(立役)하는 사람이 1병(兵)도 없도록 하며 시재(試才)를 하지 않고 칭병(稱兵)하는 사람이 1정(丁)도 없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공의 평생에 지닌 뜻이었다. 노년(老年)에 미쳐서는 순전히 풍속(風俗)이 옛날과 같지 못함을 한(恨)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색(聲色)에 나타내기까지 하였다. 처음 벼슬길에 나선 이후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간 것이 16년이었고, 전교서(典校署)를 맡은 것이 20년이었으며, 사관(史館)을 겸임한 것이 34년, 홍문관(弘文館)에 출사(出仕)한 것이 26년이었는데, 전후로 과거의 시험관이 되어 인재를 뽑은 바 문과(文科)가 16방(榜)이나 된다.
만년에는 벼슬을 사직하고 편안하고 한가로이 지내며 날마다 빈붕(賓朋, 빈객(賓客)과 붕우(朋友))ㆍ유로(儒老)들과 시사(詩史)를 확실하게 헤아려 생각하고 때로는 혹 구종[奚童]과 한 필의 말을 타고 통진(通津)의 별장[別墅]을 마음내키는 대로 노닐며 한가로운 시골 노인과 같이 지내면서 (타고난 수명(天命)을 마치었으니,)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가지가 모두 완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이 저술한 책으로는 주의(奏議)가 10권(卷)이며 가집(家集)이 6권이다. 또 ≪오조실록(五朝實錄)≫과 ≪고려전사(高麗全史)≫와 ≪절요(節要)≫ㆍ≪동국통감(東國通鑑)≫을 수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동문선(東文選)≫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집찬(集撰)하였으며 또 왕명을 받들어 ≪열성어제시(列聖御製詩)≫ㆍ≪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ㆍ≪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ㆍ≪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ㆍ≪동국도경(東國圖經)≫ㆍ≪오륜록(五倫錄)≫ㆍ≪삼강사략(三綱史略)≫ㆍ≪농잠서(農蠶書)≫ㆍ≪축목서(畜牧書)≫ㆍ≪유선서(諭善書)≫ㆍ≪시정기(時政記)≫ㆍ≪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ㆍ≪연변방수도(沿邊防戍圖)≫ㆍ≪양계방수도(兩界防戍圖)≫ㆍ≪역진명황계감(譯進明皇戒鑑)≫ㆍ≪교진의방류취(校進醫方類聚)≫ㆍ≪손자주해(孫子注解)≫ 등의 책을 집찬(集撰)하였다.
부인(夫人)은 원주 변씨(原州邊氏)로 그 아버지는 선절 장군(宣節將軍) 중령 호군(中領護軍) 변상근(邊尙覲)이요, 조부는 가정 대부(嘉靖大夫) 도총제부 총제(都摠制府摠制) 변이(邊頤)요, 증조부는 영삼사사(領三司事) 원주 부원군(原州府院君) 변안렬(邊安烈)이다.
부인은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으며 올바르고 착한 덕이 있어 군자(君子)의 배필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오래 살다가 편안하게 돌아갔으니, 이도 또한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일이었다.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양원(梁瑗)이며 다음은 정선 군수(旌善郡守) 양수(梁琇)요 다음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양찬(梁瓚)이며 다음은 증산 현령(甑山縣令) 양호(梁琥)이다.
양원의 아들은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양치(梁治)와 신창 현감(新昌縣監) 양제(梁濟)이며 사위는 여원 부원군(礪原府院君) 송질(宋軼)이요, 양수(梁琇)의 아들은 맹산 현감(孟山顯監) 양윤(梁潤)이요, 양찬의 아들은 바로 양형(梁泂)과 양숙(梁淑)이요, 양호(梁琥)의 아들은 호군(護軍) 양결(梁潔)과 사과(司果) 양활(梁活)과 사맹(司猛) 양연(梁淵)이며 사위는 종실 양록 부정(楊麓副正) 이수(李粹), 승사랑(承仕郞) 윤광흡(尹光洽)이다.
모든 내외의 증손(曾孫) 중 양윤원(梁允元)ㆍ양윤형(梁允亨)ㆍ양윤정(梁允精)ㆍ양윤수(梁允粹)는 양치(梁治)의 아들이요, 양윤겸(梁允謙)ㆍ양윤심(梁允諶)은 양제(梁濟)의 아들이요, 송지한(宋之翰)ㆍ송지간(宋之幹)ㆍ송지정(宋之楨)은 여원(礪原, 여원 부원군 송질(宋軼))의 아들이요,
양희증(梁希曾)ㆍ양희삼(梁希參)은 양윤(梁潤)의 아들이요, 양윤인(梁允仁)ㆍ양윤의(梁允義)ㆍ양윤지(梁允智)ㆍ양윤신(梁允信)은 양숙(梁淑)의 아들이며, 양윤영(梁允英)은 양결(梁潔)의 아들이요, 양윤온(梁允溫)은 양활(梁活)의 아들이며, 양윤근(梁允謹)은 양연(梁淵)의 아들이요,
이인홍(李仁弘)은 이수(李粹)의 아들인데, 모든 외손주사위와 증손주사위도 또한 세상에 드러나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많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득하게 오래었도다 양씨(梁氏)여, 남원으로부터 떨치고 일어났으며 왕소와 혼인하여 경사롭고 상서로운 기초가 비롯하였도다.
어진 덕행이 많이 쌓이고 착한 행실이 여러 번 겹쳐서 오래 될수록 좋은 일이 더욱 많이 발생하였으며, 물이 흐르듯이 점점 통달하여 넓은 강하가 되고 큰 바다를 이루었도다. 한림공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날리어 문학으로 조정에 명성을 드날리었고, 공이 바로 그 뒤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하늘에 날개를 떨치었도다.
문학의 큰 계책과 병략은 오직 나라와 공사만을 생각하고 학술(學術)과 시사와 문학은 태산과 황룡과 같이 아름답게 꾸미었도다. 다섯 임금을 부지런히 섬기었으니 공신각에 공적을 기록하였으며, 보살피고 포상하여 감탄하니 임금의 신임을 받음이 융숭하였도다.
육관(六官) 중 총경(冢卿)의 자리에 오르니 아름다운 서대[文犀, 무소 뿔로 만든 띠]가 허리에서 빛나고, 성하고 빛나는 왕조의 신하여, 특별히 사랑하는 왕명이 지극히 분명하도다. 공은 공의 사사로운 존재가 아니고 공의 덕행은 이 온국민의 표본이로다.
초목이 우거진 푸른 들에서 편안하고 한가로이 지내며 산수와 자연을 마음대로 즐기었으며, 만년을 완전하게 보냈으니 또 누가 공과 같은 사람이 있으리까? 수목이 우거진 무덤의 언덕에 끌개를 펼친 듯 큰 비석이 모시고 서 있고 별장이 그 옆에 줄지어 있으니, 평소와 같이 편안히 쉬소서. 공의 발자취에서 스며드는 향기는 자손이 편안히 이어받아 따르며 명성을 서술하고 공적을 재록하니, 끝없이 오래도록 아름다운 교훈을 주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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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梁誠之 碑銘[金安國]
成化十八年壬寅六月十一日,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南原君、兼知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梁文襄公卒于位, 享壽六十八。 訃聞, 上震悼, 輟朝二日, 命有司庀喪事。 以其年八月二十三日, 葬于通津縣之南大浦谷乾坐巽向之原。 後二十三年弘治甲子三月初六日, 貞敬夫人邊氏卒, 享壽九十一, 祔葬公兆。 又後十六年正德己卯, 公之孫肅川都護府使泂、利川都護府使淑, 持梁氏族譜及乖崖金相公南原君政案、四佳徐相公南原君家乘記, 來告安國曰: “惟我梁氏興于南原, 其源流遠矣。 至我先祖, 以文學、才略奮于時, 益大以顯。 歷事五朝, 克著忠勤。 位冢六卿, 秩躋一品, 勳記于太常。 事業之盛, 見錄於當時名公之筆, 有不可誣者。 而吾子孫力孤慮短, 至今四十年, 不得樹豐碑于阡隧, 以稱我先祖之休德。 雖其載在國乘者, 彪著于後, 而千百載之下, 人有歷吾丘壟而或登望焉者, 寧知我先祖之所歷, 而發起敬謹護之念哉爲用是懼, 石旣礱矣, 敢請刻辭興銘.” 安國以譾陋後生, 不及覿公蹈揚之日, 何能以發舒名卿之美於累數十載之後乎然請之固, 義不敢終拒, 謹聯次族譜及政案、家乘記而爲之敍曰: 梁本南原貴姓, 有曰能讓, 娶高麗宗室左僕射王琳之女, 高麗初, 以望族選任本府兵部郞中, 遂世其吏職。 至八世孫俊, 登第, 官至成均祭酒, 卽公高祖。 是生奉翊、版圖判書、贈通政・戶曹參議諱祐, 卽公曾祖: 是生通憲、判衛尉寺事、贈嘉善・兵曹參判諱碩隆, 卽公祖; 是生中訓、禮賓寺尹、贈純誠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南原君諱九疇, 卽公考。 配贈貞敬夫人權氏, 資憲大夫、全州府尹諱湛之女。 贊成公有子三人, 公其中子也。 公諱誠之, 字純夫, 號訥齋, 以永樂乙未九月丁巳生。 聰睿異凡, 六歲始讀書, 九歲知屬文。 世宗二十三年正統辛酉, 中進士、生員兩試, 復登文科第二人, 授慶昌府丞。 未幾, 選入集賢殿, 累遷副修撰, 轉司諫院左正言, 復入集賢殿, 累陞至直提學。 嘗上疏請罷行城, 復數疏論君道、邊策。 文宗二年, 密啓: “倚任外戚, 固非國家令事, 然觀今勢, 宗親强而公室弱, 須擇任賢外戚, 以强公室。” 蓋有所見而欲圖於未然也。 上意嘉之, 而未能用, 嘗稱梁誠之憂國類卞季良。 景泰四年, 世祖靖難輔政, 欲作《東國地圖》。 鄭麟趾屬公掌修, 因被奬遇。 及世祖卽位, 奉使平安道, 審視閭延等三廢邑形勢, 還修進地圖、地誌, 竝上道內便宜十八事, 上嘉納。 明年正月, 上朝罷, 引諸臣置酒, 從容令各陳所蘊。 公進曰: “殿下優禮大臣, 每盃酒談論, 誠盛事, 但望節飮, 調攝玉體。” 上大嗟賞曰: “唯汝愛我。” 進秩通政。 五月, 因輪對啓曰: “近累幸大臣第, 禮厚矣。 然昏夜閭巷間, 與世子、勳臣同幸, 恐非便。 宗親朝衙, 亦宜分番, 宿衛禁兵, 勿一時賜酒: 邊鎭將士, 當禁節宴。” 公所啓皆有深慮, 上亦然之。 未幾, 果有變, 謀敗。 公又累疏陳便宜, 上曰: “爾留心民事, 知無不言, 予甚嘉賞。” 又賞曰: “誠之, 非常人也。” 僅二四年, 累進秩嘉善、嘉靖、資憲, 陞拜同知中樞院事、兼同知春秋館事、弘文館提學。 天順八年, 上謂左右曰: “梁某, 予之諸葛亮也。” 數日, 擢拜吏曹判書。 居半歲, 罷爲中樞院事。 上嘗閱武, 顧申叔舟曰: “梁某有王佐才。” 無何, 拜司憲府大司憲。 謂曰: “憲府, 國之耳目。 少怠忽, 則百職爲之陵夷。 予用卿, 欲其振擧也。” 後數年, 上設拔英試, 以旌異才, 公中二等。 成宗卽位三年, 論輔佐功策, 賜公純誠明亮佐理功臣之號, 封南原君。 嘗奉敎, 與諸公參定《經國大典》, 公因議上四十五事, 後進兼弘文館大提學。 上嘗親祀文廟, 公進頌, 上嘉賜帑物。 未幾, 拜工曹判書。 累疏上軍國秘計及論風俗、學校等事, 後還封南原君。 公喜讀書, 博覽强記, 居常卷不釋手。 自中國以及東方, 上下數千載間, 治亂興亡、人物高下賢否, 瞭然如昨, 又能考究古今天下山川阨塞、州郡沿革, 如足履而目擊之。 且有籌略, 常惓惓以裨益國家爲慮, 未嘗頃刻忘于懷。 爲憲府五年, 彈劾二十疏外, 平時上便宜, 至四十四道三百三條數十萬言。 他所建白亦多, 不悉擧, 其大者摠二十四事: 建宗社大計三, 議朝廷大政一, 爲君上而兩進忠諫。 在憲府三振臺綱, 又五論邊防重事, 十進軍國秘計。 壯年喜論兵, 疏凡十餘上, 無一人以國民而漏籍, 無一兵以單丁而立役, 無一丁而不試才而稱兵。 此公平生之志。 及老, 全以風俗之不如古爲恨, 至形於聲色不自知也。 自筮宦入集賢殿者一十六年, 掌典校者二十年, 兼史館三十四年, 仕弘文二十六年, 試知選擧前後所取文科一十六榜。 晩節謝事優游, 日與賓朋、儒老, 商確詩史, 或以奚童、匹馬, 遊適通津別墅, 蕭然如野老, 公可謂始終兩全矣。 所著《奏議》十卷, 《家集》六卷。 又參修《五朝實錄》、《高麗全史》、《節要》、《東國通鑑》, 集撰《東文選》、《治平要覽》、《東國輿地勝覽》。 又奉敎集撰《列聖御製詩》、《皇極治平圖》、《龍飛御天圖》、《海東姓氏錄》、《東國圖經》、《五倫錄》、《三綱事略》、《農蠶書》、《畜牧書》、《諭善書》、《時政記》、《八道地圖地理誌》、《沿邊防戍圖》、《兩界防戍圖》、《譯進明皇誡鑑》、《校進醫方類聚》、《孫子注解》等書。 夫人籍原州, 考宣節將軍、中領護軍諱尙覲, 祖嘉靖、都摠制府摠制諱頤, 曾祖領三司事、原州府院君諱安烈。 夫人賢明有淑德, 配君子無虧婦道, 壽考令終, 亦世所罕見。 生四子: 長曰宗親府典籤瑗, 次曰旌善郡守琇, 次曰承政院同副承旨瓚, 次曰甑山縣令琥。 瑗之子曰宗親府典簿治, 新昌縣監濟。 壻曰礪原府院君宋軼。 琇之子曰孟山縣監潤。 瓚之子曰浻、淑。 琥之子曰護軍潔, 司果活, 司猛淵。 壻曰宗室楊麓副正粹, 承仕郞尹光洽。 諸曾內外孫曰: 允元、允亨、允精、允粹, 治之子。 允謙、允諶, 濟之子。 之翰、之幹、之禎, 礪原之子。 希曾、希參, 潤之子。 允仁、允義、允智、允信, 淑之子。 允英, 潔之子。 允溫, 活之子。 仁弘, 粹之子。 及諸外孫、曾孫壻亦衆多顯達知名。 銘曰:
遠矣梁氏, 興自帶方。 姻聯仙派, 肇基慶祥。 積德累善, 久而彌發。 如漸流達, 洪河巨渤。 俊始奮跡, 文顯于朝。 公乃繼起, 拂翮雲霄。 文謨武略, 惟國惟公。 術學詞翰, 賁飾山龍。 五朝勤勞, 旂常紀功。 眷褒嗟咨, 遭際之隆。 冢卿六官, 文犀映腰。 蔚蔚王臣, 寵命孔昭。 匪公私有, 公德是標。 優游綠野, 丘壑江湖。 晩節之全, 又孰公徒 鬱鬱阡原, 有翼豐碑。 墅第傍羅, 憩逸平時。 公迹所薰, 雲來繼綏。
述名載烈, 永世休貽。<끝>
[註解]
[주01] 崖 : 底本에는 “厓”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2] 祐 : 底本에는 “祜”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 《慕齋集・梁文襄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
다.
[주03] 幾 : 底本에는 “旣”로 되어 있다.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4] 言 : 底本에는 “吉”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5] 二 : 《慕齋集・梁文襄公神道碑銘》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
[주06] 幾 : 底本에는 “旣”로 되어 있다. 文脈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7] 瞭 : 底本에는 “暸”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및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8] 三 :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에는 뒤에 “十三”이 더 있다.
[주09] 頤 : 底本에는 “熙”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 《慕齋集・梁文襄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
다.
[주10] 子 :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에는 뒤에 “允謹, 淵之子。”가 더 있다.
[주11] 彌 : 底本에는 “稱”으로 되어 있다. 釜山大本,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 《慕齋集・梁文襄公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
다.
[주12] 漸流 : 《訥齋集・南原君神道碑銘》에 “流漸”으로 되어 있다.
國朝人物考十二 / 卿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