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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행(行)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의 묘표(墓表) - 권유(權愈)
우복 정 선생이 졸하여 장사 지낸 지가 지금 62년이 되었다. 고(故) 대학사(大學士) 조공 경(趙公 絅)이 이미 서(序)와 명(銘)을 지어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영가(永嘉) 권유(權愈)가 또 가전(家傳)과 국사(國史)에 기록된 것 가운데에서 가장 긴요한 것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묘표를 짓는다.
공의 휘는 경세(經世)이고 자(字)는 경임(景任)이며, 진주인(晉州人)이다. 공의 선조들이 상주에 살게 된 것은 대개 8대조 때부터였다. 증조(曾祖)의 휘는 계함(繼咸)으로 승지에 추증되었고, 조(祖)의 휘는 은성(銀成)으로 참판에 추증되었고, 고(考)의 휘는 여관(汝寬)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이분들은 모두 대를 이어 행의(行誼)가 있어 고을에서 소문이 났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합천 이씨(陜川李氏)로, 학생 이공가(李公軻)의 따님이다. 이분들은 공의 선대(先代)로,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해서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었다. 8세 때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환하게 깨쳐 막히는 곳이 없었다.
이에 드디어 다른 책을 읽었는데, 능히 옛 성현들을 본받을 것으로 뜻을 세우고는 종선여등시(從善如登詩)를 지었다. 그 뒤 서애 선생에게 종학(從學)하여 도학(道學)의 요체를 듣고부터는 더욱더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20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으며, 4년 뒤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갔다가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봉교(奉敎)로 승진하였고 다시 옥당(玉堂)의 남상(南床)에 들어갔다가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드러났는데, 조정에 등용됨에 미쳐서는 비록 한두 명의 극선(極選)에 선발된 자라고 하더라도 공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다. 상이 이조에 명하여 남상의 결원을 보충하게 하였는데, 당시에 남상록(南床錄)에는 겨우 두 사람만 있었으므로 이조에서 주의(注擬)를 하여 아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상이 특별히 명해 두 사람만 의망하게 하고는 공을 정자(正字)에 보임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상이 공이 경학(經學)에 밝다는 것을 알고 속히 경악(經幄)에 있게 하고자 해서 그런 것이었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는데, 상주(尙州)가 왜적들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었다. 이에 공은 창의(倡義)하여 병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칠 계획을 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왜적들의 공격을 받아 화살에 맞아 쓰러졌으며, 모부인(母夫人)과 동생인 흥세(興世) 역시 이때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드디어 양호(兩湖) 지방으로 달려가 군사와 군량을 끌어모아 복수할 계획을 하였는데, 도중에 두역(痘疫)에 걸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상제(喪制)를 마치고는 정언(正言)과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당시에 남쪽에 있는 왜적들이 아직도 평정되지 않고 있었는데, 공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큰 난리를 만나 참으로 큰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학문을 부지런히 닦아서 치도(治道)를 밝혀야 합니다.” 하였다.
당시에 상이 《주역》을 강독하고 있었는데, 공은 또 아뢰기를, “《주역》이 참으로 성학(聖學)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그 뜻이 깊어서 쉽사리 알기가 어렵습니다. 《춘추(春秋)》는 복수하는 대의를 밝힌 책이니, 지금과 같은 때에 강론하기에 마땅한 책입니다.
전하께서는 서둘러 이 책을 강론하소서.” 하였다. 또 《주역》에 나오는 정자(程子)의 전(傳)과 주자(朱子)의 본의(本意)의 차이점 및 음양(陰陽)과 길흉(吉凶)이 소장(消長)하는 이치에 대해 답하여 성상의 지혜를 크게 열어 주자, 성상이 칭탄하여 마지않으면서 뛰어난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 봄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는데, 상이 공이 《주역》에 밝다는 이유로 특별히 교리(校理)로 옮겨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어느 날 강연(講筵)이 파하고 난 뒤에 상이 설시법(揲蓍法)에 대해 묻자, 공이 내시(內侍)에게 나뭇가지를 꺾어 오게 한 다음, 나뭇가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는데, 마치 경험이 많은 서사(筮史)가 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그 이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자, 성상이 몹시 기뻐하면서 특별히 내구마(內廏馬)와 마장(馬粧)을 하사하였다. 그 뒤 이조 정랑으로 옮겨졌다. 정유년(1597, 선조 30) 봄에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공을 자벽(自辟)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이에 공이 상소를 올려 전조(銓曹)의 직임을 체차해 주어 복수하는 일에만 전력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다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한산도(閑山島)에서 군사가 패하고 남원(南原)이 함락되어 왜적들의 형세가 치성하였으므로 왜적들이 모든 군사를 합쳐서 북상(北上)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아 온 나라 사람들이 허둥대었다.
이에 공은 도성(都城)을 사수하여 중외(中外)의 인심을 견고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얼마 뒤에 분의군(奮義軍)의 장수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제수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특명으로 영남 순찰사(嶺南巡察使)에 제수되었는데, 영남 지방의 군사들을 해산하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어 백성들은 죽거나 흩어졌으며, 중국의 군사들이 호남과 영남 지방에 줄지어 주둔해 있어 열성(列城)들이 소요하는 탓에 상봉(相奉)마저도 제대로 지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공은 상처 입은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는데, 모든 것을 조처함에 기의(機宜)에 맞게 하였으므로 주현(州縣)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그때 마침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조정에서 쫓겨났는데, 간사한 자들이 공이 그대로 조정에 남아 있는 것을 껄끄럽게 여겨 한꺼번에 쫓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공은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외직으로 나가 대구 부사(大邱府使)에 제수되었다.
무신년(1608, 선조41)에 선묘(宣廟)가 승하하였다. 광해(光海)가 즉위해 구언(求言)하자, 공은 상소를 올려 사사로운 정에 빠진 잘못에 대해 극언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상소를 불태워 버린 다음, 감옥에 가두고 국문하려고 하였는데, 정승으로 있던 이항복(李恒福)이 힘써 쟁론한 덕에 단지 삭직(削職)만 되고 말았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연경(燕京)에 갔다. 근래에 들어서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현반령(玄盤領) 차림으로 황제를 알현하였다. 이에 공은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여 조복(朝服)을 입고 반열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또 병부(兵部)에 정문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 염초(焰硝)를 사다가 오랑캐들에게 되팔아 먹을 것이라고 하는 데 대해 통렬하게 따져 밝혔으며, 염초를 전에 비해 배를 더 무역하는 것으로 허락받아 전에 명 받았던 것에 준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자 광해가 기뻐하여 가자(加資)하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에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정인홍(鄭仁弘)이 공을 미워하여 자신의 당파 사람들을 사주해 공을 탄핵하게 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 4) 봄에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공은 이때 무함(誣陷)에 걸려 옥에 갇혔다가 얼마 뒤에 석방되었다.
을묘년(1615, 광해군 7) 가을에 심경(沈憬)이 거짓으로 무함한 데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광해는 이미 공을 연좌(連坐)할 점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머뭇거리며 판결을 늦춘 채 사사로이 속전(贖錢)을 바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문인(門人)들이 걱정스러워 산의생(散宜生)의 고사(古事)를 끌어대면서 공을 석방시킬 수 있는 방법이면 모든 방법을 다 쓰고자 하니, 공이 강력하게 저지시키면서 말하기를,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덕으로써 하는 법이다. 만약 억지로 나로 하여금 불의에 처하게 하여 죄를 짓게 한다면, 제군들과는 인연을 끊겠다.” 하였다.
또 재신(宰臣) 가운데 어떤 사람이 공이 오랫동안 갇혀 있는 것을 걱정하여 말하기를, “옥에 갇혀 있다가 병이 들면 풀려나기도 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병들었다고 핑계 대지 않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몸에 병이 없는데 어찌 감히 병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그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8) 겨울에 삭탈관작되고서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때부터 6년 동안 시골에 있는 집에서 숨어 지냈다. 계해년(1623, 인조 1) 3월에 헌문대왕(憲文大王)께서 종사(宗社)를 맑게 하고 가장 먼저 공을 뽑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하고는 징소(徵召)하였으며, 공이 서울에 이르자 즉시 면대하였다.
당시의 의논이 거의(擧義)한 사람들을 위하여 과거 시험을 베풀려고 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거의한 사람들에게 사사로움을 베푸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라 주었다. 또 ‘정사를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처음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의당 먼저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마침 오랜 가뭄이 들자 차자를 올려 성상의 마음이 태만해지는 조짐 및 폐단의 싹을 자르는 일에 대해 말하였는데, 돌아보거나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자 성상이 손수 비답(批答)을 내리고는 공경스레 받아들였다. 경연에 참가하는 여러 신하들이 “정경세는 글을 읽고 덕을 기른 지가 오래되었으니, 자주 경연에서 모시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하니, 상이 하루 건너 경연에 들어와 참여하라고 하였다.
공은 임금의 덕을 성취시켜 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말할 만한 것이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상이 의심스러워하고 어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때마다 은미한 뜻을 드러내고 여러 단서들을 참고하여 반복해서 논변해 주었다. 그런데 사기(辭氣)가 넓고도 너그러웠으므로 상은 몹시 주의 깊게 들으면서 받아들였다. 또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와 의론이 서로 맞지 않아 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광해가 올린 선조(宣祖)의 휘호(徽號)를 삭제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으므로, 공은 ‘조(祖)’ 자까지 아울러 삭제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광해 때 음흉한 신하가 임금의 뜻에 아부하기 위하여 드디어 ‘조’라고 칭하였으므로 공이 이때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인데, 의론이 끝내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성상이 장차 사묘(私廟)에 친제(親祭)하려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명해 축사(祝辭)에 쓰는 호칭에 대해 논의하게 하였는데, 여러 의논이 들쭉날쭉하여 한곳으로 귀결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친손(親孫)으로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이미 선묘(宣廟)를 고위(考位)로 삼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친을 고위로 삼는다 해도 고위가 두 분이 되는 혐의가 없습니다. 그러니 고(考)라고 칭하되 현(顯) 자를 붙이지 말고, 자(子)라고 칭하되 효(孝) 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 당시에 수상으로 있던 이원익(李元翼) 및 여러 대신들이 모두 공의 이 말을 옳게 여겼으므로, 조정의 의론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가을에 공은 차자를 올려 여덟 조목에 대해 논하였는데, 세 번째 조항인 종통(宗統)을 중하게 하라는 데에서는 고금(古今)의 전례를 증거로 삼아 논하였으며, 또 “이제 칭호가 이미 바르게 되었으나, 이 뒷날에 임금의 은혜를 바라는 신하가 이를 무너뜨리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이에 감히 미리 밝으신 주상을 위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성상이 장차 《대학(大學)》을 강론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공이 말미를 받아 시골로 내려가 있었다. 그러자 경연의 신하가 말하기를, “정경세가 있어야지만 이 책을 제대로 강론할 수가 있으니, 우선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그 말에 따랐다.
갑자년(1624, 인조 2)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이 남쪽으로 행행(幸行)하였는데, 공에게 명해 영남 지방을 검찰(檢察)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역적이 평정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여 체차되고서 남쪽으로 돌아갔다.
그 뒤 도승지에 제수하고 소명을 내려 부름에 따라 서울로 왔다. 상이 인견하여 위로의 말을 하자, 공은 사례하고서 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승정원이 내지(內旨)를 봉환(封還)하는 것은 옛날의 도입니다. 성상의 분부에 혹 불가한 것이 있다면 신이 어찌 감히 봉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상은 공이 강설하는 데 법도가 있다고 하여 특별히 불러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경세가 《논어(論語)》를 강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강론하였다.” 하고는,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 3)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직하였다. 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면서 공에게 명하여 도식(圖式)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관례가 끝난 뒤 한 품계를 승진하였다. 그 뒤 참찬(參贊)과 형조 판서를 거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 4) 봄에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당하여 상이 삼년복(三年服)을 입고자 하면서 상제(喪制)를 국장(國葬)의 의식에 준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은 여러 학생(學生)들과 함께 복합(伏閤)하여 30여 차례나 아뢰었다. 그때 올린 상소는 모두 공의 손에 의해서 기초되었는데, 예경(禮經)의 대훈(大訓)과 선유(先儒)의 논변(論辨)에 의거하여 굳게 쟁론하였다.
그러자 상이 강복(降服)하여 부장기(不杖期)의 복을 입었으며, 나머지는 처음에 명한 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공은 올린 말이 쓰여지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피하여 체차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병들었다고 고하자, 상이 의관(醫官)을 파견하여 병세를 살펴보게 하였으며, 세자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병세를 물었다.
정묘년(1627, 인조 5)에 오랑캐가 대거 변경을 침입하여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다. 공에게 명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영남으로 가게 하였다. 공은 이에 군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발하여 날짜에 맞추어 난리에 달려가려고 하였는데, 오랑캐들이 물러갔으므로 군병을 파하고 강도로 달려가 어가를 호위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차자를 올려서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밤낮없이 분발하고 가다듬으면서 혹시라도 조금 편안한 것을 믿어 원대한 계획을 잊지 마소서. 머지않아 오랑캐들이 다시 나올 경우에는 비록 요행히 망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굴욕스러움은 반드시 오늘날보다 열 배는 될 것입니다.” 하고, 또 군사들을 조련하는 계책에 대해서 진달하였는데, 무릇 수천 마디나 될 정도로 길었다.
무진년(1628, 인조 6) 여름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다. 가을에 차자를 올려 변방의 일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랑캐들이 반드시 맹약을 어길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먼저 황조(皇朝)에 주문(奏文)을 올려서 산해(山海) 등처의 군문(軍門)에 명해 오랑캐들이 동쪽으로 쳐들어오는지를 엿보았다가 곧장 오랑캐들의 소굴을 치게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하면 중국 측에 반드시 크게 유리할 것이며, 오랑캐 역시 형세가 막혀서 반드시 우리나라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라 주지 못하였다. 당시에 상이 《서경(書經)》을 강하였는데, 공에게 명해 혼천의도(渾天儀圖)를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 7)에 병을 핑계로 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이 보도(輔導)해 준 덕에 때때로 징분질욕(懲忿窒欲)하였다. 논사(論思)의 장관은 경이 아니면 안 된다.” 하였다. 여름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치사(致仕)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9월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어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공은 ‘현재 맡고 있는 자리는 모두 나라의 중임(重任)인데, 나는 늙어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여겨 굳게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어 조정에 나아가 일을 보면서 인재를 선발하고 관원을 제수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였다.
지공거(知貢擧)를 맡아서는 모두 공명하게 선발하였으며, 제생(諸生)들에게 유시하여 시문(詩文)을 지음에 있어서 논리적인 것을 중요시하게 하고 험상궂고 기괴한 말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과거 시험의 글이 자못 변했다. 경오년(1630, 인조 8) 11월에 목릉(穆陵)을 천장(遷葬)하였는데, 공에게 명하여 지문(誌文)을 고쳐 짓게 하였다. 얼마 뒤에 말미를 달라고 청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중도에서 상소를 올려 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 봄에 문형(文衡)의 직임을 해임시켜 달라고 요청하니, 또 허락하고는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4월에 상이 장차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려고 하자, 공은 “내가 감히 임금의 잘못을 고칠 수가 없다고 여겨서 다시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는, 드디어 상소를 올려 쟁론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공이 처음 칭호 문제에 대해 의논할 때에는 상이 공의 의논을 따라 주었으며, 그 뒤 상제(喪制)에 대해 의논할 때에는 비록 공의 말을 다 따라 주지는 않았으나, 역시 삼년상(三年喪)을 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추숭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함에 미쳐서는 상이 다시는 공의 말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예(禮)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은 모두 공보다 더 뛰어난 자가 없다고 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 공의 나이가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본직과 겸직을 해임시켜 달라고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상은 공이 어두운 임금과 밝은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을 지내면서 중외(中外)에서 전후로 맡았던 직임들이다. 공은 나라에 잘못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곧음을 지켜 논의하거나 아뢰었는데, 그것들이 혹 쓰이기도 하고 혹 쓰이지 않기도 하였으나, 대개 모두가 성정(誠正)의 학문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은 듣고 보기 전에 미리 알아채고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내다본 것이 마치 숫자를 헤아리는 것처럼 정확하여, 어느 한마디 말도 실제로 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공이야말로 진유(眞儒)로서 강령(綱領)과 조례(條例)에 밝았던 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때 올린 여러 상소들은 모두 문집 속에 실려 있다.
공은 풍채와 용모가 뛰어나고도 우뚝하였고 지조와 행실이 잘 닦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뜻을 거스르는 바가 없었고, 장례를 치름에 있어서는 모두 상을 치르는 예법대로 하였다. 왜적들과 한하늘을 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통분스럽게 여겨 왜놈들의 물품은 모두 물리치면서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숙부가 늙어 쇠약해지자 마치 친부모를 섬기듯이 봉양하였고, 여동생의 집이 가난하자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었다. 또한 단정하게 스스로의 몸가짐을 지켜서 상대방으로 인해 기울어지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이상은 공이 천성적으로 타고나서 법도에 부합되게 행하였던 행실들이다.
공은 이미 뛰어난 바탕을 타고난 데다가 가장 먼저 정학(正學)을 하는 데 뜻을 경주하여 다른 잡스러운 일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는 것으로써 고상함을 삼지 않았다. 또한 특히 예(禮)에 대해 뛰어나 어느 하루도 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양하고 받으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오직 도(道)에 따라서 하여 당세(當世)의 누습(陋習)에 의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에 충양(充養)함이 이미 두터워서 정성스럽고 공경스러운 뜻이 형체와 외모에 나타났으므로,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도가 있는 군자임을 잘 알 수가 있었다.
공은 일찍이 우복산(愚伏山) 속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우복(愚伏)이라고 자호(自號)하였으며, 날마다 배우는 자들과 더불어 강독하였다. 또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도산(陶山) 이황(李滉) 등 다섯 선생들이 전후로 영남 지방 수백 리 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상주가 또 영남의 위쪽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라고 하여, 드디어 낙동강 가에 서원(書院)을 세우고는 도남서원(道南書院)이라 불렀다. 그러고는 이 다섯 분의 선생을 나란히 향사(享祀)하여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도맥(道脈)이 이곳에 있음을 알게 하였다.
공은 광해조(光海朝) 때 여러 차례 환란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공은 방 안에서 책 읽기를 중단하지 않으면서 엉뚱한 화에 걸려들었다고 하여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도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서 혹시라도 나태한 기색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공은 사리에 통달하고 밝았으며 어질고 따사로웠는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억지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고, 또한 구차스럽게 기뻐하는 얼굴빛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대하지도 않았다. 공은 선비들 가운데 혹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선유(先儒)를 비방하여 헐뜯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꾸짖으면서, “막 새로 학문을 배우는 자로서는 선사(先師)들의 설을 독실히 믿는 것이 마땅하다.
궁벽진 곳을 파고들어 이설(異說)을 늘어놓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항상 자제들에게 가르치기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지극한 곳에 이르기를 구하여야 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아는 바가 없는 듯이 해야만 이에 능히 알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고, 능한 바가 없는 듯이 해야만 이에 능히 능하지 못한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하였다. 이상은 공이 종시토록 체득하고 훈계한 것들이다.
공은 글을 지음에 있어서 절대로 부화한 말을 쓰지 않아 말이 실정에 지나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면서 풍성하고 요약되게 하기를 오로지 알맞게 해 사리가 통하고 가리키는 바가 분명하게 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을 충분히 감동시킬 만한 점이 있었다.
또한 시(詩)를 짓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나면 흥을 붙여 읊었는데, 체재(體裁)가 올바르고 음운(音韻)이 잘 맞았으며, 옛사람들이 지은 것에 대해서는 눈으로 상상하고 뜻으로 이해하여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다. 공이 신공(身功)을 닦고 예능(藝能)을 닦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일찍이 경연에서 상을 모시고 있을 때 상이 현사(賢士)가 누구인가를 묻자 공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유진(柳袗)을 추천하여 모두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가은(佳隱) 심대부(沈大孚)가 어려서 공에게 종유(從遊)하였는데, 공이 그릇감으로 여겨 《주례(周禮)》 한 부를 주면서 말하기를, “자네에게는 이 세상을 떠맡을 책임이 있으니, 이 경전을 열심히 노력해서 익혀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심공은 마침내 문학(文學)과 절행(節行)으로 이름이 났다.
공은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릴 적에 반드시 널리 교육을 베풀었으며, 향리(鄕里)에 처해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이끌어 주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사방의 학자들이 모두 공의 문하로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공이 어질고 덕이 있는 이를 천거해 이끌어 주고 후학들을 장려하여 진보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정승 이원익(李元翼)과 이항복(李恒福)은 일찍이 공과 경연에서 함께 시강(侍講)하고 있다가 나와서는 “정경세는 참으로 시강의 인재로다. 고금에 그와 같은 사람은 드물다.” 하였다. 그리고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우복은 아는 것이 아주 정미롭고 보는 곳이 아주 높아서 아무리 도산(陶山)이라고 하더라도 혹 우복에게 양보해야만 할 부분이 있다.” 하였다. 한 시대의 제현(諸賢)들이 공을 높이면서 윗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계유년(1633, 인조 11) 6월 정축일에 졸하였는데, 졸하기 직전에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장사를 치름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라.” 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은 몹시 슬퍼하며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하사하였으며, 특별히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그리고 세자가 장차 거애(擧哀)하려고 하니, 예관이 빈객(賓客)의 상에 거애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자 상은 공이 세자를 가르치고 일깨운 공이 많다는 이유로 거애하도록 명하였다. 8월 갑신일에 함창현(咸昌縣)에 있는 검호(檢湖)의 가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때 세자가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장례를 보살피게 하고는 이르기를, “정 빈객(鄭賓客)은 평소에 예를 좋아하였으니, 궁관은 가서 실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일에 원근의 선비들이 와서 회장(會葬)한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상은 공이 졸하고 장사 지낸 날짜인데, 종시토록 예로써 함이 이와 같았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다. 전 부인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부장(部將) 이해(李海)의 따님인데, 이분과의 사이에는 후사(後嗣)가 없다. 후 부인인 진보 이씨(眞寶李氏)는 충순위(忠順衛) 이결(李潔)의 따님으로, 예행이 있었는데, 공보다 2년 뒤에 졸하여 공과 같은 무덤에 묻혔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심(杺)으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지냈는데, 재주와 학식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고 말았다. 차남은 학(㰒)으로 요절하여 후사가 없다. 큰딸은 생원(生員) 노석명(盧碩命)에게 시집갔고, 작은딸은 판서(判書) 송준길(宋浚吉)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側室)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력(櫟)으로 만호(萬戶)를 지냈다.
검열 심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응(道應)으로, 학행이 있어 천거되어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가 되었고, 사위는 봉사(奉事) 조한수(趙漢叟)이다. 생원 노석명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노사영(盧思永)이고, 사위는 전익구(全翼耈)와 이송래(李松來)이다.
판서 송준길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송광식(宋光栻)으로 정랑(正郞)이고, 사위는 나명좌(羅明佐)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다. 력(櫟)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도징(道徵)이다. 시강원 자의 도응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석교(錫僑)로 현감이고, 차남은 석현(錫玄)이며, 사위는 참봉 이원지(李元祉), 이윤해(李允諧), 학생 황종대(黃鍾大), 신강제(申康濟)이다.
또 측실에서 난 아들인 석윤(錫閏)이 있다. 봉사 조한수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요절하였고, 차남 조원명(趙遠明)은 군수(郡守)이다. 노사영은 딸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김언필(金彦弼)과 정자(正字) 신역(申湙)이다. 전익구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전오휘(全五徽)이고 차남은 전오채(全五彩)이며, 사위는 이하룡(李河龍), 김학(金㶅), 김완(金浣)이다.
이송래는 5남을 두었는데, 이기휘(李基輝), 이기안(李基安), 이기무(李基茂), 이기보(李基輔)이다. 송광식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송병문(宋炳文)은 현감이고, 차남 송병하(宋炳夏)는 목사이고, 삼남 송병원(宋炳遠)은 찰방이고, 사남 송병익(宋炳翼)은 현감이며, 사위 원몽익(元夢翼)은 판관이다.
부원군 민유중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민진후(閔鎭厚)와 차남 민진원(閔鎭遠)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큰딸은 이만창(李晩昌)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지금의 중궁전(中宮殿)이며, 셋째 딸은 신석화(申錫華)에게 시집갔다. 석교는 2남 5녀를 두었다. 도징은 6남 1녀를 두었다. 이상은 공의 아들 딸 및 내외의 손과 증손들이다.
통괄해서 말한다면, 공은 처음에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서애는 또 도산(陶山) 이 선생(李先生)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도산은 또 주자(朱子)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도산은 일찍이 주자의 편지글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을 뽑아 엮은 다음 책 이름을 《주서절요(朱書節要)》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자가 사자서(四子書)를 한곳으로 모으고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한 뜻이었다.
그런데 공이 또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에서 소(疏), 서(序), 비문(碑文), 기(記) 등의 글을 뽑아 10책으로 만들고는 《주문작해(朱文酌海)》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책은 《주서절요》와 맥락이 이어져 서로 표리(表裏)를 이룬다. 그러니 이 책은 바로 도산의 뜻을 이은 것으로, 본말(本末)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그 자신의 몸을 윤택하게 하고서 발하여 언행(言行)으로 된 것이다. 그런즉 여기에서 공의 학문의 연원(淵源)이 나아온 바를 잘 알 수가 있다.
공은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조정에서 공경과 예우를 더욱 지극하게 받았다. 사람들이 ‘공은 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서 근시(近侍)의 반열에 있었고 바른 의론을 올렸으니 재주를 숨긴 채 숨어 지냈다고 할 수는 없는바, 저술을 한 것은 역시 괜스레 한 것이다.’라고 평하나 이 어찌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공이 졸한 뒤 3년이 지나서 영남의 여러 유생들이 공을 도남서원(道南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공의 저술로는 10권의 문집(文集)과 몇 권의 《사문록(思問錄)》이 있다. 대제학(大提學) 권유(權愈)는 찬한다. <끝>
우복집 별집 제9권 / 부록(附錄)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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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行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愚伏鄭先生墓表。- 권유(權愈)
愚伏鄭先生卒而葬今六十二年。故大學士趙公絅旣序銘于神道。永嘉權愈又約最家國所記載。謹表諸墓曰。公諱經世。字景任。晉州人。其先家于尙。蓋八世。曾祖諱繼咸。贈承旨。祖諱銀成。贈參判。考諱汝寬。贈左贊成。行誼相承。聞於州里。妣贈貞敬夫人陜川李氏。學生公軻之女。此公祖世其貤贈。以公貴也。公生而有秀質。八歲受小學。未竟帙。通悟無留礙。遂進餘書。能立趣而上志。作從善如登詩。從西厓柳先生聞道學之要。益自厲。二十。選進士。後四年。擢乙科。選槐院薦爲檢閱。陞奉敎。錄玉堂南床。選湖堂。公少以文學著。及登朝。凡所一二雖差極選。莫先公者。上命吏曹補南床缺。時南床錄厪二人。曹不能擬奏。上特令擬二人。拜公正字。蓋上知公通經學。欲亟處之經幄也。庚寅。丁外艱。壬辰倭難起。尙爲賊所道。公倡募兵。謀拒擊賊。賊觸公不意。公中兵仆。母夫人及弟興世遇害。遂走兩湖。募兵食爲復讎計。道病痘。不克擧其意。制除。拜正言,修撰。陞校理。時南寇猶未平。公入對言。殿下遇大難。誠欲大有爲。宜勤學明治道。上方講易。公又言易誠聖學之源。義深卒難解。春秋明復讎大義。若時所宜講。臣爲殿下急之。又對傳義同異。陰陽吉凶消長之理。多所甄開。上稱歎相屬曰士之甚。丙申春。拜吏曹佐郞。上以公明易。特命移校理。一日講罷。上問揲蓍法。公令內侍折枝來。分指掛揲。若筮史宿習者。因究言其理。上悅。特賜內廏馬馬粧。遷吏曹正郞。丁酉春。柳文忠公爲體察使。辟公從事。公上疏乞遞銓曹。專力復讎。不許。拜舍人。時閑山軍敗。南原陷。賊勢熾。聲幷兵而北。國中䳱。公請守都城以持中外心。拜奮義將。尋拜司諫。陞同副承旨。戊戌。特拜嶺南巡察使。嶺南兵不解累年。民死散。皇朝兵列屯湖嶺。列城騷擾。相奉猶不能給。公撫瘡痍供軍食。凡注錯中機宜。州縣蒙其濟。會柳文忠公黜去。群姦病公欲幷斥。公辭遞。丁未。出守大丘。戊申。宣廟薨。光海立。求言。公上疏極言私溺之失。光海大怒。焚其疏欲繫鞠。李相恒福力爭。遂削職。己酉。奉使如燕。近事我使用玄盤領朝見。公呈文禮部。請朝服入班。又呈文兵部。痛辨我人賣焰焇與虜事得白。仍許買焰焇視前倍之。不適準所見命者而已。光海悅。加資。辭不許。冬。出牧羅州。尋拜湖南觀察使。鄭仁弘疾公。風其黨劾之。壬子金直哉獄。公被誣繫。俄釋之。乙卯秋。爲沈憬所誣引下理。光海旣知公無所坐。而留不決。待所爲私焉者。門人憂迫。攬散宜生古事。惟可以釋公者。將無不趨也。公固止之曰。君子愛人以德。若強我處不義而盤罪者。請與諸君絶。宰臣有憂公久繫者曰。囚病且少挺。盍屬病。公曰。不病敢言病乎。不聽。聞者敬服。丙辰冬。削職解舍。自是凡六年屛居家。癸亥。憲文大王旣淸宮。而首拜公副學。召至京卽賜對。時議欲爲擧義人設科。公曰。是私擧義人。不可。上從之。又言革新維初。宜先罷內需司。會久旱。上箚言上心怠忽之漸。及條弊萌。無所顧避。上手批敬納之。諸筵臣言鄭某讀書養德久。宜頻侍經筵。上命間日參筵。公以成就君德爲己任。有可言無不言。上所疑難。輒發微旨參衆端。反覆端辨。辭氣弘裕。上甚鄕納之。與李延平貴議不中。乞解不許。拜藝文提學。時朝廷議刊光海所上宣廟徽號。公請幷去祖字。蓋光海時陰臣求準上意。遂稱祖。故公欲以時正之。議終不行。上將親祭私廟。命群臣議稱謂。諸議輕重。多不得所。公曰。上以孫承大統。旣不考宣廟。則無二考之嫌。宜稱考而去顯字。稱子而去孝字。李相元翼及諸大臣皆是公言。議遂定。秋。公上箚論八條。其三重宗統。證論古今。且曰。今稱謂旣正。安知後不爲希恩之臣所壞誤邪。敢預爲明主言。上將講大學。會公乞暇去。筵臣言鄭某在。乃可講此書。盍姑俟其歸。上從之。甲子逆适反。上南幸。命公檢察嶺南。未幾賊平還朝。拜大憲。辭遞南歸。拜都承趣召。至。上引見慰諭。公謝。仍進曰。封還內旨。古道也。上敎或不可者。臣敢不封還。上以公講說有法數。特召論經義而已。上曰。某講魯論盡心。特命加資。乙丑。兼右副賓客。世子行冠禮。命公作圖。禮成。進一階。歷參贊刑判。復拜大憲。丙寅春。仁獻王后之喪。上欲行三年制。命喪制視國葬儀。公與諸學生伏閤。凡三十餘啓。皆公手所定草。據禮經大訓先儒論辨固爭之。上降從杖期。他如始命。公以言不用避。遞爲同樞。冬移副學告病。上遣醫占病。世子亦遣宮官問疾。丁卯。虜大入邊。上幸江都。命公與旅軒張公之嶺南。召募士調兵饟。剋日赴難。賊退罷兵。赴江都扈駕還。上箚曰。願上日夜奮厲。無或倚小安而忘遠圖。不邇而虜復來者。雖幸而不亡。其屈辱必倍今十之。又陳鍊兵之策。凡數千言。戊辰夏。加正憲。秋。箚論邊事。其大略虜必渝盟。宜先具奏皇朝。請命山海等軍門。伺虜東出。直擣巢穴。如此。中國必大利。虜亦形格。必不能侵軼我也。上不能從。時上講書經。命公製進渾天儀。己巳。引疾乞解。上曰。予賴卿輔導。時或懲窒。論思之長。非卿不可。夏拜禮判。乞致仕。不許。九月。拜吏判兼兩館大提學。公曰。所叨皆國重任。吾年力無能爲也。固辭不許。乃出承事。論除謹。知貢擧。盡公明。諭諸生詩文要理長。無得用險怪語。於是時文頗變。十一月。遷移穆陵。命公改撰誌文。尋乞暇。去道上疏乞解。許之。辛未春。乞解文衡。又許之。拜大憲。四月。上將追崇章陵。公曰。吾敢曰不可證移。而不復言乎。遂上疏爭之。不報。公始議稱謂。上從公議。後議喪制。雖不盡從公言。亦不行三年。及論追崇。上不復省公言。然言禮者莫不長於公。壬申。公年七十。乞致仕。不許。乞解本兼。許之。此公之歷世昏明中外所踐更也。國有中失之事。輒守宜論奏。或用或不用。而蓋皆出於誠正之學。其卽乎耳目之前。視於未事之後者。若數一二。無一言不應實。公實眞儒明統類者已。諸疏在文集中。公風容俊偉。志行修。事親無所違。居喪盡喪禮。痛倭之共一天。凡倭中物。輒斥不忍視。叔父篤老。奉養若事父。女弟貧羸。撫視極其生。端然自守。不爲物傾側。此公所性得之而雅似者也。公旣質有其內而首嚮正學。不淫於他雜業。不以分異於人爲高。尤甚於禮。無日不在是。辭受進退。惟道之從。不或奪於當世之操。充養旣厚。誠敬形於體貌。望之知爲有道君子。嘗居愚伏山中。自號愚伏。日與學者講讀。又嘗謂圃隱,寒暄,一蠹,晦齋,陶山五先生。前後生於嶺南數百里之內。尙又嶺之上流一都會也。遂建書院於洛濱。號道南。幷享五先生。使學者知道脈之在此云。光海時屢患公於居室。而誦讀不輟。不以橫禍動其心。平居正衣冠端坐。不或有懈色。通明惠和。不以己格物。亦不苟假人以色。士或有折辨詭先儒者。必責之曰。新學當篤信先師。若穿崖穴肆異論。罪也。常誨子弟曰。學者當於致至處求及。又曰。若無所知。乃能無不知。若無所能。乃能無不能。此公之終始所體訓也。公爲文。絶不作浮靡語。要使言不羨乎情。豐約惟所適。而理達指明。有足感起人者。不喜爲詩。然遇境寄興。體裁正而音韻諧。凡古人制造。目想意解。靡所不通。公之修身功藝能如此。嘗侍經筵。上問賢士。公進旅軒張先生及柳公袗。皆得其意。佳隱沈公大孚少從公遊。公器之。與周禮一部曰。子有斯世之責。努力習此經。後沈公以文學節行顯。在州郡。必廣敎諭。處鄕里。好開導人。四方學者繼于門。公之薦引賢德。奬進後學如此。李相元翼,李相恒福嘗與公同侍經筵。出曰。鄭某眞侍講才。古今幾矣。蒼石李公埈曰。愚伏識處極微。見處極高。雖陶山或不能絶也。一時諸賢宗讓公類如此。公以癸酉六月丁丑卒。臨歿謂家人曰。送必以禮。訃聞。上震悼。輟朝弔賻。特贈左贊成。世子欲擧哀。禮官言賓客歿不擧哀。上以公敎誨功多。命擧哀。八月甲申。葬于咸昌檢湖卯坐之原。世子遣宮官致祭視葬曰。鄭賓客平生嗜禮。往無失禮。葬之日。士來會者累百人。此公卒葬年日。而以禮爲終始如此。公凡再娵。前夫人全義李氏。部將海之女。無子。後夫人眞寶李氏。忠順衛潔之女。有禮行。後公二年卒。葬與公同原。有二男二女。長杺。檢閱。有才學。早卒。次㰒。夭無後。女適生員盧碩命,判書宋浚吉。側室子櫟。萬戶。檢閱有一男一女。男道應。學行擧爲諮議。壻奉事趙漢叟。生員有一男二女。男思永。壻全翼耇,李松來。判書有一男二
女。男光栻。正郞。壻羅明佐,驪陽府院君閔維重。櫟有一男道徵。諮議有二男四女。長錫僑。縣監。次錫玄。壻參奉李元祉,李允諧,學生黃鍾大,申康濟。側室子錫閏。奉事有二男。長夭。次遠明。郡守。思永有二女。壻金彥弼,正字申㴒。翼耇有二男三女。男五徽,五彩。壻李河龍,金澩,金浣。松來有五男。基輝,基安,基茂,基輔。光栻有四男一女。男炳文。縣監。炳夏。牧使。炳遠。察訪。炳翼。縣監。壻元夢翼。判官。府院君有二男三女。男鎭厚,鎭遠。皆文科。女長適李晩昌。次今中宮殿下。次申錫華。錫僑有二男五女。道徵有六男一女。此公子姓內外孫曾也。統之公始問學于西厓柳先生。西厓學于陶山李先生。陶山承述朱子。嘗節掇朱書。名節要。實朱子掇四子書。纂近思錄之意也。公又選朱集中疏序碑記爲十冊。名酌海。合絡節要爲表裏。以足陶山之意。該本末以澤乎其身。而發爲言行。此可以見公之學淵源所漸。宣仁之朝。見敬禮蓋至。人以公王者之人而居近列通正議。不可謂藏。治言亦徒有以焉爾。豈未値其誠也。抑節然也。公歿三年。嶺南諸儒配享公于道南書院。遺文集十卷。思問錄若干卷。大提學權愈。撰。<끝>
愚伏先生別集卷之九 / 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