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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5. 8. 2. 10:53
世宗 72卷, 18年(1436 丙辰 / 명 정통(正統) 1年) 5月 12日(丁丑) 6번째 기사
■ 성균 생원 김일자 등이 이제현. 이색. 권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다.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일자(金日孜)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옛 성인(聖人)을 계승하고 후학(後學)을 열어 주는 것은 성현(聖賢)의 대공(大功)이요, 조종(祖宗)을 도타이 하고 예(禮)로써 행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전(盛典)입니다.
이러므로, 역대 이래로 무릇 도학(道學)에 공이 있는 분을 거의 학궁(學宮)에 모시어 제향 하는 소이는 돌아가신 이에게 포숭(褒崇)의 뜻을 보이는 것이며, 앞으로 오는 뒷사람에게 권려 하는 뜻을 드리우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자(孔子)께서는 하늘이 낳으신 성인으로써 경위(經緯/註1)의 글[文]은 요(堯)· 순(舜)의 도를 본받아 서술하여 밝히고,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도를 본받아 명백히 하사, 육경(六經/註2)을 편찬 제술(刪述)하여 만대에 훈계를 드리우셨으니, 사도(斯道=유교의 도덕)가 장차 실추(失墜)되는 것을 붙들어 주고, 해와 달이 중천(中天)에 밝게 있듯이 세워 주신 것이 오라,
한(漢)· 당(唐)의 왕성한 때에는 우리의 부자(夫子/註3)를 남면(南面)하게 하여 석전제(釋奠祭)를 올리게 하였고, 여러 제자들을 제후(諸侯)로 봉(封)하여 배향(配享)하는 의례(儀禮)가 있게 하였습니다.
송(宋)· 원(元) 때에 미쳐 와서는 주자(朱子)· 정자(程子) 등의 사현(四賢)과 좌구명(左丘明) 등의 21인을 70 제자(弟子)의 뒷자리에 종사(從祀)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유학을 높이고 도덕을 소중히 여긴 까닭 이오라,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뜻이 성(盛) 한 것이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我大東]는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푼 뒤로부터 세대는 멀어지고 경서는 없어져서, 군자(君子)는 큰 도학의 중요한 것을 얻어 듣지 못하고, 소인(小人)은 잘 다스려지는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사이에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과 같은 이가 밝은 슬기로서 학문을 좋아하매, 문장을 발양(發揚)하여 신라 시대를 울렸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안향(安珦)이 학문을 일으키려는 데에 뜻을 두고 반궁(泮宮/註4)을 증수(增修)하게 하여 일대(一代)의 문풍(文風)을 떨치게 하니, 이 세분께서 세도(世道)를 유지시키고 동방의 백성을 계도(啓導) 해 준 공로는 또한 큰 것입니다.
이러므로, 전조(前朝)의 왕성한 때에는 특별히 포숭(褒崇)하는 법전을 들어 〈위의 세 분을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참예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영원히 전할 불후(不朽)의 큰 모범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세속의 교화가 능이(陵夷)해지고 풍속이 퇴패(頹敗)하여져서, 성인의 도학이 막히어지고 유학[斯文]이 거의 끊어지려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익재(益齋) 문충공 이제현(李齊賢)이 그 사이에 태어나서 훌륭하고 뛰어난 자질과 정대 고명(正大高明)한 학문으로 북쪽으로는 연경(燕京)에 조회하고, 남쪽으로는 오(吳)· 회(會/註5)에 유학하면서 중국의 명유(名儒)인 요공(姚公/註6)· 염공(閻公/註7)· 조자앙(趙子昻/註8) ·원복초(元復初/9) 같은 분과 더불어 토론하고 연구하여, 소견이 더욱 높아지고 지식이 더욱 깊어지게 되매, 도학의 바른 것을 미루어 밝히고, 성명(性命)의 이치를 열어 보이었으니, 글은 문장이 되고 행함은 도덕이 되어, 비로소 고문(古文)의 학(學)을 창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詩)· 서(書)의 혜택이 우리나라[東方]에 양양하게 넘치고, 예(禮)· 악(樂)의 흥성함이 중국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문학(文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중국의 명유(名儒)인 탕병룡(湯炳龍)은 익재(益齋)를 찬(贊)하기를, ‘산천 정기를 타고나서 유학에 달통하며, 충성을 마음에 두고 정사를 공정히 한다. ’고 하였고, 이색(李穡)도 또한 말하기를, ‘몸은 해동(海東)에 있으나, 이름은 세계에 넘치며,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의 조종이다.’ 하였으니, 지나친 칭찬이 아니옵니다.
또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이색은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우게 되매, 학문이 정미하며 해박하고, 도학을 밝게 강론하여 남이 모르는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신축년 홍건적의 난(亂)을 치른 뒤에는 학교가 파괴를 당하여 학문이 해이하였는데, 오직 이색(李穡)만이 성균(成均)을 겸직하면서 경적(經籍)의 깊은 뜻을 토론하고, 정(程) 주(朱/註10)의 뜻을 정미하게 합하여, 학자로 하여금 입으로 외고, 귀로 듣는 당시의 사장(詞章)에만 힘쓰던 습성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에 있는 성명(性命)의 근원을 궁구(窮究)하게 하여, 사도(師道)를 높이고 이단(異端)에 유혹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의리를 바루어서 공리(功利)에 싹트지 않게끔 하였으니,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나고 유풍(儒風)의 학술이 새롭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양현(歐陽玄)은 천하의 유종(儒宗)으로서 이를 찬미하기를, ‘가사(袈娑)와 바릿대[鉢]는 해외(海外)에서 전(傳)하겠다.’ 하였고, 권근(權近)도 또한 말하기를, ‘색(穡) 학문은 살갗[皮膚]을 버리고 골수(骨髓)를 얻은 것이다. ’고 하여, 비록 중국이라 할지라도 이에 견주기를 드물게 여기었으니, 이는 실상이 없는 명예가 아닙니다.
논의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색(穡)이 불도에 혹하였다. ’고도 하나, 신(臣) 등의 생각으로는 말이란 마음의 소리[聲]이요, 시(詩)란 그 뜻을 말하는 것인데, 그의 시를 보게 되면, ‘평생에 석가(釋迦)의 글은 알지 못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불교(佛敎)· 도교(道敎)의 두 길[兩途]은 원래 무심히 지났으나, 공맹[洙泗]의 학에 맴돌면서부터 두 귀밑 털이 희어졌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불도에 혹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예전에 당나라의 한유(韓愈)는 대전(大顚/註11)과 벗하였었고, 주희(朱熹)는 운곡(雲谷/註12)에서 노닐었으며, 최치원(崔致遠)은 해인사(海印寺)에서 은둔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불도에 혹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양촌(陽村) 문충공 권근(權近)은 원기(元氣)의 모임이 혼연(渾然)하게 자연히 이루어져서 정자(程子)· 주자의 학(學)과 자유(子游)· 자하(子夏)의 문(文)으로 오래도록 문형(文衡/註13)을 맡으면서 덕이 이 땅[東土]에서 높았고, 경서(經書)의 심오한 것을 궁구(窮究)하였습니다.
깊이 조화의 근원을 더듬어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지었으니, 전현(前賢)이 아직 발명하지 못한 것을 낸 것이며, 《입학 도설(入學圖說)》을 지어 낸 것은 뒤에 오는 학자에게 무궁함을 열어 주었습니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취하여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힘썼고,《춘추》의 학문이 추락되는 것을 체험하여 사병(私兵)을 폐지하기를 청하여 다스리는 도를 도와주었으며, 황제의 법전을 밝혀 그 공(孔)· 맹(孟)의 도로부터 정(程)· 주(朱)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생민들에게 은택이 스며들게 지극히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댄, 성명(性命)의 이치가 천하에 밝혀진 것은 공자와 맹자의 공이며, 공자와 맹자의 도학이 우리나라에 행하게 된 것은 이제현· 이색· 권근이 세 분의 공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에 보답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지난 기해년(세종 원년, 1419)에는 사간원에서 권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했고, 또 계축년(세종 15, 1433)에는 사성(司成=成均司藝) 신(臣) 김반(金泮)이 또한 위의 세 분을 배향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문신(文臣) 6품 이상으로 하여금 그 가부를 의논케 하여 성상께 계문(啓聞)하게 하였사오매, 신 등은 기쁘게 들으시고 옷깃을 여미시와 윤허하시기를 크게 바란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오늘날 수년이 되도록 아직도 거행되지 못하 와 신 등은 이를 바라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천하에 큰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천하를 통해서 제향 하여야 하겠지만, 어찌 일국에 공이 있다고 하여 문묘에 종사(從祀)하겠는가? 하오나,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오니, 한 집에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한 집안에 제사하고, 한 고을에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한 고을에서 제사하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의리이며, 천하를 통한 예식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주희(朱熹)는 스승인 연평(延平/註14)선생을 그의 집에서 제사지냈고, 조주(潮州) 사람들은 한유(韓愈)를 그 고을에서 제사지냈으며, 전조(前朝)의 왕성한 때에는 최치원· 설총(薛聰)· 안향(安珦) 선생을 학궁(學宮)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천하에 공이 있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문물과 예악이 갖추어지고, 교화(敎化)를 배양한 근본이 모두 이 세 분에게서 나왔다면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준 공이 이보다 더 큼이 없습니다. 그러니, 조종(祖宗)을 두텁게 하고 예로써 행하는 정사가 지금껏 궐했으니, 제사를 지내고 아니 지내는 것이 비록 세 분과 관계됨이 없다 하더라도, 참으로 밝은 시대의 성전(盛典)에 결함이 있는 것이오니, 엎디어 바라옵건대, 뭇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살피시고 강단(剛斷)하신 밝으심을 돌 리시와, 이 세 분으로 하여금 종사하는 반열에 올리게 하여, 최치원 선생 등과 함께 차례를 올리게 된다면, 오직 오도(五道/註15)에 있어서만 크게 다행한 것이 아니라, 또한 만대에 이르도록 〈칭송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23책 72권 12장 A면
[영인본] 3책 675면
[분류]사상-유학(儒學) /사상-불교(佛敎)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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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경위(經緯) : 경서(經書)와 위서(緯書).
☞(註 2) 육경(六經) : 시·서·예·악·역·춘추.
☞(註 3) 부자(夫子) : 공자.
☞(註 4) 반궁(泮宮) : 성균관.
☞(註 5) 오(吳)· 회(會) : 오(吳)와 회계(會稽)의 두 군(郡).
☞(註 6) 요공(姚公) : 원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수(燧).
☞(註 7) 염공(閻公) : 원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복(復).
☞(註 8) 조자앙(趙子昻) :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맹부(孟頫).
☞(註 9) 원복초(元復初) :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명선(明善).
☞(註 10) 정(程)·주(朱) : 정자와 주자.
☞(註 11) 대전(大顚) : 당나라 때의 도승(道僧).
☞(註 12) 운곡(雲谷) : 중국 복건현에 있는 주자의 독서당.
☞(註 13) 문형(文衡) : 대제학.
☞(註 14) 연평(延平) : 송나라 때 유학자.
☞(註 15) 오도(五道) : 유도(儒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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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成均生員金日孜等上言:
竊謂繼往開來, 聖賢之大功; 惇宗將禮, 帝王之盛典。 是故歷代以來, 凡有功於道學者, 率皆祀于學宮, 所以示褒崇於旣往, 垂勸勵於將來也。 昔者夫子以天縱之聖、經緯之文, 祖述堯、舜, 憲章文、武, 刪述六經, 垂訓萬世, 扶斯道之將墜, 揭日月於中天。 故漢、唐盛際, 以吾夫子位南面, 而有釋奠之禮, 以群弟子封列侯, 而有配享之儀。 逮至宋、元, 以朱、程等四賢、左丘明等二十一人, 從祀于七十子之後, 其所以尊儒重道, 崇德報功之意, 盛矣哉! 惟我大東, 自箕子設敎之後, 世遠經殘, 君子而不得聞大道之要, 小人而不得蒙至治之澤者久矣。 幸於其間, 崔致遠、(孽聰)〔薛聰〕, 明睿好學, 發爲文章, 鳴於羅代, 至于高麗, 安珦志在興學, 增修泮宮, 以振一代之文風, 三子之維持世道, 啓迪東民, 功亦大矣。 是以前朝盛時, 特擧褒崇之典, 俾參從祀之列, 誠不刊之懿範也。 自是厥後, 世敎陵夷, 風俗頹敗, 聖道堙鬱, 斯文殆絶。 當是時, 益齋文忠公李齊賢, 挺生其間, 以奇偉拔萃之資、正大高明之學, 北朝燕京, 南遊吳、會, 得與中國名儒若姚公、閻公、趙子昂、元復初輩, 磨礱切磋, 所見益高, 所造益深, 推明道學之正, 開示性命之理, 辭爲文章, 行爲道德, 始以古文之學倡焉, 而詩書之澤, 洋溢東方; 禮樂之興, 侔擬中華, 我國文學之盛, 自此始也。 故湯炳龍, 中國之名儒, 而贊之曰: “光岳其鍾, 爲儒之通。 存心以忠, 臨政以公。” 李穡亦曰: “身居海東, 名溢域中。 道德之首, 文章之宗。” 非溢美也。 牧隱文靖公李穡, 北學中國, 學問精博, 講明道學, 闡發幽秘。 歲在辛丑經兵之後, 學校廢弛, 惟穡職兼成均, 討論經籍之蘊, 妙契程、朱之志, 使學者祛口耳詞章之習, 窮身心性命之源, 宗師道而不惑於異端, 正其義而不怵於功利。 於是東方性理之學大興, 而儒風學術, 煥然一新。 故歐陽玄, 天下之儒宗, 而美之曰: “衣鉢當從海外傳。” 權近亦曰: “穡之學問, 捨皮膚, 而得骨髓者也, 雖中國罕比。” 非虛譽也。 議者以爲: “穡有佞佛。” 然臣等以爲, 言者, 心之聲; 詩者, 言其志。 觀其詩則曰: “平生不識釋伽文。” 又曰: “兩途自是無心去, 洙、泗沿洄鬢已秋。” 是豈侫佛者之言哉! 昔韓愈友于太顚, 朱熹遊于雲谷, 致遠隱于海印, 是果佞佛而然歟? 陽村文忠公權近, 元氣之會, 渾然天成。 以程ㆍ朱之學、游ㆍ夏之文, 久典文衡, 德尊東土, 硏窮聖經之奧, 深探造化之源, 五經有淺見錄, 發前儒之未發; 入學有圖說, 開來學於無窮。 得孟子浩然之氣, 力排異端; 體《春秋》墮費之學, 請罷私兵。 笙鏞治道, 黼黻皇猷。 其所以沿洙、泗、遡濂、洛, 而澤閏生民者至矣。 以此觀之, 性命之理, 明於天下者, 孔、孟之功也。 孔、孟之道, 行於東方者, 三子之功也。 然則報功之典, 不可不擧, 故歲在己亥, 司諫院請以權近從祀廟庭, 又於癸丑, 司成臣金泮, 亦以三子之從祀啓請。 於是命攸司, 令文臣六品以上, 議其可否, 以聞于上。 臣等欣聞引領, 顒望兪音者有年矣。 今玆數年, 尙未擧行, 臣等罔不觖望。 議者以爲: “有天下之大功者, 當享天下之通祀, 豈可以一國之功, 而從祀於文廟乎?” 臣等竊惟有一家之功者, 享一家之祀; 有一鄕之功者, 享一鄕之祀。 此古今之通義, 天下之達禮也。 故朱熹祀延平於其家, 潮人祀韓愈於其鄕。 前朝盛時, 祀致遠、薜聰、安珦於學宮。 是亦果皆有功於天下, 而祀之歟! 我東方文物禮樂之備、培養敎化之本, 皆出於三子, 則繼往開來之功, 莫大於此, 而惇宗將禮之政, 猶闕於今。 祀不祀, 縱無與於三子, 誠有嫌於明時之盛典。 伏望察衆允之心, 回剛斷之明, 俾三子同升從祀之列, 咸秩致遠之輩, 則非惟吾道之大幸, 抑亦有辭于萬世矣。不允。
[태백산사고본] 23책 72권 12장 A면
[영인본] 3책 675면
[분류] 사상-유학(儒學) / 사상-불교(佛敎)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