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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5. 6. 6. 14:36
■ 보재 이상설의 사상
이재권/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논문]
Ⅰ. 시작하는 말
이상설(李相卨)은 이준열사와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세계각국의 외교관들에게 일본의 조선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호소했던 독립운동가의 한 분이다. 이것이 필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을 통해서 배운 이상설에 대한 상식적인 지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상은 잘 모른다. 그가 충북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필자도 이상설에 대하여 여기까지 알고 있었다. 논문을 쓰기위해 공부를 하면서 이상설이 대단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상설에 대한 연구는 인하대학교사학과 명예교수인 제천출신 윤병석의 업적이 전부인 것 같다.
즉 윤병석의 저서인 『이상설전』1)
이 유일한 연구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 외에도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 저서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일제 강점시기에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인 이상설에 대한 연구가 이토록 미진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그가 임종하면서 자신의 몸과 모든 유품을 없애라고 유언함에 따라 시신을 화장해서 강물에 뿌리고, 원고. 인쇄물 등도 모두 소각시
켜 남은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공후사(先公後私), 공수신퇴(功遂身退)하는 정신이 투철하여 모든 공을 남에게 돌리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헤이그 밀사건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준 열사만 기억했지, 이상설이 정사(正使)요. 이준과 이위종이 부사(副
使)였다는 사실도 잘 모른다.
아무튼 이 글은 윤병석의 연구, 특히 그의 『이상설전』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재구성했음을 밝혀둔다. 다만, 윤병석은 역사학자로서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이상설을 연구했는데, 필자는 사상사적 입장에서 이상설의 사상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런 연구가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필자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이상설은 한학을 하여 성균관 교수를 지냈고, 신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사상가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 또한 그는 초기 독립운동가의 지도적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국난의 시기에 민중의 지도자는 확고한 자기사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가정 하에서 기존의 연구 성과와 윤병석이 수집해 놓은 자료를 분석해보니, 다행이 이상설의 사상이 조금씩 확인되었다. 다만 이 논문에서는 이상설 사상의 일부분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여 후속발표를 하고자 한다.
Ⅱ. 이상설의 생애
이상설(李相卨)의 생애에 대해서는 윤병석의 저서 『증보 이상설전』과 논문 「이상설 행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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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윤병석, 『이상설전』, 서울 : 일조각, 1984년 초판, 1998년 증보판.
2)윤병석, 『이상설 행장』, 『상산문화』5, 상산학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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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글을 요약하여 옮겨 싣도록 하겠다. 이상설은 1870년(고종 7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려시대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의 22대손이며, 조선시대 인조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이시발(李時發)의 11대손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복남(福男)이고, 자(字)는 순오(舜五)이며, 호(號)는 보재(溥齋), 당호는 벽로방주인(堂號 碧蘆舫主人)이다.
1876년(고종 13년) 7세 때 서울 장동(長洞)에 사는 이용우(李龍雨)에게 양자로들어가 양부모 댁에서 성장했다. 이용우는 이상설의 먼 친척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하였으며, 가산도 부유했으나 후사가 없어 일가의 아이들 중 영특한 이상설을 데려다 양아들로 삼았다.
1877년(고종 14년) 8세 때 이재촌(李齋村)이라는 한학자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882년(고종 19년) 13세 때 생부 행우와 양부 용우의 연이은 상을 당했다.
1883년(고종 20년) 14세 때 생모 벽진이씨의 상을 당했다.
1885년(고종 22년) 16세 때 참판(參判) 서공순(徐公淳)의 장녀 달성서씨(澾城徐氏)와 결혼했다.
1887년(고종 24년) 18세 때 신병 치료를 위해 강원도에 가서 섭렵하며 요양했다.
1888년(고종 25년) 19세 때 이범세(李範世) ․ 여규형(呂圭亨) 등의 학우와 신흥사에서 합숙하며 신학문을 수학했다.
1891년(고종 28년) 22세 때 양모 고령박씨(高靈朴氏)의 상을 당했다.
1894년(고종 31년) 25세 때 조선조 최후의과거인 갑오문과(甲午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895년(고종 32년) 26세 때 4월 7일 날 비서감(秘書監)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되었으나 6월 17일날 비서랑에서 면직되었다.
1896년(建陽 1년) 27세 때 1월 20일 날 성균관교수에 임명되었고, 1월 25일 날 성균관교수 겸 성균관장에 임명되었다. 2월 22일 날 성균관장을 사임하고, 한성사범학교[교원 양성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3월 25일 날 한성사범학교 교관 직을 사임했다. 이 무렵 헐버트(H. B. Hulbert) 박사와 친교를 맺고 영어․ 불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光武 8년) 35세 때 6월 22일 날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이 요구하는 전국 황무지개척권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그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상설의 상소 후 조야에서 반대상소가 연이었으며, 또한 보안회(輔安會)가 소집되어 종로를 비롯한 서울거리에서 규탄대회가 연일 이어져 끝내 일본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그해 8월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광무 9년) 36세 때 9월 6일 날 학부협판(學部協辦)에 임명되었다. 9월 11일 날 학부협판에서 법부협판(法部協辦)으로 전임되었다. 이 해를 전후하여 여준(呂準)․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범세(李範世)․ 이희종(李喜鍾) 등과 외국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에 관한 연구와 번역작업을 했다. 같은 해 11월 2일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次官)에 발탁되었다. 이 때 일제가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 강요한다는 소식을 듣고 민영환(閔泳煥)․ 한규설(韓圭卨)․ 박재순(朴齋純) 등과 협의하여 목숨을 걸고 조약체결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11월 17일 저녁 일제의 위협 속에 대신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을사오적의 찬성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때 이상설은 대신회의 실무책임자인 참찬이었지만, 일본군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이 사실을 알았다.
11월 18일 날 이상설은 사직소를 올리고, 19일 날 상소를 올려 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상소를 전후 5차례 올렸으며, 12월 8일 날 면직되어 관복을 벋고 국권회복 운동에 앞장섰다.
11월 30일 날 민영환의 순국소식을 듣고 종로거리에 나가 운집한 시민들에게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후,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1906년(광무 10년) 37세 때 4월 18일 날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망명길을 떠나 중국 상해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이어 북간도 용정(龍井)에 들어가 8월경에 그곳에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38세 때 3월경 헤이그밀사를 위해 서전서숙을 여준 등에게 맡기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이 해 6~7월 이준(李準)․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이 때 이상설이 정사, 이준과 이위종이 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세계의 언론인 등을 상대로 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7월 14일 저녁 특사중의 한 사람인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그곳 뉴브 아이 큰 다우의 공원묘지에 매장했다.
7월 19일부터 헐버트박사와 이위종․ 송헌주(宋憲澍)․ 윤병구(尹炳球)를 대동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 미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직접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한국의 영세중립화를 역설하였다.
8월 9일 날 친일정부에 의해 궐석재판이 열려 헤이그특사 정사(正使)인 이상설은 사형이, 부사(副使)인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각각 선고되었다. 1910년[융희(隆熙) 4년] 41세 때 6월 21일 날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유인석(柳麟錫)을 선임했다. 7월 28일 날 유인석과 함께 고종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건의했다.
8월 27일 날 일제의 한일합방을 계기로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韓人)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성명회에서는 한일합방의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열강에 대해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宣言書)를 보냈다.
이 선언서는 이상설이 작성하고 유인석 이하 8,624명의 민족운동가들이 서명했다. 그는 이 선언서에서 조국의 독립의지를 천명하였다. 9월 11일 날 일제가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벌인 결과 이상설을 비롯하여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수십명이 러시아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다. 러시아 총독은 그 중 이상설을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다.
1911년 42세 때 여러 동지들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했다. 권업회에서는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간행하고, 민족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국 교민의 경제 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이상설은 권업회의 회장과 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1913년 44세 때 12월경 어떤 사이비 애국자가 이상설을 매장하기 위해 그를 일제의 밀정으로 매도하는 무고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이상설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모든 공직을 내놓은 다음 블라티보스톡을 떠나 하바로프스크로 옮겨 머물렀다. 그러나 이내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상설의 결백을 인정하고 동지들의 단합을 결의했다.
1914년 45세 때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을 모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韓人)의 정치․ 사회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또한 이해9월에는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 당했다.
1915년 46세 때 3월경 중국․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회합하여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본부를 북경에 두고, 이상설을 본부장에 선임하였다. 1916년 47세 때 피를 토하는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동지들이 비밀리에 본국으로 연락하여 부인 서씨와 아들 정희(庭熙)가 와서 간호를 했다.
1917년 48세 때 3월 2일 날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雙城子)에서 향년 4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이상설은 이동녕․ 이회영․ 백순(白純) 등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아무르 강가에서 화장되어 뿌려졌고, 생전에 남긴 그의 저술도 모두 거두어 불태워졌다. 이로써 독립운동 초창기의 핵심인물인 이상설의 한 많은 일생이 끝이 났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상설의 숭고하고 고결한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후학으로서 그의 생애와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대부분 없어졌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정부에서 독립운동 유공자 훈장(대통령장 복장)을 추서했으며, 1971년 이후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고향인 충북 진천에 추모비와 사당, 그리고 기념관 등을 건립하는 등 각종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
Ⅲ. 이상설의 다양한 사상
이상설의 사상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상설은 생전에 자신의 저술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임종 유언에서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애라고 했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들이 대부분 없어졌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의 유족인 이관희(李觀熙)․ 이완희(李完熙) 형제가 해방 이후 그의 전기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윤병석교수가 이상설 전기를 쓰면서 남아있는 자료들을 어렵게 모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3)
현재까지 수집된 자료의 대부분은 이상설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도 주로 독립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서 그의 생애에서 본 바와 같이 청년 시절에 그는 신․ 구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박식하고 뛰어난 학자였다.
만약에 그가 국권상실의 불행한시대가 아닌 평화의시절에 일생을 살았더라면 학자․ 사상가․ 관리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는 필자는 사상가로서의 이상설을 조명하기 위하여 고민하던 중 윤병석이 모아놓은 자료 속에서 사상 관련 자료를 일부 발견하여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1. 전통유학사상
이상설은 7세 때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한 이용우에게 양자로 들어가 8세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재동(才童)․ 신동(神童)이라는 칭송을 들었고, 20세 전후에는 ‘문행남하울관’(文行南下鬱冠)이라 하여 대성할 학자라는 칭송도 들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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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윤병석, 앞의 책, 1984, 머리말.
4)윤병석, 앞의 논문,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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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5세 때인 1894년(고종 31년) 연 초에 치러진 조선조 최후의과거인 갑오문과(甲午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 때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조술할 학자라는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5)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실로 뒷날에 이상설이 대성하고 창무할 것을 누가 막지 않는다면, 이는 곧 율곡의 도가 행해질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부강이 될 것이요, 백성의 복지가 될 것이요, 선비의 영화가 될 것이다. 어찌 다만 이상설 혼자에게만 다행이라고 하겠는가!” 6)
과거 급제를 계기로 하여 이상설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고, 이어 세자시독관(世子侍讀官)이 되었다. 또한 그는 약관 27세에 비록 갑오경장 후에 개편된 성균관이기는 하지만, 그 대사성(大司成)에 해당하는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7)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의 유학적 학문수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나이 28세 때에는 당시 영남유학의 거장이던 이승희(李承熙)와 더불어 성리학에 관한 토론을 벌인 바도 있다. 이 때 그는 성리학의 심오한 이론은 물론 주자(朱子)의 미혹한 점까지도 논하였다고 한다.8)
이승희 와는 이후에도 계속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이상설의 헤이그 밀사 후 블라디보스톡에서 다시 만나 밀산부(密山府)에서 독립운동기지 설립을 위한 한흥동(韓興洞) 건설에 합심하여 협력하였다. 이 무렵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구학문에 있어서는 박학다식하고 천리를 꿰뚫어 구경백가(九經百家)를 말하듯이 암송하였으며, 선생(이승희)을 대할 때는 항상 성리학을 강설하였고, 그 류(類)가 대게 부합하였으므로 더불어 토론을 벌여 타향살이의 괴로움을 잊기에 이르렀다.”9)
또한 임정요인의 한분이었던 풍양 조완구(豊壤 趙琓九)의 「이상설전(李相卨傳)」에도 이상설은 “유학의 이론에는 깊이가 있고, 불교의 경전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10)고 기록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설의 과거시험 답안지(科擧試卷)인 「지어지선론(止於至善論)」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의 유학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어지선(止於至善)’은 『대학(大學)』의 경문(經文) 제1장의 첫 문장(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즉 소위 삼강령(三綱領)의하나이다. 여기에서 ‘지선(至善)’은 최고선(最高善), 즉 ultimate-good이 아니라, 최선(最善)의 뜻으로 가장 중정(中正)하고 당연(當然)한 도리를 말한다.11)
지선(至善)의 주석에서 주희(朱熹)는
“사리(事理)가 당연(當然)함의 극치”라고 했고, 양명(陽明)은
“이 마음이 천리(天理)에 순일(純一)함의 극치”라고 했다.
‘지(止)’라는 것은 주희의 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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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윤병석, 「보재 이상설의 생애와 민족운동」,『상산문화』11, 상산학회, 2005, 52쪽.
6)윤병석, 앞의 책, 14쪽, 註3.
7)윤병석, 앞의 논문(2005), 51쪽.
8)윤병석, 앞의 책, 18쪽.
9)윤병석, 앞의 책, 18쪽, 註21.
10)윤병석, 앞의 책, 18쪽, 註22.
11)이동환 외, 『신역사서 Ⅰ : 대학․ 중용』, 서울 : 현암사, 1968,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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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인간의 당연한 도리를 체득하여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이제 이상설의 「지어지선론」을 살펴보자.
“하늘과 땅이 만물에게 명령을 내린 까닭은 반드시 변하지 않는 일정한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일을 응대하는 까닭도 역시 변하지 않는 일정한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만물과 모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칙이 없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만물과 모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칙이 있는 경우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12)
유가는 천지가 인간과 만물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법칙을 제시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는 이미 『시경(詩經)』에 보인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셨으니, 모든 것엔 제각각 법칙이 있도다. 그러기에 백성들의 떳떳한 본성, 아름다운 인품을 좋아한다네.”13)
하늘(天)이 인간과 만물을 낳았으며, 그들에게 각각 고유한 법칙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과 온갖 것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법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순리이다. 특히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법칙을 우리는 본성이라고 한다.14)
유학에서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을 도덕성으로 본다.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잘 깨달아 열심히 갈고 닦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도덕적 본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늘은 모든 사물의 생성과 동시에 불변의 법칙을 부여하므로, 반대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법칙도 부여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법칙 없는 사물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설은 사물의 법칙에 관하여 인간의 감각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무릇 귀의 법칙은 소리를 듣는 것이므로 듣는 것이 그 머무를 곳이다. 눈의 법칙은 모양을 구별하는 것이므로 보는 것이 그 머무를 곳이다. 입의 법칙은 맛보는 것이므로 먹는 것이 그 머무를 곳이다. 마음의 법칙은 지선(至善)이므로 홀로 그 머무를 곳을 알지 못한다.”15)
인간은 태어날 때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각의 기능이 있다. 귀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눈은 모양과 색깔을 구별하는 것이고, 입은 음식을 맛보고 먹는 것이며, 코는 냄새를 맡는 것이며, 손으로는 사물의 재질이나 모양을 구별하는 것이다. 오관이 가진 각기 고유한 기능이 그들의 법칙이다. 그들의 법칙을 잘 따르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런데, 마음의 법칙은 지선(至善)이다. 오관의 기능은 뚜렷하므로 쉽게 알 수 있는데 비하여 마음의 법칙인 지선은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이 머무를 곳, 즉 해야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자기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법칙인 지선이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한다. 이상설은 마음의 지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지선이란 사리(事理)의 당연(當然)한 법칙이므로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원만 구족하여 처음부터 털끝만큼의 부족함도 없고, 우뚝 솟아 당당하여 처음부터 한곳으로의 치우침이나 기울어짐도 없다. 부모 앞에 나가면 효가 발생하고, 임금 앞에 나가면 충이 발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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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이상설, 『지어지선론』, “論曰 天地所以命乎物者 必有一定不易之則 故人之所以應乎事者 亦有一定不易之則 有事物而無其則者 未之有也 無事物而有其則者 亦未之有也.”
13)『詩經』 . 『大雅, 蕩之什, 烝民』, “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14) 『中庸』, “天命之謂性”.
15)이상설, 『지어지선론』, “今夫耳之則聲而聽其止也 目之則色而視其止也 口之則味而食其止也 心之則至善而獨不知其所止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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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 기어들어가는 어린아이를 보면 자연히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고, 당(堂)의 아래를 지나가는 소를 보면 우연히 죽을까봐 두려움을 참지 못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마음의 지선이니 어디에고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지선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마음속에 있다.”16)
이상설은 ‘事理當然之則’이라는 주희의 주석을 인용하여 지선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주자학자임을 알 수 있다. 지선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므로 원만구족하고 우뚝 솟아 당당하다. 그러므로 털끝만큼의 모자람도 없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치우침도 없다.17)
마음의 지선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는 효심이 발휘되고, 임금에게는 충성스런 마음이 발휘되며,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어린아이를 보면 다급하고 측은한 마음이 생겨나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보면 불인지심이 발동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마음의 지선이다. 이상설은 그 예로서 『맹자』(孟子)의 유자입정장(孺子入井章)을 끌어들였다.18) 이와 같이 그는 지선의 마음에 대해 정의한 다음 그것을 어떻게 갈고 닦을 것인가 하는 실천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므로 이치는 비록 만물 속에 흩어져 존재하지만 실로 내 마음을 주관하고, 마음은 비록 만 가지이치를 주재하지만 실제로는 사물의 밖
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으로써 지선에 머무름을 구하고, 달아나지 않도록 지선으로써 힘써 구해야 한다.
이것이 진실로 우리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이치이니, 원래는 범인과 성인의 사이에 미혹됨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기질에는 청탁의 구별이 없을 수 없고, 일을 행하는 데는 깊고 얕음의 다름이 없을 수 없다. 따라서 구하려 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버리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며, 닦으려 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어그러뜨리려 하는 자는 재앙을 당할 것이다. 한숨만 쉬며 아들 노릇하려는 자는 불효하는 것이요, 그렇게 신하노릇 하려는 자는 불충하는 것이다. 마음이 미혹되어(미쳐서) 본성을 잃어버리고, 무턱대고 행동하거나 허망한 지식을 추구하는 자는 진실로 도를 체득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와 같이 지선이 사물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전력을 다해 안으로 비추는 데만 힘쓰는 것이 도가와 불가의 허물이다. 또한 지선의 근본이 나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전력을 다해 공명과 이욕에만 힘쓰는 것은 신불해와 한비자(법가)의 잘못이다.”19)
세상의 이치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치는 만물 속에 들어 있으며, 그것을 주재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따라서 지선에 머무르는 것도 마음이 해야 할 일이다. 일단 지선에 머무르게 되면 변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성인과 범인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질과 요령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후천적으로 갈고 닦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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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이상설, 『지어지선론』, “夫至善者 事理當然之則 而天然自有之中也 圓圓滿滿 初無一毫之虧欠 亭亭當當初無一處之偏倚 去父上 有孝底出來 去君上有忠底出來 見入井之赤子 自然有怵惕惻隱之心 見堂下之過牛 自然有不忍殼觫之意此心之至善 無處不存至
善之在心 無時或間.”
17)정이천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中이라고 했다 - 中庸章句, “不偏之謂中”
18)『맹자』, 公孫丑章句上 6章, “孟子曰 : 人皆有不忍之心. ……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
心.”
19)이상설, 『지어지선론』, “故理雖散在萬物而實管吾心 心雖主乎萬理而實不外物 以心而求止乎至善 以至善而求勉乎不遷此固吾
人本有之理 元無凡聖之或殊也 然氣質不能無淸濁之別 用工不能無深淺之異 求之者得而舍之者亡 修之者吉而悖之者凶 噫彼爲
子不孝 爲臣不忠 狂心喪性 冥行妄知者 固不足道矣 至若不知至善之在乎事物 而專務內照者 老釋之失也 不知至善之本乎吾心 而
專務功利者 申韓之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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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한 만큼 얻어서 복을 받게 되고, 노력하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는 재앙을 당한 노력은 하지 않고 한숨만 쉬는 자는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고, 임금에게 충성할 수도 없다. 심지가 약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면 타고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본성을 잃어버린 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행동을 하려는 자, 실질적이지 않은 헛된 지식을 추구하는 자는 진정한 도를 체득할 수 없다. 이상설은 지선의 이치가 사물 속에 있음을 모르고 내면속으로만 침잠하는 것이 노자(도가)와 석가(불가)의 잘못이며, 또한 지선의 이치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음을 모르고 밖에서 명예와 이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법가의 잘못이라고 한다.
결국, 이치는 사물 속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므로 후천적인 수양과 노력을 하면, 노력하는 만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천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성인과 범인의 차이가 생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유가이다. 도가와 불가는 지나치게 안으로 파고들고, 법가는 너무 밖으로 향하는데, 유가는 안과 밖을 함께 아우르고 내외의 조화를 이루어 너무 이상적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현실적이지도 않은 중용의 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이상설이 정통 유학자, 즉 주자학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이 단락에서는 지선에 머무르는 실천적 방법을 다루었다. 다음 단락에서는 지선에 머무르지 않을 때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덕을 밝히고자 하면서도 지선에 머무르지 못하면 지혜를 사사로이 사용하는 폐단이 생기고, 백성을 새롭게 하고자 하면서도 지선에 머무르지 못하면 형명술수(刑名術數)의 폐단이 발생한다.
이는 마치 귀에 있어서의 못 들음(聲은 문맥으로 보아 聾의 오자임이 분명함)이 그 듣는 것의 법칙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고, 눈에 있어서의 어두움이 그 보는 것의 법칙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며, 혀의 상함이 그 맛보는 것의 법칙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므로 그 필연성을 얻을 수가 없다.”20)
주희가 말한 바와 같이 지선에 머무름(止至善)은 덕을 밝힘(明德)과 백성을 새롭게 함(新民)을 포함한다. 따라서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함과 동시에 지선에 머물러야 한다. 만약 덕을 밝혔으되 지선에 머무르지 못하고, 백성을 새롭게 했으되 지선에 머무르지 못하면 폐해가 발생하게 된다.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는 들음의 법칙을 잃어버린 것이고,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장님은 봄의 법칙을 잃어버린 것이며, 혀가 상해서 맛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맹(味盲)은 맛봄의 법칙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도가 ․ 불가 법가의 부당성을 비유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상설은 유자(儒者)의 임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지선에 머무르려고 공들이는 것이 실로 뒷날 유학자들이 해야 할 급선무이며, 또한 공자의 문도들(유가)이 마음에 새겨야 할 바이다.
격물(格物)과 궁리(窮理)로써 지식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사물의 궁극적 법칙을 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밝혀서 지선의 경지에 닿아야 한다.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으로써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우리 마음의 궁극적 법칙으로 사물에 응대하여 지선의 경지에 닿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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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이상설, 「지어지선론」, “故欲明德而不止至善 則自私用智之獘生 欲新民而不止至善 則刑名術數之獘生正猶聲(聾)於耳者之失其
聽之則也 盲於目者之失其視之則也 爽於口者之失其味之則也 其不可得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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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은 서로 근본과 말단(本末)이 되지만, 지선은 본말이 없다.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은 서로 끝남과 시작(終始)이 되지만, 지선은 종시가 없다, 명덕과 신민을 떠나서 지선의 이름을 없애면 정해진 위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에 합치해서 각기 지선의 공이 있으면 통괄(統括)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
21) 이상설은 지선이 명덕과 신민을 포괄한다는 주희의 학설에 근거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격물․ 치지․ 성의․ 정심․ 궁리․ 역행․ 명덕․ 신민과 같은 덕목을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 오늘날 유학자들의 본분임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덕목들을 갈고 닦되 반드시 지선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지선, 즉 당연한 도리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 밖에 있는 외물(外物)의 이치도 궁구해야 하고, 마음속의 이치도 밝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양자를 잘 조화시켜야 한다. 이를 좀 더 부연해서 말해보자.
“나누어서 말하면, 만물에는 각각 만개의 지선이 있다. 합해서 말하면, 만사(萬事)는 다만 한 개의 지선을 구한다. 나아가 원초적으로 논하면, 지선의 법칙은 본래 끊어짐이 없다. 공부의 측면에서 논하면, 지선에 머무르는 것이 그 극처(궁극적인 지점)이다.
이것이 삼강령 팔조목(三綱領 八條目)의 관통을 위해서 보태고 돕는 첫 번째 뜻이다. 그 나머지 의미의 미진함은 주역에서 구할 때 생각을 더하는 가운데 거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22)
만물은 각각 저마다 지선이 있고, 동시에 만사는 하나의 지선으로 수렴된다, 또한 지선의 법칙은 중단 없이 이어져 있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이루어야 할 최고의 경지도 지선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선에 머무르는 것이 유학자의 최고 경지임을 깨닫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설이 말하는 지어지선론의 요지이다.
2. 개화사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상설은 7살 때, 서울에 살던 친척 이용우에게 양자로 가서 8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고, 이후 계속하여 유학, 즉 성리학 공부를 했다. 25살 때 마침내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27살 때 성균관교수 겸 관장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유학실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균관의 직책에 겨우 한 달만 봉직하고, 이내 한성사범학교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율곡이이를 조술(祖述)할 큰 학자로 칭송되기도 했지만,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신학문, 즉 서양학에 큰 관심을 가졌고 국가 혁신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윤병석의 기존 연구인 『증보 이상설전』23)
가운데 이상설의 개화사상과 관련된 내용을 모아 재구성해보도록 하겠다.
이상설은 당시의 시국과 사회의 큰 전환을 살피고 곧 신학문과 근대사상을 거의 자습으로 수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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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상설, 『지어지선론』, “故止至善之功 實爲後儒之急務 而抑亦孔門之心印也 格物窮理以致其知者 求事物之極則 以明吾心於至
善之地也 誠意正心以脩其身者 以吾心之極則 而應事物於至善之地也 明德新民相爲本末 而至善則無有本末致知力行 相爲終始
而至善則無有終始 離明德新民而無至善之名 則雖謂之無定位 可也 合致知力行而各有至善之工 則雖謂之統括 可也.”
22)이상설, 『지어지선론』, “分而言之 萬物各有萬箇至善也 合而言之 萬事只求一箇至善也 就元初而論 則至善之則 本無間斷也 以功
夫論 則至善之止 乃其極處 於乎 此其貫三綱統八條 爲曾傅之第一義乎 其餘意之未盡 求之大易之時 思傅之中庶乎其可也 吁 謹論
.”
23)윤병석, 앞의 책, 1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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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신학문 수학시작의 정확한 연대는 불분명하다.24)
이에 대하여 친구 이시영(李始榮)은 만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보재가 16세 되던 해인 1885년 봄부터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新興寺)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課程)을 써 붙이고 한문․ 수학․ 영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때 보재의 총명하고 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 같은 학우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끈질긴 탐구열과 비상한 암기력은 기이한 일이었다. 보재는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터득하였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관한 어떤 문제를 반나절이나 풀려다가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 속에서 풀었다며 깨어서 기뻐한 일이 있다.”25)
이와 같이 이상설의 신학문은 거의 독학에 의한 것이었으나, 당시 미국인 선교사였던 헐버트(H. B. Hulbert)박사와 정치적으로 교분이 두터워 그로부터 영어․ 불어 등의 외국어와 외국 신학문의 지도를 많이 받게 된 것 같다. 또한 외국의 신간서적을 널리 구입하여 새로운 정치사상을 수용한 것 같다.26)
이상설이 구학문인 전통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동시에 서양의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했던 까닭은 국가혁신을 위한 개화사상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고향친구 안축(安潚)의 「비유자문답」(非有子問答)의 서(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정치를 하는 사람의 병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습속(전통과 구습)에 얽매인 사람들로 시세(時勢)의 발전을 알지 못하여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옛 것에만 빠져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개화에 급급한 사람들로 근저를 굳게 갖지 못하고 자기 것만 옳다고 독책(督責)하는 과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순(因循)과 고식(姑息)하여 끝내 발전할 기약이 없는 것이다.”
이상설의 신학문은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수학․ 철학․ 종교․ 외국어 등 여러 분야에 걸쳐있었고, 특히 수학과 법률분야에서는 대가로 일컬어졌다. 그가 애독하던 서적도 수천 권에 달했다고 한다.27)
또한 그는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중학수학교과서』를 직접 집필하기도 하였다.28)
이상설은 이와 같이 외국의 서적을 통하여 신사조를 연구하는 한편, 개화혁신을 통하여 구국의 경륜을 이룰 수 있는 신정강(新政綱)을 준비하고, 그것을 실천할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29)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을사5조약의 체결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06년 국외로 망명하여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그곳에서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역사․ 지리․ 수학․ 국제공법․ 헌법 등 근대교육을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서숙은 북간도 신교육의 요람구실을 했고, 이후에 설립된 여러 학교들의 민족교육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30)
3. 애국계몽과 민족주의 사상
이상설은 신․ 구학문을 겸수했기 때문에 개화혁신사상과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상의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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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윤병석, 앞의 책, 15쪽.
25)윤병석, 앞의 책, 13쪽에서 재인용.
26)윤병석, 앞의 책, 16쪽.
27)윤병석, 앞의 책, 17쪽.
28)윤병석, 앞의 책, 16쪽 참조.
29)윤병석, 앞의 책, 23쪽.
30)윤병석, 앞의 책, 5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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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증거는 위에서 인용한 「비유자문답서」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계몽사상과 민족주의 사상은 일견 모순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는데, 당시의 어려운 나라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상이 동시에 필요했던 것이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인 실력을 쌓아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다. 이를 위해서는 서양의 신학문을 통한 계몽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수단적인 차원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우리는 한민족으로서 주체성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이상설이 당시에 느꼈던 이런 고민과 모순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세계화와 지방화의 조화, 영어교육과 한국어교육의 조화가 우리 민족, 우리나라의 살 길이다. 이상설은 애국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1906년 4월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북간도로 망명 한 후에 곧바로 착수한 것이 바로 학교설립과 교육활동이었다. 1906년 8월(혹은 10월)경에 북간도 용정에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신학문과 반일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아쉽게도 이 학교는 이상설이 헤이그밀사로 떠나게 되어 다른 동지들에게 운영을 맡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07년 10월에 폐교되었다. 그러나 그 설립 목적과 이념은 이후 명동학교(明洞學校)와 신흥학교(新興學校)로 이어졌으며, 국내외 각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교육의 확산에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방향을 민족의 자주 역량 향상으로 설정했으므로 이의 달성을 위해서는 근대적 민족운동을 선도할 인재가 필요했다. 또 그러한 인재의 육성을 위해서는 민족교육의 보급이 중요한 과제였다.
더구나 일제치하의 국내교육기관에서는 민족의식과 민족문화 말살을 도모하는 식민지교육이 추진되었으므로 이에 대항하여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반일․ 항일 애국민족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 중심에 이상설이 서 있었다.31)
이상설의 애국계몽운동․ 민족주의운동․ 독립운동은 평생 계속되었다. 그는 성명회(聲明會)․ 권업회(勸業會) 등의 활동을 통해 이러한 운동을 이어나갔다. 이상설은 한일합방이라는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대항하기 위해,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를 조직하고 8천여 명의 민족운동가가 서명한 성명회선언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대한(大韓)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32)
또한 이상설은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1911년 12월 19일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를 창설하고 『권업보(勸業報)』라는 기관신문까지 발행했다.
권업회는 시베리아 한민개척(韓民開拓)과 그곳 항일민족운동사에 가장 큰 자취를 남긴 단체였다. 그는 이 단체의 활동을 통하여 한인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문제와 조국독립의 대업을 달성하는 항일(정치)문제를 결부시키는 노선을 취했다. 따라서 권업회는 종래의 항일단체보다 진일보한 조직과 이념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되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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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윤병석, 앞의 책, 49-56쪽.
32)윤병석, 앞의 책, 132-147쪽.
33)윤병석, 앞의 책, 148-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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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는 기관지 『권업보』를 통하여 이 같은 취지를 한민족에게 두루 계몽시켰다. 『권업보』는 시베리아와 북간도는 물론 국내에까지 전파되어 민족의식의 고취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권업회는 민족 운동가를 양성하는 교육에도 주력하여 신한촌의 한인학교를 새로 짓고, 시베리아 한인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권업회는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표면적 활동이 정지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4. 평화사상
이상설의 애국계몽사상․ 항일독립사상․ 민족주체사상은 그의 지론인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다. 그러니까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것은 단순한 반일이나 항일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이 곧 동아시아지역의 평화를 가져오는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상설은 1907년 여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어 조선독립의 당위성과 그에 따른 동양의 평화에 대해 세계의 대표들에게 역설하고 호소했다.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로 비록 본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회의장 밖에서 우리의 대표들은 세계인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설득했다.
그 결과 한국 문제가 국제 평화 문제에 포함될 수 있다는 국제적 이해를 넓히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설은 순국한 이준을 이국땅에 묻고, 계속하여 외국을 상대로 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1909년 4월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극동평화(極東平和)를 위한 한국의 독립지원을 호소하였다(동시에 해외에 있는 동포들의 단결과 단일한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고, 나아가 한국의 영세중립(永世中立)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상설의 외교적인노력으로 한국의 독립문제가 국제사회에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34)
Ⅵ. 맺는 말
충청도 진천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신동(神童) 이상설은 7살 때, 부자(富者)인 친척집으로 출계(出系)하여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어려서는 한학을 시작으로 성리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의 여러 사람들이 인정했듯이 그의 성리학실력은 당대최고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전통사회에서 서구식 근대사회로 변화해가는 과도기였다. 그래서 젊은 지식인들은 구학문을 바탕으로 서구의 신문학을 수용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속에서 이상설도 다양한 신학문을 배웠다. 그래서 그의 지식은 가히 백과사전적이었다.
당시에 그와 교유했던 많은 인사들이 그를 가리켜 천재라고 평가했다는데, 필자가 얼핏 받은 인상도 그가 정말로 천재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5살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으나 불행하게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겨 더 이상 학문도 벼슬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독립운동과 근대교육에만 전념했다.
1905년 을사오조약 파기운동부터 시작하여, 1906년 중국․ 러시아로 망명하여 1917년까지 전후 12년 동안, 즉 초기 독립운동 활동기간에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이상설은 우리에게 너무나 잊혀진 존재였다. 이상설 연구의 독보적 존재인 윤병석 교수의 주장대로 이상설은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35)
그리고 그 재평가의 내용에 있어서도 독립운동가로서만이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이상설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당시의 지도적 독립운동가들은 대개가 문과(文科)적 지식인들로서 사상적 기반이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연구가 대개 독립운동사적 측면의 연구에 치중된 감이 있다.
앞으로는 사상적 측면의 연구도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거기에는 이상설도 반드시 한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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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윤병석, 앞의 책, 57-114쪽.
35)윤병석, 앞의 책, 초판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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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詩經』
『大學』
『中庸』
『孟子』
朱憙, 『大學章句』
謝冰瑩 外 註譯, 新譯 四書讀本, 台北: 三民書局, 1976.
李東歡 外, 『新譯 四書 Ⅰ:大學 ․ 中庸』, 서울:玄岩社, 1968.
李相卨, 「止於至善論」
尹炳奭, 『增補 李相卨傳』, 서울:一潮閣, 1998.
尹炳奭, 「李相卨 行狀」, 『常山文化』5, 상산학회, 1999, 113-123.
尹炳奭, 「溥齋 李相卨의 생애와 민족운동」, 『常山文化』11, 상산학회, 2005, 49-7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