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훈 (환서초 6)
도산서원과 퇴계 이황
오늘은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에 갔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위해 공부하라고 만들었다. 퇴계 이황이 벼슬에서 물러나서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뒷산의 이름을 따서 도산서당이라고 지었다. 도산서당은 작고 소박한 집이다. 방과 부엌, 마루를 합쳐 3칸으로 이루어졌다. 도산서당의 방과 마루에는 퇴계 이황이 지은 이름이 있다. 방은 완락재. ‘나는 작은 집에 살아도 행복하다’라는 뜻이다. 마루는 임서헌. ‘나는 바위에 숨어 사는 사람처럼 살리라’라는 뜻이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이황의 모습이 느껴졌다. 나도 커서 퇴계 이황 같이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손지한 (용소초 4)
퇴계 이황 선생님
도산서원을 갔다. 서원은 병산서원 다음에 두 번째로 가보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황 선생님이다. 조선의 유명하신 사대부인 이황 선생님은 매화를 좋아하셔서 매화원이라는 곳이 도산서원에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왜 좋아하게 되셨냐면 매화는 봄에 피는 꽃인데 꽃샘추위를 견뎌내는 매화를 보고 매화가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그때 왕실에서는 명종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그의 친척 윤원형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바른 말 하는 선비들을 모두 죽였다. 이 상황에서 견디고 있는 자신을 매화처럼 여긴 것 같다. 그리고 이황이 도산서당을 세워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제자 중에 류성룡이 있었다. 퇴계 이황 선생님은 나랏일보다 제자들을 위해 힘쓰신 것 같다. 존경스럽다.
신송현 (용소초 4)
도산서원의 이곳저곳
오늘은 안동 도산서원에 왔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본래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지으려 했지만 앞에 있는 강에 은어가 살자 이곳에 공부방을 지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들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여 서당이 되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살 곳이 필요하자 기숙사도 지었다. 도산서원에는 박약재와 홍의재라는 기숙사가 있다. 선배들은 서재(홍의재)에 살고 후배들은 동재(박약재)에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 도서관인 광명실도 있다. 광명실의 특징은 누각처럼 다리를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책을 습기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광명실이 기억에 남는다.
안시안 (백석초 2)
다시 가고 싶은 도산서원
천안곰곰이에서 한참을 달려 영주에 도착했다. 밥을 먹고 1시간을 더 달려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이 도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퇴계 이황이 죽고 나서 그의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먼저 가본 곳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도산서당이다. 여기의 집은 3칸인데 마루 1칸, 방 1칸, 부엌 1칸이다. 3칸인 이유는 마음을 겸손하게 제자를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원래 학생이 평균 100명인데 퇴계 이황의 서원은 전국에서 학생들이 와서 많으면 500명 정도 되었다. 그래서 기숙사를 많이 지었다. 이름은 박약재(동재)와 홍의재(서재)이다. 그 앞에 있는 강당인 전교당은 주로 유생들이 회의를 하는 곳이다. 여기의 현판은 국가가 내려준 현판이 있는데 이 현판은 선조의 명령을 받아 조선시대 유명한 서예가인 한석봉이 쓴 글씨이다. 그리고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인데 누각처럼 지은 까닭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박물관 옆에 있는 건물(기숙사)은 마치 위에서 보면 H자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한자로 ‘工’자기 때문이다. 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동의재에 가서 이황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꼭 한번 보고 싶다. 그리고 나는 박물관에 있는 그림 중 1개인 ‘도산서원도’를 다시 한 번 가서 보고 싶다. 이 작품은 1751년 강세황이라는 화가가 이익의 부탁을 받고 그린 그림인데 내가 지금껏 본 그림 중 1위로 꼽고 싶을 만큼 정말 인상 깊었다.
이서영 (백석초 6)
꿋꿋하게 지켜온 도산서원
마지막 탐험으로, 그리고 거리가 가장 먼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에 갔다. 퇴계 이황이 벼슬을 했을 때 나라에서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나라를 흔들면서 마음대로 관리를 짰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는 관리들을 역모나 누명을 씌워서 죽였다. 그것 때문에 퇴계 이황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조용히 지방으로 가서 가족들과 살면서 공부하기로 했다. 산이 있고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때는 은어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은어는 임금님께 바치는 거였다. 이황은 공부방인 도산서당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제자들이 모여들면서 옆에 서원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갔을 때, 유생들은 공부는 안 하고 주막, 기생집에 나가서 놀았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그 이유로 많은 서원들을 철폐했지만 도산서원은 철폐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세운 곳이 가장 나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도산서원의 꿋꿋함을 느꼈다. 언제까지 남아있을 건지 궁금하다.
임선우 (용소초 4)
도산서원과 퇴계 태실
오늘은 안동 도산서원에 갔다. 정말 오랜 시간에 걸쳐 도착했다. 나무는 단풍나무가 대부분이어서 정말 멋졌다. 그리고 옆에 강이 좋았다. 강 이름은 낙동강이었다. 본격적으로 안쪽을 둘러보니 첫 번째로 서당이 나왔다. 서당은 이황의 집이기도 하였지만 제자를 가르치는 서당이기도 하였다. 도산서당은 3칸으로 되어 있었다. 바로 마루,방,부엌으로 되어 있었다. 또 상덕사(사당),전교당(강당),광명실(도서관),시사단(문과시험 보는 곳)에 대해 알아보았다. 한번씩 둘러보고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바로 이황이 태어나신 곳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천원에 그려져 있는 이황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 다음,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말 오늘은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운 것 같다.
홍리나 (환서초 4)
도산서원으로 가을여행
오늘은 안동 도산서원에 들렀다. 정말 많이 걸렸다. 길을 가다보면 가을이 왔다는 표시가 많이 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많아 마음이 괜스레 울리는 것 같았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긴 강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낙동강이다. 예전에는 은어가 많았다고 한다. 왜냐면 물이 너무 깨끗해서 많았다고 했다. 도산서당을 보았는데 제자를 가르치는 곳이고 이황의 집이기도 했다. 부엌,방,마루가 있었다. 여기만 봐선 없어보였는데 서원이 엄청 커서 놀랐다. 기념사진을 찍고 계단으로 내려갔는데 계단이 크고 길어서 내려가기가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유물전시관에 가서 퀴즈를 풀었다. 노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청려장’이라는 지팡이가 있었는데 신기한 점이 명아주로 지팡이를 만든다는 것이 제일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