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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설교) 행7:1-60, 2014, 3
사도행전 7장은 스테반의 순교 장면입니다. 그러면 왜 순교의 자리에 갔느냐 하면 말씀을 증거 했기 때문에 순교를 했습니다. 우리는 스테반의 순교의 장면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핍박자를 볼수 있고, 또 순교자를 볼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핍박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핍박자가 되어 지느냐 하는 것을 살필 것이며, 사람이 순교를 하겠다는 말을 하지만 그러나 사실적인 면에서 누가 순교자가 되고 싶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앞에서 순교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자가 되어지고 또 핍박자가 되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 한사람 개개인의 판단이나 의지로 되어 진다고 한다면 아마 설교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 오늘 말씀의 포인트는 과연 누가 순교자가 되어지고 어떤 사람이 핍박자가 되어지느냐. 누가 원치 않는 핍박자가 되어지며, 누가 원하지 않는 순교자가 되어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한사람의 의지나 태도와 반응이라고 말 할수 있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지금 나의 태도와 반응이 나를 핍박자를 만들기도 하지만 순교자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핍박자가 되고 누가 순교자가 됩니까? 그 사람의 태도가 만들고, 그 사람의 반응이 만든다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인생까지 바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그럼 누가 핍박자가 되느냐?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변하지 않으면 누구나 저절로 핍박자 되어 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인데 핍박자는 자기가 핍박자가 되겠노라 의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선포 되었을때 분명히 말씀이 들리거든요. 그런데도 반응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고,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저절로 핍박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테반이 사도행전 7장에서 굉장히 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을 살피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구약의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날 바울 신학의 기초가 되어지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을 들먹거리고, 요셉을 들먹거리고, 모세를 들먹거리고, 그리고 광야교회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모든 사람의 신앙의 기초가 무었이 되어야 하며, 또 잘못된 부분이 무었이라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조목 조목 설파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테반의 설교 내용을 보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모든 신앙의 기초가 다 등장합니다. 그 기가 막힌 설교를 군중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을 다 무시하지요. 회개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도리어 큰 소리를 지르면서 자기들의 귀를 막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핍박자가 되었더라, 그럼으로 우리 역시 단 한 사람도 핍박자 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그 사람의 반응과 태도가 핍박자를 만든다면, 우리 중에도 핍박자가 나올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얼마든지 나올수 있다는 전제가 붙은 것이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행7:54)지금 귀를 막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 잘 압니다. 그런데도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도 전혀 변화되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다 심판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언재나 두 갈래 길을 설명하고 있는데 한 예로 신명기 성경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거든요.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복이 임할 것이지만, 하나님말씀을 듣고도 불순종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신명기 28장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여호수아24장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기 직전 이스라엘 모든 지도자들을 앞에 모아 놓고 말씀을 선포 하면서 너희가 이 말씀을 순종 할래 안 할래? 두 가지를 질문 합니다. 그런가하면 시편 1편 말씀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나아가면, 그 사람은 의인이고, 순종 안하면 악인이라고 두 갈래의 신앙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예수님도 언재나 너희 앞에 좁은 길이 있고 누구나 다 가는 넓은 길이 있다,
선택은 너희가 해라, 두 갈래의 신앙, 그러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오늘날이나 아니 미래에도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로 갈라지게 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말씀인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들려오지 않으면 갈라질 가능성도 전혀 없어 저절로 망하는 것이지만, 그럼으로 우리는 언재나 말씀이 나에게 들려와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말씀이 안들려 온다면 아무리 중요한 말씀일지라도, 그냥 죄인으로 망해 버리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언재나 말씀이 들려오길 축복합니다. 또 말씀이 들려오지만,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어쩔수 없이 핍박자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지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변화되면 그 사람은 나 예수의 말을 듣는 거라고, 그러니까 말씀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거절하면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말씀을 듣고 아멘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끔씩 어떤 분들은 자기를 말하기를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변화가 없다며 아주 겸손한 것같이 자기를 스스로 말하는 분들이 있거든요. 죄송합니다. 오래 신앙했는데 난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지금 그 사람은 분명 핍박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주 겸손해 보이는 핍박자입니다.
왜냐? 그 사람은 교회 밖에 나가서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르거든요.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이야기가 무었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변화가 없다. 교회 생활을 오래 했는데 여전히 옛 사람 옛 모습이다. 그런 사람은 진짜 무서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하나님의 교회원수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안티 사람들을 살펴보면 스님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같이 교회를 오래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니까요. 지금도 안티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 중 신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글 내용을 읽어보면 이 사람이 신학을 했는지 안했는지를 알수 있거든요.
여러분 스탈린이 신학교 출신이란 걸 아십니까? 그런데도 그는 예수믿는 사람을 가장많이 죽였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과 3년 반을 동거동락했던 제자이고 12제자의 헌금을 관리 했던 사람입니다. 인류역사 가운데ㅡ 가장 탁월한 신학교 졸업생인데도 말씀으로 변화가 안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 스승을 은돈 30에 팔아 버리지 않더냐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지금 스테반의 설교를 다 들었고 말씀을 들은 그들 마음이 찔렸다고 했다. 찔렸다란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서 찾아 보니까 마음을 조각내다 란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나 말씀을 들으면 찔리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찔리는 것이 있으며 말씀을 들을때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면 돌아서야 하는데, 문제는 자존심이 있거든요. 이거 내가 여기에서 돌아서면 어쩌나? 민망해 하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했을때 일단 말씀이 들려오는 곳으로 모여 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조건입니다. 모든 식물들도 빛이 있는 쪽으로 성장의 방향을 잡지 않습니까? 다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으로 선포되어지며 말씀이 들려오는 곳이 있습니다. 말씀이 들려오면, 살아오던 습관이 있어 바꾸려면 힘은 들겠지만 내가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변화 되는 것 만큼 주의 능력으로 쓰임을 받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말씀이지만, 반드시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 편견이나 자기 욕심이 개입되거든요.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무능한 밥 벌레 인생으로 마무리를 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사도행전2장의 오순절 때의 반응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설교를 하거든요. 그때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놀라며 당황하며 라고 했는데 헬라어로는 같은 동의어입니다. (행전2:37) 보세요 똑같은 성령님의 역사이고 똑같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고 똑같이 찔렸거든요. 그랬는데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했습니다. 똑같은 성령 역사이고 똑같은 말씀인데 이를 갈며 악랄해지는 사람이 있지만, 가슴을 두드리면서 회개 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았지만, 말씀을 듣고 거부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핍박자가 되어 버리더라는 이것은 하나의 공식과 같습니다. 다른 말같지만, 우리가 삶 가운데서 여러 사람을 만나거든요. 별 일이 아닌데도 분노를 잘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모로든지 귀신에 의해서 쓰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우리가 살아 온 과거를 보더라도 마귀는 반드시 분노심을 통해서 일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노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셨거든요. 따라서 말씀이 선포 되면 반응은 같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저 목사가 하는 설교는 나 들으라고 하는 설교야, 그런 말은 맞지 않으면서도 맞는 말입니다. 나 개인에게 적용을 한다면 개인적으로 누구 들으라고 그런 설교는 안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목사가 나 들으라고 한다 했다면 그 사람은 뭔가 챙기는 게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재나 나 만 들으라고 했다면 그것은 틀린 설교겠지만, 나 들으라고 설교 했다면, 맞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렇게 들리든지 저렇게 들리든지 말씀이 들려 온다는 것은 다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그것에 따라서 생명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사망으로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목회자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설교자도 말씀을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먼저 자기에게는 적용을 잘 안하려 하는 엉뚱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교인들도 오늘 말씀은 누가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아쉬어 하거든요.
그런데 스테반은 말씀을 증거하고 자기에게 적용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 (행7:60) 이 경우는 두 가지로 해석을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나는 나에게 돌을 던지는 저들에게 이 죄를 돌리지 말아주세요. 하는 것은 기도의 형태 아니겠습니까? 다르게는, 나 자신은 죄를 용서 할 능력이 없으니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또 다르게는 돌멩이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자기반성, 자기를 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내가 말씀을 잘못 증거했기 때문에 저들이 지금 저토록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랬다는 것, 그러면서 주님, 혹시 내가 말씀을 잘못 증거한것 있다면 저들을 용서해 달라는 그러한 취지에서의 기도가 아니었을까?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그러한 겸손된 마음만 있다면 말씀을 증거 하는 자나 말씀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핍박자가 되어질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이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자기는 놔두고 남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빼고 누구 때문에 그랬다, 누구 때문에 일이 안되었다고 말 한다면 그 말이 맞는 말일 지라도 듣는 순간 분노심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는 어떤 사람이 순교의 자리에 까지 갈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태도와 반응입니다.
그 어떠한 경우라도 예수님만 바라 보는 사람이 결국 순교자가 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순교자가 되어질수 있고, 아니 순교적인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하고 못하고는 내가 결정합니까? 아니요, 그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사람이 순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면 그길로 인도하겠지만, 반면 살아서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면 살아서 순교적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거지요. 바울이 그랬거든요. 내가 사나 죽으나 내가 다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순교 했거든요. 사도요한 만 빼고, 요한은 순교를 못해서 영광을 못 돌린 것이 아니라 요한은 12제자 중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고, 밧모섬에 들어가 요한계시록을 쓰게 했고 요한1,2,3서를 쓰고 그리고 요한복음을 썼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한 사람 아닙니까?
왜 그렀습니까? 요한은 그러한 일이 사명으로 주어 졌으니까, 그럼으로 우리가 주의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길로 이끌어 주셔야 되는 거지요. 요한의 형님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 당했거든요. 왜요?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나 그밖에 순교한 모든 제자들이나 스테반까지의 공통점이 한가지 인데 그것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만 바라보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행7:55-56) 그렀습니다. 순교자는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 만 순교하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순교를 하든지 순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그럼으로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도 무었을 하든지 주 만 바라보는 그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우리교회 특징을 한가지 만들고 싶다면 모든 교우들이 주만 바라보게 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시키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게 안되면 항상 주가 보이다 안보이다 하거든요. 왜냐, 자기 삶에 뭐가 되어 가는 것 같으면 주가 보이는 거고, 안되고 막히면 안 바라 보고 딴 짓거리 하거든요. 하나님의 사람이 엉뚱하게 세상 바라보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다가 언재 주를 바라 보는지 아십니까? 반드시 얻어터지고 나면 주를 바라보거든요. 그렇게 바라보다가 웬만큼 지나면 또 엉뚱한 짓거리 하거든요. 그러다가 얻어 터지면 원상복구, 그처럼 몇변 반복적인 행위를 하다가 설교를 들어서 아니라 자기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아! 인생이란 여전히 주만 바라보는 것이로구나 하며 진정으로 손을 들고 오더란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깨닫고 결단하게 되어지는 모든 것이 자기 의지 같지만,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이나 나나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 주권입니다.
또 한가지는 스테반이 주님을 바라보았는데 하나님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했습니다, 그럼 이게 무슨 뜻일까?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복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 그렀습니까? 주권이 누구에게 있으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니까, 그럼으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예배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님께 조목, 조목 아뢰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기도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나와 동행하는 것을 우리는 신앙 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문제들이 없어지면 평안하다고 말 합니다.
전혀 틀린말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내 삶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면 평안이 올것이라는 기대는 절대로 틀린 말입니다. 왜 그렀습니까? 이 세상은 끝도 없이 문제 투성이 거든요. 문제는 해결되고 나면 또 문제가 옵니다. 파도처럼, 그럼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무었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사명으로 살고 주만 보아라, 맞습니까? 진정 주만 바라보는 삶을 살면 그 마음에 고백이 어떻습니까? 마음에 평안이다. 똑같은 여건이고 똑같은 삶인데도 바라보는 대상, 관점이 바뀌어지니까 평안이더라는 것입니다. 외족인 환경이나 상황만 바라본다면 스테반은 괜히 예수 믿어서 돌멩이 맞아 죽은 사람이거든요. 그랬는데 그가 예수님만 바라 보니까 극한 상황에서도 말씀을 증거하고, 극한 상황에서도 성령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니까 평안한 모습, 그래서 성경은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평안의 사람 스테반이 설교했던 그 말씀에 사도바울이 회심하고 신실한 주의 일꾼이 되거든요.
따라서 누구라도 순교자가 되어 질수도 있지만, 팝박자도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태도와 반응이 내 인생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러나 순종하지 않으면 결정적으로 우리는 핍박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 만 바라보십시오. 모든 주권은 그분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감동시키기 만 하면 이 땅에서 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찬양 가사 내용 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바 디매오가 눈을 뜨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 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거친 바다와 같은 우리들 삶이 잔잔해 집니다. 믿습니까? 왜 그렀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이시고 모든 결정권을 당신이 가지고 계시니까,
그 예수님 만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삶, 가다가 넘어 질수도 있고 주저 앉을수도 있겠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만 바라보고 나아갈 때 그러한 사람이 순교자 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도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삶이 되어 질지언정 결코 핍박자의 반열에 서 있지 않게 해 달라고 다 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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