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광화문 교조신운동을 마치고 지방으로 내려온 일부 동학도들은 관의 탄압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길에서 방황하였다. 유랑민의 처지가 된 많은 도인들은 한끼를 해결하는 것이 급하였다. 결국 이들은 대도소가 있는 보은 장내리와 도인들이 많은 삼례나 금구 원평으로 발길을 돌렸다. 3월초 부터 장내리와 삼례에는 이미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동학 지도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1893년 3월 10일(양 4월 25일)은 대신사가 순도한 제례일이다. 옥천 청성면(靑城面) 거포리(巨浦里) 갯밭(浦田)1)에 있는 김연국의 집에 여러 동학 지도자들이 모여 제례를 올렸다. 해월신사를 위시하여 손병희, 김연국, 이관영, 권재조(權在朝), 권병덕, 임정준(任貞準), 이원팔(李元八)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2) 해월신사는 제례를 마치자 교조신원운동 이후의 상황을 논의하자고 했다. 『시천교종역사』에는 “관리들의 공갈 압박이 날로 심해져 각 포 도인들은 모두 죽게 되었으니 이들의 목숨을 어찌 보전하리까?”3)라고 진언했다 한다. 해월신사는 보은 장내로 갈 것이니 도인들을 장내리로 모이라고 통문을 내라고 하였다.4)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척왜척양(斥倭斥洋)란 새로운 반침략 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이제 그 과정을 세 번에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통유와 방문 내걸어
3월 11일자로 장내리로 모이라는 통문이 발송되었다. 나라 안은 점점 부패하여 극에 이르렀고 밖으로는 왜양(倭洋) 침략 세력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팎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일어서야 하므로 도인된 자는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근자에 안으로는 정사가 미거하고 밖으로는 침략세력이 떨치고 있다. 관리들은 포악해지고 호족(强豪)들은 다투어 토색하며 학문 또한 제각기 문호를 달리 세우고 있다. 백성들은 움츠려들어 버틸 여력이 없으니 가슴을 치며 탄식할 일이다. 모두가 편히 살려하여도 어찌 할 수가 없다. 나라를 바로잡도록 도와 백성을 평안하게 하자는 데 있으니 도인들은 기한에 맞추어 일제히 모이라.5)
통유문과 아울러 한 통의 방문(榜文)를 만들어 3월 11일(양 4월 26일) 새벽 보은 삼문 밖에 내다 붙였다. 이 방문은 민인들에게 동학의 이번 모임 목적은 척왜양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지금 왜놈과 양놈들이 이 나라 중심부에 들어와 난동을 피우고 있다. … 우리들은 죽기로 서약하고 왜놈과 양놈을 쓸어버리고 나라에 보답하고자 일어났다.”고 하였다. ‘동학창의유생’ 이름으로 낸 방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 왜놈과 양놈 도둑들이 이 나라 중심부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있다. 오늘의 서울을 보면 오랑캐 소굴이 되어버렸다. 생각하면 임진란 때의 원수와 병인 때의 치욕을 어찌 참으며 어찌 잊으랴. 지금 우리나라 3천리 조역은 금수에게 짓밟혀 위태롭게 되었다. … 왜적들은 … 막 독기를 뿜어 대려하니 위태로움이 경각에 달렸다. … 고어에 ‘큰집이 기울어질 때 나무 하나로 버티기 어렵고 큰 물결이 밀려올 때 갈대 한 묶음으로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들 수만 명은 힘을 모아 왜인과 양인을 쓸어버리는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에 보답하고자 한다. 합하(충청감사)도 뜻을 같이하여 협력해서 충의의 선비와 관리들을 추려 모아 나라를 바로잡는데 나서기 바란다.6)
전국의 도인들은 보은 장내리로 모여들었다. 『청암권병덕의 일생』에는 “13일에 장내로 진왕(進往)하니 도유 회자(會者) 수만 인에 달하였더라”7)고 하였다. 『동학도종역사』에는 “3월 15일 … 해월 장석이 보은 장내에 오시니 각 포 도인들이 … 안개처럼 모여들어 수십만이 되었다.”8)고 하였다.
장내리에 1만 명
3월 12일에 보은군수 이중익(李重益)은 동학도의 방문을 충청감영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14일부터는 동학도의 동태를 살펴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취어』에 의하면 “13일부터 각처 동학인들이 모여들어 낮에는 장내리 위쪽 천변에 유진하였다가 밤이 되면 본동 민가나 부근 민가에 유숙한다. 날마다 모여드는 인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9)고 하였다. 매일같이 모여들자 보은군수는 심상치 않게 여겨 15일(양 4월 30일)부터 관리를 매일같이 보내서 탐지하게 하였다. 이미 동리를 메울 정도로 가득찼다. 좁은 고을에 모이게 된 연유를 물어보니 교통이 편리하여 이곳을 택하게 되었다고 했다. 보은군수는 16일에 이런 사실을 충청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공형(公兄)들이 동학도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이처럼 좁은 고을 피폐한 마을에 모였는가”하자 “이 마을 앞에는 각처로 통하는 길이 있어 각처 동학도가 모이기가 편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어째서 오랫동안 연달아 머무는가. … 흉년이 든 춘궁기에 곡식 값 마저 뛰어올라 지난 달 25일의 장날부터는 저자에 곡물이 귀해져 돈을 주고도 사기가 어렵게 되어 백성들은 황급해 하고 있다. … 언제 파하고 돌아가 민정을 편케 하려는가”하였다. 대답하기를 … “모이기를 기다리면 응당 파하여 돌아갈 것이니 본 읍에 먼저 통기하여 이를 알게 하라. 민정에 있어서는 도회소(都會所, 都所)가 경내 각 동에 통유하여 안심하고 농사짓게 할 것이며 미곡도 저자에 내다 팔게 하여 다시는 염려가 없도록 할 것이니 오는 장날을 기다려 보라.10)
동학도소가 경내 각 동에 통유하여 안심하고 농사짓도록 할 것이라는 다짐과 미곡 역시 저자에 내다 팔게 하여 다시는 염려가 없도록 할 것이니 오는 장날을 기다려 보라고 한 것은 그만큼 조정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학도소는 농사일도 조정하고 시장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유문 재 발송
15일 현재 1만 명 정도가 모였다. 후미진 벽촌에 1만 명이 모였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동학 지도부는 정부와 사회에 동학의 실력을 보여주는 데는 미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3월 16일(양 5월 1일)자로 각 포에 통유문을 다시 보내 적극 참여하라고 독촉하였다. “오랑캐들이 중국을 능멸하였고 우리나라에도 침범해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 왜놈들과는 일월을 같이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니” 이들을 배척하기 위한 자리에 어찌 빠지겠느냐며 지체 말고 참가하라는 내용이었다. 통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대저 우리나라는 … 중년부터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기강이 무너져 법은 문란해져서 오랑캐들이 중국을 능멸하고 우리나라에도 멋대로 침범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생각 없이 듣거나 평범하게 본다면 그 결과는 나라에 화를 미칠게 할지 알 수 없다. … 하물며 왜적들과 어찌 일월을 같이 하며 한 하늘아래서 같이 할 수 있으랴. …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쓰러질 듯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다. … 우리들은 비록 초야의 토민이지만 … 어찌 뜻을 같이하며 죽음의 의리를 맹세함이 없으랴. … 바라건대 여러 도유들은 한 마음으로 뜻을 같이하여 요사스러움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종묘사직을 되살려 다시금 일월처럼 밝히도록 하는 것이 선비와 군자가 행할 충효의 도리이다. … 여러 군자들은 힘써 본연의 의기를 가다듬어 나라에 다시없는 충성과 공로를 세우면 고맙겠다.11)
보은군수의 보고를 받은 충청감사는 조정에 알렸다. 전라감사도 삼례와 원평에 동학도가 모여 있다고 보고했다. 정부는 깜작 놀랐다. 새로운 명분인 척왜양창의를 부르짖는다 하자 정부는 다급해졌다. 혹시 반란으로 변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3월 16일(양 5월 2일)자로 우선 해산 명령을 내렸다.
양호도어사 파견
3월 16일로 발송된 동학인령(東學人令)이라는 제목의 글은 해산명령이었다. 도인은 속인과 다르니 나라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직분론을 내세워 부당한 일이니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정부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이번의 왜양(倭洋)을 배척하는 의리로 충의를 다하려는 사민(士民)에게 누가 감히 하지 못하게 하랴. 그러나 충의는 같지만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이 다르다. 난잡하게 뒤섞여 앉는 것은 옳지 않다. 각기 앉을 자리를 가려서 잘 의논해야 한다. 우매하고 몰지각하여 원래 밭가는 일을 하는 사람은 힘든 농사에 부지런해야 한다. 멋대로 일에 욕심을 부려 대업(大業, 농사짓는 일)을 포기할 것인가. 이 명령으로 경계한 후에도 여전히 따르지 않으면 응당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게방(揭榜)을 잘 살펴서 범하지 않도록 하라.12)
이튿날인 17일에는 호조참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임명하여 급히 내려보냈다. 어윤중은 18일에 남문을 나서 칙유문(飭諭文)을 펴보았다. “곧바로 취회처에 내려가 효유해서 각기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뉘우치지 않으면 스스로 처리할 도리를 마련하라”는 내용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근자에 동학도들이 무리를 지어 선동 현혹시키고 있다. 지난번에도 자리를 펴고 대궐 앞에서 부르짖었다. … 각 지방에 장관과 방백이 있는데 소원이 있으면 거쳐서 올리지 않고 작당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 경을 양호도어사로 보내니 모인 곳에 가서 잘 효유하여 각기 돌아가 생업에 힘쓰도록 하라. 뉘우치지 않으면 스스로 처리할 방도를 마련하라. 경에게 마패 하나를 주니 곧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뜻이다.13)
어윤중은 18일에 종자들을 대리고 서울을 떠났다. 보은까지는 근 3백여 리가 되므로 사흘이면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25일에야 보은에 당도하였다. 이때 장내리에는 2만이, 원평에 모인 인원은 1만 명이었다.
포명을 지어주다
3월 17일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8일에 날이 개이자 옥녀봉(玉女峰, 장내리 북쪽 높은 봉우리) 바로 남쪽기슭에다 돌 울타리를 쌓았다. 보은 관아는 19일에 석성(石城)을 쌓았다고 부풀려 보고하였다. “산 아래 평지에 석성을 쌓았다. 길이는 백여 보이고 너비는 백여 보이다. 높이는 반 길(半丈) 정도고 사방에 출입문을 두었다. 낮에는 그 안에 들어간다. 돌담에는 깃발을 높이 내걸었다. 밤이 되면 인근 각 동리로 흩어져 숙식을 한다.”고 하였다. 돌담을 마치 돌로 성을 쌓은 것처럼 보고하였다.
봄철이라 서원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와 먼지를 일으킨다. 그래서 반길 정도의 돌담을 쌓아 방 안처럼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게 한 것이다. 1만여 명이 들어 앉아 주문을 외니 장엄한 주문 소리는 골짜기를 메웠다. 이날(3월 18일, 양 5월 3일) 저녁에 해월신사는 포명(包名)을 지어 주고 대접주(大接主)를 정해 주었다. 동학의 단위 조직은 접(接)이었다. 50호 내외의 규모였던 접(연원)은 세월이 지나면서 포덕이 늘어나자 접 조직도 늘어났다. 같은 연원조직 내의 처음 접주가 늘어난 여러 접을 관할하게 된다. 일단의 연원 조직을 포(包)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최초의 접주를 큰접주라 불렀고, 연원의 명칭을 포라고 하여 김 아무개포, 이 아무개포로 불렀다. 이번에 이런 호칭을 해월신사가 바꾼 것이다.
기록상 포(包)의 호칭은 포덕 25년(1884년)에 처음 나타난다. 『시천교종역사』 갑신년 조에 “10월 28일 대신사 탄신 기념 제례에 각 포 두령 82명이 참석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1890년(己丑) 11월 조에는 경상도 김산군 복호동 김창준 가에서 내수도문과 세칙을 국문으로 친히 찬하여 각 포에 반시(頒示)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1892년(壬辰) 1월조에 실린 통유문에 “이쪽 포(包) 연원(淵源)이 저쪽 포 연원으로 옮기고, 저쪽 포 연원이 이쪽 포 연원으로 옮긴다.”는 글귀가 보인다. ‘이쪽 포 연원, 저쪽 포 연원’이라 했으므로 포란 바로 연원이며 연원을 바로 포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포덕 활동이 활발한 연원에서는 10개 내지 20개의 접을 조직할 수 있는 반면 포덕 활동이 미미한 연원에서는 몇 개의 접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큰접주의 성을 따서 이 아무개 포, 김 아무개 포라고 부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해월신사는 포명을 지어 주고 대접주라는 호칭으로 정하게 되었다. 『천도교서』에도 “대접주(大接主)와 포명(包名)을 명하다.”고 했다.
대접주 40여 명 임명
『취어』에는 동학도들이 3월 20일에는 포명을 쓴 깃발을 내걸었다고 했다. 18일에 포명을 정해 받자 19일에 포명을 쓴 깃발을 만들어 내 걸었던 것이다. 이 날 포명을 지어주고 대접주로 임명한 인원은 40명이 넘었다. 1915년에 편찬된 『시천교종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충의포(忠義包) 대접주 손병희(孫秉凞)
충경포(忠慶包) 대접주 임규호(任규鎬)
청의포(淸義包) 대접주 손천민(孫天民)
문청포(文淸包) 대접주 임정준(任貞準)
옥의포(沃義包) 대접주 박석규(朴錫奎)
관동포(關東包) 대접주 이원팔(李元八)
호남포(湖南包) 대접주 남계천(南啓天)
상공포(尙功包) 대접주 이관영(李觀永)
『동학도종역사』에 보면 이 밖에 보은포(報恩包) 대접주 김연국(金演局), 서호포(西湖包, 또는 경강포;京江包) 대접주 서장옥(徐璋玉)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덕의포(德義包) 대접주 박인호(朴寅浩)가 추가되었다. 이상의 기록에서 누락된 포와 대접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東學史>=金溝包 大接主 金德明, 茂長包 大接主 孫華中, 扶安包 大接主 金洛喆, 泰仁包 大接主 金箕範, 詩山包 大接主 金洛三, 扶風包 大接主 金錫允, 鳳城包 大接主 金邦瑞, 沃溝包 大接主 張景化, 完山包 大接主 徐永道, 公州包 大接主 金知澤, 高山包 大接主 朴致京,
<其他資料 追加分=淸風包 大接主 成斗煥, 內面包 大接主 車箕錫, 洪川包 大接主 沈相勳, 麟蹄包 大接主 金致雲, 禮山包 大接主 朴熙寅, 旌善包 大接主 劉時憲, 大興包 大接主 李仁煥, 德山包大接主 孫殷錫, 長興包 大接主 李邦彦, 牙山包 大接主 安敎善,1)
<聚語에 나타난 包名>= 善義, 尙功, 淸義, 水義, 廣義, 洪義, 靑義, 光義, 慶義, 竹慶, 振義, 沃義. 茂慶, 龍義, 楊義, 黃豊, 金義, 忠岩, 江慶.
3월 18일에 임명한 대접주는 1차적이고 그 뒤 2차, 3차로 계속해서 대접주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 도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많은 대접주가 새로 임명되었다. 영호 대접주 김인배(金仁培), 이인 대접주 임기준(任基準) 등 많은 대접주가 임명되었다.
장내리에 2만명
21일자 보은군수의 보고에 “척왜양창의라 쓴 큰 깃발을 중심으로 작은 오색 깃발이 오방(五方)에 내걸렸고, 중간 크기의 많은 깃발들이 나부꼈으며 돌담 안에는 만여 명이 들어가 있으며 1인당 1푼씩, 모두 230냥을 거두었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3월 21일 현재 23,000명이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취어』에는 전봉준이 참가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전라도 도회에서 오는 22일에 당도하리라.” 한다. “우두머리는 최시형이고 다음은 서병학, 이국빈, 손병희, 손사문(손천민), 강가(강사원), 신가, 경강·충의접장 황화일, 서일해(一海, 徐仁周)이다. 전라도 접장으로 운량(運糧)을 도감(都監)하는 명부지(名不知)의 전(全) 도사(都事)라(全羅道接長 運糧都監 名不知全都事).”고 했다.
보은 집회에 많은 인원이 참가한 곳은 전라도였다. 그 중에서도 원평의 김덕명포 관내 도인은 수천 명이다. 『취어』에 원암(元巖) 장리의 보고에 “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라도내의 여러 읍 당민들이 돌아간 수는 5, 600여 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중 대부분이 원평 도인들이다. 그래서 원평에서는 전봉준을 운량도감으로 삼아 식량을 공급하게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지영도 보은집회에 전봉준이 참석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978년 4월 5일에 해월신사의 손자인 검암 종법사는 “1945년 10월에 오지영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강연할 때 전봉준 장군이 보은집회에 참석했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모인 이의 성분은 매우 다양했다. 어윤중의 장계에 의하면 “지략과 재기가 있으나 뜻을 얻지 못한 사람, 탐관오리들이 횡포를 막아보려는 사람, 오랑캐들이 빼앗는 것을 통절히 여긴 사람, 오리(汚吏)에게 침탈되고 학대받았으나 호소할 데 없는 사람, 경향에서 억누름을 피할 길이 없는 사람, 죄를 짓고 도망한 사람, 속리(屬吏)에게 쫓겨난 사람, 곡식이 떨어진 농민과 손해본 장사꾼, 들어가면 살 수 있다는 풍문을 들은 사람, 빚 독촉을 참지 못한 사람, 상민과 천민에서 몸을 빼려는 사람들이 따랐다.”고 하였다.
원평에도 1만여 명
척왜양창의 운동은 보은 장내리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영상일기(嶺上日記)』에는 보은집회 이외에 금구 원평과 경상도 밀양(密陽)에서도 수만 명씩 모였다고 하였다. 이 중 밀양 집회는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다.
『천도교회사초고』와 『천도교서』에는 “시에 호남 도인 수천 명이 삼례역에 회집하여 관찰사에게 명원(鳴寃)하니 그 내세운 뜻은 제해구생(除害救生)이었다.”고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처음에 삼례와 원평 두 곳에서 집회를 가진 것 같다.
최영년(崔永年)의 『동도문변(東徒問辨)』에 “전 감사 이경직(李耕稙)이 수습하지 못하자 면직되고 김문현(金文鉉)이 새 감사로 제수되었다.…공은 임금에게 인사한 후 삼례역에 이르렀다. 수레의 전후좌우로 죽창을 들고 길가에 수천 명이 나열하였다. 공은 비장을 시켜 어째 모였는가 물었다.”고 하였다. 김문현은 3월 27일경 삼례에 도착하여 철거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곧 금구 원평으로 가서 합류하였다. 금구 동학도들도 감사의 효유문을 보고 해산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삼례는 교통이 편리하나 식량 조달이 문제였으나 원평은 교통도 편리하고 김덕명 대접주가 있어 식량 조달이 어느 정도 원활하였다. 금구에 모인 인원은 『동도문변』에 기록된 것처럼 만여 명이었다[是時東徒之雲集 金溝者殆萬餘].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내려 보낸 정부는 지방관장에게 속히 해산시키라고 독촉하였다. 이들은 나름대로 압력을 가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23일에는 보은 관리들이 장내리로 찾아가 즉각 퇴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학도들은 척왜양의 의를 행할 뿐이니 순영(巡營)의 감칙이나 군수의 면유가 있어도 중지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동학지도부는 다음과 같이 ‘동학인의 방’을 내걸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저 왜놈과 양놈들은 견양(犬羊, 악한 사람)과 같다. 우리나라 삼천리에 사는 오척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으며 누구라도 원수로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순상은 살핌이 밝으신데 척왜양하는 우리를 가리켜 사류라고 한다. 그렇다면 견양의 신복(臣僕)이 되어야 정류가 되는 것인가. 왜양을 물리치려는 선비들은 죄인으로 잡아 가두어야 하고 그들과 화해하려는 매국자는 국왕이 상을 주어야 하는가. 아! 분통한 일이다. 이것이 천운이란 말인가, 천명이란 말인가. 어찌 밝으신 우리 순상은 이처럼 너무도 살피지 못하는 것인가.
이 방을 보게 되면 당시 동학도들이 반외세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보은 군수는 23일에 장내리로 달려가 동학도들에게 정부의 명령대로 퇴산하라고 거듭 촉구하였다. 그러나 동학도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함을 내세울 뿐 퇴산을 거부하였다. 보은군수는 24일에도 보고하였다. “비로 물이 불어나자 돌담 안에는 모이지 않았다. … 도소에서 성찰(省察)을 시켜 내일 군대가 온다는 말을 퍼뜨렸다. 그리고 돌아가려는 이는 떠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남도록 하라. 천만 군병을 막을 대책이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어떤 접은 몽둥이를 준비하자 도소는 엄히 문책하고 금지시켰다 한다.
고종 임금은 초조한 나머지 3월 25일(양 5월 10일)에 대책회의를 열었다. 동학도가 왕궁으로 쳐들어올 것이라 예측하고 불안해했다. “중국에서도 영국군을 빌려다 쓴 전례가 있다.”며 청국군을 불러오자고 차병론(借兵論)을 강하게 비쳤다.
영의정 심순택은 “만일 차병을 하게 되면 군향(軍餉)은 우리나라에서 바쳐야 한다.”며 반대하였다. 우의정 정범조도 “처음부터 차병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결국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고종은 차병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호조참판 박제순(朴齊純)을 통해 원세개(袁世凱)와 협의하였다. 원세개는 “경군과 강화병 1천명을 충청도에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출병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이홍장(李鴻章)에게 “북양해군제독 정여창(丁汝昌)으로 하여금 해군함정을 출동시켜 동학당을 억지할 팔요가 있다.”고 건의하였다.